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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다메섹 체험 증언
행 26:13-23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13-23 / 그날 정오쯤이었는데 태양보다도 더 눈부신 빛이 하늘에서 저와 제 일행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14) 저희는 그만 모두 땅에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우리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에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이다' 하고 제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5)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내가 묻자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16) 자, 일어나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종과 내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다. 너는 이 경험과 후에 또 여러 번 내가 네게 나타내 보일 일을 세상에 전하여라. 17) 내가 너를 네 동족과 이방인들 속에서 건져내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려는 것은 18) 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바른 자세를 갖고 죄를 회개하여 사단의 흑암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죄가 깨끗이 씻겨진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될 것이다.' 19) [자기 임무를 설명하는 바울] 아그립바 전하, 저는 하늘로부터 받은 그 계시를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20) 저는 다메섹에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들에게도 모두 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보이라고 전파하였습니다. 21) 제가 이런 설교를 한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저를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고 하였지만 22)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살아 남아서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가림없이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언자들이나 모세가 말하지 않은 다른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23) 그것은 바로 메시야는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빛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체포할 권한과 위임을 대제사장에게서 받아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합니다.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13-16) 갑자기 하늘에서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바울과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이 빛에 압도되어 우리 모두 땅에 엎어져 있을 때에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짐승의 주인이 부리는 짐승의 뒷발질을 막기 위해서 수레 앞에 달아 놓은 가시를 말합니다. 짐승이 성질을 부려서 뒷발질을 하면 가시채에 찔려 고통을 받고 순순히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자기 길로 가는 바울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매개입니다. 이러한 음성에 놀란 바울은 자신에게 말하는 이가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간증은 여전히 삶의 가시채 아래서 괴로워하는 아그립바를 비롯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행복에의 초대였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17-20) 바울은 이 때에 자신이 받은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죄 사함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는 하늘의 계시를 거역할 수가 없다는 명품 표현입니다(19). 그러므로 자신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다가 이 자리에 섰고 지금은 이 자리에서 증언을 듣는 사람들도 아그립바 왕을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주님을 거스르지 말고 영접해야 한다는 증언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담대하고 끈질기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거스를 수 없는’ 곧 ‘저항할 수 없는’ 주님의 계시 때문입니다.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21-23)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전하고 자신의 사명에 순종하기에 유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변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약속의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적용: 바울이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받은 바 하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 거스를 수 없는 사명을 어떤 자세로 감당했나요? 바울이 증언하는 모세와 선지들의 핵심 내용이 지금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왔나요?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때문에 흘러갈 수 있도록 물길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은혜가 계속적으로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낼 때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26:13
정오 - 22:6의 오정 쯤(* , 메셈브리안)이 대략적인 시간(about noon)을 나타내는데 비해 본문의 '헤메라스 메세스'(* )는 정확한시점, 곧 '한 날의 중간'(in the middle of the day)을 나타낸다. 팔레스틴의 정오는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데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있었으니 그의 열성이 어떠했는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때가 한 낮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있었던 일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이하에는 강렬한 빛에 의해 바울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으며, 모든 관심은 주님이 하는 말씀에로 집중되어 있다.
=====26:14
히브리 방언으로 예수께서 - 아람어로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본다(21:40). 바울의 회심을 기록한 다른 곳에는 '히브리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주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사울'(* )이라는 아람어로 불렀다는 사실이 암시되기는 하였다(9:4;22:7). 반면 9:1에는 '사울로스(* )라는 헬라어 이름이 사용된 것과 비교하라. 가시채를...고생이니라 - 이 말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본래적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농경 문화에 배경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가시채'는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킨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잘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한편 이 속담은 유대교 내에서도알려져 있었으며(솔로몬의 시가 16:4) 필로(Philo)는 양심이 어떻게 사람에게 상처를입히는가를 언급한 바도 있다. 혹자는 본문의 말씀이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Bruce). 즉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감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 정해진 섭리를 거역했던 바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신말씀으로 이해함이 더 무난하겠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 역사에 의한것임을 이속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26:15
네가 핍박하는 예수 - 본절의 문구는 9:5와 문자적으로 일치하나 22:8에는 '나사렛'이란 말이 첨가되어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주해는 9:5;22:8 주석을 참조하라.
=====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고 대신 아나니아를 통해 받은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이 소명의 인식을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 받았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건그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상황에 맞추어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수적인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전달하고자 했다. 가령 아나니아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을 상대로 말할 때는 자신의 유대교적 경건성과 정통성을 증거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과 같이 헬라적 청중들까지 포함된상황에서 변증할 때는 유대교적 경건과 정통성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어떻게 이끌림을 당했는가를증언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상기시킨다(겔 2:1, 3;렘 1:7, 8). 뿐만 아니라 바울의 소명 내용도(18절) 사 42:5-7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소명과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나를 본 일...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 -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함이었다. 여기서 '나를 본 일'은 지금 다메섹에서 경험한 것을 가리키며, '장차...나타날 일'은, 앞으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보여질것(16:9, 10;18:9;22:17, 18;23:11;27:23;고후 12:1-4, 7)을 가리킨다. 이는 바울이 두려움과 외경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도록 명령받았음을 시사한다.
=====26:17
구원하여 - 헬라어 '여사이루메노스'(* )는 '여사이레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선택하여'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가령 고대 헬라어와 70인역 사 48:10에서는 '선택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파피루스 문서들에서는 두가지 의미 모두로 다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 간에는 '선택하여'(Overback,Randall)로 보는 견해와 '구원하여'(Bruce, Haenchen, Meyer)로 보는 견해로 갈린다.그런데 본서의 다른 곳에서(7:10, 34;23:27)이 단어가 '구원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 사실상 바울은 과거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함을 받았었다(9:23-25;21:30-32;23:12-24;25:3).
=====26:18
눈을 뜨게 하여...빛으로 - 이 본문은 사 42:6, 7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사42:6)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롬 1:24;엡 5:18) 벗어나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요 8:12;요일 1:5).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배를 뜻한다. 이것을 골 1:13에서는 흑암의 권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대비시킨다. 흑암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사함을받고 그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 사용된 신학적 언어는 개종의특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며 아그립바가 유대교적 테두리에서제대로 이해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H. Marshall).
=====26:19
하늘에서 보이신 것...거스르지 아니하고 -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다(렘 20:9). 그가 그리스도인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처럼(13-18절),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소명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거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다. 그러나그것은 단지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삶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일관된 내용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豫定)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롬 9:19-24;엡 3:9-11), 자신의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고전 15:43), 자신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딤전1:15)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26:20
다메섹...예루살렘...유대 온 땅과 이방인 -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서술한 듯하다. 실제로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9:19), 다음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9:28, 29)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유대 온 땅'이라는 표현은 갈1:22 등으로 미루어 다소 과장된 듯하다(Bruce, Marshall, Haenchen). 회개하고...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의 촉구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마 3:2), 예수님도 그랬으며(마 4:17),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회개를 선포했다(행 3:19).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어두움에서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18절)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표현은 마 3:8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를상기시키는데,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바 있다(갈 5:22, 23).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거된다 하겠다.
=====26:21
성전에서 나를...죽이고자 -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21:26-28).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시켜설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정죄는(21:29 주석참조) 하나의 계기일 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보다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한 까닭이다(22:21, 22).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 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Bruce).
=====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21:31, 32;23:12-15).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으며 17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다.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 앞에서는 복음이 민족의 차별을 뛰어넘어 유대인에게도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말했으며(17, 20절), 여기서는 복음이 신분이나 지위에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힌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준다(요 3:16). 선지자들과 모세 - '율법과 선지자'(13:15)와 같은 뜻의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요약한 말이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 모세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롬 1:2;16:26).
=====26:23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 - 사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기독교는 예수께 적용하여 예수의 수난을예언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다시말해서 유대인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다.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공의로 통치할 지상적.정치적 인물이었다(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 참조). 먼저 다시 살아나사...빛을 선전하시리라 - 메시야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만방의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사 42:1-7;49:6;60:3 등에 나온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그들로서는 메시야가 죽었다가 첫번째로 부활하리라는 생각 역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메시야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는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모든 민족에게 빛을 선전하신다. 한편 '선전하시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탕겔로'(* )는 '공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빛을 선포한다 함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요(약 1:17;요일 1:5), 어두움이 아니라밝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포한다는 말이다(18절).
< 설 교 >
나를 향하신 주님의 요청
행 26:13-18 / 김상수 목사
5.16 군사혁명 후에 정치적인 사안 때문에 김종필 중령이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 중령에게 외유 나가서 대통령 특사 자격을 가지고 자유롭게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든지 다니라고 하면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대통령 특사 자격을 가지고 가서 그 나라가 어떻게 해서 잘 사는지 그 원인을 살펴서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김종필 중령이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잘 사는 나라들은 모두 국기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모두 다 잘사는 선진 국가였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도 지위가 높은 사람의 요청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의 요청을 이 시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주님의 요청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자기 고향을 찾아 왔을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모함해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마친 후에 베스도라는 총독이 새로 부임했으며, 분봉왕 아그립바가 인사하기 위해 문안차 베스도 총독을 찾아와 이야기 하는 가운데 바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딥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증거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요청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의 내용들이 그때에는 교과서적이었지만 이 말씀을 오늘 현재 나의 삶에 재해석하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따라서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는 진정한 의미의 설교가 될 수 없고 성경 본문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요청하셨던 그 요청이 오늘 나에게 무슨 요청을 하고 계시는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내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바울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실 때 “예수님을 본 일에 대해서”와 “예수님이 바울에게 계속하여 앞으로 나타낼 일”에 대해서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서 죄 용서함을 받게 하며,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서 천국의 기업을 얻도록 하려고 너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심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본대로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에 목격자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어야지만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분들입니다. 기쁜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증인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내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가? 내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 어떻게 주님을 인격으로 만났는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을 인격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바른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저도 목사의 자녀로 자랐습니다. 모태신앙이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30대 중반까지 어디를 가든지 1등 신자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향해 저 사람은 틀림없는 신자라고 했지만 제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일대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전에 내가 섬겼던 주님은 저 멀리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기도 할 때에 “저 높고 높은 보좌에 높이 앉아계시며 저 높은 보좌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거룩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늘 이런 기도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만물을 통치하셔서 미국의 백악관쯤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났을 때에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내안에 계시며 피부로 느끼고 나의 지. 정. 의를 동원해서 그 분을 만나게 되고 얼마나 좋은지 그때에 제가 은혜 받은 찬송이 495장이었습니다.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권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어니나 하늘나라
이 찬송이 어쩌면 그렇게 가슴에 닿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평범한 가운데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주님을 만났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길에서 만났습니다. 만난 직후에 눈이 어두워졌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고 다메섹에 가서 며칠동안 앞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라는 여종을 통하여 기도하게 하셔서 눈을 열어 보이시고 주님의 사명을 그가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두려워하는 아나니아에게 “그는 나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전도해야할 나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가 만났던 주님을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고생고생하며 살지만 정상적으로 살다가 시력을 잃은 사람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날 때가 언제입니까?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죽을 고생을 할 때이며,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갔을 때에 매달려서 응답받고 해결 받고 응답받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 경찰서장님을 만났을 때에 이런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분이 “목사님! 저도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장님, 평범하게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저 크게 깨닫거나 아니면 죽을 고생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안한 가운데 주님 만나지 못한 분들은 주님 만나기를 구해야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해서 만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만날 때에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만남은 아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제가 옛날 제 아내를 만났을 때에 제가 아는 아내는 그저 키가 큰 여자로만 보였고 저와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가 사랑하게 되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는 멋있고, 기다려지고, 만나면 좋고, 또한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였습니다.
여러분,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 때와 만날 때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주님을 만나면 좋고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만났는지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계속하여 나타나신 일에 대해서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앞으로 네가 선교사가 되어서 계속 선교 할 때에 네가 가는 곳에서 지켜주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기를 마시며 공기 속에 살고 있지만 공기를 잘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인격으로 만난 후 계속해서 나와 함께하신 주님을 수 없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간부터 3주일간 미국집회에 갑니다. 여행 중에 캐나다를 다녀와야 하는데 일정 중에 밴쿠버에서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제가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밴쿠버에서 하루를 지내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낼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서 맨 처음 만난 분이 얼굴도 모르는 선교사님인데 저더러 “김상수 목사님이시지요”라고 물으며 자기는 밴쿠버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밴쿠버에 최종주 집사님이 계시는데 김목사님을 만나면 꼭 전화번호를 드리라고 해서 제가 이렇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분은 5년 전 캐나다로 이민을 가신 분인데 그분은 저에게 책을 공급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책을 사준 것 밖에 없었는데 선교사님이 밴쿠버 미장원에 갔을 때 그분이 미장원에서 선교사님 부인과 어떻게 이야기 하다가 저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선교사님에게 목사님을 만나서 건강보조약도 좀 갖다 드리라고 했는데 못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5년 전에 이민 간 그 가정이 하필이면 왜 지금 저와 연결되게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저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연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함께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나타낼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요청을 따르면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마귀에게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 증인이 되어야할까요?
17절에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동족이며 이방인들은 불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은 우리의 일가친척과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말하며 이방인은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에게 증인이 되어야할까요? 나와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게 증인이 되어야 하고 불신자들에게도 내가 만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시켜서 내가 있는 일터에 보내시고 내가 있는 모든 환경 속에 나를 보내신 것은 바로 나를 구원시키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보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까운 위치에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높은 위치에 오르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좋은 자리에 계신 높은 분들에게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왕과 총독 앞에서 증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 경찰서장님과 식사를 같이 하고 함께 경목들과 파출소장님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장님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안양시가 전국에서 가장 치안이 안정되어 있어서 범죄율이 가장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장님 그것은 첫째 경찰서에서 가장 수고를 많이 하셨구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들이 평소에 늘 선교하며, 구제하고 어려운 분들을 도와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TV에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가 수재민들을 돕는 것도 TV에 나오지 않지만, 불신자들은 어쩌다 한번 한 것을 TV에 도배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난 모든 위치에서 증인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사업장과 보내주신 일터가 선교지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게 보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평신도는 목사보다 나은 특권이 있습니다. 목사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불신자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불신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미국의 전도폭발을 제일 처음 시작하신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많은 분들이 우리가 목사님에게 월급을 주고 있는데 왜 전도 안하시느냐고 말한다고 해서 이 목사님은 “목사는 운동선수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코치가 되어야 한다. 유능한 코치는 나가서 직접 뛰는 것이 아니고 선수들로 하여금 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핑계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새로 나온 식구들도 다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전도를 하겠습니까? 제게 주어진 일은 여러분이 전도를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저의 임무인줄로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저보다 직접 전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 특권을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준비해야 합니다.
여행 할 때에 준비해야 하고, 등산할 때에도, 전쟁터에 나갈 때에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느 군목시험을 치는데 군종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3분후에 사람이 죽는데 그 사람에게 가서 가장 긴급하게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군종이 수첩을 끄집어내더니 기도문을 찾느라고 뒤적였습니다. 그래서 군종관이 그것이 아니다. 이 급한 사이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했습니다. 이럴 때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구절을 대주어야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구도 준비하고 간증도 준비하고 물어야할 질문도 준비해야합니다.
기도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기도 준비하고 고향에 가서 10년 동안이나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허드슨테일러 선교사가 중국에서 제일 선교하기 힘든 지역이 광동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님이 볼 때에 그 지역은 제일 선교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그 후 고국에 돌아가서 어느 집회에 갔을 때에 광동시 어느 선교사님의 친구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선교사를 아십니까? 알고 있다고 말하자, 나는 그 선교사를 위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 지역에 선교 열매가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영적 싸움이며 후원군이 필요합니다. 전도는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내가 성령 충만해서 넘치는 성령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별되게 살아야합니다.
배가 물에 떠 있지만 배에 구멍이 나면 배는 가라앉습니다. 구별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인정을 받아야 그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배가 물에 떠있어야 다른 사람을 구하지 배에 구멍이 나서 물에 가라앉아 있으면 어떻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은 적어도 불신자와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생의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삶 속에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길가다가 전도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참된 전도는 평소에 뜻을 세워서 ‘주님 나의 삶 속에서 좋은 관계를 가지게 해 주셔서 그들이 나를 보고 교회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일생동안 제가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시고 때가 되면 그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될 것입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헌신해야합니다.
여러분, 선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는 절대로 선교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이 한명을 키우려면 열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야 하고, 낳아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까? 이와 같이 한 영혼을 구원 하는데 그만한 수고와 노력이 있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하셔야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일을 하고 사셔야합니다. 검찰청 검사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소장에 들어가서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는데 이분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원칙만 따지고 융통성이 없어서 화해를 시켜도 잘 되지 않아 골치 아프기 때문에 서류를 빨리 넘겨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서류가 아닌 것은 본인들을 불러서 화해할 것은 하고, 이해할 것은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불신자들 보다 못하다는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의 상식보다 우리는 월등히 높아야 할 터인데 불신자들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얼마나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이 일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나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어서 의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지만 의사가 되어서 희생하고 헌신할 때에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전도자에게는 순교자의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실 때에 눈을 멀게 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눈을 뜨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했을 때에 아나니아는 “아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내가 거기에 갑니까?” 그때에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사도바울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 사도행전 9장15절에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으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아야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전도하러 나가는 사도바울을 왜 고생하게 만들까요? 전도는 순교적인 희생이 없이는 안 되기 때문에 거기 대처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희생과 헌신 없이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지난 한달 전 우리가 일본 목사님들 20여명을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들 중에서 한국 목사님 한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일본 목사님들이 모이면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부흥이 되는데 일본교회는 왜 부흥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 때문에 노회가 모여서 토의할 때에 나이 많으신 목사님께서 자기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시면서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이 많이 배출된 교회이지만 일본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순교자가 있었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편안하게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며 땀 흘리고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가 되어 있는 자에게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의미를 알아야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혼자 반문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그냥 천당에서 나서 천당에서 살게 할 것이지 왜 세상에 보내셔서 이렇게 고생하게 하십니까? 빈손 들고 가서 빈손 들고 오게 만드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에서 고생을 죽도록 해보고 죽음이라는 과정도 통과해 보면서 비로소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사모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고생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이 땅에 올 때에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왔으나 천국에 갈 때에는 주님을 닮아서 가야합니다.
그래서 갈등 속에서 마찰하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눈물 흘리며 금식기도하고 몽골몽골해서 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에서 하나님 일을 하고 와야 하기 때문에 자식들을 낳아서 전도할 수 있는 내 영혼의 자식을 많이 낳아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 많은 상급을 준비해 주시려고 세상에서 고생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물질과 재능과 환경이 다 전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 때에 빈손 들고 가지만 꼭 가지고 갈 것은 주님 닮은 믿음의 인격을 가지고 가야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상급으로 저축되어 있는 것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표를 여기에 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시고,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시며, 그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위해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상급이 얼마나 크냐면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궁창의 빛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은 그 위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쳐다보며 영원히 비췹니다. 우리에게 주실 상은 이렇게 크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어도 다 버리고 선교사로 나가며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모두 평신도라 할지라도 좋은 것 준비해두시고 주시려는 이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뒤를 따라서 이 축복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행 26:13-18 / 박금호 목사
지난 주일에는 “내게 주신 은혜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으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 오늘도 “오직 은혜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그립바 왕 앞에 피의자로 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삶을 묘사하는 대목과, 예수께서 자신을 만나서 주셨던 은혜를 묘사하는 대목, 그리고 은혜를 받고 난 이후 자신이 받은 사명을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Ⅰ. 바울의 과거 : 생명 없는 종교주의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은혜 받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란 종교적인 보수주의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특별한 열심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정한 시간에 기도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를 했으며, 십일조를 드렸으며, 집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붙여놓았습니다. 손목과 미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아서 차고 다녔습니다. 또 죄인으로 여겼던 세리나 고리대금업자, 창기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613가지의 세부규정을 만들어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바리새파 중에서도 바리새파라고 할 만큼 열성분자였습니다. 또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기 의를 내세울 만 했으며 종교적 열심이 특별히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는 참으로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을 손바닥으로 비벼 먹는 것이나 병자를 고치는 일 따위는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어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율법 이해, 바울의 하나님 이해로는,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철저히 종교에 얽매이고 율법에 얽매인 뼈만 앙상한 종교주의자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웠지만, 그의 영혼 가운데는 평안도, 자유함도, 기쁨도, 사랑도 없이 메마름과 영적인 허무 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기와 독선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예수를 만나기 이전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Ⅱ. 바울의 현재 :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은혜 받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밝힌 다음,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핍박자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러분, 이때 주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진노의 음성으로 들렸을까요? 아니면, 안타까움과 연민에 싸인 부드러운 목소리였을까요? 결코 진노의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받은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용납하시고 부드럽게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자비로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가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저와 여러분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도, 우리가 거역할 때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왜 그길로 가느냐? 그렇게 하면 너만 고생이다.” 이렇게 매일 부르시고 만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폭풍이 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내니 안심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바다에 역경이 닥쳐올 때,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바울의 미래 : 은혜의 사명자
마지막으로 바울이 받은 은혜는 무엇일까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먼저, 저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을 “일어나 돌아서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나를 핍박하고 대항하기 위해서 쫓아온 걸음이었지만 이제 일어나 돌아서라. 내가 너를 내 증인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환’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한 심부름꾼’이라는 의미보다는 ‘심복’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즉 가장 가까이에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또 ‘증인’이라는 말도 단순히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라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이제까지는 핍박자였지만, 이제는 돌이켜 순교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자로 세워주셨다는 은혜, 그것이 지금 바울로 하여금 죄인의 신분으로 심문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각각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특권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받은 이후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미래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여기 은혜 받고 사명을 받은 자에게 변화될 수 밖에 없는 세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뀝니다.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죄사함과 기업을 얻게 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일에 대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예수 만나기 전에는 바울처럼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내 의, 내 종교, 내 사상, 내 고집 속에는 아무런 평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저항하고 반대하며 핍박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타나주셨습니다. 만나 주셨습니다.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삶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빈약하게 하고, 우리 가정을 빈약하게 하고,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을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나아가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죄사함과 아름다운 기업을 얻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믿으시고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13-29 / 손상률 목사
흔히 청춘남녀가 사랑에 깊이 빠저버리면 제 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사랑에 도취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듣게 할 때 이를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성경계시에 의한 기독교 복음의 신비는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이나 이성적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때 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을 수용하지 못했으며(요 1:11), 그의 하시는 일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마 12:24).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행 2:13).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기독교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오해하거나 이를 증거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곤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구금되어 있던 바울이 그곳에 온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 나와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가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을 듣고 있던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헤롯 아그립바에게 당신은 선지자를 믿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구금 당한 신분으로 심문을 받고 있지만 그는 왕과 총독 앞에서 자신 있는 모습으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모두 다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를 미쳤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Ⅰ. 경험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그는 지금 자기가 그곳에 서게 되기 까지의 모든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와 베니게가 위의를 갖추고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이 좌중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행 25:23), 바울의 진술을 듣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진술에는 힘이 있었고 단번에 심문자와 청중을 제압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겪어 나온 생생한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1) 박해자의 경력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중심에 서서 조직적으로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6:9-12에 보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 온갖 박해를 가하며 기독교 타도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으로 행동의 규범을 삼았습니다(9절). 대제사장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10절).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스데반을 죽일 때는 가편 투표를 했습니다(행 22:20). 회당에서 여러 번 성도들에게 형벌을 가했고 모독을 주었습니다(11절). 그것도 모자라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은 외국에까지 찾아가서 박해를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예수 믿기 이전에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서 숨김없이 드러내고 실토하는 것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하거나 무용담(武勇談)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어리석은 과오를 회개하는 뜻이며 그런 사람을 변화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반증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12절에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에게 붙들리게 된 경위를 밝혀 줍니다. 13절에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정오에 비취는 해 보다 더 밝은 빛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줄 그는 몰랐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9). 14절에 “우리가 다 땅에 엎드려지매 내가 소리를 들이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엉겁결에 “주여 뉘시니이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과거 그토록 원수시 하고 핍박하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그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됩니다. 성도에게는 이와 같은 중생의 체험과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3) 전도자로서의 경험
예수님의 명령대로 다메섹에 들어간 바울은 거기서 선지자 아나니아를 만났고 그에게서 안수를 받은 다음 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행 9:17-18). 그때부터 바울은 성령에 이끌려 각 회당에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행 9:20).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박해를 가해온 그 사람이 오히려 예수를 증거 하는 자로 나서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거나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효과는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일로 인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밖으로 탈출하였습니다(행 9:25).
Ⅱ. 확신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이런 진술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3:6에 보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8에도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피력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베스도의 명에 따라 심문 받는 형식을 빌어 왕과 총독에게 그의 신앙 내용을 소개 하므로써 전도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사도행전 26:6에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이란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로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4:25). 7절에 보면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라고 하였습니다. 곧 유대인들은 저희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써 메시야의 축복을 저들의 전유물로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동정녀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로마서 1:3-4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본문 말씀 23절에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것과 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사 생명의 주님이 되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케뤼그마(ϰηρυϓμα)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제자들로부터 역대의 모든 전도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하였다는 것과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요 영생의 실증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설교하기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행 5:30-31).
(3) 영광스러운 소망
복음의 결과는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행 26:7).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게 되는 기업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4에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영광스러운 기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받은 특권을 알고 있었습니다(롬 8:17-18).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었고(행 19:11),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죽음의 위기로 몰렸을 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는 장면을 체험하였습니다(행 16:25-31).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했습니다(엡 6:20).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와 동행을 하시면서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순발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확신에 찬 간증을 하였습니다(빌 4:13).
Ⅲ. 꿈이요 이상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나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하고 소리지른 베스도나 아그립바의 경우 바울이 경험하고 확신하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미치광이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그냥 유대인의 율법에 정통한 랍비요 높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증거하는 그 내용은 베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신령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8).
(1) 환상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환상이 있습니다.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신비의 환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변화산 위에서 광채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곳에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마 17:1-5).
바울은 셋째하늘의 체험을 가졌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때 그가 보고 들은 그 상황을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상태요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1-4).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환상과 그 싸인(sign)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처음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도(행 13:2),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갈 때도(행 16:8), 그리고 폭도들에게 둘러 싸여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자기 곁에 서신 주님을 보았고(행 18:9), 그때마다 저에게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북돋아 주었습니다(행 23:11, 27:23).
그는 훗날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1:18-19).
(2) 삶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에 대한 가치관의 기준이 정확합니다. 거기에 따라서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사생관도 분명합니다. 로마서 1:1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롬 1:4). 빌립보서 3:12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리스도 예수만 바라보고 그 길을 달려간 사람입니다(딤후 4:7-8).
바울의 경우 예수를 알고 나서 그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 지워버렸습니다. 빌립보서 3:7-8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요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에게 미쳐있는 바울에게는 베스도나 아그립바의 지위가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로마의 황제를 향하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16).
(3)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꿈입니다.
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베스도에게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잠시 후 “네가 짧은 시간에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서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속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복음전도의 열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이후로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당시의 세계를 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분봉 왕 헤롯 아그립바와 총독 베스도에게 뿐만 아니라 가이사 황제에게까지 복음을 가지고 도전하였습니다. 그의 비젼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석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열망이자 사명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사명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보다 더한 모욕을 받더라도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의 열매가 맺어진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상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빌 1:8).
부활의 신앙
행 26장 22~23절 / 박헌승목사
사도바울은 분봉 왕 아그립바왕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는 부활의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부활 신앙 속에 세 가지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부활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 22절, 내가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사도바울의 부활 신앙이 확고한 것은 성경말씀에 반드시 되리라고 한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과 모세’는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반드시 되리라고 미리 증언하였는데 자기는 그 성경을 믿기에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는 다는 것입니다.
2000년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다.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증거는 성경에 있습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부활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 (행 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먼저 살아나셨다는 것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도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그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그날에 다시 살아납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성도의 부활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진리입니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욥도 부활의 신앙을 소망가운데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원수가 마귀만이 아닙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세력 사망입니다.
마귀도 멸망받는 것처럼 사망도 멸망 받습니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죽음이 없어집니다.
(사 26:19)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우리는 반드시 다시 살아납니다.
3.부활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 (행 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빛은 생명을 말합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런데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믿는 자들만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자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자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의인의 부활이요, 저들은 악인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부활이요, 저들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행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다 같이 살아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도 저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1. 부활의 증거를 말씀안에서 가져야 합니다.
2, 부활의 소망을 예수안에서 가져야 합니다.
3. 부활의 생명을 영생안에서 가져야 합니다.
복음의 다섯가지 축복
행 26장 15~18절 / 노창영목사
서론//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입니다(막1:1). 모든 인류들이 다 기뻐하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을 열두 사도들에게 증거하라고 위탁하셨고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에게 그 일을 감당하도록 사도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은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임금 앞에 죄수의 몸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고 설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핍박자였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복음의 여러 가지 축복들을 18절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섯 가지 축복이 나오는데 그 중의 세 가지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Ⅰ. 먼저 복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To open their eyes) 합니다.
A. 영적인 맹인들
먼저 복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여 앞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맹(靈盲)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 사물만 보일 뿐이며,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는 안보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눈으로 분별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신령한 눈만이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한 장님을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니” 그 말은 눈은 멀쩡히 뜨고 다니는데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영적 장님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 세계에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빗대어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세계를 뛰어넘어 그 뒤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B. 이어령氏의 간증
2007년 7월 23일 한국 최고의 석학 이어령씨가 세례를 받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어령씨에게는 이민아라는 딸이 있는데 그녀가 먼저 믿고 이어령씨를 전도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민아씨는 갑상선 암에 걸리고 망막에 이상이 생겨 앞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이어령씨가 딸을 만나러 하와이에 갔는데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 딸을 살려주시고 앞을 보게 해주시면 예수를 믿고 입담과 글 쓰는 모든 실력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딸이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했더니 병이 다 낫고 눈도 멀쩡했습니다. 결국 약속대로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에 믿음이 들어가게 되고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어령씨가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는 눈물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했던 독설가였지만 주님을 영접하고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성의 세계가 다가 아닙니다. 그 뒤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신령한 자가 눈이 열려져 그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Ⅱ. 둘째, 복음은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To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돌아서게 합니다.
A.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서는 삶
북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인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이단에 빠지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밖에서 아이들의 라틴어 동요 소리가 듣습니다. "톨레 레게(Tolle lege), 톨레 레게(Tolle lege)" 번역하면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이 그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열었습니다. 로마서 13:12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 말씀이 마음을 치고 영적인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방탕한 삶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신학자, 목회자가 되어 세계 역사에 길이 남는 영적인 거장이 됩니다. 어두움에 빛이 들어와야 됩니다.
B. 빛은 외부에서 들어온다.
우리 안에는 빛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빛이 들어와 우리 마음속을 비춰줘야 합니다. 경주에 가면 석굴암에 아미타불 본전석불이 있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빛이 들어오면서 아미타불의 눈과 얼굴을 비춰 붉은 미소를 띄게 만들고 광채를 찬란하게 하여 석굴 전체를 밝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린스톤 신학교의 제임스 로더(James Loder)라는 교수가 석굴암에 가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있는 석불도 외부에서 빛이 들어와야 비취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빛이 그 안에 없습니다. 아름다운 빛과 광채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기 19:26에 욥이 말합니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기독교는 빛입니다. 창세기 1:3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요한복음 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도 보면 사도바울이 제멋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해보다도 밝은 빛을 비췄을 때 바울과 동료들이 다 엎드려졌습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를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 빛이 임하여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어둠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복음의 빛이 내 심령에 들어와 비춰줄 때 어둠이 사랑이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Ⅲ. 셋째, 복음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To turn them from the power of satan unto GOD) 돌아서게 합니다.
A.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
암이나 치명적 질병, 교통사고, 천재지변, 전쟁, 이런 것들이 왜 무섭습니까? 죽음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인간들을 평생 종노릇하게 만드는데 사탄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지금부터 2200년 전 진나라의 시황제가 오래 살기 위해 산해진미를 가지고 오게 하여 먹고 그래도 몸이 신통치가 않아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제주도에 서귀포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진시황의 신하 서복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로 왔으나 결국 구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서복이 돌아갔다고 해서 서귀포하는 지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나중에 피부가 쭈글쭈글 해지니까 수은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시한에 가면 진시황의 황릉이 있는데 사방 2킬로로 세계에서 제일 큰 개인 묘지입니다. 영생 불사하려고 37년 동안 70만 명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었지만 진시황은 50살에 죽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려고 애를 썼지만 죽었습니다.
B. 사단의 권세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그리스도
마귀는 사망의 권세를 꽉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녀가 죽었을 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살아났습니다(마가복음 5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인 청년이 관 속에 들어가 죽었을 때 “청년아 일어나라.”고 주님 말씀하시자 일어납니다(누가복음 7장).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장사한지 3일이 된 무덤에 가서 주님 말씀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요한복음 11장)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힘과 용기, 확신과 평강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사슬을 깨뜨리고 자유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복음이 들어오면 사슬을 끊어버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단절하는 부활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눈을 뜨게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55:1에 “너희는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냥 나오면 됩니다. 주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셔 들이면 눈이 열려지고 빛이 들어오게 되고 사탄의 권세가 끊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행 26장 12~23절 / 김상수목사
120년 전 선교사들이 어두움의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1891년 2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석 달 동안 선교여행을 하고 돌아와 선교보고서를 썼는데 그 보고서를 보면 한국어 통역인과 길 안내원이 동행했고, 복음서와 통조림과 의약품 등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준비했는데 옛날에는 엽전이라서 부피가 많고 무거워 별도로 관리하고 실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지방 여행을 하면 ‘인마부대’의 출동과 같은 진풍경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떼를 지어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점심 때 행차가 멈추었을 때에 주막 앞에는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복음서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전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셀러 목사님은 배제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짬짬이 복음을 전하였는데 1887년 6월 24일 진리를 배운 어떤 학생 한명이 세례 받기를 원해서 자기 집에서 비밀히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님은 1887년 봄에 황해도에서 올라온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는데 세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영어 교사였던 ‘허버트’를 대문에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발각되지 않도록 망을 보면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초창기에 한국에 왔을 때에 백성들이 가난했으며, 무지했고, 미신도 많이 섬겼습니다. 그리고 글을 안다는 것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와서 한글을 깨우치기 위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여자들에게 교육의 문을 열어주는 노력을 하면서 어두움의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120년이 지난 지금 천만에 가까운 성도가 있으며, 4만 여 교회가 있고, 전 세계를 향해서는 9천2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축복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축복은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전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우리 주님의 소원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이 왜 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는지 죄수의 몸으로 간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난 사건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밝은 빛 가운데서 바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때 예수님은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을 선교사로 발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평소에는 대변인을 통해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직접 나서서 해결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천사들을 통해서 일하시지만 중요한 사안은 직접 나타나셔서 일하시는데 바로 바울을 불러서 선교사로 삼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이 마지막 부탁하신 일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였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6-18)
주님께서 바울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네가 나를 본 일과 앞으로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는 나의 사환이 되고 증인이 되라”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일꾼을 세우신 주님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신서귀포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왔습니다. 그때 제 숙소를 제공한 가정이 미 대사관에서 40년 일하시다가 은퇴 하시고 서귀포에서 전망 좋은 2층집에서 사시는데 1층은 본인들이 살고 윗층은 목사님들이 오시면 쉴 수 있는 곳으로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었습니다.
그 여집사님과 대화를 해보니 “저는 은혜를 받았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가정에 무슨 문제가 생기려고 하면 미리 알려 주시고,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려고 하면 미리 알려주시는데 음성으로 들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종을 보호하고, 잘 받들라고 이 은혜를 주셨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너에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사환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무엇입니까?
종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머슴이 있었는데 이 머슴이 바로 사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머슴인데 주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머슴이 없지만 성경적인 개념은 우리가 예수님의 머슴입니다. 머슴은 주인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에 순종할 뿐입니다. 머슴은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가끔 선교할 때에 때로는 힘에 겨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예”하고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둘째는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난 곳을 가 보면 증인을 찾는 프랭카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대로 이야기를 좀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여기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고, 경험했고, 무엇인가 깨달았으며, 받은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증인입니다.
성남에 있는 어느 여집사님은 남편도 없고 자녀 둘을 데리고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생활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일년에 수 십 명을 전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많이 합니까?”라고 물으면 자기가 이렇게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고생을 하는데 항상 기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손님들이 자기를 보고 “당신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항상 기뻐하냐”고 하면 “나는 예수를 믿어서 이렇게 기쁘다”고 대답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집사님이 이렇게 말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기뻐하는 것을 보고 전도 받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증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내가 만난 주님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내 주위에 있는 가까운 모든 분들에게 나타내는 여러분들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려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자 입니다.
죄인인 줄도 모르며,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에 속한 불신자들은 죽을 줄도 모릅니다. 죽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자기는 안 죽을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나쁜 행동을 골라가면서 다합니다. 밤이 되면 도둑질도 하고, 살인도 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면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이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밝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마귀에 속해 눌려있는 자들을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명을 위해서 사도바울을 부르셨고,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학교 다닐 때에 몇 번 나오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 나와서 자기 멋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주일학교 다닐 때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다시 예수를 믿어보자”하고 다시 나와서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옆사람을 전도했는데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아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어 레이건 대통령에게 영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게 예수님을 심어주어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상숭배하고, 물질 섬기고, 세상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그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사환과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일에 충성하면 상급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고 하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준비해 두시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왜 선교를 하고 있습니까? 선교는 주권자이신 주님이 지상에 남기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의 권세는 하늘의 해와 별들과 달들과 모든 우주만상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땅의 권세는 자연계와 인간의 생사화복과 모든 악한 마귀를 다스리는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절대 주권자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절대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주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함께 있으리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깨달았으면 이 명령에 순종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선교의 사명을 맡기신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선교사역은 아무나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되려면 일반대학 과정을 공부해야 하고, 신학과정을 공부해야 하고, 또 훈련과정도 해야 하고, 고난훈련을 통과해야 하고, 인격훈련도 통과해서 남에게 존경받아야 하고, 영적인 훈련을 받아서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다가 지도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선교지의 문화와 음식과 언어와 기후와 풍습 등 풍토병도 견뎌야 하고, 자녀교육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인종 갈등도 겪어야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선교사 한 명을 배출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들을 볼 때에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며, 위로해야 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나갈 때에는 목숨을 걸고 나갑니다.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처음 나가면 그곳에서 순교를 합니다. 우리 한국도 토마스 선교사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순교 했습니다.
호주 가까이에 뉴헤브리스라는 30개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가 있는데 거기는 1839년 12월 21일 영국에서 학자이면서 선교사였던 죤 윌리암스라는 분이 상륙하자마자 살해당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헤리슨 목사님이 상륙해서 3일 만에 순교했으며, 그 다음에는 죤 골든이라는 부부 선교사가 가서 원주민들과 사귀는데 성공했으나 다른 부족에게 암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 다음은 맥려라는 선교사님이 약 3년 동안 사역하다가 죽었고, 다음에 죤 골든 선교사의 동생 골든 선교사가 가서 그들의 말을 배우고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까지 했지만 역시 순교했습니다. 그 후 7년 뒤에 로버트 선교사가 상륙해서 40년 뒤에는 그 섬 전체가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다 목숨 걸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선교사들의 피 위에 기독교 국가가 되기도 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마다 선교사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데 어떤 선교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선교지에 가는 것입니다.
지금 국제 선교회는 한달에 한 5~6명 정도 인터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분들이 젊음을 바쳐서 이렇게 공부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출 때까지는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망설였으며, 기도하고 했을까? 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어떤 자매는 고등교육도 다 받고 선교사로 떠나는데 칠십 노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도 선교지로 떠나야 하는 그 길이 선교사의 길입니다. 어떤 분은 사명 받아 다 준비되었는데도 후원교회가 없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아가니 후원자도 주시고 해서 선교지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는 배후에서 하나님이 다 관리하시지만 그 선교사들을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선교 현지에서 젊음을 바쳐서 고생하는 선교사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위해서 부모를 떠나고, 형제를 떠나고, 고국을 떠나 열악한 환경에서 젊음을 바쳐서 선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선교주일을 맞이하면서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격려편지를 하고, 전화 한 통화라도 해 준다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선교위원회에서는 선교헌금으로 한 구좌당 5천원을 정했습니다. 돈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라, 5천원이라도 후원해서 보내는 선교사의 자리에 함께 참여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요청에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경꾼 되지 마시고 “주님, 제가 가지는 못하지만 보내는 선교사 되겠습니다”라고 동참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나 지금 갈수록 선교가 힘들어집니다. 옛날에는 목사의 신분으로 외국에 갈수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교지에서 목사의 신분으로는 여권이 나오지 않고, 비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은 평신도들이 선교지에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평신도 간호원, 의사, 기술자들을 많이 요청하고 있으며, 특히 컴퓨터 기술자와 자동차 정비 기술자들을 많이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기술자들을 현지에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많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교할 수 있는 것은 현지인들을 데려다가 신학공부를 시켜서 내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 동족에게 충분하게 마음대로 설교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동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선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을 깨닫는 자가 아니면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여전히 아파트가 좋고, 돈 버는 것이 좋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좋다면 그런 분은 선교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최고의 흥미와 취미가 사람 살리는데 있어야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당 건물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아파트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며, 여러분이 좋아하는 자동차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일평생 가난한 자를 위해 일하고, 전도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1904년에 이것을 인정한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이 버킹검 궁전으로 윌리엄 부스를 초청해서 큰일을 많이 했다고 격려하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 75세인 윌리엄 부스는 허리를 굽혀 펜을 들어 글을 썼는데 “각하,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에 있지만 저의 야망은 사람의 영혼에 있습니다”라고 써서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을 위해서라면 거꾸로 서서 죽으라고 해도 죽을 수 있고, 무슨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에 붙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붙들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영혼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에 붙들 것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며칠 전 저의 동생이 왔다갔는데 이 동생이 저에게 하는 말이 “형님, 우리 교회에 주유소를 하는 집사님이 있는데 그 집사님은 얼마나 자기의 건강관리를 잘 하는지 매일 운동하고, 물을 마셔도 보통 물을 마시지 않고, 뱃살이 조금만 찌면 아침에 조깅을 하고, 그렇게 건강관리를 빈틈없이 한 사람인데 어느 날 머리가 조금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뇌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제 동생을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이 아무리 설교시간에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입니다. 건강도 청지기입니다 라고 아무리 해도 제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뇌암으로 6개월밖에 못산다고 진단을 받고 나니 비로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게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과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내 영혼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영혼 살린 것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 내 마음을 돌리시고 내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내 눈을 돌리셔서 세상에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하나님 일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줄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며 그것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다 하기를 바랍니다. 사업하는 목적도 거기에 두고, 공부하는 목적도 거기에 두며, 출세해야할 목적도 거기에 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가 너를 불러서 네가 나를 본 일과 앞으로 보여줄 일의 증인과 사환이 되어라”라는 말씀이 바울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으로 받아서 주안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행 26장 16~28절 / 민경설목사
15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의료 사업을 하면서 환자들을 지켜보며 의사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은 한결같은 특징이 있는데 자신들은 절대로 병자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환자요. 약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환자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의사에게 "네가 정신병자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는 처음에는 환자가 너무도 당당하게 얘기해서 "내가 병자인가"하는 착각까지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그 정신병자가 고쳐져서 정상에 가깝게 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자신이 병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을 순순히 받아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자 자신이 약을 먹지 않으면 돈다는 것을 압니다. 이 때 의사는 치료되고 있다고 판정한다고 합니다. 정신질병이 그렇듯이 영적 문제도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 속게 되고 인생이 실패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이유는 영적 문제가 잘못되었는데도 자기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속이는지 모릅니다. 두더지는 원래 눈이 있지만 늘 땅 속에서 살고 어둠 속에 있기에 눈이 퇴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어둠에 살기에 영적인 눈이 떠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둠에 빠진 사람은 다 속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복되게 살려면 어둠에서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사탄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는 속이는 자가 있습니다. 어둠 속의 선택은 아무리 잘한다해도 다 속은 것입니다. 눈을 뜨고 빛으로 나와야 선택이 바르게 됩니다. 빛에서의 선택은 아무리 잘못된 것 같아도 잘되는 길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1)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은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됩니다. 그 분이 오실 때 어둠이 물러납니다. 두더지처럼 퇴화된 눈도 주님이 오시면 떠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를 믿을 때 당신 속에 있던 어둠이 물러나고 인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 사역이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모두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인해서 이제 눈이 열려서 축복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에게 오는 축복을 알아보겠습니다.
1. 영혼의 어둠이 사라져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영혼의 어둠은 죄 때문인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됩니다. 영혼의 어둠으로 인해서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사라지지만, 그림자에는 실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실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실체는 천국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림자이기에 다 아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체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실체를 찾는 신앙, 순례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2. 마음에 어둠이 떠납니다.
마음에 어둠이 떠날때 비로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어둠이며 속은 것입니다. 나한테 잘못한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적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텐 붐'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가족을 모질게 고문했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용서할 권한은 나에게 없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고 말 했을때 그 독일인은 나중에 놀랍게도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데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3. 환경의 어둠이 떠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환경의 어둠이 떠날 때 부유할 수 있게 됩니다. 공부, 사업을 한다해도 내 자신이 어둠에 있기에 빈곤함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면 부유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부유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은사대로 일을 주실 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박성복목사(동인교회) / 행 26장 19-29절
여러분, 율법에 충성하던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 십자가 증인으로서 본방과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붙들려 있을 때에도 열심이 있었지만 예수를 만난 그 이후에 바울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나 벨릭스, 베스도등 그 누구 앞에서도 직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십자가 부활의 증인으로 충성하였습니다. 직위에 관계없이, 직분에 관계없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울은 확신하며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죄인을 위하여 죽었으나 그 가운데 먼저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분이 또한 “이방과 이스라엘에게 빛을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그 일에 그처럼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기 본문 19절을 보면 ‘아그립바 왕’이 나오는데 그 아그립바 왕은 로마의 지시를 받고 이스라엘 팔레스틴 왕으로 와있는 왕입니다. 여기에 벨릭스라는 사람은 네로 황제 때 총독으로 온 사람이고 베스도는 벨릭스의 뒤를 이어서 온 사람입니다.
오늘 여기 19절에 보면,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했다”고 했는데 하늘에서 바울에게 보이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십자가 비밀인데 이것을 전하는 사명을 그는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사명감에 불탄 자가 바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분을 위해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설교를 이해한 사람이 그 당시에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한다”고 그랬습니다. 바울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랬습니다. 그 지혜와 그 능력을 바울이 받은 겁니다.
그런데 바울을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쳤다고 하는 것은 정신분열자라는 말입니다. 정신이상자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미친 사람으로 보았을까요? 하늘로부터 바울에게 내려준 이 비밀을 그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비밀을 그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하늘로부터 받은 바울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주를 위해서 사생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축복받을 증표를 받은 겁니다. 바울은 이처럼 귀한 말씀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방방 뛰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제가 일동에 있는 기도원에 갔었는데 한날은 그 기도원 원장인 최복규 목사님께서 “목사님, 오늘 날씨도 안 좋은데 저하고 사우나나 좀 갑시다.”라고 그래요. 그리 친한 분은 아니지만 함께 가서 때를 밀어주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얘기를 하는데 그분이 하는 애기가 “자기가 젊어서 예수를 몰랐을 때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참으로 자기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몰랐는데 은혜를 딱 받고 나니까 좋아서 못 견디겠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 내가 할 일이 무언가 하고 찾으니까 교회의 종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요사이는 교회의 종을 안 칩니다만 옛날에는 시골에 가면 종을 쳤어요. 그 교회 종을 장로님이 치는데 ‘저 종을 내가 빼앗아 쳐야 되겠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새벽 네 시 반에 종을 치기 때문에 자기는 세 시 반에 나가서 장로님이 먼저 종 칠까봐 종탑에 먼저 올라가서 종의 줄을 위로 올려놨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분이 미쳤습니까? 안 미쳤습니까? 그런데 그 종을 치는데 더울 때는 괜찮은데 추울 때는 못 살겠더라고 해요.
그래서 장로님이 와서 종을 치려고 종 줄을 찾으면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장로님이 줄을 못 찾고 가면 얼른 내려와서 자기가 종을 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장로님이 아시고 ‘네가 어디서 왔다가 종을 치느냐?’고 그러면 ‘내가 여기에 붙어 있다가 장로님이 치기전에 먼저 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장로님이랑 같이 나오게 되면 또 같이 치기도 했다는 건데 그것을 아무리 말려도 계속 했다고 해요. 그후에 교회의 목사님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를 한번도 칭찬을 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목사님께 ‘칭찬을 좀 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목사님께서 ‘칭찬을 안 해도 저렇게 미쳐서 야단인데 칭찬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서 내가 칭찬을 안 한다’라고 했다고 해요.
여러분, 너무나 은혜를 받으니까 못 살겠더라는 겁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은혜 받은 분이 계신데 부동산을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일날마다 계단에 포스터를 붙여요. ‘한계단만 더 올라가면 본당이 나옵니다. 힘드시죠, 멀리서 오셨죠’라면서 주일마다 내용을 바꿔서 계속 붙여요. 그래서 저는 참 귀하다라고 생각했더니 광주로 가 버렸어요. 광주로 가더니 ‘목사님, 광주 오면 심방 좀 와주십시오’라고 해서 광주에 심방도 갔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꼭 서울 올라 갈 겁니다’라고 하더니 환경이 그를 붙드니까 아직도 못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디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말씀이 들어올 때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발동이 걸려야 됩니다. 여러분, 점잖을 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일에는 발동이 걸려야 합니다. 그러면 남이 보거나 말거나 충성을 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예쁜 짓을 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이것은 입만 붙은 소리가 아니라 바울의 진심입니다. 그는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열심을 받았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났는데 그는 너무나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 나서는 한 발자국도 진리를 전하는 길에서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고, 세상을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달려간 사람이 바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은 세상 사람을 통하여 배우지 않았습니다. 세상 지식에서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보이신 것이라 그랬습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남들이 미친사람으로 보거나 말거나 상관치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나날 때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하거나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친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단도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 한가지만을 위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진리에 도취된 사람 아닙니까? 그리스도에 완전히 붙들린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오직 바울은 그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나의 주요, 그분만이 나의 구속자이시오’라고 하면서 옆 눈질 할 시간도 없이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매를 맞아도 ‘예수 밖에 없다고’ 했고, 옥에 갇혀도 ‘예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완전히 맛이 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본문에 바울을 향하여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 신앙이 너무 좋고, 구원이 너무 좋고, 말씀이 너무 좋아서 거기에 미치므로 바울이 들었던 소리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소리가 던져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좋아서 거기 하나에만 몰두하니까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거기다가 정신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분에게 빠져서, 진리의 말씀에 빠져서 몰두할 때에 그 당시는 미친 것 같이 볼 수 있으나 오늘 우리가 볼 때에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도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학생은 공부에 미친 듯이 열심히 집중해서 해야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발명가도 마찬가지에요. 발명하는 사람이 집중적으로 그 일에 몰두해야 됩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머리를 써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철학가나 예술가등 누구도 그 한 쪽에 미쳐야 됩니다. 제가 요즘 새벽예배에 레위기 25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그저께 밤에 그것을 보는데 또 도표 하나가 스쳐 지나가기에 달력을 여러장 찢어서 도표를 그리다가 금요일 날에는 두 제자에게도 한번 그려 보라고 했더니 도표가 안 나왔어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역시, 미친 사람이 그려야 되는구나. 역시 도표에 미쳐야 나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미쳤다라고 하는 것은 전문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골똘했다’는 소리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바울은 어디에서나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에 몸을 바쳤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면서 자꾸 그 분만 높여드리고, 그 분만 자랑하고, 그 분만 나타내니 그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꼭 미친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바울을 염병이라 그랬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부다 예수 믿게 되니 바울에게 “이 사람은 염병이라 나사렛 이단 괴수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염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오늘 여러분, 그런데 바울이 이 소리를 들어도 전혀 마음에 상처를 안 받습니다. 우리는 작은 소리만 들어도 상처를 받고 야단 북새통입니다.
오늘 여러분, 정말로 신원의 날의 종들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보내신 것을 내가 거스를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죽기로 각오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무엇을 받았길래 이런 소리를 합니까? 따라합시다. “하늘에서 보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있다”. 오늘 여러분, 이것이 바울의 신앙 사상입니다. 너무나 십자가 구속의 사랑이 좋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아그립바 왕이여”라면서 왕에게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여러분, 만약 보통 사람으로서 왕 앞에 말을 잘못하면 즉석에서 목이 날라 갑니다. 그 당시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요즘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눈만 붙은 것(?)도 다 설쳐대고 하죠. 대한민국은 대통령보다 국민이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 바울은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는데 너무나 거기에 열중하다 보니까, 본문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나 베스도나 벨릭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통 이런 왕 앞에는 얼굴도 제대로 들 수가 없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예수그리스도가 좋아서, 그 분과의 약속한 것이 좋아서 당당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은혜시대의 선구자도 이렇거늘 신원의 날의 선구자는 더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얼굴색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행동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몸이 영생한다는 것,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별의별 방해꾼이 다 있고, 별의별 가시가 다 있습니다. 바울은 ‘염병 들린 자’라고 해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나사렛 이단 예수의 괴수라고 그러면 그건 사람 취급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설 때도 당당했던 것은 그는 권력을 가진 자요, 세상의 명예를 가진 자요, 세상의 재물을 가진 자요,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자이기에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을 위대하게 만든 겁니다. 이 아그립바 왕은 유대의 왕으로 와 있는 자요, 베스도 총독들은 서슬이 퍼런 칼날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도 바울은 기죽지 않았고 그들에게 굴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가 그랬을까요? 왜 그가 그렇게 나가고 있었을까요? 그 속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요 말씀은 빛입니다. 또한 말씀은 생수이며 말씀은 만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세상 권력이나 명예나 세상의 부귀영화나 아름다움에 미치고 심취한 사람은 우울증이 오고 마음의 병도 들고 사탄의 올무에 걸려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파괴가 되고 삶이 중단되는 일이 많습니다마는 내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약속의 비밀을 가진 자이기에 세상에 꿀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내세가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벽에 레위기 25장에 희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6일이 지나고 오는 안식일이 계속 나가고 있고, 6년이 지나고 오는 안식년이 계속 나가듯이 “희년도 계속 나가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는 아담이후에 주님 오실 때까지 희년이 몇 번 들어있는지를 계산해 보니까 딱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아, 이제 우리가 마지막 희년에 들어와 있구나!”라는 느끼면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것을 도표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도표가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도표를 보면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니까 “그래 맞아, 이거야!”라면서 감사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이제는 도표가 다 나왔다고 늘 그러니까 저희 집사람이 ‘당신은 밤낮 다 나왔다 하더니 이제 그 소리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해요. 저는 생각할 때 다 나왔거든요. 그러나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또 나올 수 있죠. 여러분, 성경 안에 있는 숫자들은 그냥 의미 없는 게 없더라고요. 그걸 누구를 위해서 기록해놨던가? 누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그렇게 숨겨놨던가?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지만 신명기에 “너희 연대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연대를 계산해보라’ 고 했고 ‘너희 아비에게 물어보라’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너무 좋아요.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신원의 말씀에 미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친 자의 특색이 어떻습니까? 절대 겁이 없습니다. 여러분, 미친 자가 겁먹고 벌벌 떠는 것 봤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미친 자의 특색은 부끄러움이 없어요. 미친 자가 부끄러워서 절절 매는 거 못 봤죠? 셋째로 미친 자는 웃음이 많습니다. 자기 혼자 히죽거리고 다닙니다. 이것이 미친 자의 특색인데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자들을 만나서도 바울은 전혀 두려움이나 겁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미쳤다고 하거나 이단 괴수라고 하거나 율법의 파괴자라고 하거나 이고니온에서 약혼한 여자 문제로 인해 형무소에 가거나 개의치 않고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기뻐하라’고 하면서 형무소에 들어앉아서 바깥의 사람보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미친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도 이런 미친 자의 세 가지의 특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놓고 악한 자 앞에서도 담대하길 바랍니다.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혼자서도 잘 웃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웃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치광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웃는데 화장실에 앉아서도 웃고, 사람을 만나서도 웃습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권력가들이 볼 때에 실제로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마누라가 있어요? 자식이 있어요? 그러나 영적 자식이 많았습니다.
오늘 여러분,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바울이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 분의 것이요”라고 했는데 이는 바울이 그냥 입에만 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예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그의 것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그분 위해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어떤 분이 “권사님, 내가 살아도 권사님 위해서 살고, 죽어도 권사님 위해 죽겠다”고 했다면 헛말이래도 좋죠? 바울은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살아도 주님위해 살 것이고, 죽어도 주님 위해서 죽을 것이요”라고 했으니 얼마나 주님이 귀하게 보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3절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돈 때문에 미친 사람, 사랑 때문에 미친 사람, 명예 때문에 미친 사람들이 있지만 전부 다 마지막에 실패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 때문에 미쳤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 아닙니까? 예레미야 29장 26절 보면 예레미야도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자도 이렇거늘 신원의 날에 오실 주님의 비밀을 깨달은 오늘 우리는 그보다 7배나 더 강해야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심취해야 되고 골몰해야 됩니다. 제가 돌아오는 12월 10일날 대만 가서 집회를 합니다만 지금 세계지도에다가 우리교회의 설교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지역을 표시한 것을 보면 대만에서 저희 방송을 듣는 자들의 붉은 마크가 엄청 많이 나오죠? 이번에 가면 저는 보지 못한 분들이지만 제 설교를 듣는 많은 분들이 저를 좀 만났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대만에서 이제 거국적인 집회를 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드러낼 때가 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타날 때가 오고 있어요.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쳤기 때문에 그분이 책임질것 아닙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맡아 주실 것 아닙니까? 여러분, 사도행전20장 23절과 24절에 보면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주님이 그 말을 들을 때에 귀하게 보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사명은 순교자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변화성도가 소망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복음을 위해서 그저 욕을 먹든지, 누명을 쓰든지, 매를 맞든지, 형무소에 가든지, 우리는 바울 같은 사상 그대로만 이어 받으면 신원의 날에 반드시 승리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바울이 율법 안에서 살았다면 그 육체는 평안합니다. 욕도 안 먹고 미쳤다는 소리도 안 듣습니다. 세상 지식은 그 바울이 가질 만큼 가진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고하는 유명한 학자의 학문을 닦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미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모두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완전히 예수그리스도에게 삼킨 바가 된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신원의 날에 제 2의 바울과 같은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형무소에 들어 앉아 있어도 바깥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히죽히죽 하고 좋아서 웃기를 바랍니다. 화장실에 혼자 가서 앉아 있어도 히죽히죽 웃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이것이 바울이 살아간 신앙관이였다면 우리도 닮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웃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너무나 이 말씀이 좋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귀하지 않습니까? 너무 귀한 말씀을 줬는데도 왜 웃음이 없습니까? 이렇게 좋고 귀한 말씀 줬는데 왜 내가 봉사가 없습니까? 입술로 그저 아멘만 하고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가신 길을 바울이 가고, 바울이 가신 길을 내가 가고, 내가 간 길을 내 자식들이 가고 하면 반드시 승리의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이 진리의 빛을 선전하는 일에 앞장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양향모목사 / 행 26:19-23
성경에서 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표현하고 예수님을 그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 줄도 모르고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인생들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어두움과 빛을 단순히 어둡고 밝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나오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기쁨들과 행복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차가움을 의미하지만 빛은 따뜻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차갑고 냉정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냉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은 따뜻하고 다정하여 포근한 마음을 가지게 해줍니다.
어두움은 죽음이지만 빛은 생명입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은 모든 생명이 죽어가지만 빛은 모든 생명을 살립니다.
어두움은 미련함이지만 빛은 지혜로움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뭘 잘 몰라서 미련하게 살지만 빛은 참된 진리 참된 지혜를 알게 함으로 슬기롭고 바르게 살게 해줍니다.
어두움은 회의와 좌절과 절망이지만 빛은 희망이며 소망입니다.
절망가운데서 신음하고 사는 인생들이 빛으로 나오게 되면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어두움은 슬픔과 고통이지만 빛은 참된 평안과 기쁨과 행복입니다.
슬픔과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사는 인생에게 빛은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게 기쁘게 살게 합니다.
어두움은 시기 질투 미움이지만 빛은 위로와 격려와 사랑입니다.
빛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빛을 전하시리라”를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던 우리가 빛 가운데서 진리를 알고 참된 기쁨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본문 19-21절에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지금 이스라엘의 분봉왕 아그립바와 로마총독 버니게와 천부장들과 그리고 시중의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런저런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하여 바울을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그 고발에 대하여 자신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런 죄인이 아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믿고 따르고 있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계시해주신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대낮에 비치는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박해하지 말고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이렇게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빛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먼저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이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두움 가운에서 나와서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 나와서 따뜻하고 다정하고 포근한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빛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미련하게 살지 말고 빛으로 나와서 진리와 지혜를 알고 슬기롭고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절망가운데서 신음하고 살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슬픔과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지 말고 빛으로 나와서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게 기쁘게 살라고 합니다. 시기 질투 미움으로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은 착하고 바른 삶을 사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보혈이 아닌 나 자신의 의로운 삶에 의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바울을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소용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는 바울을 유대인들은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바울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최고로 여기고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전통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행위를 최고로 여기는 유교나 불교나 무교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를 그런 종류의 종교로 생각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전통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고 행함이 없이 믿습니다만 외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이 없이 말로만 믿는다고 외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음에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저는 거꾸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런 것만을 가지고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로마교회도 믿음을 무시하고 행위만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50%정도이고 행함도 50%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50%라고 하면 인간의 행위도 50%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그런 것까지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이 100%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100%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죄에서 나와서 밝은 빛 가운데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의 행위가 믿음을 대체할 수도 없고 믿음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본문 22-23절에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증언하기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한다는 것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을 바울 자신이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과 모세라고 할 때 주로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따르는 그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구약성경 말씀에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예언한 것이 있는데 바울이 바로 그것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의 주장이 성경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53장에 대표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미래로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보고 기록한 것처럼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고난을 받으실 것이고 그 고난의 이유는 우리들의 죄와 허물 때문이라고 하신 이 말씀을 수십 번씩 읽었을 것이고 아예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아주 당당하게 오실 것이고 오셔서 적군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나라를 해방시키실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메시야가 이렇게 힘도 없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힘없이 죽으신 예수님이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단의 무리요 제거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예언과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의 기록들을 신약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가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를 구하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예수님 이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 이전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많이 살아났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그런 다시사심이 아니라 신비한 몸으로 다시 사신 부활을 의미합니다. 먼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23절 하반절에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빛으로 오신다는 것은 성경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라고 했습니다.
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그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어두움을 밝히는 많은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이방인들까지 빛 가운데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빛으로서 이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까지 전하여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통하여 지금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불쌍한 인생들을 빛 가운데로 불러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이 빛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지 말고 복음의 밝은 빛 가운데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바르게 알고 이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또 목회를 하면서 가장 보람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복음의 빛으로 나와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나니까 인생이 다 보이고 성경의 중심이 보이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가 보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이 복음을 볼 수 있었다면 일평생을 정말로 보람 있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에 이 복음을 알았다면 정말로 멋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성인이 되어서 사회생활을 하고 사업을 할 때 이 복음을 알았다면 정말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 복음의 밝은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억지로 마지못해서 교회를 다니며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복음의 밝은 빛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어두운 골목길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아직도 교회를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습니까? 아직도 몸이 불편하고 피곤하고 세상에 할 일이 더 귀해 보이고 이런 저런 핑계들이 생각나십니까? 아직도 주님의 일에 교회의 일에 충성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집니까? 아직도 이것에 나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 계산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차갑고 냉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십니까? 아직도 어리석게 미련하게 살고계십니까? 아직도 절망가운데서 신음하면서 살고계십니까? 아직도 슬픔과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고계십니까? 아직도 시기 질투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계십니까?
복음의 밝은 빛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예수님을 세상에 빛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선지자들과 모세를 통하여 알려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을 이 그리스도의 빛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존심 갖고 삽시다
행26장 19~29절 / 연제원목사
벧후3:18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믿음안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즉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분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해 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덕소 가족 여러분!
구원받은 사실에 만족하지 마시고 늘 자라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가려면 버려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우리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존심을 버릴때 비로서 바른 신앙으로 올바르게 자라갈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존심이란 단어는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나쁜의미의 자존심은 버려야하고 좋은 의미의 자존심은 취해야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자존심은 ‘남에게 굽힘이 없이 제 몸이나 품위를 스스로 높이 가지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자존심이란 결코 배타가 아니다. 또한 교만도 아니며 다만 자기확립이다. 자기 강조다. 세상을 향해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안탑깝게도 교회안에서는 왕처럼 처신하면서도 교회 밖으로 나가면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행26:19-29절 본문을 함께 교독했습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어떤 것인가를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2년 동안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한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의 지도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울을 법정에 세워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베스도 총독은 바울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죄가 없는 바울을 석방하자니 유대인 지도자들의 감정을 건드릴 것 같아 고민하고 있었던 때에 바울은 무혐의 처리를 받을 수 있는길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는것이라 판단하여 로마의 최고 법정에 상소를 하게 됩니다.(25:25) 그러나 당시 관례로 보아 죄수를 황제 앞으로 보내려면 뚜렸한 죄목이 있어야 하는데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서 어떤 혐의를 찾을 수 없었고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되던차에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의 통치자로 있던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동생 버니게이 내방을 하게 되었고(25:13) 베스도 총독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그립바 왕과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릴 작정으로 다시 재판을 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재판중에 사도 바울이 먼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신후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기에 모든 사람이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상상해 보십시다. 한사람은 세상적으로 화려한 신분에 속하는 권세와 부를 소유한 왕과 총독이고 한사람은 초췌한 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당당하고 의젓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에게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남에게 굽힘이 없이 제 몸이나 품위를 스스로 높이 가지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그 자존심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바울의 자존심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읍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삶이 바뀌게 됩니다.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세계관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후 어느 누구에게든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덕소가족들은 예수님을 믿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즉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나 삶속에서 예수믿는 자의 행동과 품위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과 권세를 가지게 됬다는것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요1:12절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 권세는 세상에서 주는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자녀만 되어도 대단한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닌데, 한낮 아버지 덕을 보고 사는 것인데도 대단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삽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신 만유의 주되시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덕소가족들의 삶이 이런 특권과 권세를 가졌다는 자존심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 믿는 사람이 자존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세상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16:26절을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한평생 희희낙낙하며 살았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사람과는 다른 시각속에 살고 있고 있는 존재라는 자존심이 있어야합니다.
빌3: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노라’ 즉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 것이 너무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은 다 무가치 한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아픔이 아픔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삶의 상처가 오히려 힘이 됩니다. 고난이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자존심은 갖고 있으면서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자존심을 소유하지 못한 분은 없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도 바울과 같은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유로 누구에게든 당당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그립바 왕앞에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 당당히 복음을 증거했던 사도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자존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도바울과 같은 자존심을 가짐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긍휼의 기쁨을 누리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행 26장 19~32절 / 서금석목사
어느 선배 목사님의 수상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중간집단 훈련을 받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목사들끼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독일의 목사님이 갑자기 참관하러 왔습니다.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목사들 가운데 그 누구도 독일 목사를 만나기를 원치 않았지만 갑자기 모임에 독일 목사가 들어왔으니 내심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한국인 목사가 느닷없이 독일 목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나이가 어떻게 되었으며, 히틀러의 만행을 보고 목사로서 어떤 태도를 취했었습니까?" 독일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던 때에 내 나이는 여섯 살이었습니다" 갑자기 방안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독일 목사는 계속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독일 국민이 그러했듯이 어린 나도 물론 히틀러 숭배자였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히틀러를 비방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10대 소년이 되자 나는 히틀러 비행단에 가입해서 충성을 다바쳤고, 독일이 멸망하기 일년전부터 자진해서 비행기 공장에 가서 일할 정도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년 여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그때는 얼마나 분했었는지 모릅니다.
고향에 돌아간 어느 화창한 주일 날, 내가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았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을!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망할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요 역사입니다…"
그날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는 현관에 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교우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해대는 목사님에게로 달려가서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 지금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난 그땐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서 속았어요. 왜 당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그 선배 목사가 그 독일 목사의 얘기를 듣는 바로 그 현장에 저도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납니다. "왜 당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지금도 이 말이 귀에 생생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믿는 성도들은 분명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분명히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아마도 천국에 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칠지도 모릅니다. "왜 당신은 혼자 믿고 천국에 가면서 나에게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내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것을 왜 내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이 그러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죄된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 모두 함께 구원의 길로 갑시다. 나 혼자 고속행 우등 버스타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완행버스를 탄다 할지라도, 그래서 비록 어렵고 힘들게 간다 할지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 이웃, 직장 동료, 가족, 친척이 모두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힘써 복음 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받으면서 왜 자신이 이렇게 잡혀 있는지, 자신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왜 석방되지 못하는 지에 대하여 말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고도, 목숨을 구걸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울은 자신이 재판 받는 것 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섭리입니까? 한 마디로 '내가 체험한 바를 증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재판 받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들은 총독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바울아! 네가 많이 배우더니 미쳤구나!"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아그립바 왕을 향해서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선지자를 믿으시지요? 그러면 제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요?" 바울의 이 말은 아그립바 왕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말한 대로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을 수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것이고, 만약 믿지 않는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책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난처한 질문에 대해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느냐?" 고 묻자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29…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바울은 모두가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바울의 말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는 바울이 사형받을 만한 죄가 없지만 가이사에게 고소했으니 가이사에게 호송할 준비를 하게 함으로써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재판도 끝이 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찾아야 할 믿음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복음 증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래가 어찌될는지, 죽게 될는지, 살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⑴ 바울은 본 것을 증거했습니다.
19절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바, 즉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찌하여 이처럼 담대하게, 끈질기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보았기 때문에,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만나는 순간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니 증거할 수밖에요.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증거할 수밖에요.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내가 들었는데 이렇고 저런 사람이라더라" 이런 증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났는데, 그분 예수는 이전에 우리가 죽인 나사렛 예수였다. 그런데 그분은 살아계셨다" 바로 이런 증거였습니다.
무엇이 깨달아 지십니까? 복음을 계속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보다 분명하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가 전도하려고 해도 힘만 들고 꾸준히 하지 못합니까? 예수만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알기는 하는데 경험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다가 어려움 겪게 되면 쉽게 포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 만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전할 수 있어요. 주신 사명 감당할 수 있어요. 아직까지 주님 만나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분 있으십니까?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세요. "주님 만나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세요. 주님 만나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바울이 그랬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던 바울은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높은 자이든 비천한 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언제 어디서든지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도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⑵ 회개하라 - 돌아서라 -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러면 바울이 맨 처음 증거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전한 것이나, 예수님이 전한 것이나 동일한 것이었는데,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란 무엇입니까? '돌이키는 것'입니다. 어떤 길에서 돌이킵니까?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악하게 살았다면 그러한 삶에서 선한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누구를 헐뜯으며 살았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예 화>어느 교회 옆에 아주 방탕한 술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술주정뱅이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목사님에게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어제 제가 꿈을 꿨는데, '네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어요. 어찌하면 좋습니까?" 술주정뱅이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렇다면 이제부터 술을 끊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하십시요"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후 술주정뱅이는 정말로 술도 끊고 도박도 절제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심이 식어지기 시작했고 아예 교회에 발을 끊어버렸습니다. 목사님이 그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금방 열심이 식어졌습니까?" 그 술주정뱅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목사님은 그 꿈을 믿으십니까? 그건 개꿈일 뿐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도 여러분, 이 술주정뱅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막 들었을 때는 정말 회개해야 할 것만 같고,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아니지, 내가 음성을 잘못 들은 거야!'하며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말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이나 예수님, 오늘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⑶ 바울의 증언 내용(을 봅니다)
22-23절을 보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 있습니다. 22-23절을 함께 봅니다.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선전하시리라 함이니다 하니라"
지금 바울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엉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던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성경을 바로 믿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이 박식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베스도 총독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도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스도 총독을 제외하고는 바울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아그립바 왕도 적어도 바울처럼 성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식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돈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전에는 바울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바울이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해야지요. 바울을 보세요. 편할 때든지, 역경에 처해 있을 때든지 상관없이 전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의 입술에는 예수가 있었고, 그의 손과 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죄인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부자에게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예수 믿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왜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놓고 전도하지 못합니까? 언제까지 전도하는 자리를 적당히 피해 가시겠습니까? 전도 합시다. 아멘. 벌써 장로님들과 지역장님들 성도들이 지역 전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목사들도 매주 적어도 한번 이상은 함께 동참할 것입니다. 지역전도를 시작한지 한달 정도 됐는데 어떻습니까? 김일 목사님 말대로 아파트 경비원들이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전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지요? 주보와 전도지를 들은 손은 언제 마비가 되었는지 펴지지가 않지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밖으로 나오지가 않지요?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힘들어요. 어색해요. 그러나 하다보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합니다.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명령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자리를 빼앗기지 말고 지키세요. 참여하세요.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 매니아(Mania)
요즈음, 매니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것에 광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힙합(HipHop) 매니아', '월트컵 매니아', '게임 매니아', '컴퓨터 매니아' 뭐든지 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매니아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이런 것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 매니아라는 말은 없을까?" 그리고 이제는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춘천중앙교회 목사나 성도나 모두 예수 매니아가 되게 하옵소서" 성도 여러분, 예수 매니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 매니아가 등장합니다. 누굽니까? 바울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예수 매니아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24절 봅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베스도는 바울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높은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고 질타합니다.
여러분,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이 학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가 바울을 미치게 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바울을 '예수 매니아'로 만든 것입니다. 사실 베스도 총독이 '네가 미쳤도다'고 말하는데는 일리가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과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처럼 유대인들의 사상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는 소리가 다 헛소리로 들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를 증거했으면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처럼 '예수 매니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매니아가 되어 보세요. 모든 일이 기쁨이 넘쳐요.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넘쳐요. 청소를 해도 신바람이 나고 화초를 돌보면서도 신이 나요. 식당에서 밥하는 것, 설거지 하는 것 - 때로 힘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기뻐요. 찬양을 해도 기쁘고 말썽꾸러기 학생들 가르치면서 감사해요. 예수 매니아가 되면 전도해도 마냥 기쁩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예수 매니아의 삶입니다. 바울은 예수에 미쳤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예수에 미쳐 예배드려도 기쁨이 넘치고, 봉사를 해도 기쁨이 넘치고, 전도를 해도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베스도 총독이 자신을 향해 '네가 미쳤도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바울은 성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먼저 28절을 함께 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 되게 하려 하는도다"
베스도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임으로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바울의 이 말은 "당신도 선지자를 믿는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네가 나로 하여금 적은 말로 예수를 믿게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자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29절입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당신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내 말의 수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내 말을 듣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자', 더 나아가 '예수 매니아'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네가 나와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담대히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처럼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봐라. 나를 봐라. 믿고 싶지 않니?' 당당하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예수 믿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기쁨이 있으십니까?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행복이 넘쳐야 합니다.
김석균씨가 작사 작곡한 "예수 믿으세요" 찬양 아시지요?
3절 : 예수를 믿고 새롭게 되니 기쁨이 넘쳐요
어둠 걷히고 새 날이 되니 행복이 넘쳐요
이전에 없던 평안을 얻으니 찬송이 넘쳐요
샘솟는 기쁨 전해 주어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그렇습니다. 예수 믿게 되면,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가 걷히고 새날이 찾아옵니다. 예수 믿으면 행복이 넘칩니다.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평안을 얻게 됩니다. 남들 다 괴롭다 할 때, 기쁨이 넘치고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전합시다. 샘솟는 기쁨을 전합시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체험한바 기쁨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결국, 모든 내용을 들은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하고 또 다시 재판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큰 교훈 - 그것은 "성도는 '예수 매니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 해도 그게 뭐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힘썼던 바울처럼 사는 것이야 말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복음 증거에 전심전력한 나머지 그 누구에게든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역할 수 없는 소명
행 26장 19~32절 / 신성종목사
오늘 본문은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을 받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소명을 받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입니다. 물론 태어날 때의 소명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전혀 기억이 없으나 그러나 그냥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주님을 믿게 될 때와 직분을 받았을 때입니다. 로마서 1:1절에 보면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죽을 때입니다. 이제 너의 수한이 다 되었으니 내게로 오너라 하면서 부를 것입니다.
이 세 번에 걸친 소명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소명입니다. 바울은 그가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라고 소명을 받았고 그 소명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보면 소명 이전의 생과 소명 이후의 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소명 이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산, 생애였고, 소명 이후엔ㄴ 부르심에 따라산, 생애였습니다. 오늘은 바울의 소명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사람들은 다 소명을 받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의 귀가 열릴 때 비로써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영의 귀가 열립니까? 다음 4가지의 경우에 영음, 영적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1)[거듭날 때] 영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의 종류는 각각 다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아주 큰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렸지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분들은 아주 세미한 음성이기 때문에 잘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났을 때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2)[기도할 때] 영음이 들립니다.
영음은 언제나 필요할 때 들을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만 하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그의 뜻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통성기도 할 때에는 큰 소리로 말씀하시고, 일반적으로는 아주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의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3)[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루터가 말한 대로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는 말구유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려면 성경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도 했지만 그 말씀이 내게 다시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성경을 몇 절이라도 읽으시면서 묵상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주님의 뜻을 찾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소명이 임합니다.
어거스틴은 처음 주의 음성을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아이들의 소리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펴서 읽어보아라. 펴서 읽어보아라. 하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방에 들어가 어머님이 펴 놓은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이 유명한 로마서 13장 11-14절의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는 말씀으로 계속되는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아하 이것이 바로 내게 주신 말씀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2. 왜 우리들은 소명을 받아야 하는가?
(1)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시계를 공장에서 만들 때 디자인도 좋아야 하고, 색깔도 좋아야 하고, 값도 너무 비싸지 말아야 하고, 유통도 잘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밖에 있는 탑시계처럼 고장이나 잘 나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2)내가 가진 최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는 나같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쓰게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나니 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참으로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날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남보다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 그 나름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중국 고사를 보면 타산이란 산에 돌이 나는데 이 돌은 아무 짝에도 못씁니다.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옥돌처럼 보석으로도 못쓰고, 그렇다고 집의 재료로도 못쓰고 그러나 꼭 쓸데가 있습니다.
다른 보석들을 갈을 때 그 돌은 부드러워서 귀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他山之石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3)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믿습니까?
교회 일을 하시는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몇 번 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힘들어도 쉬지 않고 섬기는 것입니다.
(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면 그것이 영광이 됩니다.
가장 큰 영광은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간증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셋째는 빛과 소금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넷째는 맡은 직분에 충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3. 소명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1)먼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믿어야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우연히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진화론이나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2)설교의 핵심을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지금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입니다. 그래서 설교에 항상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이기 때문 입니다.
(3)매일 성령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성령은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하여 성경과 함께 역사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그래서 그 성령과 함께 동행하여야 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역사 하십니다.
(4)기도로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소원을 말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4. 소명대로 살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인가?
(1)소명 대로 살 때에 [처음에는]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움이 옵니다.
소명대로 살려면 내 성격도 죽여야 하고, 내 생각도 죽여야 하고, 내 고집도 버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시집간 며느리처럼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불편합니다.
(2) 소명에 따라 살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이 면이 소명을 받은 사람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입니다. 저는 제가 무슨재능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에 글짓기 시간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한번을 제외하고는 뽑힌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글을 씁니다. 과거에도 글 쓰는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재능을 주셔서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3)일을 할 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몇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취감입니다. 어려운 일일수록 성취감이 강합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이 있을 때에 그 성취감은 더욱 큽니다.
(4)후손들에게 귀한[열매를 상속]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후손들에게 상속을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채만 잔뜩 후손들에게 상속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상속시켜 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명을 상속시켜주기도 합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무엇을 자손들에게 이웃에게 상속시키기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상속시키시고, 믿음의 가정이란 이름을 상속시키기를 축원합니다.
(5)천국에 가서 잘했다[칭찬받는 성도들]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축복은 주님 앞에 설 때에 참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