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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에서 그레데로 가다
행 27:1-8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행 27:1-8 / [바울의 로마행] 드디어 우리를 배에 태워 이달리야로 출발할 준비가 다 되자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은 아구사도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율리오라는 친위대의 장교에게 인계되었다. 2) 우리는 아시아 연안으로 항해하려 하는 아드리뭇데노에서 온 배에 올랐다. 우리 일행 중에는 데살로니가에서 온 헬라 사람 아리스다고도 같이 있었다. 3) 다음날 우리가 시돈에 닿았을 때에 율리오는 바울에게 매우 친절을 베풀며, 배에서 내려 친구를 방문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4) 그러나 시돈을 출항한 우리는 역풍을 만났다. 그래서 항로를 벗어나 구브로 북쪽 연안을 따라 섬을 빠져 나가야 하였다. 5) 그러고 나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연안을 항해하여 루기아 지방의 무라에 들어섰다. 6) 거기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이달리야로 가는 애굽 배를 발견한 친위대 장교는 우리를 그 배에 태웠다. 7-8) 며칠 동안 고된 항해를 계속하던 우리는 니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심한 바람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살모네 항구 쪽으로 돌아 그 앞바다를 지나 그레데 섬을 따라서 항해하였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싸우며 섬의 남쪽 해안을 천천히 통과하여 라새아시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으로 간신히 들어갔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로마를 향해 떠나는 바울 일행의 가이사랴에서 그레데까지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해할 새(1-2)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행 25:6-12). 바울은 자신의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로마 황제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죄수들을 이송하는 그 배의 책임자는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소아시아 무시아 지방의 중요한 무역항인 아드라뭇데노를 향하는 배를 탔는데 율리오는 이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로마로 가는 큰 배로 바꿔 탈 계획이었습니다(6). 그 배에는 누가와 더불어 바울의 시중을 들었던 아리스다고도 함께 탔습니다.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3)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이튿날 베니게의 항구도시인 시돈에 정박했습니다. 시돈에 정박했을 때에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바울로 하여금 시돈에 있는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도 하였습니다. 당시 시돈에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계속되는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의 성도들이 바울을 환대했을 것입니다(행 11:19). 이와 같은 율리오의 친절과 시돈의 성도들이 베푼 호의는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맞바람을 피하여(4-8) 누가는 바울 일행이 탄 배가 시돈에서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따라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무라 시로 나아갔다고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무라(Myra)는 애굽과 로마 사이를 왕래하는 선박들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여기서 율리오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바람이 여의치 않아 천천히 항해하여 니도와 살모네 앞 바다를 항해하여 겨우 그레데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적용: 바울 일행은 로마까지의 긴 여행에 율리오의 친절과 시돈 성도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어려울 때 주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항해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삶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거친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 하기도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한 줄기 빛같이 소망이 되는 것 그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함께하심을 믿고 그 분의 생각과 행함을 따라감으로 우리의 항해는 그 어떤 어려운 항해를 뚫고 나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7:1
우리 - 본서에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본문이 네 군데 있는데(16 :10-17;20 : 5-15;21 : 1-18), 이곳이 마지막 네번째이다(27 : 1;28 : 16). 그러니까본문의 '우리'는 21 : 1-18 이후 2년 만에 처음 나오는 셈이다. 이는 가이사랴에서의2년간(24 : 27)은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상태였고 또한 기록의 초점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집중되었으므로 '우리' 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엇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누가가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볼 수없다(Bruce). 그런데 이제 바울이 기이샤라를 떠나 로마로 이송되는 시점에서 누가와아리스다고가 다시 합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누가는 다시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한것이다. 물론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총독의 허락이있어야 했을 것이다. 다른 죄수 - 본문에는 죄수들의 죄질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들이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로 로마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의 싸움 대상으로보내어지는 것이었다고 본다(Lenski, Ramsay, Robertson), 아구사도대 - 아구사도대(Augustan Cohort)는 당시 로마의 한 군대 조직인 듯하다(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사제도' 참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아그립바 왕의 친위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공동번역, 표준성경, NIV, Holtzmann)이다. (2) 사마리아의 군대이다. 이는 아구사도대의 헬라어 '스페이레스 세바스테스'의 '세바스테스'가 사마리아의 수도 '세바스토스'와 유사한 점에 착안한 것이다(Alford). (3) 로마의 황제와 지방의 주둔군 사이의연락 업무를 맡은 부대로서, '프르멘타리'(frummentarii)라 불리기도 했다(Ramsay,Mommsen). 바울 시대에는 이러한 업무를 수행한 군인들을 '스페쿨라토레스'(speculatores)라고 일컬었던 것 같다(Longenecker, Lenski, Bruce). 대부분의 학자들은 (1)과 (3)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아구사도대'는 로마 황제의 직할 부대로서 전방 부대를 지도, 통제, 연락하는 '친위대'라고 할 수 있다. 백부장 율리오 - 이 사람은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이송하는 아구사도대의 인솔자로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여기서 '율리오' (*' ,율리오스)는 가문명(家問名)일 뿐이다.
=====27:2
아드라뭇데노 배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아드라뭇데노라는 항구 도시에서 온 배인데, 아시아 지방에서 서방을 오가는 무역선인 것같다(Blaiklock) . 아드라뭇테노는소아시아 북서해안에 위치한 무시아의 항구 도시이며 레스보스(Lesbos) 섬 맞은편에위치해 있다. 오늘날의 이름은 '아드라미티'(Adramiti) 혹은 '에드라미트'(Edramit)이다(Whitelaw). 본장 강해에 있는 지도를 참조하라. 이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해안올 따라 운항하는 비교적 적은 규모의 배였므로 그것을 타고 지중해를 건널 수는 없었을것이다. 따라서 중간 어디에선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큰 배로 바뀌탈계획이었을 것이다. 가장좋은 방법은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로로마로 향하는 큰 배를 타는 것이었으나 때 맞추어 그런 배틀 만나지 못한 듯하다. 아리스다고 -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그와 동행한 자는 누가 말고도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더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누가는 의사로,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시중드는 자로 함께 승선(乘船)하였을 것이다'라고주장한다. 혹자는, 이 두 사람이 바울의 노예로 자처하여 동행함으로써 백부장 율리오의 눈에 바울올 중요한 인물로 보이게끔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amsay). 아무튼 아리키스다고는 몬 24 절과 골 4: 10에서바울의 동역자요 함께 갇힌 자로 재등장하는데, 이 두 서신이 로마 감옥에서 씌어진것이라고 볼 때 아리스다고가 바울의 로마 여행에 계속 동행했음은 분명하다.
=====27:3
시돈에 대니 - 시리아 해안의 조류(潮流)는 북쪽으로 흐르는데, 바울 일행을 태운배는 이 조류를 따라 약 23시간 가량 걸려 시돈에 도착한 것이다(Breusing). 친구들에게다...허락하더니 - 본절과 43절은 백부장 율리오의 특별한 친절을 보여 준다. 아마 베스도는 바울을 율리오에게 넘겨주면서 다른 죄수들처럼 다루지 말고관대하게 대우하도륵 특별히 지시을 하였을 것이고, 율리오도 바울의 언행과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누가와 아리스다고)의 극진한 시중을 보고, 결코 함부로 대할 사람이아니라고 느꼈을것이다. 아마 배는 짐을 내리거나 싣는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율리오는 이 시간 동안에 바울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여기서 친구들은 스데반의 순교 후에 각지로 흩어진(8 : 1) 성도들 가운데 시돈에 자리잡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하르낙(Harnack)에의하면 본문의 '친구'라는 명칭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던 칭호였다고 한다(요삼 15절). 황제앞에서의 재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고,또한 항해를 하는 중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한 여정(旅程) 가운데서도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27:4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출항하여 구브로의 남서 해안을 지나 아드라뭇데노로 직항하고자 하였으나 동쪽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서풍을 만나 더 이상 직진할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구브로 섬 동쪽 해협을 따라 우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7:5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 배는 구브로를 서쪽에 두고 북상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을 지나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이 항해는 그 해안을 따라 흐르는 해류와밤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부는 대륙성 기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 빠른속도는 아니었을 이 항해는 그럭저럭 소아시아의 가장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루기아의항구 무라에 도착하였다. 이때 소요된 항해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서방 사본에 의하면 14일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무라 항은 애굽에서 오는 곡물을 로마로 보내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무라 성읍은 항구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2 Km거리에 있었다. 바울 일행을 태운 아드라뭇데노 배는 가이사랴에서 무라까지 항해하였고, 무라에서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내려주고 계속해서 아드라뭇데노로 향했을 것이다(지도 참조).
=====27:6
이달리야로...알렉산드리아 배 - '이달리야' (* ' , 이탈리아)는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알렉산드리아 배는곡물 운반선이었을 것이다. 당시 애굽은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지(穀創地)였고, 거기서 생산되는 곡물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곡물선을 통해 로마로 운송되었다.곡물선들은 알렉산드리아 항을 떠나, 그레데 남방을 거쳐 로마로 직접 항해하는 것이빨랐지만, 대부분의 선박들은 풍향 사정 때문에 무라 항을거쳐가는 것이 상례였다.바울 일행이 올라탄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전형적인 곡물운반선이었지만(38절), 여객선 역할도 하며 무려 276명이나 되는 사람을 태울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배들이 많았는데, 개인기업의 소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로마 정부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정부에 대해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바울 일행을 배에 태우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27:7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 무라를 출발한 배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다가 강한 북서풍을 만나 매우 어려운 항해 끝에 겨우 니도에 이르렀다. '간신히'의헬라어 '몰리스'(* )는 '수고', '고생'을 뜻하는 '몰로스'(* )에서 온 말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항해하여 니도에 다다랐음을 말해준다. 니도는 소아시아 서남단의 도리스 반도 서남쪽 끝에 있는 도시로 무라에서 약 223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순풍을 등지고 항해할 경우 이틀 정도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정도의 거리를 여러 날 걸려 힘겹게 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항해였는가를짐작케 한다. 니도는 아시아 지역의 자유 도시였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여 에게해를 가로질러 가려는 배들이 서쪽으로 항해하던 중 마지막으로 기항(寄港)하는 항구였다. 그런만큼 니도항의 규모는 제법 컸고 정박하는 배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잘갖추어져 있었다.
그레데 - 무라를 출발한 배는 니도를 경유하여 서쪽 으로 항해를 계속하려 했다.그래서, 그레데 섬을 남쪽으로 바라보며 에게해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역풍을 받지 않고 순풍만을 의지할수 있을 때 가능한 항로였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니도에 이르렀을 때는 북서풍이 너무 강하여 더 이상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할 수가없었다. 이제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양자 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주, 니도에 머물면서 순풍이 불기틀 기다리던지 아니면 본문에서처럼 니도에서 남하하여 살모네를 지나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하는 것이다. 그레데 섬은 그리이스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Km정도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큰 섬들 가운데 대표적인 섬으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섬의 동서 거리는 약 255Km 정도이고 남북의 거리는 10Km에서 50Km에 이르는 좁고 길쭉한 섬이다. 좁고 길쭉한섬이다.좁고 길다란 이 섬을 방파제 삼아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북서풍이 상당히 많이 차단되므로 항해는 계속될 수 있었다. 딛 1 : 5에 의하면 그레데 섬에도 교회가 있었고 디도가 그곳에 파송되어 사역을 한 적도 있다. 한편 본문의 살모네는 그레데 섬의 동쪽 끝의 돌출부에 위치해 있었다.
=====27:8
미항...라새아 성 - '미항'(* , 칼루스 리메나스)은말 그대로'아름다운 항구'라는 뜻인데 이곳은 지금도 동일한 뜻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리메오나스 칼로우스, Limeonas Kalous). 그런데, '아름다운'(fair) 이라는 말은이 항구의 좋지 않은 특성 때문에(12절) 비꼬는 식으로 불리어진 것 같다(Whitelaw).이 미항은 그레테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남해안의 자그마한 만(灣)만으로 오래도록머물 만한 곳은 못되나 잠시 바람을 피할 수는있었다. 그레데섬이 바람막이 역활을 해주었지만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 준 것은 아니어서 항해는 결코 쉽지가 않았고 따라서미항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본절에서도 항해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7절). '라새아 성'은 이곳 '미항' 에서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 설 교 >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
번영익 목사 / 행 27장 1~9절
여러분! 바울이 드디어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어떤 곳입니까 ? 로마는 15세기 초 루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서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죽어서라도 로마에 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당시의 로마는 온 유럽과 소아시아를 모두 점령하고 지배하는 큰 제국이라ㅛ습니다.
= 로마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하면 로마는 역사적으로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으로 황폐가 되었으며 찬란했던 루네상스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16세기말에 이르러 교황 식토스 5세에 의하여 로마가 다시 어느 정도 재건되기도 했으나 1797년에 다시 나폴레옹 1세에 의하여 점령을 당하는 수난 속에서 로마는 서서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 !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약자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는 과거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 이였는데 오늘 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요 약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로마의 역사를 보면서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국이 언제까지 큰 나라와 강한 나라라는 명성을 지킬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 지나치게 비약시킨 말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또 이민을 가야 하는데 어쩌면 중국으로, 인도로, 한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이 미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 로마가 망한 것은 경제공황이 와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넉넉함으로 인하여 죄악이 넘치게 될 때 로마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 여러분 !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했던 것은 당시에 찬란한 로마의 거리가 보고 싶어서나 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로마를 가기를 그렇게도 소원했던 것은 다메섹에서 받은 사명 때문인 것입니다. 즉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다메섹의 사명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상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가이사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불안한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그 교훈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
1, 자진해서 가는 길.
= 여러분 ! (행26:31-32)에 보면 바울을 심문하던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증언을 들은 후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거라> 고 했고, 또 (32절)에 보면 <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 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2.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다 하니라 > 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말씀은 곧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누구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진해서 가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는 죄가 없다, 라는 판정내렸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만일 바울이 가이사 에게 한 상소를 취소한다면 바울은 아마 로마로 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상소를 취소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자진해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 바울이 왜 자진해서 로마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가 로마로 가기를 소원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유대인들이나 로마 병들에 의하여 강제로 지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스스로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마26:5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잡으러 온 대 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검으로 베어 떨어뜨릴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리요 하시더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 여러분 ! 이런 말씀들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지진 십자가처럼 보이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스스로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 바울이 예수님과 닮은 것이 무엇입니까 ? 바울이 스스로 자진해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과 또 복음을 위해서는 사실이 예수님과 매우 닮은 점입니다.
= 여러분 ! 바울이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여러분들도 한번 예수님과 바울을 닮아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좀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자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로마로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하나님 그런 자에게 축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벧전5:2)에 보면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자원하므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 >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서 말씀하시기를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 고 하셨습니다.
= 여러분 !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봉사가 어떤 봉사입니까 ? 아주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자진해서 즐거움으로 하는 일입니다. 억지로나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과 같이 내가 로마로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자진해서 로마로 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죄인으로 가는 길.
= 본문(1절)에 보면 < 우리의 배 타고 이탈리아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즐거운 여행길이 아니라, 죄인의 몸으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우리가 사는 이 로스앤젤리스 국제공항은 (LAX) 전 세계에서 한국인의 왕래가 제일 많은 공항입니다. 하루에도 수 천 명이 들어오고 떠나가는 관문입니다. 공항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떠나는 사람들의 사연도 각각 달라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만에 떠나는 모국 방문으로 기대와 기쁨이 해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여러분 ! 우리는 종종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는 기사들이 있습니다. 즉 한국에서 죄를 짓고 미국으로 도피하여 살다가 한미 범인 인도조약에 의하여 붙들려 수갑을 차고 죄인의 몸으로 수사관들에게 끌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이들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지만 너무도 형편이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 ! 내용은 다르겠지만 바울이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은 바로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 바울은 지금 죄인의 몸으로 결박을 당하여 가는 길입니다. 바울이 지금 타고 가는 배 안에는 바울 외에 로마로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가는 다른 죄수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닮은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입니까 ? 바울도 예수님과 같이 죄 없는 자가 죄인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울은 가이사라에서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죄 없는 자라는 판결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죄인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한번 바울과 같이 죄인 되어 보자)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나 십자가를 지고 죄인 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 바울이 죄가 없었으나 죄인의 몸으로 로마를 갔기에 온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 됐으며 로마에 루네상스도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여러분 ! 우리가 왜 서로 싸우는지 아십니까? 내가 죄인이 아니고 네가 죄인이라는 다툼 때문에 부부가 싸우고, 형제가 싸우며, 이웃과 싸우는 것입니다. 즉 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주장 때문에 싸움은 오늘도 끝이 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과 같이, 바울과 같이, 내가 한번 죄인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4. =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
3, 풍랑이 있는 길.
= 본문(7절)에 보면 <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이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이 그 연안을 지나 미향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세아 성에 가깝더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풍랑이 너무 많아서 고해였다는 말씀입니다.
= 다음 주일에 나오는 말씀이지만 바울은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라 라는 태풍을 만나므로 배가 파선되는 수난을 격게 됩니다. 당시에 바울이 로마로 가는 지중해에는 바다가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면서 생기는 파도가 있어서 파선하는 배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로마로 가던 때는 계절적으로 풍랑이 아주 자주 일어나는 9월-11월인 가을철 이였다고 합니다.
= 여러분 ! 종종 하나님께 왜 ? 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하나님 !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왜 ? 저렇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왜 ?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왜 ? 고난의 풍랑이 일어납니까? 라는 질문들 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제게 대답해 주시기를 ( 그게 주님이 가신 길이요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니라 ) 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 여러분 !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왜 고난의 풍랑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 하나님께서 풍랑을 인하여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높이시려고 풍랑을 주신 것입니다.
배안에 있는 사람들이 초장에는 바울을 무시하고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지만 풍랑을 인하여 배가 파선 되므로 바울의 말씀의 권위가 높아지고 배가 파선하여 메리데 라는 섬에 오르게 되므로 그 섬이 짐승으로부터 추장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 우리 한번 이렇게 띠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하! 그래서 풍랑을 주셨구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의롭게 살려고 할 때도 풍랑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주시는가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만난 풍랑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과 같이 로마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 억지로나 강제로 가지 마시고 스스로 자진해서 가 보시가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죄인이 되시므로 겸손해 지시며 평화를 이루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로마로 가는 길에 풍랑이나 고난이 있을지라도 바울을 생각 하시면서 참고 인내하시므로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신성종 목사 / 행 27장 1~8절
한국에서의 IMF사태로 인해서 엘에이의 교회들이 비상이 걸렸을 때였습니다. 특히 오랜지 카운티에 있는 교회들이 심합니다.
주재원들이 많은 교회들은 더욱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에서 송금이 잘 안되니까 생활이 어려워지고, 자연히 헌금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들도 헌금이 줄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했던 미주성산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위기가 하나님의 기적의 기회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전화위복이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때 IMF를 뭐라고 해석했는지 아십니까?
IM failed. IM fired. IM finished. 라고 했지만 저는 IM fine. IM futurist. 되리라고 믿고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그 위기는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 있어서 구금상태에 있고, 게다가 로마로 가게 되어 바다와 풍랑의 위험이 찾아왔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씩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제2의 IMF라고 하는 위기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돌보고 계십니까?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의 방법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꼭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1. [불신자인 백부장 율리오를 통해서]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왕도 아닌데 이렇게 훈련된 많은 로마병정들이 호위하는 것부터가 이례적입니다. 특별히 43절에 보면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불신자까지 동원하여 바울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믿습니까?
이것을 보면 심지어 불신자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페르샤의 고레스 왕을 통해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신 것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있는 바울의 동행자로 아리스다고를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로 위로해주기 위해서였고, 둘째로 협력하기 위해서였고, 셋째로 봉사를 하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넷째는 바울의 중보기도자로 동행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리스다고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세 번째 선교를 할 때 동행하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로마 감옥에 갈 때 동행케 하신 것입니다.
당시 바울에게는 두 동행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외적 동행자로서 아리스다고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동행자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의 외적 동행자인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의 마게도냐 출신으로, 에배소 소요 때 바울과 함께 투옥했던 사람입니다.
행 19:29절에 보면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도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행 27:2절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 때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는 함께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우리들에게도 외적인 동행자와 내적인 동행자가 잇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 직후 모스크바의 어느 깊숙한 지하실에서 비밀히 예배를 드리다가 몇 사람들이 잡혀왔다. 모두 다 비밀경찰 사무실로 끌려와서 이름과 경력 등에 대해 문초를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이상해서 계속 조사를 해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밝혀졌다. 비밀 신자들은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한 약속을 그대로 믿고, 모인 숫자를 계산할 때 하나를 더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항상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도 두 도우심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안에서 동행해주시고, 또 주변의 사람들과 심지어 환경까지 도와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시편 23편 6절에 보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두 동행자가 항상 함께 하면서 도와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역경에 처해있다고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후원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더욱 놀라운 것은 4절에 보면 [바람(자연환경)을 통해서] 직항로를 피하게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보호입니까?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미국 케터키주 포트 낙스의 지하에는 미합중국의 거대한 금보관소가 있다. 강철과 시멘트로 된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고, 강철로 된 담과 철망으로 둘러져있다. 또한 군인들이 밤낮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안전도는 99.99%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또, 바울의 항해 중에는 자주 섬에 들리게 함으로 많은 전도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까지 섭리하시고, 이용하셔서 그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날씨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연환경도 하나님의 섭리밖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의 물결까지 지배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할 때 바람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천년 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연환경까지도 지배하고 계십니다.
저는 얼마 전 월요일 투모로우(원제목은 The day after Tomorrow)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환경들을 오염시키므로 인해서 온난화가 생기고, 그 결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또 다른 빙하시대가 온다는 경고의 영화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덥고, 눈도 더 오고 있어서 지구가 병이 든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4. 디도서를 보면(딛1:5절) 후에 이곳에(8절, 미항, 즉 그레데 섬의 남단) [장로들을 세울 준비까지] 미리 하셨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로 가는 여행의 지점까지 하나님은 섭리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의 스케줄까지 다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저도 저의 스케줄을 세우고 미래를 위해서 준비를 하지만 어떤 때는 그것이 제게 해가 될 때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준비는 하되 하나님의 섭리를 더 의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그러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역경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1. 먼저 기도부터 합시다.
■ 여러해 전에 김영길 한동 대학교 총장의 간증(미주 성산교회에서). 그가 재정적인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모략까지 당해서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했다는 내용 입니다. 감사한 것은 저는 지금까지 기도해서 응답이 안 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때로는 일기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밖에서 행사를 준비는 했는데 갑자기 일기예보로는 비가 온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비 오는 시간을 늦추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 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했습니다.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 여의도에서 빌 부라이트를 강사로 제가 통역으로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분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비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갑자기 비가 그치면서 십자가형의 무지개가 하늘에 섰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연 환경을 통해서도 돕고 계십니다. 아멘.
기도는 모든 것을 이루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기도부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 풍성하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기도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기면 됩니다.
염려와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내가 지고 갈려는 생각을 가집니다.
■ 간 하배 선교사와 시골 아줌마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것이 안스러워서 자기의 찝 차에 앉혀주었다. 그러나 짐을 머리에 이기 있어서 내려놓으라고 하니 “제가 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놔 유, 그냥 괜찮아 유” 라고 말했습니다.
3. 끝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좀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방해하고 막는 경우가 많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여러움에 처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셔서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맡기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할 뿐만 아니라 더 풍성케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행 27:1-26 / 안양준 목사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는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도시가 바로 로마입니다. 그래서 롬 1:10에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결국 기도가 이뤄져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유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안타깝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로마로 가던 중에도 유라굴로라는 광풍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열나흘 동안 삶과 죽음의 기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보여준 바울의 모습은 믿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보여줍니다.
1. 선장의 말을 더 믿더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탄 배에 광풍이 밀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성도님들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울은 미항에서 배가 출발하기 전 백부장에게 항해를 하면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있을 것이라 권면했습니다.
10절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항해를 만류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자신이 탄 배가 세 번이나 파선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금식하는 절기인 대속죄일이 지나면 북동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항해를 말린 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래서 항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경험은 아주 중요한 지식입니다. 선장과 선주는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경험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에는 결국 파탄을 가져올 뿐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죄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듣기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과 경험을 더 믿고 출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크게 두 가지로 철학과 과학을 들 수가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철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고, 과학은 인간의 물질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란 헬라어로 ‘필로소피아’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이란 말은 헤로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에 보면 쏠론이란 사람이 처음 쓰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신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혜요 곧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때에 와서는 철학을 인간의 문제에만 고정시켜서 철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하는 두가지 문제를 푸는 학문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결국 철학은 인간의 정신세계 중에서도 내세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인간의 영원한 내세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의 현실적인 문제부터 내세의 문제까지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 선장과 선주, 그리고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죄수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사히 로마로 호송해야 할 목적이 있었고, 선장과 선주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적이요 물질적인 이들의 목적과는 다른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19:21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바울의 계획이 쓰여져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의 최종 목표가 로마입니다.
로마는 당시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상업의 중심지요 세계의 중심도시였고 모든 길이 로마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가는 모습으로 비치겠지만 아닙니다. 바울은 마음 속에 품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23:11을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마음만 먹으면 자유를 얻고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큰 곤욕을 당하고, 그 차가운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명예와 권력보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 죄인의 사슬에 매여서 로마로 가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산다고 해도 이런 시련이나 고달픔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목표가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삶의 진정한 목표가 세워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다해도 그 삶은 실패작입니다. 목표없이 습관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뚜렷합니까?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참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제라도 세상적인 삶의 목표는 버리고, 아름다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두고 신앙생활을 재정리하시기 바랍니다.
2. 유라굴로는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환란이 올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시련과 환란 중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내 곁에 서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헬라어 로 ‘파레스테 가르모’라는 말로 ‘내 옆에서 나를 도와 주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시련을 당하고 고달픔을 당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 16:13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입니다. 쉽게 해석하면 ‘곁에 계시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막대기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성경은 “내가 너희를 결단코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믿은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이 항구는 겨울에 지내기에 좋은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불편한 항구에서 겨울을 지내느니 차라리 더 항해하여 뵈닉스와 같은 항구에서 편하게 겨울을 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다른 이유의 하나는 그렇게 항해하다보니 남풍이 불어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13절을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들이 득의한 줄 알고”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쩌면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는 사도 바울을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봐라, 이렇게 날씨가 좋고 바람까지 이렇게 순하게 불어주는데, 미항에 있었으면 어쩔 뻔하였느냐?”고 저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달콤한 즐거움과 쾌락을 맛볼 것에 들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들은 바로 다음 순간을 알지 못합니다. 14절을 보면 ‘얼마 못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이 가면 얼마를 갑니까? 저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휘말리고 만 것입니다. ‘유라굴로’는 북동에서 불어오는 지중해의 폭풍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배의 기구들을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이 유라굴로와 같은 강력한 돌풍을 종종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슬퍼하며 하나님께 나에게 돌풍을 주신 이유를 따집니다. 유라굴로가 바울과 함께 승선한 사람의 목숨을 풍전등화로 만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돌풍은 우리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풍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에게는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불필요한 것을 주시거나 필요한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라굴로 앞에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과도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돌풍’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가 강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더욱 착각을 부채질하는듯 합니다. 그러나 직업적인 뱃사람이었던 선장도 ‘돌풍’을 예고하지 못했고, 또 풍랑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유라굴로’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과신을 부수는 망치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높아진 교만과 자기 의를 부수시기 위해 유라굴로를 주십니다. 히 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유라굴로를 통해서 인간의 나약함을 뼈가 저리도록 확인시켜 주십니다.
3. 유라굴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14일간이나 풍랑 속에서 정신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순간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21절 이하에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도 바울은 사나운 돌풍 속에서도 구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바울은 이 구원의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치않고 붙든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믿음대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 45: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한 번 하신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유라굴로는 바울의 권면을 들었으면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유라굴로를 만났을 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곁에 계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은 용기를 주셨습니다. 24절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하십니다.
광풍을 만났을 때 바울에게 ‘두려워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인생의 시련을 만날 때, 인생의 광풍이 밀려들 때 바울에게 용기를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는 말씀에서 로마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불행을 고치는 약은 희망 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면 불행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한 희망을 심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자는 힘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내 곁에서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경신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에 빠질 때도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생의 유라굴로를 헤쳐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드디어 로마로 향하는 바울
사도행전 27:1-12 / 서금석 목사
한 부인이 꿈속에서 새로 생긴 가게의 계산대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부인이 물었습니다. "여기서 무얼 팔고 계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자 부인은 자기가 들은 말이 거의 믿기지 않았지만, 부인은 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와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주세요"하고 부인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또 생각이 나서 덧붙여 말씀드렸습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요."
하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해를 한 것 같구나, 얘야. 우리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는단다. 씨앗만 팔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열매를 구하고 있습니까? 씨앗을 구하고 있습니까? 씨앗을 구하는 사람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분의 일에 쓰임받는 씨앗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번의 재판을 모두 마친 바울은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에 따라 드디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로써 "너는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는 약속의 말씀이 드디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처지를 보세요. 로마로 가는 바울은 전도자의 신분이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했는지도 모릅니다.
1-8절은 바울의 제4차 전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의 항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항로를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누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본문은 누가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1절에 나오는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동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해에 의사인 누가가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둘째, 백부장 율리오. 율리오는 아구사도대(the Augustan Cohort)의 백부장으로써 바울을 로마가지 호송하여야 할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부대는 황제와 그의 군대 사이에 통신을 담당하며 죄수를 로마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셋째, "아드라뭇데노(Adramyttium) 배" 이 배는 아드라뭇데노 성에서 온 상선으로써 바울과 그의 일생이 승선한 배였습니다. 이 상선은 연안을 항해하면서 아시아 각 도의 여러 항구에 머물를 예정이었는데, 율리오는 이 배를 타고 가다가 적당한 연안에서 로마로 가는 큰 배로 갈아탈 계획이었습니다.
넷째, "아리스다고" - 그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으로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아데미 여신의 신봉자들이 에베소에서 소동을 일으켰을 때, 그곳에서 바울과 함께 체포되기도 한 바울의 동료였습니다(19:29). 아리스다고는 누가와 함께 바울의 로마 여행에 있어 바울을 시중드는 사람의 자격으로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와 함께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드라뭇데노 성의 상선을 탄 바울과 그의 일향은 다음날 시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시돈은 가이사랴에서 북쪽으로 약 112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스데반의 순교 당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헬라파 기독교인이 세운 교회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시돈에 도착하게 되자,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그곳에 있는 친구-즉, 시돈에 있는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시돈에서 잠시 머무른 후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Myra) 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무라 항은 애굽에서 오는 곡물을 로마로 보내는 항구로 유명했습니다. 무라 성에 도착하자,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과 그의 일향을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곡물 수송선인 알렉산드리아 배에 오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라 성을 출발, 니도(Cnidus)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강한 북서풍을 만나 매우 어려운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7절에 '간신히'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수고', '고생'을 뜻하는 '몰로스(μ?λο?)'에서 온 말로 평상시에는 2-3이면 갈 길을 매우 어렵고 힘들게 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라를 출발한 배는 니도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레데(Crete) 섬을 남쪽으로 바라보며 에게 해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역풍을 받지 않고 순풍만을 의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항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바울과 그의 일향이 니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북서풍이 너무 강하여 더 이상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니도에서 남하하여 살모네(Salmone)를 지나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야만 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니도에서 남하하는 방법으로 그레데 섬의 미항(美港)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항까지는 오긴 했지만, 오래 머물 수 없는 자그마한 항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항해를 더 계속할 것인가를 놓고 선상에서 많은 의논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중해의 이 해역은 초겨울 10월 10일 이후에는 항해하기에 어려웠으며,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1일 이후부터 겨울이 끝나는 시기인 3월까지는 항해가 아예 금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과 선장은 미항에서 서쪽으로 64km 떨어진 그레데 항구 뵈닉스(Phoenix)로 가 거기서 겨울을 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뵈닉스는 지리적인 특성 상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항해하기에 적합지 않은 계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미항에서 머물 것인가? 아니면 뵈닉스로 갈 것인가"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사람들은 백부장과 선장을 더 신뢰하여 뵈닉스로 가기로 결정하여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어느 선택이 지혜로운 선택입니까?
1. 바울의 판단입니까? 선장(선주)의 판단입니까?
9-10절을 함께 봅니다.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우리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먼저, '금식하는 절기'란 대속죄일(Yom Kippur) 이전에 닷새 동안 지켜야 하는 금식 기간으로써, 태양력으로 10월 5일 즈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는 것은 10월 5일이 지났다는 뜻이며, 이는 당시 10월 10일 이후의 여행은 위험하여 항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지금 시기는 항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두루 다녀본 경험이 있는 터라, 이런 지역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백부장과 선장에게 "지금은 배를 출항시킬 때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배를 타고 출항하게 된다면, 하물과 배 그리고 우리 생명까지 많은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아무리 바울이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이런 일에는 선장을 당해낼 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바울보다는 선장이 배를 타본 경험이 더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백부장이 선장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배를 출항시킨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의 말대로 배는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⑴ 백부장은 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무시했습니다.
여러분, '금식 기간이 지났으니 항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믿는 바울이 지나치게 자연 현상에 구애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바울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데, 이는 불신앙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는 불신앙입니까? 아닙니까?" (말좀 해 보세요)
더러 신앙인들 가운데는 과학이 사람들을 불신앙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현대 과학의 기원에서 제 1인자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바로 아이잭 뉴턴(Isaac Newton)입니다. 그런데, 그가 비신앙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순결하며, 단순하고 순전한 사람으로 영원한 삶을 가진 가장 최고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과학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를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무신론자였습니까? 어느 날 그의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는 패러데이를 발견하고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의 성경책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축복된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길을 잃고 헤매는지 모르겠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은 비신앙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런 회고록을 썼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와 통치자에 대한 물음은 영원한 삶을 갖고 살아온 최고의 지식인들에 의해 확실하게 대답되었다"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과학적인 지식 역시 그 깊이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과학적인 사고를 받아드리는 것을 보면서 신앙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구어 말하면,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바라는 것만이 참된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폐암 발생률이 60배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 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2배 정도 폐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거 뻔히 알면서 담배 많이 피워 폐암에 걸려놓고 "기도하면 나을 수 있을 거야"한다면. 안 돼죠! 도대체 말이 됩니까? 건강을 지키려는 아무 노력없이 건강을 위해서 기도만 하면 건강해 질 수 있습니까?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무런 계획 없이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면 뭐든 일이 척척 진행됩니까? 뭔가 자신이 해야 할 것은 해야 하고 노력할 부분은 노력해야만 하나님이 역사하셔도 크게 역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자연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바란다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직무유기에 불과합니다.
바로, 백부장이 이런 직무유기를 행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전도활동을 하면서 지역적인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⑵ 백부장은 바울의 영적인 능력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백부장이 간과했던 것은 바울의 경험적 지식뿐만 아니라,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마도 백부장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떠한 사람이며, 왜 가이사에게 호송되고 있는지 등 바울에 대해 듣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바울과 함께 하면서 바울의 인격이나 그의 신앙도 면밀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백부장에게 "지금 떠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 때, 백부장은 이 말이 단지 바울의 말로만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지금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생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통해 들려주신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이 죄수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만을 보고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백부장에게는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권이 있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에게 결정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배는 비록 개인의 배라 할지라도 로마 정부에 귀속되었고, 그 결과 로마 정부의 관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백부장은 이 배에 있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결정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바울의 말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내 생각이 앞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실패뿐입니다. 절망뿐입니다. 위기의 순간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앞서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계획과 생각보다 앞설 때, 그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잠언 21장 30절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아무리 지혜로워도,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그래서 뛰어난 계획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언 19장 21절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내 계획이 뚜렷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인생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할 때에만 우리의 삶에 승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 인생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시길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 계획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시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미항입니까? 뵈닉스입니까?(12절)
본문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또 한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다함께 12절 말씀을 봅니다.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더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무엇을 발견하게 되십니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안타깝지 않으십니까? "미항에 머무느냐, 뵈닉스로 가느냐" 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선택의 방법이 어떤 방법이 사용되었습니까? "다수결".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의 의견을 모아 보니, "이 자그마한 미항에서는 겨울을 보내기 힘드니,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문제가 다수결로 해결될 문제입니까? 눈앞에 위험이 닥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뵈닉스에서 즐길 생각만 하고 출항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을 다수결로 결정하다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지요!
여러분, 뵈닉스가 어떠한 곳인지 아십니까? 뵈닉스는 유흥도시였습니다. 그러니 겨울을 보내기는 편리했습니다. 그러니, 미항에 있는 것보다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보내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 특성 중에 하나를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수결이 좋기만 합니까? 다수결로 뽑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하고 있습니까? 다수결로 결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좋은 결과를 갖고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읽지 못 합니다"하는 사람 많다고 해서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됩니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왠지 어색하고 보기 싫으니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부르짖는 기도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뿐입니까?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려면, 시간도 필요합니다. 물질도 필요합니다.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는 어렵고 힘든 일이므로 나중에 시간도 생기고 물질도 더 많이 갖게 된 후에 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전도하는 것을 게을리 해도 됩니까?
하나님 일 하면서 다수결로 하려고 하면 됩니까? 안 돼요. 사탄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사단도 알고 있기 때문에 틈만 나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갈 길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뵈닉스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좀더 편히" "좀더 놀자" "좀더 쉽게"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런데도 다수결이 좋다고 해서 결정합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되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때로는 미항에도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난, 도저히 어려운 것을 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뭔가 해내는 사람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조금만 참으면 난, 기필코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우리 인생에도 성공하지 않습니까? 바울에겐 어떠한 생각이 있었습니까? 바울은 뵈닉스에서 즐길 쾌락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뵈닉스에서 즐길 쾌락보다는 로마에서 복음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항이라는 곳에서 비록 겨울 보내기에는 힘이 좀 들기는 하겠지만, 그곳에 머물고자 했던 것입니다. 뵈닉스로 가는 길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 그 복음 증거의 사명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머물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디에 우선이 가 있습니까? 자녀 교육에 가 있습니까? 직장에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는 것에 가 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관심에만 가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추구하십시오. 단, 겉으로만 치장하지는 마십시오" 정말, 정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이사에게 호송되는 바울은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무라 성까지 와서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로 갈 수 없어 미항에 이르렀지만, 이 곳도 머물기에 여의치가 않게 되자, 백부장은 뵈닉스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바탕으로 이를 반대하였지만, 사람들은 다수결로 결정, 뵈닉스로 갑니다.
성도 여러분,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바라는 것이 참된 신앙이 아님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내 삶 속에서 씨앗을 부리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참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자기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백부장과 같이 바울의 의견을 무시하고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해, 자기 욕심과 편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 증거라는 한 가지 사명을 붙잡고 끝까지 힘써 나가는 바울의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로마로 향하는 바울의 여정.
양향목 목사 / 행 27장 1~8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다니면서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했지만 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위해서 그동안 근 30여 년 동안을 소아시아지방과 동유럽 지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당시의 가장 큰 패권 국가인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고 하면서 죽음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하고 죄수의 몸이 되고 재판을 받다가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됨으로 그의 소원대로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27장과 28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과 로마에서 복음 전파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에서 바울 일행이 로마로 출발하여서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하는 장면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본문 1~3절에 “1.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라고 했습니다. 이달리야는 이탈리아를 말합니다. 로마가 있는 지금의 이탈리아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것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동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또 2절에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아서 늘 바울과 함께 다녔고 아리스다고도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바울과 동행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9:29, 20:4) 그리고 빌레몬서에서는 바울이 그를 “나의 동역자”로 소개하고 골로새서에서는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빌레몬서나 골로새서는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동행한 아리스다고는 감옥까지 함께 가서 끝까지 바울과 동역하면서 바울을 섬긴 것으로 보입니다.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일행과 다른 죄수 몇 명을 로마까지 인솔한 책임자는 아구스도대의 백부장인 율리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구스도대란 로마군대의 총사령관 직속의 보병부대로 로마 황제와 지방의 주둔군 사이를 왕래하면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특별한 부대라고 했습니다. 그 부대의 책임자는 백부장인 율리오이었습니다.
율리오 백부장이 바울에게 매우 친절했다는 것을 3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배가 이튿날 시돈에 도착했는데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배가 항구에 들어왔을 때 짐을 내리기도 하고 또 다른 짐을 싣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도 시간이 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시돈에 살고 있는 친구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고 오도록 허락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그의 행동을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호송을 부탁한 베스도 총독에게 특별하게 대하라는 부탁을 받았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이미 바울이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울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육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끝까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육신적 이익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바울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참된 것이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바울을 해치려고 하지만 바울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어버리고서라도 복음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특별히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동행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과 바울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한 사람 아리스다고만 바울과 함께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거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고 있는 아리스다고를 칭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출세를 하기 위해서 가는 길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 가는 길도 아닙니다. 재판을 받아야 하는 죄수이고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끝까지 함께 가고 있습니다.
누가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의사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는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보람된 일도 할 수 있고 돈도 벌어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바울을 따르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바울 곁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다고는 제법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전도 여행을 다니는 도중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비용들을 대어주는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까지 가고 로마에서 2년 동안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인데 아리스다고가 그런 비용을 다 감당할 수 있는 재력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본문을 가지고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도 복음을 위해서 헌금하라고 설교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나 아리스다고가 누가 강요한다고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그들이 복음의 위대함을 알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바울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소중한 것은 복음이 소중하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위대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계획하시고 만들어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본문 4~8절에 “4.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라고 했습니다.
앞에 인용한 2절에서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라고 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에서 처음 탄 배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였습니다.
이 배는 비교적 소형의 배로 아시아지역의 해변을 오가는 배라고 했습니다. 이 배로 시돈에 갔다가 구브로 해안을 지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서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해안들을 거쳐서 몇몇 항구를 거쳐서 무라 시에 도착했습니다. 무라 항구는 소아시아 중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무라 항구에서 이달리아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배를 갈아타게 했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호는 먼저 탔던 배와 달리 대형선박이었습니다. 원래 이 배는 아시아에서 곡물을 싣고 유럽으로 가는 곡물 운반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화물만 싣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많이 탈 수 있는 여객선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배에 승객 276명이나 탈 수 있었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를 타고 니도 맞은편으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바울의 로마 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배를 타고 어느 항구에서 어떤 항로를 통해서 어떻게 로마까지 가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배를 타고 로마까지 갔다고 기록을 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이나 도시나 항구 지명들을 상세하게 기록을 한 것은 사도행전의 기록이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읽고 지나간 부분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실제로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실을 보고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상상해서 기록할 수 없는 아주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 더 살펴볼 것은 이 여정이 참 힘든 여정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이지만 그것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서 잘 가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배는 돛을 세우고 풍랑이 부는 방향으로 가야 잘 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람의 방향들을 잘 만나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간신히’라는 말이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7절)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8절)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겨우 도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나 자연환경이나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교훈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도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사탄의 세력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일에도 어떤 사람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되고 그 수고와 헌신의 길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다 순조로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생활이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을 이렇게 힘들게 해두셨을까? 왜 이렇게 좋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해두셨을까? 초대교회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쉽게 예수님을 믿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 쉽게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선행이나 고행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시고 희생이나 헌신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더 자유를 누리고 더 행복하고 더 기쁘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의 방해 공작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해서 우리 속에 있는 죄악 된 본성을 자극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을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성령님께 의지하고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죄악 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그 본성에 충실히 하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게 생각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그냥 용납해두신 것은 믿음으로 죄악 된 본성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믿음이 있는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진실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그런 유혹이 올 때 얼마나 잘 이기고 잘 견디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어려운 형편이 온다고 해도 그런 것들을 이깁니다. 믿음이 신실하지 못한 사람은 아주 작은 시험만 와도 무너집니다. 누가 시빗거리를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쉽게 믿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하려 함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당한 것처럼 우리가 이렇게 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도 많은 유혹이나 시험이 따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믿음을 따라 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드디어 예수님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힘든 길이었지만 그의 동역자들이 있어서 잘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풍랑이 이는 험한 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잘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십자가의 길도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 서로가 힘이 되어준다면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험이 올 때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파 이야기
정용섭목사 / 행 27:1-44
바울의 체포와 공판은 26장으로 끝나고 이제 로마로 호송당하는 이야기가 27장과 28장에 이어진다. 27장은 지중해에서 당한 난파 이야기이고, 28장은 로마 도착과 그곳에서 진행된 복음전도 이야기이다. 특히 27장은 누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된 대목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여기 27장에 그려진 바울은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백인대장과 선주와 선장 등,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권위를 행사했다. 이것이 바울의 실제 모습이었는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사도행전 전체 집필 의도와 부합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추호도 흔들림 없는 정신적 지도자였다는 말이다. 우선 27장의 난파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페스도 총독은 바울의 로마 호송 책임을 백인대장 율리오에게 맡겼다. 율리오와 그 부하들, 그리고 바울과 그 친구들은 가이사리아에서 화물선을 탔다. 그 배는 다음날 가이사리아에서 북쪽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시돈 항에 도착했다. 그들이 탄 배는 시돈을 떠나면서 역풍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최대의 안전을 위해서 키프로스 섬과 길리기아 해안 사이를 지나서 미라 항에 닿았다. 미라 항에서 율리오는 바울 일행을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갈아 태웠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까지 곡물을 나르는 이 수송선은 1천2백 톤급은 된다고 한다. 역풍을 만난 이 배는 직선 항로로 들어가지 못하고 훨씬 남쪽에 치우쳐 있는 그레데 섬의 ‘아름다운 항구’에 닿았다.
항해 조건이 점점 나빠졌다. 이제 추분이 지났다는 건 계절풍이 그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불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전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는 이대로 항해를 더 계속하다가는 짐과 배의 손실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잃을 큰 위험이 따를 뿐입니다.”(19절) 바울의 의견은 여기서 무시되었다. 율리오는 항해를 계속해야겠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손을 들어주었다. 더구나 미항(美港)은 겨울을 나기에는 불비한 게 많았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같은 그레데 섬 중간에 위치한 페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출항했다.
출발은 남풍을 받아 순조로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퀼라’라는 이름의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배는 그레데 섬과 아프리카 북쪽의 리비아 사이에 있는 작은 가우다 섬을 스쳐지나가면서 더욱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배가 난파되는 걸 막기 위해서 그들은 주로 곡물로 구성된 화물을 바다에 던졌으며, 그 다음날에는 배의 장비까지 던졌다고 한다. 여러 날 동안 온갖 자구책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태풍의 강도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들은 이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바로 그 순간에 바울은 다시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격려한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그는 그레데 섬의 미항에서 겨울을 나야한다는 자신의 말을 따랐다면 이런 어려움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 비록 현재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연설의 핵심은 24절이다. “나더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며 내가 반드시 황제 앞에 서게 될 것이며 나와 동행하는 여러분을 하느님께서 이미 모두 나에게 맡겨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적 사명에 의해서 주변의 사람들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의 연설로 군중들이 위로를 받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본문은 말이 없다. 다만 그의 연설 뒤에 상황이 점차 좋아지게 되었다는 보도를 따른다면 그의 연설에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표류 14일이 지나면서 배는 작은 섬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추로 물길을 재어보니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암초에 걸릴지 모른다는 염려에서 그들은 고물(船尾)에 네 개의 닻을 내린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선원들은 이물(船頭)에서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거룻배를 띄워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 사실을 바울에게서 전해들은 율리오가 거룻배의 밧줄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날이 밝자 다시 바울의 역할이 부각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충고한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왔습니다. 자, 음식을 드시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33절) 그는 지금 선장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사람들 앞에서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흡사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이나 성만찬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용기를 얻었고, 음식을 먹었는데, 그 숫자가 276명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멜리데 섬의 해변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끼어 꼼짝하지 못하게 된 배는 모래톱에 얹혀 심한 물결에 파손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갈 걸 염려한 군인들은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율이오는 바울을 살릴 생각으로 군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해안으로 올라가게 한 후, 나머지는 물에 뜨는 물건을 붙잡고 올라가게 함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바울의 약속이 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역사성 문제
이 난파 이야기는 누가 읽더라도 어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인 보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곳곳에 담겨 있다. 우선 이 이야기에는 바울이 죄수로 호송당하는 중이라는 사실이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의 죄수는 쇠사슬에 묶여서 지내야만 했다. 이 이야기 마지막 장면에서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배에는 바울만이 아니라 여러 죄수들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쇠사슬로 묶여있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바울은 이 이야기에서 죄수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항에서 항해를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해야 할 순간에 바울이 자기의 의견을 냈다. 아무리 바울의 인격이 그 배 안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만큼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죄수라고 한다면, 특히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만 할 죄수라고 한다면 지도자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율리오는 바울의 의견보다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더 믿었다는 말은 율리오에게 항해의 권한이 있다는 뜻인데, 이건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이다. 항해 문제는 로마 백부장인 율리오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권한에 속했다.
태풍으로 인해서 이들의 절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 바울은 완전히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 그는 세 가지를 말했다. 배는 잃겠지만 목숨만은 잃지 않는다. 하나님의 천사가 알려주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나에게 맡겨주었다. 물론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영웅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특출한 바울에게서 그런 일들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바울도 이런 죽음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당황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더구나 바울은 어눌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했다는 건 역사적인 바울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멜리데 섬에서 벌어진 사건도 역사성을 의심하게 한다. 한밤중에 고물에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와중에 선원들이 거룻배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묘사는 항해에 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의 진술이다. 그들이 실제로 산전수전 다 겪은 선원들이라고 한다면 거룻배보다 본선이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마지막 순간에 죄수들이 도망갈까 하고 군인들이 염려했다는 말도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는 사람의 묘사이다. 죄수들은 쇠사슬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려고 마음을 먹어도 도망갈 수 없었다.
누가에 의해 해석된 바울
우리는 이 난파 이야기에서 거의 완전무결한 신앙으로 무장한 한 영웅을 만난다. 헨헨(D. Ernst Haechen)은 저자 누가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다. “누가는 바울이 생명의 위협 앞에서 절망할 수도 있었고(고후 1:8), 따라서 죽은 자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서도 절망할 수 있었다는(고후 1:9,10)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또 독자들도 그 점을 알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오직 강력하고 흔들리지 않는, 승리에서 승리로만 전진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27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언가 근본적인 결격 사유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염려는 접어두어도 괜찮다. 그 이유는 간단히 세 가지이다. 첫째, 사도행전은 사실보도가 아니라 역사 해석이다. 둘째, 사도행전은 누가 공동체를 향한 변증서이며 동시에 설교이다. 셋째,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신앙고백이 살아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신학적 근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만 한다면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할 게 하나도 없다.
성서에 대한 매우 극단적인 두 입장이 있다. 하나의 극단은 성서를 여전히 축자영감설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이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를 순전히 종교사적 문서로만 접근하는 이들이다. 양 극단은 나름으로 일리가 있으며, 동시에 결정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일리가 있다는 말은 한편으로 성서가 문자의 차원에서 진리를 담아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 종교 일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단점이라는 말은, 우선 축자영감설은 문자로서의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역사적 개방성과 무관하게 된다는 것이며, 종교사학적 관점은 성서의 특수성이 상실된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을 축자영감설 안에서만 바라본다면 사도행전의 역사적 흔적을 그리스도교적 진리와 일치시키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며, 종교사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누가의 고유한 영적 현실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 양 극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도행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난파 이야기를 견강부회 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엄밀한 역사 비평에 근거해서 그것의 영적인 현실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바울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난파당하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길을 안내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하며, 당연히 그래만 한다.
드디어 로마를 향해 출발하다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행 27장 1~12절
새해가 되자마자 지난 12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40마일 떨어진 곳의 ‘탈’(Taal)이라고 하는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폭발이 발생할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까, 참으로 무섭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난 2018년 5월에는 관광지로 유명한 하와이의 빅아일랜드라고 불리는 하와이 섬에서도 ‘킬라우에아’라는 화산이 폭발한바 있습니다. 산줄기를 타고 내려간 붉은 용암이 흘러내리며 숲을 태우고 수많은 주택가들을 집어삼키면서 해안으로 흘러내려가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또 뉴스에서 계속 보도되어 아는 것처럼,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호주에서는 남동부 지방에 대규모 산불이 일어나 큰 피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코알라나 캥거루를 비롯해서 수많은 동물들이 죽임을 당했고, 특히 코알라가 느리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불 속에 그냥 있다가 타 죽거나 다치는 장면을 보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이런 자연재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을 보면서, 지금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연의 힘 앞에서는 인간이 무력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전했더라도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거나 갑자기 산불이 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여름에 무더위가 오거나 아니면 지금 이런 겨울에 강추위가 오면 우리는 두껍게 옷을 입고 히터를 트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전기까지 나가버리면 강추위가 몰려올 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또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집채만 한 크기로 몰려온다면,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큰 크루즈 배도 그럴 때는 흔들리는데, 작은 배나 요트를 타고 가다 그런 일을 당한다면 곧 죽음의 위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 사림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심한 박해를 받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화를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바울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바울은 또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 땅을 떠나 로마로 가면서, 망망대해에서 엄청난 폭풍과 높은 파도가 몰려와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게 되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남들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상황이라도 (1절)
드디어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는데, 27-28장은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후의 활동 내용을 요약해서 또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전체를 이끌어오던 주제인 ‘복음의 확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저 이름 없는 작은 시골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렀는지, 또 한 민족의 수도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그 당시 전 세계의 중심인 로마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전체적 그림이 이제 그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가이사랴 총독 법정에서 지루한 법적 공방이 있었고, 또 인간들의 교묘한 계책과 간교를 헤쳐나가는 과정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을 뚫고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확장과 승리를 위해서 신실한 종들이 열심히 나아갈 때,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은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의 삶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든 인간 통치자의 권력이든, 그 아무것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27장, 28장에서 어느 다른 곳보다 더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서 그 기록이 아주 자세하다는 것, 아주 정확하다는 것, 그리고 아주 생생하다는 것을 언급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항해와 난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표현을 빌려왔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27장부터 28장에 나오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우리-단락’(we sections)이 보여주듯이, 누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는 바울의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가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날마다 항해일지를 써 놓음으로써, 후에 그것을 참고하여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뿐 아니라 바울과 떨어져 있을 때에도 계속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도 기록했고, 사도행전을 2천 년이 지난 우리가 읽을 때에도 생생하다고 느낄 정도로 기록을 잘 해놓은 것입니다. 누가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역사 기록가였습니다.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라는 신약학자도 “고전 문학 전체에 걸쳐 고대의 배의 활동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해놓은 것은 없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다른 많은 기록과 문헌들이 있었지만, 누가가 기록해놓은 사도행전의 이 부분처럼 배의 움직임이나 항해에 대해 이렇게 잘 기록해놓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1절)
본문의 시기는 AD 60년으로 보기도 하는데, 더 많은 학자들이 주후 59년 가을로 추정합니다. 당시 지중해가 거칠어지는 9월 중순부터 3월까지는 지중해 항해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뱃사람들은 그것을 다 알았습니다. 특히 크고 작은 폭풍이 계속 이어지는 11월부터 1월말까지 3개월 동안 지중해 항해는 전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지중해에 11월부터 1월까지는 배를 띄울 수 없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지중해 항해가 전면 금지되는 11월이 되기 전에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바울로 하여금 서둘러 가이사랴를 출발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구스도대라는 군대의 백부장 율리오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1절의 주어가 “우리가”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1인칭 복수 대명사인데, 그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울과 이때 다시 합류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바울이”, “그가”, “그들이”라고 하다가 “우리가”라고 했는데, 그것은 누가도 함께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장까지는 계속 “바울이”라고 하다가 27장에서는 “우리가”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누가가 같이 떠나는 겁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부터 바울과 동행하기 시작했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가이사랴의 헤롯 궁에 구금당해 있었던 2년 동안 그가 석방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드디러 로마로 가는 길에 오르자, 바울과 함께 다시 동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 누가에게는 바울이 어디로 가든지 바울과 동행하면서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우며, 또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의사였는데, 바울은 몸이 아주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문도 많이 당했고, 파선당해서 물에도 빠지고, 등에 채찍을 맞아 곪아 터진 적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에 아주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이 다녔기 때문에 관절이라든지, 여러 부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며 그를 돌보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2년 전 나왔던 <바울>이라는 영화에 봐도, 누가가 끝까지 로마 감옥에서 바울의 곁을 지킵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지루한 법적 공방이 마무리되고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여기 보면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로 가기로 작정되매”라고 합니다. “작정되매”는 ‘우리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결정된 대로 우리가 따르게 되었다.’라는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결정에 있어서 바울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까지 가는 이 의미 깊은 여행에 있어서 그는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때는 항해하기가 위험해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바울이 안 가는 게 좋겠다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항해하는 시기도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또 그의 신변이 호송의 임무를 맡은 ‘아구스도대’(the Augustan Cohort, 영어성경에는 Imperial Regiment)의 백부장 율리오에게 넘겨져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여기 가고 저기 가는 게 아닙니다. 율리오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또 항해 중에 배가 어디에 정박하고 출항할 것인지, 또 언제 떠날 것인지 등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이 충고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결정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내려집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바울이 스스로 결정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참 많습니다. 지금 내 상황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단 미국 올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민을 온 분도 있고, 유학을 온 분도 있고, 다른 일로 왔다가 남은 분도 있습니다. 그럼 일단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저도 가족이민으로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네 가족이 제가 대학교 때 왔는데, 서류를 내라는 대로 내고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가서 인터뷰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분들이 심사를 해서 되는지 안 되는지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미국으로 가느냐 마느냐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제 개인으로도 한국에 사는 것과 미국에 사는 것이 결정되니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나의 인생이 대사관에 있는 저 영사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럴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지원할 때도, 지원해놓고 그분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직장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원서를 내놓고 그분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 펀드(fund)를 따기 위해서 신청서를 내놓고 그분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벌써 6년이 되어 가는데, 6년 전 안식년 보내주는 펀드가 있어서 저희도 써서 냄으로 우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지원서를 열심히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 프랑스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볼 수 있느냐 마느냐, 런던과 로마를 갈 수 있느냐 마느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느냐 마느냐는 이분들의 손에 달려 있구나.’ 물론 제가 열심히 써 내서 그분들이 보고 합격하여 우리 교회가 펀드를 받아서 안식월을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달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됐을 때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잘 안 될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혹시 그런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비록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저분들의 결정에 의해서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서 나의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저 사람들은 나를 불합격시키고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안 주더라도, 그것조차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거기서부터 새롭게 내 인생을 써주시고,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길로 오히려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에 대한 모든 결정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로마로 지금 보내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른 로마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이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을 저 사람들이 다 결정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이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서 바울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아드라뭇데노 배 - 뜻밖에 경험하는 주님의 위로 (2~5절)
바울을 호송하는 백부장과 일행들은 가이사랴에서 항해를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거기에 2년 동안 갇혀 있었고, 또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재판을 받았던 곳이 바로 가이사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항구도시였으니까 거기서 떠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배에 같이 탄 다른 죄수들이 있습니다(1). 이 죄수들은 누구였습니까? 바울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입니다. 반면 이들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대 땅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는데도 왜 저 멀리 로마까지 가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 출신이었을 텐데 왜 굳이 저 멀리 로마까지 갑니까? 사실은 이것이 참 슬픈 여행입니다. 로마가 각 식민지 지방들에게 계속 요청을 했습니다. ‘여기 와서 싸우다 죽을 사람을 보내라.’
로마에 가보신 분들은 모두 콜로세움(Colosseum)에 가보셨을 텐데, 저희도 가보았습니다. 그 안에 열광하는 관중들로 꽉 찬 데서 사자나 검투사가 나오고 거기서 도망 다니다가 칼레 맞아 죽는 역할을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선량한 시민을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들을 보내서, 그들을 거기 풀어놓고 싸우다가 죽게 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겨우 로마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이들을 직접 이달리야로 호송해 가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는 항해는 두 단계에 걸쳐 두 척의 배로 나뉘어서 갑니다. 그 두 척의 배는 각각 아드라뭇데노(2)와 알렉산드리아(6)에서 온 배였습니다.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2절)
아드라뭇데노(Adramyttium)는 터키 북서쪽에 있는 드로아(트로이 목마와 관련된 곳)에서 멀지 않은 에게해 해안에 있었습니다. 이 배는 본 항구인 아드라뭇데노로 돌아가는 연안선이었습니다. 먼 길을 가는 큰 배들이 있었고, 또 해안을 따라 여기 서고 저기 서는 작은 배들도 있었습니다.
요즘 버스와 비슷합니다. 서울에서 저 멀리 경상도나 전라도 남쪽까지 가는 고속버스도 있고, 또 어떤 버스들은 시외버스로서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멀리 가는 큰 배들도 있었고, 해안을 따라 여기저기 서는 연안선들도 있었습니다. 이 배는 그런 연안선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때 누가뿐 아니라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그리스 북부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바울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함께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당시 에베소에서부터 바울과 동행하기 시작한 아리스다고는, 골로새서 4장 10절과 빌레몬서 1장 24절에 의하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죽을 때까지 바울의 곁을 지킨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리스다고 역시 누가처럼,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귀하고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바울 곁에 이렇게 주님께서 붙여주신 신실한 동역자들, 즉 누가와 같이, 아리스다고와 같이, 또 그 외의 수많은 동역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결코 바울 혼자 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도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의 이름이 우리에게 유명하게 알려지고 있지만, 바울 뒤에는 그를 도운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 전파를 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서 16장 같은 데를 보십시오. 명단이 죽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그 사람들을 잘 몰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 기독교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입니까? 우리 교회가 무슨 유명한 교회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 기독교계가 아니라 이 콜럼버스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을 아직 모르는 VIP 분을 놓고 눈물로 기도한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해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분도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 이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텐데.’라는 마음으로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나누고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억해주십니다. 이런 것은 결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3절)
첫 번째로 들른 항구는 시돈인데, ‘두로와 시돈’이라고 해서 레바논 지역의 유명한 두 도시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악한 악녀의 대명사 이세벨의 고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이 가이사랴에서 북쪽으로 약 7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인데, 여기 잠시 정박하고 있는 동안에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의 특별한 배려 기운데 그곳에 있는 “친구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여기 시돈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고 언제부터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아서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곳으로 이주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배가 왜 시돈에 머물렀나 하면 비즈니스를 위함입니다. 상거래를 위해서 멈춘 것이지만, 바울에게는 몇 시간 동안이나마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에 죽으러 가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는데, 이런 형제자매들을 만나 같이 교제한 것은 귀한 위로의 순간입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4-5절)
하역 작업을 끝내고 다시 시돈을 출발한 무역선 아드라뭇데노 배의 최종 목적지는, 바울 일행이 이탈리아 반도로 직행하는 배를 갈아탈 수 있는 루기아 지방의 무라라는 도시였습니다. 무라는 지금의 터키 대륙 남서쪽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아드라뭇데노 배는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터키 대륙의 해안을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돈을 출발한 아드라뭇데노 배가 레바논과 시리아의 항구를 따라서 북상했다가, 터키 대륙 남쪽 해안을 죽 따라 서쪽으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항구들을 거쳐 무라에 이르는 것이 통상적인 항로였습니다.
시돈에서 무라까지 직행하는 일반적인 항로는 구브로 섬 아래쪽을 통과하는 항로였는데, 여기 보면 ‘맞바람을 피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고 항해가 위험해지는 시기가 가까웠기 때문에 맞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해서, 저 넓은 바다로 나가기보다는 사이프러스 섬과 터키 본토 사이의 좁은 바다, 즉 바람이 적게 부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해안을 따라 항하하는 쪽을 택한 겁니다.
당시 돛을 사용하는 배였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과 항로의 결정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조금 더 걸리더라도 조금 더 안전한 길을 택하여 4~5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구브로 섬 북쪽과 아시아(터키) 대륙 남쪽 사이의 항로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문 항해사가 기록한 항해일지가 아닙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용 가운데 괜히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눈으로 이때를 생각하며 본문을 보면, 이것 역시도 놀라운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돈을 출발한 아드라뭇데노 배가 거센 맞바람를 맞지 않았더라면, 레바논과 시리아와 터키 대륙 해안을 왕래하는 그 무역선이 구브로 섬으로 밀려나서 그 섬의 해안을 따라 항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북풍이 부는 것까지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바울이 탄 아드라뭇데노 배의 항로를 구브로 섬 북쪽으로 밀어내신 것입니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하게 뻗어 있는 구브로 섬의 길이는 약 160마일 정도 됩니다. 꽤 긴 섬입니다. 마지막 생을 던져야 할 로마로 향하는 바울이 배 위에서 구브로 섬을 당연히 바라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리로 지나가는데 어떻게 안 보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갈 때도 봤고, 지금 로마로 갈 때도 또 보고 있습니다. 2년 전에도 본 구브로 섬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였습니다.
구브로가 사도 바울의 인생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그 당시 사울로 불리던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하던 두 사람을 따로 세워서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셨는데, 1차 전도여행 때 첫 번째로 갔던 곳이 바로 바나바의 고향인 이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사도로서의 첫 발을 뗀 곳이 이 구브로 섬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바라볼 때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겠습니까?
게다가 그 밑에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데, 굳이 누가가 이 말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길리기아와 밤빌리아를 언급하겠습니까?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있는 지방입니다. 구브로는 남쪽에 있고 길리기아는 북쪽에 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쪽을 보면 구브로, 저쪽을 보면 자기 고향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졌겠습니까?
게다가 거기를 지나 조금 더 서쪽으로 가니까 밤빌리아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구브로 사역을 마치고 섬에서 대륙으로 처음 닿은 곳이 바로 밤빌리아의 버가라는 곳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즉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갈라디아서를 그 사람들에게 쓰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지역이 지금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겁니다.
지금은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 그때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 전파와 선교로 나갔던 바로 그 장소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보여주시는 겁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때 그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그때 얼마나 뜨거웠느냐? 또 내가 너와 위험한 순간 속에서 동행하며 지켜주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 위험한 순간에도 지켜주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때가 온다고 해도, 또 이렇게 의외로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위로를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뭔가를 하다가 실망되고 마음이 아픈 순간도 있지만, 그 중에도 가만히 보면 이렇게 순간순간 위로를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을 주님은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3. 알렉산드리아 배 - 위기 속에 임하는 주님의 손길 (6~12절)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6절)
무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이탈리아로 출항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선단에 속하는 이 배는 큰 배였고, 이집트의 곡물을 로마까지 수송하는 중요한 화물선이었습니다. 이 배들은 보통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곧장 북상하여 무라까지 와서 재정비를 한 후에,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이탈리아를 향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의 항해 시기가 대체로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는 위험 시기로 분류되었고,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는 완전히 금지되었다고 했습니다. 2월 초까지도 굉장히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 일행이 타게 된 이 배는 그 해에 거의 마지막으로 이집트의 곡물을 로마로 운송하는 배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겨울 전에 로마에 도착하여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조급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연은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또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이제 백부장 율리오는 무라에서 자기가 찾던 것, 즉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발견했습니다. 큰 배이고 더 안전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 배로 갈아타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로마의 주요 곡창 지대였습니다. 그 곡물을 나르는 배였던 것입니다(38).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7절)
무라를 출항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습니다. 몰아치는 북서풍으로 인해서, 이탈리아 반도가 위치한 서쪽으로 항해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배가 나가지 않는 겁니다. 그 결과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라에서 니도까지의 거리는 약 130마일 정도여서, 순풍일 경우 약 이틀 뱃길이었습니다. 그 짧은 거리를 항해하는 데 ‘여러 날’이 소요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많은 날이 걸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서풍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알렉산드리아 배가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버린 겁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이제는 어떻게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강한 바람에 의해 남쪽 그레데 섬까지 밀려난 알렉산드리아 배는, 그 섬의 동쪽에 있는 살모네라는 곳을 돌아 남쪽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고 계속 항해를 했습니다.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8절)
그레데 섬도 역시 긴 섬이었는데, 이 섬을 바람막이로 삼았는데도 배는 여전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새아’를 지나 또 다시 ‘간신히’ ‘미항’에 이르렀습니다. 7절에서도 ‘간신히 이르렀다’고 하고 8절에서도 ‘간신히 이르렀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게 배를 타고 갔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그레데 섬 남쪽 해안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작은 ‘미항’(아름다운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니도가 위치한 서쪽으로 나아간 것은, 가장 짧은 거리로 이탈리아에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심한 북서풍이 몰아침으로, 이틀 뱃길인 무라까지 간신히 여러 날이 걸려 도착했습니다. 더구나 니도에서부터는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않아 배는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쪽 그레데 섬으로 밀려난 알렉산드리아 배는 결국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쯤에는 드디어 지중해의 항해 금지가 시행될 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지중해가 잠잠해지는 다음 해 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9-10절)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금식 절기가 뭔가 하면 바로 ‘대속죄일’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날을 지킵니다. ‘욤 키푸르’(Yom Kippur)입니다. 이것이 여기서의 금식하는 절기입니다.
이때는 양력으로 9월 말에서 10월 초인데, 아주 유명한 신약학자인 브루스(F. F. Bruce)는, 바울 일행이 멜리데(몰타) 섬에서 3개월을 보내고 항해가 재개된 2월 이전의 11월, 12월, 1월을 생각해볼 때, 10월에 대속죄일이 오는 해가 언제인지를 찾아보았더니 AD 59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AD 59년 10월 초였다고 계산했는데, 또 다른 학자인 램지는 그 날이 10월 5일이었다고 추정해냈습니다. 대체로 맞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시기는 항해가 아주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 동안 그는 파선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고 썼습니다. 그는 그 위험성을 배의 결정권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더 힘 있는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묵살되고 맙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1절)
그러니까 이 알렉산드리아 배에는 선장 외에 그 배의 선주(배 주인)도 있었습니다. 바울을 호송하는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선장과 선주의 말’이 어떤 내용이었는가? 그것을 12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2절)
선장과 선주의 주장은, 현재 알렉산드리아 배가 잠시 머무는 미항은 규모가 작은 항구이기 때문에, 다음 해 봄이 오기까지 3개월 동안 겨울을 지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배인데 항구는 작고, 사람들도 2백 몇 십 명인데 그 작은 동네에서 어떻게 3개월 동안 먹고 지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항보다 규모가 큰 뵈닉스(Phoenix)로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승객들 가운데에도 뵈닉스로 가자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백부장 율리오 역시 지금 항해가 위험하다는 바울의 말보다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이집트의 곡물을 수송하는 배라고 했습니다. 그 배에는 지금 이집트의 곡물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왜 굳이 저쪽으로 가자고 합니까? 선주에게는 알렉산드리아 배와 여기 실린 곡물이 다 돈입니다. 만약 작은 항구인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겨울 태풍에 배가 파손되기라도 하면, 그래서 배가 봄에 못 뜨면, 선주는 돈을 다 날리는 겁니다.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겁니다.
선장도 선주의 입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당시 대형 선박의 선장은 봉급제가 아니라 할당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한 대로 돈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항해를 통해 얻은 총이익을 선주와 선장이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갖는 식이었습니다. 만약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태풍이 불어 배가 깨져서 선주의 배와 곡물을 다 잃고 배가 못 가면, 선주가 돈을 못 버니까 선장도 당연히 돈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선장과 선주는 ‘이왕 그레데 섬에서 겨울을 나야 한다면, 서남쪽과 서북쪽으로 두 개의 해안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뵈닉스로 갑시다.’라고 합니다. ‘그럼 배가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돈이 안전할 것이다.’라는 계산이 나온 겁니다.
지금 이 배에는 이들뿐 아니라 다른 하물주들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지중해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보따리 장사꾼’들입니다. 옛날 조선의 개성상인처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배에 실린 그들의 하물이 곧 돈입니다. 만약 배에 문제가 생겨서 자기들의 하물이 상하거나 잃어버린다면, 가만히 앉아서 돈을 날려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도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동조합니다.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라고 할 때 이들이 거기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의 선장과 선주 그리고 그 배에 타고 있는 하물주 즉 장사꾼들이 다 뵈닉스로 가자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거나 존중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뭡니까? 오직 자신들의 이익, 즉 돈이었습니다. 돈만 지킬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사람의 생명은 별로 상관없는 겁니다.
그런 움직임을 느낀 바울이 그들에게 이 항해가 위험하다고 수차례 권면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백부장 율리오도 바울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것입니다. 지중해 항해에 관한 한, 종교인인 바울보다는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가 더 믿을 만하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생명에 관한 것은 바울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전문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여기 탄 선장과 선주와 모든 하물주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돈을 벌려고 무리해서 항해하려고 결정한 자신들의 결정이 곧 자신들의 생명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금방 그렇게 될 것을 모르고 그냥 돈을 추구하여 그렇게 하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여러분, 돈을 많이 벌어 엄청나게 쌓아놓고 죽었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엄청난 명예를 얻게 되었는데 바로 죽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유명해지려고 하다가 죽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지금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결정을 내립니다. 한 치 앞의 어려움도 내다보지 못하고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라서 결정하고 그 길로 갑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바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그 끝은 멸망이다.’라고 말씀해줍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볼 때,
먼저 바울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다 남들의 결정에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남들의 결정에 따라가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두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돈의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을 통해 바울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구브로를 보며, 길리기아와 밤빌리아를 보며 바울에게 위로가 임했습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순간순간 위로를 주십니다.
그런데 또 그러다가 다시 인생의 맞바람이 불어와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올 때, 또 내가 의견을 냈는데 묵살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내 의견대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맞바람이 불어와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바울이 그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의 위에서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모든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 지금 나에게 닥쳐왔다 할지라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이동휘목사 / 행 27:1-44
1. 네델란드계 미국 작가 다찌(M.E.Dodge)의 작품 ‘한스 브링커’(Hans Brinker)의 이야기입니다. 소년 한스는 이웃 마을로 심부름을 다녀 오는 길이었습니다. 소년은 해안의 둑 위를 경쾌하게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순간 한스는 ‘앗!’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둑 아래 수문(水門)의 한 곳에 구멍이 뚫려서 바닷물이 새어드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땅이 해면(海面)보다 낮은 조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바닷물을 막고 있는 둑에 구멍이 생겨 물이 샌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부르러 갔다 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물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던 한스는 웃저고리를 벗어 자기 오른 팔에다 휘어감고 뚫어진 구멍에 갖다 댔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막고 있으면 그 사이 누가 와서 도와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지만 1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도움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추운 겨울 바람은 웃저고리를 벗은 소년의 몸을 꽁꽁 얼어 붙게 만들었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한스의 팔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집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만약 내가 집으로 가버리면 네델란드는 어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에 한스는 다시 이를 악물었습니다. “누구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 소년의 외침은 밤사이 여러 번 울려 퍼졌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 둑을 지나던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한스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한 쪽 팔로 뚫어진 틈을 막고 있던 한스를 끌어 안으면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수고했다. 너의 애국심과 용기가 네델란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구나!”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로마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의 승객 전원이 구원함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폭풍의 한 바다 가운데 위기를 만난 바울과 그 일행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베스도 총독 등의 재판이 끝나고,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재판을 받기 위해 드디어 로마로 출항한 바울이 무라(Myra)를 거쳐 그레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때 바울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자이었지만, 그는 결박된 죄수의 몸으로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행한 사람은 누가와 아리스다고(마게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사람)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으로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행19:29)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그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투옥되었을 때에도 함께 갇혀 있었던 복음의 동역자였습니다.
(골4:10)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몬1:24)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이제 아리스다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울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로가 변경되는 바람에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리스다고 역시 희생과 봉사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수난의 전도 여정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혼자만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훌륭하고 희생적인 동역자들을 보내주셔서 협력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가고 있었지만, 바울의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한결같이 바울을 보호해 주며 불편하지 않도록 선대(善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면서도 로마인의 특별한 호의를 받게 된 것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행19:2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23:11)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특히 로마 전도를 위해 로마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사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의 길을 예비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호 배는 남풍이 순하게 불자 머물렀던 그레데 미항을 떠나 그레데 해안을 따라 항해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때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에게 충고합니다.
(행27:9-11)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은 여행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후인 초막절(레 23:34) 이후, 즉 늦가을에 역풍(逆風)을 무릅쓰고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해를 멈추고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중 세 번에 걸쳐 파선당한 적이 있었습니다(고후 7:5). 그래서 그의 판단은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권고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靈感)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항해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하나님과 영적 교통함을 통해 전문가 이상으로 상황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 강행하게 합니다. 또한 그들이 머물렀던 라새아 미항은 조그마한 항구로, 겨울철을 나기가 불편해서 번화한 뵈닉스까지 가서 과동하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 호는 항해를 시작하여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을 만나 순풍에 돛을 달고 의기양양하게 뵈닉스를 향하여 출항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서 바울의 말한 그대로 유라굴로라는 무서운 광풍을 만나 극심한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안목에 화려하고 편한 것을 바라다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인생 항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시적으로 부는 순풍에 인생들은 희희낙낙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모진 바람이 한번 불게 되면 그 순간 공포와 비애와 절망 속에 한탄하며 신음하게 됩니다. 인생은 일엽편주 같은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젊고 건강하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라고 장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돈이 많다.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라고 호언합니다. 그러나 금력이나 건강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은 날개를 달고서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겐 나를 도와줄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 날에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폭풍 한가운데서 우리에겐 인간의 힘보다도 더 강력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줄 수 있는 항로 안내자, 도선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도선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나는 하늘과 바다의 주인이니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
2.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강행하여 위기에 빠진 또 다른 원인은 1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행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다시 말해 다수의 의견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은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고 행동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의견도 마땅히 존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수의 진실이 말살되고 다수의 주장이 폭력이 될 때 그것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수냐 소수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어느 것이 진리냐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다수의 소리에 눌려서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바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저들의 살 길이었습니다. 저들은 다수의 횡포에 희생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외로운 진리의 소수가, 다수의 폭력 앞에서 묵살되어져 버린 경우를 여러 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어느 날 남 유다 왕 여호사밧 왕이 사둔이 되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합은 사둔이 되는 여호사밧 왕에게 동맹군을 만들어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고 제의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고원(高原) 지대로서 골짜기마다 물이 많고 포도와 올리브가 잘 자라는 비옥한 지역인데, 본래 이스라엘 영토였습니다. 이러한 길르앗 라못이 아람(시리아)이 점령하고 있으니 함께 공격하여 찾아오자는 것입니다.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길르앗의 라못을 치겠습니까?’ 하고 묻자, 여호사밧은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왕상22:4) 면서 함께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여호사밧 왕은 “먼저 여호와께 물어 봅시다.” 며 아합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예언자 약 400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내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가야 하겠느냐 가지 말아야 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서 치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에게 넘겨 주실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여호사밧은 아무래도 400명이나 되는 예언자들이 만장일치로 아합에게 대답하는 것이 꺼림칙해서 아합에게 ‘우리가 물어 볼 다른 예언자는 없습니까?’ 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미가야라는 자가 있긴 합니다만 그는 나에게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않고 언제나 나쁜 일만 예언하므로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자, 아합은 신하 하나를 불러 즉시 가서 미가야를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왕에게 좋은 일만 예언하는데 당신도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미가야는 “내가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는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만 말할 것이오.” 하고 대답합니다. 미가야가 도착하자 왕이 그에게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가야 하겠느냐 가지 말아야 하겠느냐?’ 고 묻습니다. 미가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하늘의 보좌에 앉으셨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서 있는데, 이때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내어 길르앗의 라못에 가서 죽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은 이러쿵저러쿵하며 서로 자기 의견을 내세웠습니다. 결국 한 영이 여호와 앞에 나와서 ‘내가 그를 꾀어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하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영은 ‘내가 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이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좋다. 가서 그를 꾀어내어라. 너는 성공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 예언자들이 왕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하셨으나 사실은 왕에게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왕상22:15-23)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 등 최악의 아합을 죽이기 위해, 어용 예언자 400명에게 일치하게 거짓의 영을 불어넣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하리라고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이렇게 어용 예언자 400명의 예언이 거짓됨을 밝히자, 그들 400명의 우두머리 시드기야가 다가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언제 여호와의 성령께서 나를 떠나 너에게 말씀하셨느냐?’ 며 호통을 칩니다. 그때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내가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죽지 않을 정도의 빵과 물만 먹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몹시 기분 나쁘고 꺼림칙해서, 사둔 여호사밧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병 전투복으로 변장을 하고 싸울 테니 당신은 총사령관의 왕복을 입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전쟁에 나갔는데 우연히 쏜 적병의 화살 하나가 아합 왕의 갑옷 솔기에 꽂혀, 피를 흘리다가 창녀들이 목욕하는 사마리아 연못에 쓰러져 죽었는데, 그 흘린 피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들이 와서 그 피를 핥아 먹었습니다.
(왕상21:19)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진실을 말하는 미가야의 소리는 시드기야를 위시한 400명의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묵살되고 미가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과는 미가야의 예언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다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싸웠던 엘리야의 외로운 투쟁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죄수들을 호송하는 로마 백부장은, 어느 것이 더 진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다수의 의견으로 기울어져 버린 것입니다. 죄수 바울의 말보다 항해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정치 사회도 다수의 논리 속에 진실과 진리가 매몰되고 거짓, 가짜가 득세하는 불길한 현상들이 각계각층에서 몰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소수일지라도 진실과 공의에 따를 때 나라 민족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충고는 무시되고 항해 전문가 선장의 말을 따라 계속해서 항해하다 결국 엄청난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3. 유라굴로라는 태풍 속에 풍우대작(風雨大作)하는 바다 한 복판에서 승선한 모든 사람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담대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소망을 가졌습니다. 태양과 별들이 가려져 있었지만 밝은 빛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번씩이나 로마에 가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행19:2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23:11)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5:12)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24절,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극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그의 로마 전도에 대한 소명을 재차 일깨워 주심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바울이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련한 선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27:22-26)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바울과 함께 승선한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방인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생명을 건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큰 폭풍에 시달려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여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소망의 빛을 주었습니다. 즉 바울은 바다와 바람을 지으시고 자연을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했고, 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리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이 그 배에 있었기 때문에,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를 떠날 때는 초라한 죄수에 불과했던 바울이, 이제는 선중(船中)의 지휘관이 되어 활약하게 됩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깨어 있어 사공들의 도주 음모를 간파하고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행27:30-31)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사공들은 자기 자신들 외에는 승객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생명만을 부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거루(구명정)을 내려 놓고서 타고 도망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경고에 처음에는 거부했던 백부장과 군사들이, 이제는 즉각 바울의 말을 받아들여 거룻줄을 끊어 버려 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행27: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사공들이 만약 거룻배(구명정)를 타고 자기들만 살고자 도망했다면, 바울의 말대로 “배에 있지 아니하면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은 거룻배를 타고 달아나는 길이 아니라 배 안에 머무는 길이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고 주변은 어둡고 갈 바는 몰라도 참으로 사는 길은 배 밖이 아니라 배 안이었습니다. 참으로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을 믿고 사는 사람은 거룻배 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세계가 어지럽고 삶의 물결이 거셀수록 참으로 사는 길은 배 안에 머무르는 길입니다. 실제로 오늘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가는 동안 너무 많은 거룻배들을 만들어 달고 있습니다. 돈, 타협, 경영, 권력, 교리, 조직 등등의 얼마나 많은 거룻배들을 끌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이 거룻배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순수한 교회, 주님의 교회로서가 아니라, 거룻배들을 많이 달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더 의지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순수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감격과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기보다는, 이 거룻배들을 타고 살아보려고 날뛰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얼마나 복음의 외적인 것에 더 의지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숫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인 숫자의 거룻배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지 못한 교회는 자기들도 그러한 거룻배를 가지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거대한 예산의 거룻배를 자랑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섬기는 교회에서 다스리는 교회, 큰 소리치는 교회를 부러워합니다. 교회를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교리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합니다.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는 좋은 기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것들을 거룻배로 너무 많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자기들도 이러한 거룻배를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거룻배를 끊어버려라.” 참으로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되고 순수한 구원의 교회, 노아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룻배 줄들을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정없이 잘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격랑의 시대 속에서 주님이 맡겨 주신, 영혼을 구원하는 순수한 교회, 구원선으로서의 교회, 노아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거룻배줄을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순수한 신앙과 복음과 주님을 의지하는 데서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고, 그것들을 더 의지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참으로 영혼이 사는 길은 이 모든 복음의 외적인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배 안에 머무르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때로 그것이 지루하고 지겹고 육신을 피곤하게 한다해도 교회 안에 머무르는 길만이 우리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성이,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때로는 사랑이, 때로는 친구가, 세상의 쾌락이, 돈이, 식구가, 친척이, 사업이 우리를 예수 밖으로 불러냅니다. 그와같은 것들이 거룻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타고 살아보겠다고 구원선인 교회를 떠난 심령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를 예수 밖으로 불러내는 것은, 교회 밖으로 유혹하는 모든 거룻배들은 사정없이 끊어버려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 거룻배를 타고 신앙과 교회와 예수를 떠난 사람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그 영혼이 멸망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딤전6:9-10)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성경은 “(히12:1)...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거룻배들을 끊어버리지 않고는 자기를 따를 수 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항구에 들어가 구원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하고 갈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요단강물에 뛰어드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끊어야 합니다. 이 험한 격랑의 바다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인 바울이 지휘관이 되고 죄수를 호송하던 백부장이나 군인들이 도리어 이제는 바울의 지휘를 받는 하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바울의 말을 듣지 않던 백부장은, 자신의 현명치 못함을 깨닫고 그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276명의 인생들의 생명은 이제 하나님의 종 바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에서 사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밖에 다른 살 길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인생들이 사는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영력(靈力)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반면 백부장과 군인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의 한계와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로마인 백부장은 바울의 신앙적 초연함에 감동되어 죽을 고비에서 바울을 구해주는 최대의 호의를 베풉니다. 당시 로마 군법은 죄수를 지키거나 호송하던 군사가 그를 놓치거나 잃을 경우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수하에 있었던 군사들은 도망칠 우려가 있는 죄수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했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 그 계획을 묵살시켜 버립니다.
(행27:42-44)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약속하신 로마 선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76명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선장이나 선원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사랑이 그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바울을 돌보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보살피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폭풍 한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시련을 겪고 고난을 당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필요한 모든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소돔 고모라에 의인 하나가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 나라 민족의 생명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 민족의 생명이 복음 전도의 사명을 지닌 성도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한, 이 땅의 성도 여러분의 생명과 이 나라 민족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고 외치며 복음을 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이 이뤄지고 사명이 다하기까지
계강현목사 / 행 27:1-1, 21-26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쥐고 있는 한 염려나 두려움이 아니라 안심과 담대할 수 있다. 그 약속이라는 게 일반적인 약속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주님 나라를 위해 우선순위의 삶을 살면 의식주의 생계와 생존을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런 약속은 교회 공동의 사명이 된다. 우리는 이런 약속에 근거해서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어떤 약속은 개인적으로 주시는 약속이기도 하다. “나를 위해서 내가 너를 이렇게 크게 써주겠다.”하고 개인적으로 주신 이런 약속은 우리 개인의 사명으로 연결되어 진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이루시고, 사명이 다하기까지 책임져주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가이사랴 군영에 구금되어 2년 여를 지나 최종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했다. 결국 죄수의 몸으로 배에 올라 로마로 호송된다.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인들 속에서 역경을 겪고 있는 바울에게 주님은 이미 나타나서 이렇게 약속한 바 있다. 23: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이 말씀 한마디에 바울은 좌절을 떨쳐 일어설 수 있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로마에서도 복음 전도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로마로 가는 여정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건이 많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역경이 생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폐기될 것과 같은 무서운 유라 굴로 폭풍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와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고 사명을 다하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상고하며 은혜 나누자.
1. 역경은 예상하나, 약속은 이뤄지고 사명을 다하기까지 데려가지 않는다는 걸 믿는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그냥 순탄하게 아무런 문제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역경이 따를 수 있단 얘기다. 그래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사명이 있는데, 그게 이루어지는 과정 가운데 실망할 만한 상황, 절망의 상태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절대 좌절하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절대로 데려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을 가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참 좋았다. vv1-2,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 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2 우리는 아드라뭇데노 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이 배는 아시아 연안의 여러 곳으로 항해하는 배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가’인데, 주어를 ‘우리가’라고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누가와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갔을 거로 추측한다. 또 v2에 보면 데살로니가 출신인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동행했다. 그는 에베소에서부터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바울의 수종을 들면서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비록 죄수 신분이지만, 호송을 맡은 로마 장교 백부장 율리오는 꽤 괜찮은 사람이어서, 바울을 잘 배려해 줬다. 27:3,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무튼 처음은 그렇게 순조롭게 시작했다.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그다음에는 시돈에 들렀다가 그다음에는 지금의 터키와 키프로스 섬 사이로 지나 마침내 터키에 무라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울 일행은 이집트에서 로마로 가는 곡식을 실은 큰 배로 갈아탔다. 그다음에는 크레타섬으로 가서 마침내는 아름다운 항구,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미항을 떠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유라 굴로’라는 북동쪽에서 부는 폭풍이 몰아친 거다. 이때부터 두 주 동안 폭풍 속에 시달리면서 표류하게 된다. 누가는 vv15-17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배가 폭풍에 휘말려서,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다. 16 그런데 우리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쪽을 따라 밀려갈 때에, 그 섬이 어느 정도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으므로, 우리는 간신히 거룻배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17 선원들은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가 끌어올리고 밧줄을 이용하여 선체를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고 있었다.” 폭풍이 불어 항해할 수가 없자, 닻도 내리고 그다음에 배가 파도에 부서질까 봐 밧줄로 묶고 옆에 매달린 구명보트도 갑판에 실었다. 그런데도 폭풍은 계속된다. v18, “우리는 폭풍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는데, 다음 날 선원들이 짐을 바다에 내던지고 19 셋째 날에는 자기네들 스스로 배 장비마저도 내던져버렸다.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이 심하게 불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로마에 안전하게 가리라는 약속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조차 완전히 잃을 정도까지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28:14, “우리는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초청을 받고, 이레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런 다음에, 드디어 우리는 로마로 갔다.” 그래서 결국 로마에서도 복음을 힘차게 전하게 되었다. 28:30-31,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지고,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기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도 인생의 항해를 하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어서 우리가 그걸 붙잡고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 가운데 살지만, 어떤 때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예상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항해 길이 반드시 평탄하지만 않고 우여곡절을 겪을 거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약속은 이뤄지고 사명이 다하기까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이 좀 생길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약속하신 그 항구에 도달할 것을 믿기 바란다.
남편을 전도하려고 하고, vip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이제 정말 될까?’ 싶을 정도로 전혀 반응이 없고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 같고 그럴 때 마음이 무너지고 표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이뤄주시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인내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신다. 또 어떤 분에게는 사업에 관한 약속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의 사업을 크게 키워서 그걸 통해서 영광 받고, 너로 하여금 사업을 통해서 내 일을 하도록 하겠다.” 이런 약속을 분명히 받았는데, 사업이 커질 기미가 보이질 않고 하루하루 허덕허덕한다. 그래서 낙심이 되더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낙심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인생 항해에서 그런 폭풍을 다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그 항구에 반드시 안전하게 도달할 것을 믿어도 된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의 말처럼 ‘사명자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잡고 절대 낙심하지 않는 성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2,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
배가 이렇게 표류할 때, 하나님이 다시 천사를 보내서 바울에게 재약속을 해주셨다. 바울은 그 말씀으로 선원들을 격려했다. 27:21-26.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23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26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면서 지금은 표류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더라도 반드시 섬에 도착할 것을 믿었다. 그리고 이걸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격려한 것이다. v24b,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나님이 배에 있는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해주셨다. 왜 그런가 하면 바울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안전하게 로마로 데려가야 할 사람이고,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배에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도 폭풍 속에서 구원받게 된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걸 아나? 바울 때문에 276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았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도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봐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운데서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믿는 분, 친척들에게 전도할 수도 없고, 전도해도 잘 안 먹히고 힘든 분들은 자부심을 품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그 가정에 의인 한 사람으로 있어서 그 집안에 임할 수 있는 재앙이 물러가기도 하고 진노가 멈춘다는 걸 알기 바란다. 이게 의인의 힘이다. 몇 명의 의인 때문에 나라가 살고, 몇 명의 의인 때문에 사회가 살고, 몇 명의 의인 때문에 교회가 산다. 우리 소수의 가정교회가 있어서 한국교회가 건강해지고 살아난다. 그게 씨수소의 원리다.
자, 그런데도 폭풍이 계속되고 배는 표류를 14일째나 하고 있다. 선원들은 캄캄한 밤에 물 깊이를 수시로 재보면서 육지가 가까워지는 걸 직감하자, 그 와중에 자기들만 살겠다고 구명보트를 내려 도망하려고 했다. 마침 바울이 그것을 발견하고 백부장과 병사들에게 일러준다. 27:31, “만일 이 사람들이 배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면, 당신들은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이 구명보트의 밧줄을 끊어서 떨어뜨렸다. 다음에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권면을 한다. 지금 두 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 멀미가 나서 못 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음식을 준비할 수가 없어서 못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힘을 내야 되니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면서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하고, 자기도 먹고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좀 힘이 생겼을 때, 해가 떴고 그다음 날 결국 배 앞머리가 모래톱에 걸려 버렸고 배 뒷머리는 거센 파도에 부서지고 말았는데, 오히려 잘 됐다. 배가 고정돼서 사람들이 뛰어내려 수영하거나 널빤지를 잡고 나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276명 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다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바울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상황 가운데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은 다 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현장에서 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을 통하여서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어떤 분 중에 질병에 걸렸으나 하나님이 고쳐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면 그냥 갑자기 낫는 것만 기다리지 말고, 식이요법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 한다. 또 혹시 직장을 잃은 가장의 경우에는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곧 더 좋은 직장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믿어도 좋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구인 광고도 들여다보고 주위에 부탁도 수소문도 하고, 사업을 하려면 연구도 해야 한다. 보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익숙해 있으면 해야 할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사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때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는 걸 찾아서 해야 한다.
만약 해야 할 것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 바울이 선원이 도망가는 걸 보고도 아무 조치도 안 하고, 다 먹지 못해 굶고 있는데도 밥 먹으라고 권유하지도 않고, 그렇게 아무런 일도 안 하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하나님이 어떻게든 바울을 구원하셔서 로마에 도착하게 하셨을 거다, 그러나 아마도 약속의 실현이 지연되어서 고생을 더 많이 하고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을 거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을 때, 우리의 사명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내가 할 거 하면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기대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살려주셨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약속하신 대로 로마에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 하나님이 두 개의 큰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첫 번째 기적은 이 배가 마침내 몰타섬에 도달했다. 이 섬이 그 유명한, 2차대전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를 종식하려고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몰타회담(1989년)이 그 섬 주위 선상에서 열렸다. 가우다 섬에서 몰타섬까지 2주일 동안 닻을 쓰지 않고 광풍에 표류하며 떠밀려 갔다. 그런데 몰타섬에 딱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만일 이 섬을 놓치면 그다음에 나오는 땅이 어딘가 하면, 거기서 약 320km 떨어진 북부 아프리카의 튀니지다. 만약 그랬다면, 배는 산산조각이 났을 거고 한 사람도 못 살았을 거다.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셔서 그 섬에 도착하게 하신 거다.
두 번째 기적은 그 섬에서 바울이 독 뱀에게 물렸는데, 살려주신 거다. 몰타섬에 도착한 바울 일행이 추워하니까, 주민들이 아주 친절하게 장작불을 펴놓고 옷을 말리고 몸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을 때, 바울이 나뭇가지를 한 아름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그 중간에 독뱀이 있다가 그를 콱 물었다. 28:4-6, “섬사람들이 그 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를 그대로 살려두지 않는다.’고 서로 말하였다. 5 그런데 바울은 그 뱀을 불속에 떨어버리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6 섬 사람들은 그가 살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서 그를 신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을 받은 바울이 광풍에 배가 파손된 가운데도 간신히 살아났는데, 거기서 뱀에게 물려 죽으면 하나님 체면이 뭔가? 그래서 하나님이 뱀에게 물린 바울을 살려주셨다. 사실 이런 약속,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으리라 하는 약속은 예수님이 하셨다. 막 16:17-18,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이런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뱀에게 물려도 해를 받지 않은 거다. 또한 그곳 추장이 바울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보니까, 추장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손을 얹고 기도해서 치유되자, 마을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병을 치료받고는 바울의 일행을 극진히 대접해 줬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물리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물리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안심할 수 있다. 일반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는 되지 않을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우리는 믿을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나? 이런 놀라운 기적의 역사는 사실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건 막 16:15부터 읽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다음에 이런 기적의 약속을 하신 거다. 예수 믿는다고 뭐 뱀에게 손을 쓱 집어넣는다고 안 물리겠나? 당연히 물리지. 쉰 밥만 먹어도 배탈이 나는데, 독약을 먹고 괜찮을 수가 있겠나?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다. 이 약속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이런 증표가 따른다고 하신 거다. 선교사가 아프리카 깊은 밀림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깨끗한 물을 얻을 수가 없어서 소독되지 않은 물이나 이런 걸 마셔도 탈이 나지 않도록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거다. 그래서 복음 전하다가 뱀에게 물리기도 하고 해충에게 물리기도 하고 이래서 참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거다. 의술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아픈 사람을 만나고, 그곳에 있는 무당과 능력대결을 해야 할 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낫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기적의 역사가 우리가 사는 한국보다는 선교지에서 훨씬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기적을 우리 삶 가운데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방향으로 바꾸면 된다.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자기 계획대로 다 살면서 이런 기적도 기대하는 건 욕심이고 얌체 짓이다. 그러나 우리 삶이 복음을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때, 우리의 가정은 복음을 전하는 기초이고, 우리 부부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이고, 자녀들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고, 내게 주신 직장과 사업장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이며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때, 나의 모든 삶의 목적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딱 초점을 맞출 때, 이런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가정교회를 하는 우리 교회가 온 교인이 목자 목녀를 중심으로 목장에서 함께 영혼 구원, 제자 만들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힘쓸 때, 하나님의 기적 역사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는 이유다.
여러분, 천지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약속을 이루시고, 사명을 다하기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이런 확신 가운데서 역경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과 믿음을 갖고 버텨서 끝내 승리하는 성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유라굴로 풍랑이 주는 교훈
이기복목사(하늘문교회) / 행 27:9-26)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유럽과 소아시아를 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하고 마지막 인생의 말년을 저 멀리 로마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護送)당하는 처지이지만 사도 바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같이 로마가 세계 복음화의 핵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바울 사도가 마지막 선교여행인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하고 에베소 교회에서 고별설교를 했습니다(행 20:17-38). 당시 모든 성도들이 울고 입 맞추고 항구에까지 나와 작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유대인들의 고소로 율법 비방, 성전을 더럽힘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바울은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고 유대인들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 가이사(씨이저)에게 상소를하여 죄수와 관계자들 모두 합하여 276명과 함께 로마로 압송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던 북단 가이사랴에서 출발을 하여 처음에는 날씨도 좋고 순항을 하여 갔습니다. 그레데해안의 미항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항해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고 백부장에게 출항을 멈출 것을 요청하였으나 남풍으로 인해 항해하기 좋다는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따라 결국에는 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죽음의 위기도 있고 가지고 있는 모든 물품을 자기 손으로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결국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지 14일 만에 멜리데 섬에 상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로마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을 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마칩니다. 우리는 본문의 유라굴로 풍랑의 교훈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1. 인생의 항로에는 유라굴로와 같은 풍랑이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각각 자기의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합니다. 이 항해에는 순풍에 돋을 단 것처럼 순항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유라굴로라는 말은 광풍 즉 미친바람이라고 하는데 오늘날도 지중해 해상 돌풍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레데에서 하나님은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바울 사도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로마 전도에 사명이 있는 사도 바울이 탄 배인지라 하나님은 미리 계시를 통하여 떠나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좀 힘들어도 늦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물질적인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가지 말라는데도 고집부리고 가고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하면 결국 유라굴로 같은 풍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3. 풍랑 앞에서 짐을 던져야 삽니다.
고집을 부리고 출항한 배는 결국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배에 실은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위기의 순간에는 모든 짐을 벗어 던져야 삽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삽니다. 우리는 늦게 깨닫더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순종하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4. 파수꾼과 보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배에 승선한 사도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당하는 차지였지만 바울이 자청한 길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그 배에 탄 276명의 생명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망망대해와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도 바울과 같이 두가지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는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구원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 때문에 그 배에 탄 276명의 생명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 때문에 그가 사는 집 주인이 복을 받았고 애굽이 복을 받았고 나중에는 자기 가족과 민족까지 구원을 하였습니다. 모세 한사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고, 사무엘 선지자, 엘리야선지자로 인해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 곁에 서서
안양준목사 / 행 27:1-26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는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도시가 바로 로마입니다. 그래서 롬 1:10에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결국 기도가 이뤄져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유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안타깝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로마로 가던 중에도 유라굴로라는 광풍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열나흘 동안 삶과 죽음의 기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보여준 바울의 모습은 믿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보여줍니다.
1. 선장의 말을 더 믿더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탄 배에 광풍이 밀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성도님들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울은 미항에서 배가 출발하기 전 백부장에게 항해를 하면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있을 것이라 권면했습니다.
10절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항해를 만류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자신이 탄 배가 세 번이나 파선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금식하는 절기인 대속죄일이 지나면 북동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항해를 말린 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래서 항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경험은 아주 중요한 지식입니다. 선장과 선주는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경험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에는 결국 파탄을 가져올 뿐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죄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듣기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과 경험을 더 믿고 출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크게 두 가지로 철학과 과학을 들 수가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철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고, 과학은 인간의 물질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란 헬라어로 ‘필로소피아’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이란 말은 헤로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에 보면 쏠론이란 사람이 처음 쓰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신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혜요 곧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때에 와서는 철학을 인간의 문제에만 고정시켜서 철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하는 두가지 문제를 푸는 학문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결국 철학은 인간의 정신세계 중에서도 내세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인간의 영원한 내세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의 현실적인 문제부터 내세의 문제까지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 선장과 선주, 그리고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죄수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사히 로마로 호송해야 할 목적이 있었고, 선장과 선주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적이요 물질적인 이들의 목적과는 다른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19:21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바울의 계획이 쓰여져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의 최종 목표가 로마입니다.
로마는 당시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상업의 중심지요 세계의 중심도시였고 모든 길이 로마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가는 모습으로 비치겠지만 아닙니다. 바울은 마음 속에 품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23:11을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마음만 먹으면 자유를 얻고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큰 곤욕을 당하고, 그 차가운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명예와 권력보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 죄인의 사슬에 매여서 로마로 가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산다고 해도 이런 시련이나 고달픔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목표가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삶의 진정한 목표가 세워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다해도 그 삶은 실패작입니다. 목표없이 습관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뚜렷합니까?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참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제라도 세상적인 삶의 목표는 버리고, 아름다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두고 신앙생활을 재정리하시기 바랍니다.
2. 유라굴로는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환란이 올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시련과 환란 중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내 곁에 서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헬라어 로 ‘파레스테 가르모’라는 말로 ‘내 옆에서 나를 도와 주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시련을 당하고 고달픔을 당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 16:13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입니다. 쉽게 해석하면 ‘곁에 계시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막대기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성경은 “내가 너희를 결단코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믿은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이 항구는 겨울에 지내기에 좋은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불편한 항구에서 겨울을 지내느니 차라리 더 항해하여 뵈닉스와 같은 항구에서 편하게 겨울을 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다른 이유의 하나는 그렇게 항해하다보니 남풍이 불어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13절을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들이 득의한 줄 알고”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쩌면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는 사도 바울을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봐라, 이렇게 날씨가 좋고 바람까지 이렇게 순하게 불어주는데, 미항에 있었으면 어쩔 뻔하였느냐?”고 저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달콤한 즐거움과 쾌락을 맛볼 것에 들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들은 바로 다음 순간을 알지 못합니다. 14절을 보면 ‘얼마 못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이 가면 얼마를 갑니까? 저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휘말리고 만 것입니다. ‘유라굴로’는 북동에서 불어오는 지중해의 폭풍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배의 기구들을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이 유라굴로와 같은 강력한 돌풍을 종종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슬퍼하며 하나님께 나에게 돌풍을 주신 이유를 따집니다. 유라굴로가 바울과 함께 승선한 사람의 목숨을 풍전등화로 만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돌풍은 우리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풍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에게는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불필요한 것을 주시거나 필요한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라굴로 앞에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과도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돌풍’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가 강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더욱 착각을 부채질하는듯 합니다. 그러나 직업적인 뱃사람이었던 선장도 ‘돌풍’을 예고하지 못했고, 또 풍랑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유라굴로’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과신을 부수는 망치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높아진 교만과 자기 의를 부수시기 위해 유라굴로를 주십니다. 히 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유라굴로를 통해서 인간의 나약함을 뼈가 저리도록 확인시켜 주십니다.
3. 유라굴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14일간이나 풍랑 속에서 정신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순간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21절 이하에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도 바울은 사나운 돌풍 속에서도 구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바울은 이 구원의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치않고 붙든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믿음대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 45: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한 번 하신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유라굴로는 바울의 권면을 들었으면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유라굴로를 만났을 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곁에 계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은 용기를 주셨습니다. 24절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하십니다.
광풍을 만났을 때 바울에게 ‘두려워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인생의 시련을 만날 때, 인생의 광풍이 밀려들 때 바울에게 용기를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는 말씀에서 로마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불행을 고치는 약은 희망 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면 불행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한 희망을 심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자는 힘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내 곁에서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경신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에 빠질 때도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생의 유라굴로를 헤쳐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행 27:1-8 / 오늘의 말씀 묵상
바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행 25:11) 재판을 받기 위하여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로마행은 석방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고관들을 만나 제국 전체에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2년 동안 구금되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죄인의 신분이었던 바울은 오히려 여행에 필요한 경비도 들지 않았고 안전까지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크고 놀랍습니다. 지금 처한 형편을 두고 불평하기보다, 복음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내가 품고 있는 선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 삶에 어떤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까?
감동과 사랑으로 누리는 동행의 기쁨
바울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함께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친절로 시돈에서 신앙의 동료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탑승한 배는 강풍을 만났고, 가까스로 미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향하는 바울의 여정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와 아리스다고, 여러 친구의 도움을 얻게 하셨고, 백부장 율리오의 친절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훌륭한 인품과 사랑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로 인해 성도뿐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행복한 교제를 누리며 사명의 거친 여정을 이기게 됩니다.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하고, 위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바울의 로마행이 호의로 가득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남에서 나는 어떤 인품을 보이고 있습니까?
한국 교회와 함께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는 역설적인 문장이 등장합니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여기서 ‘사뿐히’라는 말은 가벼운 발걸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즈려 밟다’라는 강력한 단어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사랑하는 님을 보내지만, 동시에 보낼 수 없는 화자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설은 겉으로는 모순되 보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진리를 담아냅니다 복음 역시 역설적입니다
크신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높아지려는 자는 반드시 낮아져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봤을 땐 말이 안 되는 역설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복음의 역설이 나타납니다 힘써 하나님 나라를 전할수록 더욱 고난 당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크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며 겪는 역설적인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째, 좁은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바울은 지금 판결을 받고자 로마로 가는 최소의 신분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봤을 땐 승승장구하던 인생에서 몰락해버린 불쌍한 인생입니다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메인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2절입니다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하나님은 3차 전도여행 때 만난 아리스다고를 바울과 함께 동행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들은 가능한 죄인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른 척하고 멀어지려고 하는 법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죄수가 된 바울에게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님들 중에는 가족들 중 홀로 신앙생활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려다 보니 이전에 즐기던 친구들과 멀어진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가 복음의 길을 홀로 걷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동역자를 붙여 주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복음의 길은 때론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더 풍성히 경험하게 됩니다 가시밭길이지만 그 길을 기쁘게 뛰어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지금이 순간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역풍을 통해 무장하게 하십니다.
세상은 죄수 바울을 로마로 악성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바울이지만 그 길에는 수많은 역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역풍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강력한지 7절과 8절에는 두 번이나 간신히 이르렀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간혹 예수님을 믿으며 순풍에 돛단 듯 모든 일이 만사형통할 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바울과 같이 때론 역풍을 통해 그 길을 험난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소풍길이 아닙니다 거짓과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을 복음으로 점령하기 위해 가는 영적 전쟁의 길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역풍을 만날수록 내게 주신 사명을 재점검하게 됩니다 헛된 것을 깨부수고 복음으로 더욱 부장하게 됩니다
혹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장애물을 만나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을 더욱 든든히 붙잡길 축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9절과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에서 봤을 때 우리는 무명한 자입니다 죽은 자입니다 근심하는 자이고 가난한 자이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의 거짓말에 속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세상과 다르기에 역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통해 성도는 더욱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 역설의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게 될 축복합니다
하나님! 세상의 거짓말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복음의 역설이 가진 그 은혜에 더 깊이 거하게 원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더욱 든든히 계명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행 27:1-8 /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모두 바울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행 26:30-32), 바울은 이미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행 25:12), 이제 로마로 호송됩니다. 1절에서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 되매’라고 하여 드디어 바울의 로마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바울의 로마행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이 멀기도 하였지만, 중간에 여러 위험을 겪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였는데, 파선하는 장면과 선원들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백부장과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바울은 당시 가이사랴에서 그레데까지의 일반적인 항로를 따라갔습니다. 즉, 바울은 먼저 가이사랴에서 수리아와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27:1-5). 도중에 무라(Myra)에서 로마로 가는 큰 화물선인 알렉산드리아의 배에 옮겨 타고 그레데에 이르렀습니다. (27:6-8)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곡물 공급지였으므로 이집트와 로마 간에는 큰 무역선이 왕래하고 있었는데, 바울이 탄 배도 이런 곡물 선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배는 그레데 남방을 거쳐서 로마로 직항하는 수도 있었으나, 다른 항구에 기항하기 위해서 혹은 풍세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서 라새아 시에서 가까운 미항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의 항해 여정(행 27–28장)은 직항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항로(coastal route)를 따라가며 여러 차례 배를 갈아타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가이사랴) → 시돈 → 구브로 섬 북쪽 → 길리기아/밤빌리아 바다 → 루기아(무라), 무라에서 알렉산드리아 곡물 선으로 환승, 그레데(미항 → 라새아 근처) → 광풍 유라굴로 → 멜리데(말타) 난파 겨울을 말타에서 보냄 → 시라쿠사(시칠리아) → 레기온(이탈리아 남부) → 보디올(나폴리 근처) → 로마”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까지 항해한 거리는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직선거리로 약 2,300km이며, 실제 항해 거리(경유 포함)는 약 3,000~3,400km로 추정됩니다. (현대 항해 시뮬레이션 기준) 그리고 소요 시간은 가이사랴 출발(약 주후 59년 가을)해서 다음 해 봄 혹은 초여름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약 6개월 전후 소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몇몇 다른 죄수와 로마 군대인 황제 부대에 소속된 백부장 율리오(Julius)에게 넘겨져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될 것은 이미 사도행전 1장 8절에 제시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행 23:11) 그는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는 예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최고의 절정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항해와 파선 그리고 로마 입성과 선교였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과 그 결과와 사도행전의 바울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과 그 결과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7~28장의 바울의 로마 여정은 단순한 항해 보고서가 아니라,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가신 사건처럼 새로운 출애굽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로마 항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가신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새 출애굽의 역사가 전 세계로 확장된 사건이었습니다.
바다는 혼돈과 죄악을 상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제압하고, 복음을 열방으로 인도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11장 9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성경에서 바다는 혼돈과 악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창 1:2; 욥 26:12; 시 74:13–14) 다니엘 7장에서 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장면은 열국(이방)의 권세가 혼돈의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7:3-8) 요한계시록 13장 1~2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는 적그리스도가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에서 나타나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5장 2~3절은 출애굽의 홍해 사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출애굽 때의 홍해 사건을 연상케 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합니다. 하늘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새 출애굽의 백성으로 등장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건넜던 천상의 홍해 바닷가에 서서 홍해에서 ‘바로’로부터 구원받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했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장 1절에서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악과 혼돈이 완전히 사라질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갈릴리 바다(호수)를 건너 이방 지역(거라사,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 등)으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시는 동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고, 주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 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막 4:36-41) 그리고 요한복음 6장 16~21절에서 예수가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혼돈과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새 출애굽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예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예수가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변형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헬라어로 “ἒξοδον”(ἒξοδος)으로 출애굽을 의미합니다. (히 11:22; 벧후 1:15))
예수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과 바다 위로 걸어오신 표적은 바울의 로마 항해와 동일한 모습을 공유합니다. 예수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과 바다 위로 걸어오신 표적을 통해 새 출애굽을 완성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었듯, 바울 또한 풍랑과 난파의 사고를 당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가 완성하신 새 출애굽의 은혜와 역사가 지중해를 넘어 세계 중심인 로마와 땅끝인 서바나까지 전파됨으로써 모든 열방이 구원 얻게 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물론,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나 다른 사건도 매우 중요하지만, 출애굽 사건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하나님 구원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이사야 43장 19~20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여기서 ‘새 일’은 바벨론에 70년간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모세의 출애굽과 비교하여 ‘새 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새로운 출애굽”의 여정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에게 매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엡 2:2-3),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마귀는 심판을 받았고, 죄의 종노릇을 하던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날마다 나그네와 외국인과 같이 나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바다는 죄악과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예수는 그 바다를 갈라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본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히 4:8-11).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계 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