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한 날, 행복한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은 모두 유익한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 할 자도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한 자’ 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과 부요함을 믿는 교만한 자, 곧 악인을 의미합니다. 즉 욥은 악인들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해, 이 세상에서 즉시 멸망 당하지 않고, 그 생명이 유지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욥은 악인들이 형통하게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그들을 보존시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주장은 현세적이고 도식적인 인과응보의 논리에 기초해서 자신을 죄인으로 매도하고 비판했던 세 친구들의 주장, 곧 악인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멸망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욥의 신학적 안목이 그 친구들에 비하여 매우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욥이 고난 전에도 이와 같은 놀라운 신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면 욥 역시도 악인이 번영하고, 반대로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부조리한 현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탄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적어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고난 당하기 이전에도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악인의 형통과 고난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기 이전의 그의 신학적 관점은 그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인과응보론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무죄한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체험을 통해 점차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욥에게 임한 고난은 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고난은 무의미해 보이고 죽기만을 갈망할 만큼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욥은 고난을 통하여 신앙이 비약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물론,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을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함으로써 고난 당하기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징계로 인한 고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욥의 경우와 같은 시험과 연단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종류가 무엇이든지간에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고통의 강도가 너무도 극심하여 욥과 같이 죽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난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깁니다. 단지 고통스럽게만 여기고 자기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려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체험한 후에야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광야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당해야 하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단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광야 생활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처음부터 그들을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직선로가 아니라 광야로 우회하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신앙적으로 연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올바르게 정립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바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로 인도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고난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자질을 가지도록 연단하신 것 입니다. 그들이 광야 생활 중에 범한 죄는 그들의 연단의 한 원인이 되었을 뿐이지,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여튼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의 고난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났으며,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임한 고난은 모두 유익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만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혹 죄로 인하여서든, 아니면 알 수 없는 것 때문이든, 고난이 임하면 그것을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여러분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