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중간생략...
|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였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왜적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 한다.
이하생략...
...................................................................................................................................
밑의 잡기란 기록을 보자...
이순신의 부장 안위(安衛)는...명량에서 적선들과 충돌한 다음...벽파정 밑에서 혈전끝에...적선 오백여척을 격파했단다.
330척이니...그 중 133척이니...이걸 일제 역사왜곡팀이 좋아했을까...?
아님,오백여척을 일제 역사왜곡팀이 좋아했을까...?
왜 우린...오백여척이란 엄연한 우리 기록은 못 믿고...
133척이란 약소한 숫자만을 진실이라고 자기조상들 업적을 폄하를 하나 모를 일이다.
......................................................................................................................................
잡기(雜記)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
잡기(雜記) |
꿈을 기록하다. |
중간생략...
이하생략...
..................................................................................
밑의 유사(遺事)를 보자...
13척의 전선으로...벽파정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다.
왜적이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처들어 왔는데...척후선이 보고하여..기다리다가 기습하여 적이 물러갔다 한다.
그래, 우수영의 명량 앞바다로 회군했다 한다.
벽파정전투와 명량해전이 다른 것이다.
명량전투 전야에...이미 왜놈들는 한 번 뒈지게 깨진 것이다.
어쩜, 구루시마가 아닌 내도수란 왜장은 벽파정 전투에서 깨진 놈인데...
임란사가 둘을 뭉퉁그린 정황이다.
적선 33척이란 숫자도 이 벽난정 전투때의 왜놈들 박살난 전투함 숫자일 수 있는 정황이다.
정작, 명량해전은 다음날 아침일찍 부터 시작됐다 한다.
역시, 적선은 오육백척이라 명기했다.
그럼, 330척 중 133척이란 왜놈 함선의 숫자는 어쩜, 전야전의 벽란정 전투때의 숫자일 확률이 있다.
아침 조수가 항구에서 밀려나가는 때에 전투가 시작됐다 한다.
이걸 뭔 전문가란 위인들은...조수가 없을때 시작했다가...밀물로 적선들이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어쩌고 이러는데...
뭔 기본적 공부나 하고 그딴 소린지 참으로 한심하다.
그리고 좁은 울도목이고 뭐고는...벽파정 쪽이지...명량구(鳴梁口)는 밑의 기록엔 틀림없이 항구라 나온다.
우리가 아는 그 한반도 어디가 명량해전 자리가 아니란 반증이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항구입구가 명량였던 것이다.
..............................................................
유사(遺事) |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
중간생략...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回軍)하여 우수영(右水營)의 명량(鳴梁)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이하생략...
............................................................................................................................................
밑의 노량비명엔...
이순신 함대는 분명 왜놈들의 야간기습을 받았고...30여척의 왜선를 파괴했다 나온다.
아침부터 치뤄진 명량해전 이전에...이미,벽파정 야간전투에서 30여척의 왜선을 파괴하고 퇴각시켰으니...
명량해전이 임란 최고의 해전사이기 이전에...벽파정 해전도 같은 수준의 대첩으로 역사가 논했어야 정상인 격인데...
그저 명량해전의 전야전 격인 별것도 아닌 전투같이 묘사한건...
그 다음날 치뤄진 명량해전의 왜선 침몰숫자가 벽파정해전의 숫자와 같은 30여척이라면...
이는 말도 않돼는 벽파정전투의 억울함이라 하겠다.
........................................................................................................................
비명(碑銘) |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노량비명(露梁碑銘) |
중간생략...
그러자 조정이 급하게 여기어 공을 찾아서 재차 전직(前職)을 임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이하생략...
..........................................................................................................
다른 기록들엔...
조선수군은 벽파정의 좁은 수로를 의지해 있다가
왜군들의 야간 기습을 무찌르고 명량의 바다로 회군했다 하는데...
밑의 충무공 유사엔...적선 300여척이 명량을 경유해 벽파정으로 왔다 한다.
이는 명량해전 전야전인 벽파정 해전의 왜선 숫자이란 정황이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전투했고...적선은 전멸하고 우리의 13척만 온전하게 남았다 한다.
이건 또 명량대첩의 얘기다...벽파정 해전의 명량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한 전과가 덩어리째 삭제돼고...
벽파정 전투의 왜군 피해상황이 명량대첩의 대 전과에 덧씌워진 왜곡 흔적이다.
오육백여척..또는 삼백여척 중...1할 도 않돼는 30여척이 파괴됐다고...그걸 다른 해전에 비해 단연 근자에 유래가 없던 대승이라 할 수 있을까...?
......................................................................................
사실(事實) |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
중간생략...
.
이하생략...
.......................................................................................................................................................
밑의 고사본말엔...
평수가가...영남 앞바다를 다 메운 엄청난 선단 중.,..천여척의 배로 서해로 향했다 한다.
누구들 말대로 330척의 적선중 133척이 아니고...일단, 천여척의 왜선 중 오육백척이 맞단 반증이다.
젤 먼저 도착했단 적장이 뇌도수,또는 내도수(來島守)로서...
이는 구루시마도 아니요...마다시(馬多時)도 아닌...명량전 초전의 적장이거나...
그 전야전였던 벽파정해전의 왜장이란 정황같다.
그래놓고...다음 기록엔 뜬금없이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었다 했으니 말이다.
당시 왜놈들 이름은...대개 명나라인들이 왜놈들 발음을 그대로 받아 적은 음차글인데...
마다시와 구로시마...내도수는 천지차이의 발음이기에 다 다른 놈들이라 보인다.
역시, 적선 수백척 중...10여척만 탈출성공했다고 기록했다.
시중에서 논하는 숫자인 왜선 330척 중...33척만 침몰했다면...300백여척 대부분이 탈출한 건데...
이 사서들엔...십여척 밖엔 탈출 못 했다하니...실은 최소 300여척이 몽땅 수장됀 전투란 반증도 나온다.
역시, 뇌도수나 구루시마가 아닌...마다시가 적장으로 나올땐...적선은 한결같이 오육백척으로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중의 설대로 밀물때가 아닌...아침 썰물때...유속을 이용해 적선에 돌진했고...
시중의 설은..한결같이 조선군은 근접전 (칼싸움)이 안돼 멀리서 포사격으로 적선을 물리치는 전법만 사용했다 하나...
분명 근접 백병전이 묘사됐단 점이니...조선군이 왜군들에게 칼사움에 압도적으로 밀렸단 소리도...
해 봐야 경상도 정부군 병력들 얘기거나 왜놈들이 지어낸 개수작일 수 있다.
적선들이 수십겹 포위하며 근접할 때 까지 전의를 상실한듯 가만히 있던 이순신선단이...
아침 썰물과 함께 부는 뒷바람을 이용해...일제히 화공을 벌여 적들을 바베큐를 만들고...
기어 오르는 적들을 쏘고 찌르고 베고 하는 백병전을 했다 돼어있다.
왜놈들의 임란기록화에도 다 나와있는데...
왜 누군가들은 우리 조상들을 난쟁이 왜노들에게 칼싸움에 상대가 안돼어
저리가...무서워...이래...소극적으로 포만 디립다 쏘며 해전을 했다고 요설을 퍼트리나 모를 일이다...?
...............................................................................................
밑의 고사본말 기록엔...
적장은 내도수가 아닌 뇌도수로 나오고...역시,적장 수가가 천여척의 배로 서해를 처들어 갔다 한다.
고로, 뇌도수는 천여척의 수가의 서해함단 중 전위대 장수일 뿐인 것이다.
역시, 적선은 수백척 중...단 10여척만 탈출했다 기록했다.
그러면서 다시 적장을 뇌도수가 아닌 마타시라고 적시한다...?
두 전투는 다른 전투며...두 놈은 다른 놈이란 얘기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의 명장으로 소문난 놈이라 조선인들이 걱정이 많았다 하고...
역시, 오육백척으로 바다를 뒤덮으며 처들어 왔다 한다.
그 중 10여척만 탈출했다했으니...최소한 오백척의 왜선이 모조리 이순신에 당했단 얘기가 됀다...?
30여척의 왜선 침몰은...
아침 썰물때 시작됀 전초전에서 이미 박살난 왜선 숫자고...이후 내내 혈전이 벌어져서...
해 저물녁에야 전투가 끝나고 ..조선의 13척은 말짱했는데...왜선들은 전멸했다 나오니...명량해전의 왜선 침몰수 33척이란 숫자는...초전이나 전야전인 벽란정 해전의 왜선 침몰 숫자를 이를 뿐...
실상은 왜선 오육백척 전멸이란 전무후무한 기적적 대승이란 반증이다.
그래, 후대에 왜놈들이 이순신을 해신(海神)으로 받들어 모신 것이다.
..........................................................................................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이순신 진도(珍島)에서 이기다 |
............................................................................................................................................
밑의 재조번방지의 기록에도...
엄연히 명량해전 전야의 벽파정 해전을 명시하고 있다.
달밤에...달그림자의 어두운 곳을 이용해 조선함단에 접근한 왜선을...
이순신함대가 일제히 화포공격으로 물리쳤다 하니...
적이 포위해 근접한 사이에 일제히 바람방향을 이용해 적선에 불을 놓았단 명량대첩기록은...
전야전인 벽파전해전과 뭉퉁그려진...주요내용 삭제를 거친 기록이란 정황이고...
정작,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됀 명량해전에선...
썰물을 이용한 안위선박의 단독 질주의 충돌전을 시작으로 이순신 함대가 안위를 돕는 형국으로 초전이 치뤄지고...
포격전과 육박전이 혼재한 혈전으로...초전부터 적선 31척을 박살냈다 나온다...
그럼. 이후의 오후내내 치뤄진 긴긴 혈전에선...
조선 수군은 왜선을 갸오 2척 밖엔 침몰시키지도 못하고...오백여척의 적선들을 패주시켰단 얘긴데...
그럼, 돌아간 왜선의 숫자는 오백여척이거나...시중의 설대로 300여척이 돼야지...아님,최소한 백여척이 돼야지...
왜 달랑 10여척밖엔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했던 것인가...?
..........................................................................................................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
중간생략...
이순신이 혼자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기되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달빛이 낮과 같은데 이순신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옆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하여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를 앞에 불러놓고 말하기를,
이하생략...
...................................................................................
밑의 선조실록을 보자...
명량 앞바다가 아닌 벽파정 앞바다라 나오고...
적선 20여척을 대포로 깨고...8명의 왜군 머리를 베었다 한다.
다시, 적장 마다시 전선의 지휘로 우리 함선을 적선들이 교대로 포위 공격하자...
11척의 적선을 또 파괴하니 적이 물러갔다 하고...항왜(항복한 왜놈)출신이 저기 저 홍기를 단 전함의 장수가 마타시라고 얘기했단다.
그런데 그 다음 얘긴 없고...마타시의 목을 잘랏단 말도 없고 적이 물러가다고만 하고...
작은 승리로 적이 당분간 서해에 못 들어 올 것이라 했다.
전체적 맥락에선...명량대첩이 아닌...그 전야전인 벽파정 해전을 논한 대목같다.
......................................................................................
| ||||
11월10일 (정유) | ||||
중간생략... 근래 또 배신 겸 삼도 수군 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永登萬戶)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다. 노획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금의(錦衣)·칠함(漆函)·칠목기(漆木器)와 장창(長槍) 두 자루다.’ 하였는데, 이미 절차대로 자보(咨報)하고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앞서의 연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
이하생략...
...........................................................................................................................
왜놈들은...명량해전에서 숨진 적장은 구루시마라 하고...그는 별것도 아닌 다이묘라 하고...
그의 다른 이름이 마타시라 우기지만...
내 보기엔...마다시란 왜장은...밑에 나오는 동래지역에 진을 친 "공가와마다시지"란 왜놈이 아닐지 싶다.
왜놈들은...그리도 디테일허게 임란사를 잘 보존했다면서도...
정작, 밑의 저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공가와마다시지"란 놈이 누군지 모른다니...더 냄세가 진동한다.
................................................................................................................................
| ||||
2월10일 (계축) | ||||
중간생략...
‘왜적이 당초 나올 때에는 도합 35만 명이었다. 35만 명을 여덟 갈래로 나누어 가지고 들어와서 각각 한 도씩을 점령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숫자도 25만 명인데 좌·우도에 25진영을 설치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중간생략...
죽도(竹島)에는 강강노가미(江江老加未), 감동포(甘同浦)에는 야랑가와(也郞加臥), 가덕(加德)에는 지범지(之凡之), 안골포(安骨浦)에는 달삼부로(達三部老),(月三郞), 웅포(熊浦)에는 행장(行長), 제포(薺浦)에는 평의지(平義智), 거제(巨濟)에는 아원로가미(阿元老可未), 또 거제에는 표간곤로가미(豹干昆老加未), 영등포(永登浦)에는 사야모은로다유우(沙也毛隱老多有雨), 기장(機張)에는 가인로가미(可仁老加未), 동래(東萊)에는 공가와마다시지(共加臥馬多時之), 임랑포(林郞浦)에는 다가화시구로(多加和時舊老), 서생포(西生浦)에는 청정(淸正), 부산(釜山)에는 아긴노산소우(阿緊奴山小于), 울산(蔚山)에는 모리유긴로가미(毛里有緊老加未)입니다.
이하생략...
........................................................................................................................................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공히... 일제가 우리 조선사를 왜곡했을 거라하는덴 일치한다. 그럼, 아주 당연히... 일제의 치부인 임진란시기 패전기록에 대해선 철저한 왜곡이 가해졌을 것이기에... 명량해전 같은 왜놈들의 치욕사는...뭉텅뭉텅 삭제돼고 수정됐을게 뻔하단건 상식이겠다.
좀 안다는 분들은... 이순신장군의 자필기록인 난중일기만은 왜곡할 수 없었으며...거기에도 다..왜선은 330척 중 133척이 출전했고.... 단 33척이 파괴됐다 나왔으니... |
명량해전은... 조선 함선의 상대적 열세에서 이룬 승전이기에 가장 큰 승전이라 하는 것이지...
실상은 여타 해전들에 비하면 오히려 왜선의 파괴숫자는 적으며...손실도 크지 않았던 전쟁인데...
애국애족적 민족주의에 휩싸인 한국인들이 이순신이란 영웅을 너무 두각시키기에 바빠...
냉정하고 객관적인 실록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환타지의 명량해전을 역사라고 우기는 것이란 전문가 나발탱이가 오늘 테레비젼에 나와 주절대던데...
그 무책임한 주댕이를 뺀찌로 잡아 뜯어버리고픈 충동이 솟꾸치더라.
이순신의 자필기록이란 난중일기 역시..조선사 편수위원회에서 재 편집해 인쇄본을 발간했었고...
자필기록이란 원본기록도 실상은 중요 대목들에선 삭재와 수정의 흔적이 널널허고...
특히, 명량해전 부분에선 원본 자필기록이 두개나 존재한단 웃끼는 현실이고 보면...
난중일기야 말로 일제의 임진란사 왜곡의 최고 타켓였었다고 보는게 더 객관적이라 하겠다.
다시 종합정리하자면...
왜놈들과 친일파들이 왜곡한 조선역사 중...가장 핵심인 ...왜놈들과 이순신과의 해전 참패기록들 중...
뭉텅뭉텅 삭제하고 짜집기한 와중에서도 놓친 부분들을 재 조합하면 이런 기록이 나오게 됀다.
왜놈들은...
임란의 유일한 미 정복지였던 호남과 호서(충청)의 치욕을 갑으려...
정유재란기엔 최정예를 호남과 호서로 배치하여...
충청과 호남을 초토화시키며 학살과 싸이코적 강간,약탈등으로 유린하고...
포로들을 대거 열도로 이송해..군사 고문단인 네델란드 폴투갈등의 양키들에게도 팔아먹었는데...
그 당시 순천일대 영남 포구에만 정박한 왜선의 숫자는 수천척이었으며...
이 중 평수가의 전투함 천여척이 이순신의 조선 서해 수군을 치러 들어왔고...그 수군수장은 마다시로...
왜놈 수군의 명장이다.
전함 13척과 소형 첩보선30여척이 전부인 조선 수군은...
절대적인 숫적 열세를 감안해...좁은 수로인 벽파정 인근의 물살이 빠른 해협에 진을 쳤는데...
명량대첩 전날밤에 왜놈들은 뇌도수를 수장으로 하는 선발대 330척 중...먼저 130여척을 ...
달빛이 비치지 않는 그림자지역으로 비밀리 침투시켜 조선 수군을 야습하는데...
이를 예견한 이순신은...첩보선들을 보내 적의 야습에 대비하곤...
적들이 조선함대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포위망을 좁히며 근접했을 시기...일기에 포사격과 화공을 펼쳐...
순식간에 적선 20여척을 수장시키고...다시 적의 본대인 마다시의 함대와 격전을 치뤄...11척의 적선을 수장시키면선...적선들은 퇴각했던 것이고...선발장인 뇌도수의 목아지가 조선수군 돛대에 계양됀다.
이때 항복한 왜군출신 조선군이...
저기 저 적기를 단 배가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의 배라고 힌트를 준다.
개망신을 당한 왜군은..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대대적인 보복전에 돌입하는데...
이순신은 벽파정 해협에서 철수해...명량 큰바다에 진을 치고...
항구쪽엔 뒤로 조선 피란민들의 피난선을 전투함으로 위장한 위장전함 100여척을 배피해 적을 혼동시키고...
11척의 이순신 선단이 마치 대 함단의 일부 전위함대인양 배치하는데...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한 왜선들이 눈치를 체고...
이순신의 함단을 수십겹으로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는데...
안위의 배등...조선 수군함정 2척이...너무도 엄청난 왜선들의 숫자에 얼이 나가서....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오질 못할때...
이순신이 전령에게 명하여...안위의 목을 잘라오라 엄포를 놓으면서...
놀란 안위가 죽기살기로 적선에 돌진하는데...마침 아침 썰물 때고 뒷바람까지 불어,,,
쏜살같이 적중으로 충돌해 버리면서...왜선들에 포위당해 백병전을 치뤘고...
이순신의 나머지 선단이 이를 구하겠단 형국으로 뒤를 연이어 따르게 돼고,,,
상대적으로 조악한 왜선에 단단한 판옥선을 드리받게 만드는 충돌전술과 포사격과 백병전 끝에...
전초전에 이미 31척의 왜선을 박살내고...
왜선들이 기세가 꺽여 주춤하는 사이...조선 수군은 일제히 포사격과 화살공격으로 왜선단을 유린하는데...
아침 새벽부터 시작됀 전투가...점심을 지나 저녁 해질무렵까지 혈전을 치루고...
적선은 전멸해서 10여척만 달아났으며...
나머지 오육백여척의 왜선들과 거기에 탓던 왜놈들은 전멸했기에...
왜군 서해함단의 1000여척 중,,,그 반수가 넘는 오육백이 박살났기에...
나머지 사오백척으로 이순신의 서해함대를 이길 자신이 없서...
이후론 서해에는 절대적으로 왜의 수군이 날치지를 못햇던 이유다.
명량대첩의 왜군함대숫자 330척...전초함대 133척...이건 뇌도수의 함대이고...
실상은 평수가의 서해함대가 전선만 1000여척...그 중 마다시의 정예전선이 오육백여척...
적장 뇌도수는 벽파정 야습전이나 ...명량해전 전초전에...이미, 머리가 잘려 조선수군 돛대에 계양돼고...
포격전과 백병전의 혈투가 정오를 지나고 저녁때까지 이어지면서...
왜군들는 교대로 바궈가며 이순신 함단에 근접전을 감행하기를 수 차례...
수만명의 조선 피난민들이 위장 해군선박과 산위에서 이 광경의 발을 동동구르며 지켜보니...
13척의 조선 수군은 망루하나 손상이 없고...사망 2명에 부상 2명뿐인 대승이고...
왜적선은 오륙백척 중...단 10여척만 도망에 성공했다니...
오백여척이 이순신의 13척에게 박살났던..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 중반에... 적장 마다시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항왜출신 조선군이 저게 마다시 같다하고...이를 긴 갈고리로 건져 올리자.,..
항왜는 마다시가 맞다고 날리를 치고...적장 마다시는 생포돼어 온 왜놈들이 보는 바다 가운데에서 토막이 나서 다시 돛대에 계양돼는 치욕스런 역사를 남기게 됀 것이다.
이 대목에서...이순신은 반듯이 적의 간을 취했단 설을 적용하면...
이순신은 적들이 보는 앞에서 그 수장의 간을 씹었을건 뻔하다 하겠다.
이런 재 해석으로 볼 땐...
현재 흥행중인 "명량"이란 영화는...더 오바해도 무관했으며...
마지막 전투신엔...수백척의 적선이 불탄 명량에...
단 13척의 조선함대만 말짱하게 있는 명장면를 연출할 수도 있었을 거다.
|
첫댓글 영화가 축소왜곡이다! 그런 말씀 이군요 왜놈들은 지들이 백제의 후신인 일본이라고 자랑하다가 이씨 왕조 때는 중원대륙을 차지하고 일본이 조선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당시는 이왕조가 자신들이 조선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시기였으므로 이왕조를 자기들 부하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네...영화가 오바라 비판받으나...
실록들을 제대로 보면... 오히려 더 오바했어야 한단 겁니다.
@궐한 중요한 것은 해당 전투가 전체적 판세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냐는 것입니다.
직산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게 9월 7일이고 14일 남하합니다. 명량은 16일입니다. 이순신은 다음날 무안, 19일 영광, 21일 군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구루시마来島가 내도수입니다.
임진왜란부분은 특히 더 날조됐다는 가정하에 이 시기가 마침 일제 식민지시절인만큼 그들의 군국주의를 구체화시키고 정당화시키기위해 오히려 조선수군의 명장 리순신을 영웅적인 인물로 각색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위해서 왜군의 전함숫자는 부풀리고 조선수군의 숫자는 현저히 줄여서 리순신장군의 승리했다는 공식을 만들려고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원래는 전선도 많이 있었는데 이런부분을 날조했을수도 있다고 봐야죠. 결국 군국주의는 일제 식민지사관을 정당화시키기위해서 필요로 했던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제가 물러간뒤 바로 박통이 이런것들을 더욱 구체화시켜서 반도식민사관을 주입하지 않았나싶습니다.
논리적으로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같습니다.
군국주의를 합리화시키려면 조선은 당연 별볼일 없는 나라라 일제의 보호를 받아야한단 논리가 형성돼야 하니...
그 많은 전력으로도 조선의 소수병력에 깨진 지들병력숫자와 망신스런 참패역사는 축소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을 숭상하는게 왜 반도식민사관 주입이란 것인지도 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정치적 호불호로...독재자의 지극히 정상적인 조상숭배까지 뭔 음모로 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독재자가 무모에게 제사 잘 하는것도 무슨 음모로 모는 시각이라 비유하겠습니다.
단지, 박정희는 군사정권 합리화를 위해...무신의 중요성을 어필했다 보입니다.
인물 평가에 있어서 무엇이 객관적인가를 생각해 보면 : 그 전란의 전후 사정, 이순신은 어떤 정파에 속해 있던 인물인가, 자신이 쓴 일기와 그 외 다른 분이 쓴 전란기의 비교는, 반도조선논자인가, 대륙조선논자인가, 식민지시절 왜곡될 소지가 있는가등등을 따져봐야겠죠. 반도와 열도! 이 방정식이 바로 미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임나일본부설, 이 역시 결과는 왜가 패해 쫓겨간 것이죠. 이순신에 의해 왜가 대패했죠. 그렇다면 이들이 노린 것이 무엇일까? 바로 <반도조선과 열도 왜>라는 것입니다. 정한론이 무엇입니까? 당시 조선이 있었지 한국이 있었습니까? 궐한님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그 복선이 무엇인지 압니다.
내가 당시 임진란 그 중에서도, 명랑해전을 직접보지 못했으니, 후대인들이 쓴 기록으로 밖에 알 수 없으며, 궐한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충무공의 업적은 위대하다? 수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실제보다 과장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적을 가진 자가, 셋을 주고 일곱을 얻었다면 누가 승자인가요? 열도 아이들의 노림수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순진한 반도 백성님네들은 일본에서도 충무공은 위대한 장군이라고 하더라.......그럽습니다. 조선의 이순신장군은 위대하다고 일인들이 추켜세웁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난중일기, 그것은 왜 일인들의 손이 안탓을 까요? 그 중요한 것을..........만약 왜가 일본이 패전한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면 수거해 버려든가 조작하든가 했으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몇 종류는 전혀 손이 타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난중일기나 그 외 몇 종류가 원본이다라는 것은 누가 증거하고 증명하나요. 또 일제가 그것보다 더 깊숙이 숨겨논 것들도 모조리 찾아내어 훼손했는데, 심지어는 깊은 산속에 있는 사찰이나 금석문까지도 손을 댓는데, 어찌하여 충무공과 관계되는 것들은 온전하다? 또 육군 장교가 해군장교가 되어 수전(해전)을 한다? 다양한 면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런 겁니다...
일제가 다 수거해서 없앤다고 조선인민들의 성웅 이순신 이야기가 없어지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구전돼어 더욱 영웅적인 신화인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없앤다고 목적달성이 않돼니...그의 기록들을 다시 편집해 재 발행하는 겁니다.
지들 치욕스런 내용 삭제하고...참패당한 숫자 줄이고...이순신과 조선 영웅들의 위대함을 물타기하는 갈등적 요소들도 주입하고...개인적 스캔들도 섞어치기 하고...
엄청난 성웅을...좀 특별했던 장군정도로 왜곡해야 먹히지...
이미 다 각인됀 조선의 성웅 이순신의 역사를 함부로 없애거나 완전 바꿔 버린다면...역효과가 나니요...
충무공의 업적을 깍아내리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임진년 왜란은 전면전입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해전이 아닌 육전입니다. 그러나 육전에 대한 그 어떤 과정도 없으며, 오직 해전만이 태양처럼 우뚝 솟았다는 것은 무언인가 목적을 갖은 자들의 복선이 깔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호수나 강에서 수전하는 경우와 바다에서 벌어지는 해전은 엄연히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전함의 종류도 달라야겠죠. 저 판옥선을 속도를 내려면 도대체 몇 사람이 노를 저야 할까요. 넓은 바다에서.......그러나 강이나 호수에서는 장소가 제약됩니다. 왜 아이들의 것은 작고 빠릅니다. 이런 점까지 생각해야죠.
제가 찾아보니 육전도 많던데요...?
이순신의 해전같이 위대한 승전(대첩)이 많치 않아 문제지...조명을 않해 문제지...찾으면 다 있던데요...?
조선 관군은 개박살...전국 각지의 의병들은 뛰어남...이게 많이 나오고...
전체적으론 그래도 병력과 장비가 월등했던 명나라 파견군들이..이겼던 졌던 왜놈들을 가장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육전 승리의 기본 베이스였다 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 부분이 중요한데요, 일본수군은 조총이나 쏘고 배에 접근해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안택선이 접근한다 해도 판옥선보다 낮기 때문에 백병전도 힘듭니다. 화포도 견디기 힘든 구조입니다.
@스페르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어떨까요. 판옥선은 높고, 평영한 구조(직사삭형)이기 때문에 기동성에 문제가 있다. 왜선은 오늘날의 배와 같은 구조로써, 판옥선보다는 소형이며, 기동성면에는 판옥선을 능가한다. 이러한 구조를 전함들이 바다에서 전투할 경우와 강이나 호수에서 전투를 할 경우를 가정해본다? 바다는 일단 넓다. 강이나 호수는 좁고 넓지 못하다. 이런 경우에는 판옥선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화포 또 활을 이용하다가 근접할 경우 밀어붙히거나 충돌해 적선을 부숴버리는 이중효과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는 기동성과 화포의 명중율과 그 거리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문 무 이것은 한 무제가 발해에 루선이란 점함을 띄워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를 대입해 보실까요. 루선이란 전함은 바다에서 싸우는 전함이라기 보다는 강이나 호수등지에서 싸우는 전함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배가 높고, 평평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파도에 민감하게 작용한다는 점이죠. 이러한 수전에서의 전략전술은 그곳이 "바다이냐, 강이나 호수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수전을 벌인 곳이 바다냐? 강이냐? 호수냐? 이것이 우선 규명되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육전다운 육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군사는 수십만인데 다 도망가고, 산 속에 숨고, 관찰사는 왜군과 아군의 눈치만 보다가 군대를 해산시키고.........이러한 짓은 10족이 멸한 일임에도 전란이 끝난 후에도 관찰사가 되고 승진도 합니다. 원균도 배를 물속에 가라 앉히고 도주하고.......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가 무슨 신이 아닌 이상 장수가 군대를 해체하고 배를 수장시킨다........이걸 믿으라구요? 인정할 것은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그 본질을 찾아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리한 판옥선을 가지고도 당했으니 원균이 제대로 싸웠다고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페르츠 원균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죠. 우선 우리가 의문을 갖는 것은 <봉건왕조 시절에 감히 일개 장수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전함을 수장시키고........>라는 짓은 결코 할 수 없으며, 이런 생각자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봉건왕조체제하의 선비들의 정신자세입니다. 이것은 조선은 어짜피 망할 수밖에 없다는 왜곡의 산물이란 뜻이죠. 이 왜곡은 언제였을까? 당연히 후대에 목적을 가진 자들에 의해 행해진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이순신이 직접 썼다는 난중일기만이 온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죠.
오늘날과 달리 봉건왕조시절은, 외침시 출정한 장수가 병사가 적에게 패한다거나 항복했을 때,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또 군문을 이탈한 것 역시 똑같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장수가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는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의적인 곡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관찰사, 목사, 현령, 지방군의 장수등등이 군대를 해산시키고,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숨었다는 식의 기록들이 많은데, 이것은 고의적인 왜곡입니다. 만약 이들이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다면 이들은 삼족내지 9족이 몰살할 대사건입니다. 임란사를 보면 이런 사건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왕조다를 강조하는 것이죠
진주목사 김시민이 경상우병사 류숭인의 입성을 불허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페르츠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기록들이 진실을 기록했다는 전제가 된다면 당연히 논평이나 원인이나 그 이유, 연유 설명이 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 할 수록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해키 어려운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그 기록대로 남해안에 맟추려고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나 난중일기 자체가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봉건왕조시절의 여러가지 면을 종합, 분석한 후에야 가능하며, 난중일기 역시 같은 사안이라고 봅니다. 열도 아이들의 장난에 춤추는 꼭두각시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조선팔도는 그물망과 같은 철저한 체제가 자리잡고 있어 노비 한사람조차 도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죠. 임경업이 무서워 백마성을 피하여 속전속결도 남하했다?
조선사는 이렇듯 모든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은 반도조선왕조는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우리(일제)가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선조)가 백성들을 팽개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몇 사람을 데리고 도주했다? 서을 궁궐도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탓다? 그런데 도주한 선조가 다시 와서 왕노릇을 하고 백성들은 왕으로 모셨다? 왜가 무서워 도망가고 산속으로 숨은 자들이 승진하고 조정으로 가고, 관찰사가, 목사가 된다? 군대를 해산하고 도주한 자들이 병마사가 되고 도절제사가 된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증거입니다. 이런 자들은 전쟁 후 삼족이나 구족이 몰살돼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당시 광해의 인기가 아비를 위협할 정도였다는 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요. 왕이 도주했는데 누가 누굴 몰살하겠습니까. 이승만이 도주한 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니 조선 당시에도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 왜곡을 얼마나 했는진 모르나 적어도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아 명나라에 원병을 청해 가까스로 몰아낸 것만은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50년도 안 되어서 청나라에게 또 국토를 유린당했으니 300년간 산소호흡기로 연명한 나라라는 말을 부정할 수 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스페르츠 만약 "주원장의 명"이 고려의 제후국으로 탄생되었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지겠죠. 이러한 가정은 가정이 아닌 진실의 결과로 나올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고 봅니다. 이것은 "명이란 나라가 탄생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병이냐? 왕의 사신인 왕사에 의해 제후국 병사가 차출된 것이냐>하는 문제입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고려의 많은 제후중의 하나였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고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왕과 제후의 관계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청나라의 조선 침략 사건 역시 제조명이 필히 요구되는 사안입니다.
난중일기,실록이라는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쳐두고,
잡록, 잡기에 근거해 주장을 하시니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뻥튀기 많이 자시는 듯.
대표적 실록이라 무조건 다 믿어야 됀다면...일제가 검열해 잘 편집해 준 실록들대로 믿고 사십시요...
잘 알려진 대표적 사서들보다는...
잡록이나 잡기..각종 시집등이 더 신빙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
대표적인 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는 왜놈들이 반듯이 손을 댓다 보는게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닐거라고요...?
그럼, 일제는 우리 역사왜곡 않 했으니...
일제가 잘 편집 정리해 준 역사서만 과거같이 딸딸 외우며 역사찾기 할 필요 없겠습니다.
@궐한 할 말이 없군요.
좋을대로 하세요......
@찐따 예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