양조장(가명)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런 여자들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위법 부당한 공무원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민원인으로 생각하고, 시간을 가지고 달래고, 설득시키고, 때로는 겁을 주어서 종국적으로는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은 금액이지만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도 지급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국회의원도 해야 하고, 대통령까지 하려면 초기 준비단계부터 활동자금이 필요하다면서 자금 지원은 절대로 아끼지 않았다. 그래야 나중에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정치인, 국가지도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조장에게 필요한 돈은 얼마든지 아끼지 말고 쓰라고 하면서도 애국적 차원의 경제행위를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외제자동차라든가, 외국산 명품 브랜드는 절대로 구입해서는 안 되었다. 오로지 made in korea라는 표시가 확인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해외 출장을 갈 때에도 외국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았다. 대한항공을 타면서도 비행기 자체는 한국산이 아니고, 미국 보잉사에서 만든 것이 아니냐면서 불평을 많이 하기도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면서도 너무 큰 소리로 항공기 제작회사나 제작연도, 제원, 항속 등을 떠들어 보안요원들로 하여금 혹시 비행기 납치 테러 조직원이 아닌가 긴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맥도날드 햄버거도 금지시켰지만, 롯데리아 햄버거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자녀들의 민원 및 청원이 계속되자 먹는 식품의 경우에는 미국산이나 일본산도 허용해주었다. 이런 식품다변화조치가 시행되자, 자녀들은 코카콜라, 이태리 젤라또, 인도 카레, 월남 쌀국수, 몽골 칭기스칸 요리, 카자흐스탄 양고기, 베이징 덕, 태국 원숭이 요리, 중국 칭따오 맥주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50번째 후보로 등극한 현옥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지금까지 별로 연애경험도 없었지만, 조장이라는 남자는 특별했다. 모든 면에서 자신만만했다. 꿈과 포부가 보통이 아니었다. 잘 하면 나중에 대통령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현옥은 당연히 영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코 쉽지 않은 의대 공부를 6년 하고 인턴이나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전문의 자격을 따봤자 좋은 대학병원 취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뿐만 아니라, 인턴이나 레지던트 할 곳도 마땅치 않다, 현옥의 아버지는 육사는 나왔지만, 지금은 실업자 상태로서 어디 빽을 쓸 곳도 없다. 아버지는 설사 빽을 쓸 수 있어도 절대로 빽을 쓸 위인이 아니었다. TV를 보다가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가 자녀들을 공기업에 부정한 청탁을 해서 아무 스펙도 없는데 입사를 시켰다든가, 순위를 뒤바꾸어 승진시켰다는 뉴스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밥상을 치기도 하고, 마시던 막걸리를 독한 소주로 바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현옥의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 뉴스에서 그런 나쁜 공직자나 국회의원 관련 보도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너무 흥분해서 밥상을 잘못 치다가 완전히 뒤집어 엎어서 안방이 완전히 반찬 냄새로 한 동안 들어갈 수 없게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안방을 어머니가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를 5시간 동안 밖으로 내쫓았다.
어머니는 남녀평등이며, 여성가족부가 2001년 출범한 지 벌써 20년이나 되었는데, 도대체 아버지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 사는 사람이냐고 울분을 토했지만, 그것은 모두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어머니 혼자 조용히 일기장 비슷한 종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써놓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심한 노안이라, 어머니 노트를 봐도, 그곳에 큰 글씨 20포인트 이상으로 써놓은 아들과 딸에게 보내 줄 물품 리스트, 즉 깻잎절임, 미숫가루, 홍삼 6년근, 메추리알 등의 글씨만 보고 말았다.
그래서 현옥은 이런 저런 집안사정, 자신의 사회적 위상 등을 감안할 때 조장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고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옥도 조장에게 못마땅한 부분은 많았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너무 복잡해서 과연 이 남자가 ‘일부일처제’를 헌법적 가치로 모시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제기하면, 조장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남자는 밖에서 할 일이 중요하지, 여자는 이차적인 거야. 여자에 목숨을 걸면 큰일을 못. 그리고 여자는 어디까지나 남자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고, 여자는 내조를 잘해야 하는 거야.’ 이런 구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한국 여자 아니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명확하게 밝혔다. 조장은 미스 유니버스나 미스 아메리카, 미스 프랑스, 미스 콩고 출신의 8등신 미인이 결혼하자고 아무리 애걸복걸을 해도 자신은 결혼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표출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재가 돌아도 보통 돌은 게 아니구나! 미스 콩고가 콩고 재벌 아들과 결혼하지, 한국까지 와서 서울도 아닌 지방 도시 유지 아들하고 결혼하냐?’는 합리적인 비판을 숨어서 뒤에서 했다. 만일 대놓고 그런 비난을 했다가는 조장이 극비문서로 보고하게 되면, 아버지는 그런 나쁜 사람들에 대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특단의 조치를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장 앞에서는, ‘역시 우리의 호프, 떠오르는 태양, 위대한 총학생회장님께서는 100년만에 최초로 나타나신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라고 아양을 떨고 마음에도 없는 극찬을 했다.
그런데 어떤 하청업체 사장이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100년만이라고 해야 할 것을 실수로 10년만이라고 잘못 발음했다. 그리고 술에 취해 호프(hope)를 ’호프집‘으로 잘못 말했다. 다른 사람이 <희망>을 영어로 호프라고 말하는 것을 <생맥주> <호프>를 말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도 한번 따라 해본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호프>를 그만, <생맥주>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아니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미필적 고의에는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10년만에 나타나는 애국자는 애국자라고도 할 수 없다. 적어도 100년은 되어야 어디에다 명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10년만에 나타난 애국자는 쌔고쌨는데, 그렇게 되면 조장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의원에도 떨어질 것이 명백했다. 그리고 도대체 진지하고 엄숙하고 숙연해야 할 공식적인 석상에서 호프집, 맥주라는 저속한 용어가 사용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대반역이었다.
이 문제는 결국 조장이 아버지에게 신속하게 긴급서면보고서를 올림으로써 중대한 사안으로 분류되었다. 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그 해당 발언을 한 사람이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며. 그의 악질적인 모함행위로 인해 장차 조장이 대통령까지 가는 긴 여정에 고춧가루를 뿌린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버지는 특별진상조사단까지 꾸리면서 막대한 인원과 예산을 들여 조사를 해서 결론을 내리고 발언을 한 사람에 대한 하청공사를 모두 끊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 사장은 부도가 나고,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못주고 고용노동지청에 고발되고 끝내 징역까지 살고 나와 아주 폐인이 되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다음,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는 커녕,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글을 지역신문에 실었다.
시간이 가면서 현옥이 조장보다 더 빠져들어갔다. 현옥은 처음이고, 조장은 이미 수많은 경험을 지닌 사랑의 베테랑이었다. 여자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했다. 정치학과 학생인 데다가 전체 총학생회장이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서 그런지, 여자를 만나서 꼬시고, 데이트하면서 마음을 사로잡고, 성관계를 하고, 그 후 사후관리를 어떻게 하는지에 관해 모든 것을 사전에 완벽한 기획을 하고 계획서를 만들어서 실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습관은 아버지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시장이 될 때까지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타당성조사를 하고, 실행과정에서도 그때그때 시행착오를 거쳐서 궤도수정하는 업무처리방식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시장으로 성공적으로 시정을 마무리했고, 그 후 사업에서도 성공했다.
아버지는 이런 기업적 마인드, 행정마인드, 합리적 사고를 가정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결혼 초기부터 가정생활 계획을 수립했다. 어머니와 상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버지는 A4 용지에 매일 일일생활계획표를 써서 어머니가 볼 수 있도록 벽에 붙여놓았다.
처음에는 지저분한 싸구려 누런 종이를 붙여놓았다가, 어머니가 미관상 좋지 않다는 건의를 하자,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비싸더라도 하얀 고급 A4용지로 교체하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결단에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작은 스티커를 냉장고에 많이 붙여놓았다. 중국집 전화번호, 세탁소, 가전제품 수리센터 번호였다. 시장 볼 아이템도 붙여놓았다. ‘파, 냉면, 참기름, 간장, 양파...’ 이런 것이 어머니에게는 중요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써놓은 계획표는 정말 중요한 사항들이었다. ‘① 오전 7시 기상, ② 오전 8시 아침 식사, ③ 오전 11시까지 휴식, ④ 오후 3시 시장 가서 물건 구입, ⑤ 오후 7시 저녁 식사, ⑥ 오후 9시부터 2시간 동안 TV 시청, ⑦ 오후 11시 취침’ 이렇게 하루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아놓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친정집에 갈 일이 있어 같이 가자고 하면 일정표에 사전에 ‘처갓집 방문’이라고 쓰고 구체적인 시간, 즉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간 체류하다가 돌아온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런 습관은 아버지가 ROTC 출신으로서 장교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고, 특히 시간관념이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몸소 터득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늘 강조했다. “전쟁할 때, 공격개시시간을 정했으면, 모든 부대원이 일시에 똑 같이 공격을 해야지, 어떤 부대원은 5분 늦게 공격하고, 어떤 부대원은 5분 빨리 공격하면 부대는 전멸하는 거야. 이렇게 불과 5분 가지고 생명을 잃을 수 있어. 한국 사람은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Korean Time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거야.”
그 말도 맞는 것 같지만, 여기는 군대가 아니고 가정이고,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라 평화 시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 말이 논리정연하고 위엄있었고,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 천천히 말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감히 생활계획표 시행조치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융통성 없는 생활계획과 처참한 강제수용소 같은 실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아버지를 ‘독재자’ ‘또라이’ ‘사이비교주’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많은 진통과 고통은 있었지만, 이러한 철저한 생활습관 때문에 조장을 비롯을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자타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재정 회계분야에도 똑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결혼 초기부터 가계부를 복식으로 작성했다. 어머니가 작성하고 아버지가 결재했다. 아버지는 결혼 전 어머니와 데이트를 처음 시작하는 그 다음 날부터 장부를 썼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가 그 전 1년 동안 금전출납부를 써왔는데, 그 내용을 보니까 데이트한 비용을 일원 단위로 적어놓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고, 아버지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전자계산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암산으로 했든가, 주판으로 밤을 새워 입출금 금액을 계산해서 완벽하게 맞추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물품 재고조사도 한달에 한번씩 했다. 대상은 치약과 비누, 퐁퐁, 김장배추 등이었는데, 나중에는 의복, 구두 및 운동화, 런닝, 팬티, 양말까지 품목이 대폭 확대되었다.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전쟁을 하면서 관세부과대상 품목이 단계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비슷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재고조사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귀찮다고 불평을 했지만, 자꾸 해보니까 익숙해져서 순식간에 재고조사를 마칠 수 있었고, 또 물품을 낭비하지 않고 아껴 쓰는 습관이 생겨 부의 축적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천재적인 가계 및 가정생활 운영방식에 커다란 찬사를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새로운 종교, 즉 ‘가족교’ ‘가정교’ ‘부부교’라는 신비스러운 교주의 반열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고, 얼굴이나 머리에서 광채가 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