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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밤이 지난후 새벽동이 터옴과 동시에 주명국 대군의 거침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5만대군을 상대로 상처입은 성벽을 방패삼이 공성전을 하기엔 무리가있었다.
풍조와 대장군 백우는 필사적으로 막아보았으나 이미 지난 전투로 인해 곳곳이 무너져 내려버린 성벽은 오래버티지못해
맥없이 무너져 내렸고 주명국의 대군은 무너진 성벽을 뚫고 물밀듯이 도성으로 몰려들어왔다.
순식간에 도성의 길이 트이자 거침없이 밀려들어온 주명국의 군사들은 어른, 아이, 노인, 사내, 아녀자...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마저도 눈에 보이는것은 모조리 도륙을내어 버렸으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히 죽은 백성들의 시신으로 가득해차마 두눈을 뜨고는 그 모습을 볼 수 가없을 지경이었다.
전선을 뒤로 물려 최후의 보루로 황궁으로 들어온 풍조는 급히 황궁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다시금 적들과 대치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이곳이 정말 마지막이리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는 피로얼룩진 칼을 움켜잡았다.
어떻게든 지켜야한다.. 황궁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주명국의 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뜨거운 기름, 화살, 돌을 던져보아도 그들은 계속해서 끈질지게 올라왔고 첫번째 망루가 점령당하는것은 눈깜짝할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적들을 막아내야했기에... 풍조는 칼을 움켜쥐고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되었다...
31.
편전에 홀로 있던 설담은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밤하늘이 검게 내려 앉았지만 처절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칼소리에 밤 같지 않은 밤이었다.
지옥이있다면 흡사 지금 이 모습과 다르지 않으리...
황궁의 문이 뚫리고 그 길로 주명국의 대군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고 원상궁이 말해주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설담은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속에 자신도 모르게 치마자락을 쥔 손을 꼬옥 주먹쥐었다.
무섭다,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저멀리서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죽음의 소리에 설담은 정신이 아찔해져 그대로 꼬꾸라져 버릴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궁녀들과 내관 그리고 호위군사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편전 문앞에서 뚝 끊겨 멈추어 버렸다.
죽음이 문앞까지 왔노라... 설담은 이미 모든것을 다 포기한 마음으로 황제의 옥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곤 옥좌를 등뒤로한채 그대로 편전의 입구쪽을 마주보고 의연한 모습으로 바로섰다.
원상궁과 영진,고돔이 그녀의 앞을 가로서며 이제곧 밀려올 죽음에 함께 하겠노라했다.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편전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단라...?"
"가자, 설담..."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단라를 보자 그때까지 참고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흐를뻔했다.
"널 데리러 왔어.."
그를따라가면 살 수 있다. 이 지옥같이 무서운 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설담은 단라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슬픈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갈 수 없어. 이곳에 남아야해.."
"이곳에 있으면 넌 죽어! 고집 그만부리고 이제 그만 가자."
단라는 설담의 어린아이 투정에 장단맞춰줄 시간이 없다는듯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단라야, 오지마.."
설담은 한 손에 고이 쥐고있던 은장도를 꺼내어 저의 가녀린 목에 들이대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져간다면 그 희고 가녀린목에서 붉은 피가 흐를것만 같았기에 단라는 그저 놀란눈으로 제 자리에 멈추어 설담을 바라볼수밖에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설담. 무엇때문에 죽을길을 스스로 가려고 하는거야!"
설담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그녀 자신이 하는 해동이 너무나 이상해 보인다는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바보같은 행동을 해야하는 이유는.. 오직하나였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겠노라... 이곳에서.. 그의 자리를 지키고 다시 돌아올 그를 기다리는것.. 그것이 그녀가 지금 이곳에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그 한가지 였다.
"또 황제때문인거냐...."
단라는 이제 화도 나지 않는다는듯이 조용히 말했다. 다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차가워서 심장이 얼어 버릴듯했다.
"나는 너를 위해 그 먼길을 돌아왔는데, 너는 황제를 기다리기위해 목숨을 내놓는구나..."
그는 허무하다는듯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구나, 설담아.."
단라는 다시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고 설담의 앞에 있던 원상궁과 영진, 고돔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설담에게 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허나, 이미 이성을 잃은듯한 단라는 그녀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다시금 제 칼집에 꽂아 두며
단상위 옥좌 앞에 서있는 설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가자 설담.."
바닥에 쓰러져 처참히 숨을 거둔 원상궁과 영진, 고돔을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설담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단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예전에 그녀가 알던 단라가 아닌듯했다..
그 따뜻하고 다정하던 단라는 이미 죽어버린듯, 지금 그녀의 앞에 서있는 남자는 그저 살육에 눈이먼 살인귀일뿐이었다.
"어이쿠, 여기 계셨구만!"
그때, 한차례 피바람으로 황궁을 휩쓸고온 은대가 석성학과 함께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편전안으로 들어왔고 단라는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황 후 마 마!"
은대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설담을 향해 조롱섞인 인사를 하였다.
"차비마마는 처소에 얌전히 계시다고 하던데 황후께서는 어찌해 이리 홀로 계시는겁니까? 덕분에 찾는데 애좀 먹었습니다."
은대가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오자 설담이 손에쥔 은장도를 제 목에 바짝들이댔다. 그덕에 그녀의 희고 가는 목에 작은 상처가
생겨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이런이런, 그런 위험한 물건은 내려 놓으시고 이만 이리 오시지요. 함께 가주셔야 겠습니다."
"나는 가지 않는다."
"그러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이번 태조선국 정벌 대승(大勝)에 전리품으로 황후마마를 저희 황제폐하께 바칠 생각인지라...
함께 가주셔야된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말입니까?! 이 여인은 나의 여인입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저의 여인을 제가 데려갈수있도록 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대의 말에 단라가 격앙된 목소리로 석성학을 바라보며 외쳤고 석성학은 자신도 금시초문이라는듯이 은대를 바라보았다.
"아니, 대장군! 그게 무슨말입니까? 황후를 우리 황제께 바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어찌된것이오?"
"내 이곳에 오기전부터 태조선국의 황후가 경국지색의 절대가인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 그리해서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면 우리황제께 바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아니, 왜 들 그리놀라는거요? 황제꼐서 크게 기뻐하실것인데?"
"그것이, 대장군의 말이 틀린것은 아니나.. 내 저아이와 약조를 한것이있소. 그러니 이번만은 대장군이 그 뜻을 거두어 이 사람체면좀 세워주시오."
"한낱 아랫것과의 약조가 무어이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그대는 황제의 신하이면서 황제께서 기뻐하시는것이 미천한 아랫것과의
약조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오?"
"그리말하면 내가 할말이 없지만 서도.. 그래도 장군 그것은..."
"돼었소. 나는 계획대로 저 황후를 우리의 황제께 바칠것이니 그리들아시오."
은대는 양보할 맘이 한치도 없다는듯이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렸고 석성학은 난감하다는듯이 단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을뿐이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내가 그녀를 되찾는것에 있어 앞을 가로막을수 없다."
단라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듯이 분노한 얼굴로 거칠거 검을 뽑아들어 은대에게 겨누었다.
"저, 저놈이?!"
은대의 뒤로있던 군사들이 그를 호위하며 단라에게 칼을 겨누었고 언제든 큰 칼부림이 벌어질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대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일이냐!?"
그때 편전안으로 주명국의 부장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며 대장군을 찾았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단라와 대치중이던 은대가 귀찮은듯이 신경질적으로 부장을 바라보았다.
"적들이.. .적들이.. 적들이 몰려옵니다!"
"무슨 적들이 온단 말이냐? 태조선국의 대장군과 도성방위군은 거의 전멸상태이고 다른 국경에서 오는 군사들은 빨라야 사흘뒤에나 이곳에 도착할터인데 뭔 적들이 몰려온다는 실성맞은 소리를 지껄이는게냐!?"
"아닙니다! 분명 적들입니다. 깃발이...황제, 황제의 깃발을 단 군대가 이곳 황궁으로 몰려들어왔습니다! 지금 황궁 입구에 몰려온것을 확인하고 오는길이니 아마 지금쯤이면 이곳에......"
다급하게 이야기를 하던 부장의 가슴팍으로 날카로운 화살하나가 궤뚫고 지나갔고, 그 화살에 맞은 부장은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무,무엇이냐!"
"대장군, 황제... 태조선국 황제의 깃발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찌 군사가 있어서 ....."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일단은 후퇴하는것이 좋을것같습니다!"
"후퇴라니! 우리 대군이 후퇴한다는게 말이되나!"
"오늘 하루종일 전투를해서 군사들이 많이 지친상태입니다. 아직 힘이 펄펄넘칠 저들과 싸워봤자 좋을게없지요, 더군다나 저들이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에이! 듣기싫다! 우리 주명국의 용맹스런군사들은 언제든 싸울준비가 되어있다! 군사라해야 어디서 급히 끌어모은 오합지졸들일터인데 고양이가 무서워서 호랑이가 도망을 간다는게 말이되느냐!?"
"대장군!!!"
부장의 만류에도 대장군은 싸울것을 고집하였다.
황제의 깃발... 설마... 설담은 저멀리 보이는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며 가슴이 설레여옴을 느꼈다.
"황후를 호위하라!!!"
아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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