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약용 다산초당으로 아내와 함께 여행하다] (신축일기4) 정병경.
ㅡ순천만으로ㅡ
여정 4일 째 일기다. 아침 식사는 건너뛰고 운동삼아 해운대 동백섬 공원 산책길을 걸었다. 광안대교가 지척이다. 신라의 학자 고운孤雲(海雲) 최치원 동상이 오륙도를 바라보고 있다. 2층인 팔각정 해운정은 경주 최씨 종친회 사무실이다. 아내도 같은 경주 최씨여서 정이 더 느껴진다.
나의 시조始祖(鄭繪文) 묘지와 사당祠堂이 동래東萊에 자리했다. 다른 일정이 있어 다음 기회에 차분히 찾아 볼 생각이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후 달맞이 공원길을 지났다. 길게 이어진 카페거리 분위기에 반한다. 아침 햇살을 받으니 한층 멋스럽다.
진도를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여러 번 바꾸어 타야 한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주어 순조롭게 달린다. 점심 때 쯤 순천에 접어들었다. 갈대숲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내는 지인들과 함께 이미 다녀온 곳이다.
순천 IC를 빠져나와 순천만습지 주차장에 들어섰다. 휴일이어서 한가하다. 총면적이 170만 평이라고 한다. 끝도 안 보이는 갈대끼리 부비며 서로 의지한다.
제법 강한 바람이 연약한 갈대를 휘갈긴다. 아예 뿌리째 뽑으려고 든다. 계절마다 다르게 변해가는 갈대의 모습이 궁금하다.
관광객을 태우고 수로를 유람하는 배가 여러 척이 정박해 있다. 세계 5대 습지에 속한다고 하니 이에 버금가는 습지가 더 궁금해진다.
점심은 습지 인근 '전라도 밥상'집에서 짱뚱어탕이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 추천하고 싶은 맛집이다.
ㅡ다산초당길ㅡ
오래 전부터 벼루던 강진의 하일라이트! '다산초당'을 향해 달린다. 실학자 정약용의 유배지다. 동백나무가 지천이다.
동네 끝에 차를 세우고 초당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걸었다. 나무 뿌리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발길에 밟힌다. 뿌리들이 화가 난 모습이다.
산 중턱에 두 칸 남짓한 초당 안에 다산의 진영眞影이 밖을 내다본다. 숲에 가려 구강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초당을 향해 차를 달였던 넓적바위(다조)에서 큰절로 마주했다.
18년 유배 기간동안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집필한 다산에게 경의를 표한다. 서재 겸 주거 공간이 볼품없는 폐가였는데,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팔작기와 지붕에 5칸 정도로 번듯하게 지었다고 한다. 초당 왼편 바위에 '丁石' 은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한다.
권력자 김조순 덕분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고향집 여유당으로 돌아온 다산. 그해가 57세인 1818년이다. 마치 시냇물을 건너듯 조심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여유당. 내가 태어난 팔당 상류 귀여리와 마주한 강 건너 마현馬峴(말고개) 부락이다.
다산은 다시 흠흠신서欽欽新書(형벌을 다스리는 법정서)를 집필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성쇠盛衰를 거듭하던 그는 1836년 매화가 피기도 전인 2월에 눈을 감았지만 아직도 살아있고, 그가 남긴 글은 이 시대에도 살아 숨쉬며, 무지한 나를 가르치고 있다.
ㅡ대교약졸ㅡ
유배 시절 강진에 온 아들 학유에게 가훈이 담긴 편지를 쥐어준다. 읽고 또 읽는다. "아침에 햇볕이 먼저 든 곳은 저녁에 그늘이 먼저 들며 일찍 핀 꽃은 먼저 시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뜻을 품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잠시 재난을 당했다고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녀야 한다." 훗날 농가월령가를 저술한 주인공이 바로 다산의 아들이다.
여유당 앞 실학박물관에 다산의 저서와 흔적에서 만남을 대신한다.
2019년 10월 3일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다산독본》을 82회로 1차 마감했다. 정민교수가 집필한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 정조대왕 때 다산의 행적이다.
다산은 사람을 끄는 마력을 지녔다. 다산초당과 여유당은 매일 그를 찾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부지기수다. 벼루던 천리길을 이제서야 달려왔다. 초당 연못 주변에서 한참 채취를 느끼며 다산의 활약상을 회상해본다.
여름엔 습하고 겨울에 유별나게 바람이 많아보이는 계곡이다. 어찌 그 고난의 세월을 극복했을까. 처마밑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이 추사의 글씨체를 집자集字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 봉은사의 《板殿》 역시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71세 때의 솜씨인데, 이를 두고 대교약졸로 표현한다. 진짜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순박하다는 것이다. 서툰 사람의 솜씨처럼 생각하며 명필을 눈에 담고 비탈길을 내려왔다.
초당 아래 길목 숲에 묘지 하나가 있다. 다산의 막내 제자인 순암 윤종진의 묘와 비석이 바람을 맞는다. 길목에서 스승의 자취를 지키고 있다.
다산이 순암에게 호를 내리면서 쓴 글을 일부만 읽는다. "네가 스스로 작다 여기지 않고 뜻을 세워 힘을 쏟아 대인과 호걸이 되기를 기약한다면 하늘은 네 체격이 작다 하여 네가 덕을 이루는 것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하략)
다산은 윤종진에게 순수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순암淳菴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순암은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1744~1821)의 손자며, 윤단의 장남 윤규노(1769~1837)의 4째 아들이다.
마을 끝인 초당 입구에 다산문화원 문을 들어섰다. 묘지 주인공인 윤종진의 4대손 윤동환尹棟煥 선생이 반가히 맞아준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강진군수를 지냈다. 다산문화원과 다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실내에는 '茶信契'
'一爐香室' '茶半香初' 등 추사체의 목각이 창 위에 걸려있다. 윤동환 선생이 쓴 명저 '삶따라 자취따라 다산정약용' 한권을 사들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휴일이어서 문이 닫혀 돌아섰다.
ㅡ동백길ㅡ
다산과 연이 깊은 혜장惠藏(1772~1811) 선사가 주지로 있던 만덕산 백련사로 달렸다. 8대사 8국사를 배출한 명찰이다. 절길은 이름난 동백꽃길이다. 문화유산으로 올릴 만한 동백숲에 넋을 잃는다. 장관이다.
다산보다 10년 아래인 혜장선사. 밤새도록 주역을 놓고 잘난체 했던 스님은 다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이런 말을 남긴다.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고 할 수 없는 일이군요. 더 가르쳐 주십시오" (정민교수 글에서).
한강 상류 양수리 수종사에 책을 지게에 한짐 지고 올라가 공부에 몰두한 다산의 과골삼천(복사뼈가 세 번 구멍이 남) 내공을 미쳐 몰랐던 혜장, 그 이후 자신의 별호를 아암兒菴으로 지었다. 겸손함이 호號에 배어 있다. 34세에 다산을 만난 스님은 40세가 삶의 전부였다.
입적하기 전 혜장은 16살의 동승을 데려왔다. 초의를 다산에게 각별히 부탁한다. 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초의선사는 아암이 떠난 후 다산과 돈독한 사이가 된다.
초의는 추사와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와도 같은 해에 태어난 무오생으로 함께 벗으로 지냈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정진하며 40년의 세월을 보낸다. 서산대사(휴정)의 선맥을 물려받아 소임을 마친다.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다산의 초상을 그려 선물한다. 세속의 성은 張氏이다.
*한승원이 쓴 《초의》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24세 되는 해, 초의와 정약용의 첫대면을 주선한 것이 강진 백련사 주지 아암 혜장 스님이다. 아암은 정다산이 지어준 또 다른 법호일 뿐, 원래의 법호는 '연파'이다." "운흥사에서 찻잎을 따고 덖고 마시는 법을 벽봉에게서 배웠다."
문헌의 기록마다 상이해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ㅡ인연ㅡ
윤동환 선생의 글에서 몇 줄 옮겨본다. "강진읍에서 8년을 보낸 다산은 고성암 보은산방을 거쳐 다산의 나이 47세인 1808년 봄에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에 있는 다산(茶山; 산 이름) 기슭으로 거쳐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원래 단산정으로, 강진읍에서 30리쯤 떨어진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한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의 초당이다. 윤단은 다산에게 초당에 살도록 숙식을 제공하며, 수많은 저서를 완성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차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차동산 기슭에 있는 초당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 불렀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가 다산의 외증조가 된다." 윤동환 저자의 글에서 얻은 정보가 보탬이 되었다.
백련사 주위 5만m²에 1,500여 그루의 동백길을 걸었다. 봄에 피는 춘백春栢, 가을에도 빨간 추백秋栢, 겨울이면 눈을 머금고도 꽃잎이 열리는 동백冬栢이 장관을 이룬다. 고목에서 피는 꽃이 예쁘고 아름답다.
국가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 동백에 잠시 취했다. 대웅보전 영단에 '萬德山 白蓮社' 라고 쓰인 편액의 모일社字가 궁금하다.
4일 째 일정 마지막을 백련사에서 접고, 숙소인 진도 쏠비치로 달린다.
강진 '사의재四宜齋'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추억인데, 사위가 이미 진도로 숙소를 정했다.
다산이 유배 때 주모가 내어준 골방이다. 다산은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에서 '사의재'로 이름을 지었다.
유배 중 지식이 풍부해도 부족함을 한스러워하며 오언절구 시 한수 읊는다.
"복희의 시절에 못태어나서/
복희에게 물어볼 길이 없구나./
공자의 세상에 못 태어나서/
공자에게 물어볼 길도 없구나.
不生宓羲時부생복희시
無由問宓羲무유문복희
不生仲尼世부생중니세
無由問仲尼.무유문중니"
머리가 텅 빈 나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숙소로 가는 길은 온통 사철 푸른 동백숲으로 정원을 이루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 어귀에 동백나무 한 그루 심고 매일 눈으로 보며 즐기고 싶다.
2021.2.15.
참고 서적.
다산초당.
다산초당에서.
보정산방.
유재. 습작.
백련사 동백숲.
정석.
다산박물관.
해운대 최치원 동상.
부산 해운대 동상앞 공원.
{참고 문헌}.
*완당평전(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절집기행(심석구).
*삶을 바꾼 만남(정민).
*초의(한승원).
*조선명인전3(이은직).
*곱게 늙은 절집(심인보)
*명찰순례2(최완수),
*학자의 고향(KBS 학자의 고향 제작팀).
*다산독본 파란1ㅡ2(정민).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백민정).
*다산의 제자 교육법(정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
*인간답게 산다는 것(오세진 편역).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박수밀).
*새기고 싶은 명문장 (박수밀ㆍ송원찬).
*한밤중에 잠깨어(정민).
*나는 나다(정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1ㅡ2(이덕일).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간호윤).
*미쳐야 미친다(정민).
*땅의 역사(박종인).
*아주 史적인 고백(정상호ㆍ동아일보사).
첫댓글 시간을 벗삼으시는 멋진 모습을
더블어 지면으로 공유함에 감사합니다
순천만의 저녁노을에 일렁이는 갈대와
바다내음 뒤덮인 황량함이 추억됩니다
백련사의 춘백이 피기전 동백의 타는듯
붉은 꽃송이로 여정의 시간이 붙박이 되시리라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