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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양산박(梁産泊)
임충(林沖)이 서너 잔을 비웠을 무렵 왕륜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시대관인(柴大官人)께서는 요즈음 별일 없소?"
"매일 성 밖을 나가 사냥을 즐기며 지내십니다. 이 임충의 일말고는 별일 없지요."
임충(林沖)이 본대로 대답했다.
세 두령의 깍듯한 대우에 적잖이 감격한 터라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하지만 임충(林沖)이 감격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왕륜(王倫)은 겉으로는 임충을 반갑게 맞는 척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제 나름의 셈을 하느라 한창이었다.
'나는 본시 과거에 낙방한 수재(秀才)로 두천과 뜻이 맞아 이렇게 도둑 떼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송만(宋萬)이 찾아들고 졸개들도 많이 모여들어 이만큼 되었지만, 실은 내가 잘하는 일은 별로 없다.'
'저 두천(杜遷)과 송만의 무예도 대단한 건 못 되고, 그런데 이제 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좀 생각해 봐야 될일이 아닐까?'
'저 사람은 동경에서 금군교두를 지냈다니 틀림없이 무예가 뛰어날 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우리 셋의 솜씨가 보잘것없음을 알고 우리 자리를 힘으로 빼앗으려 든다면 무슨 수로 맞서겠는가.'
'좀 억지스럽더라도 적당한 핑계를 대어 저 사람을 이 산에서 빨리 내쫓는 게 뒷날의 걱정거리를 없애는 셈이 될 것이다.'
'시진(柴進)을 볼 낯이 없고, 지난날의 은혜를 잊었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왕륜(王倫)은 다시 졸개들을 불러 따로 큰 술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졸개들이 술을 거른다, 안주를 장만한다, 법석을 떨어 잔치 같은 술자리를 마련하자 왕륜(王倫)은 임층을 불러들였다.
송만(宋萬), 두천(杜遷), 주귀(朱貴)도 함께해 처음에는 임충을 맞이하는 두령들의 술자리 같았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해 왕륜(王倫)이 갑자기 졸개들을 부르더니 오십 냥의 은자가 당긴 쟁반 하나와 비단 두 필을 내오게 했다.
졸개들이 시킨 대로 하자 왕륜(王倫)이 몸을 일으켜 임충에게 말했다.
"대관인께서 추천해 임교두가 우리 산채를 찾아오신 것은 반가운 일이나 받아들일 수 없음이 안타깝소이다."
"우리 산채는 작고 식량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거처할 곳도 마땅치 않고 세력도 보잘것없어 오히려 임교두의 앞날을 그르칠까 두렵소."
"내드리는 돈과 피륙이 비록 적으나 비웃지 말고 거두시고 달리 큰 산채를 찾아보시는 게 좋겠소."
"교두 같은 호걸(豪傑)이 몸담을 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을 터인즉, 내 말을 너무 괴이쩍게 듣지 마시오."
그 뜻밖의 말에 술기운이 싸악 걷힌 임충(林沖)이 간곡히 사정했다.
"세 분 두령께서는 다시 한번 헤아려 주시오."
"저는 의로운 이름을 우러러 천 리를 닫고, 참다운 주인을 찾아 만 리를 헤매다가 시대관인(柴大官人)의 체면을 빌러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임충(林沖)이 비록 재주 없으나 무리에 끼워 주시기만 한다면 모든 일에 죽음을 마다 않고 앞장설 각오였습니다."
"돈냥이나 베필을 얻자고 이렇게 달려온 것은 아니니 부디 이 고단하고 외로운 처지를 밝게 해아려 주십시오."
왕륜(王倫)이 그런 임충의 말을 차게 잘랐다.
"이곳이 좁아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오. 조금도 이상하게는 생각하지 마시오."
그때 보고 있던 주귀(朱貴)가 딱했던지 임충을 편들어 한마디 했다.
"형님께서는 아우의 말 많음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한번 귀 기울여 주십시오."
"우리 산채에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지만 가깝고 먼 마을에서 빌려다 쓸 수도 있는 일이고, 거처가 마땅치 않다해도 이곳에는 재목으로 쓸 나무가 널렸으니 천 칸의 집을 지어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더구나 저분은 시대관인(柴大官人) 께서 천거해 보내신 분인데 어찌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라도 우리가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시대관인(柴大官人)이 아신다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또 저분은 여러 가지 재주를 지녔으니 우리가 받아들여 주기만 하면 반드시 지닌 힘을 다 쏟아 일할 것입니다."
두천(杜遷)도 보기가 딱했던지 임충을 편들었다.
"우리 산채에 저 사람 하나 더 있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대관인(柴大官人)이 섭섭히 여기실겁니다."
"우리도 받은 은덕과 의리를 저버린 인간들이 되고 맙니다. 전날 그토록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사람 하나 보낸 걸 어찌 받지 않고 내쫓는단 말입니까?"
"시대관인(柴大官人)의 낯을 보아서라도 저 사람을 두령의 하나로 받아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강호의 모든 호걸들이 우리의 의리 없음을 비웃을 것입니다."
송만(宋萬)까지도 그렇게 임충을 돕고 나섰으나 왕륜(王倫)은 좁은 속셈을 버릴 줄 몰랐다.
이번에는 엉뚱한 의심을 내세워 셋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아우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저 사람은 창주에서 끔찍한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오늘 이 산에 오른 것이 만약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라면 그때는 어찌 하겠소?"
그 기막힌 소리를 듣다 못한 임충(林沖)이 버럭 소리를 질러 말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짓고 쫓기다가 한 무리가 되자고 이곳에 왔는데 어찌 그런 의심을 하십니까?"
그러자 왕륜(王倫)도 스스로 너무했다 싶었던지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대로는 안 된다는 듯 조건을 달았다.
"당신이 진심으로 우리의 한 무리가 되려고 왔다면 먼저 투명장(投名狀)을 쓰시오."
임충(林沖)이 얼른 대답했다.
"글자라면 약간 쓸 줄 아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종이와 붓을 청했다.
투명장(投名狀)을 말 그대로 어떤 무리에 처음 낄 때 쓰는 서약문쯤으로 안 까닭이었다.
주귀(朱貴)가 빙긋 웃으며 임충을 깨우쳐 주었다.
"교두님, 무얼 잘못 알고 계시오. 두령께서 말씀하시는 투명장(投名狀)은 그런 게 아니외다."
"이곳 호걸들 사이에 끼어들 때 필요한 투명장(投名狀)은 산 아래로 내려가 한 사람을 죽이고 그 목을 바치는 것이오."
"그래야만 더 의심하지 않고 무리에 받아들이기에 그 목을 투명장이라 한다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습니다. 얼른 산 아래에 내려가 기다리지요. 다만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어떻게든 그곳에 남고 싶은 임충(林沖)이 그렇게 선뜻 대답했다.
왕륜(王倫)이 그런 임충에게 다짐 받듯 말했다.
"그럼 당신에게 사흘 말미를 주겠소. 만약 사흘 안으로 투명장(投名狀)을 바친다면 그 즉시로 받아들여 주겠지만, 사흘을 넘기면 당신을 내보내더라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남을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임충(林沖)이 선선히 응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수호지 - 이문열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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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