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은 Immanuel Wallerstein의 <근대세계체제>1권(까치, 1999)에 나온 pp.89-106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세기. 유럽은 중국을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카를로 치폴리(Carlo Cipolla)는 군사기술적인 면에서 15세기초에 이미 서유럽의 총포는 중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인접했고 15세기 동안 유럽의 기술이 눈에띄게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과학기술사를 연구한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에 의하면 유럽의 기술과 공업은 1450년부터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즉, 유럽은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갈릴레오의 등장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였던 데 비해 중국에서는 그와 견줄만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이가 일어난 계기는 무엇일까. 근대세계체제의 저자 임마뉴엘 월레스타인은 그 이유를 15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적극적인 해상진출과 대외교역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중국이 유럽처럼 해상진출을 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농업경제면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신항로개척 선두주자는 포르투갈이었다. 지력소모가 크고 경작면적당 생산량이 떨어지는데다 지력소모가 심한 설탕과 밀 농업, 그리고 다량의 토지를 필요로 하는 축산업등이 유럽사회경제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농축산업은 인구가 증가할수록 다량의 토지를 획득하여야만 했는데, 스페인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는 자국의 넓은 영토내에서 황무지를 개척한다거나 영토전쟁을 벌여서 다량의 농지 및 목축지를 얻는 것으로 그러한 수요를 충분히 충족 가능했지만, 포르투갈은 비좁은 영토에 바다와 강대국인 스페인이 국경선을 맞대고 있어서 전쟁을 통해 땅을 넓히는 것이 어려웠다. 포르투갈은 지리적인 특징상 어업과 조선업이 발달하였는데, 늘어나는 인구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왕정과 각종 사회계급이 주도적으로 해상진출을 독려하고 참여하였다. 주로 바다건너의 섬 등을 점령하는 것을 통해서 토지부족현상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에는 포르투갈 외 다른나라도 같은 이유로 해상진출에 참여하게 된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단위면적당 노동력을 많이 투입되고, 생산성이 높던 쌀농사에 의존하였는데 이 농업은 그리 많지 않은 토지로도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어 유럽처럼 인구압에 따른 토지수요가 그리 크지 않았다. 즉, 유럽은 토지의 추가획득이 인구압의 해결 및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던데에 반해,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유럽처럼 새로운 토지를 획득하기 위해 식민활동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둘째, 정치면에서 중국은 제국이었고, 유럽은 여러 국가들의 집합체였다. 중앙집권적인 체제하에서 실행되는 녹봉제는 지방의 자율성보다는 중앙의 특혜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지방분권적인 봉건화는 자체적인 수입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 상대적으로 더 자율적이다. 그리고 제국은 거대한 땅과 인구를 관리하기 위하여 많은 사회적 기능이 집중된다.
예컨대, 유럽의 경우 투르크인들의 침략을 이유로 포르투칼인들의 원정을 반대할만한 강력한 중앙정부와 황제가 없었다. 투르크인들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해도 포르투칼인들이 빈을 방어해야하거나, 방어를 직접적으로 도와야 하는 어떠한 정치적 의무도 없었고, 그것이 그들의 원정을 제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유목민족의 침략을 이유로 해외원정을 반대할 수 있는 중앙조정의 관료들과 제지할 황제들이 존재하였다.제국으로서 중국은 전체가 하나인양 생각하고, 그 자신들의 경제가 유일한 경제라고 생각하여 다른 경제들로부터 부를 빼어내려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려고 들었다.
중국에서 1405-33년간 실시된 정화의 해외원정은 포르투칼의 원정과 같이 생필품에 대한 수요로 시작된 원정이 아니라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조공체제를 확보할 목적으로 실시된 원정이었고, 이러한 원정은 곧 제국의 체제유지를 이유로 관료들의 반발에 부닥쳐 이내 중단되어 그 이후로 한번도 실시된 적이 없었다. 중국은 포르투갈처럼 사회적으로 각계각층이 해외원정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해외원정을 할만큼 정치적인 여건이 자율적이지 못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지속적인 해상진출과 대외교역이 기술의 발전을 촉진시켰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움직임이 없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첫댓글 잘 되는 이유를 끼워 맞추면 까일 것도 좋아 보이지요.십자군 원정의 경제적 배경과 약간 비슷하네요.
개인적으로 승자의 오만한 관점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제가 이해를 못해서 그런데, 다시한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중국같은 경우 안정을 실패요인으로 까고,
구라파는 까일만한 불안정에서 기인한 요소들을 성공의 요인으로 끼워 맞춘다는 뜻입니다.
결과론적이라고 할까요?(정확한 용어인지...)
사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게 사회과학이라는 분야는 이미 있었던 일을 가지고 인과관계를 유추는거기 땜시 사후해석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딜레마죠. 어떠한 결과가 있다면 거기에 대한 원인이 뭔가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고 과거 있었던 요소 중에 찾아서 갖다 끼우는거니까 한움쿰재님이 비판하시는 부분은 합당한 비판이긴합니다만 그 주장의 근거가 합당하냐 안하냐를 따져 봐야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옛 시대에 어떤 일인지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것이 후일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당대인과 현대인의 시각차이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애초에 경제발전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승자적 시각이 되죠.
예,포레스트님 말씀대로 딜레마가 있군요.
샤흐멍님 말씀도 맞습니다.(짜르먼트라고 쓰려다가 검색했습니다.)
딜레마가 있고 한계성이 있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수십년에 폐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백인우월주의사관 같네요.
저자의 연령을 보니 어쩔 수 없는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았거나 참고자료들이 그렇거나 한 것 같군요.
굳이 백인우월주의사관까지는 아니지요. 중국의 안정, 조숙성이 결국 서양보다 뒤지게 되었다는 원인이 되었다는 이론은 현재 역사학계에서도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추월은 이미 중세시대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이론도 문제지만, <<오리엔탈리즘>>같이 너무 서양을 폄하하며 19세기에 들어와서야지 겨우 서양이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요.
백인우월주의사관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죠;; 저자가 무려 월러슈타인인데 이 분은 오히려 기존의 보수적인 서구 근대화론은 비판하신 분입니다;;
저는 단지 유럽인들의 개척정신이 아니라, 인도와 아메리카의 존재가 판도를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분열된국가들이 낼수있는 최대의 장점(한 나라가 성공하면 우루르 몰려가서 이익공유)이 극대화되었기에 가능했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분열되어있는 유럽이 미국을 따라가지 못하는건 그러한 차이점이 아닐까요?
뭐 결론은 이것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서라는 건가요?
그러니까 결론은 될놈은 뭘해도 되고 안될놈은 뭘해도 안된다 이건가 ㅎㅎㅎㅎ
저렇게 따지면, 중국이랑 전쟁 포기한지 1000년이 되던 고려와 조선은 왜 해상왕국이 되지 않았나? 허허... 예를들어 고려나 조선이 일본 침략한다고 중국이 따지려들었을까... 맘대로 생각하고있다는 느낌...
우연이라는 면도 없잖아 있지 않나 하는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네번 연속 비길 확률만도 1프로도 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욕심을 사회발전에 이용할수 있게 되면서 발전속도가 차원이 달라졌단 생각이 드네요 황금과 비슷한 가치가 있던 육두구를 어느날 큰 배에 가득 실고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들 눈이 돌아갔겠죠. 동양에선 자급자족개념이 강해서 그런가 그런 대박상품도 없었고
nasica님 글에 존나 서양과 동양이 역전된이유를 잘설명해놓으신거같은데...
http://blog.daum.net/nasica/6862308 링크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