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릴 만큼 푸른 햇살이 새해 뜰을 비추는 아침, 창가에 서 있다가 상념에 빠져들었다. 만물이 다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에 화두(話頭)를 모은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형제와 친구를 만나고,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유독 지워지지 않는 인연이 있어 문득 감상에 빠져든다.
40여 년 전의 일이다. 재수생이었던 나는 보성군 벌교 출신의 3수생과 성냥갑처럼 단조로운 신도림동의 어느 청기와 집에서 하숙을 하며 그를 형으로 불렀다. 학원과 먼 거리에 있는 하숙집을 찾게 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학원이 밀집한 종로의 하숙비는 4,000~5,000원이었지만 신도림동은 2,500원 정도면 하숙이 가능했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렸던 세계탁구대회를 재패함으로써 국민적 탁구 붐이 일었다. 일요일엔 탁구를 하느라 천금(天金) 같은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다.
막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한 서울대학교를 드나들며 꿈을 키웠던 기억이 아련하다. 달빛 환한 캠퍼스와 공원 등에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쳐나고 통기타 소리에 몸을 흔들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유신 정치에 항거(抗拒)하는 시민들에 대한 탄압도 적지 않았다.
가끔씩 신도림 천 둑길을 걷기도 했다. 주식회사 ‘백양’을 둘러싼 탱자나무가 향기를 풍기며 줄지어 있던 기억이 아련하다. 신도림천의 목교(木橋)를 건너면 구로공단이었고 반대 방향의 논둑을 지나면 신길동이었다. 당시만 해도 담장을 드리운 석류와 들녘의 허수아비를 흔히 볼 수 있는 아득한 시골 풍경이었다. 몇 년 전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곳을 찾아 나섰지만 빌딩 숲으로 가득해 도대체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느 날, 밤이 늦어도 함께 하숙을 하던 형이 돌아오지 않아 마중을 나갔다. 아무리 주먹 자랑 말라는 벌교 사람이지만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똘마니들을 어찌 당하랴. 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도림 천을 조촘조촘 걸어가자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여인의 입술처럼 고운 달님은 미소를 머금고 비쳐 주었다. 골목길 어귀에서 형의 그림자를 기다리던 중, 한 소년이 길바닥에 앉아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그의 젖은 눈망울을 보고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얘야! 늦은 시간에 왜 여기 앉아 있니? 어디 아프니?”라고 말을 걸었지만 소년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아이의 손을 잡고 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몇 살이냐고 다시 물었다. 이에 소년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열 살이라고 했다. 이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소년의 얼굴엔 아픈 기색이 역력했고, 열이 나는 듯 고통스러워했다.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형을 기다리는 것보다 우선 소년을 도와주는 게 우선이란 생각에 그를 약국에 데려가 약을 사 먹인 후 잠시 두고 보기로 했다. 조금 뒤 불덩이 같았던 소년의 머리는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안 아프지?”라고 물었다. 소년은 머리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소년에게 조심스레 “아이야! 우리 오다가다 만나게 되면 인사나 나누며 지내자.”고 했다. 나에게 믿음이 생긴 소년은 “네. 꼭 그럴게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과 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하숙을 함께 하던 형과 함께 6개월 동안 소년과 가끔 만나 어묵과 국화빵을 사 먹으면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소년과 친밀한 관계를 나누던 어느 날부터 소년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형은 염려가 되어 시간이 날 때마다 소년을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국화빵을 먹으며 정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됨 셈이었다. 나와 형은 소년과의 만남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갑작스레 헤어진 것을 늘 아쉬워했다. 형과 나는 각자 다른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형이 먼저 징집이 되는 바람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구러 세월이 흘러 지내던 중 우연히 서울의 어느 사우나에 가게 되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어떤 중년의 남자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사람이 찾는 누군가 닮아서 그럴까? 하고 예사로 넘겼다. 그런데 그곳에 갈 때마다 만나곤 했다. 우연치고 너무 이상한 일이라 여겼다. 하루는 그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불쑥 “저 기억 안 나세요? 우린 구면이 아닌가요?” 하며 다가서는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을 아는 척할 수도 없고 난처하기만 했다. 몇 마디 건넨 그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신도림 천 둑길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중 몸에 열이 나 아파하고 있을 때 약을 사 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는데 기억하시겠습니까?” 하고서는 당시 내가 즐겨 입었던 옷이며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피부가 하얬다는 등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래도 모르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순간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모를 수가 있으랴. 유신 정치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던 시절, 국민계몽운동이라 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무렵 신도림 천 둑길에서 만난 열 살의 소년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현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는 바람에 연락이 끓어지게 되었단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끌어안았다. 오랜 세월 소식도 모른 채 지내다 다시 만난 기쁨에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잊고 지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당시의 고마움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순간 필자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숙을 함께 했던 형과는 몇 년 전 어느 투자 설명회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교분(交分)을 쌓고 있으며, 둑길에서 만난 열 살의 소년과는 중년(中年)의 세대에 다시 만난 셈이다. 형과의 하숙집 인연, 소년과의 둑길 인연은 민들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닌 인연이라 하겠다.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살아가던 시절에 만난 인연이 중늙은이가 다 된 인생의 뒤안길에서 다시 만나 국화빵을 사 먹던 옛 추억을 헤아리며 술잔을 나눌 수 있음이 너무 행복하다. 만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게 우리네 인생의 운명론(運命論)적인 한 과정임을 새삼 느낀다. 그래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