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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 바울이었음을 고백하다
행 26:1-12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 26:1-12 / [바울의 자기 변론] 아그립바왕이 바울에게 `자, 그대에게 할말이 있거든 해보아라.' 하고 명하였다. 바울은 왕에게 경의를 표한 후에 해명을 하였다. 2) `아그립바 전하, 제가 전하 앞에서 이렇게 해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 전하께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에 정통하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끝까지 제 해명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4)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만, 저는 다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서, 그리고 커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로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습니다. 5) 또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저는 언제나 엄격한 바리새파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만일 그들이 마음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그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입니다. 제가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7)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저와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독 제게만 죄가 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8)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일입니까? 9) 한때 저도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10) 그래서 대제사장들의 앞잡이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처넣었으며 그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판결할 때는 그 일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습니다. 11) 저는 각지의 회당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모진 고문을 가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심지어는 이방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치게 되었습니다. 12) [개종 과정을 설명하는 바울] 제가 바로 그런 임무를 띠고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지령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갈 때였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변론의 시작 부분입니다. 자신의 무죄함과 예수의 복음을 아그립바 왕과 모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1-4)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자 바울의 변론이 시작됩니다. 먼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법적인 범죄행위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의 풍속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그리바왕은 이해할 것이라고 그를 추켜세웁니다. 이러한 칭찬을 통하여 자신을 향한 아그립바의 심리적인 방어벽을 허뭅니다. 아마도 아그립바 왕이 회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작심하고 복음의 진수를 전합니다.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5-8) 바울 자신의 간증으로부터 복음을 전합니다. 자기를 고소했던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울 자신이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일에 엄격한 바리새파였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변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현되었다고 증거한 것이 저들의 비위에 거리는 일이었고 그 결과 자신을 고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9-12)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예수를 반대하여 온갖 박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9). 그래서 먼저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고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 번 그들을 처벌했으며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해 다른 도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거의 회상은 바울의 부끄러운 과거사이기도 하고 자신을 변하게 만든 은혜에 대한 간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적용: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바울과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이었나요? 이 소망이 지금 우리에게도 왜 이토록 바라야할 주제인가요?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에서 단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옛 모습을 완전히 십자가에 내려놓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6:1
아그립바가...허락하노라 -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릉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25:22) 바울에대한 청문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행된다. 사실상 베스도가 자신은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그립바에게 일임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겠다. 바울이 손을 들어 - 바울의 항소가 받아들여진 이상 재판은 끝난 것이며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건 아니면 청중들의 호기심을 위해서건 다시 변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회를 자신의 무죄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보다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라는 표현은 21:40처럼 청중들을 조용하게 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연설을 시작하면서 예의(禮意)를 표시한 것이라고 본다. 가이사랴의 최고권력자들과 학식있는 자들이 위엄있게 앉아있는 자리앞에 사슬에 묶인 채(29절) 손을들어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은 차라리 비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26:2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24:10).그러나 여기서 아그립바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의례적인 인사 치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3절 주석 참조).
=====26:3
유대인의 모든 풍속...아심이니이다 - 2절에서 다행스럽다고 말한 이유이다. 아그리바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종교적인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설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베스도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볼 때 당시 바울의 심정은 상당히 답답하였으리라 본다. 바울은, 베스도가 이미 그에게 정치적인 죄를 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25:25), 더이상 그것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었고 여기서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변명하면 되었다(R.N. Longenecker).
=====26:4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 - '생활한 상태'로 번역된 '비오시스'(* )는 '생활 방식'(manner ofLife, KJV)을 뜻한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다(22:3). 바울이 구체적인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유대 사회에 두루 알려져 있는 바임을 힘주어 말한 것은 그의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먼저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26:5
우리 종교 - '종교'로 번역된 '드레스케이아'(* )는 '경건하다'는 뜻인 '드레스코스'(* )에서 유래한 말로 단순한 외적 의식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내적 경건성까지 내포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 종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한것은 아그립바와 자신의 동족성(同族性)을 은연중 확인시킴으로써 공감대를 넓혀 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며(4절의 '다 아는 바라'는 말과 연결됨) 또한 그곳에 있는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 의도도 엿보인다. 가장 엄한 파...바리새인 - 이는 바울이 한때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않게철저했음을 말하기 위한 진술이다.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갈 1:13, 14;빌 3:5, 6). 실제로 바울은 힐렐(Hillel)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받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26:6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 바울은 과거에 대한 언급을 간단하게 끝내고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주목하게 한다.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란다 함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느날 갑자기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뿌리를둔 것임을 의미한다. 그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명료(明瞭)하게 언급되지는 않고 있으나 메시야와 부활에 관한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8, 23절). 다시말해서 바울은, 구약의 언약들과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도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성취를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맞춰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6:7
열 두 지파...이 소망을 인하여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은 전체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것인 바, 이 소망을 인하여 다른민족이 아닌 바로 유대인에게 송사를 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바울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25:25)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음을 먼저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소망'이라는 말은 바울의 변호연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어이다(23:6;24:15;28:20).
=====26:8
당신들은...여기나이까 - 여기서 '당신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분명치 않다. 바울이 유대교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을 이교도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자리에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외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이 질문은 그 특유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증을 보여준다. 즉만일 그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부활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라고 하는 일반론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긍정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진정한 초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맞춰져 있음은 물론이다(H. Marshall)
=====26:9
나도 나사렛...행하여야 될 줄 - 여기서 '나도'(* )는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했던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도극적인 변화를 받았듯이 반대자들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려는준비 작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反轉)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강렬한 인상과 설득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잘활용하고 있다(22:3, 4;딤전 1:13).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가져오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원만하고 점진적인 신앙을 키워가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바울의 경우에는 극적인 전환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강한 설득력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하여야 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인'(* )은 어떤 필요성이나 의무를 뜻하는 비인칭 동사 '데이'(* )의 부정사로서, 바울이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종교적 의무감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26:10
가편 투표를 하였고 -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가편 투표를하였고'(* , 카테넹카 프세폰)를 직역하면 '자갈(검은색)을 아래로 던졌고'가 된다. 이 표현은 고대에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하였다는 진술은 이곳이 처음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바울이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Robertson, Meyer, Holtzmann). 그러나 산헤드린의 회원이되려면 일단 기혼자로서 30살이 넘어야 했는데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점과, 자기의 바리새인됨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그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음을 말한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그러한 추측에 회의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혹자는 본문을온유적인 표현으로 보아 '찬동하다'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Jackuier). 이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26:11
모든 회당에서...형벌하여 -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 내에 있는 회당들을 가리키는 듯하며(Bruce, Haenchen),형벌'은 당시에 회당 형벌로 관례화 되어 있던 채찍질을 가리킬 것이다. 강제로 모독하는 말 - 이것은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강제로...하게 하고'의'에낭카존'(* )이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바울의 시도가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보는 견해가있다(Bruce, Robertson). 어떤 특정한 집단을 탄압함에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대 수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다. 또한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젊은 플리니(Pliny)의 보고서에는, 만약 기독교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그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기록되어 있다(Epistle X. 96). 외국 성까지도 -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유대지역 밖으로 나간 것으로 언급된곳은 다베섹 뿐이었다(9:2;22:5). 그렇다면 '외국성'은 다메섹으로서 출장을 강조하여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Haenchen) 핍박하였고 - 헬라어 '에디오콘'(* )은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가진 '디오코'(* )의 미완료형으로, 반복되는 핍박 시도를 뜻한다.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참으로 지독한 정도였으며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나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았다.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26:12
그 일로...권세와 위임을 받고 - '그일'이란 '그 용건', '그 목적' 즉 그리스도인들을 발본 색원(拔本塞源)하는 일을 뜻한다. 본절에서부터 바울은 자기 생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결정적 순간을 다시 언급한다. 이 진술은 9:1-19와 22:6-21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하며 주된 이야기의 흐름은 동일하나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1-23절 주제 강해'바울의 회심 기사 비교 연구' 참조). 이러한 차이점은 이야기하는 당시의 상자황이나청취자에따라 강조점을 다소 변화시켜 서술하는 누가의 문학적인 역량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H. Marshall). 한편 본절에서 드러난 차이점을 보면 9:2;22:5에는 사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로부터 '권세와 위임'을 받은 것으로 표현된다. 본절의 표현이 더 강렬한 인상을준다.
< 설 교 >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바울
사도행전 26:1-18 / 서금석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말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선택가능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옛날보다 선택 가능성의 폭이 훨씬 넓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베스킨 라빈스31(Baskin Rabins thirty one)"이라는 아이스크림 전문 체임점 아시지요? 종류대로 모두 다 먹어본 사람 있으세요? 얼마나 종류가 다양합니까? 그런데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먹는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의식주뿐만 아니라 성(成)도 선택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트랜스젠더(transgender)-성전환수술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성을 거부하고 다른 성을 선택합니다. "하리수"라고 아십니까? 요즘 매스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지요? 성전환 수술자입니다. 얼마 전에는 영화를 찍었는데, 이제 안방 드라마에도 출현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드러낼 수 없었는데, 이제는 떳떳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 더 나은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이를 용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역행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극도의 교만이며, 자기 기만입니다.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性)도 선택할 수 있으니, 뭐든지 다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에 선택될 수 없는 것,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사명은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명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은 반드시 감당해야 합니다. 100주년 성전 봉헌 예배를 내일 드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 속에 주어지는 사명"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의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전도의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헌신하고자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먼저) 바울 변론의 특색(에 대해 함께 생각합니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인사차 오자, 베스도 총독은 유대 문제에 능통한 유대의 아그립바 왕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아그립바 왕과 바울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몇 번째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섯 번째입니다. 참 오래 동안 끌고 있는 재판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고소되어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벌써 다섯 번째를 맞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전을 모독했으며, 더 나아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꾸몄다고 고소함으로써 죽이려 했고 이에 대해 바울은 분명한 논리와 증거로 자신이 무죄임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못하고 이제 아그립바 왕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석방되지 못하면서도 같은 변론만 되풀이 하는 것이 울화가 치밀수도 있고 몹시 짜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억울하다고 스스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변론하는 것을 지겹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보세요.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뭐라구요? 바울은 자신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그립바 왕의 장점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자꾸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느냐? 분명히 무죄가 아니냐? 빨리 석방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잘 보여서 목숨을 구걸하려구요? 자신이 분명하게 변론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바울에게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잔인했던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재판을 받을 때마다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하기 보다는 그 순간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을 수 있는 바울의 항소를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다구요? 바로,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각 중에 잘못된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전도는 기회를 살펴서 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여건이 될 때에만 복음을 증거 했습니까? 아니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항상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니깐, 이때 해야지!', '저 사람은 바쁘니까, 나중에 와서 전도해야지', '지금 나는 시장 가야 하니까, 돌아오면서 해야지!', '지금 상사가 일을 시켰으니까, 끝마친 다음에 전도해야지' 이렇게 핑계되기 시작하면, 평생가도 전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일이 사명보다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나에게 무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4절부터 계속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변론 시간을 통해서 아그립바 왕과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바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 도 있는 자리입니다. 말 한마디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변론 시간을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닫게 된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사명이라 여겼기에 지겹다고 생각지 않고 계속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을 깊이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명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예수 부활 - 왜 못 믿느냐?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그리고 아그립바 왕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도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 부활 왜 못 믿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나를 지금 송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부활 신앙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저들이 믿는 바와 같이 부활신앙에 근거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9절부터는 바울의 간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어떤 사람이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한 때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열정이 어떠했습니까? 단순히 예루살렘에서만 핍박했습니까? 아니지요. 10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 있어서는 제1인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함에 있어 옥에 가두는 것은 일수이고, 죽이는 일에도 찬성하였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11절 말씀을 보니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다는 것"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부여받고 다메섹까지 갑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컸으면, 그 먼길을 선뜻 가려고 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바울의 열정은 11절의 "핍박하였고"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핍박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에디오콘(?δ?ωκον)'으로써,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와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이 지독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핍박하는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보다 더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변화됐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누가 바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될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만나니까, 예수 믿으니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삶의 목적과 비전이 바뀌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미국 LA Dodgers에는 강타자 셰필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불행한 야구선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안고 운동장에 찾아와 셰필드를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셰필드는 요즈음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모범 선수로 불립니다. 그는 화려한 플레이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2년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가스펠 가수인 아내 디레온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내의 내조와 기도에 힘입어 마음의 안정을 찾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변화의 모든 공로를 아내에게 돌립니다. "디레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 비로소 삶의 의미와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 믿는 한 여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했던 것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이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돈에 좌우되는 인생이 아닙니다. 권력에 좌우되는 인생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은 매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나고자 힘쓰시길 바랍니다. 만나야 합니다. 매일 만나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매일 매일 예수님 만나는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간증 - 주께 포로된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살펴 볼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봅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주지요? 또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 시점이 '정오'라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밤에 만났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마도 "꿈꿨겠지"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한 낮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더 나아가 "햇빛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고 말합니다. 장렬하게 내리쬐는 대낮에 그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는 것 역시 바울이 체험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정오'라든가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체험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빛이 자신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동행들에게도 비추었다고 사실입니다.
14절을 봅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가시채'라는 것은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킵니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찌르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네가 지금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네게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 되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예수의 사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보다 강권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 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우선 '일어나 네 발로 서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불러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끔 주님께서 불러 당신의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부르실 때도,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왜 잣니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한 마디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는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을 증거하는 일이기는 할터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7-18절 말씀을 봅니다.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과,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여 그들도 죄 사함과 나의 축복을 누리게 하겠다" 바울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단의 권세에 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사명입니까? 우리의 사명은 아닙니까? 바울처럼 공부도 많이 하고 가문도 좋고 열심있는 사람만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바울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책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비켜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세요. 지금 이 자리에 예배드리기 위해 오신 모든 분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습니까? 사명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명입니까? 영혼 구원의 사명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세상의 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많은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아직도 "예수 믿으세요" 한번 전하지 못했다면,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신앙생활이 말도 못하게 부실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명,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전하다가 맞는 것에도 이골이 났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런 일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명이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섯 번째 재판을 받는 바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체험 -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 증거는 사명입니다. 사명은 명령입니다. 명령에는 순종해야 하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먹을 것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입을 것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살 곳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살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의 사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싫다고, 부끄럽다고, 어색하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왜 부르셨다구요? 복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전하기 위해서.
내일은 100주년 기념 교회 봉헌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께 드립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물질만 드리겠습니까? 시간만 드리겠습니까?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만 만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영혼 구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님들 먼저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 우리 모두에게 남은 사명은 전도입니다. 영혼구원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바울과 같이 일평생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시길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그런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성도 여러분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인도하심과 축복이 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이준원 목사 / 행 26장 1~12절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려면 사법고시만 합격하거나, 요즘은 사법고시가 폐지되었으니까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야 하고, 판사나 검사 보조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교 4년에 신학대학원 3년을 거치면서, 그 사이 전도사도 하고 최소 몇 년 동안의 수습목회자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특히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한 후에 잡힌 바울의 삶을 보면, 마치 요즘 변호사 훈련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당시에는 국선변호사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바울은 법정에 서면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기회만 되면 변호의 기회를 살려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미 25장(8-11절)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논리정연하게 자신을 잘 변호했고, 총독이 유대인 고위직들의 눈치를 보느라 위험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해서 로마법에 따른 보호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이방인 로마 행정관 앞에서 자신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에 무죄라는 사실에 대한 변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26장에서는 유대 통치자인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기가 로마법뿐 아니라 유대 종교법에 의해서도, 즉 종교적으로도 무죄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장의 핵심은 같지만 그 전개하는 방식이 약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바울의 자기변호 서론 (1~3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1절)
“네게 허락하노라”라는 이 말만 보면 저는 저희 집에 있는 개가 생각납니다. 저희 집 개가 ‘네가 나를 만지기를 허락하노라’ 하는 뜻으로 앞발을 척 내밉니다. 그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라고 합니다. 허락을 안 하면 말을 못합니까? 아그립바는 자기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로부터 재판권을 넘겨받은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마치 여기서 자기가 주심 판사가 된 것처럼 행동하여 바울에게 변호권을 허락하는 모습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이 고발되어 자신의 재판권 하에 들어왔으면 총독은 법에 따라 소신껏 재판하면 됩니다. 그리고 피고가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했으니까 로마의 황제 법정으로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유대 통치자 아그립바 왕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려고 하다가, 아주 잠시이긴 하지만 자신의 로마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권한이 없는 아그립바에게 넘겨주는 형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여서 그랬는지, 그래도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나 교회도 어떤 사람에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이렇게 당사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발하고 모함하는 것을 듣다 보면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냥 죄인이라고 취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합당한 증거를 요구하고 또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도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와서 B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 사람이 형편없다, 못됐다, 잘못했다고 합니다. 정도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욕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은근히 비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칭찬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에게서 B의 이야기를 들으면 B라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A에게 동조해버립니다. ‘아, B는 못된 사람이구나. 어울리면 안 되겠네.’ 하고 판단을 바로 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보통 사회의 시민으로서도 그런 태도를 배격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만약 내 앞에 와서 여기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남 앞에 와서 왜 쓸데없이 거기 있지도 않은 사람의 험담을 합니까? 칭찬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험담을 한다면, 사실은 A가 B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다른 사람 욕을 했다면, 그 사람이 정말 못된 것이 아니라 내게 말해주는 이 사람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B에게 가면 또 그 앞에서 내 욕을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면서도 거기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전혀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우리 개인의 삶에도 있고 정치계에도 있고 아주 많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결정권자 앞에서 자기 입장을 말할 기회가 있어서 그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 변명이야?”라고 하면서 기회도 안 주며 몰아붙이는 것은 비민주적일 일이고, 억울한 모함을 받아서 힘든 사람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삶>이나 <말씀의 삶>이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 뜻대로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잘 헤아릴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들어보지도 않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나, 설명을 해도 무시하며 안 듣겠다고 하면, 여기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 2세만도 못한 사람은 아닌가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아그립바 2세가 휴머니즘에 의해서 뭔가 정의롭게 해보려 시도는 하지만,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가 정의로운 판정을 내릴 것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재판관 앞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피의자인 바울이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2-3절)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 자기를 변호하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그립바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또 아그립바 왕을 유대의 풍속과 여러 문제와 쟁점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라고 인정해주는 예의 바른 자세로 자기변호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아부한 것과 같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 즉 굉장히 좋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판사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판결을 내려도 불복하며 소리 지르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아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사가 판결을 내리면 훌륭한 판사라고 칭찬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과거에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고 파헤치면서 형편없는 판사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사실은 판사 앞에서 그렇게 불신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세입니다. 물론 인간 판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판사에게 겸손한 자세와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판사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끔 비행기를 탈 때 딜레이 되거나 항공편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씨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는데, 취소되면 다음 항공편으로 가야 하니까 줄을 엄청나게 길게 섭니다. 전화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막 소리 질러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경험이 있으십니까? 소리를 질러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요즘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객으로서 권리는 찾아야 합니다. 항공사가 잘못했으면 그것에 대해 받아낼 필요는 있습니다. 오래 전에 누구를 배웅할 때 뉴욕에서 항공편이 결항되었는데, 항공사에서 잘 안 해주려 하고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라는 식으로 권유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막 소리를 치며 이래서 되겠느냐고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조금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항공사가 잘 해주려고 하는데 거기서 막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거기서 일을 보는 사람이 자기 잘못도 아니지만 항공사를 대표해서 일하다가 자기도 인간이라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이 나빠지면 또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공손하고 친절하게 하는 사람에게 끌리게 됩니다. 공손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면 분명히 들어줄 겁니다.
특히 그런 경우가 생길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뭔가 하면 바로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봐주십시오.’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상을 받았다 아닙니까? 기체 결함이면 보상해주지만 날씨 때문이면 보상을 안 해줍니다.
전에 아들과 같이 여행을 가려 하는데 날씨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고 다음 날 가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공항에 있었기에 하도 기가 막혀서 그냥 전화를 했습니다. 보상을 받을 수도 없지만 그냥 고객서비스에 전화를 해서 하소연했습니다. “내가 어린 아들과 모처럼 휴가를 내서 뉴욕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몇 시간씩 기다리다 이렇게 되어 너무 힘듭니다.” 그랬더니 “규정에 의하면 원래 안 되는데 사정이 딱하군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certificate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불쌍하게 보인 덕분에 보상도 받았습니다. 받든 못 받든,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바울의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
1) 젊은 시절 (4~5절)
바울이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 사실이 없음은 이미 총독 베스도가 확인해주었습니다(25:25). 그래서 다시 그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자기를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라 종교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그의 논증의 출발점은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도 바울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4-5절)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부터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들이 다 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박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처음부터 내 민족과 힘께 예루살렘 생활을 했다’는 것은, 21장 39절에 나오듯이,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또 다른 속주 길리기아의 다소 시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 성에서 십대 소년 시절부터 자라며 유대교에서 율법적으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5). 그것은 22장 3절에서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했던 자신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 유학을 온 해외 유학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엄격한 바리새파 율법을 따라 교육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 앞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이들도 일찍이 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대교 신앙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2) 전통에 충성했던 시절 (6~8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6-7절)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 문제에 대해 고발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를 한 걸음 더 파고 들어가며 변론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자신이 심문 받는 문제의 핵심을 그는 약속에 대한 해석과 기대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들의 조상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던 우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고 산 것이 아니냐?’ 하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유대 민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새 이스라엘로서 시작된 교회를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과 2장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굳이 “우리 열두 지파”의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물론 모든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새 이스라엘의 시작이 자신의 사역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고 섬김으로 얻기 바라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라고 7절에서 강조합니다.
이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시고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물론 예수님을 아직 안 믿는 분들은 그냥 다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경우, 왜 교회에 나오고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소망하는 바와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왜 교회에 다니고, 왜 성경을 읽고, 왜 기도하고, 왜 예배하는가?’ 이것을 잘 생각하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로 이 소망, 즉 구약 때부터 예언된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고 재판관으로 앉아 있는 아그립바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면 그 소망의 핵심이 무엇인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8절)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변호하면서 바울은 앞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핵심인 부활(23:6; 24:15) 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합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으신 것을 왜 못 믿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자신을 줄곧 고발해왔던 이스라엘 최종 결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크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 훈련을 받아서 속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부활과 내세와 영과 천사를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23장 68절에서 본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는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부활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처럼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를 비롯하여 로마 당국에 빌붙어서 특권을 누리던 사두개파를 향해서 “당신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을 수 없는 으로 여기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그들의 신앙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로마 총독 법정에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믿고 복 받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번영을 이루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신앙의 체계나 교리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죄 때문에 이 땅에 어린 아기로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다가 대신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부활을 통해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이 부활 사건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도 핵심이 부활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고 변화된 후에 나가서 전할 때, 그들과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나 ‘예수 천당’이 아니었습니다. ‘이 예수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구원자)이시고, 여러분이 죽였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부활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을 전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삶이 변화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3)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 (9~12절)
물론 바울도 자기가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전에 이것을 모를 때 어떻게 살았는지 다시 설명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9-10절)
바울의 자기변호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바리새파 신앙의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는데, 나중에 뒷부분에 나오지만, 그러다 그 예수를 자기가 만나서 회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를 만나면 부활의 문제가 해결되고 무엇이 정말 진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바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열심, 즉 하나님 신앙을 빙자한 종교주의와 형식주의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이곳의 연합부흥성회에 유일하게 두 번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김동호 목사님이신데, 첫 번째 오셨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이시라 여기저기 집회에 불려 다니십니다. 한 번은 우리처럼 한국에서 연합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초청받아 갔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지역 연합집회였는데 한 목사님이 “오늘은 제가 냅니다.” 하고 강사님을 모시고 다른 목사님들도 함께 어느 식당으로 갔습니다.
강사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가니까 강사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좋은 데 갑니다. 목사님, 가보시면 압니다.”라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영양탕(보신탕) 집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데였습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은 안 드시는 분입니다. 안에 들어가니까 다른 목사님들도 다 있고, 음식이 나오니까 다들 정신없이 막 먹었습니다. 강사님이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도 모르고 다들 마구 먹었습니다. 다 먹고 나서 “목사님, 잘 드셨죠?”라고 하니까, 먹는 시늉만 했던 강사 목사님은 “예, 예”라고 했습니다. 그날 대접한 목사님은 교회로 영수증을 들고 가서 청구를 합니다. 청구 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강사접대’입니다. 그런데 강사가 접대를 받았습니까? 전혀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강사님은 개고기를 안 드시는 분인데, 본인들이 좋아하니까 막 시켜서 다 먹어놓고 ‘강사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강사님은 좋아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쫄쫄 굶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강사를 잘 대접했다.’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이런 신앙생활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하며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데, 정작 주님은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라고 하신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로 그런 생활을 바울이 했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마구 달렸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로 갔었다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 속에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눈을 뜨고 세례를 받고 나서 완전히 사람이 변화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지금도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겪었던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가 열심히 많은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고 그것을 잘못 배워서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금도 바로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일 하나가 벌어졌을 때, 그것을 보는 나의 시각은 어떤 시각입니까?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크리스천으로서 성경적 시각으로 지금 돌아가는 이 일을 보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내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못 믿느냐고 했는데, 사실은 못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받아들이며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주님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안 믿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무신론자라면, 안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도 오래 전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을 가졌을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틀렸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요 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요 6:59)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이 회심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를 행하는 종교적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뭔가를 믿고 있습니다. 그 믿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강요할 때 문제가 됩니다. 요즘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굉장히 비난을 많이 받는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점들을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잘하는 것은 뉴스에 잘 안 나오고, 잘못하는 것만 자꾸 나오니까 더 욕을 먹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잘못된 주장들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확신이고 주장인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위한 어떤 종교적 열심, 즉 ‘내가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태도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1-12절)
바울에게는 그 열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당시에는 나사렛 도당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사형시켰고, 그것도 모지라 외국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열심히 잡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자신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같이 한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절과 12절에서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일에 함께 했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증인 아니냐?’라고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유대교에 열심을 가지고 마구 교회를 핍박하던 내가 왜 바뀌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보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사랑하는 삶이다
결국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그대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내 생각, 내 주장, 내가 원하는 성향으로 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뒤의 14절에 나오지만,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이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 되고 소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미 17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 바른 믿음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관계’인데, 그 관계가 결국은 ‘사랑’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만약 내 삶에 사랑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냉랭할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사람, 옆에만 가도 찬 기운이 뿜어 나오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핵심이 사랑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하겠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을 원하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희생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오늘 예배당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다음 주 돌아올 때까지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행26장 1-12절 /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려면 사법고시만 합격하거나, 요즘은 사법고시가 폐지되었으니까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야 하고, 판사나 검사 보조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교 4년에 신학대학원 3년을 거치면서, 그 사이 전도사도 하고 최소 몇 년 동안의 수습목회자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특히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한 후에 잡힌 바울의 삶을 보면, 마치 요즘 변호사 훈련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당시에는 국선변호사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바울은 법정에 서면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기회만 되면 변호의 기회를 살려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미 25장(8-11절)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논리정연하게 자신을 잘 변호했고, 총독이 유대인 고위직들의 눈치를 보느라 위험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해서 로마법에 따른 보호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이방인 로마 행정관 앞에서 자신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에 무죄라는 사실에 대한 변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26장에서는 유대 통치자인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기가 로마법뿐 아니라 유대 종교법에 의해서도, 즉 종교적으로도 무죄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장의 핵심은 같지만 그 전개하는 방식이 약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바울의 자기변호 서론 (1~3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1절)
“네게 허락하노라”라는 이 말만 보면 저는 저희 집에 있는 개가 생각납니다. 저희 집 개가 ‘네가 나를 만지기를 허락하노라’ 하는 뜻으로 앞발을 척 내밉니다. 그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라고 합니다. 허락을 안 하면 말을 못합니까? 아그립바는 자기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로부터 재판권을 넘겨받은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마치 여기서 자기가 주심 판사가 된 것처럼 행동하여 바울에게 변호권을 허락하는 모습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이 고발되어 자신의 재판권 하에 들어왔으면 총독은 법에 따라 소신껏 재판하면 됩니다. 그리고 피고가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했으니까 로마의 황제 법정으로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유대 통치자 아그립바 왕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려고 하다가, 아주 잠시이긴 하지만 자신의 로마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권한이 없는 아그립바에게 넘겨주는 형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여서 그랬는지, 그래도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나 교회도 어떤 사람에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이렇게 당사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발하고 모함하는 것을 듣다 보면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냥 죄인이라고 취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합당한 증거를 요구하고 또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도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와서 B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 사람이 형편없다, 못됐다, 잘못했다고 합니다. 정도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욕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은근히 비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칭찬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에게서 B의 이야기를 들으면 B라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A에게 동조해버립니다. ‘아, B는 못된 사람이구나. 어울리면 안 되겠네.’ 하고 판단을 바로 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보통 사회의 시민으로서도 그런 태도를 배격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만약 내 앞에 와서 여기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남 앞에 와서 왜 쓸데없이 거기 있지도 않은 사람의 험담을 합니까? 칭찬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험담을 한다면, 사실은 A가 B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다른 사람 욕을 했다면, 그 사람이 정말 못된 것이 아니라 내게 말해주는 이 사람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B에게 가면 또 그 앞에서 내 욕을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면서도 거기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전혀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우리 개인의 삶에도 있고 정치계에도 있고 아주 많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결정권자 앞에서 자기 입장을 말할 기회가 있어서 그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 변명이야?”라고 하면서 기회도 안 주며 몰아붙이는 것은 비민주적일 일이고, 억울한 모함을 받아서 힘든 사람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삶>이나 <말씀의 삶>이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 뜻대로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잘 헤아릴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들어보지도 않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나, 설명을 해도 무시하며 안 듣겠다고 하면, 여기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 2세만도 못한 사람은 아닌가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아그립바 2세가 휴머니즘에 의해서 뭔가 정의롭게 해보려 시도는 하지만,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가 정의로운 판정을 내릴 것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재판관 앞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피의자인 바울이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2-3절)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 자기를 변호하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그립바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또 아그립바 왕을 유대의 풍속과 여러 문제와 쟁점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라고 인정해주는 예의 바른 자세로 자기변호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아부한 것과 같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 즉 굉장히 좋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판사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판결을 내려도 불복하며 소리 지르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아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사가 판결을 내리면 훌륭한 판사라고 칭찬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과거에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고 파헤치면서 형편없는 판사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사실은 판사 앞에서 그렇게 불신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세입니다. 물론 인간 판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판사에게 겸손한 자세와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판사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끔 비행기를 탈 때 딜레이 되거나 항공편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씨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는데, 취소되면 다음 항공편으로 가야 하니까 줄을 엄청나게 길게 섭니다. 전화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막 소리 질러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경험이 있으십니까? 소리를 질러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요즘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객으로서 권리는 찾아야 합니다. 항공사가 잘못했으면 그것에 대해 받아낼 필요는 있습니다. 오래 전에 누구를 배웅할 때 뉴욕에서 항공편이 결항되었는데, 항공사에서 잘 안 해주려 하고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라는 식으로 권유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막 소리를 치며 이래서 되겠느냐고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조금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항공사가 잘 해주려고 하는데 거기서 막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거기서 일을 보는 사람이 자기 잘못도 아니지만 항공사를 대표해서 일하다가 자기도 인간이라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이 나빠지면 또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공손하고 친절하게 하는 사람에게 끌리게 됩니다. 공손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면 분명히 들어줄 겁니다.
특히 그런 경우가 생길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뭔가 하면 바로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봐주십시오.’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상을 받았다 아닙니까? 기체 결함이면 보상해주지만 날씨 때문이면 보상을 안 해줍니다.
전에 아들과 같이 여행을 가려 하는데 날씨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고 다음 날 가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공항에 있었기에 하도 기가 막혀서 그냥 전화를 했습니다. 보상을 받을 수도 없지만 그냥 고객서비스에 전화를 해서 하소연했습니다. “내가 어린 아들과 모처럼 휴가를 내서 뉴욕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몇 시간씩 기다리다 이렇게 되어 너무 힘듭니다.” 그랬더니 “규정에 의하면 원래 안 되는데 사정이 딱하군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certificate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불쌍하게 보인 덕분에 보상도 받았습니다. 받든 못 받든,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바울의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
1) 젊은 시절 (4~5절)
바울이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 사실이 없음은 이미 총독 베스도가 확인해주었습니다(25:25). 그래서 다시 그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자기를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라 종교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그의 논증의 출발점은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도 바울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4-5절)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부터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들이 다 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박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처음부터 내 민족과 힘께 예루살렘 생활을 했다’는 것은, 21장 39절에 나오듯이,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또 다른 속주 길리기아의 다소 시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 성에서 십대 소년 시절부터 자라며 유대교에서 율법적으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5). 그것은 22장 3절에서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했던 자신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 유학을 온 해외 유학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엄격한 바리새파 율법을 따라 교육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 앞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이들도 일찍이 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대교 신앙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2) 전통에 충성했던 시절 (6~8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6-7절)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 문제에 대해 고발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를 한 걸음 더 파고 들어가며 변론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자신이 심문 받는 문제의 핵심을 그는 약속에 대한 해석과 기대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들의 조상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던 우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고 산 것이 아니냐?’ 하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유대 민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새 이스라엘로서 시작된 교회를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과 2장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굳이 “우리 열두 지파”의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물론 모든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새 이스라엘의 시작이 자신의 사역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고 섬김으로 얻기 바라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라고 7절에서 강조합니다.
이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시고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물론 예수님을 아직 안 믿는 분들은 그냥 다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경우, 왜 교회에 나오고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소망하는 바와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왜 교회에 다니고, 왜 성경을 읽고, 왜 기도하고, 왜 예배하는가?’ 이것을 잘 생각하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로 이 소망 즉 구약 때부터 예언된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고 재판관으로 앉아 있는 아그립바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면 그 소망의 핵심이 무엇인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8절)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변호하면서 바울은 앞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핵심인 부활(23:6; 24:15) 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합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으신 것을 왜 못 믿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자신을 줄곧 고발해왔던 이스라엘 최종 결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크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 훈련을 받아서 속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부활과 내세와 영과 천사를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23장 68절에서 본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는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부활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처럼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를 비롯하여 로마 당국에 빌붙어서 특권을 누리던 사두개파를 향해서 “당신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을 수 없는 으로 여기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그들의 신앙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로마 총독 법정에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믿고 복 받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번영을 이루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신앙의 체계나 교리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죄 때문에 이 땅에 어린 아기로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다가 대신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부활을 통해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이 부활 사건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도 핵심이 부활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고 변화된 후에 나가서 전할 때, 그들과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나 ‘예수 천당’이 아니었습니다. ‘이 예수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구원자)이시고, 여러분이 죽였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부활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을 전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삶이 변화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3)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 (9~12절)
물론 바울도 자기가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전에 이것을 모를 때 어떻게 살았는지 다시 설명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9-10절)
바울의 자기변호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바리새파 신앙의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는데, 나중에 뒷부분에 나오지만, 그러다 그 예수를 자기가 만나서 회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를 만나면 부활의 문제가 해결되고 무엇이 정말 진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바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열심, 즉 하나님 신앙을 빙자한 종교주의와 형식주의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곳의 연합부흥성회에 유일하게 두 번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김동호 목사님이신데, 첫 번째 오셨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이시라 여기저기 집회에 불려 다니십니다. 한 번은 우리처럼 한국에서 연합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초청받아 갔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지역 연합집회였는데 한 목사님이 “오늘은 제가 냅니다.” 하고 강사님을 모시고 다른 목사님들도 함께 어느 식당으로 갔습니다.
강사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가니까 강사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좋은 데 갑니다. 목사님, 가보시면 압니다.”라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영양탕(보신탕) 집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데였습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은 안 드시는 분입니다. 안에 들어가니까 다른 목사님들도 다 있고, 음식이 나오니까 다들 정신없이 막 먹었습니다. 강사님이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도 모르고 다들 마구 먹었습니다. 다 먹고 나서 “목사님, 잘 드셨죠?”라고 하니까, 먹는 시늉만 했던 강사 목사님은 “예, 예”라고 했습니다. 그날 대접한 목사님은 교회로 영수증을 들고 가서 청구를 합니다. 청구 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강사접대’입니다.
그런데 강사가 접대를 받았습니까? 전혀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강사님은 개고기를 안 드시는 분인데, 본인들이 좋아하니까 막 시켜서 다 먹어놓고 ‘강사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강사님은 좋아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쫄쫄 굶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강사를 잘 대접했다.’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이런 신앙생활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하며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데, 정작 주님은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라고 하신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로 그런 생활을 바울이 했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마구 달렸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로 갔었다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 속에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눈을 뜨고 세례를 받고 나서 완전히 사람이 변화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지금도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겪었던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가 열심히 많은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고 그것을 잘못 배워서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금도 바로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일 하나가 벌어졌을 때, 그것을 보는 나의 시각은 어떤 시각입니까?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크리스천으로서 성경적 시각으로 지금 돌아가는 이 일을 보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내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못 믿느냐고 했는데, 사실은 못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받아들이며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주님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안 믿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무신론자라면, 안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도 오래 전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을 가졌을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틀렸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요 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요 6:59)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이 회심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를 행하는 종교적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뭔가를 믿고 있습니다. 그 믿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강요할 때 문제가 됩니다. 요즘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굉장히 비난을 많이 받는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점들을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잘하는 것은 뉴스에 잘 안 나오고, 잘못하는 것만 자꾸 나오니까 더 욕을 먹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잘못된 주장들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확신이고 주장인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위한 어떤 종교적 열심, 즉 ‘내가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태도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1-12절)
바울에게는 그 열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당시에는 나사렛 도당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사형시켰고, 그것도 모지라 외국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열심히 잡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자신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같이 한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절과 12절에서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일에 함께 했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증인 아니냐?’라고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유대교에 열심을 가지고 마구 교회를 핍박하던 내가 왜 바뀌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보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사랑하는 삶이다
결국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그대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내 생각, 내 주장, 내가 원하는 성향으로 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뒤의 14절에 나오지만,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이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 되고 소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미 17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 바른 믿음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관계’인데, 그 관계가 결국은 ‘사랑’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만약 내 삶에 사랑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냉랭할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사람, 옆에만 가도 찬 기운이 뿜어 나오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핵심이 사랑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하겠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을 원하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희생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오늘 예배당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다음 주 돌아올 때까지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양향모목사 / 행 26:1-8
오늘부터 몇 시간 우리가 살펴볼 26장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과 그리고 유력 인사들 앞에서 자신이 고발을 당한 내용에 대해서 변호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호를 시작하면서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본격적으로 변론을 하기 직전에 서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변명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폴로게오마이’(ἀπολογέομααι)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변명이라는 단어보다는 ‘변호’나 ‘변증’이나 ‘변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명이라고 번역을 한 것은 원래 변명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고 변명이라고 번역을 했을 것입니다. 변명의 뜻은 “옳고 그름을 가려서 사리를 밝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을 알고 변병으로 읽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명이라고 하면 그것보다도 또 다른 뜻인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이라는 뜻을 보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잘못하고 그 실수에 대해서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디펜스(defense)로 번역을 했습니다. ‘방어, 혹은 수비’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혼자 외롭게 수많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방어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특별히 복음을 알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에 대해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더러는 비웃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를 방어를 하고 변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알고 믿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그 믿음이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세력이 시시때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아야 복을 받지 어떻게 믿는다고 복을 받느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지 있을지도 모르는 천국이니 부활이니 영생이니 그런 것을 어떻게 믿느냐?…….
우리 자신도 참 연약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다가도 몸이 좀 아프거나, 살기가 힘들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반대로 너무 잘되거나, 돈이 많아지고 세상사는 재미가 늘어나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매 주일 교회에 와서 이런저런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고 배우는 것은 이런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세상 것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도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를 더 확실하게 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서 오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본문 1-2절 말씀에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사건을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급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그랍바왕이나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0여 년 동안 세계로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또 틈만 있으면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만 해도 길고 짧은 바울의 설교 아홉 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는 아홉 편이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설교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이 자리는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최고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인 아그립바와 그의 여동생이 있었고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파송한 최고의 지도자인 베스도 총독과 그의 부하들인 천부장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가 고위공직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28장에 가면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고 높은 사람들이 재판관처럼 배석하고 있는 이런 자리에서의 설교는 오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히게 되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왔었습니다.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내일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마음을 조금은 이해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디 가서 목사님들이나 성도님들에게 이 복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저 같은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복음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면 바울 이전에도 이후에도 바울과 같이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그 모습을 본 사람입니다. 자신도 그 천국에 가서 그 황홀한 천국의 모습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꾸며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없이 긴가민가하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남을 속여서 뭔가를 얻기 위한 장사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직접 보고들은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귀찮게 하거나 겁을 주거나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죄에 관한 문제 죽음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간단하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듣고 믿기만 하면 엄청난 것을 얻는 너무나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전하고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질 때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서로 만날 때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 자랑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강단에 서면 무엇보다도 이 복음을 먼저 이야기 하고 이 복음을 최고의 것으로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본문 3-6절에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고발에 대해서 변호를 하면서 우선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인으로 율법을 바르게 배우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낸 바리새파 사람임을 확인했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했습니다. 바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라는 곳입니다. 지금의 터키 남부지방입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은 예루살렘이었고 그것은 유대인들이 다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유대교의 가장 엄하다고 인정하는 바리새인으로 생활하였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가장 정통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울이 주장하는 복음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통적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제물을 바치는 일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나 율법을 따라 사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 그런 일들을 했지만 속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함은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꾸짖으신 사람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자주 질타를 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주로 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성경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면서 막상 자신들이 그 율법 앞에서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것처럼 행세를 했지만 속에는 탐욕이나 방탕 같은 흉악한 죄가 가득했습니다.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인척 가장을 했지만 사실은 흉악한 죄인인데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착한 척 거룩한 척 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외형적으로 좀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복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앞세우고 자신의 의로움을 앞세웁니다. 그런 교만함 때문에 이렇게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본문 6-8절에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난 후에 그런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것을 시비하여 고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을 주는 것인데 그 소망을 가졌다고 고소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느냐 안 하셨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 왕을 통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주시고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해주시겠다는 언약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나라를 로마에게 빼앗기고 짐승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비참함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은 사람 한 사람 살리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속으로는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인해서 벌어질 사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인정해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위 공직자들 앞에서 복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비록 죄인으로 몰려서 자신을 변호하는 자리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리도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이 복음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복음을 더 많이 알고 더 확실하게 알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행 26장 1~32절 / 이동휘목사
1.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을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인 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 “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있는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지르면 뭐합니까? 어쨌든 이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얼마나 자유로워하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목사님은 무려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을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 “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 대답하는 말이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심판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이 나라 민족이 어렵고 잘못되면 이는 바로 나와 내 교회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민족 복음화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대로, 핍박이 있으면 핍박이 있는대로, 재판받을 때는 재판받는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통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렉캄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 일가의 창시자인 헤롯 대제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애썼다. 그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여우’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손자 아그립바 1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아그립바의 아들 앞에 불려 나온 것을 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겸손한 사도 바울이, 대를 이어 진리와 의를 반대했던 이 세속적이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그지없는 헤롯 일가의 대표자 앞에 서 있는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로마인이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에 대한 권위자였으므로, 비교적 바울의 문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그로 인하여 로마 총독에게 자신의 무죄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 왕은 예수를 재판한 헤롯의 조카였고,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유대교에는 정통했지만, 진리에 관하여는 무지한 자였기에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를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바, 바울은 죽음을 불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변증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 자신이 현재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를, 그의 과거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파노라마처럼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을 마치 필름을 통해 영화를 보듯이 일목 요연하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유대인에게 송사받은 이유를 먼저 설명한(4-7절) 다음, 개종 전의 삶과 개종하게 된 동기(8-15절) 및 개종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도의 사명(16-23절) 등을 자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연관하여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2. 먼저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살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그는 철저히 유대 종교 옹호자로, 그리고 바리새파의 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던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0-11)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사도 바울은 예수믿기 전, 변화받기 전에 저질렀던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기를 생각하며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도 놀랍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손수 운전을 하시며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태우고 심방을 가는 중에 오고간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동안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장로님, 저 앞차의 번호판을 보니 옛날 믿지 않던 시절 화투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이에 장로님은 의아한 듯 쳐다봅니다. “저 앞차 차번호가 아주 좋습니다. 992짓고 4가 둘이니 4땡이네요.” 장로님은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넙죽 받아 하는 말이, “목사님, 저것은 992짓고 4땡이 아니라 442짓고 9땡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집사님이 거들기를, “그런걸 보고 쌍땡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세 분이 하던 얘기를 옆에서 조용히 들으시던 권사님이 웃으시며 입을 엽니다. “다 과거가 있는 분들이군요.” 하나님의 종 바울도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기탄없이 자신의 과거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밝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에는 그 과거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변화된 현재의 모습이 있다면, 과거의 변화받지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구원얻기 전의 상태가 없으면 구원얻은 후의 변화와 차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행26:12-15)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본 것입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거꾸러뜨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낮아지는 회개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12-18절)은 꿈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라는 것을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이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듯 극악무도했던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이 사건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내가 이런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도 바로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지금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의 사건이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5-17)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수께서는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하시고 확정하셔서,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은혜로 바울을 부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행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만 실컷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 ‘가시채’는 소나 말 등이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길들여지지않은 소나 말은 멍에를 메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고자 하면 그것을 매지 않으려고 자꾸 뒷발질을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뒷발질해서 닿는 부분에 송곳같은 것을 박아두어서 뒷발질할 때마다 찔리게 만듭니다. 몇번 뒷발질하다가 찔리고 나서야, 정신이 나서 비로서 고분고분하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사울아, 이제 내가 네게 멍에를 씌워 놓았으니 버둥대지말고 고분고분따라 오너라. 딴 생각먹고 뒷발질하다가는 너만 고생당한다.’ 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신 여러분은 딴 생각가지고 벗어날려고 쓸데없이 뒷발질하지 마시고, 순순히 직분과 사명에 순종하시므로 고생을 덜 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26:16-18)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엎드러진 것이 바울의 회개의 자세라면, “일어나 네 발로 일어서라”는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선언은, 너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나의 종이 되어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9-23)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사환처럼 순종하여 보내는대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안디옥에도, 고린도에도, 에베소에도, 데살로니가에도 갔습니다. 낮에도 갔고 밤에도, 육지로 바다로, 살든지 죽든지 가리지않고 명령이 떨어지면 어디든 어떤 방법으로든 순종하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갔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감옥에 갇혀서도, 그리고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복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딤후4:1-2)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윌리엄 부드는 한때는 전당포 주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1878년 구세군을 창설했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젊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또한 전도생활을 하던 중 매일 매일을 술에 취해 살며, 그의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그 남자를 몇 번 눈여겨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남자에게 교회에 다녀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포기한 채 그 남자를 잊고는 몇 날이 지났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급한 일로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사는 그 남자를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취한 남자가 빈정거리며 윌리엄 부드를 불러 세우더니 말했습니다. “여보슈, 내가 정말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그렇게 소신없게 전도하지는 않을거요.” 그 후 윌리엄 부드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때부터 열심히 전도하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우는 자가” 되지 않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5. 이렇게 사도 바울의 간증 설교를 듣던 베스도는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는 바울이 경험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사실 베스도같이 세속적이고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삶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영적인 일이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등과 같은 이야기가 베스도와 같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맑은 물 속에 득실대는 대장균들을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물을 들여다 본 사람은 그것을 잘 압니다. 이 세상에는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가진 영안을 가지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영적인 눈이 없는 베스도가 바울의 영적인 설교를 듣게 되니까 바울이 미쳐보이는 것입니다. 겨우 안다는 것이 고작 학문을 지나치게 많이 배운 탓에 바울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행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세상에 멀쩡한 사람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부친 일이 역사에 어디 한 두 번 있었겠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다 부쳤습니다.
(요10:20-21)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시며 귀신들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 고쳐주시자,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붙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막3:20-21)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이처럼 예수님을 미쳤다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야단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세상이 왜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5:13-16)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 때문에 미쳤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이 있거든, 여러분 자신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아시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마시고, 영으로 아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베스도가 영적인 눈이 멀어 바울더러 미쳤다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복음을 전하며 신앙의 결단을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바울은 베스도에게 복음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육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게는, 떡이나 몇 개 더 생기는 이야기나 출세담이나 쾌락의 이야기가 훨씬 더 귀가 번쩍 뜨이고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돼지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하고 깨끗한 옷이 아니라, 시궁창의 짚더미이며 개에게 필요한 것은 진주가 아니라 썩어빠진 고기덩어리일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인 인간에게는 복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행26:26-27)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나 아그립바 역시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행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죄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보다도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도덕성 때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아그립바는 오누이가 같이 사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버니게는 바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자기 여동생입니다. 그는 그러한 불륜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가 포기해야 될 죄들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게 된다면 이러한 죄악들을 끊어야만 합니다. 그는 이러한 쾌락과 죄악들을 끊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도덕적인 이유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내어 놓기가 싫어서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끊어 버리기가 아까워서 영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 생활의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슬프게도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이 주는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도 요한이 권면합니다.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순간적인 죄가 주는 쾌락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영생을 놓쳐 버리는 아그립바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처에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그립바에 대한 바울의 진심은 분명합니다.
(행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를 받아, 영생을 소유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주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미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빌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습니다.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어디든지 따라 갔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똑바로 미친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소원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된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불타는 사랑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심과 충성,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정열도 없는 싸늘한 고드름 같은 믿음으로는 어떤 변화도 역사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감각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복음 전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마11:15-17)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계3:1)......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성도 여러분, “(행26:29)......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 사도의 그 뜨거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감격, 그리고 그 불붙는 사랑이 여러분 가슴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죤 낙스의 민족 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정열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소원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13살난 김용기라는 소년이 이름 모를 깊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듣지 않았습니다.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사람을 불러 경을 읽히기도 했지만 낫지는 않고 더욱 심해만 갔습니다. 소년의 부모는 날로 여위어가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와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담장 너머로 하얀 쪽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 쪽지에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소년의 아버지 김춘교씨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라는 구절에서 혹시 내 아들을 살릴 길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이쪽지를 넣은 청년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 받은 그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김용기는 병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는 십리가 넘는 용진교회에서 믿음의 터를 닦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하여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회 각계 각층의 정신적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켜 나라 민족을 변화시켜가는 신앙인의 모범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 땅에 이루어드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 땅에 새로운 믿음의 불을 붙이고 여러분의 삶과 나라 민족에 새로운 감격과 변화와 능력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박성환목사 / 행 26:1-23
신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180도 다른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분봉왕 헤롯 아그빕바 2세 앞에서 전한 자신의 ‘신앙 간증문’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는 사도 행전에 모두 3번에 걸쳐(9장, 22장)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회심은 초대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구약 율법에 심취하였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말할 만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 사울은, 성전을 모독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나사렛 출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초대 교회)을 박해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생각하고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위임장)을 받아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을 돌아 다니면서 그들을 처벌하고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더우기 그들에 대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가서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26:9-11) 여기까지가 그의 인생의 B.C. (Before Christ)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짚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성도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협과 살기(murderous threats)가 등등하여’(9:1) 그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기 위해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부터 214 Km가량 떨어진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낮 12시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의 동행하던 사람들을 둘러 비춥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다 땅에 엎드러졌을 때, 하늘로 부터 히브리 말(Aramic)로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은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루는 다른 부분(9장, 22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입니다. ‘가시채’(goad)는 동물을 몰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말하는데 끝부분에 쇠붙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다’는 당시 민간에 널리 사용되던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가는 짐승이 반항하기 위해 뒷발질하는 것이 쓸데 없는 행동인것 처럼 ‘쓸데없는 저항’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강한 빛으로 그에게 임하셨고,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행위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고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26:15)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였는데, 강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14),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
이 구절을 통해서 핍박받는 교회, 고난 중에 있는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눈물을 보고 계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된 성도들은 지금도 신앙을 지키는 것 때문에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에서 그 빛의 광채로 인해 볼 수 없게 되어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22:11)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엘리트 중의 엘리트요 율법에 흠이 없을 만큼 도덕적인 사람으로 자부했던 사울은 강렬한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교만과 악행을 꺾으시는 주님의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치 앞으로도 나아 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다메섹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위해서 그를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문을 열게 하셔서 핍박자 사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 주시고 그를 형제로 받아 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목적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22:14-15)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찾아 오셔서 그를 변화 시키신 목적은 모든 사람 앞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복음 전도자 바울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내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사울에게 들려주신 말씀 중에 그를 찾아 오신 목적(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26:16-17)
사울이 본 일과 장차 그에게 나타날 일에 종과 증인을 삼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요, 로마의 전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예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인데 사형 집행이 유예되어 대신 중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노 젓는 일만 할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울을 찾아 오시고 그를 ‘종과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의 기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나의 육체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고후 5:15)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갈때,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참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썩어질 것들에 얽매여 죄에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갈 때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갈 2:20) 복된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은 한 마디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에 18절 말씀은 사울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 포함) 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복음의 의미,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사울을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sending you to them to open their eyes and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to God, so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a place among those who are sanctified by faith in me. (Acts 26:18, NIV)
1) 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2)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power)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3) 그 결과(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4)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 가운데 기업을 받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근거로하여 복음의 본질에 대해 상고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복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고 영생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정통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4-16)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보고 들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천국을 보게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7살때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영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였고, 11살 때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18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권고로 해군에 입대하여 소위 후보생이 되었으나 엄격하고 고단한 선상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체포되어 옷을 벗겨 매를 맞고 면직되고 아프리카 노예 상선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끔찍한 15개월간의 노예 생활 이후에 그는 노예 무역선의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748년 3월 10일 노예 무역선을 타고 항해 하던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그는 과거의 신앙 고백, 부르심, 경고, 방탕한 생활, 노예선에서 구출받은 사건등을 생각하며 “만약 내가 오랫동안 대적했던 성경 말씀이 사실이 아닐까?” 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1750년 2월, 어머님의 친구의 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하게 되었고, 리버풀에서 조수 측량사로 근무하면서 여가 시간에 성경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고 이후 시리아어,라틴어, 불어까지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발견였습니다. 1764년 오올리에서 목회자로 청빙받아 사역을 시작하였고 15년동안 목회에 전념하였습니다.
존 뉴턴은 노예 무역선의 선장과 같은 부도덕한 일을 하던 그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찬송시를 적었습니다.
“Amazing grace How I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존 뉴턴의 눈을 뜨게하였고, 그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복음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8:12)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적으로 흑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요 1:9) 하지만 어둠 가운데 거하던 유대인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요 1:5)
하지만 참 빛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고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요 8:12) 마태는 이사야서 9장 1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큰 빛’으로, ‘사망의 땅과 그늘에 거주하던 자에게 비취던 빛’ 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5-16)
복음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어둠의 일을 좋아하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redemption), 곧 죄 사함(forgiveness)을 얻었도다” (골 1: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power of darkness)에서 건져내어(rescued)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 동안 노예로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노예되어 육체의 소욕(desire)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아들의 나라 즉 영생과 진리와 평화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흑암=사탄과 동일어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믿기 이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엡 2:2) 살았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을 말합니다. ‘지금 불순종 하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2)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 천국, 구원, 심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안개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쾌락과, 이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며 살게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추깁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라고 속삭입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영광의 면류관에만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좁은 길, 진리의 길을 걷지 말고, 넓은 길, 편안한 길을 걸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안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서”(엡 6:10) “마귀의 간계를 대적해야 합니다.”(엡 6: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안에서 기도와 간구로 깨어 구함으로 대적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 살던 우리를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3.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고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선행을 많이하고 구제를 많이하고, 심지어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죄인이며,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롬 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를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죄’(하타)는 ‘(과녁을) 빗나간’ ‘무지한’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에 못미친다는 뜻입니다. 상대적인 죄가 아니라 절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인간의 속성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불순종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이 사는 세상에 살인이, 미움이, 전쟁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이웃과 원수되게 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드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시기 수천년, 그 이전의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구속사)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메시야는 죄 가운데 있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 제물(화목 제물)로 드려질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Passover)은 가장 큰 명절이요 축제일입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고집스러운 바로 왕과 애굽의 우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마지막 재앙은 모든 동물의 초태생과 가정의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로의 가정을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가정마다 죽음의 심판이 임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고 그곳을 뛰어 넘었다고 해서 유월절이라 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뿌린 집마다 “그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셨다”(출 12: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성경적 용어로 대속 제물, 화목 제물-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예수님)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심을 믿으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의롭게 되는(칭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4.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합니다. ‘기업’은 구약 성경에서는 ‘땅’을 의미했지만,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유산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믿는 자들은 보이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육신의 장막은 무너지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고후 5:1)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mansion)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또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성경의 약속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잠자는 첫 열매가 되신 것 처럼,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것입니다.” (고전 15:52)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 갈 때, 날마다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복음의 본질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 복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 예수님을 통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아멘!!
이 소망을 인하여
행 26장 1~18절 / 신성종목사
본문 7절의 말씀에 보면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그 앞 6절에도 “여기 서서 심문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부활의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금 왕 앞에 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26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서서 자신을 변증한 내용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어떻게 메시야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가의 경위와 그 근거입니다.
바라기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도 바울이 가졌던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바울이 개종하게 된 이유
바울이 개종하게 된 내용은 본문을 비롯해서 사도행전 9장과 22장까지 세 번 나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신앙인 메시야와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나 지금은 그 이유로 고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매우 호전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을 감옥에 보냈고, 믿는 자들을 사형에 처함을 찬성하였다고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스데반의 경우였습니다. 또 믿는 자들을 회당에서 처벌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은 믿는 자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성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놀라운 빛을 보았습니다.바로 잔인한 박해를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정오인데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바로 부활의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을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또 이상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가시 체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 이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시 체란 가시가 달린 채찍을 말합니다.
이것은 쓸모없는 저항을 풍자한 당시 헬라의 속담입니다. 소가 밭을 갈다가 뒷발질하면 내리치는 가시 채에 맞아 더욱 괴로울 뿐임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거스리면서 스스로 매 맞는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양심의 경고를 어기면서 가게 될 때에는 지옥의 형벌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경고입니다.
2. 바울이 메시아 신앙과 부활의 주님을 믿은 근거는 무엇인가?
(1)[체험을 통해서]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부터 바리새파에 속해 있을 때 메시아 신앙과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은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것을 [그의 체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의 체험은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9장, 22장, 26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회심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체험을 고린도 전서 15장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랑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고전15:8-9).
그러나 바울의 확신은 체험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2)[성경을 통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부활을 깨달았습니다.
체험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체험은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3-4절에 두 번이나 [성경대로]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님의 메시아 되심과 부활을 성경의 근거를 통해서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체험이 없으면 확신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Canon(규범, 표준이란 뜻) 즉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그것을 본 [수많은 증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살아있을 때에 그 증인들의 수자가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베드로와 12제자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증인들이 있는 것은 바울의 체험이 개인적인 환각작용이 아님을 증거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증인들은 오늘날에도 재판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이유는 바로 그 간증은 그 증인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증만으로는 표준을 삼을 수 없고, 오직 성경에 근거를 두고 다른 것은 참고사항에 불과합니다.
3.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16-19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사환과 증인]의 사명을 맡겨주신다고 했습니다. 좀더 세부적으로 말씀드리면 5가지의 사명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1)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이방인들의 눈을 열어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4가지의 소경이 있습니다.
첫째로 육적 소경이 있습니다.
둘째는 문맹이 있습니다.
셋째로 최근에는 컴맹이 생겼습니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영맹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소경들은 다 전문가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뜨게 해주지만 그러나 영맹은 우리가 그 영적 안약을 주어야 합니다.
두 가지의 약이 있는데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눈이 떠지고, 밝아집니다.
(2)18절,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방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이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빛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빛이 없이는 볼 수도 없고, 빛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을 때 색깔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물론 죄를 먹고,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죄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합니다.
(3)18절,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이방인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쾌락과 향락과 부정과 부패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수많은 유혹으로 우리들에게 끌리게 하다가 마침내 자기의 소유물이 되었을 때에는 이마와 오른 손에 666이라고 자기의 도장을 찍고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보았지만 사탄의 지배와 탄압과 비교할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인도해내야 합니다.
(4)18절 “죄 사함과 나를 믿어”. 이방인들의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주님을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는 살아있는 동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주다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자들을 죄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게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참 해방과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우정이 없고, 신뢰가 없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5)18절,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이방인들에게 영적 기업을 얻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기업이 있어야 합니다. 기업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고, 기업이 없으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업을 가져야 하는데 세상의 기업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기업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풍성함은 바로 기업을 가질 때 옵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들도 과거는 바울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주님을 믿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기업을 얻게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니 먼저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선교사역과 함께, 쉐마 교육을 통해서 제2세들을 바로 키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예배 시간에는 교육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헌신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왜 교육을 하는데 헌신합니까? 이 소망을 인하여, 주님이 주신 천국의 소망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금요일에 제천에 있는 명암 낚시터에서 미국에서 온 자녀들과 함께 낚시를 했습니다. 큰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인데 호수에서 민물낚시는 최근에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떡밥을 밤 크기만큼 만들어 낚시에 매답니다. 향어는 등치는 크지만 예민해서 여성적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찌가 한 매듭정도 약간 올라갑니다. 그러나 잉어는 찌가 내려갑니다. 붕어는 등치는 작아도 힘이 있어서 확 챕니다.
사실 저 같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한 시간을 가만히 있으면 갑갑합니다. 그런데 그 찌를 보면서 8시간을 앉아있어도 언제 그렇게 빨리 시간이 가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찌는 바로 고기가 무는가 안 무는가를 가르쳐주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그까짓 찌를 보면서도 하루 종일 햇볕 밑에 앉아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소망을 인하여 왜 우리가 이 땅에서 주의 일을 못 하겠습니까?
이제 바라기는 이 소망을 인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봉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간증이 있는 사람
조상호목사 / 행 26:1-18
수년 전 고씨 성을 가진 한 형제님이 우리 교회에 등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 불교신자였습니다. 어쩌다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오는 명목뿐인 불교신자가 아니라, 많은 불교 서적을 공부하고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던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저를 만나 인사할 때면, 항상 양손을 합장하고 불교식으로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한 후 ‘새가족 성경공부’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가족 성경공부를 수료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첫 번째 만났을 때 저는 저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을 합니다. 새가족 성경공부 첫째 날을 마치고 그 분이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제 차에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제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오늘 설법 잘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웃겨서 마구 웃으며 그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고형제님, 아까 새가족 성경공부에서 저의 과거의 삶을 소개했는데, 그것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님이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참, 죄송합니다. 불교용어가 제 입에 베어 있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님’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앞으로 불교용어를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목사님, 오늘 간증 잘 들었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 형제님 댁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제 차에서 내리면서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지 스님, 다음 주에도 좋은 설법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웃었더니 그 형제님은 아차 싶었는지 즉시 수정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제가 또 실수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에도 목사님 간증 기대하겠습니다.”
여러분, ‘간증(Testimony)’이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우리가 간증이란 말을 종종 듣는데, 간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간증이란 말은 원래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진술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또한 자기가 직접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목격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간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만, 국어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간증이란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그러니까 간증이란 종교적 체험을 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체험했던 것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간증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지난주 금요집회에서도 제가 “혹시 간증하실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간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다른 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라고 했지만, 주저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위에 보면 간증하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격상 수줍음을 잘 타서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것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간증이란 아주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라고 하면, “목사님, 제가 간증할 것이 있나요? 저는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분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간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미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26장에서 사도 바울은 똑같은 간증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22장에서는 로마 병사들 앞에서 간증을 했는데, 본문에서는 아그립바왕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의 간증을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고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는데,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멀리 다른 지방까지 가서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다같이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그가 구원 받은 후, 주님으로부터 이제까지 경험한 일을 증거 하는 일과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증인의 삶을 살라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나 변화 받은 후 곧바로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을 보면, 아라비아 광야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준비한 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다같이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하늘의 기업을 받게 하기 위한 사도로 자기를 부르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항상 담대하라
첫째로 사도 바울의 담대함입니다. 여러분, 그가 지금 누구 앞에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까?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 자리는 간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간증자로 왕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고발되어 서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7절과 28절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잡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들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죄목이 붙으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설교자나 간증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죄수가 되어 왕 앞에서 심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 떨 것입니다. 서슬 퍼런 왕과 로마 총독 앞에서 떠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초대교회 시절 어느 유교 집안의 종손인 한 아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전체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시퍼런 칼 한 자루를 아이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놈아!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믿어! 내가 죽어서 우리 조상님들의 얼굴을 뵐 면목이 있겠느냐?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면 너를 우리 집안의 소중한 종손으로 취급하고 인정해 주겠지만, 네가 끝까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면 이 칼로 너를 죽이고 나도 부끄러워서 자결을 할 수밖에 없다. 대답해라.”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뜨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예수 믿지 않고는 못 살아요. 할아버지도 예수 믿으셔야 돼요. 할아버지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실 것에요.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으셔야 돼요.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가요.” 손주의 말을 듣고 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상기되더니 아이의 멱살을 움켜쥐면서 말했습니다. “이 못되 먹은 자식, 다시 한 번 묻겠다. 이 할아버지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단 말이냐?” “네 할아버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할아버지가 손주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의 자식,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냐? 얘들아! 우리 다 같이 이번 주일 교회에 간다. 예수 믿는다.” 그래서 그 집안은 초대교회의 훌륭한 믿음의 집안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뺨을 맞아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당히 외쳐야 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가요. 예수 믿어야 삽니다.” 사도 바울은 ‘성전을 더럽힌 자’라는 죄목으로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당당하게 간증을 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손을 들어 변명했다’는 부분입니다. 보통 두려워하면 몸을 움추립니다. 낙심하거나 실망하거나 힘이 빠지면 사람들은 손을 늘여 뜨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손을 늘여 뜨린 것이 아니라, 손을 든 채로 변명, 즉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왕 앞에서도 손을 들고 당당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했던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기회를 선용하라
둘째로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기회를 선용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그 기회를 활용하여 전혀 거리낌이 없이 당당하게 손을 들고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자기의 말이 길어질 수 있으니 끝까지 너그럽게 들어달라고 요청까지 하며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총독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바울은 그 기회를 선용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증을 하였습니다.
‘셀 처치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랄프 네이버 목사님의 간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 사모님은 간호사였는데, 사모님을 통해 한 의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랄프 목사님은 그를 어떻게 주님께로 인도할까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렇다. 성경책을 사서 생일 선물로 주면서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성경책을 사서 찬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사모님이 출산을 하게 되어, 랄프 목사님은 그 의사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랄프 목사님은 그 의사와 야구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성령께서 랄프 목사님의 마음에 영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사탄이 ’아직 야구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실례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랄프 목사님은 사탄을 이기고 그 의사에게 영생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랄프 목사님은 빌리 그레함 전도 집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가 3주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침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여보, 왜 우는 거야?” “그 의사가 죽었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어쩌다가?” 그가 수상 스키를 타다가 물에 떨어졌는데, 다른 보트가 그 위로 지나가는 바람에 몸이 잘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랄프 목사님의 찬장에는 성경책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랄프 목사님이 그의 장례를 집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의사의 집에 가서 가정부를 만났는데, 그 가정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랄프 목사님, 그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가 말하기를 자기는 랄프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야구 이야기를 하던 밤에 성령께서 이미 의사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고 자기에게 영생에 대해 말하라는 마음을 주셨는데, 랄프 목사님이 그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랄프 목사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생애 동안 가장 후회하는 일 중의 하나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던 사도 바울이 그 기회를 살려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상대방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래를 간증하라
셋째로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를 간증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른 자였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게 된 과정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간 과거만 간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비전에 대해서도 간증했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과 23절을 보면 그의 비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서바나였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서바나는 지구의 끝이고 그 너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지방과 로마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춘 것이 아닙니다. 땅 끝이라고 생각하는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로마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로마에 머무를 집이나 살림살이를 요청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도 아닙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고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서를 쓸 당시 사도바울은 1차, 2차 전도여행을 이미 마쳤고, 3차 전도여행 중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일을 했다면 이제는 한 곳에 머무르며 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고생한 것만큼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땅 끝이라고 생각하는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고 거기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이란 지나간 과거에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뿐 아니라 아직까지 진행되지 않은 미래라 할지라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윗은 미래를 간증했던 인물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지경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어린 소년 다윗이 사울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17:37) 어린 소년 다윗은 자기가 벌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기를 때, 사자나 곰과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물리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다윗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고백입니다.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여기 ‘건져내시리이다‘는 말씀을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will deliver me'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비록 거인 골리앗이 자기 앞에 서 있지만, 지금까지 역사하신 주님께서 앞으로 역사하셔서 그 골리앗의 손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이미 지나간 과거만을 간증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까지 간증했습니다. 목동으로 양을 칠 때 체험했던 과거만을 간증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미래의 상황까지도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늘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면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찬란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에만 매여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펴기보다, 시간만 나면 지나간 낡은 일기장을 펴놓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과거에만 매여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간증으로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간증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간증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몇 년 전에 이승환이라는 19세 청년이 대통령 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가 주관하는 청소년 창업지원 프로그램 비즈쿨(bizcool) 연구개발팀의 연구원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그는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고 뭉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부터 매일 소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기 시작했고 고1 때는 선생님들에게 폭행하고 폭언을 하는 바람에 자퇴를 했다가 다시 입학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학생신분으로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살인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5개월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며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고뭉치가 변하여 청소년 창업지원 프로그램 비즈쿨(bizcool) 연구개발팀의 연구원이 된 것은 그가 재판을 받으면서 미래자서전 격인 <혼자 도는 바람개비>라는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무죄로 석방 되어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한 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합니다. 대학에서 그는 유명한 카피라이터를 만나 그 방면의 대가가 되어 사회적 명성을 얻고 그 후로는 종교지도자가 되어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슈퍼리더가 되는 과정을 자서전 형태로 썼습니다. 그의 미래자서전인 <혼자 도는 바람개비>가 출판된 것은 2000년 9월, 그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는 미래자서전에 쓴 대로 무죄로 석방되었고 독학사 학위과정을 거쳐 대학원까지 진학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미래자서전을 쓰고 난 다음의 변화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자서전을 썼기 때문에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더 큰 계획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나쁜 짓을 하겠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용기를 가지고 행한다면 어려움 없이 나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듯이, 보다 나은 훌륭한 삶을 위해 제 인생을 던지겠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삶에 임한다면, 계획대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환 청년은 지금도 미래자서전을 계속해서 고쳐 쓰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생각이 크고 또 성장하는 만큼 더 성숙한 미래자서전이 쓰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자서전이라고 하면 나이가 들어 삶을 살만큼 살고 나서 쓰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간증이라고 하면 지나간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서전에 미래자서전이 있듯이, 간증에도 미래의 간증이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간증할 뿐 아니라, 미래에 역사하실 하나님을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만 계시지 않고 오늘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43장 19절을 보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새 일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일입니다. 사막에 강을 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또 어디서도 물을 찾을 수 없는 사막에 강을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광야일 수 있고, 사막일 수 있습니다. 물설고 낯 설은 이민생활이 바로 광야 같은 삶일 수도 있습니다. 심한 경기 침체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고유가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이 사막과 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간증할 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 믿음으로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고백대로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분의 글에서 간증이란 마치 대야에 담긴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작은 대야에 담겨 흐르지 않으면 그 물은 서서히 미끈거리고 이끼가 생기고 나중에는 썩은 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고 결코 썩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들이 간증을 하지 않으면 삶은 무기력하고 건조해집니다. 그러나 간증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간증거리가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간증을 할 때,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간증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비록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설교를 듣다가 깨달은 것이라 할지라도, 혼자 성경 읽다가 깨달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간증할 수 있습니다.여러분들이 간증할 때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간증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낍니다.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간증으로 넘치기를 바란다면, 간증하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간증하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해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과거의 간증에 머무르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 믿음으로 간증하여, 그 믿음의 간증대로 더 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박형근목사 / 행 26:6-18
다가오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첫 주에, 사도 바울이 법정에서 변론한 오늘 말씀을 살피며, 바울을 통해 구주 예수의 오심과 그가 하신 일을 나눔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확실히 담고자 합니다. 앞인 25장 23절에 보면, 유대 왕 아그립바와 왕비가 위엄을 갖추고 높은 관리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오니, 로마 총독 베스도가 죄수 바울을 데려오라 하지요. 총독은 함께 한 이들을 향하여‘바울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며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 하여 예루살렘과 여기서도 내게 죽이라 청원하였으나.’
여기는 로마군 사령부가 있는 가이사랴입니다. 총독은 이어서‘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으나,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바울은, 이 전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여러 번 법정에 섰는데, 유대인들이 강력하게 사형을 주장했지만, 총독은,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합니다. 예수님과 같지요. 총독 빌라도가 여러 차례‘난, 예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으니, 매나 때려 석방하겠다.’
종교지도자들이 뒤에서 부추겨, 이스라엘 백성들이‘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오.’군중의 함성에 밀려, 총독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주었는데, 백성들이 죄 없는 바울도 죽이려 합니다. 죄많은 이들이, 그들을 구원하려는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는 거지요.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한 것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이 가능했고, 유대 땅에 있으면 유대인이 죽이려는 위협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생각했는지 모르나, 결국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할 기회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죄수를 황제의 재판에 보내려면, 죄목을 밝혀야 했기에, 오늘 말씀의 재판을 연 것이지요. 27절에‘죄목을 밝히지 않고 보내는 것은 무리인 줄 아나이다.’그 말입니다. 유대 아그립바 왕이, 죄수 바울에게‘너를 위하여 변론하라.’하자, 바울이‘오늘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아는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깁니다.’
하면서, 자기를 소개합니다.‘유대인들이 다 아는 바처럼, 나는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지금 여기 서서 심문을 받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입니다.’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간절히 바라오던 것은 메시야의 오심인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한 것이 이 소망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할 일을 고백하지요.
사울은 사람인 예수를 메시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를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했는데,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여러 번 예수를 모독하는 말, 즉‘예수는 저주받을 자라.’는 말을 하게 하고,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믿는 자를 박해했다 하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말합니다.
사울이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다메섹에 사는 예수 믿는 이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울에겐 물론이고 기독교에 큰 사건이라서,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9장에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사울이 예수를 만난 것을 기록했고, 22장에는 유대 백성들에게 바울이 그것을 직접 말하고, 26장에서 아그립바 왕 앞 법정에서 말하지요. 제가 사울, 바울하는 것은, 변화되기 전 박해자일 때는 사울, 변화된 후 복음 전도자일 때는 바울입니다.
‘정오에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췄습니다.’그 빛에 일행이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들으니 히브리 말로‘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사울은, 예수 믿는 성도를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며, 믿는 자를 자신과 같이 여기십니다. 가시채, 가시 더미에 뒷발질하면, 발이 가시에 찔려 자신이 고통스럽지요.
예수님께서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이, 그와 같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라 하십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사람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일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박해했지만, 믿는 이를 박해할 때 보니, 그들의 얼굴이 평안하고, 더구나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웃으며‘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한 것과, 심하게 박해하면 예수 믿음의 열기가 시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박해하면 할수록 더 빨리, 널리 예수가 전해지는 것을 보며, 사울은‘왜 이럴까? 만일 예수가 메시야라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마음속의 갈등이 커져 갔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네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거지요. 그런 갈등이 심해지던 속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박해자 사울이 즉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보면, 믿는 자를 잡으러 온다던 사울이 나타나, 예수를 오신다는 메시야라 외치니 사람들이 놀랐다 하지요. 말씀에 돌아가, 사울이‘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증인을 삼고, 사울이 앞으로 할 일을 알려주며, 그 일에 사울을 종으로 삼으려는 겁니다. 그 일은, 사울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를 믿어 거룩한 무리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
사울은 하늘의 밝은 광채에 눈이 멀어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가서, 앞이 캄캄해서 보지 못하는 동안 많이 답답해하며 걱정했을 겁니다.‘내가 영영 못 보면 어쩌지?’예수님이 보내신 아니니아에 의해 눈을 뜬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네가 그들의 눈을 뜨게 되어 어둠에서 빛으로’하신 말씀이, 자신이 앞이 캄캄하게 지내다가 눈을 뜨게 되니, 그 의미를 몸으로 깊이 체험하였지요.
그뿐 아니라, 바울은 이때 일로 평생 눈병으로 고생했는데, 고생할 때마다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먼 것과 아나니아가 눈 뜨게 해준 것을 기억하며, 다른 이의 영적 눈을 뜨게 하는데,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당신의 할 일을 마치신 후에, 사울을 택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옴으로,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되도록, 온 세상에 복음을 펴나가게 하신 것이지요.
그를 위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고, 박해자 사울을 복음 전파자 바울로 만드신 것이요, 그런 주님의 은혜와 역사로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19절에‘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않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했습니다.’저는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바울은 이어‘내가 그리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와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요,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한 말을, 제가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제게 무슨 죄가 있냐는 바울의 변론이지요. 바울의 변론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크게 소리 내어‘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로마인인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한 말이 논리가 정연한 것으로 보아, 학문을 많이 한 것은 알겠으나, 메시야에 대한 구약 성경의 말씀은 모르기에‘네 말은 미친 사람의 말이다.’한 거지요. 그러자, 바울은‘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그러고는,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왕은 이 일을 알기에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대해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압니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가르치심, 베푸신 이적,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과 십자가의 죽음은, 전 이스라엘이 아니까, 아그립바 왕도 당연히 알 거라는 것입니다. 바울이‘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믿는 줄로 압니다.’그러자, 아그립바 왕이‘네가 적은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구나.’바울이‘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원합니다.’한 것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기에 법정에 있던 모든 이들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역사를 구한 거지요. 왕과 총독과 함께 앉았던 이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합니다.‘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하며,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석방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는 이를 박해하러 가던 사울을 만나, 복음 전도자로 삼으심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변론을 통해, 자신이 과거에는 사람인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는 메시야임을 믿지 못해 박해했으나,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은 구약에 선지자들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전했을 뿐인데, 유대인들이 저를 죽이려 했다 합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바울을 비롯한 많은 전도자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로 살다가, 때가 되면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지닌 큰 의미는, 아기 예수의 오심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역사 기록에 거의 없고, 로마에서 먼 변방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이렇게 여러 인물이 참여한 법정의 변론을 통해 전해짐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분명히 하였지요. 여러분 모두,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새기며, 내가 가는 천국에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가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한 마디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이웃(참고; 이웃은 나 외의 모든 사람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큰 이웃 사랑인 줄 믿습니다. 그리 살면서, 다시 오실 재림 주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길 축원합니다.
하늘에 매여사는 사람
행 26장 9~32절 / 이성희목사
옛말에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순리대로 살면 흥하고, 하늘을 거슬리며 살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이치를 순하게 하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이치를 거슬르는 사람은 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이치대로 순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겨울에는 좀 춥게 살아야 하고, 여름에는 좀 덥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 겨울에 난방을 덮게 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너무 세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옛 사람들은 자연을 하나님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란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하늘도 하나님을 지칭했습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이란 자연친화적 삶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웰빙입니다. 최근에는 웰빙을 ‘참살이’라고 합디다. 좀 익숙해지려고 하면 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꿔서 오히려 혼돈이 오는 것 같습니다. 네티즌도 익숙해졌는데 요즘에는 네티즌을 순 우리말로 ‘누리꾼’이라고 합니다. 참살이의 삶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로마서 1:26-27에는 여자들도 순리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순리로 쓰지 아니하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순리가 아닌 역리로 쓸 때에 인간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하늘을 거슬리게 될 때 질서가 파괴되고 알 수 없는 혼란과 질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이즈라는 것입니다.
환경대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거슬린 결과가 환경파괴요 오염입니다. 지구온난화를 그냥 두면 10년 뒤에는 전 세계에 대재앙 온다고 합니다.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이 생태계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여 가뭄과 질병이 만연하게 됩니다. 이런 지구의 온난화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거슬리면 이런 재앙이 몰아오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물 흐르듯 해야 합니다. 미국과 비교해서 미안합니다만 미국의 운전은 큰 강물이 흐르듯 합니다. 넓은 고속도로에 차들이 물이 흘러가듯 갑니다. 교통법 가운데도 차가 다 빨리 갈 때는 물줄기를 따라가듯 함께 가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운전은 계곡 물 흐르듯 합니다. 이리저리 끼어들고 차선을 바꿉니다. 차선을 바꾸지 않고 끼어들지 않고 고요히 가면 전체적인 교통 흐름이 10% 이상 빨라진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 사람이 10% 느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체의 리듬대로 살면 120세는 거뜬히 산다고 합니다. 생체 리듬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지어진 원래의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하고, 우리의 몸이 생겨진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체 리듬을 벗어나니까 약해지고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관념에서 하늘은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에서도 하늘은 ‘샤마임’이란 복수를 쓰고, 헬라어에서도 ‘우라누스’라는 복수를 씁니다. 성경적 관념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바울이 삼층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 시인 ‘서시’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늘은 신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부끄럼이 없는 삶이기를 그는 바랐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빌립보서 3:20에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에 순응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을 거슬리지 아니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질은 대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민감성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고, 하늘이 보이시는 것에 민감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은 하늘이 보이신 것을 거슬리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보고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땅의 일보다 하늘의 일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하늘의 것이었습니다. 땅의 일보다 하늘의 일을 소중히 여겨씁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일을 마치셨습니다. 하늘이 준 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충성을 다 했습니다’란 말입니다. 하늘의 일을 다 끝내고 하늘에 충성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슬리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이 준 비전을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그에게 준 비전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땅을 거슬립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을 거슬립니다. 이것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22 이하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인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니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라고 시기하여 말했습니다. 3:27에는 이 말을 듣고 요한이 말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 다음에는 더 기막힌 말이 나옵니다. 30절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하늘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땅의 생각으로 보면 시기가 납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각으로 보니 예수님을 높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은 예수님을 극진히 높일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땅의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당당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으려고 사람을 거슬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7-48에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땅보다 하늘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의 이 하늘과 이 땅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 땅이 아니라 새 땅입니다. 새 땅은 이 땅과 같은 땅이 아닙니다.
옛날 러시아는 미국에 알라스카를 사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값이 고작 720만 달러였습니다. 의회의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을 때 재무장관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결국알라스카를 사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비전을 샀습니다. 미래를 샀습니다. 다음 세대를 산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땅만 바라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늘만 믿고 자기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조카와 갈등이 생겼을 때에 그는 조카 롯에게 “네 앞 온 땅 있지 않느냐?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갈 것이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땅을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동서남북 바라보아라. 밟는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민감하고 땅을 포기하니 땅을 주셨습니다. 이런 자가 땅을 관리할 자격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슬리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확실한 것을 거슬리지 않고 충실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구체적으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말씀하신 사건은 그의 삶을 지배하고, 그의 소명을 지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 것도 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20에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단호했습니다. 관원들의 공갈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절대 전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하늘이 주신 것, 하늘이 보이신 것, 하늘이 들려주신 것에 충실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늘의 소리에 충실한 삶이어야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진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설교란 하늘에서 주신 말씀을 배달사고만 내지 않으면 좋은 설교입니다. 하늘에서 주지 않은 것을 전하고, 준 것을 안 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단이 무엇입니까? 하늘보다 자기욕심, 자기주장, 자기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이단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아 고넬료에게 이중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이 먹지 못하게 한 더러운 짐승들을 가득담은 보자기를 보여주시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넬료에게는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하십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고넬료는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청하였습니다. 고넬료도 베드로도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했습니다.
사도요한의 밧모섬의 환상을 보세요.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계시를 보고 그는 자세하게 계시록을 씁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들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책이 지금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합니까?
존 오트버그의 책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암이란 판정을 받고 석 달밖에 못 살거라는 소식을 들은 한 여인이 목사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성경과 함께 묻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 가지 더 함께 넣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제 오른 손에 포크를 쥔 채 묻어주세요. 제 평생에 음식이 나오는 교회 행사에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접시를 치우는 사람이 하는 말이 ‘쓰시던 포크를 들고 계세요. 아직 더 좋은 음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포크를 들고 계세요’라고 할 때입니다. 이 여인이 죽었을 때에 여인의 관에는 포크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 날은 축제의 날이며 진짜 파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늘의 삶을 삽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늘의 것들을 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합니다.
믿음이란 땅을 바라보지 않고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땅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땅의 논리나 세상의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늘의 생각, 성경의 생각, 하나님의 원리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23절에는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왠지 아세요? 하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하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하늘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일도 하늘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9:27에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을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가 본 것을 전했습니다. 그가 들은 것을 전했습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유신론자와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플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유신론자입니다. 어머니가 아플 때에 기도하면서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신론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몸으로 이 땅 위에 임재하여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거슬리지 않고 있습니까? 하늘을 거슬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까? 전하지 않고 있습니까?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있습니까?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입니다. 베드로후서 3:9에는 “주의 약속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며 바라시는 바입니다.
결론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신 목사님께 몹시 추운 겨울날 강사 숙소에 한 할머니가 오셔서 정성껏 시중을 들었습니다. 찬 것을 마시면 감기에 걸린다고 콜라까지 보글보글 끓여주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을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 읽지 않고 사람 이름만 열심히 외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으세요?” 할머니는 “곧 하나님 앞에 갈텐데 성경을 다 읽어서 무엇 합니까? 이 사람들이 다 천당에 있을 거니까 이름이나 외워 가야지요”라고 하더랍니다. 이 할머니는 구원의 확신과 하늘의 소망이 넘쳐납니다.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하늘을 사모하는 새벽의 무리들을 보셨나요? 땅에 것 같으면 그렇게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심야 영화 프로도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 5시에 새벽프로 영화보자고 하면 보겠습니까? 새벽에 영화 보겠다고 본당 차겠습니까?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 무리를 보시려면 특별새벽기도회에 와보세요.
영화 ‘갈매기의 꿈’을 보시면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다 처리하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실제 끈으로 묶어놓은 상태로 찍었다고 합니다. 갈매기가 날고 싶지만 어느 정도 밖에 못 날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영적 자유를 누리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땅의 것에 매여 있습니다. 이 땅에 묶여 있는 삶은 하늘을 거슬리며 사는 삶입니다. 땅에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그리스도에게 묶이세요. 이 삶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하늘에 매여 있으면 있어 땅의 원리, 인간의 원리, 세상의 원리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리, 하늘의 방법으로 삽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에 매여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회심과 증언
행 26장 9~23절 / 조용기목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그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반기독인으로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이웃 나라 다메섹에 피신한 성도들을 붙잡고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이 눈앞에 보이는 그 거리까지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취면서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말에서 떨어져 엎드려서 말했습니다. ‘주여 뉘시이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에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일대에 크나큰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가 된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너로 사환과 증인으로 삼아서
사도행전 26장 16절로 17절에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불러서 바울로 변화시키고 그를 새사람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사환과 증인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들은 모두 사환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사환이요, 종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마귀의 꾀임을 받아 주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합니다. ‘좋다, 나쁘다’는 것은 주권자가 선택하는 것이지 종이나 사환이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이나 사환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인이요, 우리는 종이요, 사환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처럼 주권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시편 107편 10절로 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이 곤고와 흑암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주인이 되려고 반역한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환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이 근본적인 뜻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확실한 모델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으매 스스로를 낮추셔서 하나님 앞에 종이요, 사환으로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종으로 낮추시고 사환으로 낮추셔서 아버지가 죽으라고 하시니까 그 명령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헌신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아닌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소유,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5절로 6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도 사환이었다고 말했지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서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바울 선생같이 사환으로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환이 되었으면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다 구원받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할 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환으로서 우리의 모든 처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겸손하고 꾸준하게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환으로 부름받은 자의 나아갈 길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환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부로, 어떤 사람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은 경영자로, 어떤 사람은 학자로, 문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사환으로 불러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하게 하되 그곳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게 만드셨습니다.
목사만 사환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다 죄악의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사환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일하는 자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4절로 15절에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흑암에서 광명으로 나오지 않았었습니까? 구원받은 체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것은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었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2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쓰고 오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로 23절에 “이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증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역사적 사역에 대한 증언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켜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멸망에 처한 자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증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가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변화를 갖다주신 것입니다. 이를 체험한 우리들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린 그 고난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증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큰 변화를 가져온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환으로 살며 증인된 삶을 살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모든 인생들은 영안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자 그 영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보는 세계를 다 잃어버리고 사람은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신령한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화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영적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며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각으로만 이 세상 속에서만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영적인 존재에서 물질적인 존재로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신령한 눈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영이 살아나면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나면 영적인 세계가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게 되고 성령이 함께 계심을 알게 되며 성경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왜살며 어디로 가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사야 42장 6절로 7절에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영의 눈은 밝아지고 소경이 된 우리들을 눈을 뜨게 하며 죄에 갇힌 자를 옥에서 끌어내고 흑암에 처한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으로 태어난 그대로는 육신의 사람이기 때문에 신령한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서 거듭나게 되면 영적으로 살아나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영의 세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의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으로만 난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로 1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눈이 밝아질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곳에 있다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뒤를 보아도 알 수가 없고, 앞을 보아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죄악의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과거 어디서 와서 현재 왜 살며 미래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리스도가 빛으로 우리에게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의 어두움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의 빛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에베소서 5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악의 캄캄한 가운데서 탐욕만 따라 살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자 죄악에서 해방을 얻게 되고 용서와 의로움과 영광과 생명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의 어두움에서 의미와 가치의 빛으로 주님께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빛을 얻게 되자 우리는 허무와 무의미에서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허무맹랑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왜 사는지 압니다. 어디로 가는지 압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타락한 육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마귀의 종살이를 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며 살다가 아버지가 예비한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허무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절망의 어두움에서 부활과 영생천국의 소망의 빛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 없이 죽을 때 얼마나 절망입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의 어두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적 어두움에서 부활과 영생천국의 소망을 갖게 되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소망 속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살아나고 영적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살이 속에서 죄악과 죽음의 어두움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소망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을 지은 존 뉴턴은 위대한 주의 종이요, 찬송가 작가였습니다. 그는 11살에 아버지가 선장인 배에서 선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배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의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기는 노예선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서 수많은 아프리카인을 잡아서 노예로 파는 인간백정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탄 배가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가고 있을 때 마침 큰 폭풍우를 만나서 침몰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그는 ‘나의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 매일 어머니가 나에게 전도하던 예수님! 나를 만일 이 폭풍우에서 살려 주신다면 나는 나의 옛 생활을 청산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거대한 폭풍우가 다가올 때 비로소 그는 죄악의 껍질을 벗고 깨달아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고 그 폭풍우가 일어난 선상에서 그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겨지는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9세에 거듭난 이 날을 영적 출생일로 불렀으며 이후에 노예제도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33세 되던 해에 영국의 성공회 사제로 안수받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아프리카 노예를 생각하며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그가 지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은 아프리카인들이 배에서 고통당하는 신음소리를 듣고 지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나의 기억력은 이제 희미해지나 나는 두 가지 사실만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첫째, 나는 크나큰 죄인이며, 다음은 그리스도는 크신 구세주라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이끌어 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인간들은 모두 다 사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5절로 6절에 예수님께 나타난 마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아담이 세계와 그 영광을 다 마귀에게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에게 천국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으로 이 세상에 천국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정사와 마귀의 권세를 다 훼파하고 무장해제 하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옮김을 받은 백성입니다. 십자가 이후로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이 바로 선교사명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의 종들을 파송하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공들이고 물질들여 헌신해야만 될 것입니다.
3. 성도의 기업을 얻게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환으로 증인으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므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불러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기업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삶의 기업을 주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죄악과 슬픔과 저주와 고통 가운데 허덕이는 옛 사람은 청산되고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 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새로운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가 환하게 밝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새 생명, 즉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으며 성령을 받아서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을 얻은 백성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과 연약에서 해방된 사람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주에서 놓여남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킴을 받아 보좌에 앉은 부활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업을 우리가 얻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안에서 기업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와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과 거룩함을 받았습니다. 치료와 건강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고 그리스도의 형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과 영생복락을 갖고 천국에 집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획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놀라운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하셔서 많은 사람 앞에서 선택해 주신 택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요,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죄와 마귀와 저주와 절망을 다스리는 왕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거룩한 나라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세상나라에 속하고 마귀의 백성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속하여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 백성이 된 신분을 주었으며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요,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되어서 하나님의 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상속으로 주실 때 예수님과 더불어 여러분이 상속으로 유업을 받을 자들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얻을 새로운 신분을 획득하고 정체가 확실하게 된 우리들에게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환과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국내외에서 마귀와 싸워 영혼들을 구원하고 예수님 안에 예비된 금세와 내세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준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대회를 열고 해마다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교헌금을 작정하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주의 거룩한 섭리를 이룩하기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 네 발로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일어나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진실로 주 안에서 주의 부르심대로 사환이 되고 증인이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실한 사환과 종이 되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인도해 내서 예수 안에서 금세와 내세에 기업이 있게 만들어 주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