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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얼굴 푸른 짐승(靑面獸) 양지
왕륜(王倫)은 무슨 인심이 뻗쳤는지 양을 잡고 술을 퍼 오게 해 한껏 후하게 양지를 대접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도 왕륜의 머릿속은 나름의 속셈으로 바빴다.
'만약 임충(林沖)이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우리는 임충의 상대가 안 된다.'
'인심을 써서 이 사람 양지(楊志)를 붙들어 두는 게 낫겠다. 그래서 일이 벌어질 땐 양지로 하여금 임충에게 맞서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정한 왕륜(王倫)은 술이 몇 순배 돌기를 기다려 속셈을 털어놓았다.
"저 형제는 동경에서 팔십만 금군교두로 있었던 표자두 임충(林沖)이외다. 고태위의 미움을 받아 모함을 쓰고 창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데 다시 죄를 더하게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요. 이 왕륜(王倫)은 일찍이 글을 익혔으나 마침내는 뜻을 이루지 못해 칼을 잡고 도둑의 무리에 끼게 된 사람이올시다."
"동경으로 가시려는 분께 이런 소리를 하기는 외람되지만 저희와 함께 이 곳에 머무실 뜻은 없는지요?"
"양제사(楊制使) 또한 죄를 지은 분이라 설령 이번에 용서를 받는다 해도 그전 벼슬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오."
"고구(高俅) 같은 돼먹잖은 것이 군권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제사 같은 분을 써 주겠소이까?"
"차라리 이곳에 머무시어 큰 저울로 금은을 나누고 큰 잔으로 술이나 마시며 호걸들과 함께 지내심만 못할 것 같소이다만 양제사(楊制使)의 뜻은 어떠하오?"
하지만 양지(楊志)의 생각은 달랐다.
"여러 두령께서 이처럼 대해 주시는 것은 고맙기 그지없으나 저는 가족이 동경에 살고 있습니다."
"전에 저지른 일만으로도 누를 끼쳤는데 다시 이곳에 머물러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오직 동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니, 바라건대 여러 두령께서는 내 보따리나 돌려주십시오."
"정히 돌려주지 않으시겠다면 이 양지(楊志)는 빈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양지(楊志)가 그렇게 완강히 거절하자 왕륜(王倫)은 더는 억지를 쓰지 못했다.
마음속의 아쉬움을 너털웃음으로 감추며 말했다.
"제사께서 이곳에 머무시기를 굳이 마다하시는데야 어떻게 저희 무리에 들기를 강요할 수 있겠소."
"더는 잡지 않을 터이니 하룻밤 편히 쉬시다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시오."
이에 양지(楊志)는 기쁜 마음으로 왕륜의 뜻을 따랐다.
밤이 이윽도록 그들과 더불어 마시고 즐기다가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들어 하룻밤을 편히 쉬었다.
이튿날이었다.
양지(楊志)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 두령들이 다시 술상을 차려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해장술에 이어 아침 식사를 마치자 졸개 하나가 어제 빼앗은 양지의 보따리를 지고 나왔다.
두령들은 그 졸개를 앞세우고 양지와 함께 산을 내려가 작별했다.
양지(楊志)가 배를 타고 떠난 뒤, 왕륜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임충을 받아들였다.
주귀(朱貴)를 다섯 번째로 밀어내고 그를 네 번째 두령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양산박(梁産泊)은 왕륜, 두천, 송만, 임충, 주귀의 다섯 두령 아래 새롭게 짜였다.
한편 큰길로 나간 양지(楊志)는 거기까지 짐을 지고 따라온 졸개에게서 짐을 찾아 원래 데리고 있던 일꾼에게 지우고 동경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길이라 둘은 며칠 안 되어 동경성에 이르렀다.
양지(楊志)는 한 군데 객점을 정해 짐을 부리게 하고, 거기까지 지고온 일꾼에게 품삯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몸에 찬 칼까지 끄른 뒤 술과 고기를 시켜 배불리 먹었다.
며칠 있으려니 추밀원에서 전에 벼슬살이하던 이들을 점고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양지(楊志)는 지워 온 보따리 속의 금은을 아낌없이 풀어 추밀원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을 매수했다.
전에 있던 전사부의 제사(制使) 자리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지니고 있던 재물을 몽땅 턴 뒤에야 양지(楊志)는 가까스로 자신의 잘못을 변명해 주는 문서 한 장을 얻었다.
남은 일은 전수부(殿帥府)의 고태위가 그런 양지를 다시 써 주는 것이었다.
고태위 앞으로 나간 양지(楊志)가 문서를 바치자 그걸 읽은 고태위는 다자고짜 화부터 냈다.
"그때 화석강(花石綱)을 가지러 간 제사 열 명 중에서 아홉은 벌써 오래전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화석강을 바쳤다."
"그런데 오직 네놈 하나만이 화석강을 모두 잃어버렸다니! 더구나 일찍 와서 그걸 알리지도 않고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다가 이제 와서 다시 옛날 벼슬자리를 되찾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마라. 설령 지난 일을 용서한다 쳐도 그런 죄를 지은 놈을 다시 쓸 수는 없다."
그렇게 소리치며 문서를 내던지고 양지(楊志)를 전수부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뇌물 한 푼 안 바치고 옛날 자리를 되찾겠다고 나서는 데 심사가 틀어진 것이었다.
그만한 재물을 흩었으니 모든 게 잘되리라 믿었던 양지(楊志)는 욕만 얻어먹고 쫓겨나자 기가 막혔다.
암담한 심경으로 객점에 돌아오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역시 왕륜(王倫)이 내게 말한 대로구나."
'하지만 나는 깨끗한 이름을 지닌 장부로서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변방에 가서 병졸 노릇을 하며 처자를 먹여 살리더라도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
'그러나 고태위 이놈, 두고 보자. 네가 나를 모질게 대했으니 나도 반드시 앙갚음을 하고야 말겠다!'
양지(楊志)는 마음을 그렇게 다잡아 먹었으나 몸에 지닌 게 없으니 당장이 낭패였다.
며칠 되지 않아 방값 밥값에 푼돈까지 씨가 마르자 고민 끝에 한 가지 궁리를 냈다.
'이거 정말 큰일이로구나. 하는 수 없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보도(寶刀)를 파는 수밖에.'
'지금까지는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은 것이지만 이걸로 몇천 관 돈을 만들어 살 만한 곳을 찾아 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날로 보도(寶刀)에 '팔 물건' 이란 꼬리표를 써 붙인 뒤 거리로 들고 나갔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수호지 - 이문열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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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