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1. 16 월요일
(1897 회)
- 소의 일생 -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투명한 빗방울 속에 쌀쌀한 소설(小雪)의 한기(寒氣)가 한 아름 실려 있다. 다급한 바람이 휙 불고 지나가더니 몇몇 남은 잎들마저도 품에 안고 멀리 사라지고 만다.
청계산 입구 역, 어느 음식점 앞에 황소 플라스틱 모형이 있다.
찬 바람 부는 길가에서 한뎃잠을 자는 플라스틱 조각품이, 엄동설한 횅한 마구간에 외롭게 서성이던 우리 집 소의 모습 같아 괜히 마음이 아린다.
나는 구석진 농촌에서 자란 탓에 소에 얽힌 추억이 많다. 6,7살부터 동네 형들 틈에 끼어 큰 소를 몰고 풀을 먹이려, 온 들을 누비고 다녔다.
비 오는 날이나 추석날은 더더욱 가기 싫어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어머니가 늘 한 움큼 집어주시던 찐쌀이나 볶은 콩의 유혹에 넘어가 금세 낯을 펴고 집을 나서곤 하였다.
소는 이른 봄 논밭의 쟁기질부터 모내기 철의 써레질과 가을철의 볏짐을 나르는 일 등, 한 시도 쉴새 없이 고된 삶을 이어간다.바쁜 농사철에는 소도 탈진하여 쇠죽도 먹지 않고 쓰러진 채 그대로 잠들기도 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럴 때면 밤새 통발로 잡은 미꾸라지를 먹여 소의 힘을 돋우기도 한다.
찬 바람이 불고 나서야 비로소 소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걱정 없이 깊은 잠에 빠진다. 하지만 곧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
등에 거적 하나 덮는 것이 소의 유일한 난방 시설이다.
소의 입에는 하얀 서리가 끼고 그 혹독한 긴 밤을 홀로 지새우며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 에워싼다.
그래도 소는 겨울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 주인을 잘 만난 소는 겨울을 지나고 나면 살이 토실토실해지고 온몸에 윤기가 흐른다.
맘이 착한 주인이 여물에 콩깍지와 잘 말린 부드러운 풀과 고운 등겨, 때로는 먹고 버린 한약 찌꺼기 등을 섞어 영양이 많고 맛있는 쇠죽을 정성껏 끓여주기 때문이다.한겨울을 지내고 난 소를 보면 그 주인의 성품을 대충 알 수 있다.
말못하는 짐승에게 베푸는 일도 우선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베풀면 베푼 대로 받는 법은 아닐까?
소는 충성스러운 동물이라 주인에게 함부로 대들지 않는다.
우리 집 소가 들의 풀은 뜯지 않고 다른 동네 소들이 모여있는 먼 들판으로 내달릴 때면 나는 간신히 끌고 와서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으로 소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였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그래도 주인은 주인인지라 매몰찬 매를 맞는 그 순간에도 나를 위협하는 시늉은 하였어도 무서운 뿔로 정작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주인을 향한 소의 그 충성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소는 주어진 일에 어떤 요령도 피우지 않고 주인이 가고자 하는 먼 길에도 순종하며 묵묵히 걸어간다. 날렵하거나 재주가 넘치지는 않지만 안전하게 목표와 목적을 향해 차근차근 이루어 간다.
그 순종과 침묵, 끈기와 성실함은 우리 인간이 배우고 새겨야 할 삶의 덕목이다.
어쩌면 소는 고달픈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물고기도 그 비늘에 나타난 얼룩과 무늬를 보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거친 파도와 더 크고 사나운 고기와 싸워 무수한 위험과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사람의 한평생도 물고기의 생존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선택과 포기 등 난해하고 끝없는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더라도 그 영혼의 눈빛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지나온 발자국은 자신과 시간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흔적이다.
지나온 길이 곧 우리의 인생이요, 우리의 발이 바로 그 삶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낙엽이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길목에는 샛노란 은행잎도 떠났고 겨울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존재이지만 떠나기 위한 존재이기도 하다.
노을은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어 가는데, 남은 내 여정을 더 풍요로운 환희로 채우는 방법은 없을까?
가혹한 운명에도 쇄석(碎石) 자갈밭을 묵묵히 갈고 있던 소는 정말 의연하고 평화로운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곽진학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