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정책 구상은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피스메이커(평화의 중재자=미국)·페이스메이커(조력자=한국)론을 제시하며 북·미 대화를 남북관계 회복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 북한과의 대화 재개 문턱을 낮춘 중단-삭감-비핵화라는 3단계 북핵 해법을 제시하고 교류(Exchange)-정상화(Normalization)-비핵화(Denuclearization)를 병행 추진한다는 END 이니셔티브를 밝혔다. 문제는 당장 북한이 반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점이다. 북한은 북-미 대화에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만 남북대화에는 거듭 선을 긋고 있어 남북관계에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의 남한 접근을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북한이 적대적 양자론을 고집하는 상황에서는 이제 남북관계에서도 기존의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남북대화가 아닌 다자대화로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예상과 달리 9월 3일 중국 전승절 외교를 통해 다자 정상외교 무대에 데뷔한 바 있어 이런 추세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유엔총회에는 김선경 차관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분간은 다자대화가 남북의 의사소통에 좋은 경로가 될 수 있고, 남북이 모두 참여하는 다자대화 촉진에 우리의 외교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도 기존의 북·미, 남북, 남북미의 협상 플랫폼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중·러 그리고 일본도 참여하는 역내 핵 군비통제 메커니즘 구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에서는 북핵 문제뿐 아니라 강대국들의 핵군 확대 경쟁 심화가 심각한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중러와의 핵군축 협상에 거듭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북한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참여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일본도 핵확산금지조약(NPT)상 비핵보유국으로서 역내 핵 군비통제 논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북핵 문제를 다자간 플랫폼에서 다루게 되면 북·미 대화나 남북 대화에서 북한이 극도로 거부하는 비핵화 문제가 아니라 교류협력이나 긴장완화 등 기타 의제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라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비핵화 문제를 다자 메커니즘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둘째, 남북이 모두 참여하는 국제기구에서 남북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이 효과적이다. 유엔이 대표적인 무대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1991년 유엔 동시 가입으로 남북은 두 국가로 고정화됐다고 밝힌 바 있다. 남북이 유엔에서 접촉하게 되면 국가와 국가의 대면이 되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굳이 회피할 이유가 없게 된다. 중러가 주도하는 국제기구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남북은 현재 상하이협력기구(SCO)나 BRICS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한 북한은 앞으로 가입할 가능성이 있어 한국도 옵서버 참여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북한의 복귀를 내다본 장기적 관점에서 중-러 정상회담 의제로 최근 부상한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의 국제기구화 논의를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대북제재 예외사업에 있어 남북이 참여하는 다자간 플랫폼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원산갈마리조트 사업 등 관광 분야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 일본 관광객이 대거 유입되지 않는 한 북한 원산 갈마리조트의 활성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 니가타-한국 부산-북한 원산-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크루즈 관광을 기획하거나 한미일-중-러 국제컨소시엄을 조직해 북한에 제안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만약 트럼프 가문의 기업이 참여했다면 북·미 관계 개선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미-러 정상회담에서 비공개로 논의된 사할린 프로젝트가 대북제재 예외 대상인 나진-하산 개발과 연계되면 미국 기업의 참여에도 문이 열린다. 동시에 대북 제재의 예외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은 개발협력 분야, 특히 북한이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는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북한의 적대적인 두 국가 노선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로서는 다자대화를 활용하는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