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유의 유형과 기능
서구에서 보이지 않는 신(神)까지 벌거벗은 바람둥이로 조각하여 보여주는 것은... 종래의 비유에 대한 유형 분류는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책에서는 직유, 은유, 상징, 의인법, 제유, 대유 등으로 나누고, 또 어떤 책에서는 은유와 상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방식에 따라 <은유(隱喩), metaphor>라고 부르던 것은 <치환은유(置換隱喩), epiphor>로, <상징(象徵), symbol>이라고 부르던 것은 <확장은유(擴張隱喩), extensive metaphor>로 바꿔 부르고, 1960년 이후부터 주목하기 시작한 <병치은유(竝置隱喩), diaphor>를 추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T=V>로 바꾸어 말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들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이런 어법을 택할 때 어떤 시적 특질이 나타나는가 알아보기로 합시다.
1) 치환은유(은유) 치환은유(metaphor)는 부분적으로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강제로 같다고 말해 왜 이렇게 말하는가 따져보도록 만들기 위한 어법입니다. 따라서 원관념을 <T=V>로 바꾸는(置換) 어법으로서, 이 어법을 <치환은유>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T 이질성(Diferenetiation) V (원관념) 유사성(Simiarity) (보조 관념)
그런데, 일부에서는 직유(直喩), 의인법(擬人法), 제유(提喩), 대유(代喩) 등을 치환은유와 대등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T=V>로 바꾸는 어법으로서, 치환은유의 하위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선 직유(直喩, simile)에 해당하는 '한 송이 꽃 같은 그녀'와, 은유에 해당하는 '그녀는 한 송이 꽃'이라는 구절을 비교 해봐도 그렇습니다. 직유는 '처럼', '같이', '인 냥'이라는 <연결하는 말(繫辭), copula>이 들어 있지만, <그녀(T)=꽃(V)>로 바꾼 것이라서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또 '나무가 춤을 춘다'와 같은 의인법(personification), '감투를 쓰다(벼슬을 하다)'와 같이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접(synecdoche), 김소월(金素月) 시를 '김소월'이라고 바꿔 부르는 대유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법은 <사물→인간>으로, 제유법은 <부분→전체>로, 대유법은 <부분→전체> 또는 <전체→부분>으로 바꾸지만, 역시 <T=V>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치환은유의 하위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습니다. 치환은유의 하위 유형을 구조에 따라 나눌 경우에는 원관념을 겉으로 드러내는 <현시형(顯示形) 치환은유>와 속으로 숨긴 <잠재형(潛在形) 치환은유>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언덕은 꿈을 꾸는 짐승 언덕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월이 능금꽃 속 숨어 있었다. - 김요섭 <옛날>에서
ⓑ 적들이 뿌린 삐라 한 장이 던져져 있다. 얇은 옷을 입은 파르티잔 하나 소총(小銃)을 든 채 죽어 있다. - 이건청, <인테리겐챠.4> 전문 ⓐ는 원관념인 '언덕'이 문장의 표면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의 원관념은 '민족상쟁의 비극이나 슬픔'이지만 숨겨놓고 있습니. 따라서 ⓐ는 <현시형(顯示形), ⓑ는 잠재형(潛在形)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현시형은 문장의 표면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드러나 시인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원관념과 거리가 먼 보조관념을 내세워도 쉽게 이해됩니다. 반대로, 잠재형은 원관념을 숨기기 때문에 시인의 의도를 얼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이 곰곰이 생각하고, 시의 의미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사이가 너무 멀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현시형으로, 가까워 이해하기 쉬운 것은 잠재형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치환은유에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1:1>로 대응시키는 <단순 치환은유(simple metaphor)>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원관념을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1:N) 바꾸는 <복합 치환은유(mixed metaphor)>가 있습니다.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속합니다.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러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 김동명, <내 마음은>에서
ⓓ 바람도 없이 공중에서 수직으로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높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 한용운(韓龍雲), <알 수 없어요>에서
ⓒ는 원관념인 '내 마음'을 '호수', '촛불', '나그네'로 바꾸고, 그를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시형 복합 치환은유>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는 원관념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오동잎', '푸른 하늘', '알 수 없는 향기' 등을 통하여 이들의 원관념이 '님', '조국', '도(道)'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러므로 <잠재형 복합 치환은유>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을 동원하는 복합 치환은유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암시하고, 그로 인해 시의 의미가 풍부해집니다. 반면에 보조관념들이 너무 이질적이라서 초점이 잡히지 않으면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고, 비슷한 것들을 내세우면 반복된 느낌이 듭니다. 치환은유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강제로 결합시키는 어법이라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대조→ 차이점의 발견→화자의 주장과 독자 생각의 대결→화자의 주장을 수용하기 위한 분석→동일성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전환>의 과정을 거쳐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하기가 어려워 포기할 단계까지 갔다가 동일성이 발견되는 작품이 가장 강렬한 기쁨을 줍니다. 치환은유의 기능은, 첫째로 시인의 사상과 정성를 형상화하고, 확대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작품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월의 언덕=짐승>, <민족 상쟁에 대한 슬픔=쓰려진 파르티잔>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보조관념들을 시인의 사상과 정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그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고,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둘째로, 작품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유물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까지 부여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그리기 때문에 비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풍경화로 바뀌어 통일감을 줍니다. 셋째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앞의 작품에서 '짐승'은 5월의 언덕에 대한 느낌을 형상화하기 위한 비유물입니다. 그러나, <언덕+짐승>으로 바뀜으로서 <언덕=짐승>이라는 제3의 사물로 발전합니다. 언어가 아무리 자의적(恣意的)인 기호라고 해도, 비유물을 지칭하는 언어에 남아 있는 감각이 결합하여 또 다른 사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 병치은유 현대로 접어들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병치은유(竝置隱喩, diaphor)는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을 비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어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합 치환은유의 구조가 <T=V(v1+v2...)>라면, 병치은유는 <(T)=v1/v2/v3...>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 원관념을 숨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병치한 보조관념들끼리 '비인과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사한 보조관념들을 나열하면 잠재형 복합 치환은유로 바뀌고, 동일한 보조관념을 병치하면 상징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치은유는 원관념을 숨긴 채 이질적인 보조관념을 비인과적으로 병치하는 경우로 제한됩니다.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들을 비인과적으로 병치하면 시인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시인의 의도는 모티프와 모티프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조각난 퍼즐을 끼워 맞추듯 병치한 모티프들을 연결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로 인해 어느 어법보다 많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휠라이트(P.Wheelwright)가 이 어법을 독자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병치은유의 하위 유형은 어떤 모티프를 병치했느냐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논리상으로는 <음운(音韻) 병치>, <어휘(語彙) 병치>, <이미지 병치>, <에피소드 병치>, <리듬 병치>가 모두 가능하지만, 음운이나 어휘 병치로는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유형을 설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작의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유형은 <이미지 병치>, <에피소드 병치>, <리듬 병치>라고 봐야 합니다. 다음은 이미지 병치를 채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 선교사네 집 회랑(回廊)에 걸린 청동 시계가 겨울이 다 갔는데 검고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 3>에서
이 작품은 <벽>, <늙은 홰나무>, <호주 선교사네 집 청동시계>, <내 곁에서 자는 바다>, <바다가 키우는 숭어 새끼>라는 5개의 이미지를 병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벽'이 걸어왔다면 어떤 느낌이었다든지, 그래서 화자나 벽이 어떤 행동을 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텐데, 엉뚱하게 '늙은 홰나무'와 '청동 시계'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뒤 이미지들을 비인과적인 이미지 병치에 해당합니다. 이미지를 병치하면 이미지 단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각 이미지끼리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없어 시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제시된 순서대로 이미지들을 결합시켜서 시인의 의도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에피소드 병치는 이미지 대신 에피소드를 병치한다는 점에서 차이아 납니다. 그로 인해 에피소드 단위로 의미가 형성되지만, 전체 의미는 얼른 형성되지 않습니다. 다음은 리듬병치를 채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드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 김춘수 <처용단장 제2부 5> 전문
이 작품에서는 '불러 다오'라는 청유문(靑誘文)과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문(疑問文)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면 올 수 있는 걸 부르는 게 아니라, '멕시코'와 '옥수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사바다는 사바다'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문형을 반복한 것은 리듬을 형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멕시코', '사바다', '옥수수'를 불러달라고 한 것은 의미를 약하시켜 리듬만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리듬만을 전달하고 독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를 요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수는 이런 어법으로 쓴 자기 시를 '무의미(無意味) 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승훈(李昇薰) 역시 이런 어법을 채택하면서 '비대상(非對象) 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완전히 의미를 배제한 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멕시코', '사바다', '옥수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불러달라는 의미만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춘수는 자기 시를 '무의미의 시'라고 명명했지만 '무의도(無意圖)의 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승훈이 실재의 사물을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라는 뜻에서 자기 시를 '비대상 시'라고 부릅니다. 병치은유의 기능은, 첫째로 시인의 의도를 극단적으로 약화시켜 시를 순수한 회화나 음악 상태로 이끌어간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 작품의 의미를 시인의 의도와 연관지어 해석합니다. 그런데, 해석의 실마리인 시인의 의도를 제거하기 때문에 표현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이미지일 때는 시를 회화적인 상태로, 리듬일 때는 음악적인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둘째로, 시인의 의도를 추론하기 위해 제시된 모티프들을 결합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로 인해 무수한 자의적 해석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독자들은 '말장난'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르므로 이 어법은 작품 전체에 적용하기보다 어느 한 부분에서 적용하거나, 조금씩 미끄러뜨리는 방식을 택하여 독자들이 추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모티프의 수도 3-4개가 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합니다. 그보다 많을 경우에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아예 결합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확장은유(상징) 종래에 상징(象徵)이라고 부르던 확장은유(擴張隱喩) 역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 무엇으로 바꾸는 어법으로서, 잠재형 복합은유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다음 작품도 앞에서 살펴본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와 거의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_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柳致環) <깃발> 전문
그러나 한용운의 작품은 <오동잎→푸른 하늘→알 수 없는 향기...>처럼 계속 새로운 보조관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작품에서는 '깃발'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용운의 작품에서 '오동잎', '푸른 하늘' 등은 원래 <님>이나 <도>라는 의미를 지닌 게 아니라 시인이 임의로 부여한 의미인 반면에, 이 작품의 '깃발'은 원래부터 <이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재형 복합 치환은유는 시인이 강제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시키는 어법이고, 확장은유는 보조관념이 지니고 있던 의미 일부를 빌려 쓰는 어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로 인해 확장은유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그 사물이 지닌 의미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 확장은유를 원시적(原始的)이고 마술적(魔術的)인 힘에 의하여 합일성(合一性)을 부여하는 어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확장은유 역시 모든 유형이 동일한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어떤 상징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하위 유형을 나눕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개인적 상징>, <보편적 상징>, <원형 상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인적 상징은 시인이 임의로 만들어낸 상징입니다. 김춘수가 자기 시에서 '바다'를 <질병>, <죽음>, <회복>, <부활>, <유년> 등으로 사용한 예가 이에 해당합니다. 바다를 모성(母性)이나 죽음으로 사용한 예는 있어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예는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상징은 그것이 상징임을 독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면 은유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개인적 상징임을 알리려면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보편적 상징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으로 만들어낸 상징을 말합니다. 이런 상징은 다시 <인습적(因襲的)>, <제도적(制度的)>, <전통적(傳統的)>, <문화적(文化的)>, <자연적(自然的)> 상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습적 상징은 그 사회에서 인습적으로 사용하는 상징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희생, 사랑, 봉사, 고통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이런 예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전통적, 문화적 상징은 어떤 민족이나 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상징을 말합니다. 다음 작품은 문화적, 전통적 상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계속 이론만 이야기하니까 지루하지요? 그럼 이 작품을 해석하기 전에 이를 쓴 서정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참 바람기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선생님의 바람기가 자라고 밤마다 장독대에다 냉수를 떠다 놓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시를 쓴 분이니까 이 정도의 이야기는 밝혀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에 하는 겁니다. 언젠가 한성기 선생님이랑 김윤성 선생님이라 저랑 셋이 선생님 댁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실에서 수인사가 끝나고, 한선생님이 '지금도 여자가 그렇게 좋으세요?'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서선생님은 '한 형(兄)도 내 나이쯤 돼 보시오. 다 소용 없어요'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문단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후배에게는 '형', 선배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좀 싱거웠지요. 그런데 반대편에 앉아 계신 선생님이 사모님께서 맥주를 가지고 거실로 나오시는 걸 보고 그렇게 응대하신 것입니다. 사모님이 주방으로 들어가시자 선생님은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좋기는 여자가 기중 좋으이."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아니, 저는 어른들 틈에서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이 참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예술가들에게 아주 고매한 인격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흠결(欠缺)이 발견되어도 예술적 성과까지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이런 기준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작품과 인격을 별개로 봅니다. 예를 들어보라고요? 괴테는 일흔 살이 넘어서도 어린 소녀들을 쫓아다녔고, 보들레르는 창녀들 틈에서 살았고, 베를렌느는 랭보랑 동성연애를 하느라고 신혼의 아내를 버렸고, 밀턴은 바람둥이고, 톨스토이는 아내를 버리고 러시아를 전전했고, 포우는 형무소를 드나들었고, 파운드는 파시스트였고, 엘리엇은 고국인 미국이 싫어 영국으로 귀화했고.... 세계적인 문호일수록 도덕적인 사람이 드뭅니다. 아름다운 작품은 완전한 인격에서 나오기보다는 완전에 도달하려는 고민과 갈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행동을 한 게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이 발견되면 다독이면서 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자는 아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고 잘라내면 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아, 그럼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문화적 상징을 택하면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은 문화적, 역사적 공동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문화권이 다르면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국화 옆에서>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자 문화권의 독자들은 '국화'를 시련을 이기고 태어나는 선비 정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시련은 불교의 연기설화(緣起說話)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독자들에게 국화는 죽음의 상징이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죽음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서양에서 국화는 무덤 가에 심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적(自然的) 상징은 상징물과 원관념의 속성이 서로 유사하여 채택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속합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기사 오면,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 박두진 <해>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가 말하려는 것은 밝고 환한 조국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해'를 택한 것은 해가 광명과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원형 상징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원형 모티프를 말합니다. 이런 상징을 채택하면신과 영웅과 범인의 삶이 동일하다는 <초월적(超越的) 동일성>과 <통시적(通時的) 동일성>을 느끼게 됩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을 비롯하여, <심청전>에서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현대 제사에서도 양(羊)이나 돼지 머리 또는 돈을 바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과 인간의 심리와 제의(祭儀)의 양식이 비슷하다는 걸 깨닫게 만듭니다.
다음 작품은 원형 상징을 택한 예에 속합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尹東柱) <십자가>에서
이 작품에서 '십자가'를 희생과 봉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인습적 상징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죽겠다는 것은 원형상징으로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속죄양(scape-goat) 설화에 해당합니다.
확장은유의 기능은, 첫째로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달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적 긴장이 떨어진다는 게 약점입니다. 치환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대조하여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확장은유는 이미 그렇게 해석하는 것들을 비유물로 채택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관념과 사물이 합동을 이루면서 입체화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오렌지이기에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중략)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는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 신동집 <오렌지>에서
어때요? 손바닥에 오렌지를 올려놓고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지요? 이렇게 상징물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 그를 지칭하는 언어에 배어있는 감각이 누적되어 실제 사물을 접하는 것처럼 바뀌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부여할 경우 더욱 입체화됩니다.
'언어의 감각이 누적된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요?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파아란 물푸레나무, 보드레한 이파리, 솜털이 보송보송한,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햇살에 얼비치는, 아주 투명한..., 하는 식으로 자꾸 이파리를 거론해보세요. 기호에 불과했던 '이파리'는 실제 이파리처럼 바뀌고,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셋째로, 시인이 말하려는 원관념과 상징물의 의미가 합쳐져 다의적(多義的)으로 확산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렌지를 까고 싶으면서도 손을 대는 순간 주체나 객체가 모두 변질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비롯하여, 경험해서는 알 될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보편적 욕망으로 확대사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 】 0 각 어법의 기능과 장단점을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세요. 0 자신이 쓴 작품 가운데 하나를 골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빈 틈 크기를 조절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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