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림사3층석탑
지정번호: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2호 지정일자: 1974년 2월 16일 소 재 지: 마산시 진북면 인곡리 규 모: 높이 300cm 재 료: 화강암 시 대: 통일신라시대
이 탑은 화강암으로 건조된 삼층석탑으로 신라 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였는데, 상 하 기단면석에는 양 우주와 1탱주를 모각하였다.
탑신은 각층에 양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 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으며 보주는 후에 끼워넣은 것이다.
1974년 주지 도각스님이 요사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면서 일부 보수를 하였는데, 현재의 높이는 3m이다.
이 탑 주변에는 석등의 대석과 당간지주 등의 석물 부재가 남아 있으며 사찰입구 약 1km 지점에는 석종형의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2.합포성지
지정번호: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3호 지정일자: 1976년 12월 20일 소 재 지: 마산시 합성동 73-4 외 규 모: 면적 1,881㎡ 시 대: 고려시대(1387년)
이 성은 경상우도 병영성으로 중국계 평지 방형성곽 형태를 보여 준다. 부원수 배극렴( 1325~1392)이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고여 우왕 4년(1378)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돌로 쌓았다.
이 성은 세종 8년(1426)에 좌우도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 병영성이 되었다가 세종12년(1430)에 고쳐 지었고, 세종 19년(1437)에 다시 분리된 후 선조 16년에 진주로 우도병영을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된 것 같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4,291척, 높이 15척, 폭 10척 7촌이었고 동에 원인문, 남에 회례문, 서에 회의문, 북에 용지문이 있었으며 성안에는 의만창, 회영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성 밖에는 호를 파고 조교를 설치하였다.
3.진해현관아 및 객사유지
지정번호: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44호 지정일자: 1985년 11월 14일 소 재 지: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규 모: 건물 4동, 유지 1개소 시 대: 조선시대
진해현 관아 및 객사는 조선 순조 32년(1822년) 진해현감 이영모가 건립하였다. 동헌은 현감이 공사업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객사는 왕의 전패를 모시고 배례하는 곳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하다.
동헌을 중심으로 군관청, 사령청 등의 부속건물이 있고, 사주문 앞에는 역대 현감의 공덕비 16기가 있다. 동헌은 1981년 9월, 1982년 7월에 각각 보수가 있었다. 객사는 정면 11칸, 측면 3칸으로 75평 규모인 솟을 지붕의 목조건물 이었으나 삼진중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중 1983년 5월 2일 불의의 화재로 불타고 기단, 주초석 등 많이 남아 있다.
3.제말장군의 묘
지정번호: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26호 지정일자: 1966년 3월 11일 소 재 지: 마산시 진동면 다구리 산66-2 시 대: 조선시대
이 묘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제말 장군의 묘다.
제말장군은 고성인으로 1567년 출생, 자는 성여요, 호는 가계로 무과에 등제하여 선조 25년(1592년) 의병장으로 웅천, 정암, 김해, 현풍, 의령, 문경 등지에서 크게 공을 세워 선조 26년(1593년) 성주목사에 제수되었고 성주 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하다 선조 26년(1593년) 장렬히 전사되었다.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 내륙에는 곽재우, 제말이라 하였다. 장군을 날아다니듯 빠르다 하여 비장군이라 일컬었으며 왜적도 장군을 두려워하여 싸우기를 피했다 한다. 현재 성주 충절사와 고성 운곡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제말장군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총부수문장을 지낸 무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홍록을 비롯한 동지 67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김해와 의령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다. 의령 정암전투 후 조정에서 파견한 김성일과 함께 각처에 흩어져 싸우는 의병을 연결하는 일을 하면서 경북 성주까지 진출했으나 이미 성주성이 점령돼 탈환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조카 홍록에게 병조판서를 추서하고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성주와 진주성에 세웠다.
정조 16년(1792)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려 쌍충사적에 기록하게 하였으며, 그의 조타 제홍록과 장군의 충의를 기리어 성주와 진주에 쌍충각을 세웠으며, 순조 12년(1812년)에 장군의 충의에 비해 미약함을 애석히 여겨 그 공이 천추에 빛나도록 충의공이란 시호를 다시 내렸다.
4.경행재
지정번호: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2호 지정일자: 1985년 11월 14일 소 재 지: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규 모: 1동 재 료: 목조와 기 시 대: 조선시대(1876년)
본 경행재는 창원지구 안동권씨문중의 문화보고였던 회계서원의 지원 격으로 1867년 3월에 건립된 건물이다.
건립초기에는 문중의 재실 겸 한학의 서숙으로 사용되었으나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경행학교는 이 지방 신식교육의 전당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이기도 하여 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하였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상해임시정부에 활동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선생과 3.1독립운동시 삼진지구의 주역이었던 백당 권영조의사를 꼽을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의한 공립보통학교 신설로 폐교 당한 이후에는 지역 행사나 강습장, 회의장 등 지역의 문화시설로 이용되어 왔다.
원래 삼량가 형식의 4반칸에 팔작기와 지붕과 우물마루를 갖추었던 본 건물은 1988년 2월의 보수공사시 누마룩 증축되어 규모가 늘었으나 외관상의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위암 장지연선생 묘
지정번호: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94호 지정일자: 1983년 12월 20일 소 재 지: 마산시 현동 631-2 규 모: 묘 2기
근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며 우국지사 장지연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고종 원년(1864)에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순소, 호는 위암이며 고종 31년(1894)에 진사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항일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었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898년 내부 주사의 관직을 남궁억, 유근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이상재, 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을 써서 일제 침략 흉계를 통박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렸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이듬해 1월 출옥한 후 4월에 윤효정, 나수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족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썼다.
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대한협회로 개편, 활동하다가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해조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그 뒤 중국 각지로 유랑하다 귀국 후 진주의 경남일보 주필이 되었으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실의에 빠져있다가 1921년 마산에서 돌아가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6.이산성지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52호 지정일자: 1981년 12월 21일 소 재 지: 마산시 회원동 산7,8 규 모: 면적 14,456㎡ 시 대: 삼한시대
이 성터는 정확히 언제 축조 되었는지 모르나, 삼한시대 변한의 조그마한 정치 세력이 마산지방에 성립되어 쌓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마산의 중심지에 솟은 낮은 야산의 정상부를 에워싼 둘레 약500m의 테뫼식 산성으로 우리나루 중부,남부지역에서 나타난 가장 이른 시기의 성볍 축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쪽으로 바다쪽을 향한 낮은 부분에 출입시설과 배수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자연지세를 이용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쪽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은 기단을 할석으로 보강한 흔적이 있다.
7.회원현성지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88호 지정일자: 2005년 12월 21일 소 재 지: 마산시 자산동 일대 규 모: 면적 18,029㎡, 고위 660m 시 대: 고려시대
이 성은 자산의 남서쪽 사면을 중심으로 축조된 포곡성이며, 토성이 성벽의 기본이다.
위치는 마산시의 가장 중심지역인 무학산의 남쪽 기슭에 돌출한 낮은 야산의 서남쪽 골짝을 둘러싼 산등성이에 있으며 남쪽은 마산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동쪽은 창원지역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이곳은 현지 주민들에 의해 자산성 환주산성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회원현의 치소였던 회원현 성지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의 건치연혁조 및 고적조.관방조에는 회원현과 신.구절도사 영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의 창원도호부지는 지금의 창원향교가 있는 창원 읍성이며, 13리 떨어진 우도병마절도사영은 현재 합성동에 있는 성지를 가리킨다.
회원고현은 부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고 절도사영보다는 서쪽으로 2리 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산에는 이 성지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곧 회원현 성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골포현,합포현,회원현치소 등 행정상의 구실과 정동행성.구절도사영 등 군사상의 구실도 겸한 유서깊은 성지이다. 이 성은 마산시의 복원계획에 의해 1998년 지표조사와 아울러 시굴이 행하여져 조사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성벽은 야산 능선을 따라 폭 430㎝, 높이 170㎝ 크기의 판축으로 된 토성이 기본인데 성벽 안팎의 부분에는 자연활석을 쌓았고 내벽 바깥쪽에는 흙이나 돌로 되메우기를 하였으며 외벽은 그대로 두었다. 성의 지형으로 보아 문지를 동서남북의 정방에 두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확실히 밝혀진 것은 북문지는 일반 성벽에 장방형(폭320㎝, 길이430㎝, 높이300㎝)의 개구부를 내고 외벽 서열에 맞추어 안쪽에 기둥을 세우고 문을 달았으나 누각과 같은 목조건물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북문지 주변의 성 밖은 해자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기와 조각인데 늦어도 고려시대 합포?회원현치소에는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8.월영대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125호 지정일자: 1993년 1월 8일 소 재 지: 마산시 해운동 8-4 시 대: 통일신라시대
이곳은 신라 말기 문창후 해운 최치원선생이 대를 쌓고 해변을 소요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조선초 초기 학자 이첨의 시에 『숲 끝에 집 짖고 월영대를 거닐었네』하였다. 이는 최치원이 산사를 두루 다니시다가 마지막 정착지로 이곳을 택하여 가족과 더불어 살다가 신라 멸망을 예견하고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셨다. 최치원선생이 돌아가시고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고려, 조선조때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게되니 이곳은 우리나라 선비의 순례지가 되었다. 고려때, 문신 정지상, 명종때 학자 김극기, 고려 충선, 충숙왕때 채홍철, 고려후기 학자 안축, 조선조때 초기의 대학자 이첨, 태종때 문신 정이오, 세조때 문신 박원경,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조때의 의사 정문부, 조선조 후기의 박사해, 손기양, 이민구, 신지혜 등이 이곳을 순례하고 남겨 놓은 명기사 『동문선』, 『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해서체로 월영대라 새겨진 입석이 있는데 최치원의 친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영대의 입석이 있는데 세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조선조 숙종 17년에 최위가 창원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이 『대』를 정화하고 『천세만세에 유린되지 말라』고 한 유허비를 동편 중앙에 세웠고, 서편에는 1930년경에 최씨 문중에서 추모비를 세워 팔작지붕 비각안에 안치하였다. 『삼국사기』『보한집』역옹패설』『신증동국여지승람』『동문선』『읍지』 등 많은 기록을 상고해 보면 그 경관이 아름답고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천여년 동안 많은 선비, 시문학에 대가들이 최고운의 학덕을 흠모하여 끊임없이 찾아준 아름다운 바닷가의 대였던 것이다.
9.봉화산 봉수대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157호 지정일자: 1997년 1월 30일 소 재 지: 마산시 회원동 산18 시 대: 고려시대
봉화산 봉수대는 무학산 줄기인 해발 265m의 봉화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 등 위급상황을 서울에 알리는 신호수단으로 쌓은 것이라 추정된다.
이곳 봉화산 봉수대는 간봉 6로로서 처음 부산 동래 다대포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진해 고산봉수대 ⇒ 이곳 봉화산봉수대 ⇒ 함안 칠서 안곡산봉수대 ⇒ 창녕 현풍소산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목멱산(남산)봉수대로 연결되었다. 봉수제도는 고려 의종 3년(1149)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주청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는 봉수령을 제정, 군사제도로 정착 되었다.
봉화방법은 밤에는 불로, 낮에는 연기로 하였으며, 신호체계는 아무 일이 없을 때는 1거,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육지에 상륙하면 5거로 했다.
이러한 신호는 즉각 오장이 각 지방 수령에게 보고하였고, 서울에서는 병조에서 관망하여 승정원에 보고, 임금께 상주 하였다.
11.가을포 봉수대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169호 지정일자: 1997년 12월 31일 소 재 지: 마산시 진동면 요장리 산60 규 모: 1개소(2,782㎡)
이 봉수대는 옛날 고성 곡산 봉수대에서 이어받아 함안 파산 봉수대를 거쳐 고령 등으로 연결 서울의 남산까지 도착되게 하여 당시로서는 위급을 알리는 전달 수단이었다.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장소로 예로부터 남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양민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침입을 관아와 조정에 알려 백성을 피난시키고 왜구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음 이 봉수대는 고성곡산 -> 가을포 -> 함안 파산 -> 고령 망산의 직봉2로와 연결되어 서울 목면산(남산)까지 봉화가 전송되었음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였으며 비나 눈이 올때는 봉수군을 이용하였음
12.호계리 공룡발자국화석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170호 지정일자: 1997년 12월 31일 소 재 지: 마산시 내서읍 호계리 산50-1 규 모: 900㎡ 시 대: 중생대 백악기 전기
구마고속도로 확.포장공사로 드러난 900㎡의 이곳 비탈 암반면에는 크고 작은 이구아나룡과에 속하는 고성룡족인 공룡 발자국 166개가 확인된다.
이들 공룡발자국 화석은 평행 또는 비스듬이 이동한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원형의 새끼공룡(지름 8cm) 발자국 화석도 발견되고 있다.
공룡발자국이 드러나 있는 이곳 지층은 약 1억년전의 중생대 백악기 전기 하양층군 함안층의 중회색 세일 암반층이다.
13. 4·3삼진의거 발원지 성구사일원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244호 지정일자: 2002년 1월 27일 소 재 지: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 394-2 규 모: 성구사 1동, 도산서당 1동, 일신재 1동, 존양재 1동, 솟을대문 1동, 내삼문 1동, 외삼문 1동 시 대: 조선시대
성구사 일원은 고려조 문화평리공 변민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순국한 변연수, 변립 부자 등 세 충신을 모신 사당과 도산서당, 일신재, 존양재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서원 철폐령 이후 1914년에 재건하였다.
특히 1919년 4월 3일 진동, 진북, 진전 일대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4.3삼진의거)사성구사 일원에서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모의한 곳을 전해지고 있다.
14.관해정
지정번호: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호 지정일자: 1983년 1월 8일 소 재 지: 마산시 교방동 237 규 모: 1동 재 료: 목조와가 시 대: 조선시대
회원서원이 있었다 하여 서원곡이라 부른다. 조선중기의 학자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의 문하생들인 장문재선생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서원은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정자만 남아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중심으로 외삼문, 관리사 등이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한강과 그의 문하생인 미수 허목의 향사를 모시고 있다.
관해정 앞에 있는 수령 440년의 은행나무는 한강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몽고정
지정번호: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82호 지정일자: 1983년 12월 20일 소 재 지: 마산시 자산동 118 규 모: 1개소 재 료: 화강암 시 대: 고려시대
고려말 충렬왕 7년(1281) 원나라 세조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동행성을 두었으나, 일본 정벌이 2차에 걸쳐 실패로 돌아간 同年 10월에 연해방비를 위해 이곳 환주산(현 자산동 무학초등학교 뒤쪽 마산시립박물관일대)에 둔진을 설치하였다.
이 몽고정은 이곳의 둔진군이 용수를 쓰기 위해 만들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정 맷돌’이라고 불리는 직격 1.4m가량의 원방형의 돌이 몽고정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차륜이라는 설도 있으나 맷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물곁의 석비에 몽고정이라 써서 세워둔 것은 1932년 마산 고적보존회(일본인 고적단체)가 멸시적 감정에서 명명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렸을 것이다.
16.고현리 공룡발자국화석
지정번호: 도지정 기념물 제105호 지정일자: 1990년 12월 20일 소 재 지: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 규 모: 540㎡ 시 대: 중생대
구파식작용으로 드러난 2,100m²의 이곳 지층면에는 조반목 조각류 이구아나룡과에 속하는 30여필이 두발로 보행하는 초식성 공룡의 발자국이 400여개가 확인된다.
고현리 공룡 발자국 화석에 의하면 공룡들의 군서생활을 알 수 있고 뒷발의 길이와 폭은 각각 35cm 및 32cm정도로 측정된다. 이곳에는 공룡발자국의 내부구조가 가장 잘 노출되어 있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사 자료로 평가된다. 공룡발자국이 산출되는 이곳 지층은 약 1억년전의 중생대 백악기 전기 하양층군 진동층의 중회색 세일이다. |
출처: 향토사 네트워크 원문보기 글쓴이: 비화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