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색의 빛바램이 낡지 않고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다.
짙은 턱수염도 함부로 위험하지 않고
CIA가 꾸민 예수 임종 분위기 컨스피러시
의혹도 소용없는
노랑과 검정 대비의 빛바램이 낡지 않고,
지난 세월을 의당 어설프게 만들지 않고,
그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흑백인 채로 낡지 않은
별은 따스하다. 혁명은 이제 다정하다.
밀가루 푸대 노동은 낡지 않았다. 휴식도
60년대 초 달걀 마이크 연설도 행렬도 눈동자
아날로그 카메라 클로즈업도 시가 연기도
인민복도 낡지 않았다.
그것들은 의당 지난 세월의
나이테로 들어선다.
그것은 진리를
갈수록 새롭게 하는 방법
이지. 엽록소가 영원히 푸르른
생명을 뜻하게 된 까닭이다.
자연과 만나는
의인화의
공포가 안심하고 나무가
‘생명=세계’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만용이 아니라
슬픔이다.
뼈는 슬픔의
상상력으로 버틴다.
그것은 발의
본성으로 육체가
정신의 두려움을 이기는
탐험이야말로 진정한
세계라는 뜻과 같다.
측량의 숫자가 지형을 닮는다.
통계의 숫자가 전체와 미래를 닮는다.
그릇이 공간을 담는 아름다운 소꿉장난과
소유하는 끔찍한 소꿉장난 사이
빛은 찬란하지만
빛나는 것은 천박하지.
자유는 위대하지만
날아오르며 흩어지는
새들은 경망스럽다.
집단 없는 자유 없고 자유 없는 집단 없다.
동영상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사진이 있다.
체 게바라 사진 속에는
눈에 보이는 두뇌의
전망인 지도가 있다.
이론은 경험의 정신, 경험은 이론의 육체.
근육이 상상한 두뇌의 신경망인 교통과
실천한 두뇌의 신경망인 운송과
세상을 닮아가는
미터법이 있다. 산술은
식량을 닮은 숫자. 통신은 ‘언어=마음’의,
정보망, 우표와 이동통신 사이 발과 발.
체 게바라
사진 속에는
숫자가 정말
여럿을 아는 숫자다.
금속이 정말
단순함을 심화하는
금속의 상상력이다.
- 드러남과 드러냄, 도서출판 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