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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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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명량대첩은 엄청난 역사왜곡이다.
궐한 추천 0 조회 1,611 14.08.10 20:08 댓글 2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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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12 08:16

    첫댓글 영화가 축소왜곡이다! 그런 말씀 이군요 왜놈들은 지들이 백제의 후신인 일본이라고 자랑하다가 이씨 왕조 때는 중원대륙을 차지하고 일본이 조선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당시는 이왕조가 자신들이 조선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시기였으므로 이왕조를 자기들 부하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 작성자 14.08.11 19:49

    네...영화가 오바라 비판받으나...
    실록들을 제대로 보면... 오히려 더 오바했어야 한단 겁니다.

  • 14.08.17 15:45

    @궐한 중요한 것은 해당 전투가 전체적 판세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냐는 것입니다.
    직산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게 9월 7일이고 14일 남하합니다. 명량은 16일입니다. 이순신은 다음날 무안, 19일 영광, 21일 군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구루시마来島가 내도수입니다.

  • 14.08.11 16:03

    임진왜란부분은 특히 더 날조됐다는 가정하에 이 시기가 마침 일제 식민지시절인만큼 그들의 군국주의를 구체화시키고 정당화시키기위해 오히려 조선수군의 명장 리순신을 영웅적인 인물로 각색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위해서 왜군의 전함숫자는 부풀리고 조선수군의 숫자는 현저히 줄여서 리순신장군의 승리했다는 공식을 만들려고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원래는 전선도 많이 있었는데 이런부분을 날조했을수도 있다고 봐야죠. 결국 군국주의는 일제 식민지사관을 정당화시키기위해서 필요로 했던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제가 물러간뒤 바로 박통이 이런것들을 더욱 구체화시켜서 반도식민사관을 주입하지 않았나싶습니다.

  • 작성자 14.08.11 19:56

    논리적으로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같습니다.
    군국주의를 합리화시키려면 조선은 당연 별볼일 없는 나라라 일제의 보호를 받아야한단 논리가 형성돼야 하니...
    그 많은 전력으로도 조선의 소수병력에 깨진 지들병력숫자와 망신스런 참패역사는 축소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을 숭상하는게 왜 반도식민사관 주입이란 것인지도 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정치적 호불호로...독재자의 지극히 정상적인 조상숭배까지 뭔 음모로 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독재자가 무모에게 제사 잘 하는것도 무슨 음모로 모는 시각이라 비유하겠습니다.
    단지, 박정희는 군사정권 합리화를 위해...무신의 중요성을 어필했다 보입니다.

  • 14.08.11 20:22

    인물 평가에 있어서 무엇이 객관적인가를 생각해 보면 : 그 전란의 전후 사정, 이순신은 어떤 정파에 속해 있던 인물인가, 자신이 쓴 일기와 그 외 다른 분이 쓴 전란기의 비교는, 반도조선논자인가, 대륙조선논자인가, 식민지시절 왜곡될 소지가 있는가등등을 따져봐야겠죠. 반도와 열도! 이 방정식이 바로 미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임나일본부설, 이 역시 결과는 왜가 패해 쫓겨간 것이죠. 이순신에 의해 왜가 대패했죠. 그렇다면 이들이 노린 것이 무엇일까? 바로 <반도조선과 열도 왜>라는 것입니다. 정한론이 무엇입니까? 당시 조선이 있었지 한국이 있었습니까? 궐한님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그 복선이 무엇인지 압니다.

  • 14.08.11 20:29

    내가 당시 임진란 그 중에서도, 명랑해전을 직접보지 못했으니, 후대인들이 쓴 기록으로 밖에 알 수 없으며, 궐한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충무공의 업적은 위대하다? 수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실제보다 과장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적을 가진 자가, 셋을 주고 일곱을 얻었다면 누가 승자인가요? 열도 아이들의 노림수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순진한 반도 백성님네들은 일본에서도 충무공은 위대한 장군이라고 하더라.......그럽습니다. 조선의 이순신장군은 위대하다고 일인들이 추켜세웁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 14.08.11 20:37

    난중일기, 그것은 왜 일인들의 손이 안탓을 까요? 그 중요한 것을..........만약 왜가 일본이 패전한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면 수거해 버려든가 조작하든가 했으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몇 종류는 전혀 손이 타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난중일기나 그 외 몇 종류가 원본이다라는 것은 누가 증거하고 증명하나요. 또 일제가 그것보다 더 깊숙이 숨겨논 것들도 모조리 찾아내어 훼손했는데, 심지어는 깊은 산속에 있는 사찰이나 금석문까지도 손을 댓는데, 어찌하여 충무공과 관계되는 것들은 온전하다? 또 육군 장교가 해군장교가 되어 수전(해전)을 한다? 다양한 면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14.08.11 20:55

    제 생각은 이런 겁니다...
    일제가 다 수거해서 없앤다고 조선인민들의 성웅 이순신 이야기가 없어지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구전돼어 더욱 영웅적인 신화인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없앤다고 목적달성이 않돼니...그의 기록들을 다시 편집해 재 발행하는 겁니다.
    지들 치욕스런 내용 삭제하고...참패당한 숫자 줄이고...이순신과 조선 영웅들의 위대함을 물타기하는 갈등적 요소들도 주입하고...개인적 스캔들도 섞어치기 하고...
    엄청난 성웅을...좀 특별했던 장군정도로 왜곡해야 먹히지...
    이미 다 각인됀 조선의 성웅 이순신의 역사를 함부로 없애거나 완전 바꿔 버린다면...역효과가 나니요...

  • 14.08.11 20:47

    충무공의 업적을 깍아내리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임진년 왜란은 전면전입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해전이 아닌 육전입니다. 그러나 육전에 대한 그 어떤 과정도 없으며, 오직 해전만이 태양처럼 우뚝 솟았다는 것은 무언인가 목적을 갖은 자들의 복선이 깔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호수나 강에서 수전하는 경우와 바다에서 벌어지는 해전은 엄연히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전함의 종류도 달라야겠죠. 저 판옥선을 속도를 내려면 도대체 몇 사람이 노를 저야 할까요. 넓은 바다에서.......그러나 강이나 호수에서는 장소가 제약됩니다. 왜 아이들의 것은 작고 빠릅니다. 이런 점까지 생각해야죠.

  • 작성자 14.08.11 20:59

    제가 찾아보니 육전도 많던데요...?
    이순신의 해전같이 위대한 승전(대첩)이 많치 않아 문제지...조명을 않해 문제지...찾으면 다 있던데요...?
    조선 관군은 개박살...전국 각지의 의병들은 뛰어남...이게 많이 나오고...
    전체적으론 그래도 병력과 장비가 월등했던 명나라 파견군들이..이겼던 졌던 왜놈들을 가장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육전 승리의 기본 베이스였다 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합니다.

  • 14.08.17 15:55

    그 부분이 중요한데요, 일본수군은 조총이나 쏘고 배에 접근해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안택선이 접근한다 해도 판옥선보다 낮기 때문에 백병전도 힘듭니다. 화포도 견디기 힘든 구조입니다.

  • 14.08.17 21:00

    @스페르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어떨까요. 판옥선은 높고, 평영한 구조(직사삭형)이기 때문에 기동성에 문제가 있다. 왜선은 오늘날의 배와 같은 구조로써, 판옥선보다는 소형이며, 기동성면에는 판옥선을 능가한다. 이러한 구조를 전함들이 바다에서 전투할 경우와 강이나 호수에서 전투를 할 경우를 가정해본다? 바다는 일단 넓다. 강이나 호수는 좁고 넓지 못하다. 이런 경우에는 판옥선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화포 또 활을 이용하다가 근접할 경우 밀어붙히거나 충돌해 적선을 부숴버리는 이중효과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는 기동성과 화포의 명중율과 그 거리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 14.08.17 21:07

    @문 무 이것은 한 무제가 발해에 루선이란 점함을 띄워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를 대입해 보실까요. 루선이란 전함은 바다에서 싸우는 전함이라기 보다는 강이나 호수등지에서 싸우는 전함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배가 높고, 평평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파도에 민감하게 작용한다는 점이죠. 이러한 수전에서의 전략전술은 그곳이 "바다이냐, 강이나 호수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수전을 벌인 곳이 바다냐? 강이냐? 호수냐? 이것이 우선 규명되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 14.08.11 21:05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육전다운 육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군사는 수십만인데 다 도망가고, 산 속에 숨고, 관찰사는 왜군과 아군의 눈치만 보다가 군대를 해산시키고.........이러한 짓은 10족이 멸한 일임에도 전란이 끝난 후에도 관찰사가 되고 승진도 합니다. 원균도 배를 물속에 가라 앉히고 도주하고.......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가 무슨 신이 아닌 이상 장수가 군대를 해체하고 배를 수장시킨다........이걸 믿으라구요? 인정할 것은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그 본질을 찾아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 14.08.17 15:57

    앞서 언급했듯이 유리한 판옥선을 가지고도 당했으니 원균이 제대로 싸웠다고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 14.08.17 21:11

    @스페르츠 원균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죠. 우선 우리가 의문을 갖는 것은 <봉건왕조 시절에 감히 일개 장수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전함을 수장시키고........>라는 짓은 결코 할 수 없으며, 이런 생각자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봉건왕조체제하의 선비들의 정신자세입니다. 이것은 조선은 어짜피 망할 수밖에 없다는 왜곡의 산물이란 뜻이죠. 이 왜곡은 언제였을까? 당연히 후대에 목적을 가진 자들에 의해 행해진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이순신이 직접 썼다는 난중일기만이 온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죠.

  • 14.08.12 12:11

    오늘날과 달리 봉건왕조시절은, 외침시 출정한 장수가 병사가 적에게 패한다거나 항복했을 때,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또 군문을 이탈한 것 역시 똑같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장수가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는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의적인 곡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관찰사, 목사, 현령, 지방군의 장수등등이 군대를 해산시키고,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숨었다는 식의 기록들이 많은데, 이것은 고의적인 왜곡입니다. 만약 이들이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다면 이들은 삼족내지 9족이 몰살할 대사건입니다. 임란사를 보면 이런 사건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왕조다를 강조하는 것이죠

  • 14.08.17 15:59

    진주목사 김시민이 경상우병사 류숭인의 입성을 불허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14.08.17 21:13

    @스페르츠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기록들이 진실을 기록했다는 전제가 된다면 당연히 논평이나 원인이나 그 이유, 연유 설명이 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 할 수록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 14.08.12 12:16

    난중일기를 보면 이해키 어려운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그 기록대로 남해안에 맟추려고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나 난중일기 자체가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봉건왕조시절의 여러가지 면을 종합, 분석한 후에야 가능하며, 난중일기 역시 같은 사안이라고 봅니다. 열도 아이들의 장난에 춤추는 꼭두각시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조선팔도는 그물망과 같은 철저한 체제가 자리잡고 있어 노비 한사람조차 도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죠. 임경업이 무서워 백마성을 피하여 속전속결도 남하했다?

  • 14.08.12 12:25

    조선사는 이렇듯 모든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은 반도조선왕조는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우리(일제)가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선조)가 백성들을 팽개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몇 사람을 데리고 도주했다? 서을 궁궐도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탓다? 그런데 도주한 선조가 다시 와서 왕노릇을 하고 백성들은 왕으로 모셨다? 왜가 무서워 도망가고 산속으로 숨은 자들이 승진하고 조정으로 가고, 관찰사가, 목사가 된다? 군대를 해산하고 도주한 자들이 병마사가 되고 도절제사가 된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증거입니다. 이런 자들은 전쟁 후 삼족이나 구족이 몰살돼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 14.08.17 16:10

    당시 광해의 인기가 아비를 위협할 정도였다는 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요. 왕이 도주했는데 누가 누굴 몰살하겠습니까. 이승만이 도주한 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니 조선 당시에도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 왜곡을 얼마나 했는진 모르나 적어도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아 명나라에 원병을 청해 가까스로 몰아낸 것만은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50년도 안 되어서 청나라에게 또 국토를 유린당했으니 300년간 산소호흡기로 연명한 나라라는 말을 부정할 수 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 14.08.17 21:18

    @스페르츠 만약 "주원장의 명"이 고려의 제후국으로 탄생되었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지겠죠. 이러한 가정은 가정이 아닌 진실의 결과로 나올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고 봅니다. 이것은 "명이란 나라가 탄생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병이냐? 왕의 사신인 왕사에 의해 제후국 병사가 차출된 것이냐>하는 문제입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고려의 많은 제후중의 하나였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고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왕과 제후의 관계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청나라의 조선 침략 사건 역시 제조명이 필히 요구되는 사안입니다.

  • 14.08.15 12:46

    난중일기,실록이라는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쳐두고,
    잡록, 잡기에 근거해 주장을 하시니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뻥튀기 많이 자시는 듯.

  • 작성자 14.08.15 21:27

    대표적 실록이라 무조건 다 믿어야 됀다면...일제가 검열해 잘 편집해 준 실록들대로 믿고 사십시요...
    잘 알려진 대표적 사서들보다는...
    잡록이나 잡기..각종 시집등이 더 신빙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
    대표적인 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는 왜놈들이 반듯이 손을 댓다 보는게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닐거라고요...?
    그럼, 일제는 우리 역사왜곡 않 했으니...
    일제가 잘 편집 정리해 준 역사서만 과거같이 딸딸 외우며 역사찾기 할 필요 없겠습니다.

  • 14.08.16 11:39

    @궐한 할 말이 없군요.
    좋을대로 하세요......

  • 작성자 14.08.16 13:00

    @찐따 예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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