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을 사랑하는가? 최근 들어서 그런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는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잘 사는 나라이다. 빼어난 문화유산과 좋은 인성을 가졌으며, 최첨단의 기술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잘살 수 있도록 했는가? 누군가의 희생이 없었으면 과연 오늘과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필자는 몇 년 전에 `민족의 혼을 찾아서` 러시아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애국선열의 흔적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는 슬픈 강이 있다. 원래 이름은 수이푼 강이다. 그런데 `수이푼` 이라고 읽어도 `슬픈` 으로 들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 나라를 잃고 타국 땅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선열들과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숱한 고생을 한,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 분들이 흘린 피눈물과 한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강을 슬픈 강으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슬픈 강 앞에는 유허비가 서 있다.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를 말한다. 슬픈 강 앞에 자리한 유허비는 이상설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설 선생은 본이 경주이며,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유허비가 서 있는 곳은 외진 곳이며 허허벌판이다. <역사원정대>나 <민족의 혼을 찾아서> 같은 팀이 아니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가득한 곳이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고결한 애국심으로 목숨을 바친 분을 생각하면 후손으로서 가슴이 애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유허비를 감싸고 있는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어쩌면 우리 만족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유허비에서 여전히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슬픈 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설의 삶은 어떠했나? 그는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아 1907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분으로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하셨다. 그의 유언에는 그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소원했는지, 그 한이 담겨져 있다.
"동지들과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했고, 유해는 수이푼 강에 뿌려졌다. 이토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생을 바친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앞에 흐르는 강이 슬픈 강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가 여름이었는데 슬픈 강물은 용트림 하듯, 몸부림치듯 흐르고 있었다. 아니 달리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상설 선생의 한과 결기가 전해지는 듯 했다. 슬픈 강은 러시아 동쪽 면을 따라 흐르다가 동해로 흘러든다.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 인들 조국에 돌아 갈 수 있으랴 라고 했던 이 열사의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쳐서 동해로 흘러들어 조국의 독립을 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바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영토였다. 광야를 달렸던, 기상 높은 우리 민족이 터를 잡았던 곳이다. 바람 길이 신작로처럼 막힘이 없었다. 목적지를 향해서 거침없이 달렸던 바람은 발해뿐만 아니라 이상설 선생의 조국의 독립을 향한 질주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비록 쓸쓸하고 초라하지만 유허비가 발해의 땅에 있다는 사실이 다소 위로가 되었다.
물, 슬픈 강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발해가 멸망한 후에 그 땅은 유목민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끊임없는 전쟁은 여인들의 눈물의 근원이 되었으며, 전쟁터에서 부모, 형제, 배우자와 자식을 잃어버린 여인들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그 여인들의 눈물이 모여서 강이 된 곳이 수이푼 강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가족을 잃은 유목민 못지않게 고단한 삶을 살았던, 구 소련 땅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까레이스키들이 이 강을 슬픈 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7년에 당시 소련은 20만 조선인 강제 이주를 결정한 뒤, 곧바로 총칼을 앞세워 고려인들을 동토의 땅 중앙아시아로 몰아냈다. 공식적인 이유는 조선 사람들의 일본 첩자행위 방지와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이었다. 그러나 강제 이주의 진짜 이유는 `스탈린의 강력한 중앙집권 야욕`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은 고려인들을 경계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애국선열들이 숙청되었다.
당시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은 굶주림과 공포와 죽음뿐이었다. 그 안에서 고려인들은 40여 일을 견뎌야 했으며,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땅굴을 파고 엄동설한을 견뎌야 할 정도로 비참했다. 배움의 길은 물론이고, 국가기관 취업 같은 사회진출 길 또한 막혀 있었다.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이처럼 조국이 아닌 소련에서 살다가 갑자기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던 까레이스키들의 눈물도 함께 흐르는 곳이 슬픈 강이다.
수이푼 강이 슬픈 강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최재형 선생이다. 고려인들의 대부였으며, 뜨거운 동포애로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던 최재형 선생의 희생적인 삶이 그러하다. 그는 천민의 신분으로 일찍이 러시아로 귀화하여 자수성가 한 재력가이며, 음으로 양으로 고려인들을 돕고, 조국의 독립에 생애를 바친 분이다. 애타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슬픈 강에서 함께 울었을 최재형 선생의 눈물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상설 선생과 최재형 선생 등 수많은 우리의 선열들과 까레이스키이들의 삶은 우리가 수이푼 강을 슬픈 강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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