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랏 여정 후기
십이월 첫날 금요일이다. 전날 자정을 앞두고는 베트남 남부 고원 달락 외곽 공항에 머문 때였다. 초등 친구들과 사흘을 함께 보내고 우리나라로 돌아갈 여장을 꾸려 정해진 출국 절차를 밟아 베이젯 항공사 여객기를 타려고 대기 중이었다. 남국 휴양지에서 일정을 마치고 가족 품으로 돌아가려는 관광객들은 다소 지쳐 보였지만 낯선 자연 풍광에 힐링이 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는 가족만큼,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고향 친구들과 보낸 며칠이었다. 잠시 뒤 탑승하면 국내와 2시간 늦은 시차로 자정을 넘겨 아침 7시 이후 김해 공항에 닿지 싶다. 친구들은 출국장 의자에 앉아 여행지에서 못다 나눈 정담과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가늠했다. 나는 촌음이 아까워 노트북을 꺼내 현장 스케치를 워드로 입력했다.
트랩을 따라 기내로 드니 베트남 국적 비행기는 정한 이륙 시각 칠흑 하늘을 날았다. 전날 머문 나트랑 숙소에서 짧은 숙면과 달랏으로 장시간 버스 이동으로, 탑승하자 좌석의 불편함도 아랑곳하지 않고 곤한 잠에 빠졌다. 두어 시간 잠에서 깨고 보니 좁은 공간에 다리는 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몸이 으스스 추웠는데 머리 바로 위는 에어컨 바람이 나와 덮개를 가렸다.
한밤중 어둠을 뚫고 새벽을 날아간 비행기는 제주도 부근을 지나자 창밖은 아침 해가 뜨는 붉은 기운이 서렸다. 다대포와 을숙도 어디쯤부터는 지상의 불빛이 드러나면서 부산 강서 일대 새벽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김해공항에 닿아 출국장을 빠져나오니 예상했던 추위는 덜 느껴졌다. 공항 바깥 사설 주차장이 밀집한 식당에서 친구들과 선지해장국을 먹으면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베트남에서 며칠 보내며 두터운 우정을 확인한 친구들은 타고 왔던 차에 세 팀으로 분승해 귀가를 서둘렀다. 닷새 전 월요일 새벽 지났던 길을 되짚어 이른 아침 창원터널을 통과해 시내로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를 홀로 두고 무심 무정하게 남편만 바깥바람을 쐬고 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집안에 들여놓은 캐리어 짐 정리를 내가 하려니 그냥 두라고 해 샤워 후 잠에 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들어 늦은 오후 깨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여행지에서 보낸 후일담을 나누었다. 앞으로 아내와 동행하는 바깥나들이 기회를 마련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여건이 그렇게 주어질지 미지수였다. 수년 전 나이 예순이 되어 뒤늦게야 아들의 강권으로 여권을 처음 발급받아 대만에 며칠 다녀옴이 해외 견문의 전부라 우물 안 개구리였고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드물게 나가본 이번 바깥나들이에서 세 가지를 배우고 왔다. 베트남 남부 고원 랑비앙산 소수 적대 부족 사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았던 전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경비를 들여 네덜란드나 지중해로 가지 않고도 사계절 꽃이 피는 정원과 자연에서 눈 호강을 했다. 달랏의 드넓은 농경지와 비닐하우스 단지에 꽃과 채소를 가꾸어 소득을 높여준 김진국 박사가 자랑스러웠다.
특히 동아대에서 원예학을 공부해 대구 어느 대학에 재직했다는 김진국 박사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달랏과 인연이 닿았다. 난초 연구가 김 박사는 세계 유일하게 동양란과 서양란을 동시 재배할 수 있는 달랏에서 비닐하우스 농법으로 주민들의 소득을 높여주어 현지에서 세대 불문하고 존경한다고 했다. 고 김우중 사장이나 박항서 감독보다 먼저 더 유명한 인사가 김진국 박사였다.
한편 근래 며칠 사이 독특한 경험을 하나 더 하고 있다. 출국장에서 통신사 로밍을 하지 않았음에도 와이파이가 잡히던 숙소에서 낯선 전화번호의 부음 문자가 날아와 열어보게 되었다. 이후 국제 전화까지 왔으나 받지 않고 무시하고 귀국했는데 내 휴대폰이 헤킹 되었던 모양이었다. 주말을 앞둔 저녁 시간에 떨어져 사는 아들과 주변의 지기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송구했다. 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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