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올가을 들어 최저 기온이 처음 빙점 아래로 내려간 십일월 하순 토요일이다.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 꽃대감이 보내온 카톡을 열어봤다 “다 떠난 빈자리도 정겹고 아늑한데 / 돌아온 밤을 따라 기억은 또 흩어져 / 빈 의자 언저리에는 호젓함이 흐른다” 꽃대감은 같은 아파트단지 이웃 동 사는 초등 친구로 엊저녁 반송공원을 함께 산책하고 남긴 ‘달빛 어린 빈 의자’ 중 5연이다.
도청에서 퇴직한 친구는 아파트단지 뜰에 꽃을 가꾸면서 창원 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빙상장으로 나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동향 동갑이다 보니 어떤 때는 형제보다 끈끈한 유대감을 보이기도 한다. 둘은 퇴직 후 즐기는 술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단번 끊어 앞으로도 지속할 작정이다. 요새는 이른 오후면 동네 카페 커피를 같이 마시면서 시상을 다듬는다.
새벽녘에 잠을 깨니 일거리가 한 가지 있었다. 며칠 전 교직에서 은퇴 후 귀촌해 전업 농부가 되다시피 한 대학 동기가 애써 지은 농산물을 보내왔다. 그 가운데 무청이 제법 되었는데 베란다에 펼쳐 말리고 일부는 삶아 놓았더랬다. 그걸 그대로 시래깃국으로 끓여도 되나 아내는 식감이 좋도록 껍질을 까주질 원해 따라주었다. 평소 음용하는 약차가 바닥이 나서 재탕을 달여 놓았다.
아침 식후 기상 상황을 고려해 산책이나 산행은 마음을 거두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시장이 가깝고 병원과 약국도 근처라 이사를 떠나지 않고 눌러사는 이유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면 숲이나 시내가 낀 공원이라 산책은 굳이 먼 데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이와 함께 공공 도서관에 세 군데나 되어 장서와 열람석의 형편을 고려해 날짜를 바꿔 가면서 메뚜기처럼 골라 다녀도 된다.
여름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날씨가 추울 때도 도서관에 가려고 일부러 어제 가질 않고 미루어두었다. 배낭 속에는 교육단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있는 정현종의 산문집 ‘두터움 삶을 위하여’를 챙겨 넣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 건너편 아파트단지에서 용지호수로 향했다. 패딩에다 목도리와 장갑을 껴도 쌀쌀한 느낌이 든 영하권 아침이었다.
용지호수 공원 잔디밭 구석에 작은 어울림 도서관은 여느 관공서와 마찬가지 9시부터 업무를 개시해 아직 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깨끗하게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대암산 방향에서 아침 해가 솟아 호수 수면에 거꾸로 어려 비쳤다. 산책 도중 울산에서 사는 대학 동기가 비음산을 등정한 사진을 보내와 의아해 통화를 나누었다. 새벽에 울산에서 혼자 길을 나서 산행 중이었다.
나는 대학을 뒤늦게 입학해 같은 학번으로 아직 현직 동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동기는 올가을 뒤늦게 교장 직위에 올랐으나 내년 여름에 정년을 맞는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은 진작 등정했고, 내가 글 속에 남기는 낙남정맥 산행기를 읽고 이른 새벽 혼자서 비음산과 용제봉을 찾아왔다고 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으로 산행 들머리를 찾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용지호수 산책로에서 대학 동기와 통화를 마치고 어울림 도서관으로 드니 사서는 난방기를 켜고 업무를 시작했다. 배낭에 넣어간 다른 도서관의 책을 꺼내 놓고 아직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지방지 신문을 펼쳤다. 사서는 고맙게도 커피를 타서 가져와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읽은 신문은 접고 창원도서관 대출 도서를 마저 읽은 뒤 서가로 다가가 읽고 싶은 책을 대여섯 권 골라냈다.
개인 서재로 여겨도 좋을 열람석에 눌러앉아 은희경 장편소설 ‘새의 선물’은 후 순위로 밀쳐놓고 시집을 펼쳤다. 최승호의 ‘방부제가 썩는 나라’, 이관묵 ‘동백에 투숙하다’, 고재종의 ‘꽃과 권력’이었다. 고3 교실 문학 영역 지문 분석을 위함이 아닌, 내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시편 탐독에 빨려들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자 젊은 엄마가 어린 남매 손을 잡고 도서관을 찾아왔다. 23.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