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검도가 무도냐 스포츠냐 오랫동안 甲論乙駁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검도는 새로운 인식하에서 새로운 국면은 갖기에 이르렀다. 체육이 엘리트체육에서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육으로 확산함에 따라서, 검도도 사회체육부문의 한 장르 속으로 현대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도라는 전세대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스포츠 검도로서의 카테고리로 선명화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재인식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스포츠라 할 때는 어떤한 민족에게서나 또는 국가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체육문화가 국제화됨에 따라 그 울타리가 없어져 간다는 것을 현대 올림픽사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하나의 스포츠가 시초에는 한 민족적인 것에서 발생하여 세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민족적인 문화가 가장 국제적인 문화로 선택받는다. 물론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인류화되어가기 위한 역사적인 process가 뒤따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점에서 우리 한국은 일본 사람들이 가장 독특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검도를 일본 사무라이 검이 아닌 국제화된 스포츠 검도이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스포츠 검도의 渡來
동양 삼국 중 일본이 먼저 검술을 경기화하고, 세계검도연맹을 주도하고, 오늘의 세계검도를 절대적 영향하에 놓고 있으며 우리로서는 world game인 스포츠 검도로서 한국검도 100년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한일간의 침략적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가피한 요인을 극복하고 우리는 오늘날 일본으로부터 '渡來검도'가 아닌 한국적인 이념하에서의 '한국검도'로 정리, 정착하게 되었다.
때문에 '고대한일사'상에서 검문화의 뿌리는 우리의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주장할 때가 아니다. 현재에 일반 대중이 즐기고 있는 이 검도는 복장, 용구, 기술, 경기방식은 일본검도 발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검도는 현대 한일史上에서 재조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면저 우리로서는 '渡來검도'인 일본검도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일본은 검도를 스포츠화시키고 국제화까지 이끌고 왔다. 한편 우리 한국이 소망하는 올림픽화에는 반대하면서도, 유도가 올림픽에 가입되고 일본의 '가라데'는 한국의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화로 결정됨에 자극받아 맹렬하게 국제체육외교 면에서 물밑 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故 大島功 전 회장이 "앞으로 검도도 올림픽 종목화에 고려하여야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지금 일본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춤하면서 일본무도로 독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유럽문명을 받아들이면서 廢刀令과 더불어 검술은 보수 무사계급의 검술가 전용시대에서 벗어나면서 unique한 일본문화의 하나로 육성키로 하고 목검과 죽도문화로 개편하는데 힘쓰게 되었다. 이 검술을 검도로서 육성, 정책상 體操+劍技+道儀敎育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문교행정도 보조를 같이 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朝野는 검도의 학교의 정과편입청원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10여차례 의회에 試案을 제출하였으나 '독선적 尙武論에 대한 疑念'이라 해서 부정하였다. 그러나 결국 1911년 7월 31일 文部省令 제 26호로서 중학교령 시행규칙의 일부 개정, 체조학과에 '일반체조, 교련, 격검 및 柔述을 加함을 可함'이라는 법령을 내리고 일본사범학교에 대한 文部省令 제 15호 규정까지 개정하게 되었다.
이후 무술교육양성소, 무술전문학교(후에 무도전문학교)(1919)가 文部省 告示 제 203호로 인가됨으로써 일본은 체조라는 curriculum에서 학교교육의 목적달성을 위해 필수과목으로 확정되었다. 이를 더 system화하기 위하여 1927년 4월 1일부터 중학교 체조교육요목을 확정하여 실시하자, 교우회에서는 검도부를 두게 되는 등 자연스럽게 대학검도로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검도가 체조가 더불어 병행하여 왕성하게 되며 도장설비는 필수요건으로 되었다.
이것이 대동아전쟁 중에는 전쟁 수행사의 戰技종목화의 기도 때문에 종전 후 맥아더 사령부의 금기를 받아 말살될 뻔도 했다. 그러나 미일강화조약 체결후 복권되자 1952년에 전일본검도연맹이 결성되면서, 민주국가의 스포츠 검도로 출발한다고 선언하였다. 처음에는 사회체육으로 출발하더니 1962년 중학교에 검도지도요령 시달, 1963년 고등학교에는 검도를 선택필수로 실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교우회를 통한 과외그룹 활동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검도가 학교교상에서 기본과으로 채택됨에 따라서 각대학 체육학부에는 검도과가 창설되고, 무술 전문가들로부터 전수되던 구전적 경혐론에서 검도교육 이론의 정리통일을 기하였다. 또 한편으로 검도의 統轄기관인 전일본검도연맹은 지방연맹의 조직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전일본검도연맹下에 중고연맹도 있지만, 특히 대학연맹은 관동, 관서, 구주, 사국, 북해도, 동해, 중국의 각지방에 지방연맹체가 결성되어 있어, 중앙과 지방이 종횡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 연맹 출신자들이 경찰특별기동대에서 專行적인 검도를 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검도의 강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상으로 스포츠 검도의 발상지인 일본의 상황을 개관하여 보았다.3. 한국검도의 脈
(1) 동양적 劍技 版圖圈
한, 일, 중의 검술 교류 면에서 우리 검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술의 원류로서 볼 때 후한서 <삼국지>에 '부여인은 강하다. 마한인은 성질이 용감하다. 동옥저인은 武勇하다.'라고 씌여 있다. 또 東方朔神異經, 古文注에는 고대 조선인은 矛劍 같은 무기를 향상 갖고 다니는 武習이 있었지만, 퍽 공손하며 서로 명예를 존중하고 타인이 위급할 때에는 죽음으로 타인을 구하였다고 보면, 대륙으로부터 이 땅에 처음으로 금속문화가 파급된 것은 기원전 108년 이전이다. 이 시기 조선의 세형동검은 조선 초기의 금속문화로서 독특한 것이며, 이것은 규슈 지방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環頭刀子에서 신라의 環頭大刀로 이르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현재 일본의 <東大寺獻物帳>에 銀裝高麗樣大刀라하여, 은제의 環頭를 가진 두 자루의 칼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專來 古式의 外裝이라고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 또 1200여년 전 신라의 도비工法(다타르 옥동제조법)과 그 刀工이 일본에 渡日함으로써 일본도를 만들 수 있었고, 4세기경에 백제인 王仁 박사가 <논어>(10권)와 <천자문>(1권)을 가져갔 때 일본검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平法學小刀法을 전하였다 한다. 이 平法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의 역대제왕이 배우는 검법으로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병법을 平法으로 표현하며 心法을 말하여 殺을 피하고 평상심의 心學으로 승화시킨다는 의의가 있다. 일본검술원류에 속하는 '中條流平法'에서 '一文字' 격법 등의 원류검법을 일본에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殺手검술
1592년 임진왜란의 유발은 조총을 앞세운 왜군과의 백병전에서 조선 동맹군의 '칼'은 짧고 왜도는 길어서 초장에는 패하였다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장기인 弓矢에 치중한 우리의 선인들은 短兵技인 검술에 무심하였었다. 이것이 1598년에 신무술을 도입한 선조 31년(1598) <武藝通譜>의 발간에 이어서 <武藝新譜> <武藝圖譜通志>(1790)가 발간하기까지의 그 과정을 고찰할 때, 결국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발달한 短技로서의 삼수(砲手, 射手, 殺手)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삼수병을 교련한 훈련도감이 발족하였지만 '십만양병론'을 묵살한 사대문관의 횡행과 무관의 약체는 자주성과 武備를 외면한 이조검술문화는 쇠퇴에 빠지고 말았던 지난날의 역사가 후회스럽다 하겠다.
(3) 建陽 원년(1896)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 건양 원년 5월 23일 條에 '巡檢擊劍諸具 購入費 319원'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지금으로 부터 1세기 전에 경무청이 치안의 필요에서 격검을 경찰교습과목으로 채택한 것이 우리나라로서 오늘날 검도인 검술을 시작한 계기라고 봐야겠다. 그후 1904년 9월 27일 오늘날의 국방연구원에 해당하는 장교들의 재교육기관인 육군연성학교에서는 육군의 교육체계를 세우는 한편 전술과, 사격과, 체조과, 검술과를 신설하여 6개월 과정의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검술이 군경사이에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개적인 최초의 경기대회는 1908년 3월 28일 오후 2시 40분부터 내각원유회 주최로 거행되었는대, 한일 양국 巡査격검시합을 경무청 주관으로 비원에서 개최되었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폐하가 친람할 예정이었으나, '玉變靡寧'의 이유로 불참했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국제경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무관학교장이었던 李熙斗와 학무국장이었던 尹致旿에 의하여 발기된 단체로서는 무도기계체육부가 있었다. 이 단체는 교육계의 청년과 일반국민의 체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처음에는 군인 구락부로 활동을 개시하여 체육종목으로는 習絲, 승마, 柔術, 격검의 4개 종목이었다. 점차 일반에게도 검술에 대한 이해가 깊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는 대한, 태극 등 共修硏究會라는 우리 유학생단체들이 동경 중구 6지 9호에 있던 대한유학생 감독부에 모여 대한유학생 운동부를 두고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 널리 하고 있던 운동종목을 다방면으로 채택하고 있었다하니 검술도 보급의 범위안에 있었던 것으로 사려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체육계의 초창기였던 만큼 하나의 밑거름 역할이었다고 보겠다.(4) 사립오성학교와 조선무도관
1916년 5월에는 사립오성학교에서 검도시설을 갖추어서 일반 청년층을 모집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학교검도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또 1921년 11월 19일에는 원동에 있는 휘문고보 부근에다가 사설도장을 설립한 강낙원 선생이 격기종목인 검도, 유도, 펜싱, 권투를 직접 지도하였다 하니 이것이 한국 도장검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조선무도관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5) 연희, 보성, 이화여전의 검도 써클 창설
1925년 경성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총독부 주도하에 조선체육협회가 설립되더니 서울 남산에다가 저이들의 國祖를 모신다하여 조선신궁이라는 것을 지었다. 그리고 제 1회 조선신궁경기대회를 가졌으나 조선인이 이 대회에 참가하였는지는 모른다.
이 시기는 일제는 1927년 4월 1일부터 중학교 체조교육부문에 검도를 채택함으로써 중학, 전문학교에 스포츠 체육종목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교우회 활동에도 권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전에서도 검도 서클이 탄생되었다는 것은 이미 밝한 바 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1929년 일본의 수도학원(高野佐三郞)을 졸업한 강낙원 선생이 체육교수로 재직하면서 검도를 직접 지도하였고,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검도부에서 수련하다가 보성전문에서 검도를 시작하였으며, 이화여전에서는 김활란 박사가 克日을 위하여 검도부를 창설하였고, 연희와 이화는 서로 자주 교류를 하였다 한다.(6) 조선체육회의 출발
일본총독부 학무국 지시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체육협회는 일본인들의 전행기관이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조선인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새로 창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검도부문에서는 강낙원 선생과 이종구 선생이 창설 멤버로 참여하였다는 대한 체육사 기록에 남아 있다.
(7) 大韓劍士會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검도부흥'의 꿈을 실현코자 모인 인사 중에서 일제시 鍊士號라는 칭호가 수여되신 일본 關西대학 출신인 서정학 선생이 오사카 부 검도부에서 활약하다가 敗國후 경기도 경찰국 道助敎로 임명되었다. 해방후 일찍이 관계에 투신하였던 서정학 선생과 도쿄농대에서 보성전문을 거쳐 경기고보 교사로 계시던 이종구 선생과, 국내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1941년까지 있었던 高野佐三郞의 수도학원을 畢한 조선무도관의 長인 강낙원 선생, 일본 후쿠오카 현에서 검도수업을 하다가 귀국한 후 검도를 위하여 경찰계에 몸담고 계시던 김영달 선생, 일제부터 경찰 검도계에서 활약하던 故 호익룡 선생들이 중심이 되어 1948년 6월 3일, 재경유단자회를 창덕궁 도장에서 개최, 대한검사회라 叫稱 임시회장에 강낙원 선생이 피선되었다.
(8) 경찰검도의 왕성
1945년 서정학 선생이 UN司 경찰부 조선경찰학교 미식훈련 교육관으로 임명된 후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검도와 유도를 경찰에서 필수 교육과목으로 채택도록한 것이 경찰검도 시작의 역사적 기점을 이룩하였다.
1949년 5월에는 경찰 상무회를 조직,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1950년 4월에 제 1횔 전국경찰검도대회를 개최하였으나 곧이어 6.25사변의 유발로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그러나 1953년 대통령 경호실장었던 서정학 선생이 排日사상이 철저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이대통령탄생격축 친선 무도대회를 경무대에서 개최하여, 1953년부터 일반부만을 하다가 1957년 제 5회부터 1959년의 최종대회까지는 학생부를 첨가하였다. 이와같이 경찰검도의 경기 event가 기폭제가 되어 전반적인 검도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에는 교도관대회가 시작되었다.(9) 대한검도회의 출발
1953년 11월 20일 대한검도회가 재조직되고, 한국검도를 통할 지도하여 화랑도 정신을 배양하고 국민의 체위향상과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한 체육회에 가맹, 같은 해 12월 각 시도에 사범을 배치하고, 1959년 6월 13일 제 1회 전국학생검도대회라는 최초의 검도회 주관 event를 시작한것이라고 보겠다. 이 시기의 한국 검도인 중 고단자는 8단부에 서정학, 이종구, 호익룡 선생이었고, 7단에 김영달, 정태민, 도호문, 정동섭, 박우영 선생뿐이었다.
(10) 전국체전과 제 1회 학생검도대회
검도는 1955년 전국체전부터 일반부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으나 1956년에는 고등부, 1959년에는 대학부 순으로 증가하였다. 동시에 검도회는 학생검도의 중요성을 참작, 제 1회 학생검도대회를 주관 개최하였다. 1961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正果로 채택하면서 김영달 선생이 출강하게 되었고, 일반대학에서는 서클검도가 부흥되자, 1964년에 대학연맹과 중고연맹으로 분리 개최하게 되었다.
(11)검도 event의 다변화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실로 energetic한 발달상이었다. 1967년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는 제 1회 이충무공탄신기념대회 개최, 1972년 제 1회 문교장관배대회, 그해에 시작한 소년체전 개최, 또 기성 검도인을 위한 동서고단자대항전이 1977년 부터 개최, 1979년에는 제 1회 대통령하사기 일반선수권전 등의 행사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과 때를 같이하여 7WKC를 한국에서 개최하자, 한국검도의 개화기를 맞이한 듯하였다. 이때 사회에서는 사회인 검도가 확산되어 가며 요원의 불과 같이 일어나는 市井 도장의 증가는 드디어 사회인 연맹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하나의 운동이 팽창하고 확대해지면서 bubble 현상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unique한 내용 충종이 있어야 한다. 본국검의 연구와 개발을 한다는 의미에서 본국검경연대회를 갖게 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으나, 마땅히 하여야 할 과제였다. SBS 전국검도왕대회를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한 박철무씨의 노력에 감사하며 검도가 뉴미디어 시대의 전파에 탄 것은 실로 놀라웠다.
이리하여 대한검도회는 사회법인체가 되었다. 그러나 법인체에 걸맞는 어떠한 사업을 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4. 검도경기의 脈
(1)전국체전
국내경기로서 해마다 10월에 막을 여는 전국체전은 1920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 1회 대회부터 起算하여 회수를 계산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대회를 열지 못하는 연도도 이를 통계한다는 규정에 따라 1945년 해방년도의 대회를 제 26회로 산정하게 되었다.
제 26회 대회 이전의 어느 대회로부터 검도종목이 있었는가를 찾아보겠다. 기록상 1935년 제 16회 대회기록에는 휘문고보의 강성균 9전 9승, 1936년 제 17회 조선무도관의 정석래 승 1937년 제 18회에는 휘문고보의 강성균 7연승으로 그 기록이 남아 있고, 1938년에 소위 支那사변 반발로 중단하였다 한다. 이후 대동아전쟁 동안은 대회가 없다가 1945년에 당연히 개최하여야 할 것이나, 정치적 혼미 속에 간과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연차적으로 제 29회가 되는 1948년에야 시도대항전이 개막되었으나, 검도는 1955년 제 36회부터 일반부 대항전만으로 시작되었다.제 37회 때는 중,고부를 加하고 제38회에 가서 대학부가 加하게 되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체전운영은 각 시도행정기관이 국민체육진흥이라는 국가시책의 일환으로 행하여진다. 그러므로 승패가 각시도 자체적으로는 명예에 관계되므로 중, 고, 대, 일반팀 창설의 촉매 역할이 되어서 행정기관을 통한 보급의 원동력적 역할을 하였다.
(2)국제사회인검도선수권 대회
International Non-Professional Kumdo Grand Match
국제적인 검도대회가 없던 중 1965년에 한, 중, 일 , 미, 하와이, 오키나와를 일환으로 하는 국제사회인 검도구락부가 주도하는 국제사회인검도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서정학 선생이 창설 임원으로 참석하였다.
제 1회 대회(1965년)는 대만에서 개최하였으나 한국은 불참하였다.
제 2회 대회(1966년)는 오키나와에서 개최. 한국은 단체전 2위였다. 서정학 선생을 필두로 도호문, 정태민, 김영배, 서동준, 강용덕, 정동욱, 신준식, 이용팔 등 원로 선생들이 선수로 참가하였고, 개인전 6단 이상에서 정태민, 도호문 선생이 3위 입상을 하였다.
제 3회 대회(1967년)은 10월 20일 오사카에서 개최. 단체전에 김영달, 정태민, 서동준, 강용덕, 김석춘, 정동욱, 윤병일, 김춘경, 김재일, 천화성 선생이 선수로 참가하여 단체전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개인전에서는 6단 이상에서 서동준 3위, 5단 이하에서는 윤병일 1위, 김재일, 천화성이 3위였다.
제 4회 대회(1969년 4월 24일)는 서울서 개최. 단체전 2위, 개인전 6단 이상 윤병일 3위, 5단 이하 김춘경 1위, 이경제 3위.
제 5회 대회(1971년 10월 5일)는 대만에서 개최. 단체전, 개인전 모두 전패.
제 6회 대회(1973년 4월 17일)는 오사카에서 개최. 단체전 2위, 5단 이하 남승희 2위, 이호암 3위, 6단 이상 이홍국 3위.
제 7회 대회(1975년 4월 19일)는 서울 장충체육관 개최. 단체전 우승, 개인전 6단 이상 김춘경 2위, 김재일 3위, 5단 이하 장숭학 2위, 김화태, 박갑순 3위.
이상과 같이 국제사회인대회는 전일본검도연맹이 결정된 후 1970년에 일본이 주도하여 국제검도연맹을 결성하여 제 1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국은 제 7회 국제사회인대회를 참가를 마지막으로 이탈하였다. 그러나 IKF의 WKC가 있기 전의 국제검도교류 경기사항에서는 그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3)세계검도선수권대회
World Kendo Championship
*1 WKC - 1970년 일본 개최. 단체, 개인전 모두 패.
*2 WKC - 1973년 미국 개최. 개인전 이종림 3위 입상.
*3 WKC - 1976년 영국 개최. 불참.
*4 WKC - 1979년 일본 삿포르 개최. 단체전 2위.
*5 WKC - 1982년 브라질 상파울로 개최. 김동수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21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 선수를 선발하여 강화훈련을 여러 차례 하고 출전하였으나, 단체전 3위에 끝났다. 국제심판으로 이호암, 양춘성이 참가. 동아일보 이광석 기자 동행함.
*6 WKC - 1985년 파리대회에서는 단체전 3위였으나, 개인전 마지막 4강전에서 일본인 2명과 한국의 김경남, 박중채가 격전하였다. 그 당시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 한국검도의 자부심을 갖게 하였으나 한국은 2명 다 3위에 머물렀다. 국제심판으로 최상조, 이호암, 양춘성 참가.
*7 WKC - 1988년 서울에서 개최.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은 실로 한국검도사 초유의 대 event이다. 6 KWC때의 총회에서 7 WKC를 일본 교토에 유치하고자 한 일본측과 최상옥 회장과 故 도호문 선생의 공로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대회준비를 위해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국제준비집행회의에서 진력한 최상옥 회장과 이종림 전무, 이호암, 서병윤 이사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단체전 2위, 개인전에서는 김경남이 3위였다. 심판장에 서정학 선생, 심판에 양춘성, 유기순, 김재일이 참가.
*8 WKC - 1991년 토론토 대회에서는 부진하여 단체전 2위, 개인전은 전패의 성적이었다.
*9 WKC - 1994년 파리에서 개최하였으나 우리 한국은 단체전 2위, 개인전 입상없이 기록되었다.
결국 한국은 세계대회에서 일본을 한 번도 못 꺾었다. WKC전에서 가장 분투하였던 대회는 1988년 서울대회에서의 성적이었다. 개인전에서 김경남이 3위에 그치고, 단체전에서 일본에 패하였기는 했지만. WKC에서 가장 부진하였던 대회는 1991년의 캐나다 토론토 대회였다. 개인전 입상 없음. 이종림, 이호암, 양춘성, 김재일이 국재심판으로 참가하였다.
5. 본국검 연구동양적 검도판도권에서 한국검도의 역사성과 자존심을 찾기 위하여서는 무엇 보다도 우리의 고무예 안에서 劍技譜를 찾아야 했다.
동양 3국 중 중국은 세계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황하문명은 기원전 1300년부터 청동기 시대로 들어간 만큼 고무예에 있어서도 찬란하다 하겠다. 중국검술의 一端을 개관하기 위하여 우선 검기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찾아보자. <武編> <紀敎新書> <陣紀> <長槍法選> <單刀劍選> <武備志> <十三刀法>의 劍譜가 현존하고 있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유입에 급급하였다 할지라도 陰流, 一刀流, 神道流를 중심으로 200여 유파가 각각 갖고 있는 劍譜는 민감하게 받아들인 검술문화를 다양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 한국으로서도 당연히 하나의 unique한 검술문화는 있었다.
그러나 정치지리적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는 외세의 간섭과 침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 독점 아래서 모든 것을 말살당해서 신라의 <武島兵法>, 고려의 <金海兵書>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21세기를 향한 우리는 한국검도를 고무예 속에서 그 뿌리를 규명하고, 검도의 正史를 밝히되 스포츠 검도를 유입한 한국이 국제검도계에서 엄연한 존재라는 논리를 세우고 그 이념을 확인해 보겠다는 것이다.
1960년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유일하게 조선 고무예를 추구하여, 일본검술이 아닌 것을 주창하던 송성식 선생이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실로 고독한 조선검술 추구자였으나, 조선적인 무예를 추구하겠다는 그 의욕은 높이 평가하여야겠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적인 것의 추구는 1971년 10월 23일 부로 이호암 대학연맹 지도위원이 '검도에 있어서 하카마 배제에 관한 件'을 한국검도회 회장 앞 (검도회 각 이사, 전국대학연맹 회장, 전국 중고등 검도연맹 회장 참조)으로 제출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점차 한국 고무예 또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연구는 왕성해 가서 1977년 10월에 이호암이 '한국검도론'을 발표하고, 성균관대학에서 이종림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1983년 12월에 '한국고대검도사에 관한 연구 (신라 본국검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다.
1970년대 성균관대학 검도장(지금은 도회관)이 서울의 검도인들에게는 중앙도장 역할을 할 때였다. 이곳에서 한국의 名著인 <武藝圖譜通志>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여지자,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갖게 되었다. 이때 성균관대의 이종림과 서병윤이 拔萃검법이라하여 本國劍, 提督劍, 銳刀에서 拔萃하여서 시연하더니 1976년 춘계 축제에서 '本國劍譜'를 실연한것으로 안다. 한편 연세대학에서도 1976년 춘계 축제에서 '한국검도의 재인식'이라는 기치 아래 장기원 기념관에서 허선도 국민대 교수가 '역사적 전통을 중심으로'를, 이호암이 '본국검론 및 그 검기 해설'을 강연하고 야구장에서 본국검 초장, 중장, 중장으로 집단 시연하였다.
1983년 연구분과위원회에서(검도회) 최초로 본국검에 대한 토의와 질의를 교환하는 연구회의를 가졌다.
1987년 검도회의 이종림 전무가 '본국검법 擊刺 21首圖解'를 작성, 보급하게 되었다. 1988년 7 WKC 공개행사 이후, 1992년 제 1회 본국검경연대회를 갖게 되면서 이후 승급,승단 심사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본국검보의 자세와 도해용어를 소박하게 받아들일 것이냐, 실기 전개상의 변화를 가미할 것이냐의 연구와 <무예도보통지> 24기 전반에 대한 연구문제가 오늘의 우리들 검도인에게 주어진 과제로 남아 있다.
6. 중앙도장의 꿈
경기단체로서 구심적이고 중앙집약적인 중앙도장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의 사설도장은 우후죽순처럼 증가되어 가도 중앙도장 건설 문제는 우리들의 뇌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해방후 그 많은 산전수전에서 접수할 것을 놓쳤고, 부동산 가격이 저렴하던 시대를 놓쳤고, 정부 권력기관에게 완곡한 청원을 할 사람도 없고, 비인기 종목이라는 명목하에 완전히 시기를 逸失하고 말았다. 그래도 1982년부터 임대 중앙도장이라고 해서 원서동, 홍제동, 교도소 도장, 경기여고도장 등으로 전전하다가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참으로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다.
7. 團圓을 향하여지금 한국검도는 중앙검도회는 있으나 중앙도장이라는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확실한 교육적 system과 curriculum도 없는 中, 高, 大를 통한 학교 검도분야와 자본주의적인 자유체제하에서의 상업주의에 흐르기 쉬운 市井도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육분야에서의 검도가 병존하고 있다.
경기단체는 경기에서 우승으로 그 면목을 유지하고 검도강국으로 부상되는 만큼 소위 엘리트 검도의 육성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는 이 마당에서 WKC에서 覇者의 꿈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중요한 과제를 우리들 한국검도인은 인식하면서 <1>학교체육검도의 정립, <2>사회체육검도의 정립, <3>검도강국을 위한 엘리트 검도의 촉진이라는 이 3대 목표가 달성할 수 있는 대단원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대학검도보 1996년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