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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에 밀려가는 배
행 27:9-20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9-20 / 거기서 우리는 여러 날을 머물러 있어야 하였다. 금식하는 절기도 지나 그 해도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었으므로 장기간의 항해를 하기에는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원들에게 말하였다. 10)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항해를 계속하다가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오. 파선으로 배에 실은 물건들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오.' 11) 그러나 죄수들의 호송을 맡은 장교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12) 게다가 그 `아름다운 항구'는 사방이 틔어 있어서 겨울을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점도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선원들도 해안을 따라 뵈닉스까지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뵈닉스는 그레데 섬에 있는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만 틔어 있어 온화한 곳이었다. 13) [바다에서 만난 태풍] 때마침 온화한 남풍이 불기 시작하여 항해하기에는 좋은 날씨로 보였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해안을 따라 나아갔다. 14-1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휘몰아쳐서 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밀어냈다. 선원들은 배를 해안 쪽으로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알자 아예 포기해 버린 채 바람이 부는 대로 맡겨 두었다. 16) 배가 가우다라는 조그마한 섬 뒤로 밀려들자 그들은 뒤에 매달려 오던 구명선을 간신히 갑판 위로 17) 끌어 올려 선체가 부서지지 않게 밧줄로 동여맸다. 그리고 그대로 가다가는 아프리카 해안의 모래톱에 처박힐까 두려워서 돛을 내리고 바람이 부는 대로 떠내려갔다. 18) 이튿날 파도가 더욱 높아지자 선원들은 배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19) 그 다음날에는 배의 장비마저도 내던질 만한 것은 다 내던졌다. 20)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며칠이나 계속하여,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폭풍만 휘몰아쳐서 우리는 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린 상태였다.
율리오의 감독 하에 바울을 호송하던 배는 항해 중에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하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더 믿더라(9-11)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역풍으로 인하여 항해가 지체되었습니다. 또한 금식하는 절기(속죄일)가 지나면 지중해는 시기적으로 항해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갈 것인지, 그냥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 바울은 이번 항해에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곡물 운반선은 로마 정부의 통제 아래 운항되었기에 결정권은 결국 백부장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 항해하도록 했습니다.
더 많으니(12-13)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한 곳이므로 더 안전하고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했습니다. 또한 승객들도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미항을 떠나려 할 때 때마침 순풍이 불자 백부장과 선장, 선주, 승객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줄 알고 닻을 올리고 그레데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14-20) 항해를 시작했을 때 순풍이 갑자기 태풍 유라굴로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은 유라굴로로 인하여 배를 더 이상 조절할 수가 없게 되어 바람에 밀려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광풍에 밀려가다가 작은 섬 가우다를 지날 때 배의 고물에 달고 다니는 거룻배를 끌어올렸습니다. 혹시 배가 모래톱에 걸리게 될까봐 돛을 내린 채 표류하고 있을 때 사공들은 배의 짐과 기구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폭풍우로 해와 별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해와 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일기가 나빴다는 것뿐만 아니라 항해자들이 배의 현재 위치를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적용: 바울의 충고를 무시한 결과 유라굴로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겪었던 일들을 나누고 그것이 지금 어떤 유익이 되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요동치는 배 한가운데에서 그저 광풍에 밀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심히 애쓰는 우리의 인생여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호크마 주석
=====27:9
금식하는 절기 - 이는 디스리 (Tishri)월 (태양력으로 9-10월경) 10일에 지켜졌던 속죄일을 의미한다(민 29: 7-11). 브루스(Bruce)에 의하면 로마 여행 당시인A.D.59년의 속죄일은 태양력으로 10월 5일경이었다고 한다.
=====27:10
내가 보니...손해가 있으리라 - 바울은 지금이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계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또한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고후 11:25). 따라서 바울은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낸 후에 다시 항해를 계속하는것이좋겠다는 권고를 할 수 있었다. 혹자는 본절에 언급된 이 바울의 말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점을 고려하여(18, 19, 38, 41절),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하나(Haenchen), 이것이 그의 경험적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예언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무시하지않고 그것을 통하여서도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27:11
백부장이...더 믿더라 - 바울과 선주측 (선장은 포함)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있었는데, 그것은 겨울을 이곳 미항에서 나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전자를 주장했고(10절), 선장과 선주는 후자를 주장했다(12절). 여기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 백부장이 이 배에서 가장 높은 로마의 장교였고, 그 배는 로마 정부와의계약관계로 로마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부장의 입장으로는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21, 22절)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제안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 배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될 것이다(10절).
=====27:12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 공동 번역에는 '그 항구는 겨울을 날 만한 곳이 못되어'로 되어 있다. 여기서 '과동'(過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케이마조'(* )는 '통과하다' 를 뜻하는 '파라'(* )와 '겨울'을 뜻하는 '케이몬'(* )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겨울을 통과하는 것' 즉 ' 겨울을나는 '것을 뜻한다.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 하지 않은 이유로 숙소롸 구하기 힘들다는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만이 적고 추워서 겨울철의 거센 폭풍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Bruce, Lenski).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 '뵈닉스' (Phoenix)는 감람나무'라는 뜻을 가지고있는데. 그레데 섬의 서남쪽 끝에 있으며 미항으로 부터는 약 6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항구이다. 오늘날에는 '루트로'(Lutro)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미항에 비해 겨울을나기에는 적합하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지형적 조건올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Smith). 본절에 의하면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나자고 하는 의견과 미항에 머물면서 겨울을 나자는 의견으로 갈린 듯하며 뵈넉스를지지하는 자가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카타 리바카이 카타코론' ( * )은 문자적으로 '남서를 향하여 '그리고 북서를 향하여'라는 의미이다(Bruce, Meyer). 따라서 개역성경의 '동북,동남을 향하여'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뵈닉스 항구의 양쪽 입구가 각각 북서쪽과 남서쪽에 있고 서쪽면에는 큰 만이 있어서 마치 이 항구가 서쪽을 향해 활짝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 때마침 불어준 남풍은 뵈닉스로 옮기기로 한 결정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심하여 닻을 감아 올리고 그레데 해변에 바짝 붙어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했다.
=====27:14
유라굴로라는 광풍 - 순풍에 의지하여 순항을 하던 배가 마다라곶을 돌아서 멧세라만에 들어서자 갑작스런 태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기서 '광풍'(* ,아네모스 뒤포니코스)은 '태풍'을 가리킨다. '유라굴로'(* , 유라퀼론)는 '동풍'을 뜻하는 헬라어 '유로스'(* )와'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낄로'(aquilo)의 합성어로 '동북풍 '을 가리킨다. 이바람은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바람인데 남풍이 그레데섬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 Km 높이의 이다(Ida)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기류의 충돌로 생긴 태풍에 휩싸이면서 강력한 북동풍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 무책으로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히면 파선하게 되는 것이다.
=====27:15
배가 밀려 - 유라굴로에 걸려든 배는 바람이 불어가는 대로 밀려갈 수밖에 없게된다. 물론 선장 이하 선원들이 배를 조종 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바람과 파도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한 최선의 노력을 하 다고 있지만 배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27: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 본문의 표현 대로 작은 섬이며, 뵈닉스에서 남서쪽으로35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그러니까 배는 상당한 거리를 떠밀려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배가 가우다섬 아래로 밀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이 섬이 조금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선원들은 배고물에 매달려 위태했던 거룻배를 갑판 위로 끌어 올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거룻배는 배고물에매달아 끌고 다니지만 거친 폭풍을 만나면 배에 부덫혀 파선될 위험이 있으므로 갑판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이 거룻배는 큰 배가 암초에 걸려 파선하게 될 경우타 항구 시설이 없는곳에 비상 상륙을 해야 될 경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7:17
끌어 올리고... 선체를 둘러 감고 - 거룻배 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폭풍은여전히 몰아쳤으므로 그것을 끌어 올리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 어려움을표현하기 위해 누가는 7절에서와 같이 '간신히'라는 표현을 쓰고있다(16절). 줄을 가지고 선체(船體)를 둘러 감은 것은 배를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에는 배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했므로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배의 견고성을 강화시켜야 했던 것이다. 스르디스 - 이는 바다에 있는 모래톱, 모래 수렁, 또는 유사 (流砂)를 가리킨다.그레데 서남방으로는 이 스르디스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큰 것으로(Syrtis Major)구레네 서쪽의 아프리카 해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작은 것으로(Syrtis Minor) 카르다스(Carthase) 부근에 있다. 본문의 스르디스는 큰것(Syrtis Major)을 가리킨다고본다(2Bruce, Lenski). 연장을 내리고 - 스르디스에 걸리면 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선장은 아직 스르디스와는 먼 거리에 있지만 미리연장을 내려 대비시키고 있다. 이처럼 미리 대비해야 하는 이유는 태풍이 불어오면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므로 (20절), 언제 그곳 까지 밀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장'(* ,스큐오스)이 무엇을 가르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배에서 사용되는것들, 그러니까 돛, 돛대, 닻, 밧줄, 등을 가르키는 것으로 본다(Zahn, Robertson,Bruce). 결국 배의 선원들은 배가 서남쪽으로 떠밀려 가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하여 돛을 내리고 닻을 내리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27:18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 본문은 폭풍이 조금도 약화 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짐을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항해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버리는 장면은 욘 1 : 5에서도 볼 수 있다. 혹자는 점점 차는 바닷물로 인해 무거워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비교적 무거운 곡물을 버렸다고 보기도 하나(Breusing), 38절에서 곡물을 최종적으로 버리는점을 고려할 때 본문에서는 갑판 위에 있던 수하물을 버린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Renie)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27:19
배의 기구를...버리니라 - 많은 짐을 버렸음 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 지지 않았다. 다음날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 했다. 여기서 '기구'(* ,텐스큐엔)가 뜻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등을 가리킨다고보는 견해와(Breusing, Preuschen, Jacquier) 침구, 테이블, 의자 등과 같은 것이라고보는 견해가 있다(Lenski, Meyer, Vincent).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배의 무게를 많이 줄여야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겨우 움직일 수있는 전자를 버리는것이 후자를 버리는 것보다 배를 가볍게 하는데는 효과적이므로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한편 본절의 '저희 손으로'라는 표현은 뱃사람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을 버려야만하는 비참한 상황을 강조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를 가지는데, 그것은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한 불신의 결과였다(10절).
=====27:20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 바다의 풍랑은 잠잠 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늘에 끼인 짙은 구름은 낮의 해와 밤의 별빛을 완전히 차단 하였으므로 배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채 절망적인 표류를 하고 있었다. 항로를 이탈한 배에게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해와 별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 어디서 암초를 만나거나 모래톱에 걸려파선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무방비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살아 돌아갈 희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선장과 선주이하 선원들은 전문가로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나(18, 19절)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는 절망뿐이었다.
< 설 교 >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행 27:9-25 / 지태일 목사
미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의 어느 사람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지금 한국에 가도 괜찮느냐? 가도 안전한지 물을 정도로 외국에서는 한국이 무슨 전쟁발발 일보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는 이라크전쟁 문제를 연일 보도하고 있고,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고 서슴치않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의 핵무기가 세계 두 번째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없다, 만들고 있다. 미국철수냐 감축이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도처에 시위가 끊이질 않고 반전,반미 시위가 끊이질 않습니다. 정기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하려고 미국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부산에 입항해야 하는데 훈련반대, 전쟁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물가가 오르고 기름값이 최고치를 기록하고 주식이 떨어지고 달라 환율이 오르고 외국 투자자들이 빠져 나가려 하고 들어오지는 않고 몇 달 동안 무역수지가 적자로 벌써 돌아섰고 아직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잇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도 권력을 잡았으니 이동하는중 여러 가지 잡음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제도 교육도 기업도 그 어디에도 소망의 빛을 비쳐주는 곳이 없는 시대입니다. 검찰도 술렁거리는 원치 않는 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이런 저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질병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업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위기도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요즘 나라나 우리 사회 현실이 마치 망망한 바다 폭풍이 몰아쳐 풍랑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호라는 배도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납니다. 거기에는 당시 로마 총독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는 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또 바울을 호송하는 백부장과 그 일행, 여행객과 상인 등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항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러차례 전도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일기관측법과 영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가 겨울철이고 지중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여서 항해가 어려우니 겨울철이 지난 후 떠나자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보다 떠나도 된다는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소중하게 벌어 모았던 하물, 그리고 승객들의 짐들을 다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일부 사공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려 합니다. 비상시 쓰려는 선박을 내려 도망을 치려 합니다. 남이야 죽던 말던 자기들의 생명만 부지하려고 도망칠 궁리를 합니다.
거기다가 14일간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몰아쳤으니 배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해와 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배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살 소망이 끊겼습니다. 그러니 고생은 죽도록 하였어도 살길이 보이지 않으니 먹을 의욕도 없고 결국 다 죽게 되었습니다.
갖은 고생고생 했는데도 길이 안보입니다.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그저 될 때로 되라식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람니다. 결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답도 방법도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1.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11,21절).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21절을 보면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려 떠났다가 배가 파도에 휘말려 좌초당했습니다. 선장은 배를 움직이는 노숙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요, 선주는 배의 소유주로서 사업가입니다. 한데 바울은 항해의 비전문가이며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자기의 경험을 내세우고 사십니까? 자기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타산적인 욕심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영적 판단을 무시하고 경시하면 유라굴로의 광풍을 만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출발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비합리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만 가야합니다. 그래야만 일고있던 광풍도 멈추고 우리의 삶을 소망의 항구로 이르게 합니다. 인간의 정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탄 사람들이 왜 광풍을 만났습니까? "그럴듯하다. 그럴싸하다"라는 세상적인 욕망에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미풍이 불어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인간의 재주나 기술이나 돈이 우리를 풍랑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백부장은 신앙인인 바울의 말을 따랐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로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 인생의 풍랑을 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람니다. 초창기에 이민한 어떤 사람이 이제는 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헌데 날씨가 좋으면 골프, 비가 오면 보트타고 낚시하는데 미쳐, 교회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내는 가출,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 딸은 정신이상, 자신은 간암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풍랑이 그 가정에 몰아 닥쳐왔습니다. 비로소 그는 무릎꿇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 풍랑의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삶의 결정은 자신의 생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결정 여하에 따라서 광풍을 피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을 경시하고 과학기술, 인간의 경험, 물질을 중시하는 결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부르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고집을 피우다 풍랑을 만났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잃었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가 고집 부리고 떠났다가 풍랑 만난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인생의 풍랑을 안만나려면 그것은 "고집을 버려라, 고집 부리지 말고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의 고집을 아집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23-25,34절).
23-25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약속, 말씀이 나옵니다. 배가 좌초되어 위경을 헤매던 어느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합니다.
배가 좌초되어 위경을 헤메고 있던 어느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걱정마라 내가 이 배에 탄 276명의 생명을 네 손에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외쳤습니다.
비록 그 때 상황은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안개와 비바람 때문에 해와 달은 몇 날째 보이지 않고, 배고픔과 추위는 겹치고, 배에 있는 물건들은 다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심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노라"고 소리쳤습니다. 누가 안심하고 살수 있습니까? 누가 거센 인생의 풍랑과 비바람과 안개와 폭풍우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습니까? 누가 좌초하고 있는 배속에서 안심하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살게 되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경험과 지식, 감정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확신이요, 신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인생의 풍랑을 만난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복잡하고 얽힌 문제를 놀랍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믿음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인생을 결정하고, 세상사람들의 말을 쉽게 따라가는 자의 앞날은 얼마 못가 유라굴로 광풍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선장의 기술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주의 돈도 무력합니다. 백부장의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그어떤 것도 유라굴로 광풍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를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요소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불롱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막강한 함대가 있었던 그는 해군대장에게 폭풍을 거슬러 전진할 것을 명령하고 바다를 정복하라고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풍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폴레옹이 탄 배가 성난 파도에 휘말려 거꾸로 처박혀 박살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이 200명이 넘는 불쌍한 군사들은 모두 수장을 당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앞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권력 따위는 숨도 쉬지 못합니다. 인간의 똑똑함도 허사입니다. 사람의 인생 길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신앙적으로 합당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배멀미를 하는 모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뜻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에도 일시적인 형통이 있음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항로에는 반드시 유라굴로의 광풍이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인생의 폭풍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적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35-37절).
35-37절을 보면 풍랑을 만나 죽을 상황에 처한 알렉산드리아호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일어나시오. 먹으시오. 안심하십시오.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하고 위해 기도하는 자입니다. 함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함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영적 교제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찬을, 애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정말로 믿는다면 가장 바쁠 때, 가장 힘들 때, 그리고 가장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면 그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결코 모른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이라는 큰 풍랑을 만남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오리혀 찬송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나라적으로, 국제적으로 풍랑을 당하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해야합니다. 그것이 예배요, 성도와의 영적 교제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문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개인 사업도 그렇습니다. 영적 교제가 우선 순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먼저 행하는 것이 풍랑에서 구하는 길입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몰라서 주일도 예배도 교화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산다 하더라도 적어도 구원을 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것에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시간 나는 사람이나, 할 일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풍랑은 절대로 해결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명을 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보입니다. 사명을 안고 사랑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풍랑을 만나 끝장이라고 말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며 손을 잡고 함께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인생의 풍랑속에서도 믿음으로 외치며 힘들어 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소망의 말을 주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인생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바울이 타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로 쓰러져 있는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과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며 함께 동행해주는 사람이 옆에 계십니까? 그러면 축복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여러분 각자 각자가 축복속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그런 삶을 사시기 바람니다.
부정적이며 절망적으로 말하는 자가되기 보다는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신앙적으로 외치는 바울과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람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 가신 길만을 따라 가기 바람니다. 주의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따라 가시기 바람니다. 늘 예배하며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며 함께 함으로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 말고 또 풍랑속에서도 넉넉히 이겨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03장 고요한.... 큰 믿음 주소서)
희망이냐 절망이냐
행 27:9-26 / 엄기호 목사
로마로 항해하던 알렉산드리아라는 배가 그레데 항구 부근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승선해 있었습니다. 선장과 선주, 여행객과 군인 또는 선원과 장사꾼 등 276명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죄수 몇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로 호송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에 밀려서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물결따라 바람따라 흘러가는 대로 쫓겨가는 배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노력도 소용이 없었고 구조작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 포기하고 그냥 쫓겨가는데 악천후에 광풍은 계속되는 절망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사공들은 고생 고생하다가 배의 모든 짐과 재산과 소유를 바다에 던져 버렸고, 또 배의 기구도 저희 손으로 다 버렸습니다. 풍랑 때문에 다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짐은 버릴 수 있고 재산과 소유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의 기구를 버려서는 절대로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배의 기구들은 고장난 배를 고치고 점검하면서 로마까지 배가 운항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풍랑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일간이란 여러 날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밤의 별빛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풍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의 풍랑, 환경과 인생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풍랑을 해결하기 위해 토정비결이나 점이나 관상을 보고 자선을 행하고 도를 닦아 보지만 그렇게 해서 되지 않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 해도 햇빛도 밤의 별빛도 보이지 않는 철저한 절망이요 완전한 절망이요 빈틈이 없는 절망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길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전쟁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나 세상향락에 빠졌을 때 다시 말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들로 이스라엘과 전쟁케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 하였을 때였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들이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웨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야웨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이라크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연합국측은 ‘테러 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기적인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 해방을 위해서다’라고 말합니다. 또 반전 주장자들은 이번 전쟁이 ‘이라크의 석유 때문이다’, ‘미국의 오만한 패권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도 우리 기독교인은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삶도 주관하고 계시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도 주관하고 계시고, 세계 역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이라크 전쟁도 우리는 하나님의 수중이라는 것, 이 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TV뉴스에서는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을 말하지만 우리는 물 아래에 있는 더 큰 빙산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말하지만 우리는 그 속의 의미까지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말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미국을 무조건 비난하며 반전데모에 절정을 이루고있지만 우리는 20년 동안 이라크 국민들을 볼모로 잡고 철권을 휘두르며 공포정치를 했던 후세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하고, 또 악한 흑암의 세력에 붙잡혀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읽어야 합니다. 세상은 반전을 제창하는 사람들을 영웅취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전을 외치는 주장 이면에는 추악한 이권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보다 이 전쟁을 이슬람권의 선교에 대한 관점에서, 세계 복음화에 대한 하나님의 눈으로 믿고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절망 가운데 있었을 때 단 한사람 바울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다 죽게되었다고 275명의 사람이 절망하고 있을 때 오직 사도 바울만이 입을 열고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275명의 절망과 단 한 사람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275대 1입니다. 싸움이라면 이미 승부가 난 싸움이고 투표라면 이미 결과가 난 투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생각해 봅시다.
왜 그들은 절망했나요?
275명의 사람들이 왜 절망했습니까? 왜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과 부자들이 절망하고, 어째서 지식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나요? 그들의 절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풍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소중한 재산과 짐 그리고 배의 기구들을 다 버렸기 때문이며 그래도 풍랑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미항에 이르러 어디서 겨울을 보낼까 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때 배의 호송을 맡고 있던 백부장은 미항에서 과동하자는 바울의 의견보다는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선택하였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바다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의견을 따르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 선택은 얼마 가지 않아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뵈닉스에 닿기도 전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의 말보다 인간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것이요, 선장과 선주가 비록 바다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바다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생의 항로에는 언제나 무서운 풍랑과 암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풍랑으로 인한, 절망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가지고도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도, 물론 지식을 가지고 있다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 순풍에 미혹되어 평안을 추구하려다가 끝없는 고난의 암초, 환난의 풍랑에 걸리지 말고, 현재의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고 영원한 평안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과 지혜를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왜 희망을 가졌나요?
똑같은 바다에서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풍랑도 같고 버린 물건도 같고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는 상황도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의 손에는 수갑까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파도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해와 달과 별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풍랑에 흔들거리는 배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선원들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나의 속한 바 되신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희망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 파도를 바라보면 누구나 절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이 모든 저주와 질병, 연약함과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절망의 계곡에서 소망의 정상으로, 눈물 골짜기가 희락의 연회석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 희망의 파장은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의 말씀을 응답으로 받은 후에 낙관적인 시야를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소망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성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들이기에 꿈이 있고 그 꿈은 성공적인 삶으로 인도 받게 하며 큰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파도가 일어나고 해와 별이 보이지 않게 되면 쉽게 절망하고 맙니다. 이제는 끝장이라고 자포자기 한 채 세상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져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보았고, 희망을 외치던 바울 때문에 276명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멜리데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든지 인생의 항로에서 크든 작든 파선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혹시 불안과 공포, 두려움에 짓눌려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 항로가 아무리 험할지라도, 큰 파도가 치고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고 모든 짐과 재산을 다 버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구를 버리는 갖가지 위기가 다가왔다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과 영광과 승리를 바라봅시다. 희망이냐 절망이냐는 바로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여러분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환상이 있는 사람
행 27:9-26 / 손상률 목사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그 당시 권력의 심장부인 로마를 최종적인 공략의 목표로 삼았습니다(롬 1:15). 하나님은 바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총독 베스도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행 26:32). 그는 미결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호에 몸을 싣고 행선하던 중 그레데 해역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과 승객 모두 열나흘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공포에 쌓여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은 환상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23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한 그의 증언은 적중하였습니다.
1. 예견(豫見)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보는 자(先見者)입니다(삼상 9:9).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먼저 보고 먼저 아는 자이며 그것을 백성에게 증거하는 자입니다.
1)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자이기 때문에 사고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사람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판단합니다. 바울이 타고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가 미항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백부장에게 시기적으로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이니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신뢰했습니다(11절).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사람은 백부장처럼 사람들의 기쁨에 따라 결정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연현상이나 주어진 환경을 통하여 그의 의중을 깨닫게 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열려진 마음으로 계시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이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평소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어서 매순간마다 작동하는 성령의 사인과 환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행 16:9, 18:9, 23:11). 언제나 깨어 있는 영혼은 하나님의 계시에 민첩한 반응을 나타냅니다(삼상 3:10). 기도에 힘을 쓰며 경건한 삶을 통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에 민감한 사람입니다(엡 1:17-19).
3) 효과적으로 대처합니다.
계시와 환상에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계시나 환상은 신비적 요소가 있어서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잘못 대처하게 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요한1서 4:1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유의 은사나 신비적 사건을 감정적으로 대처할 경우 신앙의 균형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계시와 환상을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혹시 자만할까 봐서 육체에 찌르는 가시로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1-7).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자기가 행할 일을 지혜롭게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2. 자기의 소임에 충실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이 바울의 의견을 무시한 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서 출항했으나 곧 유라굴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자기의 소임에 충실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라야만 했고, 많은 군중들의 향배에 따라서 생각을 바꾸기도 했지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는 어떤 상황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 그를 로마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곧 그를 가이사 황제 앞에 세우고 권력의 심장부를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풍랑 속에서 죽어 가는 선원과 승객들을 모두 바울의 손에 붙여 그들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23-24절).
2) 자기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 전도자로서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게 하는 사명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풍랑 가운데서 자기 혼자 살기를 꾀하지 않고 그에게 맡겨준 모든 사람을 다 살려내기 위하여 헌신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여론이나 주변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도 그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나 적응하는 일체의 비결을 가졌습니다(빌 4:10-12). 여기서도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으로 새힘을 주었습니다.
3)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형통하고 잘나갈 때 큰소리치던 사람도 위험에 처하게 되면 저 혼자 살려고 비굴하게 행동하지만 복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범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 때 의기양양해 하던 선장과 선주는 유라굴로 풍랑을 만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13-19절). 심지어 사공들은 저희들만 살기 위하여 야음을 틈타 도망할 궁리를 하였습니다(30절). 그러나 바울은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 중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34절). 그는 또 열나흘 동안이나 먹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사한 다음 먹도록 권유하여 기력을 찾도록 일깨워 주었습니다.
3.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환상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요셉은 형들의 곡식단과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제게 절을 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힘든 날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맛보았습니다.
1)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23-25에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바울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가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 신종합니다.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이 지향해야 될 믿음과 행함의 기준이 되는 유일한 도리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만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마 13:11).
2) 복음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기독교 복음의 신비로운 도리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할 것 같으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3-4). 바울 자신은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택정을 받았고 또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롬 1:1-2). 그는 평생 동안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그래도 복음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16). 그의 말대로 복음이 능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간섭하였습니다(행 27:44).
3)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반드시 성취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지를 로마로 정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객들이 수십 명씩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길을 백부장이 호송하게 하였습니다(행 27:1-3). 알렉산드리아호가 조난을 당하여 침몰했지만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은 모두 구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상륙한 멜리데 섬에서 추장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로마에 입성하여 그곳을 복음의 거점으로 확보하고 기독교의 성지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말년에 로마 옥중에서 순교를 했지만 그곳에서 기록한 옥중서신들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영원한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시계(視界) 제로와 하나님의 비밀
사도행전 27장 9-26절 / 조용기 목사
■ 심한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치며, 짙은 안개가 낄 때 눈앞을 바라보는 시계는 제로가 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호주의 애들레이드에서 대 부흥회를 인도하고 그 다음 퍼스에서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호주의 항공사가 파업을 하게 되어 비행기가 한 대도 뜨고 내릴 수 가 없었습니다. 애들레이드에서 퍼스까지는 대형여객기로 3시간, 자가용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리하여 퍼스의 성회 관계자에게 ‘항공사 파업으로 갈 수가 없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퍼스에서는 ‘성회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성도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못 오시면 낭패에 처하기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좀 께름칙했습니다. 얼마 후 조그만 자가용 비행기가 도착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수동으로 작동되는 것으로 자동항법장치도 없어 고속도로를 따라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약 3시간쯤 지났는데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구름이 꽉 들어차서 시계 제로가 되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행기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를 조종하던 집사님이 벌벌 떨면서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불시착이라도 하면 호주는 너무 넓기 때문에 우리들의 시체를 한달 후에나 찾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폭풍이 너무나 거세 시계 제로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를 조종하던 집사님은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라디오 주파수를 따라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니까 주파수를 찾을 동안 목사님께서 조종간을 좀 붙들고 계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일생에 비행기 조종을 해본 일이 있나요?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으니 별 도리가 없습니다. 조종간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정관을 잡고 ‘주여 살려주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폭풍우를 지나는 순간은 마치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2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데 멀리서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퍼스의 불빛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운 불빛이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불빛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서 퍼스에 도착하니 비행장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안전하게 오도록 기도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안전하게 도착한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곳 성도들은 우리가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와 시계 제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제자들에게는 시계 제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3년반 공생애는 기적과 권세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으로 곧 천년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처자, 전토, 직업을 떠나서 3년여 동안 따라다녔는데 이젠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3일 후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해서 시계 제로가 될 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시계 제로의 절망이 아무리 짙을 지라도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세계 제로를 체험한 신앙의 위인들
성경을 보면 시계 제로를 체험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극심한 기근을 당해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절세 미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가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빼앗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엄청난 비극에 처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시계 제로였습니다. 절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크신 비밀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로의 궁전에 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근원이 사래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었으며, 사래는 아브람의 여동생이 아니라 아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9절로 20절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초강대국인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긴 아내가 도로 자기 품에 돌아옵니까? 이것은 나님께서 시계 제로의 처절한 절망에게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간 더부살이를 하다가 처자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얍복강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에서가 4백여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복수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였는데 형이 그것을 절치부심하고 동생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자들과 짐승들을 다 강너편으로 보내고 강 이편에 수그리고 앉아서 형편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어떤 장정이 그를 죽이려고 하여 그는 밤새도록 그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이르매 그 장정이 손을 들어 그의 환도뼈를 쳐서 결국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 습니다. 더 이상 그는 도망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시계는 제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쩔뚝거리며 강을 건너가서 모든 처자를 짐승들을 뒤에 두고 앞서 형이 오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에서가 4백인을 거느리고 질풍같이 달려오다가 그 동생을 바라보자마자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형이 말에서 뛰어내려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야! 나를 버리고 20년 동안 갔다가 이제 절름발이가 돼서 돌아오니? 얼굴은 왜 이렇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니? 앞으로 내가 너를 보호하마’라며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원수된 형제간이 순식간에 화목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계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난 바울과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에 탄 선원들과 죄수들은 모두 절망에 처했습니다. 생존의 희망이 없어 시계 제로입니다. 하늘을 보아도 캄캄하고, 바다를 보아도 대풍이 불고 풍랑이 거셌습니다. 사공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루를 견디다가 이튿날에는 짐을 다 바다에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들에 있어 구원의 열망이 없었습니다 시계 제로입니다. 이제는 절대로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1절로 25절에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새로운 희망과 생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배는 파손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은 섬에 도달할 수 있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3. 우리가 삶의 시계 제로를 체험할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삶의 시계 제로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끝났다, 벽에 부딪쳤다, 속수무책이다, 낭패다, 희망이 없다, 이제는 오직 좌절과 절망과 죽음만 있을 따름이다’라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시계 제로의 체험이 있습니다. 안개가 가득 끼어서 전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험 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고, 아브라함에게는 아내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고, 야곱에게는 형과 화해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바울은 유라굴로 속에서도 천사가 찾아와 구조를 받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이 시계 제로를 체험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까요? 가슴을 칠까요? 그렇지 않으면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릴까요? 고층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릴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을 말씀하신 후 노아에게 배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문은 위에만 놓게 하셨습니다. 이는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했을 때 노아가 만일 옆으로 난 창문을 열고 그 광경을 목격한다면 기절 초풍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를 보지 못하게 노아의 방주는 공중에만 창문이 있었습니다. 공중을 열고 서 있으니 노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주에 있을 동안 노아는 홍수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늘로만 창문을 내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항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당할 때 ‘어이구 저기도 풍랑이 오네, 저기도 파도가 오네’라며 풍랑을 바라보면 낙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를 당했을 때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 15절로 19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 하시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다스립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한 것처럼 시계 제로 때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위로 열린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계 제로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 선생은 그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신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면 하나님은 자녀들이 시계 제로의 위기에 처해 절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에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값도 어마 어마하게 지불했습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여러분을 값주고 소유했습니다. 때문에 그 소유물인 우리들이 낭패를 당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가만히 있을께’라고 하시겠습니까? 마귀가 세상에 와서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데 하나님이 팔장 끼고 구경하고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위기를 처할 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된 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로 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삯군은 위기에 처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진실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양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사 죄와 세속과 마귀, 슬픔과 질병, 저주와 가난 그리고 영원한 사망과 음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삯군이 아닌 목자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어둡고 깜깜할 때 확실히 마음속에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시계 제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옳게 섬기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회개해야 됩니다. 마음속의 죄책을 다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는 생활로 돌아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을 곧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캄캄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갈 해답의 크고 비밀한 길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수에 막히고 애굽 군대에 둘러 쌓여 시계 제로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홍해수를 갈라지게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 때 주님께 부르짖으면 우리들의 나갈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시계 제로에 처했을 때 구원을 선언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의심의 문을 닫고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입술로 매고 묶어야 됩니다. 입술의 선언이 바로 믿음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선언하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한 분이 골수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암이 걸렸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 한 말은 ‘하나님이여 암이 걸려서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정신병자 같지 않습니까? 암이 걸렸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환경에 빠지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다리를 잘랐습니다. 여러분 다리를 잘랐으니 이 얼마나 큰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도 그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X-RAY 촬영을 했는데 암이 전이되어 폐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귀신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암의 귀신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땀이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전율이 다가오고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폐에서 뭐가 공기처럼 튀어나오더랍니다. 속으로 ‘이제 암 귀신이 떠나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그후 병원가서 CT촬영을 하니 골수암도 폐암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린 결과 성령께서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고 치료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감사해야 됩니다. 좋을 때도 감사하고, 안될 때도 감사하고, 편안할 때도 감사하고, 환난 때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일생동안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 속수무책인 시계 제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당연한 반응은 절망이요, 탄식이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는 결코 구원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소유물이요, 그의 기르신 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잘못 섬긴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됩니다. 크고 비밀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선언하며 감사를 넘치게 할 때 안개구름은 사라지고 광명천지가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웃음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계 제로일 때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흑암을 광명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파멸을 생명으로, 가난을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내게 말씀하신 것을 믿노라
행 27:9-26 / 김영준 목사
미국 농촌의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어요. 신학교에 가고 싶으니 추천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느닷없는 부탁을 받고 목사님이 좀 차분하게 설명을 해보라고, ‘하나님이 당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청년이 ‘제가 들판에 서 있는데 하늘에 구름으로 PC라고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PC 말은 Preach Christ-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목사님이 잠깐 침묵하다가 ‘PC라는 말이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지만 Plant corn 옥수수를 심으라는 뜻이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줄로 생각하다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하신 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아니었던 경험.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습니다. 수년 전에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뱃속에 혹이 있어서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는데 부모가 그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유인즉슨 하나님이 고쳐주겠다는 응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겠다고 응답했기 때문에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는데도 딸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가가 개입해서 강권적으로 그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해서 혹을 제거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큰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인 것뿐만 아니고 법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 우리는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 믿음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나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게 진짜인가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편에는 절벽이 있는데 한쪽은 광신이고 또 한쪽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광신과 불신 사이에 있는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신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광신은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을 우리가 스스로 착각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광신은 온갖 오해와 이단을 낳는 온상이 되고 그리고 광신의 가장 큰 피해자는 본인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광신자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신앙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저런 것이라면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심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가짜가 있다는 말은 진짜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위조지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지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흉내 낸 것이 위조지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 위조지폐는 있지만 $80 위조지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80 짜리 진짜 지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신앙적인 실수를 보고 신앙을 부인하게 되면 그것은 사람의 실수를 절대화하는 것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하여 실수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애굽사람이 히브리 사람들 학대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모세가 좌우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그 애굽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파묻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히브리 사람들을 보러 나가 두 히브리 노예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왜 같은 히브리 사람들끼리 다투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누가 당신을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당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처럼 우리도 죽이려 하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가 두려워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모세가 자기 임의로 그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광야에서 사십년을 보내게 되는데 그가 광야로 피신한 이유는 자기의 살인이 탄로 난 것도 이유가 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데인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알고 그렇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사람만 죽이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보고 자신이 너무 낙심되고 그래서 모세가 자신의 실수로부터 회복하는데 사십년이란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십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이 정말로 나타나십니다.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아마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이번엔 진짜인가, 이번에도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애굽으로 보내실 때 모세가 여러 번 사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실수를 한 번 해봤기 때문에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여러 번 권고하고 격려해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대하여 실수를 해 본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경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신앙적으로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언약궤를 소가 끄는 달구지 위에 실어서 옮기는데 소가 갑자기 뛰었다고 했습니다. 소가 왜 뛰었는지는 모릅니다. 소가 뛰니까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가 떨어질까 봐 손으로 언약궤를 만지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이 진노해서 웃사를 그 순간 거기서 죽여 버립니다. 이제 아주 민망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선한 의도로 이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는데 언약궤는 옮기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만 죽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낙심되고 그리고 자칫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시험에 들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이 여기에 낙심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읽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모세의 율법을 읽노라니 거기에 어떤 규정이 나와 있느냐면 언약궤를 옮길 때는 그 옆에 고리에 봉을 끼워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옮겨야 된다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 이렇게 해야 되는걸 몰랐구나! 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런 성경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한 동기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동기가 필요하지만 방법이 옳아야 되고 또 때를 만나야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됩니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지 내 의지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이 있어야 되지만 하나님의 방법에 맞아야 되고 때를 만나야 되고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고 기뻐하셔야 올바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서둘다가는 실수하기 안성맞춤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가 실수해 놓고 하나님에 대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실수해 놓고 하나님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치 그것이 앙금처럼 남아서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동기가 나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매정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람의 의지와 열심이 하나님보다 앞서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에요.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축복하셔야 되는데 그것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다가는 실수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늘 유념해야 되는 것은 성도들의 실수를 조장하면 그것은 목회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섣불리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이러고 나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좇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야 우리가 그 말씀을 좇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가 요구한다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했는데 사람이 서두르게 되면 모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들은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풍랑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야 임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에게 임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서둘렀다면 풍랑이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염려하고 사도바울도 염려하게 될 때쯤 되어서 시간이 상당히 경과한 다음에 그때 천사를 보내서 사도바울에게 안심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과정이 정말로 사람이 그 진땀을 흘리는 와중에 임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나를 구해줄지 아니면 사자의 아침식사가 되게 할지 그것을 모르는 상황처럼 진땀을 흘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의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서도 풍랑이 이미 상당히 진전됐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도우실 줄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려면 우리의 욕심을 경계해야 됩니다. 욕심이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 있는 말씀대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됩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물질적인 욕심, 세상적인 욕심뿐만이 아니고 영적인 욕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 나는 신령해, 이것도 욕심입니다. 사람이 어떤 유의 욕심을 갖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을 미혹시킬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가 이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자기가 남들보다도 신령하다는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을 미혹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 욕심, 탐욕, 이것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끌려가는데 그 중에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신분에서 건져주지는 않았지만 풍랑에서는 건져주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에요. 죄수의 신분에서도 건져주면 좋지 않습니까? 좋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죄수의 신분은 그냥 두고 풍랑에서는 건져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바울이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그것을 우리의 입으로 시인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타고 있는 이 배에는 크리스챤이 한명도 없어요. 사도바울 이외에는 한 명도 없어요. 이들은 사도바울이 사도인지 목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바울의 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서 죽을 것 같게 되니까 유일하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고, 그의 하는 말을 모든 사람이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는 바울이 전하는 말을 귀찮게 생각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던 사람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반가운 말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23절에 말하기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시는 첫마디 말씀은 주로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풍랑이 두렵고 죄수 되는 것이 두렵고 미래가 두렵고 고난이 두렵고 두려워하는 건 여러 가지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일괄적으로 두려워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이것은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게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고백.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믿고 나는 이것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게 될 때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이 이 믿음을 고백하니까 바울에게만 힘이 되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만 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에게도 용기가 되고 힘이 되고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듣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조난과 구조 : 깨어진 가정의 회복을 위한 처방전
행 27:8-44 / 김홍규 목사
<序言: 무너져 가는 가정을 어찌할꼬>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가정이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962년도에는 오직 51%만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이혼을 고려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에 가서는 무려 82%가 이혼해야만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한 세대만에 이혼율이 거의 배 가까이 증가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매일 3천 여명 정도의 어린 청소년들이 부모가 이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통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아이들이 매주 어머니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30분이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뜻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그 절반 밖에 안 되는데 겨우 15분 정도라고 합니다.
해리스 여론조사(Harris Poll) 팀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어떤 일을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기를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30%가 독서하는데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1%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에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13%만이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이 책이나 TV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작년에는 이혼율이 40%에 육박해서 아시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한다는 통계로 보아 매일 절반 이상의 가정이 부서지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연구 기관에 따르면 2008년경에는 한국의 이혼율이 미국을 추월해서 세계 최고의 이혼국가가 될 조짐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가족 간의 대화도 급속히 단절되어서 한국 고교생의 22%는 아버지와 하루 단 1분의 대화시간도 못 가진다고 합니다.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장 집요하게 파괴하려고 광분하는 대상이 가정과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너진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가정이 깨어졌다면 무슨 이유로 어떻게 깨어졌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깨어진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한 물음들을 물으면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파선과 구조: 그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위기와 미래의 해법>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276명이 탄 배가 조난을 당했다가 구원을 받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어진 가정과 그 회복'이란 관점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 혹은 교회가 '배'라고 볼 수 있으며, 폭풍우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이 세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세상 한 가운데 우리 가정이라는 배가 떠서 여행을 합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즐겁고 편안하게 항해할 때가 많지만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풍랑이 뱃전을 때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파선 일보 직전까지 가서 배에 탄 모든 식구들이 죽음의 위기에 빠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저는 바울이 탄 배가 파선 위기에 빠진 것을 '부서진 가정의 위기'로 보면서 본문 해석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① 왜 파선할 수밖에 없었는가?
바울이 탄 배가 조난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고 할 때 한 가정이 부서진다면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조난 사고를 당하게 된 것 역시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9절 말씀을 보면 행선하기에 위태한 시간을 택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여기서 금식하는 절기란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가을철의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을 의미합니다(레 16: 29-31 참조).
유대력으로는 7월이 되지만 오늘 우리 캘린더로는 대개 추분(autumnal equinox), 즉 양력 9월 23일 경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지중해 사람들은 10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항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폐해기'(閉海期, the period of closed sea)라고 부르면서 항해를 자제했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사람들은 항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뱃길이 위험했고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례 때문에 바울은 10절에서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예상하면서 만류합니다. 바울의 만류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항해 상식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영적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졌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왜 깨어집니까? 대개의 경우 위태한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정욕과 고집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생을 조금이라도 오래 산 부모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식의 결혼이 위태해 보입니다. 그래서 만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말은 듣지 않고 무리한 일을 강행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바울이 탄 배도 당연히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항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욕심과 성급한 판단력 때문에 무리한 여행을 강행했다는데 위기는 이미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11절에 보면 바울의 압송을 맡은 로마의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행 27: 1을 보면 '율리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바울의 로마 압송을 책임 맡은 장교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의 말은 믿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말해줍니까? 백부장은 한 가정의 우두머리, 즉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남편이나 아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이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말은 무시하고 세상적인 지식과 욕심만 가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세상의 감언이설에 더 귀가 솔깃해서 그 말에 넘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만 확고히 붙들면 우리의 가정이 얼마든지 튼튼히 설 수 있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어질 수밖에 것입니다.
셋째로, 14절에 보면 '유라굴로'라는 예기치 않은 광풍을 만나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Eurakylon)라는 광풍은 희랍어로 '동풍'을 뜻하는 'EUROS'와 '북동풍'을 뜻하는 라틴어 'AQUILO'가 결합된 말로서 그 당시 선원들의 은어(slang)였습니다. 그 당시 뱃사람들을 골탕먹였던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던 북동풍(Northeaster) 허리케인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왜 파선합니까? 예기치 않은 광풍이 불기 때문이 아닙니까? 몇 년 전에 한국에 IMF라는 유라굴로가 닥쳐서 수많은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하루아침에 남편들이 직장에서 밀려나고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엄청난 빚더미에 눌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 부부간에 사랑만 있으면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현실의 파도 앞에 많은 가정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법무장관인 강금실 장관 역시 남편이 사업 실패로 빚을 과도하게 져서 결국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라굴로의 광풍이 우리 가정을 괴롭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② 파선의 위기 앞에 선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러면 이 엄청난 파선의 위기에 직면해서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로, 30절을 보면 믿음이 없는 사공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사공들이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거룻배, 즉 구명정을 바다에 내려놓았습니다. 자기들만 구명정을 타고 몰래 도망치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지요.
아마도 사공들은 누구보다도 바다의 생리를 잘았기 때문에 선수를 치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건져주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좌왕했던 것입니다.
31-32절에 보면 바울은 사공들이 배에 남아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꾸짖으면서 거룻줄을 아예 끊어 떼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배, 즉 가정과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무리 파선과 죽음의 위기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거룻배, 즉 구명정은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정과 교회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우리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사수(死守)해야 합니다. 그럴 때 풍파가 지나고 구원이 찾아옵니다!
둘째로, 바울의 의연한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차 있을 때 바울 한 사람만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22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또한 34절 후반을 보면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담대한 믿음 때문에 배안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며 안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위기에 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만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의연한 믿음 때문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배에 탄 276명의 승객들이 순전히 바울 한 사람의 믿음과 담대한 태도 때문에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이 전원 구원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③ 침몰의 위기로부터 구조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을 비롯한 276명이 전원 구조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18-19절을 보면 사공들이 배안에 있던 모든 무거운 짐들과 배안의 기구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JETTISON,' 즉 '하물투하'(荷物投荷)라고 말합니다. 선박이나 항공기가 긴급 조난시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짐을 버리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지요. 침몰 직전에 처한 배가 구조를 받으려면 모든 쓸데없는 물건들을 버려야만 합니다.
여러분,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려면 모든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야만 하지 않습니까? 사실 지나놓고 보면 순전히 우리의 과욕 때문에 가정에 금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 1: 15절 말씀처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자라나서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가정이 살기 위해서는 과욕을 버려야만 합니다. 또한 아무 소용이 없는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이 가벼워지고 구조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면 회개하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요 영적인 지도자인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믿음 없는 선장과 선주의 말만 듣고 무리한 항해를 강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난이 일어났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깨어진 이유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영적인 눈으로 가정과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의 지나친 욕심과 무절제와 실수로 가정에 금이 갔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믿음으로 중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지켜 주심을 믿고 담대한 마음으로 현재의 위기를 수습해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위기에 처할수록 마음을 강하게 하고 여유를 잃지 말아야만 합니다. 33-36절을 보세요.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여러분, 이혼이라는 충격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밥맛을 잃어버립니다. 집안이 침울해지고 온통 기쁨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온가족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어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린 자식들이나 본인을 위해서 아무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큰 풍파 앞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권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식사기도를 올린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왕지사 이와 같은 위기에 빠진 것 먹지 않고 잠자지 않고 괴로워해 보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 음식을 먹고 원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손길을 펼쳐주심을 믿고 더욱 더 터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結語: 가정이라는 배에 탄 온 식구가 구조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조난을 당한 배가 바울 한 사람이 놀라운 믿음으로 깨어 있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44절 후반부를 주목하십시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배에 탄 276명 전원이 한 사람도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에 어떤 위기가 몰아 닥친다고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한 사람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이 건짐 받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가정이 어떤 위기에 처해도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어떤 거미가 낡은 헛간의 서까래 꼭대기에서 한 가닥 실을 떨어뜨려서 거미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이 거미집은 점점 커졌습니다. 파리나 모기, 그 밖의 다른 곤충들이 이 거미집에 걸려들어서 거미는 많은 먹이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거미는 다른 모든 거미들이 부러워할 때까지 점점 더 큰 거미집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야심만만하고 성공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찬 거미가 한 가닥의 거미줄이 헛간 서까래의 어둠 한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지은 거미집을 가로질러 그 줄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아니, 이런게 왜 여기에 있지? 이 거미줄은 나에게 어떤 먹이감도 주지 않잖아."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이 거미는 이 거미줄을 타고 올라가 싹뚝 끊어버렸습니다.
거미가 이 한 가닥 거미줄을 끊어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 지 아십니까? 이 거미가 그토록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지어놓았던 거미집 전체는 물론이고 이 거미집을 타고 있던 거미 자신마저도 헛간 바닥으로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한 가닥의 거미줄이 거미가 지은 집 전체를 지탱해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의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단 하나의 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줄이 아니겠습니까? 그 줄을 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그 줄을 견고히 붙드십시오! 거기에 안전과 회복과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아멘.
인생의 유라굴로
이대성목사 / 행 27:9-14, 21-26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인생의 유라굴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인생의 유라굴로” 저는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친 후 빗속을 뚫고서 오후에 차를 몰고서 양평에 있는 예영원 즉 ‘예수 영성 수련원’을 다녀왔습니다.
예영원은 제가 존경하는 백남철 목사님 부부께서 예수님을 닮는 영성 수련을 위해 세우신 기도처소입니다. 그곳에서 예수 전도단 중보기도 모임이 있어서 오랜만에 전도여행팀원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전도여행팀이 함께 모인 시간이 무려 22년이나 된 겁니다. 22년 동안 함께 모여 기도했던 중보기도의 용사들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날 저는 멋진 그림 한 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지금은 목사 사모가 되어 미국에 가 있는 수진 자매가 개인 전시회를 한 후에 보내 온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한번 알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유라굴로 광풍’입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 인생 3막 2장부터는 유라굴로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결론은 파산하지 않고 항해하고 있다. 그 배의 주인과 사공은 주님이시기에...’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광풍 즉 난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하여 인생의 유라굴로입니다.
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다 일어납니다. 때와 장소와 시간과 시대와 역사를 가리지 않고 발생합니다.
개인의 삶에 유라굴로의 광풍이 불기도 하고, 가정 속에, 기업이나 사업에, 또 국가나 사회에 이 유라굴로의 광풍이 불어 닥칩니다.
일례로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기도 하고, 잘 나가던 회사가 급기야 부도가 나므로 문을 닫기도 합니다. 이는 개인의 건강에, 기업이나 사업장에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위험하다고 사도 바울이 적극 만류했음에도 배는 출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예견과는 달리 순풍이 부는 겁니다.
64km만 더 가면 편안하고 행복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뜨기도 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험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역시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뭐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얼마 안 되어" - 출항한지 얼마 안 되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 겁니다.
유라굴로는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폭풍의 한 명칭인데요? 그레데섬의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m 높이이다 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 기류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북동풍 바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아프리카 방향으로 밀려나가게 되면서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라굴로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더 위협적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르디스 라는 바다에 있는 모래톱이었습니다.
이 스르디스 라는 모래톱-모래 수렁이라고 함-에 걸리면 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과 스르디스 라는 모래톱 - 이 두 가지는 이들로써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수 십 년 배를 타고 이 곳 저 곳 다녔다 할지라도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으니 이는 한 마디로 낭패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있는 힘껏 극복해 보고자 애를 씁니다.
먼저 15절을 보니까 배를 가만히 놔 둡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광풍이 심하자 배를 바람에 맡겼고, 이러한 조치로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를 지나게 됨으로써 잠간 동안 광풍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그들은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아 배를 견고하게 하면서도 스르디스를 만날까봐 연장을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18절을 보면 광풍은 다음 날이 되어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장과 선원들이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계속되는 광풍과 싸워야 했습니다. 광풍은 다음날에도 계속 휘몰아 쳤습니다. 결국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배의 기구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기구란 여기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아무래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 것으로 보아 침구, 테이블, 의자와 같은 것이 아닌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그들의 손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무슨 뜻입니까? 기구 즉 돛과 돛대를 그들의 손으로 내어 버렸다는 말은 더 이상 항해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결론은 어떠했습니까? 20절 말씀을 보면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인생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어려운 순간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그렇습니다. 지구 땅 곳곳에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대형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코로나 19로 인한 계속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기업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서 취업 전선으로 나가려는 학생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입니다.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은데 도대체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약이 무효한 바로 이 순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힘이 되어 주십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여러분! 욥이 생각나시죠? 그는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자식들 또한 모두 잃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온몸에 심한 피부병이 퍼져 고통 받기까지 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순간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아멘.
여러분! 이 무슨 말입니까? 달리 말하면, 도저히 내가 힘쓸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만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아시기에 그 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더욱 굳세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뭐 이런 고백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 배의 선장과 백부장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바라보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취해야 할 태도 또한 무엇입니까? 역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그 분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삶이야말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범임을 깨달아 알아 환난 중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일행은 왜 이런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에” 다같이 11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러분! 항해 출발시 솔직히 백부장은 죄수 바울의 말보다 선장,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더 믿었습니다.
사실 백부장과 선장, 선주, 선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예기치 못했던 고통이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 이런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배를 타고 항해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겨울을 보내고자 하는 현실 안주적인 그들의 태도가 이들로 하여금 무모한 항해를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평상시와 같은 때라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래도 항해를 하는 데에는 바울보다는 선장과 선주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 평안한 시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아예 항해를 통제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평상시와 같은 그들의 판단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안겨 준 것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미항에 그냥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것을 다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진정 위기의 순간에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돈 많은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힘센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 움츠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 마저 골리앗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모두들 이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골리앗을 이겨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지만 실제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위기의 순간을 반전시켰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무엇으로 반전시켰습니까? 칼이었습니까? 창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물맷돌로 이 위기의 순간을 반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맷돌이 힘의 원천이었습니까? 아니지요! 물맷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의지하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간다는 다윗의 믿음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순간이 닥쳐와도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 순간에 내가 무엇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이는 인생이십니까? 하나님 말씀입니까? 사람 말입니까?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말씀, 십자가 능력을 붙잡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을 유행으로 생각하거나 십자가를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음성으로 듣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 일행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멀리 바라보는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멀리 바라보는 눈이 어둡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마음속에 육신의 애정과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욕심이 앞서게 되면 잃는 것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의욕이 앞서고 어떤 성과를 빨리 얻고자 하면 일을 서두르게 됩니다. 마음이 급하면 멀리 바라보는 생각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당장 눈앞의 발등만을 바라봄으로써 그만 멀리 내다보는 눈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또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 허리에 매서는 못쓴다고 했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그만큼 어떤 일을 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백부장 일행이 바로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즉 산 전체를 보지 못하고서 눈앞의 숲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다같이 1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선주와 선장은 겨울을 지내기에 좁은 미항보다는 좀 더 넓은 뵈닉스 항구로 가는 것을 더 좋게 여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는 원인의 시발점이 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상조건입니다(비행기, 자동차등 다 마찬가지임). 그런데 선장과 선주는 기상조건보다 자신들의 욕망이 앞섰던 겁니다.
여러분!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합니다. 좁은 미항보다 좀 더 넓고 편리한 뵈닉스 항구로 가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람마저 순풍이 불어오는 겁니다.
그들은 당시 잠깐 불어온 남풍 즉 순풍에 속아 출항을 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과 노도를 만나게 되는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의 함정이 있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일시적인 풍향보다는 계절적인 기상 원리에 근거해서 항해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가장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항해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보다는 지엽적인 현상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당한 재난은 가장 기본적인 원리 원칙을 무시한데서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이 일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멀리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근시안적인 눈은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멀리 바라보는 눈은 하나님 말씀 안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통해서 멀리 앞을 내다보는 영안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숲만 보게 되면 그것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웅장한 산! 높고 크고 깊고 넓은 그 산 전체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저 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권세나 명예나 지식이나 재물이나 쾌락 같은 것을 바라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후로는 이 땅의 삶에 급급해하기보다는 저 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영생의 기쁨과 감격을 온 세상에 힘써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유라굴로 광풍이 분 것은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여러분! 여러 날 동안 광풍과 싸우느라 모든 사람들은 지쳐있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니까 벌써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21절을 보니까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처지가 되자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이 말은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들춰내서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자신의 옳은 판단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따라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을 전합니다. 다같이 22-26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먼저 바울은 사람들을 안정시킵니다. 폭풍 속에서 두려움과 허기짐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을 전합니다. "안심하라."
사실 지금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풍랑이나 허기짐보다 오히려 삶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불안을 제거시키기 위해 배는 잃게 되겠지만, 생명은 그 누구 하나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말해준 것도 있었지만 바울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이런 풍랑 속에서도 죽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찌 이 위험한 상황에 아무 일 없는 듯이 태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 바울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노라." 하나님은 다시 한번 바울에게 약속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그를 더욱 굳건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통로가 열려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과 채널이 맞춰져 있으십니까? 오늘 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라디오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잡음만 들릴 뿐입니다. 그러할진대 하나님과 늘 항상 주파수를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그 분의 말씀에 주파수를 고정시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위태롭다고 걱정하는 것만이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항상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했던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도중에 유라굴로 라는 광풍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립니다. 연장을 버리고 짐을 버리고 기구를 버립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그들을 이 위기의 순간에서 안심시킬 수도 없었고, 헤쳐 나가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위기의 순간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사도 바울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주님 음성에 온전히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지금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의 광풍을 맞고 있습니다. 주님 음성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늘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섭리하심을 체험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지금도 나와 함께 하사 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삶 속에 지금 찾아와 주옵소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만져주시고 다스려 주옵소서.
극심한 고난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모진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목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광풍을 뚫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면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비록 유라굴로 광풍 속에 있다 할지라도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고서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대성 목사야,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는 안심하라. 아무개야,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는 안심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격동하는 세파 속에서 그 어떤 광풍을 만난다 할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함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장 9~20절 / 양향모목사
요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 사는 것을 많이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저런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걱정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아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잘살고 있는 사람은 잘살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것이 억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냥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는 일은 자랑스럽고 보람되지만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걱정거리가 많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들 때문에 가장 평안해야 할 교회까지도 서로 싸우고 가장 사랑해야 할 성도들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요즘 제 혼자 가끔 흥얼거리는 옛 노래가 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도 처음도 끝도 모르지만 제가 흥얼거리는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었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이런 어려운 일이 시작되었을까요
이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비가 오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우리에게 주신 이 지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천지창조 기사가 기록된 창세기 2장에 천지창조를 마친 후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4-6)
하나님께서 처음 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비는 오지 않았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서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그때는 비가 올 필요도 없었고 비가 올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물이 지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과 동식물이 잘 살 수 있는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바람이나 구름이나 비가 올 수 없었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음 비가 온 때가 노아 홍수 때입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7:4)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칠 일 후부터 40일 동안 내린 비가 최초의 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는 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고 살 때 그런 인간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내리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빗속에서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와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고 비와 함께 우리 인생의 고통도 더 심화 되고 사람들은 다 죄로 인해서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있는 이런 귀한 길에도 역시 비가 내리고 어려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항을 떠나서 뵈닉스라는 그레데 항구까지 가려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고통을 당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본문 9-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를 떠나 미항까지 오는 여정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로 가야 하는데 다음 배의 여정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바울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겨울을 지내고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주나 선장은 여기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조금 더 가서 겨울을 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최고 책임자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였고 배나 모든 사항은 로마의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백부장이 죄수로 호송 당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 이 배를 잘 아는 선주나 뱃길을 잘 아는 선장의 말을 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당연히 바울의 말보다 선주나 선장의 말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떠나서는 안 되고 여기서 겨울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금식에 중점을 둔 말이 아니라 그 절기에 중점을 둔 말입니다. 여기 금식하는 절기란 9-10월경에 있었던 속죄일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여행 당시였던 주후 59년 속죄일은 10월 5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태풍이 몰려오고 파도가 드세게 몰려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환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미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때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전도 여행 때 배로 여행하는 도중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여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고후11:25)
이어서 바울이 말하기를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지금 떠난다고 하면 배에 실은 물건들은 물론이요 선박과 사람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배를 타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 것은 꼭 경험에 의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계시면서 이런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미리 알도록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견해와 다르게 선주나 선장은 지금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했습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미항이라는 곳은 말만 미항이지 사람들이 지내기가 편한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뵈닉스라는 항구는 한쪽은 서북으로 한쪽은 서남으로 향하고 있어서 서쪽을 향하여 열려 있는 항구처럼 생겨서 겨울을 나기가 좋은 항구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지역적인 것도 있겠지만 지금 있는 미항은 작은 항구로 먹거리나 볼거리 같은 것이 부족하고 뵈닉스라는 항구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필요한 것을 잘 구할 수 있는 편리한 항구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우리도 백부장의 선택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편하고 우선 재미있게 사는 쪽으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좀 힘들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신앙생활을 우선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보다 이 세상의 쾌락을 중심으로 선택을 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본문 13-17절에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경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항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인간의 욕심을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출항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아 우리가 잘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순풍에 돛을 올리고 출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빗나갔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순풍이 부는 길이었지만 출발하자마자 곧바로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유라굴로는 북동풍을 말하고 광풍은 태풍을 말합니다. 그 지역의 특성으로 그 계절이 되면 자주 일어나는 풍랑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알아보고 생각했더라면 발견할 수 있는 풍랑이었습니다. 욕심만 채우려다가 바로 앞에 부는 순풍만 보고 나갔다가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이 15-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
우리가 배를 잘 몰라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잠시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를 뭔가 그쪽으로 일이 잘돼 갈 때 그 길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쉬운 길 잘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이 하나님의 뜻일 때도 있습니다. 사탄이 쉬운 길을 보여주면서 유혹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이야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차라고 했는데 니느웨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도망갑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얼른 올라탔습니다. 그 배가 풍랑을 만나고 파선이 되어서 큰 고기 뱃속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믿음의 길이 아닌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길이 쉬운 길입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본문 18-20절에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했습니다.
한번 길을 잘못 선택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배와 배에 있는 짐들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안 되니까 제일 먼저 싣고 가던 짐을 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배의 기구들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기구는 소소한 가구일 수도 있고, 항해하는 데 꼭 필요한 닻이나 돛일 수도 있습니다. 배의 무게를 줄여서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무거운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도 달도 보이지 않도록 먹구름 속에서 풍랑은 계속해서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살아날 가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목숨이 걸린 문제에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살아날 가망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해 볼 것이지만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스러운 형편을 만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적 같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의 항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길로 항해를 한다고 해도 위험한 일을 만나고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가 사는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벌을 받고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길은 소망이 있는 길이고 어떤 길은 구원의 여망도 없는 절망의 길입니다.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은 구원의 소망이 있는 길입니다. 쉽다고 해서 재미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따라 산다면 우선은 쉬운 길 같지만 절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절망 길을 가는 인생길에서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여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장래를 내다보면서 어렵지만 미항에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듣고 또 좀 편하게 지내보려고 눈앞에 보이는 순풍을 따라 출항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여망마저 없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자기 생각대로 살면 구원의 여망마저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은 구원의 소망이 있는 길입니다. 반드시 죄에서 죽음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짐을 덜어버리라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 행 27:9-26
여러분은 미래에 대한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영화치고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는 영화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같이 암울한 미래를 그립니다. <일라이>라는 영화는 핵전쟁으로 지구가 황폐해졌는데 성경말씀과 신앙이 사라진 세상을 그렸습니다. 오직 주인공만이 머릿속에 성경을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어서 그것을 보존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워터월드>라는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육지가 다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배에서 생활을 하는데 전설의 육지를 찾는 그런 미래를 그렸습니다. 아이러니는 온 세상이 물이지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질라>라는 영화는 태평양의 산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바다 동물이 미국의 핵실험으로 인해 괴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인간을 공격한다는 줄거리입니다. 그 이외에도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영화는 많습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괴물과 좀비에요. 사람들은 괴물이나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운명과 과학은 발전하는데 왜 인간은 미래를 상상할 때 밝고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두렵고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 내면에 두려움을 반영하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심판. 인간에 죄와 교만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영화는 하나같이 인간의 교만, 탐욕에 대한 결과가 환난으로 돌아온다고 서술합니다. 그래서 <고질라>도 핵실험으로 환경이 오염된 결과고, <일라이>도 핵전쟁으로 문명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워터월드>도 지구 온난화로 인해 문명이 멸망했다고 가정합니다. <트렌센던스>란 영화는 인터넷이 너무 발달해서 인간을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인간은 자신의 탐욕과 교만에 대한 대가를 언젠가는 지불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심판이란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합니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현 정권을 심판하자’ 사람이 사람의 잘못을 심판할 필요를 느낀다면 설마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던 방식으로 앞으로 살 수 없다는 싸인은 이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제 불황이 그 중에 하나에요. 경제 불황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인 것입니다.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나라뿐만이 아니고 영국, 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청년실업이에요.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다는 문젭니다. 다음 세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리던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대두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미 느끼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특권, 평안함, 안락함을 다음세대는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인 문제에요. 앞으로 이것이 얼마나 더 심각해질 것인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탁상공론이 아니고 실재적인 종말론적인 두려움입니다. 우리 모두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두려움의 말, 최고의 두려움의 말은 ‘이제는 끝났다. 이젠 끝이다. 다 끝났다’라는 말이에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죽음과 멸망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문에 사도바울 같아야 됩니다. 바울은 위기에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본문에 풍랑이 함께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첫 풍랑이었을지 모르지만 바울에게는 첫 풍랑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여러번 위기를 겪었습니다. 돌로 맞아죽을 위기, 굶어죽을 위기, 맹수와 싸우다 죽을 위기, 그리고 배가 하선한 적도 여러번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럴 때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바울을 필요로 하십니다. 아직 그의 사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위기를 당하는 것은 막아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건져주었습니다. 바울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바울을 담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으로 나오는 <시로코>라는 영화에 제 기억 속에 남는 한 대사가 있습니다. 험프리 보가트가 수년간 열심히 일해 모아놓은 돈을 잃어버립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술집 카운터에 기대어 술 한 잔을 주문하면서 술집주인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가졌던 것을 다 잃어 버린적이있소?’ 술집주인이 대답하기를 ‘여러번입니다-many time’ 지금도 이 대사를 종종 생각합니다.
본문에 바울이 겪는 이 풍랑은 자기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풍랑을 예측했고 항해를 반대한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경고했지만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에 말을 더 듣고 항해를 강행한 결과에요. 바울이 풍랑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의 잘못 때문에 풍랑을 당한 것도 아니지만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입장이다 보니깐 바울도 풍랑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보니깐 좋든 싫든 세상이 풍랑을 당할 때에 우리도 그 풍랑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억울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10절 말씀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이것이 손해가 다가오는 순서에요. 첫 번째가 화물, 두 번째가 배, 그리고 마지막이 생명이에요. 이 순서대로 손해가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진행되기 전에 중단을 시켜야 됩니다. 배를 지키고자하는 사람은 화물을 포기할 수 있어야 되고,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배를 포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화물과 배를 건지더라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화물과 배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버릴 수는 없지요.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풍랑이 오니깐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무엇을 버렸는지 아십니까? 18절에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문자 그대로 풍랑이 오니깐 그 다음날 화물부터 던져버렸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살아야 되니깐 배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 다음에 버리는 것이 기구였어요. 19절에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그리고 결국은 무엇까지 버립니까? 배까지 버립니다. 22절에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그래서 이들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 들어 섬으로 헤엄쳐가서 다 생존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줄거리에요. 여러분 이것이 맞는 순섭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가장 귀중합니까? 만일 사람이 개에게 공격을 당할 때 그런 일이 없어야 되겠지만 만에 하나 개가 사람을 물려고 달려들 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팔을 내줘야 된다고 그럽니다. 팔을 내주어서 개가 팔을 물게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개가 목을 문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팔이라도 내줘야 된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그런 일을 발생할 때 무엇을 건져야 할지를 판단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돈을 잃는 것이 제일 적게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건강을 잃는 것보다는 낫고, 가족을 잃는 것 보다낫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순간에 판단할 수 있어야 됩니다.
조지정이라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70년대에 마리화나를 처음 미국으로 수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코카인을 미국으로 수입을 해서 유통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마이애미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약의 대다수가 조지정이 유통시킨 것입니다. 그는 엄청나게 돈을 벌었습니다. 집안 사방에다가 현금을 쌓아놓았습니다. 돈을 다 셀 수가 없어서 저울로 돈의 무게를 재서 얼마정도 될 것이다 이렇게 예측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많은 현금을 가져다가 파나마 은행에 예치를 했는데 노리에가 대통령이 그 은행을 구기화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그 돈을 다 잃어버렸어요. 수십억에 돈이 하루아침에 날아갔어요. 여러분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생명을 건졌기 때문에 대다수의 마약 일을 하는 사람은 생명까지도 잃어버리는데 조지정은 아직까지도 살아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메시지는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될 메시지인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가 아까우면 화물을 줄여야 됩니다. 그리고 생명이 아까우면 배의 미련을 가지면 안 됩니다. 풍랑이 없으면 더 좋지만 우리의 미래가 과거와 똑같을 수 없고 과거의 살던 방식을 앞으로도 지속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리 짐을 줄여야 됩니다. 불필요한 지출, 불필요한 사업, 불필요한 소비, 불필요한 취미, 불필요한 친구, 불필요한 장난감, 불필요한 소유, 불필요한 욕심, 불필요한 허영, 불필요한 자랑을 줄여야 됩니다. 풍랑이 왔을 때에 그것 때문에 배가 위험합니다. 21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라면 좋을뻔 하였더니’ 우리가 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바울이 당한 풍랑은 세상의 종말은 아닙니다. 며칠 있으면 끝날 풍랑입니다. 다만 이들이 바울의 말대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당하고 있는 경제위기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화물보다는 배가 중요하고 배 보다는 생명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풍랑이 뭐가 정말로 귀중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배마다 믿음의 사람이 타고 있어야 됩니다. 가정마다 믿음의 사람이 깨어있어야 됩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폭풍을 넘어서
행 27장 9~26절 / 이윤재목사
여러분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지난 주 토요일,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해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바다는 아름답지만 한번 풍랑이 일면 바다는 무섭습니다. 쓰나미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번에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수많은 분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바다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나이야기입니다. 요나가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물속에 빠졌고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 이야기는 자주 등장하는 성경 이야기중의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뿐 아니라 예수님이 탄 배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주로 겨울에 일어납니다. 11월 이후 비가 오면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람이 불면 풍랑이 일어납니다. 요즘도 어떤 때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면 파도가 6미터, 8미터 이상 일어 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성경은 풍랑을 무섭게 묘사합니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에 리워야단이라는 살았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용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다에 사는 용이 풍랑을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바다에 대한 이스라엘백성의 가장 큰 경험은 홍해바다 일 것입니다. 간신히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바다앞에 섰을 때 그 앞에 파도치는 무서운 바다를 보고 백성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계21장에 보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바다가 없다고 말합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더라”. 바다가 없다는 것은 풍랑도 고난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을 바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이 바다라면 풍랑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풍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같이 실제 풍랑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온 풍랑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삼손이 이성문제로 엄청난 풍랑을 만납니다. 실수와 죄가 풍랑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풍랑이 있습니다. 누구의 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에 따라 일어난 풍랑입니다. 아마 구약의 요셉이 그랬을 것입니다. 욥이 그랬을 것입니다. 꼭 죄때문은 아닙니다. 그런데 풍랑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때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끌려가던 주후 60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로마의 황제에게 마지막 재판을 받으러 배를 탓습니다(지도1).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는 죄수 276명을 태우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나갔습니다. 문제는 지중해 한 가운데인 크레타 미항에 도착할 때 일어났습니다(지도2). 이쯤 도착하자 지중해의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중해의 겨울은 아주 춥고 파도도 거셉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서 겨울을 나고 봄에 갈까요? 지금 떠날까요?” 회의 결과 지금 떠나자는 사람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단 한 사람이 반대했는 데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히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떠나면 안된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위기에 빠졌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인생 풍랑을 만납니까? 어떤 풍랑입니까? 인생 풍랑은 개인에게 뿐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다가 옵니다. 우리가 당하는 풍랑중에는 우리의 실수와 죄로 인해 생긴 풍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당하는지 모르는 풍랑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풍랑이 일어날까?
먼저 왜 풍랑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당시 바울의 배에 탓던 사람들은네 종류였습니다. 선장과 선주, 백부장과 죄수였습니니다. 선장은 배를 운전하고 관리하는 항해의 책임자입니다. 백부장은 죄수들을 호송하는 로마의 군인입니다. 선주는 배를 이용하여 사업하는 배 주인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죄수 276명이 있습니다. 누가 이 배의 주인입니까? 배가 만일 위기를 만날 때 누가 배의 운명을 결정하겠습니까? 우선 죄수는 아닙니다. 죄수들은 그럴 권리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은 묶인 채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배의 운명의 일차적인 책임은 선장에게 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봐도 선장이 중요합니다. 선장의 능력, 선장의 자세, 태도가 결정적으로 배의 운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으로는 법적 책임자인 선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배를 잘못 운행해서 파선되면 당연히 주인에게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위험한 일을 안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책임은 죄수 호송책임자인 로마의 백부장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배가 잘못되어 죄수들을 놓치면 그는 법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누구도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배의 책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풍랑치는 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10-11절을 볼까요? 행27:10-11,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사실 바울은 항해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배에 관한한 그는 비전문가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이 비전문가인 바울의 말을 듣기 보다 전문가인 선장,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모든 백성보다 낫다는 것을. 영국의 개혁자 존 녹스가 위기의 시대에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기도하는 한 사람을 달라.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영국을 일으키리라”.
기도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자 연달아 나쁜 일이 일어났니다. 먼저 사람들이 투표를 합니다. “자, 두 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장, 선주의 주장으로 지금 곧 떠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죄수 바울의 주장으로 여기서 겨울을 난 다음에 봄에 떠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투표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이 결절한 것이 곧 결론이었습니다, 투표는 전혀 형식적인 절차였습니다. 그 결과가 12절입니다. 행27: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자 더 많으니”. 다같이 “더 많으니”. 사람들이 투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적은 사람보다 옳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이 맞습니까? 다수가 소수보다 옳습니까?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남자만 60만이었으니 남녀노소 합치면 300만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광야로 나오면서 불평을 합니다.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왔느냐? 애굽에 있을 때 잘먹고 잘살았는데 이제는 먹을 양식도 마실 물도 없다”. 그때 만일 투표했더라면 모세, 여호수아, 갈렙만 빼고 전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스라엘은 영영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앞에서 예수님이 바라바와 함께 재판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100%의 군중들이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시오”. 그들의 주장이 옳았습니까? 정말 신비한 것은 하나님이 옳지 않은 다수의 주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말이 옳아서 예수님이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사안을 민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교인들의 의사를 묻습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도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도 다수결에 의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상의 방법은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주의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내 뜻을 말할 수 있으나 최후의 순간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결이 결정합니까? 하나님이 결정합니까? 교회 체제는 민주주의입니까? 신주주의입니까?
문제는 투표가 끝나 막 출발했는 데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3절 볼까요? 행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줄 알고”, 사람들이 선장의 말을 따라 막 출발했는 데 바람이 이 불기 시작합니다. 남풍은 부드러운 바람이고 항해하기에 좋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잘 결정했어, 바람도 불지 않아”.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엄청난 풍랑을 만나 모두 죽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빠지지 쉬운 유혹이 이것입니다. 자기가 기도없이 어떤 결정을 해놓고 어떤 환경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데 “마침” 배가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와도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환경을 더 믿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비전문가의 말보다 기도하지 않은 전문가의 말을 더 믿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풍랑을 만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같은 목회자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영적 지도자가 누군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속에 나타난 바울의 말과 행동을 본다면 위기때 영적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때 바울이 없었다면 모두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기 떄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새로운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 것은 목회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잘 하기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잘해야 합니다. 지혜롭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능력이 필요합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교회가 청빙위원회를 만들고 “목사의 자격”을 이렇게 규정했답니다. ”우리가 모실 목사는 설교는 정확히 20분만 하되 할 말은 다하는 목사, 설교에서 죄는 정죄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목사, 매주 주일뿐 아니라 수요, 새벽기도까지 훌륭한 말씀을 전해야 하며 교회 일도 솔선수범하여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열심히 일하는 목사, 십일조뿐 아니라 돈만 생기면 헌금하는 욕심없는 목사, 키는 크고 얼굴은 잘 생겨야 하나 제비처럼 생기지 않는 목사, 십대와는 언제나 농구할 수 있어야 하고 노인들과도 언제나 시간낼 수 있는 목사, 유머 감각은 풍부하나 언제나 신중하고 실수가 없는 목사, 매일 교인들에게 15통 이상의 전화를 하나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 목사, 매일 구령열에 불타 전도에 힘쓰되 교회 기도실은 24기간 지키는 목사“.
어떻습니까? 이런 목회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예수님 아니고는 누구도 그렇게 못합니다. 또 한 청빙위원회가 있습니다. 이 청빙위원회는 몇 달간 새로운 목사님을 구하기 위해 13명의 후보자를 만나보고 교인들에게 이런 보고서를 냈습니다. ”청빙위원회 보고서, 먼저 섭섭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동안 13사람의 목사 후보자를 만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드립니다“. 먼저 아담, 아담은 좋은 사람이지만 부인이 숲속에 벌거벗은 몸으로 다닌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둘째 노아, 노아는 120년이나 되는 긴 목회 기간 중 비현실적이고 낭비적인 방주 건축에만 몰두했습니다. 셋째 요셉, 요셉은 꿈이 컸으나 허풍쟁이였으며, 지나치게 꿈해몽에 집착할 뿐 아니라 전과기록이 있습니다. 넷째 모세, 모세는 온유하고 겸손했으나 자주 말을 더듬는 등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고 사람들은 살인 혐의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째 드보라,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여섯째 다윗, 다윗은 최근까지 가장 촉망받는 후보였으나 이웃의 아내와 간통한 사건이 드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곱째 솔로몬, 솔로몬은 위대한 설교가이긴 하나 여자 문제가 복잡하다는 소문이 있어 여성들이 싫어합니다. 여덟째 엘리야, 엘리야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성격이라 사람들이 불안해 합니다. 아홉째 호세아, 호세아는 인자하고 다정다감한 후보이나 아내의 나쁜 행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실수가 있습니다.
열번째 세례요한, 요한은 침례교 출신 목사인데 열정도 있고 고생도 많이 했으나 메시지가 너무 직설적이고 아파트에서 안 살고 광야에서만 살겠다고 주장해서 곤란합니다. 열두번째 바울, 바울은 능력있는 설교자고 신유의 은사도 있으나 외모가 대머리인데다 미혼이라 식사문제를 담당할 여신도들이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마지막 열세번째, 가롯유다, 가롯유다는 인내심이 있고 보수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하여 위기의 시대에 교회를 이끌만 하며 특히 유력한 회계사 출신으로 어려운 재정 문제를 잘 다룰 것으로 믿어 다음 주일에 설교를 초청했습니다. 다음 주일 가롯 유다 목사님의 설교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기라성같은 이런 인물들이 안된다면 누가 목회하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후보들을 만나놓고 결국 가롯 유다로 정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한계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같은 완전한 목회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를 청빙할 때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목회자를 채용하거나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피고용인이 아닙니다. 행여나 우리가 추천하고 우리가 투표했다고 해서 우리가 뽑았다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뽑고 하나님이 보내고 하나님이 일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에 두 번의 지도자 선택이 나오는 데 한번은 행1장에 가롯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6장에 7집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공통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선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결국은 하나님이 선택했습니다. 사람의 인물이나 학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행1장에서 12사도가 두 사람을 추천했는 데 조건은 딱 하나입니다. 행1:1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화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은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자”입니다. 목회자는 다른 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증거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꼭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는 좋아해야 합니다. 많은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거룩한 성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문제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기도없이 좋은 목사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결정은 하나님께 맡기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행1:24-25,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가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직무를 대신할 자인지 보이시옵소서”. 그러다가 맛디아를 선출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도합니까? 지금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모든 일을 멈추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저런 걱정, 염려, 논쟁, 다 그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좋은 신자는 기도하는 신자입니다. “주여, 주의 부활을 증거할 목사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이 교회의 역사와 정신을 이어갈 신실한 목회자를 보내주시옵소서, 사도 바울같이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목회자를 보내주시옵소서,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목사님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목회자를 추천한 사람은 추천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추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그 일이 안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되지도 않고 되어도 교회안에 파당이 생깁니다, 추천하고 바로 잊으세요. 오로지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누가오든 하나님이 보내시는 목회자에게 순종하세요. 새로운 목회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가 일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기억합시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를 인도하는 자”는 “목회자”입니다. 성경은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까? 목회자가 하나님을 위한 일하는 한 목회자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복종은 비슷한 말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순종은 밖에서 행동으로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안에서 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교회를 만드는 것은 목회자지만 목회자를 만드는 것은 교인입니다. 목회자를 바꾼다고 교회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교회가 달라집니다.
어떤 가난한 어부가 바다에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진주를 건졌답니다. 어부는 너무 기뻤는 데 자세히 보니까 진주에 작은 흠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흠집만 없다면 더 비싸게 팔 것인데” 해서 진주 표면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기기 시작했답니다. 얼마동안 계속 꺼풀을 벗기다 보니 흠집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진주도 사라졌습니다. 흠집을 너무 많이 벗기다 다른 것도 벗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흠이 없는 목회자가 있겠습니까? 흠은 그대로 두고 부족한 것은 내가 보완하면 됩니다. 그러라고 장로님, 직분자,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폭풍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도, 우리에게도 그런ㄴ 목회자를 주시옵소서.
폭풍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자, 이제 본문으로 갑시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시작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집채만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물건을 바다에 집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안돼 먹던 양식까지 집어 던졌습니다. 18절, 짐도 던지고 19절, 배에 있던 기구까지 다 던졌습니다. 그래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20절을 보실까요? 행27:20, “여러 달 동안 해도 달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까지 없어졌더라”.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이 그 추운 겨울 바다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몇 달을 고생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7:15, “배가 밀려 바람에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그들은 지금 자기 의지가 아닙니다. 이리 저리 바람부는 대로 쫓겨다닐 뿐입니다. 다음, 20절,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던지고 양식도 던지고 이제는 몸까지 던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떻게 바울을 도우셨으며 바울은 어떻게 폭풍을 이기고 승리했습니까? 23절부터 26절까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먼저 24절입니다.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위기를 만난 바울에게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는 사명입니다. 위기를 만난 바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지금 위기를 만났구나. 그래서 너는 지금 생존을 위해 힘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너에게는 생존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다. 너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사명이다. 그것은 가이사앞에 서는 일이다, 너는 로마 황제앞에 서서 나를 증거하라. 내가 그 일을 위해 너를 불렀고 너는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왔다”. 하나님이 위기를 만난 바울을 일으킨 첫 번째는 사는 방법이 아니라 사는 이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우리가 정말 사는 이유를 알면 정말 사는 방법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이유가 사는 방법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곧 사명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바울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사명”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행:15, “너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전하기 위한 나의 그릇이다”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적대자들이 그를 죽리려고 할 때 행18:10,11, “두려워 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했습니다. 행23장, 공회앞에서 위험한 일을 당할 때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처럼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하리라” 했습니다. 행26장에서 아그랍바왕앞에서 심문당할 때 행26:19,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풍랑속에서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헤하는 자를 네게 주셨느니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잘 살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사느냐 보다 왜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명이 분명할수록 우리의 사는 목적도 사는 태도도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선교를 결심하면서 스스로 저를 위해 다짐한 구호가 있습니다. “live to die, die to live”.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겠다 생각하니 사는 것이 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 생각하니 죽는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전에는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모든 고난, 모든 위기는 이것 때문에 이길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 사명을 새롭게 해서 일으켜 세운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23절입니다. 행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저는 이 구절을 좋아합니다.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이것만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중에 171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사하시려고 십자가 지셨으나 다시 사셨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두려움이 사라지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 찬송은 언제나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영어로 부르다가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후렴입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바라볼 수 있고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도 사라진다“. because he lives, 그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아 아닙니다. 아무 근심과 격정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just because he live,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단지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그 이유 때문에 I can face tommorrow, 우리는 내일을 바라볼 수 있고, I can face future 우리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고, I can face all kind of difficulties,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직면할 수 있고, 그리고 all fear is gone,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because he lives,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여러분도 살아 있습니까? because he lives,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여러분도 잘 할 수 있습니까? because he lives,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여러분도 폭풍가운데 승리하겠습니까? because he lives, 우리가 위기를 만나고, 인생 폭풍을 만나고, 온갖 종류의 풍랑을 만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서서 ”안심하라. 반드시 말씀대로 되리라. 안심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안심하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살아게신 하나님이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인생 유라굴로
행 27장 9~26절 / 김정호목사
한 사람 한 사람은 딱히 명백하지 않은 수만 가지 이유로 귀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엡2:8-10). 곁에 있는 서로를 배려하고 보살핍시다. 우리 옆의 누군가가 사실은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천사는 변장술의 대가입니다. 실체를 감추고 나타나 쉽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겉만 보고는 분별하기도 어렵고 속기도 쉽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천사로 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면 천사를 놓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에 인간은 나그네입니다. 험란한 인생을 흔히 만경창파(萬頃蒼波)의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비유합니다. 한 척의 조각배가 대해를 항해하노라면 때로는 큰 파도를 만나 전복되기도 하고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은 크고 작은 풍랑을 맞아 죽음과 고난과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과거에 이런 파도를 경험했고 현재도 경험하고 있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겪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 보다 파도는 더 강하고 아픔은 더욱 큽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승선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순풍을 받고 안연히 항해하던 중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다한 끝에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인생 유라굴로의 광풍이 주는 교훈을 듣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선장과 선주의 말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미항에서 정박하라고 바울은 권했으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뵈닉스까지 가려고 미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풍랑을 만나 14일간이나 바다에서 시달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선원들을 격려합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티스리 월(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지키는 금식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 이후는 항해하기에 위험하였습니다. 대체로 항해의 안전기는 9월 중순으로 끝나고 그 이후 익년 3월 중순까지는 중단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바울은 항해의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바다에서 세 번이나 파선 당한 일도 있었으므로(고후11:25) 이런 경험에 의지하여 이번 항해를 반대한 것입니다. 여행에 있어서도 선장 같은 전문가를 능가하는 지식을 가진 것에 주목할 것입니다. 바울의 반대에는 단순한 경험에서가 아니라 신앙적 동기에서의 예언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바울의 말대로 배와 화물을 잃고 생명도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장은 배의 지휘권을 가진 자이고 선주는 배의 소유자이므로 항해의 결정권을 가진 백부장이 그들의 일치된 의견을 일개 죄수인 바울의 말보다 더 믿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선장은 경험과 지식을 앞세웠고 선주는 이해타산을 중요시 했습니다. 지식과 재물의 의견이 중시되고 바울의 신앙적 말이 무시 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항로에 있어 똑같은 현상을 어디서나 발견하게 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삶은 행복의 삶입니다.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행복한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입니다. 욥기에서 엘리훗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면 그들은 나날이 행복하게 살고 평생을 즐겁게 지낼 것입니다.”(욥36:11)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이 무조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야 불신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될 가능성이 많으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전도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은 많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반대로 돈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행복과 돈은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시16:2) 그렇습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냥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행복이라는 보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나 재물보다도 훨씬 더 귀한 것이어서 잘 사용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보석으로 만들어 줍니다. 보석같이 귀한 삶, 그것이 바로 행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입장으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고 있는 죄인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제안대로 인생 뵈닉스로 떠나는 배의 운명은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선장의 기술과 선주의 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바다를 항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순하게 부는 남풍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2-14절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미항과 그 인근인 라세이 성은 빈약한 촌락이고 겨울이 춥기도 하므로 선원들은 이곳을 떠나 보다 번창하고 따뜻한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잠시의 불편함을 피하려 하다가 큰 고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뵈닉스는 서북풍을 막아 온화한 곳입니다. 미항에서 뵈닉스로 향하는 해안선은 북으로 급선회하므로 순한 남풍은 그들의 항해에는 최적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때 아닌 순풍에 속아 저들은 큰 실패로 끌려 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달려가는 자에게 마귀는 일시적인 순풍을 주는 법입니다. 태풍 전야는 늘 고요한 것입니다. 요나에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던 것입니다(요나1:3). 유라굴로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낱말인데 동북풍을 뜻합니다. 급격한 동북풍인 광풍이었습니다. 이다산에서 내리치는 동북풍에 배들은 밀려 파선한다고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입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신답게 사는 것입니다.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습니다.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집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크고 화려한 인생의 뵈닉스로 인하여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순한 남풍으로 인하여 사명을 버리고 내 뜻과 고집과 이익만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과 사명을 버리면 반드시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깨지고 무너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생 뵈닉스와 순한 남풍 위에 계신 하나님을 정신 차려서 잘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24-25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선원들은 돛대 등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맡겨 쫓겨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짐을 버렸습니다. 식량만을 간직해 두었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별은 항해자에게 배의 위치를 가리켜 주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해와 별이 보이지 않아 배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식사도 못했으므로 절망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이나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무사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멸시를 받으나 유사시에는 그들의 소망이 되고 구원이 됩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환상의 사람 바울에게 마지막 환상입니다. 광풍 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징조는 밖이 아니라 위에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 앞에 서야 합니다. 함께 항해하는 276명을 구원해 주십니다. 안심하라. 그대로 되리라고하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선포한 그대로 276명은 다 살게 되었습니다. 위험하고 절박한 가운데 이 보다 더 위로와 격려와 생명의 말은 없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고한 보통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신생아실’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쭉 누워있는 아기들 중에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니 옆, 앞, 뒤에 있던 아기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따라 우는 것을 ‘신생아성 반응울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신생아실에서 가장 잘 우는 아기를 데리고 나와 다른 방에서 울음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그친 후에 조금 전 녹음했던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아기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은 ‘아기들은 자신이 불편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타인을 위하는 이타심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고로 이 세상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게하려면 먼저 누군가가 선행(善行)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이타심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2001년 이수현이라는 일본 유학생이 지하철에서 취객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사망했습니다. 이 선행이 알려진 후로 일본 곳곳에서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그 전에는 철로에 사람이 떨어져도 남의 일처럼 바라보기만 했었답니다.
유라굴로 광풍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언제 불어 닥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됩니다. 유라굴로 앞에 바울처럼 믿음으로 당당하게 사는 제2의 바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많은 바울이 생길 것이고 따를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믿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인생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 닥치는 이 시대에 선장과 선주의 말과 순하게 부는 남풍을 믿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믿어 유라굴로 광풍같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시대의 사도 바울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문기태목사 / 행 27:9-26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인생은 항해다’
생각할수록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인생이 항해라고 한다면 아마 모든 사람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순풍에 돛달고 원하는 목표를 향해 순탄하게 항해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절대로 순풍만 불어오는 바다는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오늘이 올해 전반기 마지막날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살아오셨는데 올해 자신의 인생에 순풍만 불어오신 분이 계신가요?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욕심껏 모든 일이 다 이뤄지던가요?
아마 대부분 순풍을 늘 기다리다가 6개월이 다 지나가신 분이 더 많지 않을까요?
또 순풍이 불긴 불었지만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원치 않는 폭풍만 연달아 불어온 것처럼 느껴지신 분이 이 가운데 더 많이 계실 것입니다.
사고와 질병과 가난과 실패와 같은 폭풍을 만날 때 우리는 대부분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겪게 되었나를 생각해보게 되지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 때문에 만난 폭풍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그 폭풍은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또 나의 실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폭풍을 만나게 되면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나를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붙잡아서 더욱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욱이 주님을 위해 삶을 헌신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 때문에 만난 폭풍은 더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바울은 주를 위해 정말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며 복음에 미친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었는데도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시기와 온갖 위협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는 큰 고난을 너무도 많이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했지요. 전도여행한 거리를 다 합하면 무려 20,000Km정도의 거리였는데 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당한 어려움들을 고린도후서 11장에 소개하고 있는데요.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한 고난의 크기들을 상상하며 들어보십시오.
고후 11장 23-27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은 사실 인생의 꽃길을 걷던 사람이었지요.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보장된 기득권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지요. 주님 만나기 전의 인생에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난들입니다.
이 모든 고난이 전부 예수 믿고 나서 시작되어 매일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이쯤되면 포기할만도 할텐데’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사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럴 수 없어야 정상일텐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고통과 고난의 크기가 여전히 작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어떤 고난도 은혜를 포기할만큼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는 정말 복음에 미친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인생에 찾아오는 폭풍들로 인해 그의 믿음이 꺾이기보다 오히려 더욱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폭풍을 만날 때마다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이 얼마나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것인지를 증명하는 기회로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찾아온 폭풍을 믿음을 보여야 할 때로 여길 줄 알았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하나님을 향해 보여야 할 믿음 3가지를 나누려합니다.
첫째로 폭풍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고, 하나님을 만날 기회로 바꿔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276명을 태운 알렉산드리아호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백부장 율리오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크게 2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1절의 “더 믿었다”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역풍으로 인하여 항해가 지체되었습니다. 또한 금식하는 절기(속죄일)가 지나면 지중해는 시기적으로 겨울이 가까워져 항해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갈 것인지, 그냥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 바울은 이번 항해에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곡물 운반선은 로마 정부의 통제 아래 운항되었기에 결정권은 결국 백부장의 손에 달려 있었는데요. 백부장은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 항해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12절의 “거의 모두는”이라는 단어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더 많으니”라고 기록.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한 곳이므로 더 안전하고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했습니다. 또한 승객들도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미항을 떠나려 할 때 때마침 순풍이 불자 백부장과 선장, 선주, 승객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줄 알고 닻을 올리고 크레타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습니다.
인생의 큰 폭풍을 만나게 될 때 우리도 이 두 가지로 인해서 만나지 않아도 될 폭풍을 만나게 될 때가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믿음보다 지식과 이성과 경험이 더 우선되어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의 말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더 귀를 크게 열고 따라가기에 인생에 유라굴로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를 만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까?
자기들이 자랑하던 것들, 자기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다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평생의 경험과 지식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배를 움직여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고 그냥 떠밀려 가게 되면서 선장은 더 이상 선장이 아니고 이 배의 진짜 선장이 하나님이심을 점점 보여주시게 됩니다.
지식과 경험을 하나님보다 더 귄위에 올려놓고, 욕심에 따라 결정하는 다수의 결정을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옳은 결정이라 여기는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댓가가 유라굴로였다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폭풍을 통해 그들을 어디까지 낮추시게 됩니까? 20절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이 심하게 불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해와 별이 보여야 방향 감각을 찾을 텐데 완전히 방향도 잃어버리고 지속되는 폭풍으로 인해 다 죽었다라고 하는 절망이 배 안에 가득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폭풍을 통해 낮아질대로 낮아지게 되니까 배 안의 사람들이 비로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대놓고 무시하던 그들이 바울이 22절부터 26절까지 길게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도 입을 막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내 힘을 빼고 겸손하게 낮아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열려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나를 겸손하게 낮추셔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함께 있어 줄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행자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절을 보면 ‘우리’라는 주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만 바울과 동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출신인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도 우리와 함께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고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다는 겁니다. 아리스다고는 그때부터 바울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20장 4절에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 동행한 일곱 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 또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그랬던 아리스다고가 바울이 로마까지 압송돼 가는 길까지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호송하던 배에는 모두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군인들도 있었고, 선장과 사공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동행자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께 배를 타고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정말 바울의 동행자였습니다. 목적지도 같았고요, 목적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롭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한다면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안전합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길도, 믿음의 길도 혼자서는 갈 수 없습니다. 함께 가는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길에, 믿음의 길에 좋은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믿음의 동행자를 만나도록 기도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믿음의 동행자가 되어 주시길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더 이상 다른 동행자가 필요 없을만큼 확실한 동행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동행자이시지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며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살 희망을 잃어가는 우리의 이웃에게 한 주간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안심할 수 없는 세상에서 안심할 수 있는 하나님의 품을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폭풍을 만날 때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22~26절을 보면 사공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소망을 잃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안심하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무슨 근거로 안심하고 기운을 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큰 폭풍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리고 바다와 파도를 다스리시는 주님에게 시선을 향했습니다. 이 사나운 폭풍을 바라보면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바울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보시고 용기와 담대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성 어거스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마니교에서 생활하면서 육신을 따라 살았고 세상의 인기와 육신의 향락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안정도, 평안도 없이 살아가다가, 하루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펴 읽으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앞에 있던 성경을 펴보니 로마서 13장 12~14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읽은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바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지난날의 잘못된 생활을 그 자리에서 청산하고 온전히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바람이 몰아치는 큰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을 살면서 폭풍을 만날 때 바울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을 만났을 때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물론 폭풍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으나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같이 고난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만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닮은 동행자가 되어주셔서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이 위로와 소망을 얻는 통로가 되도록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보시기 바랍니다.
폭풍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모든 성도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비범한 사람
행 27장 9~10절 / 김홍도목사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죄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로마 황제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황제 앞에 서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석방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죄수의 몸으로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을 비롯한 죄수들을 인솔한 사람은 율리오라는 백부장이며 그들이 타고 있는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호였습니다. 얼마쯤 항해하다가 무라성에 이르러서 알렉산드리아호라는 배로 바꾸어 타고 계속 항해하여 미항(美港)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조용히 기도하고 명상하는 중에 항해를 계속하면 큰 위험이 닥쳐올 것을 영감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권고하기를 이번 항해가 배와 우리의 생명에 큰 위험이 있을테니 과동 (過冬)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계속 항해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쯤 갔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여러 날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배에 있는 모든 짐짝들을 바다에 던지고 심지어 배의 기구까지 바다속에 내버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심한 풍랑으로 토하고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또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이리 저리 밀려 다니기를 여러 날을 계속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던들 이런 재난과 손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안심하고 용기를 내십시요. 이 배만 잃을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의 천사가 지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무서워 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많은 사람을 다 네게 맡겨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요.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 흘러 닿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조이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 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당신들의 목숨이 붙어 있을 것이고 당신들 중에 머리카락 하나 라도 잃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후에 떡을 들어 하나님께 축사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배는 파선되었고 짐짝하나 건지지 못했으나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이 멜리데라는 섬에 헤엄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이 배에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누가 참으로 비범하고 뛰어난 사람입니까? 그 비범한 사람은 선장도 아니요, 선주도 아니요, 백부장도 아니요, 경험 많은 뱃사람들도 아닙니다. 그 비범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죽음이 닥쳐오고 어려운 시련이 몰아칠 때에는 돈이 많은 것도 벼슬이 높은 것도 지식이 많은 것도 필요 없습니다.
위기에 직면 했을 때는 비범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서 군중을 인도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고 인도해야 합니다. 이런 비범한 사람들이 나라도 지키고 교회도 지키고 이 세계를 지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이런 뛰어난 인물이요 하나님의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비범한 사람의 자격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바울은 전기를 연구한 사람과 같이 항해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행선하기 전에 기도하며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과 위험이 올 것을 영감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며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는 무슨 일이나 급히 서둘지 않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도 눈이 먼채로 3일이나 금식하며 심사 숙고한 후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전도사업을 시작할 때도 대번에 뛰어들지 않고 2년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홀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며 기도하고 난 후에 전도 사업을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범한 사람은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며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무슨 일에나 기도하며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폭풍과 파도라도 그의 영교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타인이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생각하는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초라하고 무식해 보일지라도 기도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뛰어난 사람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단순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집니다>
폭풍이 심할 때 뱃사람들도 소망을 잃고 공포에 싸여 있었으나 바울은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줄 믿노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비범한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나 재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일만큼 단순하고 어린아이같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의 영웅들도 어린아이같이 단순한 데가 있고 바보스러운 데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더욱이 단순 소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노아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햇빛이 내려쬐는 맑은 날 높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자신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런 믿음의 소유자인고로 갈 곳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떠나라는 말씀만 믿고 떠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큰 축복을 받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도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애굽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기드온 또한 이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고로 3만명이나 되는 많은 지원 용사들 중에 불과 300명의 용사를 뽑아 무수히 많은 적군을 무찔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도 이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일만큼 기도 생활을 하다가 사자굴 속에 던져지게 됐으나, 오히려 승리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디(D. L. Moody) 은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은혜주실 것을 믿고 우리 다 같이 머리 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실 일에 대하여 감사합시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단순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까, 단순하고 어린아이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그럴 때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에 입각한 낙관주의를 가집니다>
바울은 성난 파도가 삼킬듯이 배를 때리고 죽음에 직면한 때에 배 갑판위에 서서 "안심하십시요. 우리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먹지 않은지 14일이나 되었으니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야 됩니다"하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며 소망적이 었습니다. 이것 역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분이시므 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영원히 긍정뿐이고 낙관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전진하는 대신에 뒤로 물러갈 길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서 낙관적인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918년 l1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선거하는 마지막날 투표소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병문안을 했습니다. '요사이 좀 아프신 데가 어떻습니까?' 류마티즘으로 몹시 고통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였습니다. 이 때 그는 "내 발은 항상 아프지" 머리는 언제나 건강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답니다. 그는 범사에 그렇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 경제공항이 일어났을 때도 잘 극복하고 나갔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모든 기업이 망한다 생각하여 은행에 저금한 돈이나 기업에 혹은 공장에 투자한 돈을 찾아가려 했습니다. 때문에 공장들은 문을 닫고 사업체들은 붕괴되고 큰 어려움이 닥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매일매일 방송을 통해 말하길 "우리는 이 경제 공황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복받습니다. 잘 삽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말을 매일 전 국민에게 외쳤더니 국민들은 다시 마음 놓고 은행에 저금을 하고 기업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여 불황을 타개했을 뿐 아니라 큰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는 무수히 많은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영어의 몸이 되어 절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철거덕 거리며 찬송을 했더니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음으로 찬송하며 나갈 때에 얽매였던 마귀의 사슬이 끊어지고 닫혔던 축복의 문이 열릴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승리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 인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 찬송이 부족합니다. 어떤 가정을 심방하니까 집안 청소를 하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얼마나 은혜가 됐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감사하면서, 찬송하면서 낙관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월남과 크메르가 망하고 인근 국가들이 위협을 당할 때 '이제는 한국차례다.' 모든 세계인들은 이렇게 말하며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몰지각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민을 간다하며 야단 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신령한 목사님들께서는 '우리나라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으로 절대 안전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 커녕 석유가 나오고 수많은 지하자원이 매장된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희망에 벅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이렇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나갈 때에 축복의 문은 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죤스(J. D. Jones) 박사는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한 번은 카나다의 어느 산속을 지나다가 새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집에 편지하기를 산과 숲이 아름답고 장엄하지만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이 산은 노래를 잃었다 하고 썼습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찬송이 없이 기쁨이 없이 삶의 즐거움이 없이 살아가는 분이 너무도 많이 계십니다.
참된 크리스챤이라면, 참된 주님의 자녀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능력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비관주의자(Pessimist)가 되지 말고 낙관주의자(Optimist)가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사람은 경외심과 감사한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바울은 그 폭풍 가운데서 믿지도 않은 사람들 중에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 의 참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영어에 지져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란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역정내고 욕할 때 예수 그리스도여 하는 말입니다. 아무 때나 주님의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마음 속에 주여! 하는 부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위험해도 근심이 와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기 위해 예배당에서 뛰거나 소리지르거나 기도할 때 눈뜨고 장난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심을 가진 사람은 죄를 못짓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했습니다. 문학가들이 어느 날 런던의 사교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유명했던 문학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하길 만일 밀톤(Milton)이 우리 방에 들어 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우리는 그가 세상에 있을 때 받아 보지 못했던 열렬한 환영을 해야 되겠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만일 쉐익스피어(Shakespear)가 이 방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모든 문학과 시의 왕관을 그에게 씌워 드려야겠지요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방에 들어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촬스·렘(Charles Lamb)이라는 사람이 말하긴 "우리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될 줄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의 마땅한 정신 자세여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세어할 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잠언 16장 3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공자님도 말씀하시길 임금님이 벼슬을 사양할 수 있고 성을 빼앗는 용맹을 가질 수도 있고 칼날 위에 설 수도 있지만 중용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중용이란 말의 뜻은 절제하고 자기를 제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큰 전쟁터는 사람의 가슴이요, 사람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 마귀와 성령이 주는 마음의 다툼입니다. 여기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배 위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일본을 방문하시고 오셨는데, 30여년 전에 일본 패잔병을 도와 주었는데 그분이 목사님이 되셔서 초청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도와 준 것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제는 남을 도와주는 축복받는 신앙 생활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비범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죽지 않고 산 사람들
행 27장 9~12절 / 피종진목사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이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게 되면 위험하고 불안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이 땅에 어느 한 사람도 그 생애에 평안이 없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호위병을 두고 많은 무장을 해서 그 안에 보호를 받기 위해서 담도 쌓아보고 철조망도 쳐보고 사나운 개로 하여금 사방을 지키게도 해보지만 그것 가지고 절대로 마음의 안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한다는 이 사실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276인이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한 명도 죽지 않고 다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살게 되었고, 한사람도 죽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이것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왜 죽게 되었느냐? 몇 명이 죽고 살았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살게 된 이 사실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276명이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 죽지 않고 다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배에는 백부장이 타고 있었고, 선장과 선주가 타고 있었으며, 로마로 호송되어가는 죄수들이 타고 있었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백부장은 권세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세계를 통치하는 가장 권력을 가진 요소 요소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세가 이 풍랑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선장과 선주는 물질주의자들입니다. 이 항구 저 항구 배를 타고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황금을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선장과 선주가 바로 이 풍랑을 잔잔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가는 이 죄수들은 더구나 발언권도 없고, 자유도 없고,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박탈당한 그런 짐승 이하의 천대를 받으며 호송되어가는 이 사람들이 그 풍랑을 잔잔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위기상황에 봉착해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이런 사건에 이르렀을 때 사람은 자기를 원망도 하고 남을 탓하기도 하고 세월을 탓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후회도 해보고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바로 내가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는 불행한 인생이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배 안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쌓아놓는 것은 세월이 지나고 날이 가고 달이 간다고 해서 기도가 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쌓아놓은 기도는 그대로 다 비축이 되어집니다. 은행에 적금을 비축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크게 비축이 되어집니다. 화력이라는 것은 폭발물의 양에 따라 강도가 달라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쌓아놓는 것만큼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쌓아놓은 기도가 바로 큰 응답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합니다. 교회에서 제일 하나님이 신임하고 목사가 신임하고 성도들이 신뢰할 수 있는 바람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100%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보장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일을 맡기시고 큰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도 기도해야 되지만 어려움이 없을 때도 기도를 쌓아놓으십시오. 영적인 호흡이 계속 이어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은 기도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에스더도 기도로 민족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고넬료도 기도하면서 가정의 축복을 하나님 앞에 받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죤 낙스는 '내가 생명을 사랑하거든 기도를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최대의 무기입니다. 뉴톤은 '나는 망원경으로 천리 밖을 바라볼 수 있지만 내가 기도할 때는 저 멀고 먼 하늘나라까지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영안은 탁 트여있습니다. 하늘 나라까지 열려 있습니다. 앞날의 미래가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절망이 절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 안하면 절망이지만 기도하면 소망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면 사람이 미워집니다. 기도할 때는 다 사랑스럽게 보여집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필요없는 것을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행 27:18,19) 배에 실은 그 소중한 물건들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자기들이 죽어가는데 그 배에 있는 물건이 아무리 귀중하다고 할지라도 생명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것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고 자기 생명이 이 세상 것만 못한 것처럼 그 노예가 되어 천대를 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존경을 받아야 될 분입니다. 사랑을 받아야 될 분입니다. 여러분은 가치 있게 살아야 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존귀하게 지으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귀하게 살아야 될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다 맡기면 됩니다. 세상 것이 귀중한 것 같지만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필요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필요없는 근심을 안고 있는 사람, 필요없는 욕심이 너무 쌓여 있는 사람, 필요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벌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피곤한 인생입니까?
참 취미도 가지각색입니다. 제가 TV를 보는데 어느 분은 안경테를 모으는 것이 취미랍니다. 옛날 골동품부터 시작해서 선반에도 옷장, 책장에도 복도부터 온 집안 구석구석 안경테로 가득차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필요없는 것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 보면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우리는 필요없는 것을 다 버려야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주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한 사람은 빈 손으로 가면서 옆에 사람 구경만 하겠습니까? 함께 들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다 맡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맡기라'는 말과 '맡겨버리라'는 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맡긴다'는 말은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맡겨버리라'는 것은 끝장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맡기기는 잘하는데 전당포 물건 찾듯이 다시 찾아갑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버려야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근심이 쌓이지 않으면 혈액순환에 좋은 약을 먹어서 맑게 하는 것보다도 항상 맑은 공기를 마시듯이 맑은 생수를 마시듯이 그리고 순금에 전류가 잘 흐르듯이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창조한 본연대로 건강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쓰레기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머리 속에 있는 잡념, 가슴속에 있는 근심, 그리고 말버릇, 손버릇, 행동이 나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오늘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맡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밥은 비싼 것 사먹지 않더라도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그러한 짐만은 맡기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짐을 맡아주는 보관소도 있고, 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짐을 맡기면 돈을 주어야 되는데, 우리 주님은 아무리 맡겨도 계산서가 안나옵니다. 오히려 주님이 맡기는 자를 기뻐하시고, 맡기는 자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축복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4) 바울은 지금 로마에 가서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서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될 사명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주의 일을 좋아하고 정말 자나 깨나 주의 일 열심히 하는 분들을 지켜보면 항상 건강하고 좋은 일들이 자꾸 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지나면서 정말 좋은 성도들을 만나서 제가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 저 분은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 저렇게 하면 축복을 다 잃어버리는데 하는 분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런 분은 주의 일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짐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깜짝 놀랄 축복을 많이 받게 해주셨는데, 주의 일 싫어해서 이 핑계 저 핑계 이렇게 저렇게 빠져나가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너무 너무 처참하고 가슴 아픈 소식을 들어보곤 합니다.
바울에게 만일 사명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겠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 때문에 바울과 함께 행선하는 276명이 다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이웃을 잘 만나야 됩니다. 저주받은 사람을 만나면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축복된 사람을 만나면 요셉 때문에 애굽의 고센 땅이 보호와 축복을 받은 것처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지역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광야 같은 땅도 오아시스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로스앤젤레스의 땅은 옛날 인디언들이 사는 숨막힐 정도로 더운 사막지역인데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착하니까 복된 땅이 되었습니다. 주의 일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사명을 위하여 가서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하자 추워서 모닥불을 쬐다가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을 물었습니다. 이 뱀에 물리면 다 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섬 사람들이 '아, 이 사람이 바다에서는 구원받았는데, 이제 독사에 물려 죽는다'고 막 두려워했는데, 웬걸 독사에 물렸는데도 툭툭 털고 아무렇지도 않자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면서 이 분들이 막 바울을 신으로까지 생각을 그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오늘 사명을 위해서 사는 자는 풍랑에서도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이런 독사의 물림 속에서도 보호를 받고 위기에서도 보호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리빙스톤은 '내게 사명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명을 위하여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바울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확신과 평안 가운데 거한 바울의 모습은 폭풍의 상황에 매몰되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안심시켜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자기의 것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 허락했습니다. 바울이 '믿노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계속해서 믿고 있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필요없는 것을 다 내어버리고, 사명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276명이 다 죽지 않고 산 것처럼 기도의 사람, 필요없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겨버리고, 사명에 충성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보호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폭풍 가운데서의 평안
행 27장 9~26절 / 김상수목사
얼마 전 한 젊은 여인이 두 어린 남매와 함께 아파트에서 추락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에 우리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 지난주간에는 현대그룹의 총수였던 정 몽헌 회장이 12층 자기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사건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듣는 순간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많이 염려가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분한 마음까지 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 회장의 죽음을 보면서 그분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저는 작금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면서 지금이 어느 때 보다도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안팎으로 꼭 풍랑을 만난 배와 같은 상황입니다. 배가 앞으로 계속 항진을 해야할 텐데 지금 10년째 표류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의 국민소득이나 지금의 국민소득이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와 지역 이기주의와 이념의 갈등과 외부적인 혼란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으며, 북한의 핵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지금 최대 이슈가 자살 사건입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지난해 총 자살한 사람이 13,055명이며, 하루평균 36명이 자살하며, 시간적으로는 3시간에 2사람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침체로 인해 실업자가 늘어나고,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생활고와 사업실패 때문에 자살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통계를 보면 지난 2000년에 생활고와 사업실패 때문에 자살한 사람은 78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에는 843명, 2002년에는 968명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10대들이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을 했지만 그 숫자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30대가 지금 계속해서 자살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는 2444명, 2001년에는 2446명, 2002년은 2,655명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많은 어려움이 있고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의 개개인의 사정과 형편을 살펴보아도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상황에 있는 성도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아픔이 있고, 염려와 걱정근심이 있고, 또한 눌린 것이 있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염려, 근심, 걱정, 고민이 반드시 가난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번에 우리가 보았듯이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중 한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보다 더 많은 걱정과 근심과 고민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더욱 근심이 많으며, 더 짐이 무겁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바다에 가면 풍랑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나 이 풍랑이 다가오는 것인데 그때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죄수의 몸으로 그 앞에 서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호송하는 백부장이 그레데에 와서는 선장의 말을 듣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서 계속 항진을 하면 큰 풍랑을 만나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의 말을 듣고 가다가 ‘유라굴로’ 라는 폭풍을 만나는데 14일 동안 표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에 있는 많은 짐을 다 버리고 연장도 다 버리고 하는 가운데 276명의 목숨을 겨우 건지는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평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함께 동승한 276명을 안심시키면서 도리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풍랑을 만났을 때에 가질 수 있는 믿는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때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살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인도할 수 있는 힘과 특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길에 폭풍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파산을 당하기도 하며, 하던 사업이 파산을 해서 가정이 파산이 되고, 또한 실직도 하게 되고 또 사랑하는 이가 죽어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내가 죽을 병에 걸려서 절망적인 상황이 되기도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가온 인생의 폭풍입니다.
그때 자칫 잘못하면 좌절합니다. 불신자들은 낙심해서 자살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성도는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며, 용기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 우리가 인생길에 폭풍을 만났을 때에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합니까?
1)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바로 인생길 자체가 항해하는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셔야합니다.
모든 분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나도 일생에 유라굴로와 같은 폭풍을 만난다는 것은 기정사실임을 알아야합니다. 이미 유라굴로와 같은 폭풍을 만난 분들도 우리 가운데 있으며, 앞으로 만날 것입니다.
저도 만납니다. 저도 지금까지 잘 지켜주셨는데 두 달 전부터 청력이 떨어져서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항상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남편과는 헤어져야합니다.
이 폭풍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인데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폭풍이 다가오기 전에 폭풍을 준비하고 대비하고 내가 폭풍을 맞았을 때에 대비하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폭풍이 없을 것이라고 편안하다가 갑자기 다가오면 속수무책인 사람이 되지 말고 폭풍이 다가왔을 때에 폭풍과 맞서 이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갑자기 건강을 잃게 되고, 어느날 갑자기 재산을 다 잃게 되고, 가족을 잃게 되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못되어 좌절당하게 되었을 그때에도 우리가 침몰당하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어야할 것입니다.
2) 우리에게 폭풍이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을 때입니다.
만약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우리가 미항에서 지내고 가자고 했다면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선장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 여러분이 결정해야할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방향을 설정하고 그 일을 진행해 나갈 때에 모든 계획과 결정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나 연장자인 어른들의 지도를 받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하다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성도 중에도 한번도 목사와 상의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전에 의논을 했으면 하지 말도록 말리든지, 아니면 큰 원칙의 틀 안에서 그것을 지도해줄 수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도 법을 안 지키면 감옥에 가야합니다. 우리나라에 지난 정권의 실세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하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에 우리 가정에 폭풍이 다가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느니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장사하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대를 이어 목사가 되라고 하셨는데 나는 세상에서 장사하느라고 세상길을 따라가느라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풍랑을 만나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 세 식구가 다 세상을 떠나는 풍랑을 만났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은 풍랑을 만나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결혼할 때와 사업을 시작할 때, 인생의 길을 계획할 때에 지도를 받는 것은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1)폭풍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폭풍이 나를 집어삼키고 죽일 것 같아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폭풍 중에 고생할 때에도 그는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폭풍이 일어났으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폭풍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우리의 폭풍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싸인 인줄 아셔야합니다. 사람이 폭풍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잘나서 돈을 벌고, 자기가 잘나서 잘되고, 출세하는 줄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나보면 그때는 안 됩니다. 그때 자기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평생 어부였습니다. 밤중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폭풍이 불었습니다. 풍랑이 불어 배에 물이 들어오자 배가 잠기게 되니까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평생 동안 했던 기술을 가지고 노를 저어도 헛수고였습니다. 그 실력 아무데도 쓸모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 “바다야 잔잔하라”고 하시니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때부터 노를 젓자 잘 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될 때에 하나님께서 편안한 좋은 환경을 주시기 때문에 내 노력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인 줄 알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2)이 풍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됩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보여드려야 합니다. 회개하고 모습을 주님 앞에서 새롭게 가다듬어야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풍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을 옆에서 잘 모셨던 장로님이 한분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평생을 목사님을 전심으로 받들어드렸던 장로님이십니다.
이 장로님은 어떻게 그런 믿음의 장로님이 되셨을까요? 그분은 6.25동란 때 월남해서 할일이 없었는데 주문진에서 자기 친구가 수산조합에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도움으로 고기를 사 부산에 가서 장사를 하면 장사가 잘된다고 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몇 번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돈에 눈이 뜨게 되고 돈에 재미가 붙게 되면 하나님은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도 똑같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배에 잔뜩 고기를 싣고 부산으로 갑니다. 배가 바다 한복판에 갔는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 조그만 배가 폭풍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죽는구나!’ 그렇게 되어지니 사람이 뭐하겠습니까? 자기 재주를 아무리 부려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이제부터 바로살고 하나님 뜻대로 바로 살겠습니다”라고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몇시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제일순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풍랑을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풍랑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풍랑을 만나면 주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이 풍랑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릴 때에 그때 주시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기도하고, 눈물로 기도했더니 상황은 도저히 불가능해서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때에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을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할 때 주신 그 평안함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납니다. 상황은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마음에 이상하게도 평안이 옵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도 평안이 옵니다. 사업은 망했는데도 평안이 옵니다. 집에 가면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평안이 옵니다.
저는 그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평안은 하나님이 OK 싸인을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해결되며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붙드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풍랑을 만났을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 파도가 치면 배는 항상 파도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복되지 않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데 파도가 무섭다고 배를 옆으로 돌린다면 바로 전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많은 불신자들이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보겠다고 하지만 속절없이 낙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천성을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말씀을 붙들고 목표를 향해 앞을 향해 전진해야합니다. 피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련이니 전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승리합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하고 맡겨버려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타고 있는 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 던져버리고 정처 없이 떠다녔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18-19절은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자기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 이것 가져다가 팔면 돈을 벌 텐데 했던 것들, 이것 가지면 내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4)풍랑을 만났을 때에 내가 의지했던 것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평안을 얻는 길입니다. 이번에 SFC수련회를 한동대학에서 두 주간에 걸쳐서 했는데 우리 교회 학생들이 갔을 때에 강사님 한분이 하정완 목사님이라는 분이었는데 이 목사님은 책을 50권정도 쓰신 목사님으로 위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습니다. 위암으로 위를 완전히 잘라내고 식도와 십이지장을 바로 연결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좋아했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그 시간에는 내게 아무 가치가 없었으며,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때 내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고 했으며, 그가 그 하나님으로 평안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포기하십시오. 욥기서 22:21~28절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하나님 일은 뒷전이고 육신의 일에 앞서 있는 분이 계십니까? 풍랑 만나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풍랑 만나 회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풍랑만나기 전에 감사하면서 주님 뜻대로 사십시오.
풍랑일고 난 후에 인간은 자기를 발견합니다. ‘아아, 전에는 조금 똑똑한줄 알았는데 별것 아니로구나’ 저는 죽도록 고생하고 난 뒤에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좀 똑똑한줄 알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천치 바보가 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셨습니다. 거기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5)바울을 폭풍 속에서도 지켜주셨던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앞이 잘 안보입니다.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를 지키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지난 36년 일본의 압제 아래에서, 우리의 성과 이름을 바꾸어버렸던 그 압제에서도 이 나라를 지키셔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6.25 동란에는 얼마나 혼돈의 시절이었으며, 공산당들이 얼마나 이 나라를 혼란케 했는지 그러나 이 나라가 공산당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6.25동란에서 인민군들이 완전무장을 해서 남하했을 때에도 불과 한 달 만에 대구, 마산, 부산 밖에 남지 않아 망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지키셔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정치가 얼마나 부패하고 혼란스러웠던지 영국신문에 말하기를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할지언정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소망이 없는 나라다”라고 평가를 했던 나라입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이만큼 축복을 받았습니다.
원리대로라면 북한이 우리보다 훨씬 잘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해방직후에 우리보다 공장도 많았고, 자원도 많았고, 전기전력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북한이 남한의 전기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인 독재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일사천리로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보다 훨씬 잘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서투른 민주주의 한다고 중구난방으로 늘 혼란한 상태로 싸우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래도 누가 더 잘살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잘살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다른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폭풍가운데서도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막까지 지키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 최후의 승리를 누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세상의 평안은 가진 것이 있어야 평안한데 하나님의 평안은 다 빼앗기고도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된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이 참된 평안입니다.
스테포드 라는 분은 대학교수이며 변호사입니다. 신앙이 독실한 부인과 예쁘고 똑똑한 네 딸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 가정에 폭풍이 다가왔습니다.
유명한 시카고 대화재 때에 그 집과 재산이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위로하기 위해서 부인과 네 딸을 불란서로 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다가 대서양에서 그분들이 탄 빌리하브 라는 배가 영국 배와 충돌해서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20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는데 그때 부인만 살고 네 딸은 모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재산과 가족을 다 잃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그분이 불란서로 부인을 데리러 가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배가 침몰한 지점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아픈 가슴, 찢어지게 아픈 그 가슴에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우리 아이들 넷이 아주 없어진 것 아니잖아요. 우리는 잠깐 헤어져 있는 것뿐이고 천국에서 만날 거예요”라고 위로할 때에 이 부인의 말을 들은 스테포드 씨가 너무너무 가슴이 뜨거워져서 그 입에서 시가 흘러나오는데 그 시가 무슨 시입니까? 우리가 늘 부르는 470장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라는 찬송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평안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 근심, 걱정으로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때까지 기도하시고 그 평안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고, 앞으로 어떠한 풍랑이 다가오더라도 말씀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