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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존 번연(John Bunyan)은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길의 험난함을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고 읽힌 책이라고 한다. 지난 11월 20일 금요일, 우리 중독기독신우회가 경남 함안을 거쳐 농촌 교회인 우리 덕천교회를 방문하고 드린 예배의 여정을 기록하면서 왜 천로역정을 떠올렸을까. 그리고 관련 글을 쓰면서 제목을 '천리역정(千里歷程)'으로 삼을 생각을 했을까.
우리 중동기독신우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10년 전통의 중동중고등학교 크리스찬 동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동아리 성격의 모임체이다. 각 기수별로 기독교인들이 모여 오다가 지난 해(2014년) 2월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에서 전체가 모일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만들어 준 분이 고 손양원 목사님이다. 그가 중동고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게 된 것이다. 그날 손 목사님의 명예졸업장은 큰딸 손동희 권사가 대신 받았고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공부를 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함안군 칠원면의 한 시골 마을 아이인 손양원이 어떻게 서울하고도 그 한복판에 있는 중동학교까지 가서 공부할 생각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히 추축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지방의 청년들이 민족사학으로 일컫던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민족과 나라의 독립을 생각하면서 향학열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함안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수의 그 지역 청소년들이 중동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손양원 목사님도 이런 일군의 청소년들 중 한 명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3.1만세운동 주모자로 구속되면서 손 목사는 중동학교를 1년 만에 그만 두게 되지만 중동학교에서의 공부는 그의 신앙과 특히 민족의식 고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찾고 연구하여 손 목사님을 중동 동문으로 정식 등록하고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게 된 데에는 총동문회 백강수 회장의 공이 컸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백강수 회장은 어느 신문사 인터뷰에서 "우리 중동고가 손양원 목사님에게 명예졸업장을 드렸더니 손 목사님은 우리에게 중동신우회를 만들어 주셨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다. 우리 중동기독신우회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손양원 목사님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고, 그 기념으로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또 명예졸업장을 여수 손양원순교기념관에 영구 전시하기 위하여 작년 4월 여수시장을 통해 기념관에 전달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그 뒤 함안 칠원면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기공식에 참석하고 또 당일 손 목사님의 모 교회라 할 수 있는 칠원교회를 방문해서 명예졸업장을 전달하고 왔다. 작년 10월에는 유나이티드문화재단(이사장 강덕영 동문, 58회) 주최로 여수 여울마당 공연장에서 손양원목사 추모음악회를 열어 그분의 순교 영성을 생각하며 믿음을 단련하는 기회를 삼으려 했다. 금년 6월엔 세종문화회관에서 역시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는 음악회를 열어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앙과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9월 16일 우리는 순복음강남교회 7층 외국인 예배실에 모여 정식으로 중동기독신우회를 출범시켰다. 회장으로는 중동고 직전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백강수 장로를 추대하고 느슨하게나마 골격을 갖춤으로써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각 기수 별 대표를 뽑아 그들이 회장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신우회를 이끌어 가기로 했다. 우리는 신우회 첫 행사로 지난 10월 9일 강원도 화천과 춘천 일원으로 가을 소풍을 다녀옴으로 신뢰와 친목을 굳건히 다졌다.
그러니까 이번 함안 손양원 목사 생가 및 기념관 방문은 우리 신우회가 뜬 후 두 번째 행사가 되는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체 30 여 명의 회원들이 하루의 여정을 기쁨으로 소화한 것이다. 11월 20일 일정은 오전 7시 순복음강남교회 출발-오전 11시 30분 송죽가든(칠원면 소재) 점심식사-오후 1시 기념관 도착, 예배드린 뒤 기념관 생가 관람-오후 2시 김천으로 출발-오후 4시 덕천교회 도착 예배 후 직지공원 관람-오후 5시 황간 인터식당에서 저녁식사-오후 6시 30분 서울로 출발로 잡혀 있었다.
여행을 다녀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예정된 시각에 맞춰 일정이 진행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차질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간의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차질은 각오해야 한다. 지난 우리의 함안 김천 여정도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늘여졌다. 30 여 명의 숫자로 이루어진 단체 움직임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의 지각으로 출발에서 1시간 지체되었고, 함안 기념관 현지에서도 예상 외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상세한 관람과 사진 촬영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천리역정'으로 정했다고 했다. 이것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따온 것쯤은 누구나 눈치채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확하게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서울 중심지에서 경남 함안군 칠원면 손양원기념관까지는 400여 Km에 가깝지 않나 싶다. 기념관을 거쳐 김천 덕천교회까지 셈한다면 편도 400 Km는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 Km 숫자라면 우리의 거리 단위로 천 리가 넘는 것, 그리고 '역정'은 지나온 길 정도의 뜻이다. '천리역정'이라는 제목이 여기에서 나왔다.
여행이란 게 목적지에 가서 풍취를 즐기면서 노니는 것이 주가 되지만 그것 못지않게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의 시간도 무시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우리 신우회는 간증을 곁들인 자기소개 시간으로 유익한 시간을 되새겼다. 좀 늦게 오전 8시 출발하면서 일행 중 가장 선배이신 이승환 장로님(58회)이 하루 일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로 시작했다. 이어 신우회장 백강수 장로님(64회)의 간단한 인사말과 황병직 사무총장(67회)의 일정 소개에 이어 우리는 앞자리에서부터 시작해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아무리 즐겁고 들뜬 날이라고 해도 아침 배를 채워야 하는 법. 우리는 최민식 집사(70회)가 보낸 영양떡과 감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우리 신우회의 장거리 여행 때마다 최 집사는 영양떡을 들고 오는데, 식사대용으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든다. 배가 든든하고 군것질 생각을 가시게 하니 여러 모양으로 여행을 돕는 셈이다. 앞자리에서부터 자기소개를 해 나갔다. 비슷한 내용을 갈 때마다 듣게 되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30 여 명의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모두 소개를 하니 어느덧 선산휴게소에 와 있었다. 경북 선산 땅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 온 것이다. 신앙 간증은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휘몰아가는 블랙홀이다. 그 중 단연 압권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 신우회 여정에 합류한 김경생 장로님(63회)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자기소개 시간 중간에 잘 될지 모르겠다면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 산상수훈을 암송했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 냈다. 모두들 찬탄을 금치 못했다. 강한 도전의 시간이었다.
선산휴게소를 나오는데 진해 산성교회 황홍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황 목사님은 이날 손동희 권사님을 모시고 오기로 한 사람이다. 11시가 되어 갈 즈음인데 벌써 칠원 기념관에 도착해 근처를 둘러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손 권사님 피곤하지 않으시도록 잘 돌볼 것을 부탁하며 칠원교회 구신회 장로님을 찾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구 장로님에게 바로 전화를 드렸다. 구 장로님은 손양원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부본부장을 맡아 일해 온 사람으로 기념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 일행의 기념관 관람을 안내할 것이다.
면 소재지에 있는 것 치고 꽤 큰 음식점이었다. 우리가 짐심을 해결할 곳이다. 이곳은 구 장로님이 소개한 음식점이니만큼 우리의 입맛을 충족시켜주고도 남을 것이다. 성용제 권사님(63회)의 식사기도 뒤 우리는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점심 식사에 칠원교회 최경진 목사님과 구 장로님도 함께 했다. 늘 넉넉함으로 신우회에 사랑 베풀기를 즐기는 장인수 안수집사님(67회)이 식사 값을 계산했다. 작년 우리 신우회가 칠원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는 전형적인 면 소재지의 예배당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꽤 큰 규모의 예배당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튿날(11월 21일)이 바로 입당예배 날이라고 했다. 땅 값을 제외하고 건물만 30억 공사라고 하니 대단하다. 그것도 모두 외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해결하였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음식점에서 기념관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손 목사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기념관 1층에서 예배드릴 준비를 하는데, 일행들은 기념사진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초가집 생가 마루에 마련되어 있는 손양원 목사님 좌상(坐像)을 사이에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또 우물 앞에서, 아니면 9가지 감사기도 기념표지를 배경으로 돌아가면서 단체 사진들을 촬영했다.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시구처럼 인걸의 흔적을 남기려는 몸짓으로 여겨졌다.
기념관 안에서의 예배. 내가 인도를 했다. 김경생 장로님이 기도를 했고 신진수 목사님(63회)이 빌립보 1:12-14를 본문으로 "살든지 죽든지"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손양원 목사님의 순수한 순교 영성에 대해 본받을 것을 주문하는 내용이었다. 말씀 선포 뒤의 찬양은 손양원 목사님이 작사했다는(실제로 이 노래는 손 목사님이 작사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불러 오던 것인데 손 목사님이 즐겨 부른 데서 그의 작사로까지 와전된 듯하다) '주님 고대가'를 합창했다. 6절까지 있는 노래였지만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중동기독신우회 회장 백강수 장로님의 인사말이 있었다. 상술(上述)했듯이 그는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큰 애정을 갖고 있는 분으로 손 목사님이 중동 동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표면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년 중동고 졸업식장에서 손 목사님에게 명예졸업장까지 수여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큰 역사(役事) 뒤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는 칠원교회에 우리 신우회에서 헌금을 전달하는 순서가 있었고 바로 이어 최경진 목사님의 환영사가 있었다. 그는 중동기독신우회는 손 목사님을 가교로 칠원교회와 먼 관계가 아닌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된 것 같다며 중동기독신우회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리고 기념관 관람 뒤 칠원교회도 둘러볼 것을 권했다.
손양원 목사님의 큰딸 손동희 권사님의 환영사 시간이다. 손 권사님은 감기몸살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지 못할 것을 왔다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는 가운데, 전 재산 다섯 마지기 논을 교회 건축을 위해 다 드린 아버지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패가망신 운운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손종일 장로)는 불이 나 재산을 다 날릴 수도 있고 노름으로 다 털어먹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주색잡기로 재산이 거들날 수도 있는데, 예수 믿고 교회 건축을 위해 재산을 드리면 예배당은 남지 않느냐면서 이런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고 응수했다는 얘기를 했다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기념관 관람에 나섰다. 손양원목사기념관은 부지 3,655 평방미터에 전시장, 갤러리, 카페테리아(카페만나)와 기념품 매장, 기록물 보관실, 사무실 등을 갖춘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복원된 손 목사님의 생가(30평방미터)를 포함하고 있어 성지 순례지로서 손색없는 위용을 자량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오늘날 이념으로 분열되고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 속에 용서와 화해, 평화를 상징하는 성지(聖地)로서 자리잡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장이 되며,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여가활동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할 것으로 모두 기대하고 있다고 안내를 맡은 구 장로님이 설명했다.
우리 기독신우회 임원들은 기념 표지석을 기증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념석을 세울 위치를 물색하느라 몇 곳을 둘러보았다. 일단 최경진 목사님과 구신회 장로님과 뜻을 같이 하기는 생가 앞 우물 옆 양지바른 곳을 점찍어두었다. 기념 표지석을 세우기로 하고 신우회 회원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성금을 모았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성사가 될 것이다. 어느덧 오후 3시하고도 3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가 더 지체하다가 다음 일정에 큰 차질을 불러올 수 있고 그것은 서울 도착을 마냥 늘려놓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구신회 장로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두 번째 방문지인 김천 덕천교회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면 피곤함도 사라지는 법인가. 새벽같이 나와 천리 길을 달려왔고 또 기념관 관람 등 움직임의 연속이었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뽑혀 나오는 신앙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버스가 이런 속도로 달린다면 오후 5시쯤 우리 교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기념사진을 찍자고 미리 광고를 해 두었다. 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찍어 두어야 선명도가 어느 정도 보장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5시 정각에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 입구 '덕천성결교회' 표지석을 사이에 두고 일행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표정들엔 작은 농촌 교회에서 느끼는 잔잔한 애수가 흐르고 있었다.
초라한 농촌 교회의 예배당, 한 주 전 추수감사주일을 지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단 앞에는 추수감사절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또 강단에는 감 토마토 키위 고구마에 심지어 귤까지 성도들이 정성껏 준비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나눠주고 남은 것들이다. 강단 플래카드 왼쪽 옆에는 '중동신우회 방문예배'라고 붓글씨로 써붙여 내방객들을 환영하는 마음을 표현해 놓고 있었다. 좁은 예배당 공간이지만 눈길을 받을 만한 것들은 많았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을 궤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든지, 교회 소식을 알리는 게시판, 오래 된 오르간 그리고 긴 세월을 듬뿍 간직하고 있는 교회 역사의 증인 장의자 등.
예배를 드려야 할 차례이다. 사회는 김동진 장로님(70회)이 맡아주었다. 212장 찬송을 부른 뒤 송우용 안수집사님(64회)이 후배가 담임하는 작은 농촌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자나 마음을 함께 모든 자 모두 애절함을 담은 기도였고 따라서 은혜로 돌아오게 하는 기도였다. 설교는 이상현 목사님(60회)이 맡았다. 빌 2:1-11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겸손'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님은 중동학교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말문을 튼 뒤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우리 삶을 세상 위에 세워나가자고 권면했다. 섬기는 교회를 벗어나 예배를 드릴 때 대충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서먹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으로 인한 은혜이다. 이 날 예배는 후자였음이 분명하리라.
다시 한 번 강대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행한 김 권사님이 사진사를 자처했다. 김 권사님은 손양원 목사님 막내 딸 손동연 권사님과 사돈지간이 되는 분이다. 김원하 목사님과 손동연 사모님 부부와 함께 유족을 대표해서 우리와 긴 여정에 함께 했다. 그들의 동행으로 이번 일정이 더욱 농밀한 내용과 형식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친구 양승관 집사님이 특별히 준비해준 방문 기념 볼펜과 수세미즙을 하나씩 선물로 전달 받고 가뿐하게 발걸음을 띄었다. 이젠 유명해 전국 손님을 손짓한다는 인터식당으로 갈 차례이다. 그 곳은 올갱이 전문 식당이다. 올갱이는 다슬기의 총청도 사투리이다. 올뱅이라고 부르는 데도 있는 모양인데, 인터 식당의 그 음식은 한 번 맛 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게 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미리 예약을 해둔 터라 큰 방 하나가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25명의 대식구를 손님으로 맞은 식당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곧 올갱이국이 차례차례 나왔다. 황영훈 목사님(70회)의 식사 기도로 우리는 입을 열었다. 역시 찬사의 말들이 쏟아졌다. 듣던 바대로 라며 모두들 흡족해 했다. '천리역정'으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된 탓도 없지 않았겠지만 이것보다는 맛이 뛰어난 이유가 더 컸다. 모두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 해 치웠다. 음식점에 들어가 반찬까지 바닥내며 포만감을 느끼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날 저녁 식사는 송우용 집사님이 쏜 것이다. 드러내지 않고 공궤하는 송 집사님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일일이 악수 또는 허깅을 하며 손님들은 버스에 올랐다. 갑자기 좀 슬프다는 생각이 났다. 진한 정과 사랑을 나눈 사이의 사람들과 격리되는 듯한 아쉬움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마치 20세기 초엽 우리 근대문학의 태동기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이별, 그래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그 날 밤 자정이 가까워지자 무사히 귀가하였다는 문자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감사하다고 했고 나는 더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신우회 여행이어서 특별했다는 그리고 좋았다는 후문이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감쌌다. 우리의 '천리역정'은 또 다음을 기약하며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