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시작
삼상9:1-4
(삼상 9: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삼상 9:3)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삼상 9: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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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의 말씀은 엄연히 눈으로 보이지만,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할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정할 따름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것,
혹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을
구분지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할 자격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사건이나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기에 보이는 것 뿐입니다.
나 자신은 그대로 인데
대상이 출현하면서 나의 일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사이가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때
비로서 하나의 의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졌던 강도는
마지막 순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누가복음 23:42)
강도의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죄악된 지난 일생도
충분히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실수 있다고 믿게된 겁니다.
이는 곧 단순히
자신이 예수를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나타나 주신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를 위한 자기가 아니라
자기 같은 일생도
얼마든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주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의미를 주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이 그 인간을 사로 덮치면
하나님의 일로 되어 버리는 겁니다.
본문이 그러합니다.
집에 기르던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끝까지 그 암나귀를 찾아와야 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의 미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루한 일상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대수롭지 않는 일이
실은 백성들이 들고 나오는 요구사항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는 일’이
어떤 인물을 움직이게 한것입니다.
기브아라는 마을에서
떠날 이유가 없는 어떤 청년이
자기 마을을 떠나서
본의 아니게
사무엘 선지자가 머무는 라마라는 동네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원래 선지자를 만나야겠다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선지자와 대면하겠다는 그 목적조차도
이 청년의 뜻으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대수롭지도 않는
아버지의 일상적인 일에
심부름을 했을 뿐입니다.
본인이 구상하지도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은 일에
그는 말려든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알고 있는 일과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의 노선 위에 있었을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지루한 일상생활에서
나름대로 보람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 일에 매진한다고
자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다른 일로 바꾸어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루한 일생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냥 백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예상 못한 일로 빠집니다.
뭔가 자신의 계획과 뜻을 가로막은 세력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주장은
모두 헛 주장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면서 살 뿐입니다.
자기 힘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일이 안 될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뭔가 일은 되어지는데
그 와중에서 자꾸만
자신의 계획은
인정받지 못하고
나아닌 다른 힘이 부각될때,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되묻게될 뿐입니다.
그 점은 사무엘을 만나지 않고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뭐해 먹고살죠?
운좋게 회사가 나타나면
그곳에서 평생 돈벌고 먹고살면 됩니까?
그 당시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획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다른 모든 인물들은
이 중심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15-16절에 보면,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 보았노라 하시더니”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신기한 부분은
왜 사울이라는 사람이
사무엘이라는 사람은 자신은 알고 있는 것을
사울은 몰랐어야 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왜 다같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따로 두고 계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 점은 사무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불쑥 사무엘을 찾아왔다면
사무엘은 그저 암나귀 찾고 싶어서
자기에게 점치려온 사람으로만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기에는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사무엘하고 의논해서
사울을 사무엘에게 몰아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암나귀나 걱정하는 사울이나
선지자 노릇하는 사무엘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냥 놀고 있는 자에 불과합니다.
백수들이지요.
물론 자기 딴에는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상적인 일들이 산재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은 산당에 올라가서
제사들을 드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흔히들 하고있는
그 ‘하나님의 일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해온 자기일일 뿐입니다.
그것은 한다고 해서,
혹은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망쳐지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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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핵심은 이러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인간들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든지,
생계에 관련된 사업을 하든지 간에
각자 일상적인 일에 몰두하면서
전혀 그 일과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의 주체에서
인간이 배제된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는 그 요구조건 또한
인간들의 타고난 일상적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란
그런 인간들의 일상 속에서
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담으려고 합니다.
제 딴에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은
자신들이 내뱉은 요구사항이나 의지도
신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뜻은
하나님에게 받아져서
참으로 중요한 계획을 위해 소모되는
중요한 요구조건이 됩니다.
문제는 부정적으로 쓰여진다는 겁니다.
즉 “절대로 저런 식으로는 살아서는 안돼”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없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왕을 구했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했는지
인간들은 아무런 감각도 없습니다.
그것조차 지루한 일상적인 일이요
평소에 품고 있었던 속마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포부가
하나님의 뜻에 준해서
철저하게 무시당할 때,
이것보다 더 신나는 축복이
또 없을 것입니다.
부정적으로나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벌리시는 작업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정하는 상황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