因緣＜제3편 세상꽃＞ ⑥ 고추금줄-10

[백마강]

장편소설

因緣

<제3편 세상꽃>

⑥ 고추금줄-10

 그녀는 메마른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듯이 하더니, 옅은 한숨처럼 말을 토하여내었다.

“서울마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녀는 말꼬리를 추스르지는 못하였으나, 경산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기여 여덟 번째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산은 했지요?”

“예!”

경산이 넌지시 묻자, 그녀는 파리가 나래치는 소리만큼이나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건성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꼭두새벽에 산기가 일어나 허리가 뒤틀리는데, 장찬지는 허둥지둥 불을 켜놓고 해산구완을 맡았다. 이제껏 딸 일곱을 낳을 적마다 바깥마당 우물안집 버들댁이 받아내었는데, 그는 딸이 되었든지, 아들이 되었든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 핏덩이를 손수 받아서 따뜻한 물에 씻어서 안기어주었다.

그러더니, 또 먼동이 트이자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새끼줄을 두어 발이나 꼬아놓더니 생청솔가지를 꺾어다가 숯등걸과 함께 새끼에 꿰고는, 그것을 대문 앞에 매달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한 남편의 꾸물거리는 모습을 거실의 유리창을 통하여 내어다보던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아픔이 왔고, 그로 하여금 눈망울이 젖어들었다. 두리의 친정격인 최 부령네 집의 중문 밖 은행나무아래에서 또는 언덕너머 우물터에서 만나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뜨거운 사랑에 숨이 막히었는데, 그러한 젊은 날의 꿈이 한낱 끝내는 이러한 비애로 검은 장막을 두르는가 싶었다.

무정한 세월 속에서 쇠털처럼 수많은 나날을 두고 씨 없는 열매만을 주렁주렁 맺히어놓고서 허화(虛花)를 바라보는 죄책감이란 마치 천형사리라도 하는 듯이 형극에 찔리는 아픔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리게 하였다.

골뜸댁이 이러한 우울한 생각에 잠기었는데, 경산이 입을 열었다.

“모두 잊고, 앞으론 내 말을 잘 들어야하오.”

경산이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일렀다.

“예, 서울마나님. 어쩜 좋겠어유?”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제 와서는 믿느니 경산 밖에 없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뜰에 석류나무는 잘 자라고 있소?”

경산은 여름철에 옮기어 심었다는 석류나무가 혹시라도 말라죽었는지 몰라서 물었다.

“작은 묘목을 뿌리 다치지 않게 옮겨 심어서유. 잘 자라유.”

그녀의 혼란하던 머릿속에는 석류나무가 또렷이 떠올랐다.

“이파리에 윤기가 반들거리고 생기왕성하게 잘 키워요.”

“예, 맨날 해질녘에는 애 아빠와 번갈라 조리에 물을 주거던유.”

“음, 잘하는군요. 내외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하찮은 일이라도 부부가 정성을 쏟아야지요.”

경산은 골뜸댁이 딸을 낳고서 허탈하여진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그녀가 다른 데에로 취미를 붙이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유도하였다.

그러한 뒤에 골뜸댁은 이전과 같이 사나흘 만에 한 번씩 쌀이든 콩팥 같은 잡곡이든 한두 말씩 머리에 이고 와서 손님이 없을 때에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손님이 있을 때에는 금방 가고는 하였다.

천복이도 학교가 끝나면 옥희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 가도록 그녀와 만남은 서너 번밖에 안 되었다.

천복은 그녀에게 자주 만나면 안 된다고 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녘에 유희가 소리 없이 찾아와서는 웬일인지 토방에 걸터 앉아있었다.

경산이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이 하여 쪽유리로 밖을 내어다보았는데, 어떤 계집아이가 허물어진 토방에 앉아있자 대뜸 문을 열어보았다.

“네가 누군데 거기 앉았니?”

경산이 문을 열고 묻자, 유희는 앉았던 자리에서 발딱 몸을 일으키더니, 생긋생긋이 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저, 유남이 동생여유.”

경산은 천복의 친구 유남이를 알았다.

“그런데? 네가 왜 거기 앉아있니?”

“오빠, 보고 싶어서유.”

경산은 그녀의 당돌한 대꾸에 놀라서 섬뜩함마저 느끼어지었다.

“아니, 네가....?”

유희가 오빠 보고 싶다고 하자, 경산은 그녀가 말하는 오빠가 용훈이를 말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때 뒷방에서 천복이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빠! 왜 요샌 우리 집에 안 와?”

그녀는 천복이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서 물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경산은 잠시 덩둘하니 보고만 있었다.

“숙제하느라고 바빠서 그래.”

천복이 이렇게 대꾸하자, 경산이 끼어들었다.

[대우]

유희란 아이가 당돌하고 배짱도 좋습니다 ^^*

[백마강]

유남이와는 딴판입니다. 세컨드 기질을 가진 아이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