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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함
행 26:24-32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행 26:24-32 / 갑자기 베스도가 소리를 질렀다. `바울, 당신은 미쳤구려! 너무 학문에 깊이 빠져서 정신이 돌아 버렸구려!' 25) 그러자 바울이 대답하였다. `저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저는 다만 진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26) 아그립바 전하께서도 이미 이런 일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제가 전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7) 아그립바 전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으실 것입니다.' 28) 아그립바왕이 바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그런 하찮은 증거를 가지고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오?' 29) 바울이 대답하였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하찮게 들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하와 여기 있는 청중이 모두 다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물론 이 쇠사슬에 묶인 것만은 제외하고 말씀입니다.'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31) 그들은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사형에 처하거나 감옥에 가두어 두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32) 아그립바도 베스도에게 `그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걸 그랬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의 복음의 변론을 들은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미쳤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바울의 구령의 열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24-28) 부활의 복음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의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식 사고에 갇혀 있는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바울은 대신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바울의 말을 알아듣는 듯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그리바 1세는 매년 성전에서 신명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성장배경에는 유대교적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를 비롯한 유대교의 전승들과 종교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유도합니다. 변론을 빙자하여 자신에게 전도하는 것을 알아챈 아그립바는 바울의 권유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맙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의 말씀처럼 그는 사망의 냄새를 풍겼습니다(고후 2:15, 16).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 비록 그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바울은 기죽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깁니다. 지금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고, 반면 바울은 죄수에 불과한 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담대히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30-32) 바울에 대한 모든 재판과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결론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장은 바울에게 종교적 망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법적인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즉시 석방될 수 있었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간밤에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입니다(행 23:11). 비록 죄수의 신분이라도 로마에 갈 수만 있다면 그곳의 법정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적용: 본문 29절의 말씀에서 ‘나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긴 시간 논해야 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신 구원의 길로서 확실하고 단순하여 듣는 자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도(道)입니다.
호크마 주석
=====26:24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미쳤도다 -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가로막았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은 이 부문에서 사실상 끝나고 있다(H. Marshall).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문외한인 베스도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바울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가 미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베스도의 생각에는 바울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몰두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적 차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끔자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Bruce). 이렇듯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만주된 관심이 있는 베스도의 모습은 복음의 신령한 메시지에 초미(焦眉)의 관심을 보였던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대조를 이룬다(13:7, 12).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상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그밖에는 희랍의 철학이나 당시의 최고 학문에 대해 폭넓으 지식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베스도가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렸을 분이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하여금 미친 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개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음을 고백하였다(고후 5:13). 주님께서도 살아 생전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셨다(요 10:20).
=====26:25
참되고 정신차린 말 - '정신차린'에 해당하느 헬라어 '스프로쉬네스'(* )는 '건전한', '올바른'을 뜻하는 '소스'(* )와 '생각', '마음'을 뜻하는 '프렌'(*)의 합성어로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을 뜻한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온전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는 아나니아에게 심한 말로 맞섰던 것과는 대조가 되는 장면이다.
=====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다. 바울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담대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담대히말하노니'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메노스'(* )는 '파르레시아'(* )에서 온 말인데, 이는 '모든'(all을 뜻하는 '판'(* )과'말'(word)을 뜻하는 '레시스'(* )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함'을 의미한다. 사실상 바울은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진실대로 말했고,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Lenski), 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한편 구석에서...아니 로소이다 -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삶이 공개적인 것이었고(눅 22:53). 그분의 죽음 또한 여러 증인들에 의해 목도 되었고(눅 23:26, 35-37). 예수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증거와 현현 체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던것처럼(마 28:9-11;막 16:12, 14),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20절;1:8;2:14;막 16:20).
=====26:27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 이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가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는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피상적 지식차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예언된 바 메시야에 관련된 구절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못한 듯하다(Meyer). 따라서 이어지는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는 말은 그에게 마치 아부 내지는 조롱의 어감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26:28
적은 말로...그리스도인이 - 본문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형용사 '올리고스'(* )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올리고스'는 양적으로 '적은'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런데 이 말이 전치사'엔'(* )과 함께 쓰일 때는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엔 올리고'(* )는 개역 성경과 같이 '적은 말로'도, RSV처럼 '짧은 시간 안에'(in a short time)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29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각한다면전자의 번역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는 '적은 노고'(Vincent)로 해석하는견해와 '거의'(Luther)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다소 거리가 멀다. 아그립바왕의 대답은상당히 애매하여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혹자는 그의 대답에는 냉소적(冷笑的)인 부정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하며(Bauernfeind), 혹자는 간접적인 긍정의 뜻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Overbeck, Haenchen). 당시 상황을 고려할때, 만일 아그립바가 긍정의 뜻을 확실히 표현했다면 바울을 미친 자로 생각한 베스도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전격적으로 부정했다면 유대인들의 눈이 마음에 걸렸을것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택했으리라 본다.
=====26:29
말이 적으나 많으나...모든 사람도...나와 같이 되기를 - 여기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는 '길거나 짧거나'(whether long or short)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결정적인 의미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간에,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산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아울러 애정 어린 소망을 기원법의 동사(( ,워사이멘)를 사용하여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 자신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뜻하며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게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18절). 바울의마지막 말과 행동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가이사랴 최고의 군세가들 앞에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사슬이 매여 있다.그런 모습의 바울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세가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진정한 영적 자유에로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슬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맺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26: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다 일어나서 -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배석했던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다. 더이상 바울을 비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26:31
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속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嫌疑點)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바울의 무죄는 천부장 루시아(23:29), 베스도(25:25)에 이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26:3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바울의 무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석방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이다. 아그립바는 그밖에도 베스도가 항소이유서를 작성할 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기때문인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23:11). 바울의 석방되지 못함은 도리어 그에게 가장 안전한 로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 설 교 >
살아있는 순교자
행 26:24-29 / 김상수 목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미친 XX”, “미친 X”같은 욕설을 들었는데, 기분이 좋고 가슴이 찡했던 적이 있는가? 만약 누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 진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실제로 “미친 년”이라는 말 때문에 가슴이 뭉클 했던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욕설 때문에 가슴이 찡한 은혜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충남 논산시 성동면에 가면 병촌성결교회가 있다. 병촌교회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전체교인 74명 중에 66명(남27명, 여39명)의 성도들이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순교를 당했던 교회다(1950.9.27-28). 그 당시에 이 교회 신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8명(어린이 3명 포함) 뿐이었다. 순교를 당하신 분들 중에는 집사님이 한 분이고, 나머지 65명은 아무 직분도 없는 성도들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 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스데반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런데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지 불과 2년 후인 1955년에 병촌교회는 새로운 교회건물을 건축하였다. 새로 지은 교회건물은 그 당시 성동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교인의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고 장년성도가 불과 5명밖에 남지 않았던 교회에서 어떻게 이렇게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던 현재 병촌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윤영수목사님은 1955년 사무총회록을 검토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전쟁 통에 66명이 순교를 당했고, 어른은 단지 5명만이 남았던 교회가 불과 2-3년 만에 131명으로 부흥한 것 이었다. 그래서 건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부흥이 되었을까? 그래서 그 당시 살아남았던 분들 중의 한 분이신 고령의 권사님에게 문의할 결과, 순교사건이 있은 후에 살아남은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피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애통해 하면서 비록 순교는 당하지 못했지만, 순교자적인 각오로 성동면 일대에 밤낮으로 전도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돌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죽는가?’라고 하면서 ‘미친년들’이라고 욕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짧은 기간에 5명의 성도가 131명이 된 것이다. 그들은 멀리 금강 하구에 있는 장항 제련소에서 나온 폐철가루들을 긁어서 나룻배에 싣고 강경포구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 일일이 손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병촌교회 순교이야기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순교자적인 일화를 들으면서 마음이 찡하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병촌교회 순교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잘 말해준다. 생전에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말을 들었던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여사는 이런 말을 했다.
“순교보다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왜냐하면 순교는 단 한 번으로 죽지만, 순교자적인 삶은 매일 매 순간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순교보다 어려운 것이 순교자적인 삶이다.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순교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교를 당한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미처 순교를 당하지 못했던 성도들에게도 그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통해서 교회를 재건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던 것이다.
병촌교회에서 살아남았던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앞으로 지향해야할 아주 중요한 삶의 지침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순교자적인 삶이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사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만약 극한 질병에서 나를 살려주셨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 극한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쉬고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면, 그 또한 그 속에는 분명히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 뜻이 바로 남은 생애 동안,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나에게 주신 사명”이다. 이것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가는 것이 바로 순교자적인 삶이다. 우리들이 죽은 순교자는 되지 못한다 해도, 순교자적인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순교자는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남은 평생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대적 자들에게 “전염병 같은 자라”는 말까지 들었고,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총독에게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Pest)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24:5)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You are out of your mind, Paul!)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26:24)
여기서 사용된 “전염병”이라는 말은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 Pest)을 말한다. 흑사병을 일으키는 페스트균은 19세기 말에 파스퇴르가 페스트균을 발견하기까지 인류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1347년부터 1351년까지 5년 동안 서유럽 인구의 30~50%인 7500만 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그 당시에 고려의 인구가 210만 명 정도).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전염병(페스트균) 같은 자”, "소요하게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네가 미쳤도다”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자신을 심문하던 자리에서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전도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자신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아예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사도 바울이나 130여 년 전에 이 땅에 왔던 선교사님들 그리고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는 지금 무엇에 미쳐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미쳤다는 말과 가장 유사한 것이 “중독”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와 교회는 각종 중독으로 너무 심각하다. 지금 한국사회는 돈과 쾌락에 미쳐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에 미쳐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진정으로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미쳐야 한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다. 이것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순교자적인 삶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그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희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 우리가 결코 상환할 수 없는 그 큰 빚의 아주 작은 일부를 갚아 드린 것뿐인데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말해주기 바랍니다."(1857.12.4,캠브리지 대학 설교)
그렇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지역을 섬기고, 충성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권이다.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이여,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있는가?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목숨을 걸지 말고, 영원한 진리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자.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가 겁나는가? 오히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라.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사도 바울처럼 순교자들처럼 예수를 전염시키는 강력한 복음 바이러스가 되자. 그래서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처럼 되십시오
챙 26:24-29 / 마경훈 목사
저는 사도 바울이 부럽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자녀들에게 유언을 하면서 "너희들 나처럼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히게 되었고 영어의 몸으로 아그립바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볼 때는 바울의 몰골이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로마시민권자며, 세도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가 벌써 2년이 지났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몰골도 말이 아닙니다. 그런 바울을 보고 베스도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울이 자신은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하면서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감옥에 갇힌 것 외에는 자기처럼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과연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자기처럼 되기를 원했을까요?
1.자기처럼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은혜와 축복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자신 속에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이나 능력, 돈이나 권력을 얻는 것 보다 예수를 얻는 것이 더 값진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경멸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하늘의 빛에 눈이 멀고 삼일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 질그릇에 담긴 보화로 표현을 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가치 없는 그릇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면 질그릇에 보화를 담은 것처럼 가치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에수님께서 신자 안에 들어가시고 신자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과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죄와 사망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처럼 새 생명 가운데서 살며 영생을 보장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 요1:12에 보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의 영혼의 친 아버지가 되셔서 그의 생사를 간섭하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은 생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의 생명이 자녀에게 생명을 주듯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부모의 집이 자녀의 집이 되듯이 믿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2. 자기처럼 예수 닮으라는 말입니다.
고전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 말은 예수 닮으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피를 힘입어 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모의 피가 흐르는 것을 속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자식을 보면 부모의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를 보면 그리스도를 본듯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닮는 것은 공부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많이 닮으려면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많이 가지면 됩니다. 어떤 부부는 처음에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한솥밥을 먹다보니 점점 닮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사용하는 단어 심지어 얼굴까지도 닮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함께 살다보니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느끼는 감정이 같고, 감정이 같으니 표정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그 사람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그에게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의 향기가 물신 풍겨나야 정상인 것입니다.
저는 가끔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혹시 목사님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때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 내게서는 목사 냄새가 나는 구나!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을 보니 예수님을 본듯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예수 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 자기처럼 예수를 위하여 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방해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정말로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롬14:8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후에 자신의 주인이 에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으나 사실은 자신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의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자신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계는 시계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팔목에 차는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 구속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를 만나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죄인인 자신은 죄의 삯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분인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피 값 주고 사셔서 자신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한 반면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종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속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과 같은 피조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구속받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입니다.
4. 자기처럼 예수를 전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생애 목표는 로마 복음화 였습니다. 그는 로마를 복음화 하여 온 세계로 복음이 수출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처음 주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을 때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을 깨달았으며, 그 일에 전적인 헌신을 했습니다. 그는 생활의 모든 것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사명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사실 신자는 누구든지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임하신 목적은 예수 증거를 위함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공무원은 공무원으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사업을 하는 사람도 그리고 직장인들도 자신의 일터를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으로 주셨다고 믿고 그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영혼이 중요하다면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방 숫자보다 교회수가 많다며 교회를 더 세우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에 5만 교회가 있는데 12백만이 믿는다면 45백만의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는 4배 이상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다방 숫자 보다 교회 숫자가 더 많은 것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교회숫자가 더 많은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외쳤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습니다. 그런데 만약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을 선지자에게서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과 우리 소망교회에 복음 증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자기처럼 내세를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 후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후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은 이 땅에서 이미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 후에 상급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딤후4:7-8).
저는 어제 장례식 설교를 했습니다. 장례예배를 집례 하면서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시체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쁨과 소망이 충만했습니다. 고인이 예수를 믿는 분이었기 때문이며, 저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가 좋기는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좋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계속 생활할 곳은 그곳이 아니고 서울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와 내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현세가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현세에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잠시 지나가는 곳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헌신하고 충성하며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은 이 곳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고가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 중에 하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원한 세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준비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대성목사 / 행 26:24-29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추석 명절 가족과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아들 딸 식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어 넘 행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돌이 갓 지난 손녀딸 재이랑 함께 하다 보니 시간이 어찌도 그리 빨리 가는지... 그런데 요놈이 자꾸만 자기를 안고서 뻐꾸기 벽시계 쪽으로 가자는 겁니다. 시간마다 ‘뻐꾹 뻐꾹’ 나는 소리가 넘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동으로 뻐꾸기 소리를 들려줬더니 자꾸만 또 듣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뻐꾹 뻐꾹’ 소리를 흉내 내는 겁니다. 이거 천재 아닙니까? 내가 좀 심했나요?
여러분! 그 무엇을 닮는다고 하는 것은 그걸 흉내 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꾸 흉내 내다보면 그것과 똑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나를 본받으라.”는 이 자신감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고 힘쓰다 보니 이 말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자식에게 나처럼 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도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제발 나처럼 살지는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신 있게 여러분도 제발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전도자 사도 바울의 자기 행복 선언입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특별히 그의 이 행복 선언은 구중궁궐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말이 아니라는 데에 오늘 그 귀중함이 있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소 행복을 느끼고 살던 사람도 손에 쇠고랑을 차면서까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꼴이 이런데 내가 행복을 선언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 줄까?" 내적인 갈등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 지금 그는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판정의 재판관은 일개 하급 판사가 아닌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 내가 진정 당신의 자녀일진대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저 왕도 제발 나처럼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그는 포박된 죄수의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아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 어떤 자극이 오면 금방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 주로 무너집니까?
첫째, 모욕을 당했을 때 그렇습니다. 강아지는 먹을 것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 어려운 법입니다.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욕 앞에서도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동정을 받을 때에도 행복과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사람도 애틋한 동정의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더라면 총장은 되었을 것이고, 사업을 했더라면 CEO는 했을 것이요, 정치를 했더라면 로마 총독은 했을 것인데 어쩌다가 쇠고랑에 묶인 몸이 되었느냐?" 이런 동정 앞에서 그는 분명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를 불운아 또는 박복한 사람으로 동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은 자임을 깨닫고 "당신들도 모두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은 흔히 권력 앞에서 위축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아그립바 대왕도 베스도 총독도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재판정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해 동안이나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기에 얼굴은 창백한 상태였을 것이고, 그동안 부실한 음식으로 연명했으니까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것이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건강 상태 또한 좋을 리 만무합니다.
의복은 남루했을 것이요,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능히 업신여길 만도 했으며, 쉽게 동정할 만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한없이 불행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자신 있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복음을 받았고, 나는 그 복음을 전하며 삽니다. 이는 나에게 있어 진정 영광스런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이처럼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리얼 크리스챤들은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사도 바울은 도대체 그 무엇 때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당신들도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는 당당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이 말은 우선 나 바울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이 그의 사명이요,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는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서 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때, 그는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로 그 순간, 사도 바울의 인생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대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일이 오히려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구나! 나는 지금까지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내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죄악 덩어리였구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사울은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서 힘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새사람이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박해자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혐오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로 인해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는 일을 영광으로 알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진정 그의 행복이요, 영광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시여,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되십시오. 총독이시여, 당신도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당히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뺨을 맞아도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쳐야 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 믿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바로 이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주의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경우 이 세상을 송두리째 다 잃는다 할지라도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았다면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면서 그 예수를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힘의 근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힘의 근원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힘의 근원을 알라는 말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고 말하면서 돈이 힘의 근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아는 것이 힘의 근원이요, 또 어떤 이는 권력이 힘의 근원이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 앞에서 죄수의 몸으로 서 있는 사도 바울이 할 말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포승줄로 묶여진 상황 속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통념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아그립바 왕을 순간 침묵하게 만들었던 저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그 어떤 힘 앞에서도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저 멋진 대장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내고 있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냄새를 묻힌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박해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찐한 예수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관이 없으면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비록 왕관이 없다 할지라도 세상 천지를 호령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 위대한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사도 바울을 향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행17:6)이며, 변호사 더둘로 같은 이는 사도 바울을 송사하면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행24:5)라고 악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하게 하는 전염병처럼 사도 바울 그를 두려워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서 영원한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강력한 힘과 마침내 승리하는 절대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 힘과 능력으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 복음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 복음에 미쳤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그 어떤 환경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좀더 심한 말로 하면 한 마디로 그는 예수 복음에 미친 자였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왕은 세상 권세와 부귀와 영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그립바 왕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에게서 금관을 벗겨 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 있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죄악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몸은 자유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사슬에 묶여있는 가련한 노예 신세였습니다. 그러할진대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이처럼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라고...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몸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 있었지만 그의 심령은 한없이 저 하늘을 날면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을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질병도 가난도 박해도 죽음도 감옥도 채찍도 쇠사슬도 사도 바울을 결코 얽어맬 수 없었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거듭난 생명의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환경이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선언이 우리 모두의 행복 선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그 어떤 가치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유행도 그 어떤 환경도 그를 절대로 가둘 수 없는 자유인!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복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쳤던 자입니다. 죽을 만큼 행복했던 사람, 미칠 만큼 행복했던 사람,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그를 향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중생 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바울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같은 말들이 세속적인 인간들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육체 말고 영혼이 있습니다. 고기나 밥 외에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조차도 생명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망원경으로 보면 멀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별나라의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꿈에 그리던 아이를 갖게 된 후 처음으로 초음파를 통해 바라본 태아의 모습은 한 마디로 에메이징!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영혼이 보이고 믿음이 보이고 내세가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예수님도 한 때 미쳤다는 얘기를 들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이란 말이 있고,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이 미친 줄 알고 가족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분명히 미친 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24절 하반절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이는 한 마디로 미친 소리 이제 제발 그만하라는 겁니다. 사실 바울은 한 때 학문과 유대 종교에 미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문도 유대 종교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미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더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아니더냐? 지금도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건져내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더냐?”
그는 예수를 박해하던 자신을 거두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 감격하여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주의 사랑에 노예가 되어, 성령의 노예가 되어, 사명의 노예가 되어, 말씀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구세주이시다. 그 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시다. 우리 모두를 심판하러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스스로 ‘복음 증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복음 전파에 열정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어떤 일에 전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 일에 미쳐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여러분! 이 무슨 말입니까? 나는 복음 증거를 위해 미쳤다는 겁니다. 여기서 미쳤다는 말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일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능력은 결코 숫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기독교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오히려 ‘헌신하는 소수’, ‘창조적인 소수’, ‘열정 있는 소수’의 사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주님 전에 나아온 여러분과 같은 열정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과연 독생자를 보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영적으로 무감각의 질병이 만연해서 교회가 점점 더 시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죄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덤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다 잃어 버렸으며,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인해 이 시대가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무개야 네가 미쳤구나! 큰빛광성교회 성도들아, 단단히 미쳤구나! 한국 교회 성도들아 진짜로 미쳤구나!"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쳤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때에 이 세상은 비로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천당’을 외쳤던 최권능 목사가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구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존 낙스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옵소서!’ 외쳐댔던 에스더의 간구가 오늘날 이 민족 가운데 다시금 불일 듯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부터 예수 사명에 미치게 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들처럼 예수 비전에 미치게 되면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진정 행복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 품에 안기는 그 날까지 평생 동안 이 행복을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제발 노예처럼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세상살이, 고난과 시험에 참된 행복을 강탈당하면서 그렇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온전히 미치게 되면 우리도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저와 여러분도 늘 항상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십시다.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이대성 목사는 참으로 행복한 목사입니다.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같이 2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진실된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늘 항상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과 감격을 누리면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담대히 전파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고로 행복한 사람
이대성목사 / 행 26:24-29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최고로 행복한 사람” 여러분? 서로에게 이렇게 인사하십시다. “행복한 추석 한가위 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된 거룩한 주일에 주님 전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한가위의 풍성한 복이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가위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이 뜬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항상 추석 한가위만 되면 이렇게 외치곤 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는 이번 추석 명절이 아무래도 조금은 쓸쓸한 명절이 될 것만 같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설 명절과 추석 명절에는 어김없이 부모님을 찾아뵙고는 어린아이처럼 참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그 부모님이 이 세상에 다 안 계시네요... 하지만 저 천국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추석부터는 부모님이 하시던 그 역할을 이제 우리 부부가 온전히 감당해서 아들, 며느리, 딸, 사위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 명절에는 특별히 우리 가족 식구들 각자가 먹고 싶은 걸 미리 신청받고 있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생뚱맞게도 자꾸만 계란말이가 먹고 싶은 거 있죠?
저는 어렸을 적에 그 누구보다 계란말이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도님들이 너무나도 가난해서 집에서 기르던 닭에서 나온 계란을 그렇게 많이도 목사님 댁에 가져오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의 도시락 반찬이 계란말이가 주종을 이루곤 했기에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의 김치나 어묵과 바꿔먹던 기억이 새록 새록 납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바로 그 계란말이가 먹고 싶은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번 추석 명절을 어떻게 맞이하고 계십니까? 혹시 무겁고 답답한 심정으로 추석 한 가위를 맞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성경을 보면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꿈의 사람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방 땅에서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다가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 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많이 외로웠고 젊은 혈기가 있었지만, 그는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겠습니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뿌리치고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외로운 젊은 청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거룩한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삼손은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들릴라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거룩한 자존심을 버림으로 결국 눈이 빠지고 비참한 인간 노리개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억울하면서도 듣기 싫은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 바로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입신해서 천국까지 보았지만 그것도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는데 그는 약함을 자랑했습니다.(고후12:5) 사도 바울은 평생 동안 간질과 백내장으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특히 간질은 그의 자존감에 크나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소크라테스, 줄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아이작 뉴턴, 토스토 예프스키도 간질환자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도 간혹 발작을 일으키니까 사도로서의 권위에 크나 큰 손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3번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오히려 약한 데서 더 온전해 진단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약함은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계속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비록 약해도 내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면 난 충분하다고...” 그가 얼마나 능력이 있었던지 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자들이 벌떡 벌떡 일어났습니다. ]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셔야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자존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은혜가 아무리 부어져도 그것은 밑 빠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체질화하시기 바랍니다. 살면서 자존심에 크나 큰 상처를 입을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모두 다 행복하고 매력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면 진정 최고로 행복하고 매력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24절과 2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이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극렬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야 맙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회개와 부활에 관해서 말하자,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진정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도 때로는 좋은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지만 다같이 한번 따라해 보실래요? “목표에 미쳐야 목표에 미칩니다(도달합니다).”
여러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축구팬(fan)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축구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부릅니까? 축구광(mania)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지난 아시안 게임 축구 경기를 통해 온 국민이 다함께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이 예수님을 향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제가 요즘 같은 축구 열기에 찬 물을 끼얹고자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남들 못지않게 축구를 좋아합니다. 아니 축구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축구 사랑이 예수 사랑보다 결단코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이 금방 식을까요? 그것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늘 언제나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 되신 주님처럼 몸과 마음을 아끼지 말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고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해 살다가 도리어 힘들고 지쳐서 넘어질지라도, 결단코 믿음 만큼은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금 힘차게 일어나 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베스도가 미쳤다고 말하자 바울 자신은 올바른 정신이라고 하면서 아그립바 왕에게 말머리를 돌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26절과 2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습니까? 믿는 줄 압니다.” 이에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까지 그리스도인을 만들려고 하는구나!”
그러자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아그립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말입니다. 바울을 살리고 죽일 권세가 자기에게 있는데, 바울이 자기처럼 되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성도’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바울이 “나처럼 되라!”고 한 말의 핵심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는 산 자다! 나는 영원을 품에 안았노라! 이제 너희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바라노라!” 뭐 이런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땅에 있었으나 영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소유했기에 그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자기를 심문하는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져서 나처럼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변한 겁니다. 복음 전파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했음에도 그는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그에게 행복이요,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었기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높아도 불쌍하게 보였던 겁니다. 그러니 육신이 묶인 그가 영혼이 묶인 그들에게 “여러분도 구원받고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구원받은 천국 백성답게 굳건한 믿음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가지고 살면 정말이지 참으로 행복해지고, 모든 시름과 걱정 또한 다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능력과 영향력은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믿음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당시 대적들은 그를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행24:5)
여러분? 그의 고백은 결단코 헛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영향력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지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왕관을 벗으면 그들은 다 허깨비입니다.
그들은 겉은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속은 비어 있었으며, 영혼은 남루한 속빈 강정이요, 몸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영혼은 사슬에 묶인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 그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확신 가지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만난 주님을 온 세상에 기쁨으로 전하면서 주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거룩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거룩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같이 2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베스도가 미쳤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다면 총장이 되었을 테고, 사업을 했다면 회장은 되었을 테고, 정치를 했다면 로마 총독을 했을 텐데... 네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고야 말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꿋꿋이 극복해나가던 사람도 그런 동정의 말을 들으면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신들 모두 다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대개 권력 앞에서는 위축되고야 맙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관대작 앞에서도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그의 외모를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2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행색도 많이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너무 기뻐서 가는 곳곳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제발 나처럼 그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바울의 이 거룩한 자존심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전혀 기쁨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 미쳤니?”라고 반문 할런지 모릅니다. 바로 그 순간,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나는 멀쩡합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살아보세요! 이게 얼마나 행복한 줄 아세요? 끝내줘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성공은 다 일차원적인 성공이요, 근시안적인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계산적으로 사니까 언뜻 보면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일을 못하면 그냥 단칼에 자르니까 단기 이익은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커지고 지위는 올라가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진정한 친구와 동료가 주변에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목표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인생에는 실패한 존재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은혜를 내세우니까 목표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도 많아지고 하나님의 은혜도 더욱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 은혜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으니까 사도 바울은 총독과 왕 앞에서도 죄수의 신분으로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러자 심문을 다 마치고 나서 왕과 총독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 사람에게서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를 발견할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보다도 그들의 마음에는 바울에 대한 깊은 존경심마저 생겼을런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자존심으로 말하면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이면서도 로마 시민권 자였으며, 골수 바리새인이었기에 율법으로는 거의 흠이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부터는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당당히 외치시기 바랍니다. 가난하다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가난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십시오.” 실패했으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실패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십시오.”
병들었으면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병든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십시오.” 이런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결단코 우습게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그 모진 고통 중에도 얼굴이 빛나고 아름다운 언어가 나오는 사람을 과연 그 누가 비웃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자꾸만 시험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세상적인 복을 나는 누리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면 절대로 시험에 드는 법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할 때에 날마다 다시 사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행복해 집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은 내 행복이 흘러 넘쳐서 남까지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중에 사도 바울처럼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목적이 진정 분명하다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도 완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환경이나 세상 물질의 유혹에 절대로 무릎 꿇지 마시고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최고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몇 년 째 거동도 못하는 질병으로 병상에서 용변을 받아내며, 투병 중이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활발하던 사역도 중단되고, 궁핍과 고독과 투병으로 극한 어려움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믿음으로 사셨던 분.. 그 누구보다 기도의 사람이셨던 분.. 그 누구보다 경건하고 신령하셨던 분.. 그 누구보다 언행이 일치되는 분이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셨고, 그 누구보다 주님을 빼어 닮은 분이셨습니다.
비록 그 목사님은 육신의 몰골은 형편없지만, 얼굴의 광채는 해같이 빛나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오히려 사역으로 바쁘고 건강할 때 보다 지금 '더 깊이 주님과 연애하는 것 같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목사님이 불행하다 생각해서 위로하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우리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이며, 우리가 모르는 차원 깊은 사랑에 빠져서 열애 중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며, '복음의 야성'입니다. 주님과 열애하는 관계가 되면 소유도, 환경도, 조건도, 상황도 다 무의미해 집니다.
여러분?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난리가 나고, 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합니다. 이것이 참 사랑의 힘이며, 주님과 열애하는 자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고난과 시련과 환란을 이기는 힘은 믿음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는 게 허무하십니까? 이유 없이 탈진이 되십니까? 차라리 종말이나 왔으면 할 정도로, 도피하고 싶으십니까?
자꾸 무기력증에 빠져, 짜증 충만 이십니까? 이유 없는 예민함과 신경과민으로, 주변 사람들을 달달 들볶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진짜 사랑이 묘약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도박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함으로, 허무와 공허를 메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몰핀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인 해결책과 근본적인 해답은 오직 나의 주님!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나의 전부! 나의 기쁨 되시는 예수님과의 열애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분과 처음 만나 눈물로 범벅되었던 첫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과의 연애는 옛날 이야기로 남은 채 지금은 그 분과 별거 중이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그 분에게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던 그 자리로! 처음 은혜 받던 그 자리로! 울며 불며 행복에 겨워하던 그 자리로! 주님은 그곳에서 여러분을 벌써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대문 열어 놓으시고 “어디 갔었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고생 많았니?” 하시며, 안아주시고 품어주실 나의 첫사랑, 예수님 그 분에게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후로는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담대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우리 주님 품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맛보면서 그 행복을 온 세상에 당당히 전하는 행복 전도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양향모목사 / 행 26:24-32
세상을 살면서 꼭 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건강하게 살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고 여기저기 아파보니까 건강한 것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건강 중에서 육체적인 건강도 참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건강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지는 멀쩡한데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 일 중독처럼 어떤 한 가지 일에 몰두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한두 가지 육신의 질병을 앓고 있듯이 한두 가지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질병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육신의 질병보다 더 심각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어느 하나에 집착하든지 어떤 한편에 치우쳐서 편협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환경에서 잘못된 것들을 보고 살면서 기본적인 양심이나 기본적인 정신이 잘못된 채로 살아갑니다. 이런 잘못되어 있는 마음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이 건강한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이단에게 속아서 거짓 선생들의 말에 속아서 진리를 모르고 복음을 모르고 엉뚱한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건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신앙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도 다 건강하시고 무엇보다도 바른 신앙을 가지셔서 건강한 영혼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증언을 하고 난 후에 베스도 총독과 아그랍바 왕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변론을 듣고 아주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바울이 대답하기를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바울이 답변한 말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참되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참되고 온전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본문 24~25절에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라고 했습니다.
여기 변명이라고 한 것은 “옳고 그름을 가려서 사리를 밝힘”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변명보다는 변론이나 변증이나 변호로 번역해야 이해를 잘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다니다가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해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잘 아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일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과 모세가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실 것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변증하였는데 그 변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울의 증언이 뭔가 많이 배운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너무나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너무 많이 하다가 보니 너무 이상한 것을 많이 알게 되어서 정신이 혼란해졌다는 것입니다.
주변에도 공부를 너무 많이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그런지 너무 많은 것을 알다가 보니 정신에 혼란이 온 것인지는 몰라도 비정상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비정상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알고 사는 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너무 많은 것을 배워서 헛소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로써는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최고의 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유대문화와 헬라문화를 겸하여 읽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런 세상 지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에게 말씀하셨고 성령님께서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셨기 때문에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빌3:8) 그가 배웠던 모든 지식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의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참되고’라는 말은 진리, 진실, 사실, 이런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온전한’이라는 말은 옛날 성경에서는 정신 차린 말이라고 번역했던 말인데 건전하고 정상적인 뜻을 가진 말입니다. 미쳤거나 정신이 나가서 한 말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한 진리의 말씀이요 진실이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참됨은 온갖 종류의 기만 및 오류와 반대되는 것이고 온전함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씨앗일 뿐인 헛된 사변들이나 까다로운 궤변들과 반대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미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되고 온전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오류도 없고, 헛된 질문이 일어나게 하지도 않고,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가르침이고 적절한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가짜뉴스라는 말입니다. 이말 저말들이 많이 오고 가는데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가짜뉴스라고 하니까 누구의 말이 옳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은 배고프다는 말과 먹고 싶다는 말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으면 그런 말까지 나오겠습니까?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고 얼마나 쇼를 잘하는가가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과장을 잘하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진실 그대로만 말해도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최고의 진리요 최고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문 26~27절에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 총독이 미쳤다고 지적하자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이 참되고 온전하다는 것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왕은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기적들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들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사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한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보이신 일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부활을 증언하면서 행한 수많은 기적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지구 한쪽 구석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일이고 당시 최고의 지도자들인 황제나 분봉왕이나 총독이나 많은 지도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세계 모든 사람에게 이미 공개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유대인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한 것이며 그 선지자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고 그들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복음이 누구도 바꿀 수 없도록 신구약 성경 66권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가장 많은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책이고 가장 많은 논문이 이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서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동안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하는 그런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이 복음을 듣고 새사람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망에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보고 밝은 빛으로 나와서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나고 무지하게 살던 사람들이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고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들이 보람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가 성경의 역사이고 복음의 역사이고 교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 모든 일을 세상 사람들을 보고 들어서 아는 사실입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본문 28절~29절에 “28.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적은 말로”라는 말은 시간상으로 짧은 시간이나 양적으로 짧은 문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에 몇 마디 되지 않은 말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다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시간도 없었고 그런 기회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 몇 가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가 아그립바 왕에게 많은 감동을 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만약에 그가 유대인 왕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한다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고 왕의 자리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바울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바울의 변론을 인정하고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무죄이고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의 말대로 참되고 온전한 말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도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자기처럼 이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두 바울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알고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당한 죄수 앞에서 당황한 권력자들
행 26장 24~32절 /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오늘 제가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제가 우리 교회에 오기 전 부목사로 섬겼던 디트로이트한인연합장로교회의 원로목사이신 김득렬 목사님께서 지난주에 소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입관예배에 급하게 다녀왔습니다. 그쪽에 가면서 제가 부목사 때 뭔가 디트로이트 교회나 김득렬 목사님에 대해 적어놓은 것이 없나 파일을 찾다가, 김 목사님에 대한 것은 찾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그 당시 인터넷에 떠돌던 재미있는 유머를 적어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제목은 “교회 광고 속의 부조화”였습니다. 이런 겁니다.
“다음 주에는 여선교회 주최로 각 가정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판매하는 바자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여선교회 회원들은 잊지 마시고 반드시 남편들을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데려와서 뭘 하라는 건지, 남편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건지 약간 헷갈립니다.
“오늘 목사님의 고별설교 후에 할렐루야 성가대의 특별찬양이 있습니다. 제목은 ‘기뻐 뛰며 노래하라’입니다.”
“내일부터 3일간 금식기도회가 있습니다. 참가비는 5만원이며, 여기에는 숙박비와 푸짐한 식사가 포함됩니다.”
“오늘 아침 김 장로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두 유가족을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 같이 일어나 폐회 찬송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부르시겠습니다.”
“다음 주에 가질 예정이었던 ‘평화와 화합을 위한 기도회’는 회원들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이제 소프라노 이 집사님께서 특송을 해주시겠습니다. 특송 후에는 목사님께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
둘을 따로 놓고 보면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합쳐서 보면 약간 이상한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런 장면이 보입니다. 당연히 기가 죽어 있어야 할 죄수인 바울은 당당하게 외치고, 그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떵떵거릴 수 있는 권력자들인 총독과 왕은 당황해 합니다.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당당한 죄수 바울 앞에서 당황하는 총독 베스도 (24~26절)
바울은 바로 앞 본문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살아 계실 때는 못 만났지만,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바울은 총독의 청문회장에서, 메시아이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부르시고 사용해 오셨는지,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며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거기에 놀란 것은 총독 베스도였습니다. 원래 그가 이 모임을 마련한 목적은, 자기보다 유대의 사정을 훨씬 더 잘 아는 아그립바 왕을 통하여 바울을 죄인으로 황제에게 보낼 죄목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 자리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전하는 설교의 기회가 되었고 또한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에 베스도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소리를 지르며 바울의 말을 제지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4절)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단정합니다.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다시 살아난 예수를 바울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의 명령에 따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종과 증인으로 그 동안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바울은 베스도가 보기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총독으로서 바울의 신원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부임했을 때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였기 때문에 금방 파악했습니다. 유대인 최고의 바리새파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배운 바울이 구약성경에 능통한 학자이고 높은 학문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베스도는 이미 파악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방금 바울은, 자신이 증언한 것이 자기 말이 아니라 전부 다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내용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구약성경에 대한 지나친 학문적 열심 때문에 미쳐 버렸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아마도 베스도는 요즘 폐인과 같이 방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던 사람들이 정신 이상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울도 공부만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자신의 설교를 요약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5절)
베스도가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라고 한 것은 ‘네가 지금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You are out of your min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말은 “참되고 온전”하다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미치거나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아그립바까지 대화 속으로 초청하며 계속해서 말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6절)
우리말 성경에 이 말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말은 바울이 계속해서 베스도 총독에게 한 말입니다.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아그립바) 왕께서도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시기에, 내가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는 그가 이 일 가운데 무엇 하나 모르는 게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어느 구석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베스도에게 아그립바를 가리키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청문회는 신임총독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진술을 들어보기 위해 베스도 총독에게 요청하여 개최된 것입니다. 그래서 청문회가 시작될 때 아그립바 왕은 26장 1절에서 본 것처럼 바울에게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23절까지 계속 그를 쳐다보며 그에게 자기변호를 한 겁니다. 특히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거리낌 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을 증언한 것은, 아그립바가 그 모든 사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과 다시 사심에 대해 아그립바 왕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여러 번 왔다 가셨고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임명권자인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공식적인 보호자였던 아그립바 왕이, 그 예수님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때는 이 아그립바가 없었고 헤롯대왕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그립바는 한참 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이야기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 아그립바 2세가 알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아그립바 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밝힌 자신의 증언은 미친 소리가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미쳤다.’ 저는 없습니다. 혹시 여기 공부벌레인 분들은 그런 말을 들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공부벌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고 소리친 베스도에게 바울은 모든 면에 걸쳐서 이해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베스도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자기가 이해가 안 가니까 ‘너는 미쳤다’고 단정하며 소리쳤습니다.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겁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 가면 항상 상대방이 틀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 그렇습니다. 내가 이해를 못하면 ‘너는 미쳤다’고 합니다. 베스도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어둠의 노예로 살아가면서도 자기가 어둠의 노예인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베스도 총독이 어떻게 빛의 세계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분의 종과 증인과 사도로 살아가는 바울을 이해하겠습니까? 그 바울이 가지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 복음을 향한 열정,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베스도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이해가 안 가니까 ‘네가 미쳤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가끔 젊은이들 사이에 누구와 사귄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친구가 와서 “야, 너 그 사람과 사귀어?”라고 하니까 “내가 미쳤냐, 사귀게?”라고 합니다. 또는 “너, 미쳤어? 그러면 안 돼!”라고 하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미치다’라는 단어는 ‘무언가에 몰두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주 깊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운동에 미쳤어’, ‘저 사람은 드라마에 미쳤어’, ‘저 사람은 쇼핑에 미쳤어’라고 할 때, 정말 미쳤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푹 빠졌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한 베스도의 표현은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바울이 정신 나간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 정말로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베스도는 ‘네가 미쳤다’라고 소리 질렀는데, 그런 의미로는 틀린 말입니다. 누가 비정상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아니라 베스도 총독이 비정상 아닙니까? 또 거기 있는 ‘높으신 분들’이 비정상 아닙니까? 그러나 자신들이 비정상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놀라운 인물인 바울이 미쳤다고 보이는 겁니다.
<걸리버 여행기>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걸리버가 소인국에 가면 자기들이 다 작은 사람들이니까 엄청나게 큰 걸리버를 보며 비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대인국에 가면 자기들이 다 큰 사람들이니까 작은 걸리버를 보면서 비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 자기 기준에 맞춰서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정말로 올바른 기준, 성경적인 기준, 하나님 보시기에 맞는 기준이면 괜찮은데, 자기감정에 근거한 기준일 경우 문제가 됩니다. 특히 베스도와 같이 상대방이 진짜로 틀리거나 미쳤기 때문에 미쳤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결론을 낼 수 없는데, 사실은 자기가 정상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바울이 ‘무엇인가에 푹 빠지다, 몰두하다’라는 의미에서는 미쳤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특히 그분의 교회를 그토록 박해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죽는 데까지 몰아간 바울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래서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드린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맞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께 미쳐서 살았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빌 1:20, 새번역)
그리고 그 전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에게 보낸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다 뭔가에 미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짜로 미치고 정신이 나가면 안 되겠지만, 뭔가에 몰두한다는 의미로 모든 사람은 뭔가에 미쳐서 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당신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욕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다!”라고 했을 때, 바울은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야, 내가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욕이 아니라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미쳤다고 하면 그것이 부끄러워서 우리는 슬쩍 숨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공공장소에서 식사할 때도 기도하면 너무 티가 나니까 안 하는 척하거나, 하더라도 속으로 1초나 2초만 기도하거나, 뭔가를 떨어뜨리고 줍는 척하며 기도한다든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척하면서 기도한다든지,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도 너무 푹 빠지면 안 되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마지막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어디를 갑니까? 하나님 앞에 갑니다. 그 앞에서 ‘너는 어떻게 하다가 왔느냐?’라고 하시면 ‘너무 부끄러워서 뭔가를 떨어뜨리는 척하면서 살짝 1초만 기도하다 왔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에게 미쳐서 살지 않으면 다른 뭔가에 미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학벌이든, 성공이든, 남들의 인정이든, 취미생활이든(드라마, 스포츠, 운동), 또 안 좋은 것들로 도박이나 술 등에 빠져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미쳤다’라고 하니까 약간 어감이 이상한데 ‘푹 빠져 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완전히 몰두해서 사는 것, 완전히 정신이 빼앗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뭔가에 미쳐서, 다시 말해 푹 빠져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에 미쳐서 살고 있는가? 무엇에 빠져서 살고 있는가?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뭔가? 그것만 생각하면 입 꼬리가 슥 올라가는 게 뭔가? 그게 그겁니다. 거기에 푹 빠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 외에 어떠한 다른 것도 끝은 결국 멸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것에 푹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중독이 됩니다. 중독이 되면 이제는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노예가 되면 그것이 자기를 옭아매고 허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끝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미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 푹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선하신 분, 완벽하게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 푹 빠지고 중독이 되어 버리면 그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종과 증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이제 예수 믿으시죠. 교회에 나오시죠.’라고 하면 ‘조금만 더 놀다 오겠습니다. 조금만 더 재미있게 놀다 오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조금 더 자유롭게 놀다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자유롭게 하고 그쪽에서 놀수록 빠져들고 중독되고 노예가 되고 결국 멸망입니다. 허무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푹 빠지면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천국의 상급도 받습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중독되어도 괜찮은 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끝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으로도 조금 해봐서 알지 않습니까? 해봤는데 별 것 없지 않습니까? 너무 좋아서 해봤는데 별 것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그렇게 좋았던 것도 싫증납니다. 그런데 완전히 빠져버리면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것이 자기를 완전히 컨트롤해버려서 아주 힘든 삶이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2. 당당한 죄수 바울 앞에서 당황하는 아그립바 왕 (27~29절)
이제 베스도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그립바를 향한 바울은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7절)
본문의 아그립바 왕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헤롯대왕의 증손자입니다. 예수님 태어나실 당시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던 사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했던 사람이 헤롯대왕입니다. 그 헤롯대왕의 증손자가 바로 본문의 아그립바(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헤롯대왕은 원래 이두매 사람입니다. 이두매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지나면서 이두매가 되었는데, 이것이 원래는 구약의 에돔(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를 로마제국이 보호해주고 황제들과도 친분을 쌓음으로써 유대인의 왕좌에 올라 헤롯 왕조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사는 아주 복잡합니다. 그는 이두매 출신이고 부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유대 땅이 잠시 독립을 누리며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을 때 그 하스모니안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게 된 겁니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리스토불로스이고, 그의 아들이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으로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잡았다가 놓치고 죽이는 데 실패한 사람, 결국은 벌레에 먹어 죽은 그 사람이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오늘 본문의 아그립바 2세입니다.
본문의 아그립바 2세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요단강 동쪽)의 분봉왕이었지만,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의 공식 보호자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직책상, 그는 이두매 사람의 후손이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의 피가 흘렀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 앞에서는 자기도 유대인임을 크게 강조하면서 유대인들의 동정을 사고 환심을 샀던 기가 막힌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이 어떻게 보면 아주 담대하고도 당돌하게 질문을 합니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아그립바 왕은 그의 직책상 성전의 보호자이고 대제사장도 임명하는 사람이니까 ‘선지자를 믿는다’라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렇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만약 선지자를 믿는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곧 예수라고 증언한 바울의 말에 공개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과 대적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아그립바가 ‘나는 선지자를 안 믿는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부정하면, 그것도 역시 선지자를 믿는 유대인들과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를 믿느냐’는 바울의 질문은 아그립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그립바 왕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바울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바울은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줍니다. 선지자를 믿느냐고 한 자신의 질문에 바울이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는 말을 덧붙여 줌으로써, 아그립바 왕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 겁니다. 빠져나갈 길을 터주었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므로, 이 예수를 믿으십시오.’라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를 간파한 아그립바 왕이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8절)
이 말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적은 말”이라는 데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적은 말로, 또는 짧은 시간 안에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라고 아그립바가 말한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아주 애매하면서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답변입니다. 그는 아주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분봉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어느 쪽에게도 걸려들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정치인답게 여기서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이렇게 노련한 말재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의 고백과 실천으로 얻는 것이지, 말재주가 좋다고 얻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청문회의 결론을 내립니다. 놀랍게도 이 청문회장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린 사람은 총독인 베스도 아니고, 아그립바 왕도 아니고,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29절)
지금 여기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방청하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높은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신분부터가 다릅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부인 버니게는 사실 남매로서 근친상간 관계에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그의 일행, 또 베스도 총독과 다섯 명의 천부장들, 가이사랴 시의회 의원들 모두 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최고 권력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유대 땅에서 그들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들이 옷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화려한 관복과 예복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은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이제 나와서 청문회를 하고 있는데, 마치 거지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겉으로만 보면 상대도 안 됩니다. 바울이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저 ‘고상한 분들’을 보면서 ‘야, 나도 저런 옷 한 번 입어봤으면...’ 해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저도 이제 저 사람들처럼 저런 것 좀 누리며 살게 해주세요. 그 동안 너무 고생했는데, 이제는 좀 누리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지금 거지와 같은 모습의 바울이, 이 땅을 다스리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 권력자들 앞에서 “내가 이렇게 잡혀 있는 것, 죄수인 것 외에는, 여러분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원하나이다’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금 바울에게는 세상의 명예나 금이나 은이나 돈 같은 건 없었어도,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부르셔서 사도로 삼아주신 직분이 있었고, 주님의 종과 증인으로서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저 ‘높으신 분들’을 향해 “여러분이 지금 내가 갇혀 있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이 땅에서 화려해 보여도 결국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죽는 길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옮겨주는 역할과 사명을 받은 주님의 사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당당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도 사회에서 꽤 괜찮은 위치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아무리 괜찮은 위치에 있어도 위에 또 누가 있습니다. 아주 높은 사람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비굴해지거나, 그렇다고 객기를 부려서도 안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돈이 없는 것 빼고 여러분이 나를 본받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학식이 조금 부족한 것 빼고는 여러분이 나를 닮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이 부족한 게 무엇이 있습니까? 부족한 게 하도 많아서 셀 수가 없다 하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만 잡으셔서 ‘이것 빼고는 여러분이 나를 본받기를 원한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당당한 죄수 바울에 대한 권력자들의 무죄 선언 (30~32절)
이제 청문회 형식의 재판은 끝났는데, 베스도는 그가 원하던 로마 호송의 이유를 사실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바울이 여기 왜 잡혀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가 분명히 떨어졌습니다. 이후로 이 사람들은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라도 이때를 계기로 나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분명히 한 명 이상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의 가족 중에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 가서 목이 잘려 죽었을 때 천국에 갔을 텐데, 최근에 나왔던 영화 <바울>에 보면 바울이 목이 잘려 죽는 순간 바로 천국에 서 있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박해했던 스데반과 사람들이 그를 맞아줍니다. 꼬마가 그를 맞아줍니다. 자기가 죽이고 박해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얼마 후 바울이 천국에 있는데, 바로 이 청문회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또는 그들의 가족들 중에 바울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와 바울이 ‘잘 오셨소. 어서 오시오.’라고 맞아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하다가 전도가 안 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안타까워합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믿게 하려 했는데 결국 믿지 않은 채로 이곳을 떠나 한국이나 다른 주로 간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분들 중에 ‘어서 오세요!’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가 있는데 올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갔는데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당신이 누군데요?’ ‘아, 왜 저 선교사님에게 당신이 선교헌금을 보내줘서 그분이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어 제가 믿고 여기에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에 떨어진 작은 씨앗의 역사를 결코 무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문회에 참석한 이 사람들이 바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0-31절)
사형이 아니라 결박을 당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복음의 씨가 심어졌을 때 분명히 나중에 어떤 긍정적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는 분명히 떨어졌고 또 전파되었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뿐 아니라 아그립바 욍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는 베스도에게 이런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32절)
사실 우리는 그 동안 죽 읽어왔으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제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유 없이 잡힌 것이고, 이유 없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고난은 사실은 바울 개인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왔습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기회인 총독들 앞에서 증언하는 기회, 즉 벨릭스와 이제 베스도에게, 그리고 또 아그립바 왕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복음이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와주어서 복음을 이렇게 마음껏 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바울이 당했던 고난이 오히려 복음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저번부터 계속 강조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안 좋은 일, 슬픈 일, 괴로운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이 주님 안에서 꼭 안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벌어졌더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꼭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역사가 이 일을 통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경험이고 너무 괴로운 일과 슬픈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며 쓰임을 받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일이 잘 안 풀리고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것도 없고, 또 일이 잘된다고 너무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항상 ‘과연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며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축복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고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다음 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마무리 부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유대 땅을 떠나기 전 마지막 청문회장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신분도 달랐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그의 일행과 베스도 총독과 천부장들과 시의회 의원들 모두 거기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너무나 초라한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죄수 바울이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또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고, 오히려 권력을 쥐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던 그들은 아주 당황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일을 생명 걸고 끝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매일매일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늘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삶,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축복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대성목사 / 행 26:24-29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다 나와 같이 되기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성공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다." 이는 성공철학자 죠지 와싱톤 카버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사역에 성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형통한 길을 걸을 때 뿐만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행복하라」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행복할 수 있다」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높은 자리에서도 행복하고 낮은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져도 행복하고 다 잃어버리고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행복하고 병들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역자와 전도자들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행복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때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고난, 핍박, 상실을 통해서 예수님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그건 확실히 행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를 전할 수만 있다면 그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순교라고 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 최고의 영광이요, 최고의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자 사도 바울의 자기 행복선언 입니다. 바울은 참 행복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의 이 행복선언이 구중궁궐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 데에, 오늘 그 귀중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소 행복을 느끼고 살던 사람도 손에 쇠고랑을 차면서까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꼴이 이런데 내가 행복을 선언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는가?" 내적인 갈등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재판관은 일개 하급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도한다면 아마도 "하나님 내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바울은 포박된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아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오면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첫째, 모욕을 당했을 때 그렇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는 주림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 어려운 법입니다.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했구나."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욕 앞에서도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동정을 받을 때에도 행복감과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사람도 애틋한 동정의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더라면 총장은 되었을 것이고, 사업을 했더라면 사장 회장은 했을 것이고, 정치를 했더라면 로마 총독은 했을 것인데 어쩌다가 쇠고랑에 묶인 몸이 되었느냐?" 이러한 동정 앞에서 분명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불운아 혹은 박복한 사람으로 동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되지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자 임을 깨닫고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은 행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람들은 흔히 권력 앞에서 위축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그립바 대왕도 베스도 총독도 만장하신 고관 대작 여러분도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재판정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해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으므로 얼굴은 창백한 상태였을 것이고 그동안 부실한 음식으로 연명했으니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것이며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습니다. 의복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쉽게 업신여길 만도 했고, 쉽게 동정할 만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행복자입니다. 나는 복음을 받았고 나는 복음을 전하며 삽니다. 이것은 금생과 내생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자신만만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그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했을까요?
첫째로,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행복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행복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우선 이 말은 나 바울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요, 천직인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서 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죽은 천벌 받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대속하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다시금 살아나셨구나!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구나!’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로 이 순간, 사도 바울의 인생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일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었구나! 저들이 내 형제 자매인줄 알지 못하고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고 채찍질하여 죽였구나! 나는 그분이 내 아버지, 내 주님인줄 알지 못하고 채찍을 휘둘러 때린 불효자식이었구나! 나는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내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죄악 덩어리였구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는 일을 기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그의 행복이요, 영광이 되었습니다. "나는 구원받습니다. 나는 예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대히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새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총독이여 당신도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진정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당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뺨을 맞아도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쳐야 될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 믿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외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확신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전도자인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을 송두리째 다 잃는다 할지라도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얻었으면 저와 여러분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행복의 기쁨을 전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나는 진정한 힘을 아는 행복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는 진정한 힘을 아는 행복자입니다.” 여러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힘의 근원을 알라는 말입니다. 흔히 돈이 힘이라고 말하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권력이 힘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대왕과 그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선 사도바울, 여러분?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이 통념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왕을 침묵케 했던 저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그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저 멋진 대장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댔습니다. 향나무가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냄새를 묻히듯이 사도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핍박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토설했던 것입니다.
왕관이 없으면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았던 아그립바 왕 앞에서, 비록 왕관 없다 할지라도 천지에 군림하는 바울의 이 위대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있어도 비단옷에 온갖 보석을 걸친 사람들을 부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 말했습니다.(행17:6) 이는 사도바울의 위대한 감화력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면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고 악평했습니다.(행24:5)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페스트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고 저 이방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케 하는 염병처럼 그를 두려워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서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라는 존재는 멸망자들에게는 염병같이 무서운 것이었지만 구원 얻은 자녀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힘은 곧 살아계신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의 권세는 곧 하늘의 권세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아멘. 사도 바울, 그의 권능은 곧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썩을 땅의 권세가 아닌 다른 권세가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멸망할 세상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힘을 알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힘, 진정한 권세, 진정한 부를 알고 가졌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패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참된 힘, 영원히 승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나는 예수 복음에 미친 행복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는 예수 복음에 미친 행복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그 어떤 환경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좀 더 심한 말로 말하자면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왕은 세상 권세와 영화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 왕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왕이라 하나 저에게서 금관을 벗겨 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죄악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몸은 자유 했을지 모르나 저의 영혼은 사슬에 묶여있는 가련한 노예 신세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처럼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라고,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몸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있었지만 그의 심령은 한없이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병도 가난도, 핍박도 죽음도, 감옥도 채찍도 쇠사슬도 바울을 얽어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세상의 그 무엇도 거듭난 생명의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환경이 나의 행복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선언이 우리 모두의 행복선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그 어떤 가치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유행도 그 어떤 환경도 그를 절대로 가둘 수 없는 자유인! 그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행복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죽을 만큼 행복했던 사람, 미칠 만큼 행복했던 사람,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해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감격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중생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저들로서는 미쳤다는 얘기를 할만 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같은 얘기가 세속적인 인간들에게는 황당무계한 얘기로 들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 말고 영혼이 있습니다. 고기나 밥 외에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조차도 생명력이 있음을 알게 되며, 망원경으로 보면 멀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별나라의 신비를 체험케 됩니다. 또한 꿈에 그리던 아이를 갖게된 후 처음으로 초음파를 통해 바라본 태아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영혼이 보이고 믿음이 보이고 내세가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땅의 눈, 땅의 가치관으로만 살던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대왕의 눈에는 바울이 단지 미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때 미쳤다는 얘기를 들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0:20절에 보면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이란 말이 있고, 마가복음3:20절에 보면 예수님이 미친 줄 알고 가족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미친 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이는 한 마디로 미친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한 때 학문과 유대 종교에 미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문도 유대 종교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미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더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아니더냐? 지금도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건져내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더냐?” 이렇게 선포하면서 말씀에 미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을 거두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살았습니다. 주의 사랑에 노예가 되어, 성령의 노예가 되어, 사명의 노예가 되어, 말씀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시다. 우리 모두를 심판하러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20대는 사랑에 미치고, 30대는 야망에 미치고, 40대는 일에 미치고, 50대는 소유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고독에 미치고, 70대는 은퇴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시간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기적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예수 사랑, 자신의 사명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덤덤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렸으며,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큰빛광성교회 성도들아, 네가 미쳤구나. 한국교회 성도들아, 너희들이 미쳤구나." 이 땅에 예수로 인해 미쳤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이 쏟아져 나올 때에 세상이 진정 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민족이 진정 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가,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구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죤 낙스가, 오늘 한국 교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외쳐댔던 에스더의 혼이 오늘 이 민족 가운데 다시금 살아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사명에 미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비전에 미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미쳤다는 얘기 한 번은 들어야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진정 행복하십니까?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여러분? 평생 동안 이 행복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예처럼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세상살이, 고난과 시험에 행복을 강탈당하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십시다.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역자입니다. 여보, 나는 행복한 아내입니다. 얘들아, 나는 참으로 행복한 아빠란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참으로 행복한 목사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같이 2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아멘.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여러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진실된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맛보며 예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진정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양한 전도 방법
행 26장 24~29절 / 박찬길목사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전도자를 꼽으라면 한다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19살 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가 살던 조그마한 마을에 '모다카이 햄' 이라는 목사님이 오셔서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친구들이 가자고 하니까 빌리 그래함도 함께 참석했는데, 그날 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더니 예수 믿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그 때에 빌리 그래함과 친구 몇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예수 믿겠다는 청년들을 위하여 안수기도를 해주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그렇게 그렇게 좋더랍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세상이 온통 달라 보이더랍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던 겁니다. 빌리 그래함은 그때부터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 좋은 복음을 나 혼자서만 누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전도자의 첫발걸음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이 분의 전기를 읽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는지 모릅니다. 억 단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적어도 몇 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놀랄만한 일입니다. 앞으로 영화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텔레비전, 방송, 비행기, 자동차, 마이크 시스템..., 필요한 것은 모두 동원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시겠지만 시대마다 전도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학교에 다닐 때에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분 중에 최권능 목사님이 계십니다. 본명은 최봉석 목사님인데 권능을 하도 많이 베풀어서 최권능 목사님으로 불린 분입니다. 이 분은 "예수 천당, 예수 천당"을 외쳤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예수 믿고 천당에 가라고 전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소리를 듣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총동원해서 전도합니다. 노방전도를 비롯해서 문서선교전도, 인터넷 전도... 요즘은 보편적인 전도가 됐지요. 태권도 전도, 길거리 농구전도..., 예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인데 요즘은 만화전도지가 나옵니다. 보면 따뜻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바울도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에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지요. 얼마나 열정적으로 전도했는지 모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전도를 했고, 배를 타고 다니면서도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양한 전도방법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지금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해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기를 치거나 살인을 해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재판을 받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몇 가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전도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재판을 받는다고 하면 대개는 자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합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에서 회피할 것인가를 생각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대략 여섯 번의 재판을 받았는데 이 모든 재판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재판정에서 서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나도 과거에는 당신들과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이 있는 재판정에서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엄청난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회를 전도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어디에 있든지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배를 타고 가면서도 전도의 기회로 삼았고, 옥에 있으면서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평소에 열심히 전도했어도 감옥에 들어가면 사역이 중단되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재판이라는 것은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는 뜻인데, 그곳에서도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겁니다. 후에 바울이 자신의 삶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언제든지 말씀을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단기선교를 하고는 버스 타고 돌아오면서 운전기사에게 말씀을 증거 했답니다. 전도간 교인들이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든지 예수를 전했는데 운전하는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었다는 겁니다. 어느 교회는 해외선교를 하고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했는데, 그 사람이 비행기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많은 전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지위나 위치나 말이나 은사를 통해서 전도하라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전도하라고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혹 지금까지 지내면서 전도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 말한다고 예수를 믿을까? 괜히 이 말 했다가 관계만 불편해지는 것 아니야? 조금 더 있다가 하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신 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돈벌 수 있는 기회,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일할 수 있는 기회, 연애나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그런데 기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같이 주셨다는 겁니다. 돈버는 기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던 겁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고, 연애나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던 겁니다. 심지어 병들었을 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던 겁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때를 통하여 전도하는 기회로 주셨던 겁니다.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통해서도 전도하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회를 전도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있어서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지 못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동원해서, 모든 증거를 다 동원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만남을 주셨는데, 만남을 통해서 복음 증거 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바울이 그런 인생이었잖아요.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통하여 생명이 구원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와 다른 전도 방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대개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전도하는 방법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바울이 법정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뭐 그렇게까지 할 것이 있나.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고 나와서 또다시 전도하면 되지? 우리에게는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켓 앞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전도가 되겠느냐? 헛수고만 하는 것이 아니냐? 더욱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생각해야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어요. 전도지 10장 나누어주면 제대로 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전에 보면 찬양축제를 할 때마다 1,000장씩을 나누어주었는데, 고맙게 생각해서 소중하게 가지고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어떤 사람은 나누어주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그냥 집어넣잖아요. 봐라 이거 헛수고다 이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나누어준 전도지를 통해서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중에 천국에 가서 '좋은교회에서 나누어준 전도지를 통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구원받았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금년에 우리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나가는데, 재명이 형제는 벌써 갔다가 왔어요. 미국에서도 많이 나가지만 우리 나라에서 수천 명이 나갈 겁니다. 어떤 사람은 두 주간, 한달, 두달, 일년을 나가지요. 어느 교회에서는 단체로 가서 집도 지어주고, 의자도 만들어주고, 진료도 해주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많은 선교를 나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가서 전도가 되겠느냐? 전도는 하지 않고 집 지어 주고 노동만 하다가 오는데 그것이 되겠느냐? 비행기 값만 해도 엄청난 액수가 될텐데, 그 돈을 모두 선교사에게 주면 훨씬 더 많은 전도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똑같이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고 어떤 사람은 왜 저렇게 볼까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관점이 다를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면서 비판합니다. 요즘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아직도 그 방법으로 하냐? 그 방법은 일반인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니까 하면 안 된다. 자신이 대안을 제시한다든지, 자신은 다른 방법으로 한다든지 하면 모르겠는데, 이건 이래서 좋지 않고 저건 저래서 좋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나아가 비난한다는 겁니다. 전도나 선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호주 동북쪽에 뉴 헤브크레스 제도가 있습니다. 포르투칼 사람 귀로스가 17세기에 발견했는데, 30개의 섬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섬에나 사람이 살고 있는데 주민들이 식인종입니다. 그런데다가 백인들의 기만적인 취급을 받고 더욱 포악하여졌습니다. 이 섬에 1839년 죤 윌리암스 선교사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찾아갔어요. 그는 육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었어요. 다음으로 해리스 선교사가 갔는데 섬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어요. 세 번째 선교사로 죤 골든 부부가 자원해 갔는데, 토인들과 접촉은 하였으나 그들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 선교사인 마크에이너가 갔는데 병으로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다섯 번째 선교사로 죤 골든 선교사의 동생이 갔습니다. 그는 다행히 약간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본토 말을 연구하여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사도행전 7장 마지막 부분을 번역하고 있는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하잖아요. 이 부분을 번역했는데 급한 환자가 있으니 와달라는 토인의 말을 듣고 문을 열자마자 도끼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 성경 초안은 지금도 캐나다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일곱 번째로 로버트 선교사가 건너가 일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40년 후에는 섬사람 전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겁니다. 이 섬의 이름을 '성령의 섬'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살아 활동하신 섬이라는 뜻입니다. 전도, 미션이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 나라에도 보세요. 선교사들이 왔을 때에 처음부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지요.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이화대학교, 배재대학교. 다 선교사들이 세운 기관입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으니까 학교나 병원을 세워서 간접 선교를 시작한 거지요. 이곳이 복음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어요.
우리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라는 토마스 선교사가 있습니다.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라는 배를 타고 평양에 들어왔는데, 물이 빠지는 바람에 배가 둔턱에 걸렸습니다. 우리의 관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불붙은 화살을 쏘아서 배를 좌초시켜버렸어요. 관군들이 배에 올라가서 모든 사람을 칼로 베어 죽이는데 그 안에 20살 짜리 토마스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한국말도 모르고 얼떨결에(?) 왔다가 오자마자 죽게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한문으로 써진 성경 한 권을 전달하고 죽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이 종이질이 좋으니까 이것저것용으로 쓰고 벽지로도 사용했습니다. 옛날에는 종이가 없어서 아무 종이나 벽지로 사용했거든요. 성경으로 벽지를 한 이 집에는 여기저기에 성경 말씀이 붙어 있는 겁니다. 천장에는 창세기가 붙어 있고, 안방에는 요한복음이 붙어 있고, 건너 방에는 로마서가 붙어 있고..., 성경으로 벽지를 한 집의 아들이 이 말씀을 읽다가 회심해서 변화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한국 최초의 순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과학은 발전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야 하지만 복음 증거 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되지요. 저희 어릴 때에는 손으로 드륵드륵드륵 돌리면 교환이 나와서 연결시켜주었어요. 요즘은 내가 직접 누르지요. 셀폰이 얼마나 발전돼가요. 셀폰으로 인터넷도 하잖아요. 요즘에 드륵드륵드륵 전화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복음 증거 하는 것은 예전에 사용하던 것과 함께 시대가 바뀌어가면서 나오는 새로운 방법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마켓 앞에서 가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는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른들 편에서 보면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가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어느 한가지 방법으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야 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방법으로 전도를 하면 존중할 줄 아는 수준있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오히려 귀히 여기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전도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양한 전도 방법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다양한 전도 방법을 통하여 한 사람의 생명이 구원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내가 할 수 있는 전도 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주특기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전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전도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저런 방법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면서 그 방법을 더욱 발전시키는 거예요. 개발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거예요.
어제 농구대회를 했는데 교회연합회에서 왜 이런 것을 했느냐 하면, 베이 지역에 유스, 청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해에 처음으로 시작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농구대회의 장을 만들어주면 교회마다 농구하기 위해서 전도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NBA 화이널이잖아요. 이 시즌에 맞추어서 하는데, 젊은이들 중에는 농구를 좋아하는데 교회를 나오지 않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 이들을 데려다가 농구하면서 우리 교회로 갑시다. 예배도 드립시다. 이렇게 해서 전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거예요. 제가 어제 듣기로 이렇게 해서 전도한 사람이 여럿이 있답니다. 참으로 감사했어요.
하루에 경기할 수 있는 팀이 16개 팀인데, 한 팀에서 한 사람을 전도한다고 가정을 하면 대회를 할 때마다 16명이 전도되는 겁니다. 그 전도된 사람이 한사람씩 전도한다면 32명이 되는 겁니다. 16명, 32명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것 같지만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으니까, 그러면 대회 할 때마다 16천하, 32천하가 구원되는 겁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할머니가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고령입니다. 몸이 말대로 따라주지를 못합니다.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르바이트 학생을 데려다가 성경을 읽게 해서 전도해야 되겠구나. 그래 자신은 누워 있고 아르바이트 학생은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할머니에게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을 읽어줍니다.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을 읽습니다. 요한복음을 시작하는데 16절쯤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학생이 이 말씀을 읽었는데 할머니가 이러는 겁니다. '학생 안 들려' 학생이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뭐라구?' '다시 한번 읽어 줘' 학생이 큰 소리로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할머니는 안 들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더욱 큰 소리로 읽습니다. '할머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대요~' 그런데 이 학생이 그렇게 소리소리 질러가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할머니는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성경을 읽게 하는 방법으로 전도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하시는데 전도는 선택이 아닙니다. 사명입니다. 전도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의 전도 방법을 삶의 현장에서 개발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한 사람이 전도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오늘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다양한 전도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은 전도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도의 방법을 개발하고 개발해서 지속적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마음으로 나아가실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구원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더 확장되리라고 생각합니다. 7월부터 전도 기간인데 다양한 전도 방법을 개발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구원되는 놀라운 은혜가 이 제단 위에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다양한 전도방법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은 전도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희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이 귀한 은혜를 전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가 미쳤도다"
행 26장 24~29절 / 최병남목사
공산당원 중에는 세 종류의 공산당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안팎이 빨간 참 공산당을 토마토 공산당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과 공산당이 있다고 합니다. 사과는 겉보기에는 빨갛지만 껍질을 벗기고 보면 하얀 것처럼, 겉보기에는 공산당원 같지만 속은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수박 공산당이 있다고 합니다. 수박은 겉으로 보면 파랗지만 속은 보면 빨갛습니다. 겉으로는 공산당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데 사실은 새빨간 공산당을 말합니다. 북한에는 5가구당 한 사람의 감독관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공산당원이 아닌 것 같은데 속은 새빨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주로 감독관이 된다고 합니다.
이 원리는 비록 공산당원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토마토 기독교인들은 안이나 밖이나 완전히 새빨간 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과 공산당원처럼 사과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가타고, 겉보기에는 좋은 신자 같은데 속은 아무 것도 없는 분들, 바로 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의 형식이요, 의식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믿음이 없는 분들입니다. 중생의 체험을 못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수박 교인들이 있는데, 수박교인들은 겉보기에는 별로 신앙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선조 대대로 예수를 믿는 분들은 그렇게 열심이 없는 듯 합니다. 또 모태신앙인들은 겉보기에는 잠잠하고, 열심도 없고, 그렇게 신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속을 보면 새빨간 수박처럼,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신앙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토마토처럼 안과 밖이 믿음의 사람들로, 은혜의 사람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를 변회시키고, 이러한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를 깨뜨려버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하는 모범적인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서 오늘 본문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에게 미쳤던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게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면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뭉쳐서 폭도가 되어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세상 부귀영화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갖히디고 하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주님을 향한 그 뜨거운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왕 앞에 섰을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내가 이렇게 손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랬더니 베스도 왕이 뭐라고 말합니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여러분,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계 선교의 주춧돌을 놓는 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만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만이 어두운 사회를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사람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입니다. 로마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30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 땅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며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환난 속에서 매를 맞기도 하고 나중에는 순교를 당하면서까지도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북한 땅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죽는데도 불구하고 지하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신앙의 사람들은 바로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세상 것에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에게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 예수에게 미쳤는지, 빌립보서 1:20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나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으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길 원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예수에게 미쳤으면 이런 고백을 합니까? 또한 빌립보서 2:23-24을 보면 이런 고백도 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은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에서 함께 사는 것을 더 소망할 정도로 그렇게 예수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미쳤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다.
여러분, 그렇다면 베스도 왕이 바울 사도에게 "네가 미쳤도다"라고 말했는데, 그 미쳤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고대 언어를 보면 하대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중국말들은 아주 높이고 한국말은 낮추는 풍토가 있었는데, 그러한 말들 중의 하나가 '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쟁이" "점쟁이"등 이 말은 오늘 현대말로 바꾸자면 "박사"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쟁이"라는 말은 "전문가"라는 의미입니다. "박사"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다 아는 것이 박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공학박사" 그러면 물론 박사과정을 하는 긴 시간 동안 전반적인 교과를 다 공부하기는 하지만 정작 박사학위는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를 연구해서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꿀벌의 다리 하나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합니다. 적어도 꿀벌 다리에 관해서는 그 사람처러 많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까? 예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전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것은 좀 무식해도,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전문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유대인들의 신관: 하나님을 자기 민족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우주 만물의 하나님으로 증거한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 민족들만의 신으로 알았습니다. 다른 밎족들과는 상관이 없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초월해서 전 세계인류를 위한 신이라고 하는 것을 밝혔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요, 온 세계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민족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2) 유대인들의 교회관: 솔로몬 성전의 제사만 예배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의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리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의 성전, 즉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그 성전은 우리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성전이요, 유대민족이 모여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전은 누구나 다 나아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 누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라고 하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결국은 우리 주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3) 유대인들의 구원관: 자기 민족에게만 구원이 있고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한 것을 가르쳤다.
구원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얼마나 잘 알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 대해서만큼은 석학 중의 석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에 대해서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루에 최소한 10장씩은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되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깊은 교제를 갖게 되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러스킨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임시적인 책과 성경 두가지 밖에 없다. 임시적인 책은 성경 이외의 모든 다른 책이요, 영원한 말씀의 책은 성경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2. 예수로 충만했다.
여러분! 여기에 "네가 미쳤도다"라는 말은 예수로 충만했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 또 있었겠습니까? 다른 성경과는 달리 '주 안에서'라는 말이 자그마치 16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주 안에서''엔토크리스토' 이 말은 바로 신비적인 주님과의 연합을 가르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비적인 결합''미러클유니트'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친히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일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도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성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너무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멀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개념적으로만 알았던 율법주의자 사울이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주님 안에,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5:7)
여러분 "주는 내 안에, 주님 안에 내가"라는 것은 완전한 혼연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인간 '나'는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 내 주장도, 내 교만성도, 타락성도, 부패성도 다 죽었습니다. 내 성품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만이 내 속에 충만히 거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우리의 말이 예수님처럼 말하고, 우리의 삶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제2의 예수님처럼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3. 열심이 특심이다.
그 다음 "네가 미쳤도다" 라는 말은 뜨거운 열심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열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열심이 필요한가?
1)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다(요2:17)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열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난미도 열심 있는 분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그랬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열심이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니 그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요한복음2:17)에 보니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처럼 하지말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해서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열심히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를 드려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심이 있을 때 그 곳에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고, 열심이 있을 때에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선한 일에 열심이 있어야 한다.(딛2:14)
여러분, "선한 일에 열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는 자연히 되지만 선한 일에는 열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3) 서로 사랑하기를 열심히 해야 한다.(벧전4:8)
"열심을 품고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서로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교회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가정교회에서는 대예배를 통해서 체험하지 못하는 따뜻한 사랑을 서로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열심히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 받고, 받는 가운데 그 사랑이 자라게 되고, 사랑이 만들어져서 더 큰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곳입니다. (고린도전서13:1-3)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이 있고, 또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4)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전15:10)
여러분, 전도하는데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고전15:10)을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권능 목사님은 전도에 얼마나 열심이 있었는지 일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잡고 전도를 시작합니다.
"일을 끝내고 어디로 가십니까?"
"집에 가려고 합니다."
"집에 가서는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예, 조금 푹 쉬려고 합니다."
"푹 쉰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지요."
"열심히 일해서는 무엇을 합니까?" 그렇게 묻다보니 나중에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죽어서 공동묘지에 가야지요." 그러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묘지를 넘어서 우리 함께 천국에 갑시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저 산꼭대기에서 한 젊은이가 나무를 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산 밑에서 "이봐요! 젊은이 청년 청년" 하고 다급하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젊은이가 보니 한 노인이 산 밑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습니다. 노인이 부르시니 어떻게 안 내려갑니까? 젊은이는 일하는 것을 잠시 접어 두고 숨을 헐떡이며 열심히 뛰어내려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청년, 우리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렇게 전도하는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예수로 충만해야 됩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새벽 4시만 되면 평양 시내를 누비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순사들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일본 순사들이 잡아다가 실컷 매로 때립니다. 이상한 것은 핍박을 받을수록 매를 맞을수록 최권능 목사님 입에서는 "예수 천당"이라는 말만 계속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 순사들이 제발 예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니까 최권능 목사님은 "나의 마음 속에는 예수로 충만해서 때릴수록 예수만 나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어떤 신자가 필요합니까? 예수에게 미친 성도, 예수 전문가, 예수로 충만한 사람,예수에게 열정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성도가 신자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예수에게 미쳐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행 26장 24~29절 / 류영모목사
네로 황제 당시 유대 총독으로 베스도라는 총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벨릭스 총독의 후임으로 부임 3일 후, 가이사랴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 대제사장과 유대지도자들을 접견합니다.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 요청 속에는 바울을 노상에서 살해해 버리려는 음모가 도사려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해 봅니다. 이때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권리를 이용,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로마에가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수일 후 대왕 아그립바 2세가 그의 누이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 총독을 문안하기 위해 가이사랴를 방문하자 베스도는 이들과 함께 바울의 변론을 듣게 되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대왕과 총독은 한때 지성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당당한 세도가로 명성을 떨치던 바울이 일개 전도자가 되어 영어의 몸이 되어 송사를 당하고 초라한 재판석에 앉아 심문을 받는 모습을 보며 동정을 합니다. 변론하는 행색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비난합니다.
이때 바울의 대답이 나처럼 옥에 갇히는 일을 제외하고는 여러분 모두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하오. 나처럼 미친 사람이 되어 보시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입니다.
I. 자기 행복 선언
본문의 이 말은 사도바울의 자기 행복선언입니다. 바울의 이 행복선언이 고루거각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데에 오늘 그 귀중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이 선언을 했습니다.
평소 행복을 느끼고 살던 사람도 손에 쇠고랑을 차고서까지 행복에 겨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내 꼴이 이래서야, 설사 내가 행복을 선언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는가?" 내적인 갈등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재판관은 일개 하급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해 주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바울은 포박된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오면 무너지기 쉽상입니다.
① 가령 모욕을 당했을 때 그렇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는 주림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나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했구나" 바울은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욕 앞에서 태연자약하며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동정을 받았을 때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사람도 애틋한 동정의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더라면 총장은 되었을 테고, 사업을 했더라면 사장 회장은 했을 테고, 정치를 했더라면 로마 총독을 했을 터인데, 어쩌다 이 신세가 되어서 쇠고랑에 묶인 몸이 되었느냐?" 동정 앞에 마음이 약해질 수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불운아로 혹은 박복한 사람으로 동정하는 사람 앞에 "당신들도 나처럼 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들처럼 못된 자신의 신세를 한스러워 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자 임을 깨닫고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③ 사람들은 흔히 권력 앞에 위축을 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권력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그립바 대왕도 베스도 총독도 만장하신 고관 대작 여러분도 모두 나와 같이 되시오" 당당하게 품위 있게 위엄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 서 있는 지금 바울의 몰골을 상상해 보십시다. 두해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으니 얼굴은 창백해 있을 테고 그동안 부실한 음식으로 연명했으니 얼굴엔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터이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을리 만무했습니다. 의복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속인들의 눈으로 보면 쉽게 업신여길만도 했고 쉽게 동정할 만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바울은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을 받은 행복자다. 나는 복음을 받았고 나는 복음을 전하며 산다. 이것은 금생과 내생에 영광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자신만만하게 지금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과 누리는 행복으로 만족하니 더 이상 소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제 목회 간증을 듣고는 시민운동가로 알려진 서경석 목사님이 제게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목회를 했다면 류 목사 같은 목회를 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옹색한 상가 교회당에 있을 때 당시 영락교회 담임 목사였던 임영수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하룻밤 설교를 하시고 차 한잔 나누며 오히려 제 목회가 부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새롭게 목회를 시작한다면 류 목사 같은 목회를 하고 싶다고.” 말씀했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이나 임영수 목사님은 평범한 한 사람 목회자가 아닙니다. 우리시대 예언자 같으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우리교회를 부럽게 생각하신다면 우리교회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것이 자랑스럽고 또 한소망교회 목사가 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람에겐 차원 높은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에 긍지를 느끼며 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믿음입니다. 인생관입니다. 가치관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타인들을 향하여 당신들도 나처럼 행복하시오. 고백할 수 있습니까?
II. 나처럼 예수믿고 구원 받는 사람이 되시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 말은 나 바울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요 천직인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죽은 천벌 받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이 땅에 와 내 죄를 걸머지고 돌아가셨구나. 그분은 살아나셨구나. 지금도 살아 계시는 구나. 선악간에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가 되시는 구나.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여기서 사도 바울의 인생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아 하나님을 섬긴다는게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었구나. 저들이 내 형제 자매인줄 알지 못하고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고 채찍질하여 죽였구나. 나는 그분이 내 아버지인줄 알지 못하고 채찍 휘둘러 때린 불효자식이었구나. 나는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죄악 덩어리였구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전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외쳤습니다.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는 일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고난은 그의 행복이었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알지 못하면 천하의 무식쟁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나지 못하면 죽은 시체나 다름없다. 성령 받지 못하면 누구나 사단의 노예요 지옥의 불쏘시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러니 그는 담대히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되시오. 총독이여 당신도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시오.” 당당히 외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개의치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를 심문하는 아그립바 대왕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 셀 리더십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한 낯선 얼굴이 부엌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행복동산에 참여하는 새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설거지를 신나게 하며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예수 믿으면 행복하고 좋은데. 이렇게 기쁜 소식이 가득한데. 이렇게 신나는 일이 많은데. 못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예수 믿고 지금까지 자기에게는 아무도 예수 믿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이제는 자기에게 예수 믿고 교회 가자고 인도해 준 집사님이 한없이 고맙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행복을 아는 사람들의 외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나와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시오!
III. 나처럼 힘의 근원을 알고 사시오.
둘째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힘의 근원을 알라는 말입니다. 흔히 돈이 힘이라고도 하고 체력이 국력이라고도 합니다. 또 권력이 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대왕과 그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선 사도 바울,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통념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왕을 침묵케 했던 저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그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저 대장부를 보십시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댔습니다.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 냄새를 묻히듯이 사도 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핍박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토설했던 것이지요.
왕관이 없으면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았던 아그립바 왕 앞에서 왕관 없이도 천지를 군림하는 바울의 그 위대한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17:6)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감화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여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고 악평했습니다. (행24:5)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페스트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고 저 이방인들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케 하는 염병처럼 그를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라는 존재는 멸망자들에겐 염병같이 무서운 것이었고 구원얻은 자녀들에겐 생명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향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록으로 보면 1347년부터 약3년간 전유럽에 살인적인 페스트 전염병이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 페스트로 감소된 인구는 당시 유럽인구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당시에 페스트나 전염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을까요?
바울의 복음전파로 인한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으면 저 이방인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을까요? "바울의 복음전파 위력은 페스트 전염병 보다 무섭다." 이 파우워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힘은 곧 살아 계신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의 권세는 곧 하늘의 권세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그의 권능은 곧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왕이여 썩을 땅의 권세가 아닌 다른 권세가 있는 것을 아십시오. 멸망할 세상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힘을 알기를 원하오” 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IV. 나처럼 자유인이 되시오
나아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나처럼 진정한 자유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왕은 세상 영화와 권세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워하기는 커녕 이 왕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왕이라 하나 저에게서 금관을 벗겨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죄악과 탐욕의 노예였고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몸은 자유했으나 저의 영혼은 사슬에 묶여있는 가련한 인간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처럼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고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란 말입니다.
바울의 몸은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있었으나 그의 심령은 한없이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던 것이지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보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넘치느니라. 할렐루야!
질병도 가난도, 핍박도 죽음도, 감옥도 채찍도 쇠사슬도 바울을 얽어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거듭난 생명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다 결박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자유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던 것입니다.
V. 나처럼 전도자가 되시오
넷째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나처럼 전도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하여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간증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의 중생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저들로서는 미쳤다는 얘기를 할만 했습니다. 죽은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같은 얘기가 세속적인 인간에게는 황당무계한 얘기로 들려질 수 있었겠지요.
믿음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싸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말고 영혼이 있습니다. 고기나 밥 외에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미경으로 보면 맑은 물 속에도 득실대는 대장균이 있고, 망원경으로 보면 멀어서 보이지 않던 별나라가 보이게 되고, 내시경 or X-광선으로 들여다 보게되면 피 속에 살 속에 뼈 속에 숨어있던 질병들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육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영혼이 보이고 믿음이 보이고 내세가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그러나 땅의 눈 땅의 가치관으로만 살던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대왕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얘기를 한때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0:20에 보면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이란 말이 있고, 마가복음 3:20에 보면 예수님이 미친줄 알고 가족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미친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요. 이 땅에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썩어 문들어질 가치관을 가진 세상사람들의 눈에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또 미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거지 전도단들은 아예 복장과 모자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미쳤다!" 아예 자신의 identity를 미친 사람으로 규정하고 살아갑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하여금 미치게 하였구나" 한 마디로 미친 소리 하지 말라는 거지요. 사실 바울은 한때 학문에 유대 종교에 미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문이 아니라 유대 종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듀나미스, 다이나마이트 같은 복음의 능력을 기억하면 복음에 미쳐 살아갈 수 밖에 없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더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아니더냐. 지금도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건져내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더냐 말씀에 미쳐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미쳤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깨를 볶아서 참기름을 짤 때에 큰 틀 속에 집어넣고 거대한 바위를 거기에 얹어 놓으면 그것이 너무 힘이 쎄서 압착하여 깨가 툭툭 터져서 기름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이 강력하게 사도 바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사도 바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듀나미스, 다이나마이트 같은 능력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입이 터졌던 것입니다. 가슴이 터져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저를 거두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주의 사랑에 노예가 되었고 성령의 노예가 되었고 사명에 노예가 되었고 말씀에 노예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게지요.
이때부터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다. 나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며 여러분들을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댔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더라고 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더라고 하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더라는 얘기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한소망 성도들아 네가 미쳤구나. 일산의 성도들아 너희들이 미쳤구나. 대한의 성도들아 너희들이 미쳤구나. 이 땅에 미쳤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이 쏟아져 나올 때에 시대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 북녘 땅이 복음으로 녹아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가, 스코틀랜드 해변가에 무릎 꿇고 내 조국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면 차라리 죽음을 주십시오 외쳤던 죤 낙스가, 이 교회에서 되살아나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외쳐댔던 에스더의 혼이 오늘 이 민족 가운데 살아나야 합니다.
VI. 맺으며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스도인! 그들은 참 별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믿고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삽니다.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천국을 보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하고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종착점이 무덤인 줄 알고 슬퍼하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믿고 행복에 겨워 삽니다.
그리스도인! 그들은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의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종착점이 다른 과연 별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들에겐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높은 자존감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상한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들의 기를 꺾을 수 없고, 세상의 환란이 그들을 낙심시킬 수 없으며, 세상의 감옥이 그들의 자유를 결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행복 선언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
행 26장 24~29절 / 조상호목사
미국의 외교관들도 입국하지 못하는 나라도 들어갈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코카콜라>입니다. 그리고 코카콜라가 들어가고 나서 식당 하나가 뒤따라 들어가는데 그것이 바로 맥도널드입니다. 한국, 뉴질랜드, 호주 세계 구석구석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공산권이든, 저개발국이든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맥도널드의 위치만 알아도 세계 어디에서도 끼니 건너뛰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코카콜라와 맥도널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수교하는 모든 나라에 제일먼저 들어가는 코카콜라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성장한 배경에는 이 회사 사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사장은 코카콜라 판매를 위해 완전히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힘과 정열과 노력을 코카콜라 판매를 위해 쏟아 부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코카콜라 판매에만 집중했는지, 어느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 사장이 이 정도로 코카콜라에 헌신을 하고 집중하자, 그 어느 회사도 넘보지 못하는 아성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업을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파파 존스>라는 피자 회사입니다. 1984년에 22살의 존 쉬나터는 아버지가 공동소유로 되어 있는 휴게소의 작은 구석에서 피자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 회사는 창업 7년만에 46개의 점포를 만들고, 또 다음 7년 동안 46개에서 1,600개의 점포를 갖춘 피자 체인점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파 존스> 피자의 급성장에는 창업주인 존 쉬나터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존 쉬나터는 파파 존스 피자를 먹을 뿐 아니라, 피자를 호흡하고, 피자와 함께 잠자고, 피자와 함께 살았을 만큼, 언제나 피자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취급하는 것은 먹기 싫어할 뿐 아니라, 아예 쳐다보기도 싫어하는데 쉬나터는 달랐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아니라, 피자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피자를 사랑했습니다. 피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Success라는 잡지에서 그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피자는 쉬나터의 인생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코카콜라와 파파 존스 피자 이야기가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코카콜라 사장이나 파파 존스의 사장은 자기 분야에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장이 코카콜라에 미치고, 사장이 피자에 미치니까 다른 회사가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회사로 성장한 것입니다. 저는 미치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분야이든 한 분야에 집중하고 미치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많이 배운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열정이 있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열정의 사람이 무서운 사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해도 한 분야에 미친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 가운데 배우자를 선택할 때, 현재는 그저 그래도 삶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에게 미래를 걸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은 좋지만 물에 술탄 듯, 술에 물 탄 듯, 삶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은 일찍 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가족들 고생시키기에 딱 알맞습니다. 부모님 유산 다 말아먹을 사람입니다. 또 주위에 열정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 사람의 좋은 열정, 선한 열정이 나에게도 전염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열정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1주일 전이나 1개월 전이나 1년 전이나 어떠한 변화도 없이 어떠한 열정도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의 무기력한 삶의 방식이 나에게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력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열정을 가진 사람이 미래가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분야에 미친 사람이 무서운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열정의 사람을 한 사람만 뽑으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을 뽑고 싶습니다. 그는 그가 세운 비전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정의 사람 사도 바울
그가 얼마나 열정의 사람이었는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은 당시 유대 총독인 베스도 앞에서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나,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최고 학문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많이 하다보니 그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만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열정의 사람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를 보십시오. 그는 산꼭대기에서 자그마치 120년 동안 엄청나게 큰배를 지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며 어찌하여 저 사람의 말을 듣느냐고 힐난하였습니다. 또 마가복음 3장21절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족들조차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며 예수님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마가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 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자, 이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12절과 13절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믿음의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조롱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언젠가는 드러나는 줄로 믿습니다. 거짓과 사실은 판가름나게 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치 우리 몸 속에 있는 질병을 우리의 눈으로 찾아 낼 수 없지만, 내시경이나 X-Ray나 초음파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님의 렌즈로 판가름 나게 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복음 때문에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 당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