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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11,21ㄴ-26; 13,1-3
복 음 : 마태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70년 세계 역도 선수들에게는 절대로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벽이 있었습니다.
몇 년 째 계속해서 그 어떤 선수도 500파운드, 약 227Kg의 무게를 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500파운드는 인간이 절대로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라고 불렀습니다.
그해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참석한 선수 중에서 으뜸은 ‘바실리 알렉세예프’였습니다.
그 역시 500파운드는 불가능한 무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499파운드를 들겠다고 신청을 했고 이 무게를 들어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장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주최 측의 실수로 역기의 무게가 잘못 측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쎄 알렉세예프 선수가 들었던 역기는 499파운드가 아니라 501.5파운드였습니다.
주최 측의 실수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인간의 한계’가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이 대회 이후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인간의 한계’로 여겼던 500파운드를 들어 올린 사람이 그 해에만 자그마치 6명이 나온 것입니다.
한계가 무너진 뒤에 사람들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고,
실제로 한계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한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할 것으로 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한계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한계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도전하겠다는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사명을 내리면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전대에 돈을 지니지 말라고 하시고, 옷이나 신발 그리고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의 일을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도 나올 수 있는 상황 같습니다.
이런 주님의 명령에 사도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말씀에 온전히 순명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인 전교 여행이 되었습니다.
바로 세상의 한계를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참으로 많은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다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외칠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다가선다면 어떨까요?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은 끊었지만, 담배를 처음 배울 때입니다.
양 담배는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양 담배를 보면 참 좋아 보였습니다.
케이스도 좋아 보였고, 담배의 향도 좋았습니다.
요즘은 양 담배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국산 담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제, 특히 미국 제품은 튼튼하고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제품 중에는 남한 제품이 많다고 합니다.
남한의 물건들이 깔끔하고, 튼튼하기 때문이랍니다.
판문점 선언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겠지만 이미 평화와 번영은 제품들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기쁜 소식은 신약성서의 큰 주제입니다. 신약성서의 이름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신약성서에서 기쁜 소식은 크게 3가지 단계를 거쳐서 발전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한 사람들이 맞이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만났고,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죄를 용서받았고, 치유를 받았던 사람들은 놀라고 기뻤습니다.
제자들에게 이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의 능력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 기쁜 소식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살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예수님처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제자들은 12명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교회는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예수님을 체험했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의 선교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까지를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부여했던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그 뒤로 교회를 이끌었던 학자와 지도자들은 ‘교부’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우리는 모두 ‘사도직’에 불리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사도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삶을 통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사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도직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예언자가 나옵니다.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봉헌되었고,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례에 함께 하면서 신앙의 샘에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셋째는 봉사직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는 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요즘은 화산 폭발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다가
공항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검진결과 “영양실조”였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신부님은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3 년에 한 번 겨우 한국에 나오면서 신부님은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해본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님은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기적이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천국의 증거라면, 거저 주는 행위는 사람이 드러내는 천국의 증거입니다.
천국에 참여한 사람만이 거저 줄 수 있으며, 거저 받았음을 깨닫는 이만이 거저 줄 수 있습니다”(함께야).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도 바르나바 기념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 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 7)
이는 하늘나라가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 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 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름다운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납니다.
받은 것이 무엇이며
주어야 할 것이
무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잃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주는 것이며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도
거저 받은
오늘임을
예수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십니다.
거저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삶임에도
너무 어렵고 복잡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소유하려는
이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모든 길 또한
거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의 길이었으며
지나가야 할
모든 시간 또한
거저 주어야 할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서로를 자유롭게
하십시오.
거저 받은
생명과
거저 주어야 할
자유는
하나입니다.
자유롭게
장미
활짝 피어오릅니다.
복음 선포자가 항상 기뻐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리차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길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과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몹시 슬퍼 보이는 한 여성이 리차드의 정비소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하루는 그녀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네’라는 이 여성은 감정에 북받쳐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와 가까운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걸어서 출퇴근했고, 매일 리차드의 정비소를 지나친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는 군인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하지만 누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저도 곧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요...”
리차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누네를 매일 초대하여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대 선물하고 사비로 등록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감옥에도 갇히고, 노숙자로도 지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난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 사장이 매울 울면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인생을 바꿔 놓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며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고 여벌옷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듯이
복음을 전하며 굶는 일은 없을 것이니 무작정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본질은 주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해지지 않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저도 유학할 때 ‘내 것’만 찾을 때가 있었습니다.
함께 방을 쓰는 인도 신학생이 저의 물건을 마음대로 갖다 쓰고 자신의 것으로 넣어두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도둑질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의 뻔뻔함보다 더 스트레스 받는 것은 이태리 말이 잘 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태리 말이 안 돼 힘들어죽을 지경인데 그런 일까지 있으니 더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것’을 너무 찾게 되었고 저의 말을 듣던 누군가가 제발
‘내 것, 내 것, 내 것 ... ’이라는 말 좀 그만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다 주님 것이기에 저의 물건에 이름을 적어놓는 일조차 없었는데
힘이 들다보니 ‘소유’욕구가 더 커졌던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선교의 본질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으면 소유욕이 커져서 선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넉넉지도 못한 한 정비소 사장이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시간과 돈까지 아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한 때 같은 처지였음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처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아졌다는 말은 지금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결론은 행복한 사람만이 나의 것을 내어줄 줄 압니다.
다시 채워진다는 확신이 있으니 주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전하는 이가 내어주는 것을 좋아하여 가난하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니네
신희준 신부(서울대교구 공릉동성당)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연을 통해서 인간에게 준 보편적인 ‘자연법’에
일반적으로 ‘자유권’ ‘평등권’ ‘생명권’ ‘행복추구권’과 함께 ‘소유권’이 포함되어 있을 만큼
자본주의 세상을 사는 오늘날, 각 개인의 재산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정말 ‘성서의 하느님’인지
아니면 ‘돈의 하느님’인지 헷갈릴 정도로 부동산, 돈, 주식 등으로 대변되는 재산에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돈을 많이 번 성공 체험에 근거를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사도로 뽑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시며 분부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공짜’로 해주라고 분부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상으로 받은 것이니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우리는 열두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포함한 “내 것”을 나누어주도록
오늘날에도 새롭게 예수님의 파견명령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 우리가 누리는 것은 모두 하느님 선물입니다.
누군가와 같이 나눌 때 우리는 더 많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생활성서 2018년 0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