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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와 모집소개 스크랩 교회홍보 교회와 신앙이 말하는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
유오디아 추천 0 조회 46 10.03.26 10: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교회와 신앙이 말하는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과 성경관 (펌)|

 

 

강 금성 목사입니다.
‘교회와 신앙’은 변 승우 목사의 구원론과 성경관에 문제가 있고, 신비주의를 조장하고 있으므로 이단성이 있음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구원론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변 목사의 구원관

교회와 신앙이 발표한 변 목사의 구원론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구원파의 구원론이 교회 안에 존재하며, 그는 이를 반대한다. 사람이 단순히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구원론을 그는 반대합니다.
둘째, 그는 칼빈의 5대 교리 중 특히 ‘성도의 견인 교리’를 반대한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믿음은 비성경적이다’는 것입니다. 변 목사의 이 주장은 지극히 웨슬리적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성결교 목회자 가운데서도 칼빈의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지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셋째, 그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야말로 구원 받는 참 믿음이다고 주장한다. 이는 구원파식 구원론에 반대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인데, 회개와 거듭남, 그리고 성결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교단들과 ‘교회와 신앙’은 이것을 마치 변 목사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규정하고 이단성이 있다고 왜곡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 목사의 이 구원론은 우리 성결교의 사중복음과 일치합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에 칭의가 없는 것은 죄 사함을 통한 칭의를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요, 칭의에서만 머무르며, 구원의 확신 속에 살아가는 신자의 폐단을 고치고, 나아가 사중 복음의 신앙을 가져야 전인적인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 때문입니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교회와 신앙은 변 목사가 마태복음 5장 20절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라고 주장한 것을 들어, 그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의 진단은 이 부분에서 오해와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변 목사가 해석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가 맞으며, 그렇다고 그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문맥에서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5:21-6:18절에 나오는 여섯 개의 ‘명제와 반명제’를 사용해 설명합니다.

1)살인에 관하여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살인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의는 살인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화를 내거나 욕하지 않으며, 미련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2)간음에 대하여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간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의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3)맹세에 대하여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에 있어서 헛맹세를 하지 않고, 맹세한 후 지키면 의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도무지 맹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면 예, 하고 실천하고, 아니면 아니오 하고 피할 뿐, 무엇인가 맹세하고 그 맹세한 대로 지키는 것 자체가 불의라는 것입니다.

4)원수 갚음에 대하여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당한 만큼만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에서 지나면 이는 불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갚는 대신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까지 돌려대라고 합니다. 그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입니다.

5)이웃과 원수에 대하여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께서 요구하신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6)구제, 기도, 금식에 대하여(6:1-18)

(6: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구제를 할 때든지, 기도할 때든지, 금식을 할 때든지... 모든 것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은 그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변 목사의 말이 맞습니다. 이 여섯 개의 명제와 반 명제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3. 예수님은 행위구원론을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고 예수님이 행위구원론을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행위구원론과 ‘행함이 있는 믿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16-29절에 이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이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구원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고, 그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대답하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절)고 거듭 말씀합니다. 그러자 놀란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온전함,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어떻게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며 하나님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을 때 걸림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버리고 좇는 제자가 될 때 ‘하나님이’ 그를 온전케 하십니다. 그 온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좇는 자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결과로써 얻는 의이다. 이 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걷고 있었던 행위구원론은 부정됩니다.
둘째, 그러나 그 의는 예수 십자가를 믿음을 통해 얻는 죄 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나타나야 할 의이다. 이 점에서 구원파 식의 구원론은 부정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라고 해석한 것은 바른 해석이며, 변 목사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지와 왜곡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는 예수님을 믿고 좇는 신앙에 의한 의입니다. 곧 우리가 믿는 중생과 성결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은, 이러한 진리가 가려져 있어서 강단에서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런 구원론에서 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참 복음이 가려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은 시급한 일이며, 교회의 부흥은 이 진리의 회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있으면 구원론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 내용과 로마서를 통해 다시 말씀드리기를 희망합니다. 다음번에는 ‘변 목사의 성경관이 잘못되었고, 신비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교회와 신앙이 무지로 인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능을 현저히 약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변 목사의 주장을 변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중복음이 얼마나 탁월하며 성경적이고, 21세기에 들어 침체되고 있는 교회 부흥에 훌륭한 대안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중복음의 기치 아래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사중 복음을 부인하고, 장로교의 잘못된 교리에 동조하고 있는 교단 내 현실을 가슴 아파 하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진리 안에서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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