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려라 허니 바람이 마구마구 달려들어 뺨에 부닥치는 느낌이 좋아요. 끊긴 루틴을 기어이 원상 복귀 시키고서 회장하러 삼겹살집에 왔어요. 주당만 회장하라는 법이 있나요? 시래기 된장국-파무침-콩나물-양파-고추-마늘-꽈리고추-기름장까지 사이드 메뉴 천국입니다. 와 귀(구워 먹는 소고기)를 고추냉이에 간장 찍어서 먹으면서 파무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초밥도, 소고기도 국산이 가장 맛나다고 봅니다. 나는 이번에 <사이드 메뉴>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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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나 라캉 이전에 비본질(무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꿰뚫어 본 니체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습니다. '이성'의 어원이 채권자와 채무자로 시작된 것을 아시나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5%의 무의식이 95%의 의식(이성)을 밀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과, "진리보다 곁가지인 비진리를 다루지 않는 철학은 의미가 없다"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인간은 거대한 사상 속에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 불편, 실망, 실패, 피곤 등등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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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은 꽃길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진리>를 박물관 진열품처럼 고정된 결론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꽃길을 포함한 시궁창 길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조각조각의 콜렉트라는 말도 아닙니다. “조직신학이 아니라, 씨앗-줄기-꽃-열매를 모두 통과하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과정 전체, 본문을 통으로 보는 성경신학 말입니다. 40년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행복론' '부자 아빠' '성공 신화'의 '핵심 찾기' 유혹에 현혹되었는지 속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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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전체>개념 앞에서는 틈-숨-공백-곁가지마저도 하나의 국면일 뿐입니다. 행복도, 거룩도, 성공도, 실패도 전체 과정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지요. 에예공! "과정 자체가 진리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 성장의 드라마”로 읽혀야 한다고 보는데 동의 주시라! 헤겔은 인간을 실패하지 않는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순·충돌·좌절을 통해 정신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고 봤어요. “배고픔이 철학보다 강하다(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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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조화보다 충돌에 가깝다(니체)”, "인생은 끝까지 해석이 미뤄진다(데리다)” 공주야! 아비는 이 시간 꽃길을 철회한다. 쾅! 쾅! '이성'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성은 주체 안의 타자, 곧 욕망·채무·법·죄를 관리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곁가지(비진리)를 다루지 않는 철학은 무의미합니다. 다만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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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기억의 고통”에서 인간을 본다면, 바울은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롬 8:1)에서 새 주체를 봅니다. 결국 무의식이 아니라, 누가 나를 기억하는가 관건이 아닙니까? 꽃길만 걸은 삶은 전체를 경험하지 못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넘어짐 속에서 자기 한계를 알고, 충돌 속에서 타인을 배우며, 와귀 먹다가 사이드 메뉴의 절실함을 터득하고, 실패 속에서 더 깊은 자유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에예공! 실패하고, 상처받고, 흔들리거라!
2.
행복한 순간만 내 인생의 본문이라 여기고, 실패와 상처와 공백을 ‘삭제할 곁가지’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삼겹살집의 <사이드 메뉴>에서 헤겔의 ‘전체’로 건너가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파절이와 된장국은 고기의 본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빠져보면 한 끼의 경험 전체가 달라집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성공·거룩 같은 굵은 줄기만 인생이라고 부르면 불안, 피곤, 좌절, 실패 같은 수많은 ‘사이드 메뉴’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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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 삶은 오히려 그런 주변부에서 더 많이 흔들리고 결정됩니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을 “의식 성장의 드라마”로 읽자는 제안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헤겔에게 진리는 완성품처럼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자신의 확신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경험하고, 그 확신이 무너지고, 더 넓은 입장으로 이동하는 운동 속에서 드러납니다. 헤겔이 말한 “진리는 전체”에서 그 전체 역시 자기 발전을 통하여 완성되는 전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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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과정 자체가 진리다”는 표현은 좋은 요약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무 과정이나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이전의 좁은 의식을 부정하고 더 포괄적인 인식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전체의 한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꽃길 철회”도 불행을 예찬하자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헤겔에게 상처가 귀한 이유는 상처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상처를 통과하면서 이전의 자기 이해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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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꽃보다 열등해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부정되고 보존되면서 꽃으로 넘어가듯, 성공과 실패 역시 더 큰 전체 안에서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이 대목에서 글의 “성경신학적으로 본문을 통으로 보자”는 비유도 잘 맞습니다. 한 절만 뽑아 성공공식을 만들듯 인생에서도 한 시기만 떼어 “나는 실패했다”고 결론내리면 전체를 잃어버립니다. 니체와 연결한 부분에도 좋은 직관이 있습니다. 다만 두 군데는 정리하면 글의 철학적 정확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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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자-채무자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니체가 추적한 것은 ‘이성’의 어원이 아니라 주로 죄책·책임·양심의 계보입니다. <도덕의 계보> 2논문에서 그는 독일어 *Schuld*가 죄책과 빚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는 데 주목하며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책임과 처벌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채권자와 채무자로부터 시작되었다"보다 니체는 "죄책과 책임의 도덕적 이면에서 채권자-채무자의 경제적 관계를 발견했다”가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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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심리학에는 의식적 숙고 밖에서 작동하는 자동적·무의식적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강한 근거가 있지만, 인간 정신을 정확히 5 대 95로 나눌 수 있다는 합의된 측정값은 없습니다. 숫자를 버려도 글의 주장은 전혀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에 의해 움직인다”라고 하면 프로이트·니체·라캉을 잇는 문제의식이 더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발견은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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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본질이 더 중요하다’가 아니라 ‘본질과 비본질을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헤겔에게 곁가지는 최종적으로 버려지는 찌꺼기가 아닙니다. 실패·모순·부정 역시 전체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순간입니다. 데리다까지 간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중심은 주변을 완전히 제거하고 홀로 설 수 없고, 의미는 자신이 배제한 것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에예공! 실패하고, 상처받고, 흔들리거라!”는 아주 강렬하지만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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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라고 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 실패는 알아서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 그것을 인생의 오탈자로 지워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꽃길을 철회한다는 것은 시궁창길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꽃길과 시궁창길을 모두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내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꽃길만 걸은 삶은 전체를 경험하지 못한 삶일 수도 있다.” "진리는 꽃에만 있지 않다. 씨앗이 깨지고, 줄기가 흔들리고, 꽃이 지고, 마침내 열매가 되는 그 전체의 운동 속에 있다"
2026.8.12.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