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태양>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
배우 올렉 멘시코프 / 니키타 미할코프 / 마라 바샤로프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시간 146 분
개봉 미상
국가 러시아 / 프랑스
◈ 줄거리 및 내용 소개
'강철의 사나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희대(稀代)의 독재자 스탈린. 한때 러시아 인민들의 '태양'이었던 요세프 V. 스탈린. 그것이 '위선의 태양'이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예술영화의 품격을 잃지 않은 채 사색적으로 반추해 보는 영화 한 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물론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말이다.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 감독의 1993년 작 <위선의 태양 Burnt by the Sun>이 바로 그것. 이 영화는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물론 스탈린의 악명 높은 전제정치와 개인숭배의 폐해를 고발한 서방세계의 영화는 부지기수다.
예컨대 기존의 영화는 의례 당시의 다큐멘터리 필름에 픽션을 절묘하게 삽입하여 희대의 독재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해 왔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할코프의 형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이너 서클 Inner Circle> (1991년)이라는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는 '크레믈린(즉 이너 서클)'에서 스탈린을 위시한 권력 핵심부들을 위해 헌신했던 한 영사기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인민들의 오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위선의 태양>은 같은 소재지만 무언가 좀 다르다. 2시간이 넘는 장편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체제의 모순과 치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마치 따사로운 초여름의 햇살아래서 천렵(川獵)을 즐기듯 쉽게 감상할 수 있는 한 편의 영상시와 같다. 요컨대 형제 감독 모두 스탈린 정권의 반민중성과 반혁명성에 염증을 느꼈지만, 형은 체제 외부(즉 할리우드)에서, 동생은 내부(러시아)에서 각각 전체주의의 폭압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때는 1936년. 무대는 스탈린의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그의 대형 초상화를 하늘에 띄울 애드벌룬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다차'라는 한적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산과 들 그리고 강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특권계층 인사들의 별장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평화롭기만 한 이 마을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온다. 훈련 중이던 한 탱크 부대가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이 마을에 잘못 들어온 것이다. 무지막지한 탱크들의 질주에 무참히 짓밟히는 드넓은 밀밭, 그리고 꺾어진 밀대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들꽃 몇 송이는 이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마침 휴가차 와있던 세르게이 대령(니키타 미할코프 감독 자신)의 설득 반 협박 반으로 군인들은 곧 철수를 하게되지만 뒤이어 찾아온 또 다른 불청객은 불가항력적 힘(권력=폭력)으로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다.
세르게이는 '혁명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권력자 스탈린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아내 마루샤(잉게보르가 답코나이떼)와 앙증맞은 딸 나디아(감독의 친딸 나디아 미할코프), 그리고 가족-친지들과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째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마루샤의 전애인 드미트리(올렉 멘치코프)가 불쑥 나타나면서 평화롭던 가정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것은 바로 검붉은 태양 빛에 타버린 위선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위선의 태양을 상징하는 두 개의 장치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절정을 이루게 될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이며, 다른 하나는 드미트리에게 따라다니는 선혈과도 같은 조그만 불덩어리다. 전자는 물론 영화의 내러티브 전개에 따른 자연스런 플롯의 일부다. 그렇지만 후자는 플롯 및 스토리의 전개와는 무관하게 감독이 관객에게만 직접 보여주는 위선의 실체에 대한 고도의 메타포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위성(衛星)의 태양' 정도가 될까. 그것은 또한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소격효과로도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드미트리의 등장으로 영화의 전반부는 세 사람간의 미묘한 삼각관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10여 년만에 재회한 드미트리와 마루샤 사이에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되살아나게 된다. 한편 세르게이는 두 사람의 과거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여섯 살 난 어린 딸 나디아와의 뱃놀이에만 온 신경을 쓴다. 흐르는 강물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 이들의 모습은 찬연한 햇살과 은빛여울의 후광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실제의 부녀지간이 펼쳐 보이는 가슴 뭉클한 명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처럼 짧은 행복한 시간은 그것이 더 이상 되풀이 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파토스를 자아내게 한다.
철모르는 나디아는 드미트리를 삼촌으로 알고 이내 그와 친해진다. 그런 나디아에게 드미트리는 자기가 젊었을 때 마루샤와 겪었던 첫사랑의 환희와 좌절담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해주며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한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그가 이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게이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의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 인가. 그리하여 그가 첫사랑만을 빼앗아 간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르게이에게는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멜로드라마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위선의 태양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드미트리는 연적(戀敵)으로서가 아니라 정적(政敵)으로 나타난 비밀경찰이었다. 딸의 배웅 속에 '이너 서클'로 압송되는 아버지. 이처럼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극에 달했던 지난 수년 동안 구소련에서는 무수한 아버지들이 혹은 어머니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사랑하는 딸 혹은 아들을 홀로 남겨둔 채로. 스탈린이 단행한 숙청의 결과 몇 사람이 살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2천만 명쯤은 될 것이라는 것이 대략적인 추산이다.
어쨌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압살하는 체제의 폭력을 이보다 더 섬뜩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선정적인 폭력장면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말이다. 미할코프 감독은 "이 영화를 혁명의 배반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바친다"고 했다.
◈ 인물 소개 (올렉 멘시코프 / 니키타 미할코프 는 러브오브 시베리아와 동일 인물)
마라 바샤로프 Filmography
2004년 제작
72 미터 (72 Meters / 72 Metra) / 표트르 역
2000년 결혼 (The Wedding / Svadba)
1994년 위선의 태양 (Utomlyonnye solntsem)
◈ 스탈린 (Ioseb Dzhugashvili)에 대해
출생 - 사망 : 1879년 12월 21일 (그루지야) - 1953년 3월 5일 (뇌출혈)
경력 : 1945년 소련 수상
1941년 인민위원회 의장(수상)
1941년 ~ 1945년 독소전쟁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일국(一國) 사회주의론 전개
1936년 스탈린 헌법 제정
레닌의 후계자로서 소련공산당 서기장·수상·대원수를 지냈다. 본명은 그루지야어로 Ioseb Dzhugashvili. 그루지야의 고리(Gori)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Mesame Dazi)’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캅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후 10년간에 체포 7회, 유형 6회, 도망 5회의 고초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으로 인정을 받아 1912년 당중앙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뷰로》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13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1917년 그곳에서 2월혁명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4월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어 제(諸)민족 공화국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인 ‘소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1919∼1922년 국가통제위원, 이어서 초대 당 서기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 동안 독재적으로 전(全) 소련을 통치하였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난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 서기장직에서 경질할 것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카(VCHK: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 이상의 자기 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유임을 인정받았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스탈린헌법’이 제정되었다. 스탈린헌법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 국제적 파시즘의 대두로 ‘대소전쟁(對蘇戰爭)’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하여 잇따른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G.E.지노비예프 등 반대파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군인·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투옥·제명되었다.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제기하여 소위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파시즘의 총구를 일시 서유럽 쪽으로 돌려놓았다. 1941년 V.M.몰로토프 대신에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을 겸하여 비로소 정치정면에 나섰는데, 그로부터 l개월 후에 독일의 기습을 받아 독·소전쟁(1941∼1945)에 돌입하였다.
그는 국방회의 의장, 적군(赤軍) 최고사령관이 되어 개전 초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임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 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또 테헤란·얄타·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 연합국(미국·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혀, 독일을 굴복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되어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였고 동구(東歐)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1953년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N.S.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유발하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1991년의 소련정변 이후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는 종전의 신(神)적 숭배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