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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앞에 선 바울
행 25:23-27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행 25:23-27 / 그래서 그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화려한 외상을 갖추고 장교들과 그 도시의 명사들을 거느리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이 끌려 나왔다. 24) 베스도가 일어나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아그립바 전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이 사람은 이 지역에 있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발해 온 사람입니다. 25) 그러나 내가 조사해 보니 그는 사형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를 황제에게 보내는 도리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26) 그러나 황제에게 뭐라고 써보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고소할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 특히 아그립바 전하 앞에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를 심문해 보시고 황제 앞에 뭐라고 써보내야 할지 내게 일러주십시오. 27) 아무 이유도 없이 죄수를 황제에게 보낸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복음을 위해 어떤 선한 일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23) 이튿날 아그리바 왕과 그의 이복 여동생 베니게는 마치 부부처럼 위엄을 갖추고 등장했습니다. 이들의 뒤를 군 지휘관들과 도시의 유지와 명사들이 따랐습니다. 이로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그릇이라 하시던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행 9:15). 바울은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는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던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또 하나의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마 10:18). 우리 주님은 언제나 미리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24-26a) 재판정 상석에 있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정작 사형에 처할 죄는 없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석방되어야 하지만 로마시민권자인 죄수가 스스로 로마 황제께 상소하였기에 그를 로마로 보낼 것이라고 판결합니다. 그러면서 베스도의 고민을 나눕니다. 황제에게까지 보내는 죄수에 대해서 뚜렷한 죄목을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한 일이 바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도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2년의 연금 상태가 힘들었겠지만 복음의 열정으로 인내하고 이기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26b-27) 아그립바는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로마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던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지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아버지 때의 위용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러한 자격지심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위엄 있게 하고 화려한 외관으로 압도하고자 하는 허약한 통치자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임총독 베스도는 그가 유대인의 사회와 문화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그립바의 심문을 통해 바울의 죄목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이방인의 통치자도 지역의 분봉왕도 죄목을 설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울은 무죄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용: 빌립보서 1장 12절의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의 말씀대로 지금 당신이 직면한 사건이나 상황이 복음의 진보를 어떻게 가져 왔는지 서로 간증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이 간계를 부릴지라도 그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어떤 사람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 위해서.
호크마 주석
=====25:23
크게 위의를 베풀고...바울을 데려오니 - '위의'(偉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시아'(* )는 '보이게 하다'는 의미의 '판타조'(* )에서 파생된 말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위엄있고 호화 찬란하게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정도였다고 한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들이 뒤따라 들어오는 화려한 행렬은 이 날의 청문회가 얼마나 비중있는 것인가를 말새준다. 한편 '신문소'(* , 아크로아테리온)는 '청취자가 되다'는의미의 '아크로아오마이'(* )에서 파생된 말로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는 공청실(公聽室)을 뜻한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외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스승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며 그것은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9:15).
=====25:24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을 송사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William Neil). 다만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을 해하려 했던 군중들을 감안한다면(21:27-36)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무리들을 대표하는자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25:25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 본문은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를 분명히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천부장 푸시아도 그러했고(23:29), 벧릭스도 마찬가지였으며(24:22, 23), 지금은 베스도까지도 바울의 무죄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않고 있다. 매번바울이 석방되지 않은 사유가 있었지만(9-12절;23:20-24;24:22), 사실상 그런 것들은바울을 풀어줄 수 없는 정당한 사유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판결의 지연이 바울을로마로 향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23:11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주님의 섭리임에틀림없는 것이다.
=====25:26
황제 - 본문의 '황제'(* , 퀴리오스)는 21절의 '세바스토스'(* )와 다른 칭호이다(21절 주석 참조). '퀴리오스'는 '주'(Lord or His Majesty)라는 뜻의 칭호인데, 옥타비아누스나 디베료(Tiberius)는 이 칭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연상케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 칭호가 공식적으로 용납된 것은 칼리굴라(Caligula) 때부터이고 도미티안(Domitian)에 이르러서는공인된 칭호가 되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를 새겨넣기까지 하였다. 본래 이 칭호는 통치자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점차신성과 관련되면서 황제 숭배로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은 '퀴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기 때문이다. 폴리갑(Polycarp)은 황제를 '주'(* )라고부르지 않아 순교당한 인물의 예이기도 하다.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 본문에는 베스도의 난처한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다.그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9절) 엉뚱한 제의를 하였다가 바울의 항소를 받았고(11절).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을 최고 법정인 로마에 보낼 때 함께 보내야 할 혐의 사실이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황제가 보아서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상소(上訴) 재료도 없이 바울을 올려 보낸다면 그에게는 무능력가라는 낙인과 문책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상소(上訴) 재료를 찾기 위하여 이 청문회를 열기로 한 것이며 아그립바의 심문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25:27
죄목을 베풀지 - 베스도는 천부장 루시아가 벧릭스에게 써보낸 것과 같은(23:26-29) 애매 모호한 조서(調書)를 올려보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베풀지'(* ,세마나이)는'표시한다'는 뜻의 '세마이노'(* )의 제1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구체적인죄목을 명시하는 것을 뜻한다. 무리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곤'(* )은 부정 접두어 아(* )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의 합성어로 '이성이 없는', '이성에 위배된'의뜻이다. 분명한 죄목도 없이 사람을 보내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성이 없는, 즉 정신나간 일이 아닐 수 없다.
< 설 교 >
하나님의 보호
신성종 목사 / 행 25장 23~27절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의 무리가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사람“(24절)이라고 하여 죽이려고 테러와 정치적 압력과 여론의 조작 등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호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보호]란 제목으로 이 세상은 어떤 곳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이 세상은 광야요 여관입니다.
(1) 성경은 이 세상을 [광야]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행13: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있었다고 했는데 그 광야는 바로 이 세상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광야의 특징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로 험합니다. 둘째는 맹수들이 우글거립니다. 셋째는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습니다. 넷째로 길이 없습니다. 다섯째로 편히 쉴 곳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 이 세상은 문화의 발달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수많은 편의 시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영적으로 광야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바로 살수가 없습니다.
(2) 먼저 이 세상은 잠간 머물다가 가는 [여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영원히 살 유토피아처럼 오해하고, 자기의 성을 쌓고, 무엇인가 영원히 남기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세상은 인간들이 잠간 머물다가 가는 여관에 불과합니다.
여관의 특징은 첫째로 잠간 머무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여관은 결코 무료가 아니고 주인이 있어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곳입니다. 셋째로 여관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것이 아닙니다. 넷째로 여관은 떠나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소망을 둘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의 본질(세상은 험한 광야요, 잠간 머물다가 가야 하는 여관임)을 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헛되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2.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
(1) 하나님의 보호는 [성령의 인 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엡1:13절에 보면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성령으로 도장을 찍어 우리들이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확신케 하고 이마와 오른 손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나라가 국민들을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해외에 있는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사관과 영사관이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보호해줍니다.
나라가 강할수록 힘 있게 보호하고, 나라가 없거나 약하면 제대로 보호를 못 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많으셔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의 백성들을 항상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품음같이 하시고, 또 눈동자같이 보호해주신다고 했습니다.
(2)[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교회란 영원한 피난처가 아니라 일시적인 즉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의 shelter입니다. 높은 산에 등산을 하다 보면 갑자기 눈이 오거나 자야 할 때를 위해서 shelter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교회는 광야세상에서 성도들을 보호하는 장소입니다. 가난한 자는 구제하고, 약한 자는 위로하고, 무지한 자는 교육시키고, 병든 자들은 심방하며 기도해주고, 외로운 자는 사랑을 주고, 이런 식으로 교회는 세상의 쉼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교회를 멀리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천사들을 통해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신약시대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지만 그러나 지금도 때때로 천사를 통하여 보호하시고, 인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사라고 하면 다 날개달린 영적 존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상상의 그림일 뿐입니다.
천사가 성령과 다른 것은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통해서 역사하지만 천사는 어떤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점이 다릅니다.
저도 천사의 도움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긴 적이 있습니다.
(4)[성령으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마28:20).
또, 히브리서 13:5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늘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습니까?
3.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비결은?
(1)먼저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인 쳐 주시고, 아무도 손 못 대도록 보호와 인도하십니다. 사람들도 자기 가족은 보호하여 줍니다.
그래서 집에 담을 쌓고, 문에 열쇠를 잠그고, 하다못해 똥개라도 길러서 [맹견주의]라고 써서 경고하고, 보호하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인을 치셔서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시편 23:1절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있을 때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 보호하고, 필요할 때에는 맹수와 싸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3)[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종이와 반석이 붙어있을 때 아무도 종이를 찢을 수 없듯이. 사실 우리들은 종이처럼 약합니다. 그러나 만세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과 접붙여있으면 아무도 우리들을 해할 수가 없습니다.
(4)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6:13절).
사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총으로도 못 이기고, 칼로도 못 이깁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5)[항상 은혜의 날개 아래 있으면서]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36:7절에 보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은혜의 날개 아래 피하여 있기를 축원합니다.
[맺는 말]
이 세상은 광야이기 때문에 언제 맹수가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가 없이는 이 세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해야 합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시온의 대로를 안전하게 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통해서 다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양향모 목사 / 행 25:22-27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이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탄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도 섬기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분들을 섬기지 못합니다. 부모님이나 스승이나 선배나 마땅히 존경하고 따라야 할 사람들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교만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교만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잘난 척하고, 잘 아는 척하고, 똑바로 사는 척하지만 사실은 교만일 뿐이고 못나고 무지하고 추한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세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살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면 시야가 넓어지고 많은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의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직접 사도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중복으로 읽었던 22절에 보면 아그립바가 총독 베스도의 말을 듣고 자신도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그 아그립바 왕의 부탁을 듣고 그 다음날 바울을 불러내어서 아그립바 앞에 세우고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그립바가 바울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듣게 되는 그 시작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봉왕 아그립바가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라고 한 말을 설교의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들어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귀한 말을 듣고자 하면서 그 자리에 임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매우 교만한 모습으로 그 소중한 말을 듣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 중요한 기회에 바울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본문 22-23절에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여동생 버니게가 왜 바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당시에 바울의 재판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주 중요한 재판이었기 때문일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유대인의 왕으로서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 벌어진 재판에 대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는 나라에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이라고 정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이 어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장하신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아그립바의 헤롯 왕가와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시라고 할 때 단순히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기들이 어렵게 차지한 왕위를 빼앗겨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대왕 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때 동방박사들이 별을 연구하다가 갑자가 나타난 큰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누구냐고 헤롯에게 물었습니다.
헤롯이 자기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될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그 시기에 그 부근에 태어난 아기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의 왕위를 탐하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해주셔서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죄명을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 십자가 위에다가 붙였습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가 거부하고 그냥 ‘유대인의 왕’으로 써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실 때는 단순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나라로 세운 특별한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아그립바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사람이 정말로 다시 살아났고 지금도 살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아그립바와 그 여동생의 자세는 매우 교만했습니다. 진짜 왕이 누구신지 알아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내가 왕인데 누가 감히 왕의 자리를 엿보는가 하는 자세로 그 자리에 나왔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라고 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 폼을 잡고 왕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형적인 폼을 잡는다고 해서 그가 진짜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의 후손도 아니면서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서 어쩌다가 왕 노릇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의 왕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겸손하게 나와서 진짜 왕이 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만하게 내가 진짜 왕인데 누가 감히 왕이라고 하느냐는 교만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그런 자세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거기다가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것이 아주 아주 귀한 복음이라고 해도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어려서 어디서 잘 못 배운 것이나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믿음의 전부인 줄 알고 진짜 복음을 말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복음을 바르게 알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닌 사람입니다. 그냥 주일을 지키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고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서 하는 것인 믿음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위한 것이며 그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모르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알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벌 받을까봐서 주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좀 적극적으로 복을 받아서 잘 살아보려고 교회 일도 하고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다 안다는 교만함 때문에 모태신앙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정말로 내가 흉악한 죄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흉악한 죄인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최고의 착한 일은 내가 구원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믿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연약한 교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큰 부자도 없고 크게 출세한 사람도 없다고 연약한 성도라고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우리교회는 가장 강한 교회 중에 하나이고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강한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날마다 듣고 그 복음으로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가장 큰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면 가장 강한 용사가 되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 되지만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좀 교만해도 됩니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고 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본문 24-25절에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 앞에 바울을 불러 놓고 바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고발을 하였는데 내가 살펴보니 죽일만한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죽이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예수님 때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고 바울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서로를 살리는 것이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둑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틈만 있으면 죽이려고 대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 짓이 아니라 사탄이나 그 졸개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남을 나쁘게 만들고 험담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교만 때문에 남들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에 잘못을 보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지만 복음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더 잘되게 해주려고 서로 애를 쓰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본문 26-27절에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총독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을 세우고 바울의 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심문하고 답변을 듣고자 한 것은 바울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보입니다.
다만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서 가이사의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바울을 가이사의 법정에 보내면서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하여 보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를 통해서 혹시 바울의 죄목을 특정할 수 있을까 하여서 이런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의 최고의 지도자인 왕 앞에서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바울의 주장 중에 무엇이 죄인지를 살펴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범죄 혐의가 있어야 하고 그 혐의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살인죄라든지 간음죄라든지 법을 어긴 죄가 확실히 있어야 하고 그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했지만 그 죄목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재판받는 과정을 살펴보았지만 그렇게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목을 지정하지 못했습니다. 죄목이 뚜렷이 없으니 증거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죄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런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당연한 일을 거부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잘못한 일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한 것이 잘못입니까?
그 하나님을 몰라본 것이 죄이고 알면서도 그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당연한 일을 하는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 죄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행실을 똑 바르게 해야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지 예수님만 믿는다고 하면 다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그렇게 시시한 일입니까?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나 감사할 일이고 너무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믿고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살피면서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성경 전체의 말씀을 통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를,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또 앞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죄들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깨끗하게 용서받게 해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너무나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나의 진실한 고백이 되도록 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런 귀한 증언을 듣고도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을 죽이려고 하는 죄악 된 습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깁니다.
우리도 이런 죄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정말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를 알고 믿고 따르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바울
구규창 / 행 25:23-27
사람들은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누가 더 센지, 누가 더 싸움을 잘하는지 등에 대해서 본능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투견 같은 것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축구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 외의 스포츠 시합이나 어떤 종류의 경쟁이 있는 곳에서는 누가 더 잘 하냐, 누가 이기냐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더 강한지에 관한 관심이 지극한데 이것은 아마 사람의 본능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원시시대에 들판에서 어떤 동물을 만났을 때 내가 그 동물을 이길 수 있는지 아니면 도망을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옆 부족이 우리 부족보다 강한지 약하지를 잘 살피고 강하면 조공을 바치거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약한 상태면 가서 큰소리를 치고 하는 등의 판단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상대의 힘과 나의 힘을 잘 알고 판단해서 도망을 하거나 아니면 잡으러 가거나 하는 판단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문제였고 지금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이 분명치 않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큰 피해를 볼 수 있고 반대로 너무 상대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다가는 , 자신 보다 약하고 자신을 어떻게 할 힘이 없는 대상에게 지배를 당하고 식민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이 어떠한지 또는 우리를 해할 수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것들이 우리를 해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벨릭스에게 심문을 당했던 바울은 벨릭스의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높은 자들이 바울을 송사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의 죄를 증명하지 못했고 바울을 벌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재판으로 바울을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고 불법적으로 바울을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전에도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다시 바울의 이송 중에 죽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하신대로 바울에게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베스도 총독과 분봉왕이었던 아그립바가 바울 놓고 의논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별 볼일 없는 일개의 피고인일 따름인데 바울은 3명의 유대 최고 지도자들의 관심을 받고 그들이 심각하게 바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바울의 고소 자들이 무력하게 됨
바울에게는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들과 최고 권력자들의 고소와 무력으로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그들의 모든 노력들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그 나라 최고 통치자들의 심문을 받았지만 바울은 여전히 무사했고 바울 자신의 갈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주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다. 아무도 바울을 해할 수 없었고 쉽게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로마시민권이 있어도 암살당할 수 있었고 또 총독들의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로마시민인 것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천국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 때문에 살 수 있었고 그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 믿는 자들을 이길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을 가르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대단해 보이고 로마총독이 대단해 보이지만 그들이 믿음의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눅10:19-20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면
세상의 모든 위협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세나 어떤 힘이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더 강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결코 세상이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사람은 우리가 굴복하고 항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적인 반대와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바울은 예정대로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한 일을 할 때 누군가 그 일을 방해하더라도 우리는 능히 그것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반대를 하더라도 또는 여러 가지 여건의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 믿음으로 끝까지 전도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해들이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품은 뜻을 여러 가지로 위협해서 우리로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속고 잘못 생각해서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누가 강하냐 판단할 때 "우리가 약하니까 포기하고,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만약 우리가 겁을 먹고 미리 꼬리를 내리고 굴복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해할 수 없는 자들에게 굴복한 모습입니다.
마치 적이 쳐들어 왔는데 그들은 도저히 우리의 성을 함락시킬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겁을 먹고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깡패 중에 싸움을 잘 해서 두목이 되는 경우에 그 두목은 모든 사람들과 싸워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싸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무섭게 생긴 인상이나 그 사람의 명성 또는 분위기 등으로 사람들을 제압한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능히 우리를 이길 수 없고 우리를 해할 힘이 없는데 우리가 미리 겁을 먹고 무릎을 꿇고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면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저의 부모가 반대하고, 저 사람이 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데 안될 꺼야" 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선한 양심으로 한다고 해서 되겠어", "왜곡된 엄청난 세상의 구조가 우리의 이런 노력들로 바뀔 수 가 있겠어?", "악한 일 인줄 알지만 그렇게 안하고 내가 이 상황에서 살아 남을 수가 있겠어?" 등등의 생각이 우리가 지지 않을 대상에게 지고 굴복해서 우리를 도륙하도록 내어주는 모습들입니다.
*예화* 두려움 어떤 사람이 처음 가는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는데 양쪽은 모두가 높은 절벽 이었다. 발을 잘못 디딘 실수로 떨어지던 그는 간신히 나무뿌리를 잡고 매달리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그가 소리를 치며 구원해 달라고 했으나 듣는 사람 이 아무도 없었다. 손목과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갔다. 이제는 도저히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떨어 져서 죽는 일만이 남았다. 드디어 그는 악! 소리를 치며 나무뿌리를 놓쳤으나 이게 웬일인가? 수 십 미터의 낭떠러지인줄로 알았던 것이 겨우 털썩! 하고 발이 땅에 닿는 약 1미터의 높이였던 것이다. 손만 놓으면 떨어져 죽는 줄 알고 겨우 1미터 높이의 곳에서 밤새도록 나무뿌리를 잡고 두려워 떨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것을 놓으면 죽기라도 하는 줄 알고 결사적으로 세상 것에 메 달려 있는 사람이 그 얼마나 많은가?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세상이 우리를 해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 우리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왕은 다윗을 자신의 권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잡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다윗을 결코 잡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굴속에 다윗이 숨어있는데 뒤를 보려고 들어왔을 때 다윗의 장수들이 한칼에 도육해 버리자고 할 때도 자신의 장수를 막았고 또 한번은 자신을 찾아 죽이려고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야를 헤매며 찾다가 들에서 군사들 틈에 잠자는 것을 알고 사울의 진에 들어갔다가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습니다. 두 번이나 자신의 생명을 다윗이 죽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을 죽일 수없다는 자신의 신앙이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닌 사울을 부끄럽게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불레셋과 전투에서 그 자녀들과 죽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과 바로서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쓰임 받은 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며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을 저들도 믿을 수 있도록 예수님 자랑 교회 목사 자랑을 하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도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바울을 어떻게 감당하게 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는 바울을 방해하면 한 만큼 그들은 더 바울을 죽일 수 없고 바울의 삶에 대하여 한 발자국도 간섭 할 수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으면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 할 지라도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죄악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은 내 편에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주를 살면서 만나게 되는 세상의 도전들에 대해서 능히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내어서 도전하고 싸워 이기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싸워나갈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를 막아설 수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전도하는 한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