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경우 내 집 마련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이 10년이 넘는다는 조사가 있었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집에 집착한다. 그곳이 삶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집은 말 그대로 거주하는 공간이다. 대부분 임대 형식으로 집을 갖는다. 그것은 한 군데 정착해서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농경문화의 전통과, 삶의 터전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문화의 전통의 차이다. 물론 시대는 변했고 한국인들 중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는 집단무의식의 강렬한 영향은 아직도 우리를 한 군데 정착할 수 있게 해주는 집에 집착한다. 내 집을 마련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지상에서 편히 쉴 곳이 생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필기의 내 집 마련에 대한 집착을 설명하기 전에, 달동네에서 달동네로 손수레에 허드렛짐을 가득 싣고 전전하며 셋방살이 모습의 애닯음을 보여주는 [귀신이 산다]의 오프닝 시퀀스는 매우 유효한 것이다. 박필기의 내 집 마련은 3대째 이어온 가문의 소망이었다는 것을, 즉 어떤 난관이 있어도 처음 마련한 내 집을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알려주는 극적 장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자존심을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필기는 주인집 아들을 두들겨 패서 결국 더 높은 산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
투잡스족 박필기의 내 집 마련을 위한 눈물겨운 뺑뺑이는, 낮에는 조선소 기사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이어진다. 은행대출에 융자 얹어 바닷가 전망 좋은 이층집을 사는데 성공한 그가, 문패를 달 때의 감회가 얼마나 남달랐겠는가. [귀신이 산다]의 재미는 저승과 이승을 분리된 세계로 보지 않고, 귀신과 사람 사이에 두꺼운 벽을 쌓지 않고 전개하는 생사관에 있다. [귀신이 산다]의 전반부는, 박필기의 집에 먼저 거주하고 있는 귀신 연화와 새주인 박필기의 기 싸움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식칼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공격하고 소파를 부르르 흔들어 사람을 떨어트리면 혼비백산이 나서 당장 나갔겠지만, 내 집 사수에 대한 굳은 결의로 박필기는 아예 귀신과의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영화의 중반부는 박필기가 귀신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티격태격 정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박필기의 애인까지 등장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연화와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무르익어간다. 교통사고로 생사가 불분명한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죽은 뒤에도 집을 떠나지 못하는 연화나, 3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유언인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박필기나, 그 집을 쉽게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집을 부수고 다른 건물을 지으려는 악덕 부동산 업자가 등장하면서 영화의 후반부는 박필기와 귀신 연화가 같은 편이 되어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귀신이 산다]는 매우 영리한 작품이다. 우리 곁에 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극의 전개도 그렇고, 얼핏 집요한 고집처럼 보이는 외형적 행동 뒤에 개인의 잠복된 내면적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도 그렇고, 극적 구성과 캐릭터는 서로 조응하면서 웃음의 상승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신라의 달밤]이나 [광복절 특사]를 거치면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 김상진 감독은, [귀신이 산다]에서 표피적인 웃음이 아니라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며 그 속에 잠복된 상처를 이해하는, 여운있는 웃음을 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지금 이곳의 현실은 과거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는 불교의 연기법적 발상은, 목이 잘려 죽은 닭들을 회상하면서 집안 가득 넘쳐 나는 닭씬에서 효과적으로 등장한다. 김상진표 코미디가 진화하고 있다는 징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