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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地大)와 구행(口行)의 출현
― 빠알리 니까야의 유대색(有對色)·촉외입처(觸外入處) 해석과 우주론·수행론의 구조적 상관성 연구 ―
국문 초록
본 논문은 빠알리 니까야에 나타난 색(色)의 이중 분류 체계를 정밀히 검토하고, 특히 촉외입처(觸外入處)의 범위를 둘러싼 남방 상좌부와 북방 설일체유부의 아비담마적 분기(分岐)를 분석함으로써 초기불교 물질관의 한 정수를 규명한다.
남방 상좌부가 수대(水大)를 촉외입처에서 배제하여 법외입처(法外入處)의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으로 분류한 교학적 결단은, 진정한 물리적 접촉[有對觸]이란 오직 감각 기관에 직접 충돌하여 거치적거림(paṭigha)을 일으키는 물질에 한정된다는 엄격한 인식론에 기초한다. 이 기준에서 유대색의 근간은 단연 지대(地大, 견고성)이다.
본고는 이 교학적 정밀화가 지닌 수행론적 함의를 《대인연경(DN 15)》의 유대촉(有對觸)과 명칭촉(adhivacana-samphassa)의 상호의존 논증과 결합하여, 지대 중심의 유대색이 언어적 사유인 구행(口行, vitakka-vicāra)의 필수 조건임을 논증한다.
나아가 《아간냐 니까야(DN 27)》에 기술된 괴겁(壞劫)의 우주 진화 과정에서 라사빠따비(rasapathavī, 地味)가 최초로 출현하는 사건과, 선정(禪定) 수행에서 초선(初禪)에서 제2선정(第二禪定)으로 이행할 때 언어적 사유가 소멸하는 사건 사이에 성립하는 구조적 평행성을 밝힌다.
이를 통해 초기불교의 수행이 단지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언어와 개념 세계의 물질적 조건 자체를 연기법적 통찰로 해체하여 '거치적거림' 없는 순수한 통일의 장으로 나아가는 존재론적 실천임을 규명한다.
주제어: 색(rūpa), 유대색(sappaṭigha-rūpa), 지대(pathavī-dhātu), 구행(vacīsaṅkhāra), 촉외입처(phoṭṭhabbāyatana), 제2선정(dutiya-jhāna),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ṃ)
Ⅰ. 서론: 연구의 목적 및 문제 제기
초기불교에서 물질을 지칭하는 색온(色蘊)은 객관적 실재로서의 외계 사물을 규명하려는 물리적 탐구가 아니라, 감각 기관과 그 대상의 접촉을 통해 경험되는 세계를 체계화한 인식론적·수행론적 범주이다. 색온에 관한 교학은 ‘어떻게 물질이 인식의 장(場)을 구성하며, 그 구성이 어떻게 수행을 통해 변형되고 해체되는가’를 설명하는 근본 틀로서 기능한다.
빠알리 니까야는 물질[色]을 두 가지 체계로 분류한다.
첫째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와 그에 의존하여 파생된 사대조색(四大造色)으로 나누는 생성론적 분류이며,
둘째는 시각 가능성[見]과 저항성[對]이라는 두 기준에 따른 삼분법(三分法)이다.
《합송경(DN 33)》은 이 삼분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Tividhena rūpasaṅgaho — s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anidassanāppaṭighaṃ rūpaṃ.”
“세 가지 종류로 물질의 분류가 있다 — 볼 수 있고 부딪힘이 있는 물질[有見有對色], 볼 수 없으나 부딪힘은 있는 물질[無見有對色], 볼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물질[無見無對色].” (DN 33)
이 두 분류 체계를 가로지르는 핵심 개념이 바로 파티가(paṭigha, 對)이다. paṭi(마주하여)와 √han(치다)에서 파생된 이 용어는 물리적 차원에서 두 존재가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할 수 없게 하는 불가입성, 즉 ‘거치적거림’을 뜻하며, 정신적 차원으로 전이되면 대상을 향한 반발심인 ‘성냄’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물질적 요소가 이 ‘거치적거림’의 실질적 근거인가?
그리고 이 물리적 거치적거림은 인간의 정신 활동, 특히 언어적 사유의 발생과 소멸에 어떤 조건으로 작용하는가? 본 논문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음의 세 단계로 논증을 전개한다.
첫째, 촉외입처(觸外入處)의 범위를 둘러싼 남북방 아비담마의 견해 차이를 분석한다. 남방은 수대(水大)를 촉각의 대상에서 배제하여 법외입처의 무견무대색으로 분류하는 반면, 북방은 사대 전체를 불가견유대색으로 간주한다. 이 교학적 분기는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물리적 접촉’인지를 둘러싼 근본적 입장 차이를 반영한다.
둘째, 《대인연경(DN 15)》의 유대촉과 명칭촉의 상호의존성 논증을 검토하여, 지대 중심의 유대색이 언어적 사유(구행)의 필수 조건임을 밝힌다.
셋째, 우주론적 차원과 수행론적 차원에서 이 동일한 원리의 작동을 확인한다. 《아간냐 니까야(DN 27)》의 우주 진화 과정과 선정 수행의 심화 과정을 비교하여, 양자가 동일한 ‘유대색 → 유대촉 → 구행’의 연기 구조를 정반대 방향으로 통과함을 논증한다.
Ⅱ. 물질(色)의 이중 분류와 파티가(paṭigha)의 본질
1.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 생성론적 분류
니까야에서 물질은 두 층위로 구성된다. 네 가지 근본 물질인 사대(四大)와, 이에 의존하여 파생된 이차적 물질인 사대조색(四大造色)이다.
“Cattārome, bhikkhave, mahābhūtā. katame cattāro?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u.”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 물질[四大]이 있다. 어떤 것이 넷인가?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이다.” (SN 12.2 등)
각 대(大)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지대(pathavī-dhātu)는 견고성·단단함을, 수대(āpo-dhātu) 는 결합력·응집성·흐름을, 화대(tejo-dhātu)는 열기·변형시키는 에너지를, 풍대(vāyo-dhātu) 는 압력·이동·지탱력을 본질로 한다.
사대조색(upādāyarūpa)은 이 네 근본 성질이 결합하여 형성하는 감각기관(오근)과 감각대상(오경)을 포괄하며, 아비담마 주석 전통은 “네 가지 근본 물질에 의존하여 파생된 물질이 현상한다”고 정리한다(《청정도론》 XVIII 등).
2. 삼분법(三分法): 인식론적 분류와 파티가
삼분법은 인식 주체와의 관계에서 물질을 분류한다. 그 기준은 두 가지다:
볼 수 있는가[見, nidassana], 그리고 물리적으로 부딪침이 있는가[對, paṭigha].
- 유견유대색(有見有對色) : 시각적으로 인식 가능하며 물리적 저항성도 지닌 물질. 오직 색경(色境)만이 여기에 해당한다.
- 무견유대색(無見有對色) :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물리적 저항성을 지닌 물질. 성·향·미(味)의 세 대상과 촉외입처(觸外入處)에 포함되는 물질들, 그리고 안·이·비·설·신(五根)이 이 범주에 속한다.
-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 : 볼 수도 없고 물리적 저항성도 없는 미세한 물질. 법외입처(法外入處)에 포함되며, 오직 마음[意根]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이 삼분법의 중추 개념인 파티가(paṭigha)는 앞서 확인한 대로 ‘물리적 거치적거림, 불가입성’을 의미한다.
Ⅲ. 촉외입처(觸外入處) 해석의 남북방 분기(分岐)
1. 북방 설일체유부의 해석: 경험적 포괄성
북방 아비달마의 대표 논서인 《구사론》은 촉외입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觸外入處者, 謂四大及四大造色, 不可見有對.”
“촉외입처란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을 말하며, 볼 수 없고 부딪침이 있는 물질[不可見有對]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사대 전체가 촉각의 직접적 대상이 된다. 물에 손을 넣었을 때 느껴지는 축축함이나 유체의 압력 등은 분명히 촉각적 경험이라는 상식적 직관에 부합하는 입장이다.
2. 남방 상좌부의 해석: 엄격한 물리적 저항성 기준
반면 남방 상좌부의 아비담마는 사대가 항상 결합하여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촉각(신식)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지·화·풍 삼대뿐이며, 수대(水大)는 배제된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는 《청정도론》과 《앗타살리니》의 아비담마 주석 전통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촉각이 발생하려면 외부 대상이 신근(피부 등 감각 수용체)의 지대(견고성)에 직접 충돌하여 저항을 일으켜야 한다.
- 지대(地大) : 단단함·견고성으로 신근과 직접 충돌하여 가장 강력한 촉각을 발생시킨다. 유대색의 전형이다.
- 화대(火大) : 뜨거움·차가움으로 신근의 온도 수용체와 직접 반응한다.
- 풍대(風大) : 압력·이동으로 신근에 물리적 힘을 가한다.
- 수대(水大) : 결합력·응집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입자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할 뿐, 신근의 표면에 부딪쳐 충격(paṭigha)을 직접 주지 않는다. 물이 피부에 닿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축축함 등은 실상 그 유체의 지대·풍대·화대가 신근과 접촉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남방은 수대를 촉외입처에서 제외하고, 불가견무대색(不可見無對色)으로 분류하여 법외입처(法外入處)에 배정한다.
3. 분기의 핵심: 지대(地大)의 유대성(有對性)
양측의 차이는 단순한 분류 항목의 이동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물리적 접촉인가’ 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를 반영한다.
| 구분 | 북방 설일체유부 | 남방 상좌부 |
|------|----------------|-------------|
| 촉외입처의 범위 | 사대 및 사대조색 전체 | 지·화·풍 삼대 (수대 배제) |
| 수대(水大)의 지위 | 불가견유대색 | 불가견무대색 (법외입처) |
| 인식의 기준 | 상식적·경험적 촉각 | 엄격한 물리적 충돌(paṭigha) 여부 |
상좌부의 입장을 따를 때, 유대색(有對色)의 정수(精髓)는 거치적거림을 통해 감각 기관과 직접 충돌하는 물질이며, 그 중심에는 단연 지대(地大, 견고성)가 자리한다. 결국 파티가(paṭigha)의 실질적 담지자는 지대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Ⅳ. 《대인연경(DN 15)》의 유대촉과 언어 발생의 조건
1. 경문의 구조 분석
남방 아비담마의 엄격한 유대색 규정이 지니는 수행론적·인식론적 의의는 《대인연경(DN 15)》의 법문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 사이의 이 문답은, 물질(色)과 정신(名)이 교차하는 접촉(觸)의 장에서 물리적 거치적거림이 언어 발생의 절대적 조건 임을 천명한다.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그러한 형태들[ākāra], 특징들[liṅga], 상(相)들[nimitta], 이미지들[uddesa] 때문에 명신(名身)에 관한 개념이 있다. 그러한 형태·특징·상·이미지들이 없을 때, 색신(色身)에 대한 명칭촉(adhivacana-samphassa)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존귀하신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그러한 형태들, 특징들, 상들, 이미지들 때문에 색신에 관한 개념이 있다. 그러한 형태·특징·상·이미지들이 없을 때, 명신(名身)에 대한 유대촉(paṭigha-samphassa)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존귀하신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DN 15)
이어서 부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Ettāvatā kho, ānanda,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해서 명칭(adhivacana)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어원(nirutti)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개념(paññatti)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지혜(paññā)의 영역이 전개된다.” (DN 15)
2. 유대촉-명칭촉의 이중 조건 구조
이 경문은 ‘명(名)’과 ‘색(色)’이 접촉(觸)을 매개로 상호 조건 짓는 역동적 연기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문답은, 명신의 인식적 표지들(형태·특징·상·이미지)이 사라지면 색신에게 명칭촉이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힌다. 이는 물질이 ‘무엇’으로 지칭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분별하고 개념화하는 정신의 틀이 먼저 작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문답은 그 역(逆)을 논증한다. 색신에 관한 인식적 표지들이 사라지면 명신에게 유대촉이 알려질 수 없다. 명신(정신)은 자체적으로 물리적 저항성과 부딪칠 수 없으며, 오직 색신(물질)을 통해서만 유대촉을 경험한다.
부처님께서 이 대론을 마무리하며 선언하신 “이와 같이 해서 명칭의 길이, 어원의 길이, 개념의 길이, 지혜의 영역이 전개된다”라는 말씀은, 명칭(언어)과 개념의 세계 전체가 명칭촉과 유대촉의 이중 조건 관계 위에서 비로소 펼쳐질 수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3. 구행(口行)의 조건으로서의 유대촉
그렇다면 유대촉은 구체적으로 어떤 정신 활동의 조건이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구행(口行, vacīsaṅkhāra)이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구행은 언어 발화의 선행 조건으로서, 《중부 니까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MN. 44)
즉, 구행은 소리 내어 말하기 이전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언어적 사유, 대상을 향한 지향적 생각[尋]과 고찰[伺]을 뜻한다.
《대인연경》의 문맥에서, 유대촉이 없을 때 명칭촉이 불가능하고 명칭촉이 없을 때 언어의 길이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은, 곧 물리적 거치적거림(유대촉)이 언어적 사유(구행)의 발생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함축한다. 이 논리적 연결은 다음의 경문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사밋디여, 인간의 의도적 사유들[尋-思惟]은 무엇을 대상[所緣]으로 하여 일어나는가?”
“존귀하신 세존이시여, 명색(名色)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SN 14.12)
이 문답은 구행의 실체인 심·사가 명색(물질과 정신의 복합체)을 대상으로 삼아 발생함을 명시한다. 단순히 정신(名)만으로는 구행이 발생하지 않으며, 물질적 기반(色)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물질적 기반 중에서도 구행을 촉발하는 것은 무대색이 아니라 유대촉을 가능케 하는 유대색, 특히 그 근간인 지대(地大)라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 논지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슬이 도출된다.
[지대(地大) 중심의 유대색] → [유대촉(paṭigha-samphassa)] → [명칭촉(adhivacana-samphassa)] → [구행(口行, vitakka-vicāra)] → [언어·개념 세계의 전개]
Ⅴ. 괴겁(壞劫) 우주론과 지대(地大)의 출현: 《아간냐 니까야(DN 27)》의 증언
1. 괴겁의 우주 상태: 수대(水大)의 단독 지배
《아간냐 니까야(DN 27)》는 우주의 한 주기가 수축하여 파괴되는 괴겁으로부터 다시 팽창하는 성겁에 이르는 우주 진화의 드라마를 설한다. 이 설화의 초기 국면에서 가장 주목할 개념은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ṃ)’이다.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saṃvaṭṭati. saṃ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ṃvattanikā honti... ekodakībhūtaṃ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andhakāro andhakāratimisā.”
“왓세타여, 참으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시점에 이 세상이 수축[壞]하는 때가 온다... 왓세타여, 그때 세상은 하나의 물이 된 상태[ekodakībhūtaṃ] 이며, 어둡고 칠흑 같은 암흑이다.” (DN 27)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ṃ)은 eka(하나) + udaka(물) + bhūta(~이 된)의 명백한 합성어로서, ‘하나의 거대한 물 덩어리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남방 교학의 관점에서 이는 수대(水大)만이 우주적 규모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아직 지대(地大)가 출현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단단한 형태, 공간적 경계, 물리적 충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곧 유대색과 유대촉이 완전히 부재하는 세계이다.
2. 광음천에서 범천(초선천)으로의 이행
우주가 팽창하는 성겁의 첫 번째 사건은 빈 범천의 궁전이 나타나는 것이다.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suññaṃ brahmavimānaṃ pātubhavati. atha kho aññataro satto āyukkhayā vā puññakkhayā vā ābhassarakāyā cavitvā suññaṃ brahmavimānaṃ upapajjati. so tattha hoti manomayo pītibhakkho sayaṃpabho antalikkhacaro subhaṭṭhāyī...”
“비구들이여, 참으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시점에 이 세상이 팽창하는 때가 온다. 세상이 팽창할 때, 빈 범천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한 중생이 수명이 다하거나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Ābhassara, 제2선천)에서 죽어 빈 범천의 궁전(초선천)에 태어난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manomaya], 희열을 양식으로 삼으며, 스스로 빛을 발하고, 허공을 날아다니며, 청정함 속에 머물면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한다.” (DN 27)
이 구절은 광음천(제2선천)에서 죽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이 범천의 궁전(초선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범천의 존재도 여전히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manomaya]’을 지닌다는 점은, 아직 ‘라사빠따비(地味)’가 출현하지 않은 상태, 즉 지대 중심의 거친 유대촉의 세계가 여전히 부재함을 의미한다.
3. 라사빠따비(rasapathavī)의 출현: 지대의 우주적 탄생
이어서 경은 우주 진화의 결정적 사건을 기술한다.
“Atha kho tesaṃ, vāseṭṭha, sattān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rasapathavī udakasmiṃ samatani. seyyathāpi nāma payaso tattassa nibbāyamānassa upari santānakaṃ hoti, evameva pāturahosi.”
“왓세타여, 그런데 그 중생들에게 유구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시점에, (우주를 채우고 있던) 물 위에 맛있는 흙[地味, rasapathavī] 이 마치 뜨거운 우유가 식으면서 위에 응고된 막(膜)이 생기는 것처럼 고르게 펼쳐졌다. 이와 같이 나타났다.” (DN 27)
라사빠따비(rasapathavī)는 ‘rasa(맛) + pathavī(땅, 지대)’의 합성어로, 최초의 지대(地大) 출현을 의미한다. 수대만이 지배하던 우주에 비로소 견고성·단단함·공간적 경계라는 유대색의 본질이 출현한 것이다. 이후 중생들은 이 맛있는 흙을 맛보고 그 맛에 대한 갈애(tanhā)가 생겨나며, 이로부터 점차 거친 물질과 윤리적 분화가 진행된다. 그 모든 전개의 근원적 조건은 바로 이 지대의 출현이다.
4. 지대 출현의 인식론적 함의
《아간냐 니까야》의 이 대목은 단순한 우주 발생 신화가 아니다. 이는 언어와 개념이 작동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이 성립되는 과정을 물질적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다. 앞서 《대인연경》이 밝힌 유대색(지대) → 유대촉 → 명칭촉 → 언어로 이어지는 연기 사슬은, 이 우주 진화의 서사에서 물질적 기반이 형성되는 순서와 정확히 일치한다. 괴겁의 암흑은 단순한 물리적 어둠이 아니라, 언어와 개념이 미분화된 존재론적 심연을 상징한다.
Ⅵ. 제2선정(第二禪定)에서 구행(口行)의 소멸
1. 초선(初禪)의 심리 구조: 구행의 작동 영역
선정(jhāna)의 체계에서, 구행으로서의 심(尋)과 사(伺)가 작동하는 것은 오직 초선(初禪)까지만이다. 초선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나고 해로운 법들로부터 벗어나, 심(尋, 생각)과 사(伺, 숙고)를 갖춘, 멀리 떠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DN 2 등)
초선은 심·사가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상태이다. 심(vitakka)은 마음을 대상에 향하게 하는 초기 지향, 사(vicāra)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붙잡아 두는 작용이다. 이 심·사가 바로 구행(口行)의 정의 그 자체이므로, 초선은 언어적 사유가 여전히 기능하는 선정의 단계 이다.
2. 제2선정(第二禪定)의 침묵
제2선정(第二禪定)에 이르면 결정적 전환이 일어난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심(尋)과 사(伺)가 가라앉음으로 인해, 내적으로 청정하고 마음이 하나로 모인 상태[ekodibhāva]가 되어, 심도 없고[avitakka] 사도 없는[avicāra], 삼매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의 제2선정(第二禪定)을 성취하여 머문다.” (DN 2 등)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 아윗딱까 아위짜라(avitakka-avicāra) : 심(尋)도 사(伺)도 없는 상태, 즉 구행(口行)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가 명시적으로 선언된다. 이는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그 발생의 조건 자체가 해체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에꼬디바왕(ekodibhāvaṃ) : 주석 전통에서 이 용어는 eka + odi(한계, 고정됨) 또는 udeti(떠오르다)의 결합으로 분석되어 ‘단일하게 집중된 상태’, ‘마음이 하나로 모인 통일 상태’를 뜻한다. 이는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통일된, 고요하면서도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이다.
3. 우주론과 수행론의 구조적 평행: 개념의 기능적 대칭성
여기서 《아간냐 니까야》의 우주론과 제2선정 수행론 사이에 성립하는 평행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헌학적으로 볼 때, 에꼬디바왕(ekodibhāva)의 어근(odi / udeti)과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의 어근(udaka)은 서로 다른 어원을 지닌 별개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두 용어가 역사·언어학적으로 동일한 어근을 공유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경전의 서사 구조 내에서 드러내는 개념의 기능적·해석학적 대칭성(hermeneutical symmetry)은 부인할 수 없는 교학적 실체이다.
수대(水大)의 응집력이 개별 입자들을 묶어 하나의 거대한 물 덩어리(ekodakībhūta)를 형성하듯, 선정의 힘은 산란한 마음의 작용들을 묶어 하나의 고요한 통일장(ekodibhāva)을 형성한다. 양자는 ‘응집적 통일’이라는 동일한 기능적 원리를 물리적·심리적 두 차원에서 각각 반영하는 대칭적 개념 이다.
| 차원 | 《아간냐 니까야》 (우주론) | 제2선정 (수행론) |
|------|---------------------------|-------------------|
| 원초 상태 |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ṃ, 하나의 물) | 에꼬디바왕(ekodibhāva, 마음의 단일 통일) |
| 응집의 원리 | 수대(水大, 물의 응집성) | 선정의 힘(마음의 응집성) |
| 지대(地大)의 위상 | 부재 → 라사빠따비(地味)로 출현 | 유대색(有對色)이 완전히 해체됨 |
| 유대촉 | 불가능 | 초월 |
| 구행(口行) | 미발현 (언어 이전의 세계) | 소멸 (avitakka-avicāra) |
이 구조적 평행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주가 수대의 바다(ekodakībhūtaṃ)일 때, 지대가 없으므로 유대촉이 불가능하고, 유대촉이 없으면 《대인연경》이 설한 대로 언어와 개념의 길이 전개될 수 없다. 이는 ‘언어 이전의 세계’, 곧 구행이 미발현된 존재론적 원초 상태이다.
수행론적 차원에서 보면, 수행자가 초선(지대의 세계)을 넘어 제2선정에 진입할 때, 마음은 유대색의 거치적거림을 완전히 초월한다. 유대촉의 기반이 해체되므로, 유대촉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명칭촉도, 그리고 그 연장선상의 언어적 사유인 구행(심·사)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소멸한다.
우주 진화가 수대의 바다[ekodakībhūtaṃ] → 범천(초선천)의 출현 → 지대[rasapathavī]의 출현 → 언어·개념 세계의 전개로 나아가는 하향적 전개라면, 수행은 이와 정반대로 지대의 세계[초선] → 유대색의 해체[제2선정] → 수대적 통일 상태[ekodibhāva]로 복귀하는 상향적 해체의 과정이다.
양자는 동일한 ‘유대색-구행’의 연기 구조를 정반대 방향으로 통과하며, 그 정점과 시원(始原)에서 각각 ‘언어 이전의 응집적 통일’을 물질적·심리적 언어로 증언한다.
Ⅶ. 결론: 존재론적 해체로서의 수행
본 논문은 빠알리 니까야의 물질(色) 분류 체계를 정밀히 검토하고,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가 수대(水大)를 촉외입처에서 배제하여 무대색으로 분류한 교학적 결단이 단순한 학문적 엄밀성을 넘어, 수행의 심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질적 전환을 설명하는 결정적 단서 임을 논증하였다.
논증의 핵심 축은 다음의 사슬로 요약된다.
지대(地大, 견고성) → 유대색(有對色) → 유대촉(paṭigha-samphassa) → 명칭촉(adhivacana-samphassa) → 구행(口行, vitakka-vicāra) → 언어·개념 세계의 전개
이 사슬은 세 가지 층위에서 일관되게 작동한다.
교학적 층위에서는, 남방 아비담마의 엄격한 유대색 기준이 지대를 유대촉의 근본 토대로 정립하고, 수대를 법외입처로 격하시킴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물리적 접촉인가’를 정밀히 규명한다.
인식론적 층위에서는, 《대인연경(DN 15)》이 명시한 유대촉과 명칭촉의 상호의존성이 물리적 거치적거림이 없이는 언어적 개념화가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우주론적·수행론적 층위에서는, 《아간냐 니까야(DN 27)》의 괴겁에서 수대만 존재하던 ‘에꼬다끼부땅(ekodakībhūtaṃ)’ 상태에 지대(rasapathavī)가 출현하는 사건이 언어와 개념 세계가 시작되는 우주적 조건을 보여주며, 이와 기능적으로 대칭되는 제2선정의 ‘에꼬디바왕(ekodibhāvaṃ)’ 상태에서 구행이 소멸하는 사건은 내면적 수행을 통한 동일한 조건의 해체를 보여준다.
이 다층적 수렴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단지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인식적 조건들을 연기법적 통찰을 통해 해체해 나가는 존재론적 실천이다.
“거치적거리는 물질(지대/유대색)이 소멸된 자리에서는 사유와 언어(구행) 또한 발붙일 곳을 잃고 소멸한다”는 이 명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거친 물질 세계와 그에 의존한 산란한 언어적 사유로부터 어떻게 벗어나 더 높은 통찰과 평온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 지표이다.
제2선정의 침묵은 단순한 무언(無言)이 아니라, 언어 발생의 물질적 조건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획득되는 실존적 자유의 표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빠알리 니까야의 물질 분류 체계는 단순한 교리적 분류학이 아니라, 거친 물질의 거치적거림을 해체하여 순수한 통일의 장으로 나아가는 깨달음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적 길잡이 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선명히 드러낸다.
참고 문헌
1차 문헌 (빠알리 니까야)
- Dīgha Nikāya (DN): Mahānidāna-sutta (DN 15), Aggañña-sutta (DN 27), Saṅgīti-sutta (DN 33)
- Majjhima Nikāya (MN): Mahāvedalla-sutta (MN 43), Cūḷavedalla-sutta (MN 44)
- Saṃyutta Nikāya (SN): Nidāna-saṃyutta (SN 12.2), Dhātu-saṃyutta (SN 14.12), Cūḷavedalla-sutta (SN 41.6)
2차 문헌 (아비담마 및 주석서)
- Visuddhimagga (Buddhaghosa)
- Atthasālinī (Buddhaghosa)
- Abhidhammattha-saṅgaha (Anuruddha)
- Abhidharmakośa-bhāṣya (Vasubandhu)
현대 연구 문헌
- Bodhi, Bhikkhu.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 Wisdom Publications, 2000.
- Bodhi, Bhikkhu.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 BPS Pariyatti Editions, 2000.
- Walshe, Maurice. The Long Discourses of the Buddha . Wisdom Publications, 1995.
- Ñāṇamoli, Bhikkhu.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 BPS Pariyatti Editions, 1991.
- Karunadasa, Y. Buddhist Analysis of Matter .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