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큼 그 가능성이 큰 나라는 달리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만일 그런 기준으로 올림픽이라도 열린다면, 금메달을 딸 확률은 일본이 가장 높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서 일본만이 유일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 주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업으로 말미암아서 유일하게 핵폭탄을 맞아서 수많은 사람들(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체험해 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런 만큼, 오늘날과 같이 핵위협이 현저히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서 테러가 반복되는 악순환의 상황 속에서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만들기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일본이 나서서, “우리는 침략도 경험해 보았고, 피폭도 경험해 보았다. 그 어느 것이나 인류의 행복, 아니 자기나라 국민의 행복마저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느껴 보았다. 그러니, 전쟁이나 침략, 또는 테러 같은 일을 저지르지 말자. 우리 함께 제거해 나가자”고 한다면, 상당히 설득력이 높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이웃에 사는 일본은 전혀 그러한 길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침략과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애써 기억에서 몰아내면서 부인하고자 애쓴다. 피폭의 상처는 한쪽으로 그러한 기억의 상실이 없을 때 비로소 평화를 위해서 기능할 수 있는 하나의 동인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가해자에서 어느덧 피해자로 둔갑한 채 피폭만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평화의 허위의식마저 예리하게 지적해 내는, 그러면서 진정한 인류평화를 모색하고 있는 지식인도 적지 않다. 피폭체험만을 부각하면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글을 쓴 사람이나, 그런 글을 외국으로부터 온 유학생들에게 일어를 가르치는 데 교재로 채택해서 읽게 한 일본인 교수나 다 그런 분일 것이다.
현재 독도나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일본이 취하고 있는 태도로 인하여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분노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민간차원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아야 한다. 다만, 수년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과의 민간차원의 문화교류까지 단절하거나 취소해서는 안 된다. 예정된 대로 체육경기도 하고, 학생들 교환방문도 실시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전쟁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화와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의 증진 밖에는 문제해결책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그러한 일본인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을 그 내부에서 해줄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4년 전, 역사교과서가 왜곡 출판되었으나 실제로 학교현장에서 채택되어서 사용된 경우는 채 1%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의 대응방향을 시사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일본이라는 화두’를 풀기 위하여 불교계는 얼마나 노력했던 것일까? 그 노력은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불교계와 우리 불교계의 교류는 매우 국지적이며, 그다지 양국 불교계에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학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루어지는 공동의 학술행사조차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 상호이해를 위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할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게 된다. 우리가 우리 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일본학자가 일본의 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말하는 한, 우리들의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는 일본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일본은 우리불교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래야 공부를 하게 되고, 오해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오해풀기라는 차원에서 만남과 교류가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역사교과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왜곡(때로는 오해)은 일반사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불교계 혹은 불교학계가 교정해 가야 할 부분 역시 적지 않다. 우선, 일본의 불교계나 불교학계가 아직도 갖고 있는,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판이다”라는 식으로 보는 식민사관(정체사관)을 수정토록 요구해야 한다. 또 해방 이후 쫒겨간 뒤 다시 재상륙을 시도하는 종단들에 대해서는 “일제 시대 한국 내에서 행한 일본불교의 포교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다른 차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왜 해방 이후에 한 사람의 한국인 신자도 남지 않았겠는가” 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제하 그들의 포교가 침략의 보조적 수단이었을 뿐 참된 불교(그들 종파의 참 모습)에서 벗어났던 것임을 지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불교적으로 뒷받침하고 앞장섰던 일련주의(日蓮主義)운동을 비롯한 불교계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도 우리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학술에서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져야 과거로의 회귀를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종래와 같이 우리가 일본불교에 대해서 심리적인 우월감을 가진 채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한다. 일본불교를 뿌리에서부터 공부하면서, 그들과 빈번히 교류하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로 든 몇 가지 문제는 일본불교의 근대와 무관한 채 이루어지는 우리불교의 근대 연구로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만이 아니다. 비록 현재 학생들의 이수학점 수가 줄어듦으로써 동국대 불교대학의 커리큐럼에서 『일본불교사』 과목은 존재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교계에서라도 관심을 갖고 일본불교사 이해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본의 불교계와 교류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불교계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