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박정희 그리고 윤석열의 '영빈관'
다음 달 10일 취임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신라호텔(호텔신라) 영빈관에서 취임식 만찬을 진행한다.
만찬에 소요되는 비용이 33억 원을 넘는다고 한다.
파티 비용만큼이나 관심을 끄는 것은 이곳이 한때 국립 영빈관이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 표기되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였다는 사실이다.
안중근 의거 23주년인 1932년 10월 26일 발행된 <동아일보> 1면 좌상단 기사는
"천황폐하께옵서 박문사에 하사하옵신 향로는 26일 오전 9시 총독부에서
전달하기로 되얏다"라며 "박문사 낙성식 입불식(入佛式)은
26일 오전 10시에 거행하기로 되얏다"고 보도했다.
그해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천장절로 불리는 히로히토 생일 축하연에 폭탄을 던졌다.
그런 일이 있었던 해의 10월 26일에 안중근 의거를 지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고자 박문사 준공식을 거행하고 일왕의 향로가 들어가고 불상이 들어갔던 것이다.
바로 이 장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파티를 하게 된다.
조선왕조의 혼을 말살시키려 했던 일제
서울 남산 동북쪽 기슭에 박문사가 세워진 데는 크게 두 가지 인연이 작용했다.
하나는 죽음과 관련된 인연의 끈이다. 이곳은 소의문(남소문)과 더불어,
한양 안에서 밖으로 시신을 내가는 통로였던 광희문(서소문)과 가깝다.
광희문은 그런 이유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시구문인 광희문 바깥에는 공동묘지가 많았다.
이는 이 지역에 무녀촌이 형성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무녀촌이 있던 곳은 지금은 새로울 '신'을 써서 신당동(新堂洞)으로 표기되지만
조선시대에는 귀신 '신'을 써서 신(神)당동으로 표기됐다.
그런 배경으로 인해 이 지역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이는 고종이 이곳에 장충단을 세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1895년 을미사변 때
희생된 홍계훈 등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양력으로 1900년(고종 37년) 10월 27일 자 <고종실록>은
"임금의 일(王事)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며
장충단 설립 배경을 설명한다.
장충단은 한국 왕에게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이랬던 곳이 1932년 10월 26일 일왕의 충신을 추모하는 박문사로 변질됐던 것이다.
그 자리에 박문사가 세워지도록 추동한 또 다른 인연은
'일본'이라는 키워드와 관련이 있다.
일본인들이 장충단을 박문사로 변질시킨 것은 조선왕조의 혼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 지역 자체에 대한 집착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일본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곳이다.
서울특별시사(史)편찬위원회가 펴낸 <시민을 위한 서울역사 2000년>은
남산과 일본인들의 인연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조선 정부는 이곳에 동평관을 세우고 일본 사신을 접대했다"며
"이에 따라 왜관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이어 "일본의 무고한 침략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의 서울 출입을 금지했다"고 덧붙인다.
그런 상황이 뒤집힌 것은 1876년이다.
그해에 일본이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통해 조선 시장을 강제 개방시켰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남산은 다시 왜식 복장이 넘쳐나는 곳으로 변모했다.
위 책은 "그리하여 남산 기슭은 어느덧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변해갔다"며
"일본인들은 1898년에 벌써 남산 중턱에 경성신사를 세웠다"고 설명한다.
장충단은 그런 일본인들의 포위를 받았다.
일본인 주거지와 함께 일본 신앙이 자리를 확대되는 이곳에서,
한국 임금의 충신들을 추모하는 제단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결국 이곳은 일왕의 충신을 추모하면서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다짐하는 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인들과 연(緣)이 닿아 있었다는 점이
이 같은 박문사의 출현에 영향을 줬다.
장충단이 박문사로 개조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고약한 심리도 함께 드러났다.
조선 궁궐에 있었던 상징적 시설을 훼손해 이곳으로 옮겨뒀던 것이다.
2006년에 <건축과 사회>에 실린 안창모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반공과 전통 이데올로기의 보루; 장충동'은 박문사 건축 과정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을 이렇게 서술한다.
*"본당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조의 일본식 사찰로 지어졌지만,
박문사 내에는 조선의 전통 건축이 함께 있었다.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경희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가장 완벽하게 훼철되었고, 그 정문이었던 흥화문이 옮겨져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
그 밖의 조선식 한옥 건물은 훼철된 경복궁에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희궁에서 왕이 생겨날 기운이 있다는 것은 일본의 지배에 맞서는 기운이
거기서 생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경희궁을 훼손하는 기회에 그 정문을 떼어다
박문사 정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 내의 건물을 떼어다 박문사 건축에 사용하는 일도 벌어졌다.
박정희는 왜 영빈관을 팔았나
해방 14년 뒤인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에 외국 국빈을 위한 영빈관을 건축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에 쫓겨났고 공사는 중단됐다.
영빈관이 완공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7년이다.
그런데 박 정권은 이곳을 오래 지키지 못했다.
6년 뒤인 1973년에 삼성그룹에 매각했다.
그해 8월 16일 자 <매일경제> '국유재산 매각 업무에 활기'는
"7월 6일에는 28억 원짜리 영빈관을 남산세무서가 매각 처분"했다고 보도했다.
박 정권이 영빈관을 매각한 표면상이 이유는 경영난이다.
하지만 민간 기업도 아니고 국가가 국빈 접대 장소를 그런 이유로 매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정보부와 군대를 앞세워 폭정을 자행한 박 정권이 그런 이유로
국립 영빈관을 매도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박 정권의 부패상을 분석한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3년 무렵에
박 정권이 봉착한 어려움을 설명한다.
도널드 프레이저가 위원장인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에 발간한, 정식 명칭이 <한미관계 보고서>인 이 책 제4장은
1972년에 전대미문의 독재체제인 유신체제를 선포한 박정희가 군부와
야당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목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 가지 명백한 의문은,
왜 박정희는 임의로 사용할 비밀자금들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후락의 아들에 따르면, 대통령은 큰일을 당한 야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지자들에게도 지불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한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과정에서 때때로 정부를 대신해서
활동했던 한 한국인 기업가는 1973년에 야당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실질적으로
지불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가 언급하기를,
최근보다는 1970년대 초까지도 대통령은 군부 배신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서
육군의 핵심 지휘관들을 매수했고 개인적 기여보다 더 관대하게
지불했다고 보고되었다."
유신체제를 끌어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1973년 당시의 박정희가
야당과 군부에 돈을 많이 뿌렸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위해 일한 것보다 훨씬 많은 대가가 치러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영빈관 매각을 보도한 위의 1973년 <매일경제> 기사의 제목이
'국유재산 매각 업무에 활기'가 된 이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지난 100년간 한민족이 겪은 불행의 중심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박문사 터는
우리 국민들의 처분에 맡겨졌어야 마땅하다.
이런 곳이 이승만 정권의 결단에 따라 외국 손님 접대 장소가 되고
박정희 정권의 필요에 따라 민간 기업에 넘겨진 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다가오는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게 된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