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이씨 시조 이천일...양산,공주,수원,전의이씨와 동조동원
시조: 이천일(李天一)
<氏族의 연원>
시조 이천일(李天一)의 시호(諡號)는 문무(文武)이며, 신라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5년에 중국에 초선(招選)되어 아우 이홍일(李弘一)과 더불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장원했다고 '癸酉譜' 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그 뒤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이 되고 흉노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이 되었다고 한다.
병(病)으로 귀국해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무(文武)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公州(公山)李氏族譜를 보면 시조가 이천일(李天一)이어서 양산이씨(陽山李氏)와 동원(同源)임이 드러난다.
언제부터 양산(陽山)과 공산(公山)이 갈렸는지는 각기 족보 서문이나 발문(跋文)에 밝혀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족보의 손록(孫錄), 또는 세계표(世系表)를 보면 분관연혁이 나온다.
34세 이교송(李喬松)은 공산이씨(公山李氏)로 분적(分籍)되었고, 아우 이자송(李子松)은 수원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31세 이백령(李栢齡)이 元나라에서 세운 공으로 충민(忠敏)이라 시호(諡號)되고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져 양산이씨(陽山李氏)로 분관된 것이다.
손자인 이인의(李仁義)도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진 사실이 '癸酉譜' 손록(孫錄)에 보인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고 43세 이항무(李恒茂)가 세조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이씨(陽山李氏)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本貫地 연혁>
양산(陽山)은 경기도 양지현(陽智縣)의 옛 이름으로 양양(陽良) · 추계(秋溪)라고도 한다.
양지(陽智)는 본래 수천(水川)의 양양부곡(陽良部曲)인데, 조선 정종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으로 만들었다.
태종13년 현(縣)의 읍내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죽주(竹州)의 고안(高安) · 대곡(大谷) · 목악(木岳) · 제촌(蹄村) 등을 분할하여 소속시켰으며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옮겨왔다.
1895년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하였다.
주요 성씨로 李, 朴, 柳, 安씨 등이 있다.
<주요 世居地와 변천>
'己丑譜'에 보면, 선대의 세거의 터를 짐작하기 어렵고 29세 이승경(李承景)의 대부터 전북 남원(南原), 충남 공주(公州) 등지에 양산이씨(陽山李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34세 이교위(李喬違) 이하 5대가 실전(失傳)하였으나, 이교위(李喬違)가 충남 부여(扶餘)에 살기 시작했다고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일부 자손들은 한동안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42세 이중손(李仲孫)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땅으로 옮겨왔고, 이중손(李仲孫)의 5대손 이성(李晟)이 다시 지금은 경북 영천군(永川郡)에 속해 있는 신녕(新寧)의 사천(沙川)에 가 자리잡은 이래, 영천군(永川郡) 일원에 세거해온 것으로 보인다.
<氏族史의 개요>
'己丑譜'서문에 보면 "양산이씨(陽山李氏)는 공주(公州), 수원(水原), 전의이씨(全義李氏) 등과 동조(同祖) 동원(同源)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양산이씨(陽山李氏)는 30세 이희안(李希顔)이 宋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귀국, 고려 문종 때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태상(太常)이라 시호(諡號)되었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己丑譜'손록(孫錄)에 적혀 있다.
큰 아들 이송령(李松齡)의 현손(玄孫)대에 공주이씨(公州李氏)와 수원이씨(水原李氏)가 분관되었는데 양산이씨(陽山李氏)는 바로 이송령(李松齡)의 아우 이백령(李栢齡)이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양산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함은 창씨편에서 말한 대로다.
그러나 35대 이후 5세譜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이 뚜렷치 않다가 40세 이당(李棠)이 조선 태종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고 아들 이근(李根)은 세종조에 이천현감무(伊川縣監務)를 지냈으며 손자 이중손(李仲孫)이 문종조에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냄으로써 양산이씨(陽山李氏)의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들 이항무(李恒茂)가 뛰어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조조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양산군(陽山君)에 습봉된 분이다.
충간공(忠簡公) 이승수(李承須)는 45세로 그의 손자이다. 중종11년 문과에 올라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오르고 충간(忠簡)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양산이씨(陽山李氏)가 확고한 기틀을 잡은 것은 조부 이항무(李恒茂)에 이은 이승수(李承須)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충간공(忠簡公) 묘갈명(墓碣銘) 중에는 그의 관력(官歷)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곧 중종11년에 등과하여 권지교서관(權知校書館) 부정자(副正字)를 지낸 뒤 이듬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다음해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다.
중종14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겨, 17년에는 장락원첨정(掌樂院僉正)을 지낸 뒤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고 19년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듬해에 수찬 교리(修撰校理)를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다.
그는 목민관(牧民官)으로도 이름을 떨쳐 교민효제(敎民孝悌)로 선정(善政)을 쌓았다고 한다. 이듬해에 낙안현감(樂安縣監)으로 부임한 뒤 그 치적이 더욱 빛이 났다고 한다.
그 뒤 내직(內職)으로 돌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마지막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이수전(李守全)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명종 때 음사(蔭仕)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낸 분이다.
그 후손으로 이시욱(李時郁), 이동원(李東元), 이성춘(李成春) 등이 환로(宦路)에서 명맥을 지켜낸 분들이다.
1985년 당시의 씨족세(氏族勢)는 5천명에 가까운, 어찌보면 분관(分貫) 이후의 역사에 비추어 고단한 씨족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이씨(陽山李氏)가 널리 알려질 만큼 성세(盛勢)를 떨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영고(榮枯)가 무상(無常)한 것이라 한다면 씨족의 선대(先代)인물의 혈통으로 보아 번연(蕃衍)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양산이씨 시조 이천일...양산,공주,수원,전의이씨와 동조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