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3
조홍시가, 자모사초, 어머니
석야 신웅순
노계 박인로가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여헌 장현광을 찾았다. 여헌이 조홍감을 대접했다. 이를 소재로 노계에게 시조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다. 이것이 ‘육적회귤’ 고사를 들어 지은 노계의 ‘조홍시가’이다.
반중(盤中)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육적은 오나라 왕 손권의 참모를 지낸 사람이다. 그가 6세 때 구강에서 원술을 뵈었다. 원술은 육적에게 귤을 내놓았다. 원술이 잠시 비운 사이 육적은 귤을 품에 감추었다. 육적이 작별 인사를 올리자 그만 귤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왜 귤을 품에 넣었느냐?”
원술이 육적에게 까닭을 물었다.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 그리했습니다.”
원술은 어린 육적의 효심에 감동했다.
이 육적 회귤 고사로 노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유명한「조홍시가」한 수를 지었다.
소반에 담긴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나다. 유자가 아니라도 품 안에 넣고 싶지만 그리한다 해도 반가워할 어머니가 안계시니 그것이 서럽습니다.
‘효’하면 으례이 노계의「조홍시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시조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효라는 인간의 보편적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한음 이덕형이 영천에 도체찰사로 있을 때였다. 박인로가 이덕형을 찾아갔다. 이 때 한음도 노계에게 조홍감을 내놓았다.
한음이 노계에게 청했다.
“노계,「조홍시가」에 이어 몇 수 더 지어보시겠소?”
「조홍시가」 4수가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어머니!’ 하면 위당 선생의 자모사가 떠오른다. 선생은「자모사」를 이렇게 말했다. 자모사 일부이다.
이 시조는 지난 병인년 가을에 지었다.옛날 어떤 효자는 설우면 통소를 불어 통소 속 에 피가 하나더라는데 내 시조는 설움도 얼마 보이지 못하였거니 피 한방울인들 묻었으리요마는 효도야 못 하였을망정 설움은 설움이다 어머니 일을 적고 내 시조를 그 아래 쓰니 시조는 오히려 “의지”가 있는 것 같다
「자모사」는 연이은 단시조 40편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내 생․양가 어머니 두 분이 다 거룩한 어머니이다’로 시작된다. ‘생어머니는 높고 어머니는 크다’라고 했다. 생모는 대구 서씨이고 양모는 경주 이씨이다. 양가로 입적해 두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이다.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아라
- 정인보의 「자모사12」
고등학교 교과서 실렸던 시조이다. 바리의 따뜻한 밥은 자식에게 주고, 찬 밥은 당신께서 잡수셨다. 두둑히 자식들에게 옷을 다 해 입히시고, 당신께서는 겨울에도 엷은 옷을 입으셨다. 솜치마 그리 좋다하시며 아끼시다 결국 보공되어 관속에 담아 가셨다. 보공은 관의 빈 곳을 채우는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그만 목이 컥 하고 막힌다. 더구나 나라까지 잃었으니 지은이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이런 것이다.
이 시조는 1926년 33살 때의 작품으로 생모와 양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 시조이다. 여기에는 망명했던 동지들의 슬픔과 민족에 대한 사랑도 아울러 배어있다
필자의 시집 『어머니』 나태주 평설 일부이다.
일찍이 우리는 우당 정인보 선생의 「자모사초」에서 가슴 절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읽은 바 있다.이번에 보이는 신웅순 시인의 시조는 또 다른 「자모사초」이다. 편편히 살아서 숨을 쉬며 독립하였으되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강물로 흐르고 있음을 본다. 물론 어머니란 강물이다.
말석에 필자의 어머니 58편 중 한 편 싣는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필자인들 어느 뉘보다 못하겠는가. 가시고 나니 사무친다. 명편은 아니나 어머니께 바치는 진심만은 명편이라 여겨「어머니5」에 대한 사족도 함께 싣는다. 효문화진흥원에 기증한 40미터나 되는 58편의 시서 작품 중「어머니5,6」이다.
하늘은
낮고
산은
깊었었지
유난히도
진달래꽃
붉게 핀
봄이었지
남몰래
산 넘어가서
울먹였던
그 봄비
- 「어머니 5」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남자 아이들은 농사일을 도왔고 여자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남자는 무작정 상경하기도 하고 여자는 부유한 집으로 식모살이 가기도 했다. 남몰래 뒷곁에서 봄비처럼 서럽게 울었을 그들. 서울 가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돈을 많이 벌자. 돈을 많이 벌자’ 수 없이 되뇌었을 그들이 지금의 5,60대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천지가 보리 농사였다. 농촌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주 먹거리인 밭농사였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보릿고개는 보리 농사와 함께 그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 보리가 이제는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강식이 되었으니 초등학교 때만해도 부황기로 얼굴이 누렇게 뜬 학생들이 많았는데 격세지감이요 상전벽해이다.
보릿고개는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문화 유산이다. 초근목피의 보리꽃 피는 고개가 아니었더면, 진달래 붉게 피는 바위 고개가 아니었더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
-신웅순, 『절제와 인연의 미학』(미술문화원,2017), 118-19쪽.
출처 : 주간한국문학신문,2021.11.17(수)
첫댓글 다 읽었습니다 ^^
작품도 읽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다 읽기 쉽지 않은데,감사합니다.
어울리는 시와 캘리 잠시 머물다 갑니다.
교수님 다과 함께해요^^
茶🍵올려드려요.
감사합니다.다례 선생님이신가보지요.가을 향기를 맡고있습니다.
동무하고 실습을 했거든요^^
매우 즐거운 習이었습니다.
다시 보는 명품 시조 연작 참 좋습니다.
대봉이 며칠 두었더니 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계절에 맞는 시조를 딱 고르셔서 소개하시니 그 맛이 한층 더합니다.
초5때 반중조홍의 뜻이 어려웠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해가 되어야 암기가 되는데...무작정 외웠다가 나중에 국어시간에 알게 되었지요.
정인보의 자모사도
다시 떠오르네요. 저희 때는 다 외우게 했었지요.
그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평을 읽으니 선생님의 레베~ㄹ!을 짐작할 수 있어요.
아! 높아서 쳐다보기 목 아픕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