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키피디아에 가보니깐 임진왜란이 길게 씌여 있더라구요.
우리나라 내용보다 오히려 더 길더군요. 일본어는 거의 모르지만 한문만 알면 나머지 조사는 잘 몰라도 때려맞출수 있더라구요.
거기는 임진왜란을 '분록 및 경장年의 役'이라고 하는데 분록년(1592)과 경장년(1597)에 행해진 정벌..이라는 뜻입니다.
각설하고, 내용을 보니깐 우리 나라와 조금씩 또는 많이 어긋나는 부분들이 보이네요.
일단 처음부터 '이씨조선'으로 표기한게 맘에 안드는군요.
1. 임진년에 한성이 함락되자 민중들은 대궐과 비싼 가옥에 불을 지르고 왜군(일본어 표기도 왜군입니다)을 해방군으로 맞이했다.
2. 원래 일본군은 전국시대 풍습에 따라 농민 등 비전투원을 보호하는게 원칙이지만, 조선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군민 합동 최후의 저항을 하는 바람에 민간살상도 다수 하게 되었다.
3. 한산도 대첩을 평가절하함. 와카자키가 공을 탐내서 단독출전했고 이순신 요격작전에 말려 깨졌다. 근데 이로 일본수군이 완전 페이스가 말린건 아니고, 적극적 수군작전에서 수륙병행작전으로 방침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명량해전을 평가절하함. (실제 피해는 미미했고 조선수군이 스스로 철퇴후 전라 북부로 진영을 옮김으로써 왜군은 전투는 패배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전라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 외에도 정유재란 말기 왜성을 쌓고 대회전에서 일본군이 반격을 여러차례 시도해서 성공하는 것으로 나오네요. 다만, 쌍방 손실이 극심해 염전사상이 꽃피웠다는군요. 그후 히데요시가 뒈지자 그대로 철수..
전반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고평가가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그동안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한국측은 민족주의, 일본측은 제국주의 시대 해군 육성계획을 뒷받침하고자 이순신을 더더욱 띄워줬다는 군요.
다시 읽어보니깐 조명 연합군 vs 일본군 전투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일본군이 크게 숫자에서 우위에 있었더군요. 1차 진주성전투 3800명 대 2만, 2차 전투 3500명대 10만 --;
갑자기 쓰다 보니깐 너무 기술적이 되버렸네요
썅노무 쪽바리들
첫댓글 ..................3500VS100,000?..................
그정도 전력차이로 진 일본인은 ㅄ인증하는건가효..... 이건 뭐....
갑자기 용인 전투가 떠오르는군요...
1번과 2번은 서로 양립하기 힘든 명제같습니다만
ㅋㅋㅋㅋㅋㅋ
일본 위키피디아의 명성황후에 대한 설명도 본적있습니다. 그러나 무슨말인지 도통모릅니다.
뭐 이러니 역사라는게 ... 특정한 지식인 집단이나 국가에서 강요하는 역사 교육을 2세대만 거치게 되면 이전 세대의 역사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게 증명되는 순간이랄까요? 아무튼 역사는 절대적이 아니라는게 슬프군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왜국 위키에 뭘 기대하나요(..)
위키페디아"는 여러 사람들이 마음대로 편집 등을 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거나 정확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지요...; 레포트"등을 쓸 때도, 참고문헌으로써 위키페디아는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위키피디아는 사용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기 때문에 별로 신뢰할만한 게 못됩니다.
제가 들은바로는 왜란말에 이순신 장군의 전투들을 '휴전을 깨고 공격한 행동이었다'라고 기술한 곳도 있다더군요...
위키피디아에선 너무 제작자의 판단이(중립이 아니고)들어가 있어서 혼동하기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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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일위키에서는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썼던 전력이 있는지라 --;
헐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관군만 3500인지 모르겠으나 주민들을 모두 합하면 50000명이라 좀 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