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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에 밀려가는 배
행 27:9-20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 설 교 >
유라굴로 광풍
행 27장 9~26절 / 손상률목사
사도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그레데 해역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배에는 바울을 포함하여 276명의 선원과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위하여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총독 베스도의 명을 받은 백부장 율리오가 그의 군사들과 함께 바울을 호송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을 태우고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의 여러 항구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운항하는 호화 여객선입니다. 그 배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목적 있는 여행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로마에 가기를 희망했고 그 꿈을 이루고자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로마에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뜻밖에도 지중해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파선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같이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며 아비규환의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핵폭풍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바다에 항해하는 배는 항구를 떠나는 그 시간부터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르는 풍랑을 예견하고 대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도 북쪽에 호전적인 공산주의 집단이 상존하고 있는 이상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태였으며, 또 그들이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고 이것으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해 왔기에 일찍부터 이런 일에 대비하여야된다는 경고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마당에 우리는 난파선에서 보여준 바울의 행동을 통하여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기지와 신앙적인 태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1. 풍랑이 오기 전
본문말씀 9-11절에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13절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하고 행선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태풍의 위험을 예고하며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출항하자고 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기어이 배를 띄우도록 율리오에게 압력을 가한세력이 있습니다.
1) 선장입니다.
이는 지식이나 기술을 갖춘 사람입니다. 선장은 모든 선원을 총괄하는 지휘관인 동시에 배를 운전하여 항해하는데 따르는 전문적인 이론이나 기술을 겸전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대해(大海)로 불리는 지중해를 활동무대로 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까지 삼 대륙을 넘나들던 오랜 경륜과 관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장에게는 배에 타고 있는 승객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누구의 말보다도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2) 선주입니다
이는 배의 주인을 말하는데 재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겨울을 지나고 가자고 했을 때 선장과 함께 곧바로 출항하도록 율리오에게 압력을 행사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거대한 여객선을 소유하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무역을 했던 사람이니 많은 재산을 가졌을 것이며 막강한 재력으로 그는 사람들을 부리기도 하였고, 또 백부장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배의 주인 되는 선주가 말할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가볍게 들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3) 군중들입니다.
배안에 있는 모든 승객들은 미항에서 겨울 지나고 가기를 청하는 바울의 말에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입장에서 볼 때 배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가진 선장과 선주에 이어서 절대 다수의 승객들이 한목소리로 그들의 말에 동조하고 나오는데 이를 거부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앙적인 기준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일 경우 이럴 때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2. 풍랑이 왔을 때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장을 했고 또 처음에 얼마동안 남풍이 순하게 불 때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으나 잠시 후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였습니다. 이때 배가 파선직전의 위험에 빠졌으나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늦게야 책임을 통감한들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선주는 배에 실려 있는 짐들을 자기 손으로 바다에 빠뜨렸습니다(18절). 큰소리치던 선장도 역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열나흘동안이나 배가 표류하며 위험에 빠지게 되자 저희들만 살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30-31절에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 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못하리라”고하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군중심리에 들떠 부화뇌동하던 무리들도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그 난국을 수습하거나 희망적인 대안을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 때는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우쭐대며 큰 소리쳤을 뿐 막상 유라굴로라는 재난 앞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못했고 오히려 삶 자체를 체념하고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인간적인 기준만으로 일을 하다보면 언제나 유라굴로와 같은 재난에 봉착하고 맙니다. 율리오처럼 뼈아픈 대가를 치른 다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3. 난파선의 바울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게 된 것은 그들에 비하여 바울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 특별한 죄수입니다.
지금 그 배안에서 바울의 신분은 군사들에게 호송되어 가는 죄수입니다. 저를 호송해 가는 군인들이나 그 배안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다 바울을 죄수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자기가 특수한 신분의 죄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죄수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에베소서 6:20에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호송책임자인 율리오도 그가 죄수 이상의 특별한 신분임을 인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3절에 보면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리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아구사도대라는 부대의 백부장으로서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호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 오랫동안 같은 배를 타고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바울의 비범함과 탁월한 지도력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2) 환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행 9:1-5). 이후로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비와 환상의 체험을 가졌습니다(고후 12:1). 그가 2차 전도여행 때 아시아에서만 전도하려 하다가 예수의 환상을 보고 그 싸인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으며(행 16:9),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을 부르다가 환상을 보기도 하였습니다(행 16:26).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폭도들에게 매를 맞고 천부장의 영문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의 사자가 그 곁에 서서 담력을 주며 장차 로마에 가게 될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행 23:11).
본문 23절에도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어떤 혼란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라도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3) 투철한 사명감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리스도인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일생을 보면 그가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수없는 고난과 역경에 봉착하였지만 어떤 경우에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1:13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성도들이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상경 길을 막고 나오자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난파선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사명감에 투철하여 배에 있는 모든 선원들에게 계시의 환상을 따라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큰소리치던 선장이나 선주는 위기에 몰렸을 때 입을 다물거나 저희만 살려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누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사도적 사명에 신명을 걸고 나섰던 것입니다.
4)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유라굴로 풍랑이 휩쓸고 가자 알렉산드리아 배는 바울의 독무대였습니다. 선장도 선주도 그 많은 선원, 승객도 심지어 백부장 율리오까지 바울의 말 한마디에 명줄을 걸고 거기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21절에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2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에게 계시한 내용을 전해주었습니다. 25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선언하였습니다. 33-34절에는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하고 떡을 가져 축사한 다음 나누어주어 다 먹게 하였습니다. 36절에 보면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무리의 수는 전부 276인 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전후좌우 사방을 살펴보아도 구원의 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갖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4.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찬송가 503장을 작사한 영국의 톱레이디(A. M. Toplady)목사는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의 구원계획을 어김없이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잠시 후 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배가 깨어져 침몰하였으나 276명 중 한사람도 손실 없이 모두 구조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군인들은 죄수가 도망 갈까봐 다 죽이자고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생각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모두 다 섬에 상륙하게 하였습니다(42-44절). 그들이 헤엄쳐 건너간 곳은 밀레데라는 섬이었는데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집에 들어가 바울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열병에서 낫게 해 주었습니다. 거기서 석 달 동안 겨울을 지나고 다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로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전혀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이 되는 것을 실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처한 전대미문의 국난 중에도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얼어붙은 북한에도 민주주의의 새봄이 오게 되고, 우리 모두의 소원인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복음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이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풍랑을 만날 때
행 27장 9~26절 / 조상호목사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할까요? 여러분들은 인생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인생을 뭐라고 정의하고 싶습니까? 아마 어떤 분들은 여행객처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인생은 여행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힘들게 오르고 쉽게 내려오는 것과 우리 인생이 비슷하다고 해서 ’인생은 등산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달리는 마라톤과 비슷하다고 해서 ‘인생은 마라톤 경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인생은 치열하게 경기하는 씨름과 비슷하다고 해서 “인생은 댄스보다는 씨름에 가깝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인생을 사닥다리로 비유해서 “이 세상은 어떤 사람에게는 올라가기 위한 사닥다리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려가기 위한 사닥다리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이런은 시계추에 비유해서 “인간이란 미소와 눈물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와 같은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생을 배를 타고 것에 비유해서 "인생은 항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다 우리의 인생살이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만, 저는 지난 주 주중 한국에서 오신 어떤 분을 모시고 New Brighton Beach에 갔다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생은 항해"라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Peer 다리 위에서 바다는 정말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곳입니다. 밀려왔다가 사라지면 또 다시 밀려옵니다. 계속해서 파도가 밀려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 한숨 돌릴만 하면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계속해서 문제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또 바다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제 거센 풍랑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바다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고 잠잠하던 물결이 갑자기 광풍이 몰려오면서 성난 파도로 돌변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 바다입니다. 우리 인생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제 우리 인생에 IMF 같은 풍랑이 불지, 언제 9.11 테러사태와 같은 풍랑이 불지, 언제 쓰나미와 같은 풍랑이 불지 아무도 모릅니다. 계속해서 예상치 못하는 풍랑이 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풍랑이 불어올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로마로 가는 항해를 하다가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미항 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미항에 도착한 바울은 자기를 체포해가는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주에게 겨울이 가깝기 때문에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그 곳에 머물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계속해서 항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백부장은 바울의 의견을 묵살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뵈닉스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같이 13절부터 14절을 보겠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부드럽게 남풍이 부니까 미항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항해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신나게 항해를 했는데, 그들은 얼마있지 않아 ‘유라굴로’라는 광풍(Hurricane)을 만났습니다. 여기 ‘유라굴로’라는 말은 ‘동풍’이란 의미의 ’유라(eurus)’라는 말과 ‘북풍’이란 의미의 ’아굴라(aguilo)’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북동풍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광풍을 만나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풍랑을 만날 수 있다
누구나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재판 받기 위해 포로가 되어 로마에 끌려가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풍랑이 불어왔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러 가는 바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루 빨리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데, 태풍을 만나고 풍랑을 만나면 복음 증거는 막히거나 늦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풍랑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에게도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풍랑은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포도가 몸에 에너지를 주면서 동시에 다이어트 음식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도 다이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하루 세끼 포도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포도만 먹기 시작한 3일 후에 그 여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의 진찰이 끝나자, 가족들이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쓰러졌습니까? 혹시 영양실조 아닙니까?”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농약중독입니다.” 그 여자는 포도 다이어트를 하여 날씬한 몸매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생각지도 못한 농약에 중독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에게도 거센 풍랑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크게 낙심하며 하나님께 질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래야 합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저의 삶에 이런 광풍과 풍랑을 불게 하십니까?”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춘근 장로님이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쓰신 ‘와이 미(Why me?)’라는 제목의 간증집을 리얼 라이프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그분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 후 단돈 200불을 들고 미국에 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30대 초반 그 어려운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만에 최우수 교수로 뽑히는 영광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잘 나가던 그에게 갑자기 풍랑이 몰려왔습니다. B형 간염에 간경화 진단이 나왔고, 급기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이젠 집에 가서 편히 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충격 속에 휩싸인 그는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말이 ‘Why me?’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나는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도 했습니다. 게다가 신앙생활도 꾸준히 잘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아마 이 자리에도 김춘근 장로님처럼, “Lord, Why me?" "하나님, 왜 나입니까?”라고 말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다보면 갑작스런 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질병이 찾아와 고통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날 때도 있습니다. 쉬지 못하고 잠자지 못하며 일구어 놓았던 사업이 갑작스런 부도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배신을 하고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Why me?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필이면 우리 가족입니까? 하필이면 나입니까?”라고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분들을 어떤 말로도 위로하기 힘이 듭니다.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고통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힘이 있는줄로 믿습니다. 사실 풍랑을 만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저도 풍랑이 싫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풍랑이 저의 삶에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꺠닫지 못하던 하나님의 뜻을 풍랑 때문에 깨달을 수 있다면, 그 풍랑은 또 다른 차원에서 복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풍랑 속에서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평온할 때 깨달을 수 없던 것을 풍랑 속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풍랑이 거세어지자 그들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행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여기 ‘거루’라는 말은 ‘구명보트(life boat)’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구명보트를 준비해 놓고 여차하면 뛰어내릴 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준비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렸다’고 하는데, 여기 ‘스르디스’는 ‘암초’를 의미하고, ‘연장’은 ‘닻(Anchor)’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거친 풍랑으로 인해 배가 이리저리 흘러가다가 커다란 암초에 부딪칠 것 같으니까, 닻을 내리는 등, 모든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풍랑은 더욱 거세게 불어 닥쳤습니다. 그래서 사공들은 배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에 다 던져버렸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장비들까지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의 양식인 밀가루까지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나갈 때, 생명의 소중함을 몰랐지만, 이제 거친 풍랑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에 가서 팔아 많은 이익을 남길 짐들보다, 그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식보다, 항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장비들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불어오는 풍랑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게 당한 고난이 많았습니다. 3번씩이나 태장을 맞아 죽을 뻔했고, 배가 깨어지는 경험을 3번이나 했습니다. 강도를 만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거짓 증거하는 사람들을 만나 큰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러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는 그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합니까?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한 섭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김춘근 장로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충격 속에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다 보니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교만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잘못한 것, 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울면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겠다고 마음 가운데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나중에 그 분은 완치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 분은 알래스카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알래스카 주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알래스카의 요셉’이란 별명도 얻게 되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운동’을 시작하여 많은 기독 청년들을 변화시켜 미국을 신앙과 도덕을 회복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풍랑이 그의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집 맨 끝 페이지를 보면, 그분이 다시 ‘Why me?’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제는 왜 나 같은 죄인, 부족한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까? 하나님의 일에 써주십니까?” 라는 감사와 감격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풍랑을 통해 그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걸작품 인생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울처럼, 지금 광풍을 만났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거세게 몰아치는 풍랑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거칠게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풍랑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바꾸어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풍랑을 만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 풍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풍랑은 은혜를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친 풍랑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여기 바울이 말하고 있는 ‘어제 밤’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밤이었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을 만큼 절망스런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주셔서 바울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받을 것이고, 그는 로마의 가이사 앞에까지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결국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는 배에 탔던 276명을 모두 구원해 주셨습니다. 44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마침내’라는 단어입니다. 비록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 모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라고 외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거센 풍랑이 몰려 왔다고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풍풍 속에서도 마침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D. L. Moody는 19세기에 복음으로 영국과 미국을 흔들어 놓았던 탁월한 복음증거자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런던에서 전도 집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는데, 갑자기 배가 암초에 부딪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 안에는 700명의 선원과 승객들이 절규하며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무디는 배의 한쪽 구석에서 조용하게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배 안이 소란하니?" 그때 아들은 "아버지, 배가 암초에 부딪쳐 배 안에 물이 들어오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배위로 올라가서 사람들을 진정시킨 후, 시편 91편 9절부터 11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리고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무디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잡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잠을 잔 사람은 무디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레이크 퓨런’이란 구조선이 나타나서 승객 전원을 구조하여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뜻하지 않은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센 풍랑이 몰려 올 때,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로, 거센 풍랑 앞에서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센 풍랑을 보고 절망하고 ‘될 되로 되라’고 하면서 자포자기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거센 풍랑 앞에서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센 풍랑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이웃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심하면 하나님까지 원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거센 풍랑을 헤쳐 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로, 거센 풍랑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Surfing Board에 몸을 싣고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거센 풍랑을 이용하여 자기 인생을 복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과 달리, 거센 풍랑을 이용하여 오히려 더 빨리 목표를 향하여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문제의 파도와 거센 풍랑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문제의 파도와 거센 풍랑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거센 풍랑 앞에서 포기해버리는 비겁한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센 풍랑 앞에서 환경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거센 풍랑을 이용하는 영적인 파도타기 선수, Spiritual Surfer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지 모리슨이 쓴 “내 마음의 하이웨이”라는 책의 한 내용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책에서 아메리카 신대룍을 발견한 콜럼부스의 항해일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에는 다른 모든 항해 일지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기록 사항이 있다. 그것은 ‘오늘은 순풍이 불었다’가 아니라, 그것은 ‘오늘 우리는 항해하였다’이다. 안개와 폭풍우 그리고 선상 폭동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항해하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러분, 콜럼버스처럼 인생 항해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앉아서 순풍 불기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하늘만 보고 원망만하고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생 가운데 풍랑은 끊임없이 밀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풍이 아니라, 항해인 줄로 믿습니다. 비록 안개가 끼어 있고, 폭풍우가 불고 항해에 큰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믿음으로 전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거센 풍랑만을 바라보고 근심하고 절망했던 선장과 선주와 여행객들과 군인들과 장사꾼 등 275명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거센 풍랑 가운에서도 거센 풍랑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들이여 안심하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풍랑이 우리를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안개가 끼어 있고,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주님을 바라보고 매일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평정히 하사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바람이 칠 때에
행 27장 9~26절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아슬아슬한 파선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뿐만 아니라 항해 역사상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고 소위 신성모독죄와 소란죄라는 죄목으로 피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총독에게 몇 번씩이나 재판을 받았지만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가 없어서 직접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다른 죄수들과 더불어 로마로 보내도록 결정을 내린 것은 물론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미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고, 따라서 담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를 인도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보다 관심이 더 크십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기르시는 양인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양보다 목자의 관심이 더 큰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위하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32편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첫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된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약속하셨고 한 걸음씩 그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떠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의 한 무역선을 탔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애굽에서 로마로 쌀을 싣고 가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배를 옮겨 타게 된 것입니다. 이 배는 상당히 큰 배로서 많은 화물과 함께 사람도 탈 수 있는, 말하자면 여객선을 겸한 화물선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죄수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여러 죄수들과 같이 이 배에 탔었고, 이 배 안에는 죄수를 인솔하는 책임을 진 율리오라는 백부장과 그밖에 여러 군인, 그리고 선원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보면, 이 알렉산드리아호에는 화물 말고도 276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별 것 아닙니다만, 2천년 전의 배라고 생각하면 대단히 큰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배는 유대인의 대제일인 속죄일 전에 미항이라는 항구까지 간신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큰 배라고 해도 돛을 이용하는 범선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좋지 않으면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미항에서 대제일을 보내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계절적으로 대제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심하기 때문에 항해를 하지 아니하고 겨울이 지난 후 해동과 더불어 항해를 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타고 있는 큰 배 알렉산드리아호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날 것인가 아니면 좀더 가서 뵈닉스에서 과동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선장의 의견대로 미항을 떠나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서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가고 있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일 후에 있을 풍랑을 생각해서 겨울에 항해하는 것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호의 실권자 율리오는 군인 장교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선원이건, 죄수이건, 군인이건 할 것 없이 두 주간 동안이나 바다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늦게라도 바울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들은 14일 후에 구원을 얻어 전원이 '멜리데'라는 섬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교회가 말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교회의 주장이 대우받는 형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기술과 경험만을 앞세우고 집권자의 의욕으로 전진을 명령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나아가는 앞날에 우리의 기술과 경험, 불타는 의욕까지도 무너뜨리는 광풍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가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형편만 안정되면 군에 복귀할 것이라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물러나시면 안 된다고 해서 대통령이 되고 한 번하고 더 하고 싶어 소위 유신체제를 수립해서 장기집권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교회는 소리쳤습니다. 유신체제를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 총리로 계시던 분이 TV 방송에 나와서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에 교회가 시끄럽게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아직도 정치 일선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한국 정치가 꼴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우받는 입장에 놓여 있지는 못하지만, 개인이나 국가의 위기를 예고하고,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는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비록 그 소리가 미약해 보여도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한 알렉산드리아호의 백부장이나 선장은 남풍이 순하게 불 때는 만족해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이 큰 배는 파도에 쫓기기 시작했습니다. 24시간 안에 배에 실었던 값진 물건들을 몽땅 바다에 던져버려야만 했습니다. 50시간도 못 되어 배 안의 모든 기구를 물 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낮 사흘 동안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기술도, 경험도, 의욕도, 자신감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 보니까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그 당시의 상황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항해를 너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목적지를 향해 인생 항해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인생이란 배는 때로는 순항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난항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풍에 휩쓸려 이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어두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을 뻔한 것이나, 애굽에 가는 대상에게 종으로 팔려 간 것이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 한 것이나,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 한 것이나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이 큰 풍랑의 와중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리고 바다와 파도를 다스리시는 주님에게 시선을 향했습니다. 이 사나운 풍랑을 바라보면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평안을 누리며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3절을 보세요.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했습니다. 이 큰 풍랑 속에서도 바울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생생한 교제였습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바울에게는 더 이상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생명줄입니다. 기도가 없을 때 남아있는 것은 인간적인 두려움과 절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내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과 씨름할 때 자주 넘어지면서도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고자 하는 이 연약한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한, 그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실망을 아뢸 수 있는 한 나에게 더 이상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지요? 그는 젊은 나이에 마니교에서 생활하면서 육신을 따라 살았고 세상의 인기와 육신의 향락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는 마음의 안정도, 평안도 없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펴 읽으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앞에 있던 성경을 펴보니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은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바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지난날의 잘못된 생활을 그 자리에서 청산하고 온전히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바람이 몰아치는 큰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불의 선지 엘리야도 아합 왕의 왕후 이세벨의 공갈에 두려워서 멀리 멀리 도망해서 로뎀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죽기를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떡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한 후 힘을 내서 그가 지시하는 곳에 이르게 한 후,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있으나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으시고 이 모든 것이 지난 후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거쳐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너 혼자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겨두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탈진 상태에 있던 엘리야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확신이 생기고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희망이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계신 한, 내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삶을 향한 뚜렷한 하나님의 지시가 내게 들려오는 한, 큰 풍랑 일어나 비바람이 칠 때에도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한 비바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모험이며 도전인 것입니다.
유라굴로라는 폭풍
행 27장 9~26절 / 조용기목사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체포되고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리오라는 로마의 백부장이 이끄는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거슬러 로마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레데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묵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백부장 율리오에게 ‘이번에 출항하면 하물도 다 잃고 배에도 타격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에도 큰 해를 받을 것이니 여기에서 겨울을 지나고 떠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중하게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이면 큰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면했으나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고 그레데에서 출항해서 결국 유라굴로라는 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는 유라굴로의 풍랑에 밀려서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 그들이 그렇게 아끼던 하물을 바다에 다 던져 버렸고 사흘째는 배의 기구까지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 해와 달과 별들이 보이지 아니할 정도로 그들은 풍랑에 밀려가게 된 것입니다. 오직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절망 가운데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심하라.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그 사자를 내게 보내사 말씀하기를 ‘바울아 내가 반드시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 서야 되겠고 또 너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의 손에 다 주었다’고 말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생명에는 손상이 없고 배만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 그러므로 안심하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룰 줄을 믿는다”고 확신에 찬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1. 나의 속한 바
바울은 무시무시한 유라굴로의 풍랑 속에서 모든 사람이 좌절하고 절망했을 때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나는 내가 속한 곳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바울은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크고 작은 단체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에게 소속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소속감을 통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소속을 잃어버리면 누군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속한 곳이 있습니다. 가정, 단체 등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제가 해외선교를 가면 입양아들이 종종 찾아와서 한국에 있는 자기 뿌리를 찾아 달라고 합니다. 그때 제가 “당신들은 이 나라에 와서 여기서 자라서 이 나라 말을 하고 이 나라 문화에 익숙하고 이 나라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왜 당신을 버린 한국에 있는 부모를 찾으려고 합니까? 무엇 때문에 뿌리를 찾으려고 합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마다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외국에서 자랐지만 우리의 뿌리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끝없는 방황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가서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보아야 내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찾아야 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직업이라는 소속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이 안전하고 든든합니다. 우리는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있어야 됩니다. 탈북 난민이 중국에 와서 한국의 국적을 얻지 못하고 중국 국적도 없이 끝없이 방황하는 슬픈 유랑의 모습들을 신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소속을 잃어버릴 때 삶의 큰 풍랑에 부딪히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가정이 풍비박산될 때 뿌리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직장을 잃은 후 위기감으로 개인, 가정, 사회에 크나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적 소속감을 상실할 때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실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절망적인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리지 않는 영원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심으로 잃어버린 자에서 찾은 바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속감을 가지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됨의 소속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확실한 소속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천국 시민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시민일 뿐 아니라 천국의 시민입니다. 세상이 풍비박산이 되어도 천국의 시민된 우리들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을 곳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을 곳을 잃어버릴 때 절망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을 곳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우리의 있을 곳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 저 편에 있을 곳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이 땅을 사는 동안 어떤 시험과 환난과 폭풍우가 다가와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시편 91편 2절로 6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은 ‘나는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이 그 풍랑 중에 소속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나는 소속감이 확실하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이 나의 소속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 나의 섬기는 하나님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들은 그 유라굴로의 풍랑에서 그들이 섬기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배에 싣고 오던 재화를 이틀만에 다 바다로 던져 버렸고, 선원들은 배의 기구를 사흘만에 다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섬기고 의뢰하던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그 풍랑 가운데서도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환난과 고난에서 그들이 믿던 세상에 의해 건짐을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에도 그들을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삽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헛된 것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탐욕을 섬깁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했는데 탐욕 때문에 이 세상의 헛된 것을 섬기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합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섬깁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쾌락주의에 빠져서 순간적인 향락으로 인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대부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국, 비행기 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를 소유하고 수많은 헐리우드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며 평생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당시 최고 액수인 2조 4천억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Nothing! Nothing!”하고 죽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면서도 임종에 처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탐욕이나 쾌락은 계절처럼 지나가고 맙니다. 이 세상 모든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탐욕이나 쾌락은 계절처럼 지나가 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명예를 찾아 섬기지만 죽으면 그만입니다.
사람들은 부를 얻기를 원하고 부를 섬깁니다. 부를 얻기 위해서 온갖 죄악을 다 범하고 살인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5절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허망하게 됩니다.
권력을 섬기는 사람도 삶에 폭풍이 다가오면 모두 잃고 맙니다. 당나라 황제 20명중 6명이 약물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권좌를 오래 누리고 싶어서 불로장수에 효험이 있다는 비약을 먹었는데 이 비약에 모두 다 독이 들어서 오히려 더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말에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고 하여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년을 넘게 가는 권력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욥기 21장 18절에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생이요,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당당히 고백했습니다. 세상 탐욕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쾌락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부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유라굴로의 풍랑이 다가오면 이런 것은 다 일장춘몽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입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왜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깁니까? 하나님께서는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 하나님을 섬기라. 그 날을 복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은 복의 날인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주를 섬기는 것은 영과 마음과 몸과 생활의 복을 듬뿍 받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양으로 주일을 지키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리고 하나님께 몸 드리고 시간 드려 봉사도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직장도, 직업도, 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세계 1위 기업으로 부상한 미국 최대 할인점 월마트를 창설한 잭 웰치 회장은 1962년 조그마한 할인점에서 시작해서 불과 40년만에 세계 최대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공 투자를 보면 성경을 읽다가 성경에서 열 가지 성공 비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아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직원들을 인생의 동지로 예우했으며, 사업 목표를 돈버는데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하겠다는 고차원적인 경영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세상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부귀, 영화, 공명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을 섬기면 풍랑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났을 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에 처했지만 바울 선생은 그의 속한 바 그의 섬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통해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좌절과 절망 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과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여러분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도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어제 저녁에 사자를 보내서 내게 ‘바울아 네가 로마의 황제 앞에 서야만 하겠고 너와 함께 한 사람들을 네게 주었다’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생명의 광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속했고 예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 풍랑을 지날 때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풍랑을 당해서 동서남북을 분별할 수가 없고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빛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죄악의 폭풍우를 지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 가운데 죄악이 들끓고 죄악의 폭풍우가 다가와서 우리를 침몰시키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죄가 아무리 우리들을 침몰시키려고 해도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죄악의 풍랑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악의 풍랑이 아무리 다가와도 우리는 그 속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풍랑도 헤치고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과 탐욕의 풍랑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천국과 성령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세속과 탐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 가운데 우리가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 풍랑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과 탐욕의 풍랑 중에서도 천국과 성령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붙잡고 우리는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신의 치료의 메시지도 십자가를 통해서 받고 있습니다. 질병의 풍랑이 다가와서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를 죽이려고 할 때 그 어둡고 캄캄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 지고 갔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누가복음 9장 2절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질병의 유라굴로인 풍랑 중에 치료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의 풍랑 중에서도 축복의 메시지를 붙잡고 있으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고
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
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
록되어 있습니다. 가난과 저주 속에서도 축복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갈 방향이
뚜렷해지고 용기와 담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풍랑 중에서도 영생복락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 사망을 이길 수가 있습
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
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린도전서 15
장 55절로 57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
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
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과 음부가 다가와도
구원의 메시지를 갖고 있으면 능히 풍랑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그 배에 탔으나 마음으로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
오와 군인들과 승객들은 몸은 자유하였으나 마음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노예였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격심한 폭풍우가 인생의 껍질을 다 벗겨놓자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섬기는 자의 절대허무와 무력과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유라굴로의 인생 풍랑을 만났을지라도 그곳에서 소속감
을 확실히 알고 섬기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면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
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나 이 모든 일에
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 나아가 믿음으로 나가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유라굴로의 풍랑을
늘 체험합니다. 이 풍랑을 만날 때 소속감이 분명하지 아니하고 섬기는 것이 확실하지 않
은 사람들은 좌충우돌하다가 좌절과 절망에 빠져 침몰하고 맙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바울 선생의 신앙고백처럼 우리의 소속한 바가 분명하고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
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랑 중에 주신 메시지가 십자가를 통해서 우
리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메시지를 부여잡고 어두움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
으로, 풍랑을 고요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왜 풍랑 만난 인생인가?
행 27장 9~26절 / 조재진목사
성경을 보면 풍랑사건이 몇 군데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의 풍랑사건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손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 가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바람을 보내사 풍랑을 대작하게 하셨다” 성경은 불순종의 죄가 우리의 인생에 풍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인생에 풍랑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요나의 풍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인생의 풍랑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라는 풍랑을 만나고 난 후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하고, 부도라는 풍랑을 만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이층 계단에서 떨어지고 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이런 풍랑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치시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풍란만난 사건들
또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난 사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별안간 풍랑이 몰아쳤습니다. 영문모를 물결이 몰아친 것이지요.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제자들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주님은 그 때 일어나셔서 불어오는 풍랑을 잔잔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난후 제자들을 향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 이런 경우 제자들이 만난 풍랑은 영문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풍랑, 역경과 시련들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 숨쉴 여가조차 없이 밀어 닥쳐오는 힘든 사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했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쓰러집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요. 예수 잘 믿는 성도들도 이런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성도들이 믿음을 사용하여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사용하기만 하면 어떤 풍랑도 이길 수 있습니다. 혹시 영문도 모를 어려움이 닥쳐왔습니까? 그 때가 바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풍랑 사건이 하나 더 나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로마를 향해가던 사도 바울을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울을 태운 배가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향하다가 그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풍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14일 동안이나 이 풍랑에 밀려 이리 저리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배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그들은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 빠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탄 이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요나의 경우와 다릅니다. 또 제자들에게 닥쳐온 풍랑과도 다릅니다. 분순종 때문도 아니고 믿음의 시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사실 이 배는 풍랑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 배의 항해를 만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바울의 말을 들었다면 풍랑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 풍랑이 닥쳐옵니까? 정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강 듣고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주의 말, 바울의 말
이런 상황을 본문 11절은 잘 말해 줍니다. 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은 행해를 계속할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결정할 때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고 선장과 선주는 전문가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하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몰려오는 풍랑은 정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늘 선장과 선주의 말이 있고, 동시에 바울의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말을 듣는지가 그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우리는 쉽게 몸이 아픈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련한 경험의 소유자들, 노하우(know-how)가 있는 사람들이 존중을 받습니다. 여러 다양한 분야가 있고 저마다 전문가들이라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전문가의 말, 합리적인 말, 노련한 경험들이 우리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분명히 이성을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이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경험도 참 중요합니다. 노하우(know-how)라는 것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도, 인간의 경험도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는 한계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도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미래를 알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도 경험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인간의 문제는 늘 내 생각과 내 경험이 하나님 말씀보다 앞설 때 옵니다.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난 이유는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의 이성을 더 신뢰했기 때문에 결국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미항이라는 항구가 항해를 멈추고 겨울을 지낼 정도로 좋은 항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불편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 고급호텔도, 유흥장이나 놀이시설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 편리함을 축구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즐길 거리들, 즉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뵈닉스까지 가려고 한 이유가 지극히 육신적인 이유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없는 미항입니다. 미항처럼 불편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재미로 교회 가냐?’ ‘예수 믿은 사람들을 참 재미없다’라고 불신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산과 들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어두침침한 교회에 앉아있는 것이 참 한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전도하다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믿음생활을 거절하는 이유는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뵈닉스를 찾습니다. 육체를 즐길 곳을 찾아 헤맵니다. ‘어디 더 재미있는 것이 없냐?’ 라고 찾습니다. 그러다가 유라굴로와 같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한 영혼을 파멸과 고통에서 건질 것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설사 무미건조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영혼이 안전하게 거할 것은 십자가 그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부장이 뵈닉스까지 가자고 한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다수의 의견을 따른 결정입니다. 물론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민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소수의 소리가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는 다수냐 소수냐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진리냐 라는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다수결로 합시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라고 물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어느 것이 진리냐를 따진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하느냐에 따라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내 말에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고 진리는 아닙니다. 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13절을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처음 항해를 시작할 때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들은 신났습니다. 바울의 말이 한낮 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울의 말을 듣고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 했느냐?’ 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겠지요. 그들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을 몰랐습니다.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물결, 풍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지요.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 때문에 속을 수 있습니다. 잠깐 동안 잘되는 것 때문에 그 다음에 올 멸망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불신자의 삶은 그렇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잘되는 것 때문에 죽음과 그 이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모릅니다.
얼마 못되어
본문 14절을 보면 참 흥미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얼마 못되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못되어’ 라는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놀라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이 가면 얼마를 가겠습니까? 얼마 못되어 유라굴로라는 풍랑이 그들에게 밀어닥쳤습니다. 유라굴로 라는 말은 북동풍의 폭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들은 그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서운 폭풍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몰아치는 이 거대한 풍랑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몰아치는 풍랑 앞에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경험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풍랑이 불어오자 인간의 모든 계획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단지 풍랑에 밀려 이리 저리 밀려다니게 되고 말았습니다.
18절을 보면 이 풍랑 앞에서 그들은 모든 짐을 버려야 했습니다. 아끼는 물건들, 소중한 것들을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섭니다. 아까워도 버려야 했습니다. 짐만 버린 것이 아닙니다. 19절에 보면 배의 기구도 버려야 했습니다. 풍랑을 만나게 되면 아무 것도 소용없습니다. 21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했습니다. 20절에서는 “구원의 여망이 완전히 없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한 결과가 이렇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가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풍랑이 몰려오면 마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난 배처럼 그냥 물결에 밀려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앞에 인간의 의지,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누가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저 멀리 우주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는 세상을 낙원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이 때 유토피아를 외쳤습니다. 어떤 학자는 불합리하게 기록된 성경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초인사상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 못가서’ 정말 ‘얼마 못되어’ 인간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은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갔습니다. 이 때 일어났던 것이 1,2차 세계대전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은 휴지조각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초토화할 무서운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얼마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누구의 말을 듣는가?’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바울의 말을 들을 것인가? 를 결정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은 아버지 솔로몬을 모셨던 지혜로운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다가 실패했습니다. 92년 대선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무당의 말을 듣고 대선에 나갔다가 그가 쌓아놓았던 인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단군교 교주였던 김해경씨가 대선에 나가라고 했다고 하지요. 150만표로 YS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실패했습니다.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도 무당말 듣다가 망했습니다. 쇳가루를 만지라고 해서 철강산업에 손을 댔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탤런트 황수정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당말 듣고 남자를 사귀다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대강 듣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하나님 말씀들을 때에는 졸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 바울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은 아주 놀라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인생의 풍랑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믿다가 고통을 당하고 먹지도 못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는 사람들과 이 죽음의 풍랑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한 사람을 대조시킵니다. 몰아치는 풍랑과 관계없이 평안을 누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이 그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과 바울이 얼마나 대조되고 있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두려움에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초조에 빠진 그들에게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죽지 않습니다’ 라고 외칩니다. 바울은 어느 새 풍랑만난 배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절망 속에서 소망을 줄 수 있고, 캄캄한 앞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별빛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파도의 수위가 낮아진 것도 아니고, 어제와 똑같은 고난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려워말고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풍랑만난 저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심어줍니다.
어떻게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안심할 수 있었습니까? 풍랑과 관계없이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23-24절에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나의 속한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렇습니다. 푹풍우가 몰아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바울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바울은 어떤 상황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주의해서 보십시다. 23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을 “나의 속한 하나님,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격려하시는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일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정말 한 사람이 제대로 하나님을 체험하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일인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내 아버지가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일인칭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두 번째로 우리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 그의 마음속에 있는 놀라운 소명의식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울을 살려주신 것은 바로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풍랑 한 가운데서 주님은 바울의 사명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입니다. “너는 안죽는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중요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품은 사람들은 유라굴로가 와도 상관없습니다. 사명을 확인하는 사람들,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과 비전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으려면 사명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온다하더라도 담대하게 승리하려면 사명을 확인하면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성도들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풍랑만난 이 민족이 한국교회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풍랑만난 이 부산 땅이 우리 부산제일교회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위의 몇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세 번째 우리가 바울의 고백 속에서 놀라운 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나는 믿노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기적은 한 사람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실제로 바울의 이 고백이후 풍랑이 사라지고 상황이 변화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해방을 꿈꾸면서 “I have a dream"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삶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전하리라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말의 고백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고백, 삶을 헌신하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을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말, 전문가의 말을 듣다가 풍랑을 당하게 된 백부장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말하는 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을 가진 바울이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바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 때문에 가정이 변할 수 있고, 직장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믿고 경험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을 통해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 믿음의 사람 바울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 큰 축복이다.’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상황이 반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지시고, 세계의 역사를 주도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너를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그 한 사람은 전 세계를 향한 복의 통로였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아십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장군의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애굽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한 가정에, 또 한 교회에 있다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울처럼 이 시대에 사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소망을 주는 한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풍 속에서의 위로
행 27장 9~26절 / 박조준목사
오늘 아침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아슬아슬한 파선기를 읽었습니다. 이 야기는 비단 성 경에서 뿐만 아니라 항해 역사상 유명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고 신성 모독죄와 소란죄라는 죄목으로 피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총독에게 몇 번씩이나 심판을 받았으나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할 길이 없어서 직 접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아데라뭇데노의 한 무역선을 탔었습니다. 도중에 애굽에서 로마로 쌀을 싣고 가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배로 옮겨 타게 되었습니다. 이 배는 상당히 큰 배로써 많은 화 물과 함께 사람도 탈 수 있는 말하자면 객선을 겸한 화물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바울은 하나의 죄수로써 다른 여러 죄수들과 같이 이 배에 탔었고, 이 배 안에는 죄수를 인솔하는 책임 을 진 율리오라는 백부장과 그 밖에 여러 군인 그리고 선원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성경대 로 보면 이 알렉산드리아호에는 화물 말고도 276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별 것 아니지만 2,000년 전에 있은 배 치고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배는 유대인의 대제일(大祭日), 즉 10월 초에 지내는 대속죄일 전에 미항이라는 항구까지 간신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큰 배라도 돛을 이용했기 때문에 바람이 좋지 않 으면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미항에서 대제일을 보내고 다시 항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대제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심하기 때문에 항해를 하지 아니하고 혹시 항해를 하더라도 아주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겨울을 지내고 해동과 더 불어 항해를 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큰 배 알렉산드리아 호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좀더 가서 베 닉스에서 과동(過冬)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담론이 구구하다가 결국 선장의 의견대로 결정 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미항을 떠나 베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하여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 되어 가고 있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일 후에 있을 풍랑을 생각해서 겨울에 항해하는 것 을 기어코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를 탄 사람 가운데 실권자는 율리오라는 군인 장교였습 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미항을 떠나 베닉스로 향 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광풍을 만나게 되었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선원이건 죄수이건 군인이건 할 것 없이 두 주일 동안 바다 위에서 굉장한 고생을 하게 되었습 니다. 다행히 늦게라도 바울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들은 14일 후에 구원을 얻어 전원이 멜리데라 는 섬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그 동안의 그들의 고생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 다.우리는 이 유명한 항해의 이야기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사람들을 먼저 보세요. 군인들은 로마 황제의 근위대인 오구스탄 대에 속한 군인들이었습니 다. 그러므로 이 군인들은 로마로 가면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고 또 그립던 가정에도 갈 수 있 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군인들에게 있어서 이번 항해는 무척 기쁘고 흥겨운 여행 이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선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애굽에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써 상업차 항해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때 세계를 지배하던 대 로마제국에 가게 되면 그만 큼 재미보는 일도 많이 있고 수중에 굴러 들어오는 수입도 적지 않아서 로마로 항해하는 일을 가장 신나는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맛있는 로마의 술과 애교있는 로마의 미녀들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차츰 가까워 오므로 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흥이 피어나는 구름처럼 떠오르기 시작하였습 니다. 그리고 이 배에 탄 사람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죄수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론 각각 그 이유는 다르겠지만 이제 로마로 가면 좀더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의 시민권을 갖지 아니한 사람들은 현지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인 데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것을 보면 로마인이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 들이 아니었는가 짐작됩니다. 그런데 죄수이기는 하지만 좀 다른 목적을 가진 죄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울 입니다. 바울도 물론 가이사의 재판을 받는 것이 표면적 이유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 보다도 바 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지만 그는 그곳에 가서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같은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 생 각하는 것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지마는 한 배에 타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 람들에게 한 가지 같은 것이 있다면 제각기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만나 기뻐할 희망, 어떤 이는 돈과 환락을 찾아 즐기려는 희망, 어떤 이 는 억울함을 씻게 되리라는 희망, 어떤 이는 로마인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로마에 가기까지는 생사의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겨레는 그 생각이 다르고 배운 기술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다고 하지마는 대한민국이 라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이 배가 풍랑을 만나면 우리 다같이 풍랑을 겪어야 하고, 파선이 되 면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 공동운명을 지니고 있습 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밀어닥치기 전에 주의할 일은 배 안에서 서로 옥신각신하지 말아야 합니 다. 이 알렉산드리아 호는 미항에서, 베닉스로 갈 것이냐? 미항에서 그냥 머물 것이냐? 하는 것 때문에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미항은 베닉스보다는 작은 항구요, 2, 3개월씩 머물러 있기는 아 무 재미가 없어 보이는 항구였습니다. 그 대신 베닉스는 크고 화려한 곳이므로 과동하기에 심심 치 않은 곳이므로 선장과 선주는 지휘관 율리오에게 베닉스로 가자고 제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술을 믿었고 다소 바람이 불더라도 베닉스까지 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결 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죄수 가운데 한 사람인 바울은 펄펄 뛰면서 반대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의 주장 으로 말하면 찬성이건 반대이건 할만한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 배가 지 금 떠나면 위기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히 보이므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보니 이 번 행선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우리의 생 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호의 지휘관인 율리오는 죄수 바울의 말은 오히려 시끄럽게 생각하고 경 험과 기술이 있는 선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교회의 주장은 이와 꼭 같습니 다. 대우받는 주장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기술과 경험만을 앞세우고 집권자의 의욕으로 전진을 명령하지만 매우 위험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개인 이던 국가이던 장래에 우리의 기술과 경험, 불타는 의욕마저 무시해 버리는 광풍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회의 충고를 받아드릴 아량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렇게 대우받는 입장에 놓여 있지는 못하지만 개인이나 국가의 위기를 예고하 고 지도자가 잘못 판단할 때에는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지도자들은 비록 그 소리가 미약해 보여도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미항을 떠나 베닉스로 향한 알렉산드리아 호는 남풍이 순하게 불 때 백부장이나 선장은 자기들 의 결단에 대하여 만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밀어닥치는 바 람에 이 큰 배는 파도에 쫓기기 시작하여 24시간만에 짐을 몽땅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50시간도 못 되어 배 안의 모든 기구를 물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 사람들은 맥이 빠졌습니다. 기술도 이젠 소용이 없이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절망 상태 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기자는 본문에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고 사실 그대로를 밝 혔습니다. 지도자가 한 번 잘못 생각하고 잘못 결단을 내리게 되면 온 국민이 고생과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원들은 위급하게 되니까, 광풍에 밀려 배가 암초에 걸릴 것이 내다보이니까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들켰기 때문에 그대로 되지는 못했지만 사명감이 없는 일꾼들은 수틀리면 제 갈길 찾아 발 뺌이나 하고 달아날 생각만 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어렵고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위기를 잘 타개해 나아가야 할 사명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알렉산드리아 호가 위험의 절망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죄수의 한 사람인 바울이 나타났습니 다. 바울은 구원의 소망이 없이 식음마저 전폐한 276명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그는 먼저 백부장 과 선주, 선장의 잘못을 책망하고 나서 민중을 향하여 위로의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내 말 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던들 이런 재난과 손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용기를 내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의 천사가 지난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무서 워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많 은 사람을 다 네게 맡겨 주셨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용기를 내시오.
나는 내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광 풍에 시달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권명하였습니다. 우리 기독 교는 그 존재가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그 국민의 영혼과 그 생명을 책임지고 있 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닥쳐 올 때 그 위기를 경고하고, 위기에 봉착 했을 때에는 그 원인을 밝히는 동시에 고생하며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어야 합 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기독교는 위기에 처한 역사 속에 참신한 새 소망과 구원의 밝은 빛을 주어 왔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이용을 하다가 위기가 오면 버리고 도망 하는 일이 있어도 기독교는 항상 고생하는 국민의 벗이 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안된 다고 소망이 없다고 절망할 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고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와 근심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너희는 근심 하지 말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너희와 함께 하신다 고 기독교는 말하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타고 있습 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이 광풍 만난 배에 같이 탄 사람들입니다.북 쪽에서는 유라굴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광풍이 불어옵니다. 동남 쪽에서는 일찌기 우리를 삼켜 본 경험이 있는 일본의 거센 파도가 아직도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인플레의 광풍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이 나라의 유권자들은 나라를 위해 자중하고 경솔한 결단 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수가 적고 평소에 인정받는 처지에 있지는 못하지만 나라의 위기를 경고해 주고,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고, 고생하는 국민에게 위로하고 살 길을 보여 주 어야겠습니다. 바울은 광풍 속에서 어떻게 하였나요? 밤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한 것 뿐입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하였습니다.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된 이 겨레에게 희망을 주며 위로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처럼 우리 일어나 이 겨레 를 위로하고, 소망의 새벽 별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어제 밤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
행 27장 9~26절 / 유영설목사
1. 지난주 어느 날 기도원에서 점심식사 후 등산로를 따라 산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내 머리 위 2-3㎝ 거리의 나뭇가지에 지저귀는 새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저귀는 새소리를 자연의 소리라고 하고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소통 방법으로 지저귑니다. 그 소리는 사랑을 나타내는 소리, 적의 침입을 알리는 위급함을 나타내는 소리, 먹이를 두고 영역 싸움을 하는 소리, 이런저런 갈등과 생각을 나타내는 소리일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우리 귀에는 자연의 소리로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럼 우리의 소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소리 기능은 “언어”인데 인간이 가지는 의사소통방법입니다. 이 소리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합니까?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아름답다, 평안하다, 기쁘다” 고 느낌이 듭니까? 실제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때 분노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판단, 정죄,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고 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창조의 형상을 유지해 가시며 피조물의 생명을 풍성케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은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를 통해서 피조물의 생명을 풍성케 하십니다.
2. 강림절 제3주를 맞이해서 내 말에, 얼마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능력이 있는가를 돌아보겠습니다. 말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상처 주기 쉽고 분열과 고민하도록 하기 쉽고 영혼을 파괴하기 쉽고 정곡을 찌르는 말로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도 쉽습니다. 말로 세상을 다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급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가 전하는 말씀, 내 입을 통해 나가는 말을 통해 용기와 힘을 얻고 위로, 소망, 열심을 내고 부족함을 깨닫고 결심하게 할 수 없을까요? 저는 오늘 읽은 말씀에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바울 일행은 시돈을 출발해서 무라 항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호로 바꾸어 탔습니다. 무라 항을 출발한 배는 여러 날 후에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다시 미항을 출발했을 때 “유라굴로”라는 겨울 폭풍이 불어 왔습니다.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했고 선원들은 배에 실은 짐과 기구들을 던져서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폭풍에 표류하면서 먹지도 못하고 뱃멀미로 기력도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행 27:20)고 했습니다. 이때 배 안에는 선원과 선장, 백부장가 군인들, 사업가들, 죄수들과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각자 역할과 기능이 있고 신분의 차별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모두 똑같아졌습니다. 그들의 재능과 신분은 배가 안정을 찾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 모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역할과 기능,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모두 똑같이 느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3. 오늘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똑같은 이야기만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요 동일하게 반복되는 이야기들입니다. “경제 불황이다, 어렵다, 어려워 질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다 하는 말, 누구나 다 아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 “말 한대로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이 좋지 않은 말을 안 합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 누구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때 배 안에는 절망하는 사람,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도여행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체험했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이 배안에 있는 분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행 27:22)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의지와 감정과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오,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말씀 하셨습니다.”(행 27:23)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있던 어젯밤에 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난파선 가운데서 들었던 하나님의 위로와 용기와 희망의 말씀이었습니다.
4. 오늘의 세상에 어쩌면 우리는 함께 풍랑을 만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해있으나 판단과 해석,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달라야 합니다. 어디서나 위로, 용기, 희망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내 의지, 판단, 경험으로는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감동”으로 오는 확신과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내게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강림절에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자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체험한 것은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머무르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에 처한 상황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어젯밤의 일”은 기억에 희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생생한 은혜를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현재의 사람입니다. 금방 만든 음식이 맛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오늘 받은 은혜로 오늘을 해석하며 비전을 제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절망과 고통과 포기 속에 있을 때 담대하고 인내하고 희망을 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한 은혜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제시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풍랑 일 때
행 27장 9~26절 / 최응희목사
바울 사도는 긴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라 하여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소란을 겪은 후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임으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여 결국은 로마로 이송되게 됩니다. 이것은 로마의 가이사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크고 빠른 교통수단이 배였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여정을 거쳐 로마로 가는 큰 상선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본문이 시작됩니다. 276명이 타고 있는 이 배(27:37)는 모두가 희망이 가득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뱃사람들은 큰 도시에서 많은 돈을 벌고 즐길 수 있는 기대가 가득하였습니다. 죄수들은 재판을 통해서 풀려나리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은 각기 태생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지만 모두 한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제각기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미항(美港)이라는 항구에 도착한 이 배는 어디에서 겨울을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엇갈렸습니다. 미항은 이름은 예쁘지만 실상 시골 작은 항구여서 별로 시설도 없고, 겨울을 지내기에 맞지 않는 항구였습니다. 그러나 뵈닉스는 상당히 큰 항구로서 도시가 발달하고 좋은 시설도 많아서 겨울동안 머물면서 재미를 볼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선장과 선원들은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깜짝 놀라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보니 이번 항해는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계획대로 뵈닉스로 간다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도 큰 위험과 많은 손해를 볼 것입니다.' 바울은 뱃사람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전도하러 다니는 동안 배가 파선하는 일을 여러 번 겪었기에 그 일대의 환경과 기후에 경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호송하는 백부장은 죄수인 바울사도의 말보다 선원들의 말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울사도의 경고를 무시하고 뵈닉스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한 알렉산드리아호는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부니 백부장이나 선장은 아주 만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큰 폭풍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이 큰 배는 파도에 쫓기기 시작하여 하루만에 짐을 몽땅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 안의 모든 기구를 물 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맥이 빠졌습니다. 기술도, 경험도, 의욕도, 자신감도 이젠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20)고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13) 우리가 인생을 항해할 때, 때로는 이렇게 남풍이 순하게 불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의기 양양하고, 심지어 교만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큰 풍랑이 일 때가 있습니다. 푸른풀밭 맑은 시내를 지나가다가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야 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생각지 못한 큰 폭풍에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낙심과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오히려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바울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풍랑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와 어려움에 부딛칠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그를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3) 이것은 바울사도가 밤에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실이 아니라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했습니다. 이 큰 풍랑 속에서도 바울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생생한 교제인 기도였습니다. 기도속에서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바울에게는 더 이상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생명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연약한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을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주님과 영적교제를 나누며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가 풍랑을 이기게 합니다.
바울사도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사도에게 그의 사명을 다시 확인시켜주시고 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렇게 가이사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이 바울에게 풍랑을 헤치고 살아나갈 의미가 된 것입니다. 이 사명을 알고 있는 한 바울에게 고난은 오히려 도전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고 했습니다. 이 사명을 깨달을 때 바울이 자기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였습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풍랑 속에서 절망한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신을 죄수로 잡아가고 있는 로마 군인들에게조차 희망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안심하라. 비록 재산은 잃을 것이나 생명은 모두 살것이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명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의 존재 이유를 아는 한,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어떤 풍랑도 이기고 오히려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였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 바울사도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평상시의 순탄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깊이를 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의 깊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웨슬리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미국에 선교하러 갔다가 실패하여 돌아오는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그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웨슬리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였고, 성실성에 기초한 자신의 믿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은 스스로 실제적으로 주님과 영적 교제를 경험하면서 그 믿음과 삶은 새로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그러나 내 삶이 환난의 풍랑을 만날 때, 그리고 내 삶이 절망의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여전히 이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이상한 것은 우리가 꼭 믿음을 가져야 할 때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인생속에서 역경과 폭풍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 속에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역경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역경과 풍풍를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풍랑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곁에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하셨습니다.
우리는 풍랑을 만나면 겁이 나고 낙심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해야 할 소중한 사명을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그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자
행 27장 9~37절 / 이원근목사
똑같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분은 들러리로 살아가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느 분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됩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조역입니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은 가롯 유다처럼 살아가고 있으나 어느 분은 베드로처럼 살아가고 사도 요한처럼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 복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의 고발로 로마로 재판을 받으려 압송당하고 있었습니다.
환경이 좋지 못합니다.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배안에는 선장도 있고, 선주도 있고, 뱃사공도 있고, 다른 죄인도 있으며 백부장도 있습니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제일가는 자들입니다. 선장은 바다의 전문가입니다. 백부장은 전쟁의 전문가입니다. 죄수는 죄의 주인공이면서 전문가입니다. 선주는 물질의 전문가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짜 누가 주인공이냐 하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잘 모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알 수 있습니다.
항해하는 배가 처음에는 배가 잘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행선하기가 위태한 것을 알고 “여러분,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 얼마 못가서 갑자기 태풍이 와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장도 선주도 뱃사공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배의 짐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날 동안을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힘 있게 말하는 자가 있으니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4일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하다가 겨우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꿈이 있었습니다.
무역상은 꿈의 항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항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꿈은 복음의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수의 몸이지만 세계정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꿈을 꾸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아가는 꿈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에 선 바울, 바다에 짐도 버리고 기구도 버리고 먹지도 못하고 고생 고생할 때에 그만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꿈을 가졌습니다. 276명의 가운데에 서서 주인공이 되어서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을 살리셨습니다.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배를 보살펴주셔서 그 안에 있는 뱃사공을 살렸고 선장을 살렸고 선주를 살렸고 그 안에 있는 죄수들도 살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과학, 물질, 세상 지혜로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믿고 항해하다가는 풍랑을 만납니다. 그러다가 배가 좌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같이 복음의 꿈을 가지고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요셉은 애굽의 주인공으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41:38-45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고 했습니다.
애굽은 그 당시에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그때에는 애굽이 세계에서 제일로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바로왕도 있었다. 보디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바로왕입니까? 보디발입니까? 아닙니다. 주인공은 바로왕도 보디발도 아닌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린 종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고자 하니 주인공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역사를 책임진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지금은 연약하지만 한국의 주인공,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일 것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이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부모의 사랑받는 자녀에게 나타났습니다. 형제에게 미움을 받고 팔리는 자에게 나타났습니다.
보디발의 종된 자에게 나타났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꾀임에서 승리한 자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본 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통함이 임했고 이렇게 하다보니 하나님께서 그를 감옥에서 한 순간에 국무총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신다 하면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 하면 쓰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여기있는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준비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시대의 요셉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고난도 주십니다. 때론 고통도 주십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원통함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에 원망 불평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인내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주인공, 세계의 주인공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이 세상의 영의 싸움에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출애굽기 17:10-16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이세상은 영적 싸움터입니다.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것을 이겨야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시에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싸움, 훈련받지 않는 오합지졸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싸움의 장군인 여호수아도 있었습니다. 싸우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군에게는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겼습니까?
누가 주인공되었습니까? 주인공은 싸움터에서 싸움을 하는 군인들이 아닌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세가 주인공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기도의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아론과 훌이 모세 양옆에 돌을 가져다 놓고 모세의 양손을 붙들어 올려 손을 해가 지기까지 내리지 않으니 영원한 승리가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하는 자가 있습니까? 지혜를 쓰면서 사업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하는 자가 있을 때에 승리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싸우는 장소도 싸우는 군인도 있지만 먼저 기도로 싸워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주인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지 바디매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많은 무리가 있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교회의,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잔치집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주인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많은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에게 발 닦을 물을 주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주인이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합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주인공은 집안 식구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죄 많은 여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예수님을 닦아 드리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구제에 대한 얘기도 주인공의 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어디든지 전파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 여인의 봉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준비였습니다.
미래를 아는 봉사였습니다.
최고의 봉사, 힘을 다한 봉사였습니다.
주의 복음이 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기념이 되는 봉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념이 되기를 원십니까?
우리도 복음과 함께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의 일도 증거가 되는 주인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죄많은 여인이지만 모든 이가 손가락질하는 여인이지만 예수님의 역사에 주인공이 되어서 주의 역사를 책임진 주의 복음과 함께 증거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까?
복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애굽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싸움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잔치집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행 27장 12~26절 / 이상웅목사
부활절을 지난 지 4주가 되었습니다. 부활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믿음 가운데 매일 부활을 기념하며 살고 계시죠? 우리 삶이 평안할 때도, 고통스런 풍랑을 만날 때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전달하러 왔다가 성난 폭도들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이사랴에 2년간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을 거치며 재판을 받았지만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면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원래 계획이 예루살렘을 갔다가 로마로 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를 통해 땅끝인 서바나로 가기 원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는 강도가 많아 위험했고,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로마 백부장 율리오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로 향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를 향하는 배를 타고 ‘무라’라는 곳에서 로마로 가는 배로 갈아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싣고 로마로 가는 배가 무라를 거쳐 갔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 중에 광풍을 만나고 난파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풍랑 중에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생소한 지명과 함께 항해일지를 기록하듯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인생 중 힘들었던 기억은 자세히 기록하여 오래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기억해야 쉽게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힘들 때 도우셨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교만해집니다.
사랑하는 마중물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광풍처럼 찾아온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몇 번이나 있으셨습니까?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옵니다. 지나갔다고 잊지 말고, 그때의 일을 자세히 기록해두면 어떨까요? 어떤 과정을 겪었고,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고, 그 과정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잊지 맙시다. 오래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하는 삶이 되시길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욕심이 부른 위기
지중해(地中海)는 말 그대로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입니다.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의 지브롤타 해협만 없었다면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호수같은 곳입니다. 지중해는 육지로 둘러싸여 육지의 기후 변화에 따라 바다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금식하는 절기인 대속죄일이 지나면 바람이 내륙에서 바다 쪽으로 불게 됩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은 강하고 빠른 바람이 해수면에 부딪히게 되면 유라굴라 광풍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11월에서 1월은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무라를 출발한 바울 일행의 배가 겨울이 다가오면서 육지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밀려 그레데 섬의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더이상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전도여행을 3번이나 다녔고, 배가 파선한 적도 3번이나 있었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 나름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12-13절입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선장과 선주도 알았을텐데 왜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첫 번째는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미항은 작은 항구였기에 즐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3개월간 겨울을 나기에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뵈닉스라는 항구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겨울을 보내려는 배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기에 즐길 것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이왕이면 뵈닉스에서 겨울을 보내기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을 긍정적 신호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보다는 마무리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남풍이 불어서 출항하는 것이 괜찮겠지만 과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판단했어야 했습니다. 바울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즐기며 겨울을 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남풍이 부니까 출항을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위기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찾아옵니다. 나의 선택과 관계없이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위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고,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위기도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경험한 위기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했다면, 즐기는 것을 포기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의 욕심에 이끌려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도전하지 말라, 위험 앞에 몸을 사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가치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안위와 즐거움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욕심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2. 구원의 여망마저 잃음
미항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웬만한 파도에도 배멀미를 합니다. 그런데 광풍이 불면 어떠하겠습니까? 집채만한 파도에 배가 쪼개지기도 하기에 선체를 줄로 감았습니다. 17입니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스르디스는 모래톱으로 파도에 따라 바다 아래 모래가 쓸려다니며 언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 배가 걸리면 배가 파선되게 됩니다. 일종의 바다에 떠다니는 지뢰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배의 기구를 버려 무게를 줄여서 배가 바다에 깊이 잠기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결국 짐도 기구도 다 버렸습니다. 그 짐에는 로마로 가는 귀한 물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에 재물을 잃는 것이 가장 적게 잃는 것입니다. 건강을 다치고, 마음이 상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재물을 잃는 것이 낫습니다.
버릴 것을 다 버렸습니다. 목숨이라도 건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20절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큰 풍랑은 그대로 있고,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나 별이라도 보여야 방향을 잡고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는데, 해도 별도 보이지 않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습니다. ‘여망’이란 지푸라기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사라지자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아 낙망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주 안에서 살길을 찾게 되길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3. 위기의 순간에 일하신 하나님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다가가셨습니다. 21-22절입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거봐라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 꼴이 뭐냐, 왜 나까지 죽게 만드냐?’ 그들을 책망하고 원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염려하지 말아라. 안심해도 된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장하여 자신의 말을 듣도록 조종하는 사람은 참된 지도자가 아닙니다.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안심하라고 했지만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어려움 겪는 사람에게 아무 근거없이 ‘괜찮을거야 힘내! 잘될거야’ 이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안심하라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절 때 나누었던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바울 속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생명의 보장이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할 복음의 핵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예수님을 믿고 안심하라’ 이렇게 전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4절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하나님은 바울에게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바울 마음의 두려움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위기도 문제지만 위기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두려움은 판단 능력을 잃게 합니다. 얼마전 성경공부 시간에 어느 집사님이 보이스 피싱 당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구 어머니냐고 하면서 애 울음소리를 들려주는데 두려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바울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사명을 자각시켜주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폭도들에 의해 잡혔을 때 그 밤에 찾아와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11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로마에 가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 넌 이 바다에서 죽지 않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명을 다시 인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함께 하는 자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 그들을 너를 통해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바울을 통해 배 안의 276명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두 절망하여 죽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죄수였던 바울을 통해 배 안의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받았지만, 이 배는 바울 하나로 인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도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의 풍랑 가운데 두신 것은 그 풍랑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 인생의 풍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나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찾아오기도 하지만, 나의 결정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피할 수 없는 풍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알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두려워할 일이 그만큼 많지만 우선적으로 사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늘 사명을 자각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풍랑 가운데 있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나를 통해 저들을 돕기 원하신다면 나를 사용해주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한 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목 소리 들으려면 -조오현-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으려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고목 소리 듣는데도 이 정도의 시련과 풍파를 견뎌야 하는데, 아버지로서, 목사로서 부끄러웠습니다. 어렵다, 힘들다, 불평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속이 썩고 부러진들 뭐가 문제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신실한 성도라는 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상처 자국이 영광이지요. 인생의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주님께 신실한 성도라 불려지시길 축복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외친 소망의 선언
이준원목사 / 행 27장 13~26절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즐겨보던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랑의 유람선(Love Boat)>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온 다음에도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장로님 내외분이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어디를 간다고 하시기에, 어디를 가시냐고 물었더니 플로리다에 가서 크루즈를 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 대단하시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크루즈가 대중화되어서 우리 중에도 타본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도 크루즈를 두 번 타보았습니다. 사실은 두 번 다 크루즈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 한 것인데, 첫 번째는 크루즈가 맞기는 맞습니다. 몇 년 전 LA에 갔을 때 부모님이 한 번 타보자고 하셔서 3박4일로 거기서 멕시코에 살짝 갔다 오는 작은 크루즈 배였습니다. 또 한 번은 ‘갈릴리 크루즈’였는데, 사실은 전혀 크루즈가 아니었고 30-40명 타는 작은 배였는데도 ‘크루즈’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 다 풍랑 같은 것은 없고 잔잔한 물 위에서 잘 타고 왔습니다. 그러나 때로 뉴스를 보면 큰 크루즈 배라도 강한 폭풍을 만나서 고생하다 왔다는 경우도 있고, 화장실이 고장 나서 물이 역류하여 돌아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바로 이런 항해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풍랑이 일어나고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돌려서 생각해보면, 삶에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풍랑이 인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병이 나서 아픈 경우에 얼마나 고통이 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프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문제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인생 문제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문제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힘든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항해 길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시고 또 우리의 인생을 정금처럼 단련시키셔서 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려는 은혜의 손길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믿음으로 소망을 선포하는 바울의 믿음의 선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항해 길에서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과 직면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광풍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것을 오늘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1.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 (13~17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3절)
바울은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선장과 선주는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항이 작아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저 옆에 있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뵈닉스로 우리가 잘 갈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며 계획대로 닻을 올리고 출항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배’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생각이 옳고 ‘바울이 괜히 저런 말을 해서 우리 마음을 언짢게 했다.’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조심하기 위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크고 긴 그레데 섬 해안을 끼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죽음의 북동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4절)
항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섬의 내륙으로부터 큰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도 이처럼 모든 일이 우리 계획처럼 순풍에 돛단 듯 잘 나가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이런 광풍이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바람의 이름을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유라굴로’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입니다. 선원들(뱃사람들)이 말하는 북동풍, 그것도 아주 강력한 죽음의 북동풍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 잘 표현해놓았는데 “a wind of hurricane force”, 즉 허리케인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NRSV, ESV 등 요즘 많이 사용하는 영어성경 번역들은 이것을 ‘유라굴로’라고 하지 않고 ‘Northeaster’ 즉 북동풍이라 불리는 광풍(혹은 허리케인)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그것은 허리케인과 맞먹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바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상선이나 크루즈 배처럼 강한 추진력의 엔진을 가진 배들도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배들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이기고 나아갈 수 없는 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용기가 대단하고 경험이 많은 뱃사람들이라도, 강력한 두 개의 폭풍(북풍과 동풍)이 합쳐져서 몰아치는 역대 최강의 바람이 만든 파도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냥 그 파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상황입니다. 잘못된 파도에 엉뚱한 데로 떠밀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파도가 칠 때 아무리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5-16절)
제가 오래 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를 어느 교회에 갔다가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본문만 가지고는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바람에 계속 밀려가다가 크레타 섬에서 약 23마일 떨어진 가우다라는 섬 근처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우다(Cauda) 섬은 지금의 가우도스(Gavdos)라는 섬입니다.
계속 항해하기에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배 뒤에 끌고 다니는 “거루” 즉 작은 거룻배들을 끌어올렸습니다. 이 거룻배들은 얕은 해안가에 상륙할 때 사용되는 작은 배들이고 때로 구명정처럼 사용되었는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거룻배들이 날아와서 배에 부딪치면 거룻배들도 깨지고 모선도 해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풍과 파도에 날아와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룻배들을 끌어올려서 밧줄로 꽁꽁 동여매었습니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7절)
위험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스르디스에 걸리는 게 뭐고 연장을 내리고 쫓겨 간 것은 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스르디스”는 ‘시르티스’(Syrtis)라는 단어입니다.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크레타 섬의 남쪽 에게 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부터 밀려드는 모래톱(모래언덕)을 말합니다.
‘연장을 내렸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에 빠르게 밀려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내리는 일종의 닻 같은 것을 말합니다. 너무 빨리 밀려가니까 무거운 닻을 내려서 천천히 밀려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갔다’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을 보면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가고 있었다.” (14절)
지중해 남쪽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비아 해안이 있는데, 그 당시는 북아프리카를 주로 ‘리비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 속에 ‘모래언덕’으로 불리는 ‘스르디스’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배든 그 바다 속에 있는 모래언덕에 탁 걸리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고 붙들리는 겁니다.
그레데 섬 미항을 출항한 이 알렉산드리아 배가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남서쪽에 위치한 가우다 섬으로 휩쓸려갔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자칫 배가 남쪽으로 밀려가다가 결국 리비아 해안까지 밀려가서 바다 속 스르디스(모래언덕)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래언덕은 선원들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번 걸리면 누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있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그런 데 걸리면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작 돛을 내리고 그냥 휩쓸려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처음 출항할 때는 순풍이 불어서 ‘우리가 바울의 말을 안 듣길 잘했지. 전문 뱃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의견대로 한 것은 참 잘했다.’라고 생각했겠지만, 바로 조금 후 급작스럽게 돌변한 사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을 태운 이 배가 겪고 있는 일은 마치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작은 비유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세상 일이 순풍처럼 보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서 아주 잘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경 내용도 그렇고,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나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을 통해 ‘그렇게 하면 안 좋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그래도 내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는 다르게 하는 게 낫다.’ 하며 나아갔을 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했는데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각을 아주 잘한거지.’ 하며 의기양양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풍이 광풍으로 변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예상 밖의 광풍이 불어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조금 살아보면 그런 것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했을 때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다가, 중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Icarus)의 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미노아 문명과 관련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 그레데 섬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서 크레타 섬을 탈출하고자 했던 이카로스의 꿈이 막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태양의 열에 녹아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카로스의 신화입니다.
인생이 그것과 참 비슷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날아오르며 잘되는 것 같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든, 다 좋은 일도 찾아오고 위기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좋은 일보다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진짜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풍이 순풍으로 바뀔 때는 누구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분 좋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풍이 광풍으로 바뀔 때 진짜 신앙이 어떠한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쉽게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불순종하여 광풍을 초래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다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죄 때문은 아니더라도, 욥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어려움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어려운 순간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며 돌아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위기 상황도 벗어나도록 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2.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 (18~20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8절)
‘풍랑으로 심히 애썼다’는 표현은 ‘폭풍우로 심히 괴롭힘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폭풍을 견디는 데 힘을 보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아리스다고 등 일행이 거기 탄 사람들과 같이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 이튿날이 되었지만, 광풍의 위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광풍 속에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한 하물들을 모두 바다에 내버려야 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실은 거대한 양의 곡물, 또 많은 하물주들이 실은 온갖 하물들을 다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주의 돈이고 선장의 돈이고 또 하물주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미항에 있지 않고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뵈닉스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항해의 위험에도 바로 옆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자고 주장해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풍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광풍 속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곡물과 하물들)을 다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9절)
지금 누군가가 내버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침구, 의자, 테이블 등 “배의 기구”도 바다 속으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배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할 기구들마저 바다 속으로 버릴 정도로 상황이 아주 위급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절)
“여망”이라는 말은 ‘남을 여(餘)’에 ‘바랄 망(望)’, 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인데, 이제 남은 희망도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시적으로 ‘햇님, 별님’이라고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굳이 여기서 해와 별을 쓴 것은, 그 당시 뱃사람들이 해나 별을 보면서 방향도 알고 시간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볼 수 없으니 측정하여 알아낼 수 없는 상황,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단어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을 왜 이들은 바다 속에 버려야 했습니까? 배에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기구들까지도 왜 바다에 다 버려야 했습니까? 그렇게 해야 혹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지만,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날들만 계속될 뿐, 죽음의 풍랑 유라굴로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는 겁니다. 실날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으니까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바람은 강하게 불고 거대한 파도는 쉬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삼키려 막 몰려옵니다. 그냥 배를 타서 조금만 흔들려도 배 멀미를 하며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물이 쏟아지고 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 또 바람이 불고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이리 밀려갔다 저리 밀려갔다 하며 쓰러지고 부딪히고 피가 나고 팔다리도 부러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이런 상황이 조금 후에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조금만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거다.’라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는 그냥 놓아야겠다. 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해도 별도 달도 다 안 보이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배에 있는 사람 숫자가 바울까지 합쳐서 276명입니다. 지금 이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괜히 왔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괜히 미항을 떠났다가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누가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면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위기 속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은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왜 미항에 머물지 않고 뵈닉스로 가자고 하며 무리해서 떠났습니까? 자신들의 피와 같은 돈,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돈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다, 생명보다 돈이 귀하다.’라고 여겼습니다. ‘돈이면 생명도 지킬 수 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항이 아니라 뵈닉스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했던 바로 그 돈 때문에, 결국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이 지금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도구이어야 할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돈이 오히려 우리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수없이 많은 곳에 돈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지금 이것을 겪고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썼던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성경에서는 돈 자체가 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돈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neutral)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합니다.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썼을 당시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돈에 넘어가서 믿음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돈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를 찌르고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뿐이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학위나 사회의 성공이나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맨 끝에 가보면 다 돈입니다. 아무리 유명해지더라도 돈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유명해질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량상품을 만들어냅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는데, 부실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지난번 세월호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무리하게 한계를 넘는 화물을 실었다가 배가 돌 때 넘어져 침몰하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돈 때문입니다.
이 콜럼버스는 그래도 괜찮지만, 제가 오래 전에 살던 애틀랜타에는 이상하게 유흥업소가 많습니다. 옛날에도 많았고 나중에는 뉴욕 쪽에서 온 사람들이 큰 식당도 세우고 또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를 세웠습니다. 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도박 산업이 왜 안 없어집니까? 도박이 나쁘다는 건 다 아는데 왜 안 없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아주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가 왜 벌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테러도 결국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기는 조금 덜하지만, 한국은 좁은 땅인데도 부동산 투기가 지금까지도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사기 치고, 횡령하고,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횡포를 부리고, 사람 간에도 갑질을 하는 일이 왜 계속 일어납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벌려고,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그런 모든 행동들을 통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내가 사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생명까지 스스로 찔러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이든 무엇이든 그쪽으로 가다가 어느 날 이런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이 갑자기 우리를 덮칠 때, 우리의 돈이 그 죽음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다급해서 이제 돈을 다 포기하고 살고 싶다고 한들, 그 광풍이 조용히 사라져주겠습니까? 우리의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학벌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겠습니까?
결국 이런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 결정을 하지 말 걸...’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주님을 붙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안심하라 (21~26절)
이렇게 죽음의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기는 사실 죽음의 풍랑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기가 뭔가 하면, 이것이 너무 힘드니까 ‘이제 끝이다’ 하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덴마크의 크리스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인 풍랑이 몰려오고 불행이 일어나는 것이 최대의 위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런 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토리는 이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1절)
지금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친 후로 며칠이 지났는데, 27절에 보면 “열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누가는 날짜를 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주 동안 이 엄청난 폭풍에 계속 시달린 겁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외칩니다.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고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먹겠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바울이 말을 하는데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볼 때 어떻게 들리는가 하면, ‘내가 뭐랬어? 거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고 들릴 수 있는데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을 면했으면 좋을 뻔했다.”라는 것은 ‘꼴좋다. 거 봐라.’ 하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내 말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말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는 돈이 자기를 살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일깨워주며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절)
우리말 “안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사실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기뻐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망이 다 사라지고 살 소망이 없으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라, 안심하라’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돈은 날렸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도 없을 것이며 돈은 살아서 다시 벌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바울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나오는데, 이때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뱃사람이고 엄청난 파도에 힘들어하며 괴로워하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안심하라! 기뻐하라!” 하고 말합니다. 그때 얼마나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는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이 상황에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들에게 경고한 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번쩍 틔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3-26절)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대단한 선언입니다.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근거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 관광을 위해서 지금 무슨 알렉산드리아 크루즈 배에 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것은, 베스도 총독의 법정에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또 로마로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고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비켜간 것이 아닙니다. 광풍이 불었는데 바울이 서 있는 곳만 조용하고 옆에만 폭풍이 몰아친 게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다 휩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이 젊은 때도 아니고 노년에 접어든 나이이며 몸도 아주 허약합니다. 그런데도 이 폭풍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넘어지고 뒹굴고 하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때만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이때는 천사를 보내어 이전에 주신 말씀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인데, 23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데, 아무리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어도 바울은 분명히 ‘나는 괜찮다. 살아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동역자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하고 있는 273명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기서 새롭게 추가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살아나서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정말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2020년이 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벌써 1월 마지막 주일로 1월이 다 갔습니다. 그럼 이제 11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예배는 매주 있고 주중에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말고 그냥 다음 주에 가지.’ ‘그 다음 주에 가지.’ ‘삶 공부는 이번에 관두고 다음에 또 있을 테니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그때까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탄 배에 엄청난 광풍인 유라굴로가 불었습니다. 꼼짝없이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주와 선장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거기에는 화물주들이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보따리 장사꾼들로서, 돈을 벌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 화물을 꽉 붙들고, 이것이 곧 돈이기 때문에 가서 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로마 군인들이 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또 백부장이 그 배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지시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죄수 바울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이지만, 그 배에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배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고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결국 276명 모두를 살린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아니,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군사력도, 육체의 강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보다 강하신 주님, 광풍도 다스리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조차도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리더십은 이제 주님을 섬기는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뒤에 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절망 속에 있던 273명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작은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이처럼 큰 유라굴로가 불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부느냐가 문제이지, 반드시 옵니다. 그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유라굴로가 불지 않고 있을 때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 주님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어떤 상황이 우리 삶에 닥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살려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풍랑을 만난 사람들
행 27장 13~20절 / 김경년목사
여러분, 요즘 개와 같이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개와 같이 달리면-개 같은 사람(놈)-ㄴ ㅗ ㅁ
*개한테 뒤처지면- 개만도 못한 사람
*그리고 개보다 앞서 달리면- 개보다 더한 사람이 된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유명한 개가 있는데 전라남도 진도에 서식하는 진돗개입니다. 진돗개는 너무나 영리하고 날렵해서 한번 물면 끝장 날 때까지 놓지 않는 끈기가 대단한 개입니다. 그런데 진돗개는 원래부터 이렇게 유명한 개가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렇게 유명한 개가 되기까지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진도 사람들이 농사일과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워낙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개한테 먹을 것을 주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진도의 개들은 스스로 먹이를 해결해야 했답니다. 진도의 개들이 주로 먹이로 삼은 것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갈매기였습니다. 개가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꽤와 날쌘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갈매기를 놓치면 굶어야 하기에 개들은 한번 물면 결코 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 유명한 진돗개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보면 한결 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이를 악물고 “내 인생에는 이것 밖에 없다”는 각오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페니에게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페니,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백화점 왕으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그러자 페니는 단 두 마디로 대답을 했답니다.
“첫째는 내가 가난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수님 때문이네.”
오늘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 우리는 더욱 훌륭한 인격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아랍 사람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햇빛만 계속 비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사막이 된다.”
우리 인생은 때로 약간의 비와 구름과 풍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풍랑 속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백부장과 여행객과 장사군 등 276명이 무역선이었던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항해전문가는 아니지만 바울이 볼 때, 이번 항해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겨울철을 지난 후 떠나자고 건의했지만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떠나도 된다는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떠났습니다. 결국 그 배는 얼마 못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풍랑을 만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지도자의 고집 때문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본문 9-11절 말씀입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보면 백부장은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다가 이런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보면 시기적으로 항해하기에 위험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리하게 항해를 강행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란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가을철의 속죄일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달력으로 추분 때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지중해 사람들은 9월 초순경부터 겨울이 지날 때까지는 항해하는 것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뱃길이 위험했고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그 배의 지도자였고, 또한 군대 장교였습니다. 그는 누구 보다가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선장은 이 배의 키를 쥐고 있는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술과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자기 기술과 재주와 기능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기술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돈으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힘도, 기술도, 돈도 없는 가난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풍랑을 만났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여러분, 고집을 피우면 결국 다 망합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을 황소고집 같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 고집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결국은 바다에 빠져 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가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고집 부리면 혼자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가 고생을 함께 합니다.
우리는 괜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고집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풍랑을 만났을 때 살기 위해서는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본문 18-1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니라.”
여기보면 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짐도 버리고, 기구들도 버렸습니다. 이제는 오직 배와 사람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적인 수단, 도구, 방법, 처방을 다 잘라 버리고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남아 있으면 그것들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한손으론 예수를 붙잡고, 한손으론 세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믿고, 석가도 믿으려 합니다. 예수도 의지하고, 세상 것들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끊고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연민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연민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말입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수아의 대답입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우리가 풍랑을 만났을 때 아직도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할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다 끊고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오직 예수님 한분만을 의지하면 풍랑 속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 23-25절 말씀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바울은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믿었습니다.
우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용하다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어떤 유명한 권력자나 도사를 찾아갑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5:4절에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누가복음 5:5절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면서 순종했을 때 친구의 배까지 가득채우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 때, 우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찬양이 나왔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 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우리나라에 어떤 탄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탄광에서 갱이 무너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갱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두 쪽으로 나뉘어 고립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출하는데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 쪽 갱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다른 쪽 갱에는 모두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한쪽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화선이 연결이 되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전화선이 없었습니다. 전화선이 연결된 쪽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살 수 있다는 음성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선이 없는 곳에는 전혀 아무런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희망도 가능성도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풍랑을 만난 배에 탄 사람들은 전혀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 때문에 함께 탄 275명이 살 것이다.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하거라. 이제는 먹을 것을 좀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하거라. 이렇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풍랑을 만나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삽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삽니다. 우리가 살 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결 론
미국의 커터 대통령이 에머리 대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기는 각성을 낳고, 각성은 참신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낳는다.”
여러분, 우리는 위기를 통해, 풍랑을 통해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더욱 창조적인 인생을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풍랑을 만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정과 나라와 민족이 풍랑을 만난 것 같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고집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와도
행 27장 13~26절 / 홍문수목사
여러분, 요즘 많이 어려우시죠? 인생이 고해(苦海)와 같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특히 요즘은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경제 불황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근심으로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삼삼오오 모이면 거의 예외 없이 어려운 경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둥,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는 둥, 내년에는 정말 어려울 것이라는 둥, 심지어 IMF 때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둥 ... 대개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마음이 점점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흔히 인생을 가리켜 바다를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만, 요즘은 항해 중에 광풍(狂風)을 만난 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렵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인생이 늘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은 잔잔한 호수에 배를 띄우고 유유히 유람하는 뱃놀이가 아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겁니다. 시시때때로 거친 광풍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혜로운 인생의 태도일까요? 몰려오는 광풍을 멀거니 바라보며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언제나 광풍이 물러갈까 지켜만 볼 게 아니라, 광풍을 어떻게 잘 헤쳐 나아갈 것인지 궁리하는 게 지혜로운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친 파도만 바라보고 불평하거나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겁니다. 부디 이 시간 말씀을 함께 상고하면서 인생의 바다에 광풍이 몰려와도 넉넉히 승리하는 지혜를 터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던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상소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가던 배가 광풍을 만납니다. 거센 회오리바람과 돌풍을 동반한 태풍이었습니다. 하도 거세서 그 배가 견디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마침내 파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죄수의 신분이었던 바울이 승객 전원을 구원해 냅니다. 분명 그 배에 선주와 선장, 선원들, 호송관인 로마 군대 백부장도 있었는데, 바울이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합니다.
[1] 인생의 유라굴로 : 예기치 못한 고난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났는데, 우리 인생에도 이런 광풍과 같은 고난이 몰려옵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닥쳐옵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14절 보시죠.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처음에는 순한 바람이 불고 항해가 순조로웠습니다. 아마 선원들도 승객들도 콧노래를 부르며 항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 갑자기 광풍이 몰려옵니다. 그 광풍의 이름이 뭐죠? 유라굴로! 직역하면 북동풍(北東風 Northeaster)이란 뜻입니다. 거센 회오리바람이죠. 허리케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런 광풍이 시시때때로 예기치 못한 순간 닥쳐옵니다.
[2] 유라굴로가 몰려오는 이유 : 교만, 욕심
그러면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몰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론적으로 말하면, “인생은 다 그런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광풍이 불어오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인간의 교만과 욕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미리 예방하고 피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만과 욕심으로 인해 광풍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① 교만 :
바울은 미리 경고했습니다. 시기적으로 겨울철인데, 항해를 강행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호송관인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르고 항해를 강행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교만이죠. 그 결과 그들은 큰 광풍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0절~11절을 봅니다.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무시한 것은 단순히 인간 바울의 말을 무시한 게 아닙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서 ‘내가 보니’라는 말은 그의 영적인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그에게 오랜 항해 경험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기도하면서 느끼는 영적 감각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만 봐도 세 번이나 파선의 위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 경고했지만 이를 무시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한 셈입니다. 백부장도 승객들도 전문가 운운하며 선장과 선주의 말을 신임했지만, 그들이 만난 것은 유라굴로 광풍이었습니다.
요즘 세계 금융 위기로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진원지가 어디입니까? 뉴욕의 월 스트리트 아닙니까? 그곳에는 세상 말로 ‘날고기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정말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들이 큰 부자가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금융 전문가들이 있나요? 얼마나 많은 경제 관료들이 있나요? 그래도 별 수 없었습니다. 며칠 전 어느 투자자문회사 회장이 자살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투자자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고, 유서를 써놓고 죽었습니다. 고객들의 원금이라도 건져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괴롭다며 자살했습니다. 한참 잘 나가는 분이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 경험, 기술 등 ... 이런 게 모두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식과 학문,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다 된 줄로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특히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점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는 혹시 알 수 있어도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요즘 점쟁이들이 다 떼돈을 벌어야 말이 되겠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교만하지 말라고, 겸손하라고! 약4:13~16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 )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는 겁니다. 벧전5:5 “ ...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은혜는 물처럼 낮은 데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결국은 망합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한 자는 반드시, 예외 없이, 기필코 망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타이태닉(Titanic))를 기억하시죠. 아마 영화로 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1912년 4월 처녀 항해 중 침몰한 영국의 호화여객선입니다. 그 사고는 약1,500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였습니다. 그때 출항하면서 스미스 선장은 이렇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타이태닉은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다!” 사실 그 당시 과학 이론으로는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대단한 배였습니다. 그래서 그 배의 별명이 ‘가라앉을 없는 배’(Unsinkable)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까지 들먹인 선장의 말은 교만한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웃으셨을 겁니다. 선장은 그 배를 가지고 최단 시간 항해 신기록을 수립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전속력을 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주친 빙산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두고두고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추호라도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② 욕심 :
또 한 가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욕심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왜 항해를 강행했었나요? 그 이유를 12절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 ” 여기서 ‘그 항구’란 ‘미항’(美港)을 가리킵니다. 그들 보기에는 이름만 아름다운 항구일 뿐, 겨울을 지내기 불편하다는 겁니다. 사실은 미항이 겨울에 지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연 조건이 풍랑을 피하는 데 아주 좋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흥 도시가 아니어서 먹고 마시고 노는 데 불편하다는 게 그들의 불만 사항이었습니다. 그래도 안전이 더 중요한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욕심 때문에 환락의 항구 도시인 뵈닉스를 선택했고, 그 결과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욕심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지나치면 하나님도 안 보입니다. 그 대신 세상의 물질과 세상의 쾌락이 신(神)이 됩니다. 그래서 골3:5 보면 탐욕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 ...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마치 이런 겁니다. 꿀벌이 꿀단지를 발견했습니다. 정신없이 꿀을 먹습니다.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 그러다가 헤어나지 못하고 꿀 속에서 질식해 죽습니다. 꿀을 좋아했는데 꿀 때문에 죽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인생도 그렇다는 겁니다. 역사가 토인비가 이런 말 했습니다. “성공한 자는 그 성공한 것으로 망한다!” 욕심의 파괴력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탄 배가 어떻게 되었나요? 20절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아무런 소망도 엇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죽기만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질려 있는 그들의 모습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지! 교만한 모습으로 욕심을 부릴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요즘 환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3] 유라굴로를 극복하는 방법 : 회개, 신뢰, 역전
그러면 이처럼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앉아서 당하면 안 되겠죠.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극복 방법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회개 :
유라굴로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라굴로 광풍 앞에 모두 벌벌 떨고 있는 아수라장 가운데 누가 나섭니까? 바울,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섭니다!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한 겁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줄을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으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얽히고설켜도 실마리를 찾으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다 해결됩니다. 호6:1 말씀 보면,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호세아 선지자가 호소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회개는 유턴(U Turn)입니다. 하나님께로 유턴하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항상 지향할, 초점을 맞추어야 할 정북향(正北向)입니다. 방행을 몰라 방황할 때, 혼돈 가운데 있을 때 정북향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조건 북극성을 찾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에게로 가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유라굴로 광풍이 앞에 있습니까? 좌고우면 할 것 없습니다. 무조건 즉시 하나님께 유턴하시기 바랍니다.
② 신뢰 :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인간인데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이 극한 상황을 극복합니까? 23절~24절 보십시오!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는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영적인 체험을 합니다. 천사가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위로하고 새 힘을 줍니다. 그리고 이제 용기백배하여 당당히 말합니다! 25절 보세요!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당당하게 그들을 향해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백부장도, 선장도, 선주도 있습니다. 별의 별 사람들, 잘난 사람들 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리더입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확신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확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강력한 확신입니다! 사43:1~2 “1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어느 크리스천 잡지(「낮은울타리」2005년 7월호)에서 대한항공 기장 출신 성도의 간증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감동적이어서 잠시 나눠봅니다. 괌(Guam)에 처음 운항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신혼 부부 61쌍을 포함해서 15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했습니다. 괌에 가까이 가면서 관제소와 교신하면 착륙 준비를 합니다. 고도를 낮추고 있는데, 갑자기 기관사가 황급한 목소리로 보고합니다. “기장님! 하이드록릭(Hydraulic)이 새고 있습니다.” 착륙 시 바퀴를 내리는 유압(油壓)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상사태 시 사용하는 보조 수동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마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되질 않습니다. 관제소에서는 주 활주로는 사용할 수 없고, 보조 활주로를 사용하되 동체 착륙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바퀴 없이 동체 착륙을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운 겁니다. 잘못하면 두 동강이 나고 승객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때마침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고 벼락이 치고 난리입니다.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때 크리스천인 기장과 기관가사 순을 잡고 기도합니다. 불신지인 부기장이 조종간을 잡고 있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평안이 밀려오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관사에게 다시 수동장치를 작동시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작동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안전하게 착륙했습니다. 그러자 관제소 사람들도 놀라고, 승무원들과 승객들도 신,불신 간에 모두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놀렸습니다. 나중에 부기장이 묻습니다. “기장님! 정말 하나님이 바퀴를 내려주신 게 맞습니까?” 기장이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지! 자네가 다 봤잖아!” 그 후 부기장은 하나님을 만났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신학 공부를 하고 교회를 개척했다는 간증입니다.
여러분!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광풍을 헤쳐나아가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③ 역전 :
어려울 때 하나님께 돌아가 신뢰하며 기도하면 역전의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왕의 상황은 인간의 잘못으로 빚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실 수 있다는 겁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납니다. 35절~37절 보시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여기 보면 완전히 바울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결수지만 백부장도 그의 말을 듣고, 모든 승객들이 그의 말을 듣게 됩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고 축사(축복기도)를 하자 그들이 편안한 마음을 음식을 먹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구원뿐 아니라, 바울의 모습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당신의 구속 사역을 아름답게 이루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행28:1~10 보면, 멜리데 섬에서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일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날씨가 추워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데, 나뭇가지 사이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독사에게 물린 사람은 죄인이라 반드시 죽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바울은 멀쩡합니다. 모두 놀라 바울을 신이라 여겼습니다. 물론 바울이 잘 설명해 줬겠죠. 그리고 추장의 부친이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안수 기도로 고쳐줍니다. 이래저래 원주민들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후 바울은 로마로 갔고 당시 세계의 심장부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다시 로마로 항해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바울이 풍랑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역전승을 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게 이뤄집니다. 시험이 와도 범위가 있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faithful)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착실히 살아가면 나중에 분명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장은 어려운 상황 같지만 하나님에 함께 해 주시면 나중에 가서 놀라운 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유행하는 청바지 이야기입니다. 청바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독일계 미국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입니다. 청바지 회사 중에 리바이스(Levi's)가 있죠. 그게 바로 이 사람이 세운 회사입니다. 그는 본래 천막 천을 만드는 업자였습니다. 1930년대 미국 서부에 골드러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손쉬운 주거지를 만들다 보니 곳곳에 천막이 세워지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 스트라우스는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군납업자가 찾아와 대형 천막 10만개 분량의 천을 납품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다고 제의합니다. 뜻밖의 큰 행운을 잡은 스트라우스는 즉시 빚을 내서 공장과 직공을 늘리고 밤낮 생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결국 3개월 만에 주문받은 전량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군납의 길이 막혀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빚 독촉에 임금 독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겠죠. 고민 고민하던 그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금광의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헤진 바지를 꿰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질긴 천으로 바지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천막 천으로 바지를 만듭니다. 이 바지가 바로 청바지입니다. 선을 보이자마자 광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역전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크리스천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시한 존 뉴우톤(John Newton)의 말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없어 벌벌 떨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십시오. 그래서 바울처럼 승리의 주인공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쓰나미 앞에서
행 27장 13~26절 / 양인순목사
지난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46분, 우리의 가장 가깝고도 먼 이웃인 일본에서 진도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곧 이어 15m에서 최고 20m가 넘는 엄청난 쓰나미가 밀려왔습니다. 그 결과 일본 동북부 지방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 파악된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일만 팔천 명을 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소중한 삶의 보금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쓰나미로 인해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되어 방사능 유출로 인한 핵공포가 일본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대비가 철저한 일본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시바타 도요 라는 99세의 할머니가 쓴 <피해를 당한 여러분께> 라는 시가 일본 열도를 감동시켰습니다.
아아 무슨 일인 걸까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저 손을 모을 뿐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도 여진이 와서 상흔이 더욱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흔에 약을 발라주고 싶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기분입니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이제 곧 100세가 될 나, 천국에 갈 날도 가까울 테지요.
그때엔 햇살이 되어 산들바람이 되어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괴로운 나날이 이어지겠지만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약해지지 마!
99세 할머니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하여 아침은 반드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해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대 재앙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왜소함을 봅니다. 인간의 절망을 봅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여 쌓아놓은 바벨탑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콧김을 날리시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크고 작은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질병의 쓰나미, 실직의 쓰나미, 부도의 쓰나미, 사고의 쓰나미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순간에, 원치 않는 방법으로 엄습합니다. 우리 인생 앞으로 밀려오는 쓰나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도 엄청난 폭풍이라는 쓰나미를 만나 죽음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사도 바울일행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체포되어 군인들의 호위 가운데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입니다. 그 배에는 27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그 배의 호송 책임자는 율리오 라는 백부장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들어서 겨울이 지난 후에 출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중해에는 겨울철에 북동풍이 불어서 태풍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출항을 감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납니다.
여기서 '광풍(anemos tuponikos)'은 '거센 회오리' 와 '돌풍'을 동반한 태풍입니다. 그리고 '유라굴로(eurakuilon)'는 ‘북동풍’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크레타 섬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2100미터의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개의 반대기류가 맞부딪칠 때 일어납니다. 유라굴로에 휩쓸리게 되면 대부분의 배는 돌풍에 의해 표류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하게 됩니다.
백부장의 선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항해의 위험성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의지했습니다.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선장과 배의 주인보다 바다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바다를 잘 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예외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유라굴로가 닥쳐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때입니다.
죄수들을 호송하는 백부장의 입장에서 죄인인 바울의 말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 선교를 위한 큰 그릇입니다. 그들도 바울에 대해서는 익히 소문을 통해서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했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선택적으로 자기 유리하게 듣고 해석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당장 손해가 오고 불편하면 그것을 거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 큰 유라굴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내가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선택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좀 더디고, 미련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는 자만이 유라굴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순풍 속에서 자만할 때 인생의 유라굴로를 만납니다.
백부장이 탄 배는 처음에는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잘 나갔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했습니다. 자기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시적인 승리가 영원한 승리는 아닙니다. 지금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이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배웠다고 자만할 것 없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가졌다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자칫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자만하다가 유라굴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쪽 변방지역에 한 늙은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말 한마리가 오랑캐 지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늙은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늙은이는 슬퍼하기는 커녕 웃으면서 이것이 오히려 좋은 일을 가져다 줄지 어떻게 아느냐고 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그 말은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늙은이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다시 그 늙은이에게 축하한다면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는 이번에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것이 오히려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시나 여러 날이 지난 후에 그의 아들이 바로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시 그 늙은이를 위로하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웃으면서 오히려 더 좋은 일을 가져올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그 일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변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전쟁이 났는데 그 동네의 온 청년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가 대부분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서 전쟁터에 나갈 수사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의 행복이 그 다음에는 다시 불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이기심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유라굴로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내가 비록 지금 경제적으로나 건강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아픔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의 자리입니다.
의기양양하던 자들이 갑작스런 유라굴로 앞에서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배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루디스 즉 큰 모래톱에 걸려 배가 깨질까봐 밧줄로 선체를 동여맸습니다. 유라굴로가 멈추지 않자 그들이 아끼던 짐들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배의 기구까지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유라굴로 앞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유라굴로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잠깐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갈수 있습니다. 잠깐은 성공한 것 같고, 올바른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를 만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빨리 손을 들고 포기해야 합니다. 좌절하거나 낙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 길이요, 유일한 대안입니다.
유라굴로 앞에선 그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구원의 소망이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을 빛을 던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죄수의 신분으로 압송중인 바울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25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고백이 바로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유라굴로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절망 속에 신음할 때 바울은 선포합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본 환상입니다. 비전입니다.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 바울의 꿈은 당시의 땅 끝인 로마의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가진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바울의 가슴은 언제나 활화산처럼 타올랐습니다. "나는 반드시 로마의 가이사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리라" "이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리라"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요 환상이요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본 사람은 결코 현실의 유라굴로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꿈이 다가왔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가 왔음을 앏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하나님의 확실한 환상을 보았고,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비록 배는 깨질지라도 생명은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중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행선한 모든 사람들을 다 선물로 주었습니다." 결코 배는 깨질지라도 생명은 죽지 않을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
리빙스턴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떠한 광풍이 몰아쳐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를 이기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는 일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주신 소원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소원을 가진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좀 어렵고 힘들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마십시오. 거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사인(sign)을 보십시오. 세상에서 절망의 자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시작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절망의 터널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사막에 강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만드십니다.
내가 지금 맞이한 광풍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지 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유라굴로를 만나 절망가운데 있다면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내게 꿈을 주신대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광풍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번 불일 듯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유라굴로를 잔잔케 하는 비결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요? 돈을 잃었거나 명예를 잃어서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절망, 즉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란 자기의 상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절망에 이르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인간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자,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는 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의 정상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안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해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도와 주시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한때 스페인 영(嶺)에 속해 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있습니다. 이 항구 도시의 해안 마지막 끝나는 곳에 큰 암석 바위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This is the end. There is nothing behind.)
그런데 1492년에 한 젊은이가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는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입니다. 15세기 말 당시는 두 차례 걸친 커다란 지진과,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면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 시킨 사람이 바로 이 콜럼버스였습니다.
오늘 이 어둡고 절망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콜롬버스처럼 새로운 희망의 항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유라굴로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는 비전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줄이 끊어진 순간, 그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줄이 뚝 끊어지는 절망의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절망은 새로운 부흥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절망은 새로운 사명에로의 출발점입니다.
금번의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살아남은 어부 10명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생을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던 이들은 조상 적부터 전해온 말이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밀려오면 깊은 바다로 나가라.’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면 빨리 육지로 피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의 조상들은 삶을 통해 경험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쓰나미 경보 발령 후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서 무사히 쓰나미를 피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유라굴로라는 쓰나미를 만날 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방법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더 깊은 은혜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장은 더 어렵고 힘들어보여도 주님 명령 따라 순종함으로 은혜의 바다로 노를 저어가면 인생의 선장되시는 주님께서 안전한 포구로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하십니까?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이렇게 고민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빛이 없는 캄캄한 밤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고독과 절망 속에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 다가오셔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99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말했듯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침은 반드시 다시 옵니다. 절망의 터널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 힘을 내! 힘을 내!
사랑의 주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벗겨주시고 새 힘을 부어주십니다.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셔서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 앞에 찬양으로 영광돌리기를 원합니다.
♬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행 27장 13~26절 / 서금석목사
믿음을 비유로 설명하는 글 중에 좋은 글이 있어 하나 소개 드리고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믿음에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소나무형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버드나무형 믿음입니다. 소나무는 높은 곳에 심겨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푸른 잎을 하늘로 뻗어 올리기 때문에, 시련과 인내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합니다. 이런 소나무는 풍상 때문에 뿌리가 깊을 수밖에 없으며, 어떠한 풍상이 있다하더라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반면, 버드나무는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잘 자라며 유독 잎줄기가 땅을 향해 늘어집니다. 이 버드나무는 뿌리가 얕아도 살아갈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바람이 불거나, 폭풍우가 몰아치면 쉽게 그 뿌리가 뽑힙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까? 소나무형 신앙입니까? 버드나무형 신앙입니까? 춘천 중앙 교회 모든 성도들은 소나무형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어려움과 인생의 풍랑 속에서 오히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신앙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미항이 겨울을 보내기에는 부적접하다고 판단하여 좀더 편안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뵈닉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유라굴로라 하는 광풍을 만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먼저, 배에 탄 4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⑴ 선장과 선원
알렉산드리아 배에서 선장과 선원은 바다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전문가였습니다. 배를 통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배를 타고 갈 시기가 지났음으로 나중에 가자"는 바울의 제안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⑵ 백부장
백부장은 당시 이 배에 있어서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가 로마 정부와의 계약 관계로 로마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백부장은 로마의 장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입장으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⑶ 선주, 물주
이 알렉산드리아 배가 곡물을 운송하며, 동시에 사람들을 태울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선주는 상당한 갑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한시간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미항이라는 조그만 항구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⑷ 마지막으로 죄수
이 배에는 바울 이외에도 다른 죄수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자유도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울에게만 제한된 자유가 주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신앙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인생의 광풍은 갑자기 불어옵니다.(13-20절)
먼저, 13절 말씀을 봅니다.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배는 출발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예견과는 달리 순풍이 불었습니다. 배는 순조롭게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64km만 더 가면 편안하고 행복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뜨기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험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생각을 안 따르기로 한 것 역시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4절 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얼마 못 되어" - 출항한지 얼마 못 되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바람은 '북동풍'으로써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바람인데, 남풍이 그레데섬의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m의 높이의 이다(Ida) 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 기류의 충돌로 발생하는 북동풍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아프리카 방향으로 밀려나가게 되어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광풍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더 위협적인 것이 있었는데, 바로 스르디스라는 바다에 있는 모래톱이었습니다. 이 스르디스라는 모래톱-모래 수렁이라고 함-에 걸리면 배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과 스르디스라는 모래톱 - 이 두 가지는 이들로써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수 십 년 배를 타고 이곳저곳 다녔다 하더라도 이런 광풍을 만났으니, 낭패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있는 힘을 다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먼저, 15절을 보니까, 배를 가만히 놔둡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광풍이 심하자, 배를 바람에 맡겼고 이러한 조치로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를 지나게 됨으로써 잠간 동안 광풍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이 그들은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아 배를 견고하게 하면서도 스르디스를 만날까봐 연장을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18절을 보니, 광풍은 다음 날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장과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계속되는 광풍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광풍은 다음날에도 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배의 기구를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기구란 여기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아무래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 것으로 보아, 침구, 테이블, 의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를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니 '저희 손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추측컨대, 이전부터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를 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돛과 돛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항해의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갖가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했습니까?
20절 말씀을 보니,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해보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어려운 순간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그렇습니다. 벌써, 미국이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최첨단 무기를 동원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계속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있으며, 대기업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기업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서 취업전선으로 나가려는 학생들도 취업자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입니다.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뿐입니까? 불치병에 걸린 부모나 자식을 보면서 때론, 본인이 그 방면에 전문가이면서도 치료할 수 없는 그런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주님 바라보세요. 우리 주님이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힘이 되어 주십니다. 문제의 해결이 되십니다. 욥이 생각나시죠?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자식들을 잃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온몸이 심한 피부병에 퍼져 고통받기까지 했습니다. 이유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어떻게 할 도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참, 억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 바라보았습니다.
욥기 23편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무슨 말입니까? 달리 말하면, 도저히 내가 힘쓸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만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아시는데, 그 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더욱 굳세게 해주신다는 이런 뜻 아닙니까?
바울의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 배의 선장과 백부장이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바라보기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분명한 위기 시대인데, 이러한 시대의 믿음의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역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계시는 그 분만을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범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2. 백부장은 죄수 바울의 말보다 선장,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사실, 백부장과 선장, 선주, 선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예기치 못했던 고통이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 이런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배를 타고 항해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겨울을 보내고자 하는 현실 안주적인 그들의 태도가 이들로 하여금 무모한 항해를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평상시와 같은 때라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래도 항해를 하는 데에는 바울보다는 선장과 선주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지금이 평안한 시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아예 항해를 통제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예요. 이런 위기의 순간에 평상시와 같은 그들의 판단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안겨 준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미항에 그냥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진정 위기의 순간에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돈 많은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돈 버는 것을 삶의 지상 목표로 삼는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힘 쎈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의지해야 합니까?
진정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의지해야 함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 움츠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 마저 골리앗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모두들 이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골리앗을 이겨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들은 있었지만, 실제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이 위기의 순간을 반전시켰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무엇으로 반전시켰습니까? 칼이었습니까? 창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물맷돌로 이 위기의 순간을 반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맷돌이 힘의 원천이었습니까? 아니지요! 물맷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의지하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간다는 그런 다윗의 믿음이 위기를 극복케 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믿음으로 나가는 자가 승리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승리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순간이 닥쳐와도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 순간에 내가 무엇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이는 인생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오스기네스'라는 유대인이 구소련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당국에 의하여 정치범으로 15년 간 투옥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면서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은밀히 예수에 대한 복음이 전해졌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부터, 언젠가는 자신의 4살 난 아들을 보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5년을 견디어 냈습니다. 마침내 그가 석방이 되었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으로 자기 아들과의 재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만났습니다. 아들을 포옹하려는 순간 자신의 아들이 가슴에 십자가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가운데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들이 지니고 있다니. 포옹을 풀고 그동안의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이제 19세가 된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뜻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니?"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말을 기대하면서 늠름하게 자라난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거 유행이예요."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희망이었습니다. 소망이었으며, 위로였습니다.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행이었을 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말씀, 십자가 능력을 붙잡을 수 있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유행으로 생각하거나, 십자가를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역사하는 음성으로 들으시길 바랍니다.
3. 위기에서 '안심하라' 선언하는 바울을 봅시다(21-26)
여러 날 동안 광풍과 싸우느라 모든 사람들은 지쳐있었습니다. 2
말씀을 보니, 벌써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1절을 보니,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처지가 되자,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러분, 바울의 이 말은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내어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자신의 옳은 판단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은 전합니다. 22-26절을 봅니다.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5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먼저, 바울은 사람들은 안정시킵니다. 폭풍 속에서 두려움과 허기짐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을 전합니다. "안심하라" 사실 지금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풍랑이나 허기짐보다 오히려 삶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불안을 제거시키기 위해 배는 잃게 되겠지만, 생명은 그 누구 하나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해준 것도 있었지만, 바울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이런 풍랑에도 죽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을 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찌 이 위험한 상황에 아무 일 없는 듯이 태연할 수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바울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하나님은 다시 한번 바울에게 약속을 확인시킴으로써 더 굳건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통로가 열려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과 채널이 맞춰져 있으십니까? 주파수를 맞추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항상 그분의 말씀에 주파수를 고정시키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삼성 전자 휴대폰 이름이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삼성 전자를 홍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름이 뭡니까? Anycall 무슨 의미입니까? 어느 환경 속에서도 통화가 된다는 뜻 아닙니까? 전화가 통화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Anypray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또 전화가 언제 어디서든지 통화된다면, 성도의 신앙은 Anybible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느 때나 말씀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항상 하나님과 교통함이 있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음성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위기의 순간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위태롭다고 걱정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살리세요. 춥다고 움츠려들지 마세요. 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살아나야 우리의 신앙이 살아나고, 우리의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의 속회가 살아나고, 우리의 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실로, 오늘의 세대가 이러한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부름입니다.
이 시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꿈을 꾸고 비전을 품고 나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했던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립니다. 연장을 버리고 짐을 버리고 기구를 버립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그들을 이 위기 순간에 안심시킬 수도 없었고 헤쳐 나가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순간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바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성도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귀 기울이세요. 그래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의 광풍을 맞고 있습니다. 뚫고 나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기고 나갈 수 있는 성도뿐입니다. 우리 춘천 중앙 교회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음성을 듣고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게 하는데 도구로 쓰임 받았던 바울처럼,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시대를 구하는데 귀히 쓰임받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