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째 머문 달랏
나라 밖 낯선 곳에서 초등 동기들과 하룻밤 묵은 숙소는 삼미 달랏 호텔이었다. 잠자리 환경이 바뀌어도 숙면에 쉽게 들어 새벽녘 잠을 깼다. 옆 침대 친구에게 방해가 될까 봐 노트북을 들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 전날 여정을 몇 줄 남기려니 실내등이 희미해 식당 구석 비상등 불빛으로 생활 속 남기는 글을 탈고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내 삶의 편린은 가감없이 기록으로 저장했다.
호텔에서 정해둔 시간에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마쳤다. 식후에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에서 커피나무 원산지임을 실감했다. 숙소에 올라와 잠시 대기하다가 이틀째 일정 따르기 위해 가이드는 전세버스를 숙소 앞에 대기 시켰다. 아침나절 우리가 가는 관광지는 달랏 기차역이었다. 시내를 거치면서 창원의 용지호수보다 더 수려해 보인 인공호수를 돌아갔다.
달랏 기차역은 외관이 웅장했으나 시민들이 오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지 않음이 의아했다. 남부 내륙에서 해안 도시로 나가지 않고 산간 지역으로 더 뻗어가지 않는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 있었다. 사연인즉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철로 공사가 착공되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미완인 채였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이 끝나고도 그동안 호치민시와 달랏 사이 철로는 개통하지 못했다.
가이드 안내에서 베트남 지난날은 외세로부터 침략과 내전을 겪었던 역사가 달랏 기차역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절, 프랑스는 식민지 경영 일환으로 내륙으로 철도를 개설하다가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다 일본군 세력까지 잠시 뻗쳤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베트남은 미소 양극 냉전 틈바구니에서 우리처럼 분단의 아픔과 전쟁을 겪었다.
앞서 언급된 전쟁 소용돌이에 사이공 해안에서 산간 달랏까지 깔던 철로는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하고 내외부의 두 차례 전쟁은 종식되고 호치민이 꿈꾼 사회주의로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통일 이후 베트남에서는 다른 개발 우선순위에 밀려 내륙으로 놓던 철도 공사는 시급성이 떨어져 방치했다가 달랏 일부 구간에 깔린 철로는 여객 수송이 아닌 관광객을 태워 한 구간만 왕복했다.
일반적 열차 승차권을 대신한 입장권을 소지해 플랫폼으로 드니 우리와 같은 관광객들이 철마와 객차를 배경으로 방문을 기념하는 사진을 남겼다. 달랏 시내 관광지 곳곳이 그랬지만 한국에서 찾아간 관광객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일행을 태운 열차는 20분 남짓 기적소리 울려가며 철로를 천천히 미끄러져 달랏 시내와 외곽의 풍경과 자연을 감상했는데 어디나 만발한 꽃이 펼쳐졌다.
종착역에 내려 유리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독특한 외벽을 장식한 사원을 찾아갔다. 베트남이 남방 불교 나라답게 절의 규모가 웅장했다. 에밀레종과는 비교되지 않았지만 한 친구는 커다란 종을 당목으로 울려봤다. 거대한 불상의 외피를 생화로 붙여 장식했던 국화는 꽃잎이 시들어가도 외경심이 느껴졌다. 지하에 지옥을 형상한 독특한 공간이 있다고 했으나 찾아가질 않았다.
돼지볶음 점심을 먹고 사계절 꽃이 피는 삼만 평이 넘은 정원을 들러 기화요초 속을 거닐었다. 우리의 에버랜드 튜립 정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넓이와 다양한 화초였다. 정원을 나와 달랏 고원 케이블카를 타려고 이동 중 가이드는 농업 도시 달랏에서 비닐하우스를 지어 현지인들 소득을 증진 시켜 수교 이후 박항서보다 먼저 고마운 한국인으로 각인된 김진국 선생을 소개했다.
해발고도 1500미터가 넘는 달랏 고원에서 고소 공포를 무릎 쓰고 죽림사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야 해서 스릴감에 앞서 눈앞이 아찔했다. 사원을 둘러 나와 카페에서 카피향을 음미하고 나에게는 더 난도가 높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다딴라 폭포를 둘러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객’ 식당의 저녁을 먹고 야시장 풍물 장터에서 새우를 구워 독일 다음이라는 맥주 맛을 음미하고 숙소로 왔다. 23.11.28
첫댓글 케이블카 레일바이크 정복기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