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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35. [역경의 열매] 김경래 (1-19) 백인 선교사에 호통치던 외조부… 교회 지어 헌납
국민일보로부터 세 차례 이상 역경의 열매 연재를 요청받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비교적 근래까지 요청이 올 때마다 나는 사양했다. “역경의 열매에는 역경을 딛은 훌륭한 분들이 나온다. 나처럼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 거기 어떻게 나갈 수 있나.”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피하고 싶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 탓일까. 하나님이 부르실 날이 가까워져일까.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1928년 4월 3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남6녀 중 다섯째였다. 아버지 김상기(1890∼1963)와 어머니 하은혜(1893∼1969)는 딸만 넷을 낳은 뒤 나를 얻었다. 어머니의 큰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 신앙의 모태다. 외조부 하강진은 경남 지방에서 신앙을 가장 일찍 받아들인 분이다. 1907년 통영 한 장터. 백인 선교사가 성경을 들고 전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뭣 하는 짓이오. 이곳을 떠나시오.” 하얀 도포 차림의 외조부는 노방전도하던 선교사에게 화를 냈다. 선교사는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저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외조부는 선교사의 인자함에 감동받아 예수를 영접했다. 집마저 기도처소로 내놓았다. 외조부는 1916년 집 마당에 미수교회를 짓고 헌납했다. 그는 영수(領袖)가 되셨다.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에서 임시로 교회를 인도하는 이를 장로교에서 영수라고 한다. 충무교회 9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부산을 근거로 하여 경남 지역을 선교 지역으로 삼았다. (중략) 대화정교회 교인 하강진씨는 자택에 미수리 기도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미수교회 시작이다.’ 조부는 1남6녀를 두셨다. 그중 셋째 딸이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평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하셨다.
나의 부친은 본래 유학자였다. 한동안 군청 서기로 일하다 은퇴하셨다. 기독교 신앙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교회 출석을 반대하지 않았다. “땡∼땡∼땡∼” 주일 교회에서 예배 예비 종이 울리면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쌀 가져오란다. 돈 가져오란다. 어서 교회 가라”고 농담하며 재촉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도 속에 내가 아들로 태어나자 예수를 영접했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 통영 읍내였다. 나는 외가가 있던 미륵도 미수리에 자주 놀러갔다. 1932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해저 터널이 생겼다. 동양 최초였다. 나는 이 터널을 지나 외가에 자주 갔다. 터널 주변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외가는 찬송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렸다. 성경 읽는 소리가 이어졌다.
부친은 마을에서 은퇴 후 농사를 짓고 서당을 운영했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아버지는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주일이면 우리에게 “교회 갔다오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성품이 너그럽고 밝았다.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에 낙천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 속에서 신앙심 깊고 밝은 아이로 자라난 것 같다.
통영소학교 시절 나는 전교 1, 2등을 했다. 당시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사범학교를 적극 권했다. 나에게도 진주사범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5년제였다. 졸업 후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 나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났다. 진주 대봉동에 하숙집을 얻어 학교를 다녔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경래 (1) 백인 선교사에 호통치던 외조부… 교회 지어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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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장로 약력=1928년 경남 통영 출생. 46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71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2년 국제기드온협회 서울캠프 회장, 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총장,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95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고문, 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
***[역경의 열매] 김경래 (2) 독립운동가 차병곤 선생의 누이를 아내로
나의 아내는 독립운동가 차병곤(1928∼1945)의 누이 은희(1930∼2008)다. 장인은 일제 강점기 헌신하다 요절한 차재선(1902∼1933) 전도사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1946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나는 부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일했다. 현재의 초등학교다. 아내는 당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맘에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전도사가 중매에 나섰다. 반년가량 교제했다. 아내의 집에 처음 간 날 무척 떨었던 것 같다. 옆방에는 선을 보러 온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가 가득했다. “외모가 촌사람 같다” “행동거지가 어수룩하다” 등 대부분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한 할머니가 “밥 먹는 걸 보니 복스럽네. 은희 굶기진 않겠다”며 적극 찬성해 혼인 승낙을 얻었다.
고향 통영에서는 나의 혼인을 서두르고 있었다. 외동아들의 혼사를 빨리 보고 싶어 했다. 1949년 내 나이 스물 둘에 결혼했다. 장인은 아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교사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전도사로 일했다. 장인은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기 전인 20대 후반에 신학잡지 ‘활천(活泉)’에 설교를 연재할 정도로 뛰어난 영성가였다.
장인은 전도사로 일할 때 손양원 이인재 목사님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세 사람은 혹시 누구라도 먼저 죽으면 남은 이들이 먼저 간 가족을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실제 두 목사님은 장인이 돌아가신 뒤 아내의 가정을 돌봐주셨다. 나의 아내는 이인재 목사를 아버지로 알고 성장했다. 두 목사님은 일제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됐다. 손 목사는 한국전쟁 중 순교했다.
장인의 피를 이어받은 차병곤은 1943년 동래고 전신인 부산실천상고 재학 중 항일단체 순국당(殉國黨)을 결성했다. 당수로 활약하던 그는 영도다리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광복군 동참을 위해 해외 망명을 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투옥됐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났으나 고문 여독으로 곧 한 달 만에 숨졌다.
정부는 1995년 그의 공훈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했다. 아내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자라서인지 외유내강(外柔內剛)했다. 이웃에게는 부드럽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남편에게는 평생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다. 정·관계 진출이나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반대했다. “여보, 권력과 명예를 뒤쫓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 일을 해야 해요.”
한국전쟁 발발로 나는 교사생활을 접고 1950년 12월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자원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하던 중 급성맹장염에 걸렸다. 제5육군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어느 날 ‘프레스(PRESS)’ 완장을 찬 미 뉴욕타임스 종군기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외상이 적고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간부후보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동족끼리 벌이는 이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불과 7주 군사교육을 받은 후 전방에 투입되는 심정은 어떠했는가?” 그는 ‘소모품’ 같은 군인들의 심정을 취재했다. 몇 주 후 그 기자가 병상으로 내 얼굴까지 실린 신문을 가져왔다. 날카로운 기사에 매료됐다. 기자가 매우 멋지게 보였다. 나는 후유증으로 입대 1년여 만에 의병제대했다. 건강 회복 후 부산에 있던 조선신문학원에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3) 한국 사회에 큰 충격준 ‘사이비 종교’ 보도로 해직
조선신문학원에서 언론계 대선배 오소백(1921∼2008) 선생을 만났다. 1953년 오 선생의 추천으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가 됐다. 이 중앙일보는 65년 창간된 현재의 중앙일보가 아니라 해방 직후 서울에서 창간되다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오 선생은 “현장을 보지 않고 말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늘 강조했다.
한 기자가 화재 현장에 가지 않고 소방서 측 취재로만 기사를 쓴 적 있다. 오 선생은 그를 당일 다른 부서로 발령 냈다. 46년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한 그는 48년 합동통신을 거쳐 부산일보 사회부장, 중앙일보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이후에도 6군데 신문사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후배들은 그를 ‘영원한 사회부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햇병아리 기자였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기사 마감 시한에 쫓겼다. 기자 생활 첫해 부산 영도 앞바다에 북한군 선박이 나타난 사건을 단독 취재했다. 이 일로 사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함태영 부통령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경남 진해 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나는 기자로서 사명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맛봤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으로 피난 왔던 언론사들도 환도했다. 내가 일했던 중앙일보는 환도 후 세계일보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발행 중인 세계일보가 아니다. 60년대 초 폐간됐다. 55년 말 전국에서는 일간지와 통신사가 56개, 주간지 115개가 발행됐다. 서울에서만 17개가 발행됐다. 그야말로 언론사 춘추전국시대였다. 그중 동아일보가 17만부, 경향신문이 10만부, 국제신문이 7만8000부 발행됐다.
한국은 혼돈의 시대였다. 50년대 중반 한국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지만 이념 갈등으로 남북이 분단됐다. 3년 넘게 동존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전쟁 후에도 이산가족이 넘쳤다.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가뭄 홍수와 같은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사이비 기독교가 판쳤다. 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55년 한국예수교부흥협회가 젊은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적극 포교 활동을 벌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주기철 한상동 목사를 존경하던 나는 사이비 기독교 창궐을 두고 볼 수만 없었다. 57년 3월 8일자 세계일보에 ‘괴(怪) 전도관의 정체-남녀 12명 혼음?’이라는 제목으로 1면 기사를 썼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문제를 시리즈로 연재했다. 한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주간 비판신문에도 연재돼 큰 방향을 일으켰다.
나는 취재 내용을 보완, ‘사회악과 사교운동’이란 책으로도 냈다. 182쪽 분량이었다. 신흥종교의 생성, 추종 세력의 실체, 폭로 계기가 된 혼음 사건 진상, 교리 문제점, 신흥 사이비 종교 창궐 이유 분석 등이 상세하게 담겼다. 그러나 57년 내게 돌아온 것은 결국 해직 통보였다. 신문사 경영진이 외부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나는 1남3녀를 둔 가장이었다. 2년 남짓 무척 곤궁했다.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내게 미국 여행 기회가 생겼다. 미 북장로교 드와이트 말스베리 선교사 요청을 받은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가 나를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강사로 추천한 것이다. ICCC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에 대항해 칼 매킨타이어 목사가 만든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였다. WCC가 자유주의 신학 조류라면 ICCC는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했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4) 경향신문 복직… 화장실서 ‘월남전 파병’ 특종을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는 대만 필리핀 한국 3개국 청년 5명을 초청해 미국에서 강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1959년 2∼5월 70일 동안 미국 20여개 도시에서 50여 차례 강연했다. 나는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고 공산주의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교인들은 한국교회와 국민을 위해 모금에 동참하기도 했다.
미국 출국 전 나를 기자로 추천했던 오소백 경향신문 사회부장을 찾아갔다. “제가 미국 갈 기회를 얻었어요. 미국에서 기획기사를 써보면 어떨까요? 저를 미국 특파원으로 임명해주시면 기사를 준비해보겠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를 취재했다. ‘정말 공부를 잘 안하나’ ‘애국심이 없는가’ 등이 르포 기사 제목이다. 취재 결과 본국의 우려는 기우이거나 과장에 불과했다.
기획 기사 연재를 계기로 경향신문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바로 일하지 못했다. 재집권에 혈안이 된 이승만정부가 59년 4월 경향신문 폐간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 등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가 빌미였다. 경향신문은 60년 4·19혁명 후 이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날인 4월 27일 복간됐다. 나는 60년 5월 경향신문에서 일하게 됐다.
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치부에서 일하던 나는 5·16 직후 쿠데타 사령부격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기자로 출입했다. 하지만 기자들에게는 암흑기였다. 취재원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우방국 미국은 베트남전(1960∼75)에 뛰어든 상태였다. 국내에서는 베트남 파병 여부가 큰 관심사였다.
62년 5월 11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서울 경복궁 옆에 있는 최고회의 건물로 출근했다. 현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있는 자리다. 3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평소 눈인사 나누는 최고위원 1명과 마주쳤다. 얼굴이 무척 상기돼 있었다. ‘뭔가 큰 일이 있는 게야.’ 나는 넘겨짚었다. “어디 먼 데 가십니까? 월남이나….”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난 지리산 공비토벌 하러 가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파병이 결정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확인을 해야 했다. 나는 최고위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남자 화장실 한 칸을 차지했다. 회의 후 최고위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 골치 아프게 됐어. 베트공이 많다는데….” “파병하면 국가 이익이 엄청나니 그 정도 희생은 각오해야지.” 외교가에 소문으로만 나돌던 파병이 결론난 게 분명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충정로에 있던 베트남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직원 대부분 퇴근한 뒤였다. 3등 서기관 1명이 잔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는 사실을 아느냐?” 그는 놀랍게도 “당연하지(Of course, I know!)”라고 했다. 선발대는 어제 이미 베트남에 도착했고 단장은 내일 떠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신문사로 돌아와 기사를 썼고 6시간 후 송고했다.
5월 12일자 경향신문 1면. ‘월남에 군사고문단 파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최고회의가 전날 비밀리에 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보도 여파는 매우 컸다. AP UPI 로이터 등 전세계 통신사가 경향신문을 인용해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보도했다. 최고회의는 바로 기자실을 폐쇄했다. 기자들은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5) 박정희 의장 “월남 파병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소?”
월남파병 기사가 나온 날 느지막이 출근했다. 기관원 3명이 나의 팔을 이끌었다. 내가 간 곳은 이후락(1924∼2009) 공보실장의 방이었다. 최고회의 건물 안이었다. 곧이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으로 안내됐다. 1년 전부터 출입기자로서 많은 기사를 썼지만 박 의장을 코앞에서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담배는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긴장됐다.
“그런 기사를 쓰려면 우리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지. 덮어놓고 쓰면 되겠소?” 박 의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은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후 자리를 권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의장님, 죄송합니다. 그 기사는 국민들에게 긍지를 심어주자는 동기도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우방을 돕게 된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굳었던 박 의장의 표정이 펴지는 듯했다.
“그런데 월남파병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소?”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거듭 물었지만 나는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취재원을 밝힐 수 없습니다. 기자에게 그것은 생명보다 중요한 원칙입니다.” 박 의장도 지지 않았다. “내게만은 밝혀줘야지. 국가 중대사를 발설한 놈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닌가?”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월남대사관에서 들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답이었다. 박 의장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1시간 후에야 나는 의장실을 빠져나왔다. 신문사로 돌아오자 선후배들이 박수를 쳤다. “살아왔구나.” 당시는 삼엄한 시절이었다. 매를 맞거나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라 다들 염려했던 것이다. 나는 면담 과정에서 박 의장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다. 소탈하고 사려 깊다고 느꼈다.
최고회의를 출입한 62년 나는 세 차례 기자실 출입정지를 당했다. 첫 번째는 월남파병 기사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정책 관련 기사 때문이라고 했지만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최고위원 전원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한다는 기사가 허위라며 출입정지를 통보했다. 63년 군사정부의 민정이양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64년엔 2월부터 전국에 식량난이 왔다. 보릿고개였다.
다이어트를 위해 ‘간헐적 단식’을 하는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약 130만 농가가 쌀 한톨 없는 농가였다. 봄 파종할 쌀도 없다는 뜻이다. 나는 5월 19일 ‘허기진 군상’이라는 제목으로 국민들의 생활상을 보도했다. 정치부장이던 나는 특별취재팀장 자격으로 시리즈 첫 기사를 작성했다. ‘술지게미 수배행렬. 하루 평균 200명…눈물이 말라 한숨으로 변해’가 제목이었다.
대전 한 양조장에 대한 르포였다. 배고픈 이들이 술을 담고 남은 곡식 찌꺼기 ‘술지게미’를 얻기 위해 줄을 선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는 술 찌꺼기로 배를 채운 아이가 교실에서 취해 쓰러진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시리즈는 같은 달 30일 8회를 끝으로 마감했다. 계획보다 빨리 끝난 것이었다. 계엄령 선포 때문이었다.
게엄포고령 1호로 모든 언론이 군의 검열을 받게 됐다. 정부 비판이나 사회고발 성격의 기사는 보도될 수 없었다. 우리 신문 몇몇 기사가 ‘북한의 신문과 방송에 인용돼 적을 이롭게 했다’ ‘학생시위를 선동했다’ ‘정부를 비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계엄 선포 후 구속된 1호 언론인은 우리 신문사 사장과 기자였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6) 집 팔아 교회 빚 갚고 여덟 식구 예배당 지하서 생활
나는 부산에서 한상동 목사가 개척한 삼일교회에 출석했다. 1953년 상경한 뒤엔 가족들과 흥천교회에 다녔다. 명신익(1916∼1968) 흥천교회 목사는 젊은 시절 주먹 쓰던 사람이었다. 평양구치소에서 신사참배 반대 혐의로 수감된 주기철 목사를 만나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분이었다. 명 목사는 61년 새 예배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채를 쓴 것 같다. 새 예배당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마칠 시간이 되면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졌다.
“빨리 돈 내놓으시오.” “우리한테 빌린 돈 챙겨갑니다!”
매주 한 무리의 남녀가 헌금 주머니를 열어 돈을 셌다. 그 돈을 센 뒤 몽땅 털어갔다. 사채업자들이었다. “주일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나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경건해야 할 예배가 돈 때문에 엉망이 돼버렸다. 나는 마음의 벽에 부딪혔다. ‘하나님, 이걸 어찌 해야 됩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기로 했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럽시다”라고 했다. 우리가 살던 청운동 2층 집을 동네 복덕방에 내놨다. 하루 만에 집이 바로 팔렸다. 집값으로 받은 돈은 300만원이었다. 교회 빚은 270만원이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에 35원, 커피 한 잔 30원하던 때였다. 그 돈을 들고 명 목사를 찾아갔다.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꼭 받아주십시오. 대신 우리 가족이 집을 구할 때까지 예배당 지하를 쓰도록 해주세요.” 명 목사는 간곡한 내 요청을 이기지 못해 돈을 받았다. 당시 나는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 자녀도 다섯이나 됐다. 우리의 교회 더부살이는 2년 가까이 이어졌다. 명절이면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선물로 사과 상자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 북창동 23번지.’ 내 문패를 찾을 수 없었다. 교회 주소였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 사이에 ‘경향신문 정치부장이 교회 지하에 산다’는 얘기가 한참 회자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대한항공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가 나에게 연락했다. 영락교회 집사라고 했다. “저희 회사가 미국 뉴욕에 취항하면서 제가 지점장으로 가게 됐어요. 회현동 저희 집이 팔릴 때까지 머무시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우리 자녀는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어났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당에 분수가 있는 집 2층 주택이었다. 건평만 250㎡가 넘었다. 이사 온 지 10개월쯤 지났을 때 집이 팔렸다. 600만원이었다. 집 주인에게 매매 대금을 송금했다. 당시는 외환송금 절차가 까다로웠다. 한꺼번에 돈을 보내기 어려웠다. 150만원을 송금했을 무렵이다. 주인이 연락해 왔다.
“더 이상 송금하지 말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쓰세요.” 너무 큰 돈이라 내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제가 어려울 때 교회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 그 돈이 아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한 집사님에게 주님이 주시는 상급으로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집을 팔아 교회 헌금한 돈이 270만원. 그로부터 3년 뒤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주어진 돈이 450만원. 나는 그때 깨달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상식으로 예측할 수가 없구나.’ 나는 교계 일을 할 때나 세상 일을 할 때 내 부족한 지혜로 계산하기에 앞서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먼저 헤아리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7) ‘사카린 밀수’ 특종 보도에 이병철 회장 “만납시다”
1963년 12월 제3공화국 출범 직후 경향신문은 ‘국회선 밝혀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냈다. 나는 당시 정치부장으로 취재를 지휘했다. 그중 ‘국민경제 망친 삼분(三粉)’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삼분이란 주요 생활 물자인 설탕·밀가루·시멘트를 가리킨다. 기사는 삼분을 생산하는 재벌이 가격 조작과 세금포탈 등을 통해 폭리를 취한다는 의혹 제기였다.
이듬해 1월 15일 박순천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졌다. 삼분 폭리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가 여당의 반대로 유야무야됐다.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민주당 유창렬 의원은 삼성 등 재벌의 일부 의원 매수설을 제기했다. 나는 유 의원의 주장을 ‘폭리 의혹 점차 확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기업들은 명예훼손 혐의로 나를 비롯한 간부진을 고소했다.
어느 날 부산 주재기자로부터 첩보가 올라왔다.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려다 벌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재벌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서민들 등치는 것을 감시하는 게 언론의 일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 연관된 밀수사건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경제부 기자를 파견해 추가 취재했다.
한국비료는 66년 5월 공장 건설 용도로 받은 정부차관 4000여만 달러를 받았다. 이 자금으로 사카린 원료(OTISA) 2259포대 약 55t을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왔다. 한국비료는 이 원료를 다른 회사에 팔려다 6월 초 부산세관에 적발됐다. 부산세관은 이 사실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벌과금 2000만원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에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보도됐다.
기사는 재벌기업이 밀수를 했는데도 정부가 벌금으로 사건을 종결했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국민 여론은 들끓었다. 일주일 뒤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중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명의 각료를 향해 인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재수사 대상이 됐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언론계 한 선배로부터 이병철 회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곤혹스러웠지만 대화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병철 회장과 오전 7시30분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어디서 취재했습니까?” 그는 정치세력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 나는 보도가 사회정의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식사 후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신앙인의 정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회장님, 제게 혹시 돈이 필요하면 장소, 액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주십시오.” 그 이후 이 회장에게 다시 연락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만남 이후 명절마다 삼성그룹에서는 선물이 왔다. 제일모직에서 나오는 양복지 등 고급 선물이었다. 선물을 흔쾌히 받을 순 없었지만 의전에 품위가 있다고 느꼈다.
밀수를 현장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93년 발간한 회상록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싼 조직적 밀수였다”라는 취지로 기록했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재벌비호였던 셈이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관련자들은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됐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8) ‘코리아환상곡’ 안익태 선생 업적 국내 첫 소개
나는 1971년 9월 경향신문 31대 편집국장이 됐다. 내 나이 43세. 언론에 투신한 지 20년 만에 ‘신문사의 꽃’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야 영광이지만 결코 즐겁지 않았다. 1963년 5월 천주교 측으로부터 경향신문을 인수했던 이준구 사장이 물러났다. 66년 4월 ‘공매’라는 방식으로 신문사 사주가 바뀌었다. 편집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송건호 편집국장은 경영주가 또 바뀌자 사표를 냈다.
이때부터 71년 말까지 5년 동안 편집국장이 6차례 바뀔 정도로 신문사는 혼란스러웠다. 이 기간 편집국장이 전무나 부사장을 겸임했다. 취재 부국장이던 내가 실질적 편집국장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내가 국장이 된 2년 동안 나라는 격동했다. 69년 삼선개헌, 71년 대선과 남북적십자 회담, 72년 7·4남북공동성명에 이어 10월 유신. 10월 유신 후 모든 신문 기사가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이어령 논설위원은 당시 우리 신문에 ‘내일의 한국인을 위한 에세이-아들이여 이 산하를’을 연재하고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무자비한 독설로 문단에 폭풍을 몰고 다니던 그였다. 12월 중순 이 위원이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았다. 서울 삼선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한숨지었다.
“검열을 하니 글을 쓸 수가 있어야지. 지난달 내 ‘여적’ 칼럼 읽었소? 어디 그게 글입니까? 제멋대로 깎고 넣고. 붓을 꺾는 편이 차라리 낫겠소. 유신인가, 유령인가 하는 이 사태 오래 갈 것 같죠? 박통(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성을 걸고 시작한 도박이니….” 그는 나에게 부탁했다. “나, 파리에 보내줄 수 없겠소? 특파원으로.” 나는 편집국장으로서 사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 위원은 현장 기자 경력이 전무한 첫 해외 특파원이 됐다. 그는 73년 2월부터 반년 동안 특파원 자격으로 파리에 머물렀다. ‘25시’의 작가 버질 게오르규를 인터뷰하고 한국에 초청했다. 재독음악가 윤이상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령은 말년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됐다. 나와의 교제가 그의 회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기자는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만남을 계기로 책을 쓰기도 하고 알맞은 자리에 추천하기도 했다. 65년 여름 외신부장이던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안 선생을 만났다. “저 좀 봅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입하던 시절 서울국제음악제 추진을 위해 건물을 드나들던 그와 안면이 있었다. “선생은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시니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제가 한국에 가면 친일파라 모함을 받아요. 저를 좀 변호해 주세요.” 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노 작곡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나는 65년 9월 안 선생이 스페인에서 숨진 뒤 그가 준 자료를 바탕으로 일대기를 정리했다. 이듬해 ‘코리아 환상곡-안익태의 영광과 슬픔’(현암사)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나는 누구를 만나나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섬기려고 노력한다. 상대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면 자리를 부탁하고 돈이 필요하면 모금을 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62년 3월 이동원 국제학술원 원장은 ‘차기 정권의 담당세력’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3차례 기고했다. ‘구 정치인을 규제한다고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센티멘털리즘이다’라는 등의 과격한 표현이 있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며칠 후 청탁자인 나와 기고자인 이 박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대면했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9) 박정희 대통령 “함께 일하자” 제안 정중히 거절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이동원 박사에게 철학과 소신, 정세와 향후 판도에 대해 물었다. 그의 지식과 견해에 탄복한 김 정보부장은 그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천거했다. 보름 후 이 박사는 박 의장의 비서실장이 됐다. 1964년 7월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39세. 이 장관은 한·일 외교회담, 월남파병, 국내 기업의 중동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62년 2월 박 의장과 출입기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 어떻게 하면 농촌을 잘 살게 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김용기라는 분이 광주농군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요. 농촌개혁운동을 하시는 거죠.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농군학교 옆에서 교육 활동을 하는 사촌 형으로부터 김 장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다. 광주농군학교는 나중에 가나안농군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바로 다음날 출입기자였던 나와 이만섭 유혁인 이종식 등이 박 의장을 따라갔다. 김 장로는 박 의장에게 농촌 현실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1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야 새 사람이 되고, 새 사람이 모이면 새 마을이 됩니다. 새 마을이 뭉치면 새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 의장은 김 장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며 감사했다. 박 의장은 김 장로에게 들은 농촌개혁 운동을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편집국장에 취임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71년 11월 하순 말쑥한 청년 2명이 나를 찾아왔다.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악수를 청했다. 대뜸 물었다. “요즘 신문사 재미있어요? 나와 함께 일할 생각 없소?” 갑작스러웠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보고 연락 주시오.” 청와대 대변인 제안이었다.
나는 갈팡질팡했다. ‘걸핏하면 기사 문제로 여기저기 끌려 다닐 국장 그만 두고 감투나 써볼까?’ ‘무슨 소리! 아무리 힘들어도 20년 지켜온 정도를 가야지.’ 조언을 구했다. 함석헌 선생은 언론의 행태를 질타하는 바람에 말도 못 꺼냈다.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은 “나 같으면 안 가겠네”라고 했다. 나의 멘토 오소백 선생은 “그걸 말이라고 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가장 존경하던 홍종인 선생을 찾았다. 일본말로 역정을 냈다. “오마에모카(너마저 간다는 거냐)? 도대체 기자라는 사람들은 왜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정했다. 언론인의 길을 지키겠다고. 일주일 뒤 박 대통령을 다시 찾았다. “각하, 아무래도 저는 신문사에 남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원래 배운 게 신문밖에 없어서.” 잠시 뒤 내가 말했다.
“옛말에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한테 밥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이 개가 주인집 아이를 문다고 했습니다. 군대와 공무원 사회는 계급사회 아닙니까? 모두 진급하기를 학수고대하는데 어느 날 아침 특채된 사람이 자기 윗자리에 오르는 걸 보면 사기가 꺾이지 않겠습니까?” 실제 당시 정부는 언론인 교수 등 많은 인사들을 특채했다. 공무원 조직 안에서는 ‘낙하산’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나는 부대변인을 대변인으로 승진시킬 것을 권했다. 박 대통령은 각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내가 한 기자에게 청와대 대변인 자리를 제안했다. 근데 이 사람이 나한테 ‘당신 강아지 밥이나 잘 주라’며 거절하더라.”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세 퍼졌다. 아마 당시 공직사회에 인사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리라.
***[역경의 열매] 김경래 (10) “각하께 백이 될 만한 이 소개를…” “예수 아니오?
김주언은 1988년 한국기자협회보에 연재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현주소’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대다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권력의 유혹에 두 손을 들었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언론계를 고수한 인사들도 있다. 송효빈(한국일보 논설위원)씨, 김경래(경향신문 편집국장)씨가 이들로, 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감투를 주겠다고 요청했는데도 거절한 유일한 언론인으로 꼽힌다.’
갈등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박 대통령은 내 얘기를 듣고 기가 찬 듯 웃었다. “알았소. 그만 가보시오.”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저, 각하. 한 말씀만 더….”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백(Back)을 가지길 원하지 않습니까? 대통령 각하는 가장 높은 분이니 백이 없지 않습니까? 각하의 백 될 만한 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바다 위를 거닐기도 하시고 장님의 눈도 뜨게 하시고, 문둥병 환자도….” 박 대통령이 먼저 말했다. “그거 예수 아니오.” “예, 맞습니다. 예수님 얘기는 성경에 있습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예수 믿을 것을 제안했다.
“우리 집에도 성경이 네 권쯤 있을 거요. 나하고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 함께 다닌 친한 친구가 목사요.” 나는 반가움에 이렇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각하께서도 예수님을 백으로 삼으시면 아주 좋으실 겁니다.” 분위기가 밝아졌다. 잘 웃지 않는 그였지만 그때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나의 전도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웃음은 지금도 내게 위안을 준다.
나는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설교’ 같은 이야기를 잘 꺼냈다. 날 따라다닌 많은 별명 중 하나가 ‘개량목사’다.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23세 때 주례자로 데뷔했다. 진주사범학교 동창생이 결혼한 지 1년도 안된 내게 주례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후 주례 요청이 들어오면 나는 ‘잘 먹고 잘 살자’로 요약되는 3분 주례사를 하곤 했다. 인기가 좋았다.
기억나는 또 다른 별명은 ‘소공동 동회장’이다. 60년대 후반 ‘주간경향’을 만들던 시절 표지 모델을 선정하는 권한이 내게 있었다. 문화계 인사나 연예인을 만나는 장소는 주로 소공동 주변 다방과 조세핀 조나 앙드레 김 의상실 같은 곳이었다. 소공동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 명함만 있으면 외상이 가능했다. 후배들이 내 명함으로 외상을 많이 했다.
연예인과 인연도 많다. 75년 코미디언 구봉서씨와 곽규석씨가 나를 찾아왔다. “예수님을 믿는 연예인들이 성경 공부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요. 남는 공간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들은 당시 신학생이던 하용조 전도사(1946∼2011)의 인도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화방송·경향신문 기획이사였다. 무료로 공간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기독 연예인 모임은 날로 커졌다. 이들은 밤 11시가 넘도록 기도하고 찬양했다. 후일 연예인교회로 발전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는 한국 매스컴선교회를 조직했다. 언론인들의 영성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이동원 목사가 지도하던 성경 공부에 20명 정도가 참석했다. 월례 예배에는 200여명이 참석했다. 차인태 문화방송 아나운서, 김태선 동아일보 부국장이 열성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1) “한국 참 모습 알리자” 전 세계에 뉴스레터 발송
1970년대 초반 신문사 편집국장이란 자리는 영광의 자리라기보다 고통의 정점이었다. 내가 택한 길은 어쩌면 제3의 길이었다. 사회참여도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닌 미래 발전안 준비였다. 사회참여보다는 복음참여를 우선했다. 71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민간단체 사회통신연구회를 창립했다. 이진수 주관중 김종표 서영희 등이 참여했다. 한국 경제와 정치의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연구회는 학술 연구 외 ‘코리아프렌드’라는 민간 뉴스레터를 발행했다. 한국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만든 홍보지다. 전 세계 150여 개국에 1만5000부가량 배포했다. 우표 값만 매월 50만원씩 들었다. 돈은 회원 50여명의 회비로 충당했다. 71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또 호출했다. “김 국장께서 좋은 일을 하고 있더군.” “예?” 박 대통령의 설명은 그랬다.
최근 한 아프리카 국가가 박 대통령에게 자전거 1만대를 보내주면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당시 남·북한은 각기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단독 회원국 가입을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한국에 자전거 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코리아프렌드’를 통해 알게 됐다. 코리아프렌드 맨 뒷면에 실린 ‘삼천리자전거’ 광고를 보고서다.
나는 연구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나도 연구회 회원이 되고 싶소.” 박 대통령이 자청했다. “각하, 죄송하지만 저희 연구회는 순수 민간단체입니다. 대통령이 회원이 되긴 어렵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름 없는 회원으로 받아달라고 했다. 그는 매월 후원금을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나와 박 대통령의 관계가 새로워졌다. 나는 박 대통령과 연구회 소식지를 겸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연구회에서 논의한 정책연구 요약본 5∼6쪽과 편지 2∼3장을 썼다. 편지는 청와대 민원실에 접수했다. 겉봉에 ‘조상호 의전실장 앞’이라고 썼다. 박 대통령의 인간성이 묻어나는 편지가 많았다. ‘내가 대통령 자리에 와 보니 무섭고 떨린다. 책임이 막중하다. 밤잠을 많이 설친다.’ ‘엄동설한에 떨고 있을 사람들 생각하면 당장 뛰어나가 담요를 덮어주고 싶다.’
73년 이동원 박사가 스위스 대사로 있을 때다. 나는 취재차 유럽을 방문했다. 전쟁 후 부흥한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으로 기획 취재했다. 이 박사와 내가 몽블랑에서 스키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외무부 연락망을 통해 보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대통령 그만두고 자네들과 같이 스키나 타고 싶다. 늘 청와대에 갇혀 지내다니 이런 팔자가 있느냐.’
장기적으로 경제를 부흥시키려면 중공업 위주로 경제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등 연구회의 의견을 올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런던타임스 뉴스위크 등 외신도 자주 올렸다. “지난주 뉴스위크에서 유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했는데 어떻게 대응했느냐?”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물었다. 각료들은 서로 “누가 보고를 올렸나” “박통 귀신 아니냐”고 했다. 출처는 사회통신연구회 보고서였다.
몇 해 전 조 의전실장을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적 있다. “옛날에 김 형이 사실 보이지 않는 국무총리를 한 10년 했어요”라며 싱긋 웃었다. 박 대통령과 주고받은 편지를 다소 과장해서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논란이 많다. 독재자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경제혁명가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그런 평가는 모두 일면만 보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2) 광주민주화운동 후 강제 해직… 다시 주님의 길로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3단계로 나눠 평가하고 싶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부터 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기 초창기다. 권력 수립기로 볼 수 있다. 한일협정 체결 후부터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74년 8월까지는 2기 중흥기다. 박 대통령은 해외 차관을 도입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육 여사 피살 후 79년 10월까지는 3기 종말기다.
3기 박 대통령은 국정을 등한시했다. 관료들은 박 대통령에게 부정적 정보를 보고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점점 침체기에 빠졌다. 시기별 공과가 있다. 딸 박근혜는 알려진 대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75년 8월 나의 세 딸 원미 원주 원희가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초청 연주 후 청와대로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딸은 영부인을 대신해 동석했다.
나와 박 대통령의 서신왕래는 71년부터 약 8년 동안 이어졌다. 내가 받은 편지는 44통이다. 육 여사 서거를 기점으로 편지가 줄다 79년 초 끊기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이후 나의 조언은 물론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육 여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삶이 상당히 일그러졌다고 생각한다.
73년 편집국장을 마친 뒤 나는 문화방송·경향신문 연수실장 겸 기획실장을 거쳐 77년 부설 한국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79년 10월 26일 18년여 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한 달여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쿠데타 12·12사태가 일어났다. 80년 4월 5일 아침 보안사 요원 3명이 들이닥쳤다. 나는 서울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은 간첩을 취재하는 곳이었다. “당신이 여기 왜 오게 됐는지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루 뒤 한 조사관이 말했다. “대구 강연에서 전두환 장군을 헐뜯지 않았소? 있는 대로 쓰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나는 그제야 그때 일을 더듬었다. 얼마 전 경북 지역 기독학생회 초청으로 강연에 나섰던 일이 있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물’처럼 챙기려 하고 있다. 소방수는 불을 끈 뒤 소방서로 돌아가야 한다. 불 끈 공로가 있다고 해서 그 집에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웃긴 일이냐.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더 큰 국가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옆방에서는 고문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강제연행된 지 닷새 만에 풀려났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후 신군부는 언론 장악을 위해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을 전격 교체했다. 신임 이진희 사장은 간부를 포함해 124명을 해직했다. 나도 포함됐다. 7월 15일 30년 동안 몸담았던 언론인의 길을 마감했다. 전체 언론을 대상으로 한 강제 해직과 언론 통폐합의 본보기였다.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친구들에게 전화하면 수화기 너머로 “없다고 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있고 힘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일이 없어지자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하나님 안에서 만났던 이원설 박정수 정광택 이동원 같은 친구들은 변치 않고 늘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줬다. 여기저기 기도원을 찾아다녔다. 성경 66권을 제대로 읽었다. 석 달 정도 걸렸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3) 한경직 목사 “나와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1980년 7월 김장환 목사로부터 서울 하얏트호텔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조용기 김장환 목사, 유상근 명지대 이사장이 있었다. 그리고 생면부지 외국인 3명이 있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보좌관을 했던 찰스 콜슨 부부와 비서였다. 콜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크리스천이 된 그는 76년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란 책을 냈던 이였다.
나는 엉겁결에 세 사람의 관광 안내인이 됐다.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 서울 경복궁을 함께 다녔다. 김포공항에서 헤어질 무렵 그가 사업 제안서를 건넸다. 미 콘덱그룹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단열재 ‘아이소핑크’에 관련된 서류였다. “내 친구가 한국 사업 파트너를 찾아요. 아는 사업가를 소개해주든지, 당신이 해보든지 알아서 하세요.” 나는 친구들을 모았다.
82년 2월 경기도 화성에 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외식사업체인 던킨도너츠 사업에도 참여하게 됐다. 11월 어느 날 한경직 목사가 말죽거리 인근에 살던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한 목사는 예장통합 목회자였다. 예장통합은 한국교회협의회(NCCK) 소속으로 진보적 교단이었다. 반면 나는 광복 직후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된 고신 교단의 보수적 평신도였다.
나는 한 목사와 함께 생활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저와 함께 일합시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려는데 함께해주시지요.” 고민했다. 성공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사업을 막 시작한 때였다.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만하면 세상 일 놓을 때 된 것 아니십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거들었다. “여보,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세요.”
생각지 못한 일이 관련돼 있었던 것을 후일 알게 됐다. 2006년 한 목사 소천 6주기 행사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한 무리 여인들이 찾아왔다. 북한 사투리를 썼다. “장로님, 어떻게 한 목사님이 장로님을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뽑았는지 아십네까? 저희가 추천한 거야요. 그때 저희가 감동받아서.” 내가 과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을 무렵 흥천교회에 빚을 받으러 왔던 이들이었다.
82년 11월 아이소핑크 대한아이소플라스트사 생산공장 준공식을 마치고 다음달부터 100주년협의회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는 그때 한 1년만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길어도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준비기간 내내 나는 거의 쉬지 못했다. 광장을 사용하기 위해 정부와 시를 설득하고 기금 확보를 위해 독지가와 교회를 찾아다녔다.
가장 마음을 많이 쓴 것은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고 교회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첫날 본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서울 여의도 하늘에 오색 무지개가 나타났다. 수만명이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84년 8월 15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에는 연인원 400만명이 참여했다. 김준곤 이호문 이만신 피종진 강원용 조용기 오관석 목사 등이 설교했다.
큰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여의도에는 쓰레기 한 조각 남지 않았다. 여의도를 관할하는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이 추가로 하는 일이 없었다. 성도들이 모두 치웠기 때문이다. 100주년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순교자기념관을 짓기로 했다. 한 목사는 “우리는 한국에 온 선교사와 순교자의 피, 땀, 눈물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4) 믿음의 열 식구… 매년 만우절엔 웃음 선사 이벤트
나는 항상 바쁜 아버지였다. 아내 차은희 권사와의 사이에 2남6녀를 뒀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지 않았을 때 출근하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뒤에야 퇴근했다. 가끔 잠든 아이들을 깨워 졸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도 했다. “불을 끄라.” 아이들을 앉혀 놓고 피아노를 쳤다.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 귀가 어두워져 아무 소리도 못 듣게 됐단다. 슬픈 마음으로 둥근 달을 보며 만든 곡이야.”
나는 월광 소나타를 쳤다.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도입부만 치다 그만두곤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사실 도입부만 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워서라도 아이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없더라도 아내는 가정예배를 매일 드렸다. 장모님까지 우리 가족만 10명이 넘었다. 바쁜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 하나님과 아내에게 감사한다.
장녀 원혜는 의사다. 남편과 미국에서 교민 교회를 섬기고 있다. 화가인 둘째 원숙은 1995년 유엔이 선정한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됐다. 원숙은 우리 가족이 흥천교회 지하에 살던 시절 벽에 낙서를 가장 많이 하던 아이다.
셋째이자 장남인 용진은 아프리카 말라위 한 교도소에서 선교사로 사역한다. 미 샘휴스턴주립대에서 범죄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한국 한동대에서 강의하다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미 웨스트민스터신학대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손봉호 박사, 홍정길 목사가 용진의 사역지를 다녀온 뒤 전했다. “아드님 참 훌륭하십니다. 교도소 재소자 전원이 새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새벽기도를 해요.” 아들이 참 자랑스럽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넷째 원화는 사업가다. 원화의 아들, 손자 동민은 나와 함께 산다. 대학을 졸업한 동민은 대기업에 취직했다. 나를 위해 운전도 하고 요리도 한다. 세대를 초월한 교제의 즐거움을 준다. 다섯째 원미, 여섯째 원주, 일곱째 원희는 각각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전공했다. 피아니스트 원미는 연주자로 산다. 원주는 미 볼티모어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다. 막내 원희는 미 피바디콘서바토리 프리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막내아들 용현은 정보기술(IT) 전문가다. 미국에서 일한다. 우리 가정형편에 아이들에게 따로 음악이나 미술을 가르칠 수 없었다. 다섯 딸이 모두 예술을 전공하게 된 것은 예배당을 집으로 알고 산 덕분인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평일 비어 있는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자식들에게 어려움이 없는 건 이들 가정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는 가족들을 위해 매년 만우절 이벤트를 벌인다. 지난해 4월 1일에는 둘째 딸의 친구 시인 문정희가 걸렸다. “이번에 강남 포스코 건물 로비에 갔더니 네 시가 엄청 크게 걸려 있더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정희는 이걸 확인하러 간 모양이다. 걸려 있을 리가 없다.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님. 제가 또 속았어요. 진짜 걸려 있는 줄 알고 왔는데(웃음).”
매년 이벤트를 하다 한 해는 건너 뛴 적이 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섭섭하다고 난리였다. 딸 원숙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무슨 모임에서든 상대가 누구이든 웃음을 나눠주신다. ‘재미’라는 유전자를 타고나신 것 같다. 또 에너지가 넘치신다. 항상 누군가를 돕고 살리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평생 축복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5) 양화진 선교기념관 건축비, 재벌 총수들 “우리가”
100주년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순교자기념관을 짓기 위해 법인체가 돼야 했다. 1984년 11월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순교자기념관 건립을 위해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경기도 용인 임야 33만여㎡를 기증했다. 양화진 묘지 증여도 이뤄졌다. 양화진 선교기념관 건립은 국내 기업인들의 협찬으로 이뤄졌다. 한경직 목사가 재벌 총수를 초청한 오찬 회동에서 기독교에서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을 직접 소개했다. 이어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 묘지에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더미가 가득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비쳤다. 한 목사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말했다. “목사님, 설명 알아들었습니다. 공사비가 얼마입니까?” 내가 “약 7억원입니다”라고 했다. 정 회장은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손가락 2개를 들어보였다.
1분도 되기 전에 비서가 봉투를 들고 왔다. 2억원이었다. 한 목사는 “고맙수다래”라면서 정 회장의 손을 잡았다. 지켜보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나도 2억원 하겠습니다”고 했다. 이어 박용학 최대섭 김인득 정태성 장치혁 회장, 최장근 장로가 참여했다. 7억원이 그 자리에서 해결됐다. 86년 선교기념관이 준공됐다.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이 급격히 식었다.
1884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숨진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2600여명. 이들 순교자를 위해 교회와 사람들을 찾아 모금을 시작했다. 모두 세 차례 전국 1만2000여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당시 내가 쓴 편지들을 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다. 87년 우여곡절 끝에 기념관 진입로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도로 입구에서 대형 암반이 발견됐다. 폭파하려 했으나 인근 군부대의 반대에 부닥쳤다.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진입로 마련이 필수였다. 머리를 싸매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당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 정서가 좋지 않았다. 한 목사가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게 바람한지도 고민되고, 부탁해서 안 될 때 뒷수습도 걱정됐다. 일단 시도했다.
연세대 교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규호 박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를 통해 약속을 잡았다. 한경직 목사는 청와대 앞 광화문에서 면담자와 방문 목적을 말했다. 한 목사는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 접견실에 도착했다. 전 대통령이 폭포수같이 열변을 토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물었다. “아,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순교자기념관 건립 의미를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황영시 장군에게 얘기하세요. 아니 내가 전화하지요. 목사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당장 해드려야지요.” 그날 이후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9년 11월 순교자기념관이 완공됐다. 전 대통령은 몇 년 뒤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은둔할 때 나는 그곳을 찾았다. 그는 고마워했다. 비록 그로 인해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그를 생각하면 인간적 연민이 있다.
나는 늘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중 한 곳이 정신지체아 특수시설 다니엘학교다. 55년 미국인 윌리 맥다니엘이 설립한 보육원이 전신이다. 92년 학교 운영 법인인 구령회 이사장이 된 나는 다니엘학교 부지 이전 임무를 맡았다. 새 부지 10여곳 모두 주민들이 반대했다. 혐오시설이라는 게 이유였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6) “조선족 청년들에 주님 사랑을” 연변과기대 설립 지원
다니엘학교 이전 장소가 서울 내곡동으로 확정됐다. 임대 계약도 이뤄졌다. 주민들은 구청에 여러 차례 반대 민원을 제기하고 이사장실을 찾아와 농성을 벌였다. 나는 정신지체아동들이 처한 상황과 우리들이 하는 일을 상세히 적은 장문의 호소문을 집집마다 발송했다. 주민 대표를 만나 간곡하게 설득했다. 요지부동이었다. 지친 나는 천마산기도원을 찾았다. ‘하나님, 이 사태를 해결할 이는 당신뿐입니다. 해결의 열쇠는 인간의 지혜가 아닐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온 다음 날 주민 대표들을 만났다. “부디 광장동에 있는 다니엘복지원을 한번만 방문해주십시오.” 주민대표들은 내 요청에 응했다. 며칠 뒤 그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부모도 하기 힘든 일들을 하고 계시더군요. 여러분이 말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사시는데, 우리는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습니다.” 드디어 구령회 법인과 주민대표, 구청 사이에 양해각서가 만들어졌다. 1997년 건물을 준공하고 이전을 마쳤다. 이후 나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하나님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운동이든 사회사업이든 내 소임이 사라지면 내가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을 작곡한 교회음악가 박재훈 목사와는 1960년대부터 교회음악협회에서 교류했다. 그러다 박 목사가 70년대 초 이민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95년쯤 박 목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주변 지인들을 모아 ‘박재훈 목사 후원회’를 조직했다. 십시일반 모아 96년부터 2년 동안 후원을 했다. ‘산골짝에 다람쥐’ ‘코끼리 아저씨’ 등 다수 동요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박 목사는 2012년 오페라 ‘손양원’을 작곡하기도 했다. 고령에도 여전히 작곡하는 박 목사의 열정이 감탄스럽다.
89년 가을 김진경 박사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와 그의 인연은 56년 일간지 기자로서 학보사 기자이던 그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준 게 다였다. “장로님, 제가 호텔에서 3주 동안 무전취식한 죄를 쓰게 됐어요. 중국 정부로부터 옌지(延吉) 지역에 대학 설립 허가를 받고 한국에 후원자들을 만나러 왔어요. 근데 소개해준다던 지인이 줄행랑을 쳐버렸네요.”
나는 하나님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예비한 이가 김 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북방 선교를 해야 한다는 말은 무성했지만 실효성 있는 방안은 전무했다. 재중동포가 모여 사는 옌지에 대학을 설립,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젊은이들을 교육한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조선족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북한에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선교입니까?”
나는 그와 함께 한경직 목사를 찾았다. 한 목사도 “이같이 좋은 기회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위해 예비한 섭리”라고 감격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국내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와 연결되면 한 목사에게 전화를 바꿔드렸다. 곽선희 옥한흠 홍정길 이종윤 목사 등이 적극 후원했다. 이를 기반으로 91년 연변조선족기술대학이 설립됐다. 2년 뒤 4년제 연변과기대가 됐다.
내 생활신조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행 20:35)는 성경 말씀이다. 자랑으로 비치진 않을까 우려된다. 남을 돕는 가운데 내게 늘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7) 1984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사회에 큰 반향
내가 믿음의 길에서 외롭지 않았던 것은 동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기독실업인회(CBMCK) 활동에 동참했다. 74년 실업인회를 법인으로 전환할 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이곳에서 황성수 박사를 비롯해 최창근 정태성 최태섭 김인득 등을 만났다. 특히 최 장로는 나를 친동생처럼 살뜰히 여기셨다. CBMCK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통일찬송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성경을 배포하는 국제기드온운동에는 72년부터 참여했다. 74년부터 매년 기드온 세계대회에 임원 자격으로 참석한다. 손봉호 박사는 70년대 중반 내가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할 때 평신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CBMCK 성경 공부 인도자로 바쁜 시간을 내줬다. 80년대 한국교회 윤리회복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손 박사는 84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주창했다.
나는 이 운동 발기인 대표였다.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다. (중략) 움켜쥐었던 것을 풀어놓고 내려놓아 나눔의 희락에 참여한다.’ 이 운동은 재산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누룩처럼 소리 없이 번지도록 한다는 강령 아래 무조직 무홍보 무사업 무회비 무회칙 5대 무(無)원칙으로 진행했다.
이 운동은 한국 사회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20년 동안 1000여명이 동참했다. 나는 손 박사가 87년 창립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회원으로도 참여했다. 이듬해 나는 한국장로회총연합회 8대 대표회장이 됐다. 이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조향록 정진경 유호준 목사 등 한국 보수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협의체를 구상했다. 여러 사회 시책에 교회의 불협화음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운동 취지에 공감해 평신도로 적극 참여했다. 한 목사가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다.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설립됐다. 나는 1대 박맹술, 2대 정진경, 3대 이성택 목사를 보좌하는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80년 말 국내에서는 쌀 풍작으로 쌀값이 폭락했다. 정부가 쌀 소비 진작책을 마련할 때다. 예수원 대천덕 신부가 한 목사에게 쌀 소비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90년 2월 한기총 산하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를 설치했다. 3월부터 소년소녀가장 사회복지단체 및 장애인 수재민에게 사랑의 쌀을 전달했다. 북한 주민에게도 전달했다. 7월부터 필리핀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인도 사할린 몽골 수단 에티오피아 등에 전달했다. 이 운동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 한국 교회의 위상을 알리고 선교의 문을 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기총 설립 초기부터 외부에서는 관변 단체라는 시비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선교에 힘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몇 년 사이 한기총이 교단 정치의 중심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회장 선거 비리로 몸살을 앓았다. 임원 일부가 권력 주변을 맴돈다는 소문도 있다. 아마 예수가 보신다면 “독사의 자식들아”(마 3:7)라며 모두 쓸어버릴지 모른다. 교회는 한국을 이끌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95년부터 대통령을 위해 매월 25일 기도하는 모임 ‘25기도모임’에 참여했다.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을 위해 처음 시작했다. 국민들이 김 대통령에게 실망한 듯했다. 크리스천 대통령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우리 몫은 기도와 간구다. 주관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경래 (18) 4년여 ‘양화진’ 소송… 피끓는 법정 진술로 지켜내
1986년 6월 한창 선교기념관을 짓고 있을 때 유니온교회가 100주년협의회에 협약제안서를 보내왔다. ‘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양화진묘지에 대한 위탁 사용권을 유니온교회에 부여한다. 교회는 선교기념관과 묘지 유지·관리 책임을 진다.’ 유니온교회는 선교사 후손인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주축이 돼 설립한 교회다. 협의회는 한경직 목사의 권유로 관리권을 넘겼다.
2000년 4월 한경직 목사가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하루하루 나그네 길이다. 이 세상에 좋은 씨를 많이 뿌려라.’ 유언이었다. 한 목사가 이사장이었기 때문에 100주년협의회가 교회 연합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소탈한 그는 내가 운전하면 조수석에 앉아 말벗하기를 좋아했다. 강원용 정진경 강병훈 목사가 뒤를 이어 이사장이 됐다. 나는 한 목사 별세 후에도 사무총장과 이사로 일했다. 이희연 사무총장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97년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 일대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협의회는 양화진 성지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강원용 목사가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정부 관계자는 양화진 성지화가 기독교만을 위한 일로 비칠 것을 우려했다. 우리는 선교사들의 묘가 있는 양화진을 역사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정부 측에 계속 전달했다.
유니온교회가 양화진 위탁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협의회는 2003년 9월 양화진묘지와 순교자기념관 관리를 전담할 교회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몇 사람이 이재철 목사를 추천했다. 그는 86년부터 양화진묘지 바로 옆 양화진길에 살고 있었다. 교단을 넘어 가장 신망 있는 교역자로 통하기도 했다. 정진경 목사와 함께 두 번 방문한 끝에 이 목사가 담임 목사직을 수락했다. 이 목사는 창립예배에서 2005년 7월 “제 역할을 ‘양화진 묘지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앙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복음 안에서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양화진 묘에는 선교사와 가족 등 400여명이 잠들어 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을 성역화하고 한국교회 200주년을 내다보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나는 그제야 ‘이제야 한경직 목사님 뵐 낯이 있겠구나’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2007년 양화진 사용권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전이 시작됐다. 경성구미인묘지회와 유니온교회가 소송 주체였다. 나는 법정에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판사님, 저들은 한국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는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기 위해 선교지에 옵니다.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땅 내놓으라, 집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이들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법원은 결국 우리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지난해 2월 28일 “경성구미인묘지회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고 선고했다. 4년3개월 동안 이어졌던 민사소송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토했다. 양화진 묘역을 자주 걷는다. 자주 머무는 묘지는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의 묘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힐 때 조선 땅에는 많은 꽃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제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던 미 루비 켄드릭(1883∼1908) 선교사 묘지도 있다. 여기 남은 내가 더 해야 할 일은 뭘까.
***[역경의 열매] 김경래 (19·끝) “하나님 사랑 나눈 지인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올해는 한국기독교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다. 한경직 목사와 함께 100주년을 준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더해졌다. 한국 교회의 분열과 반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벧전 4:8)고 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다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교단을 초월해 떡을 나누고 비빔밥을 먹는 은혜로운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의 사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함께 사역하길 바란다. 선교사들이 묻힌 이 터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용광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허락한다면 양화진에 교단 구분 없는 원로들의 ‘사랑방’을 만들고 싶다. 가능하기를.
빨리 통일이 되길 바란다. 북한 지하 교회의 영성은 남한 교회를 능가할 것이다. 북한은 정부 수립 전후 30만∼50만명의 순교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성은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이 영성에 뿌리 내린 북한 교회가 남한 교회를 영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지하교회에서 “주여 어서 오소서”라며 울부짖을 것이다. 우리는 안락에 기대어 영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칠순을 넘기자 선물이 예고 없이 도착했다. 이별도 예고 없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2년 1월 나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고 통지했다. 1980년 신군부 등장 후 강제 해고됐던 나는 비로소 명예를 회복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해선 안 된다는 강연이 빌미였다. 당시 나의 해직사유는 ‘부조리 언론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2008년 3월 내 곁을 떠났다. 아내 차은희 권사는 급성폐렴으로 누운 지 사흘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믿는 남편 주시고 그런 남편과 사랑하며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자식 주셔서 감사하고 그 자식들 모두 하나님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의 마지막 기도였다.
유언은 “예수 잘 믿어라”였다. 아내의 장례식은 축제처럼 진행됐다. 찬양은 천국으로 배웅하는 환송가 같았다. 조화는 화환처럼 빛났다. 아내의 표정도 평화로웠다. 나는 장례식 후 아내의 사진을 거실 벽에 걸었다. 사진 밑에 ‘좋은 사람’이라는 글을 붙였다. 빨간 장미 한 송이도 달았다. 나는 아내처럼 기쁜 마음으로 천국에 가고 싶다.
지난해 4월 나는 회고록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출판기념회를 서울 양화진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열었다. 초라한 나의 책 출판을 축하하러 500명 가까이 몰려왔다. 나는 “예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감사하다. 믿음의 동역자들로부터 신앙을 배운 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이어령 박사는 “내가 뒤늦게 예수를 믿게 된 데는 김 장로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고 이동원 장관은 김 장로가 여러 번 청탁을 했는데 자기를 위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며 “김 장로같이 좋은 사람을 만난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과찬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자랑만 늘어놓은 거 같아 송구해진다. 내가 겪은 시절을 후대와 공유하고자 기록을 남긴다. 내 부탁에 귀한 시간을 내주고 지갑을 열어준 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