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기 94년 1월 31일 토요정례법회 ○
☆ 청년강연 : 아름드리 2단 김법준
교의품 3장과 함께 숭산 박광전 종사님에 대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 질문과 답변
Q. 허공은 교우님 :
좌선을 하다가 잡념이 떠오르면, 이것이 잡념이다 하면서 없앤다고 하셨는데,
교무님 설법 중 잡념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없애려고 한다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잡념이 꼬리를 물어서 좌선 후까지 잡념만 하다가 끝내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김법준 교우님 :
거기에는 특효약이 없다. 단기간 특효약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좌선할 때 중요한 것, 잡념 계속 꼬리 물 때 중요한 것, 까닭을 가지고 계속 하다 보면 자기만의 연마와 노하우가 생긴다.
교무님께 조언 구하는 방법도 좋다.
꾸준히 기간을 갖고 해야한다. 3년 후에 만나서 그 때도 꼬리 물고 있는가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나도 조바심이 나서 28세에 견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안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전공부하면서 노력하는 모습 보여야 한다.
구도의 마음을 잡고 있되 편안한 여유를 갖는 게 필요하다.
Q. 허공은 교우님 :
사은의 은혜를 알기는 아는데 머릿속으로 안다. 사은님 은혜가 크게 다가올 때도 있는데,
내 스스로 내가 초라하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은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A. 김법준 교우님 :
저도 그럴 때가 있다. 외롭다, 내가 초라해 보인다.
그럴 때 혜향 교우님께 왜 저는 자력이 없을까요 그러니 그 답이 사람은 원래 그런거야 딱 이러셨다.
사은의 은혜를 잘 못 찾을 때 저는 부모은 하나는 정말 크다는 걸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집에 가면 11시면 부모님 주무시는데 부모님 주무시는 문 밖에서 사배를 하고 잔다. 하나라도 찾으려 한다.
mp3로 독경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도도 하시고.
솔직히 사람 관계는 끝까지 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이 교법을 만나서 이 법을 믿고, 법과 함께 갈 수 있는 이 길이 끝없는 은혜다.
내가 초라하다고 느낄 때가 누구나 있지만 그럴 때 작은 것들을 시도해 보면서 은혜를 찾아본다.
하나하나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란다.
공은교우가 실천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께도 두 번 전화할 것 세, 네 번 해 보자.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씩 추구해 가면서 은혜임을 알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Q. 정용환 교우님 :
12시 전에 자기 위해 여러 가지 사리연마를 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일심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 이후에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일심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김법준 교우님 :
다음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일심을 해야만 한다.
제가 만약 강연을 하고 있는데 그 다음 일들을 생각한다면 뒤죽박죽 될 수 있다.
Q.권도훈 교우님 :
평소에 훈련을 다녀오면 마음이 잡혀서 며칠 정도는 열심히 하지만 사람이 태만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럴 때 어떤 것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가.
A.김법준 :
화요일과 토요일에 법회 두 번 나오는 것으로 잡는다. 평소에 잡고 싶으면 독경 MP3를 듣기도 한다.
또는 이번 해에는 교전을 달달 외우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든가 하는 목표를 세우면, 다른 것에는 태만이 없게 된다.
☆ 숭산 박광전 종사님 외손자 이창훈 교우님 감상담
내게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말씀드리겠다.
사실 숭산 종사님은 외조부신데, 아버지께서는 결혼 전에는 종교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결혼하면서도 결혼 후에 종교 강요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결혼 전 외조부님 뵈러 갔을 때 딱 얼굴 뵙고 공부를 시작 하셨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처가 장인어른을 뵈러 주말마다 익산총부에 내려갔었다.
할아버지 댁 평상에서 부채를 부쳐 주시면서 아버지가 교전 보다가 모르시는 것 있으시면 물어보곤 했었다.
나는 당시 어린마음에 할아버지를 보면 관심 가는 것이 크신 풍채와 헤어가 없으시면서도 둥근 두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했었다.
어느 순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도중에 가서 머리를 만지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셨고 아버지께는 많이 혼났다.
나는 손자라서 손자 보는 재미가 다르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태어나서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나는 직접 업어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무조건 잘해주시는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일이 있어 꾸지람을 들었었는데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의 꾸지람이 매우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때 너무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외할머니가 부산 분인데 엄청나게 큰 부잣집 딸이셨다. 식민지시대 신여성이셨다.
할머니 대학 동기들은 스님에게 시집간다고 다 우셨다고 한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사가 사람이라도 열외가 없이 더 빡세게 해야했다.
21세에 이화여대 다니다가 중간에 시집 오셨다. 부잣집으로 떠받들어 살다가 시집 와서는 일만 하다가 사셨다.
할머니께서 “다음 생 되면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질까요”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원망하지 말고 지금 생이나 잘 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계시는데, 아직까지 우리 영감님만한 분 못 보셨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한국외대 불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신데 어머니는 피아노가 좋았는데 예고도 못가고
고등학교도 원광여상에 가서 피아노를 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어학을 공부하라, 불어를 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속으로 좀 원망을 하기도 했는데 불어를 하다 보니 재미있고 프랑스 유학을 가서 불어로 교전도 번역하시고,
이렇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게 아버지의 도움이었다 라고 하신다.
지금부터 23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오래된 일인데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 결혼식도 있었고 1월 마지막 날이라 서로 잘해보자고 기도도 하였다.
오늘 법준 교우님이 교의품 3장을 가지고 말씀해 주셨다. 숭산 박광전 종사님에 대한 이야기와 3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창훈 교우님은 박광전 종사님의 외손자로서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셨다.
여러분은 숭산님 안보셨죠? 나는 뵈었다.
원불교를 입교하여 군에 가기 전에 휴학하고 있다가 총부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 보니 키가 큰 양반이 아침마다 딱 그 시간에 총부 정문 앞에 들어오면 반백년 기념관 건물 뒤의 집이 숭산님 댁이셨는데 거기서 나와서 제시간이면 출근하셨다.
그 당시 총장님인데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내가 일찍 원불교를 만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때의 숭산님의 모습이 어렸을 때지만 대종사님 아들이라는데 키가 참 크구나, 기운이 맑으시구나, 참 어떻게 정갈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음에 저 사람은 얼마나 복이 많으셔서 대종사님 아드님으로 나와서 원광대 총장에 교무로서 저렇게 하셨을까,
대종사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성산님도 계셨고, 형산종사님도 기라성같은 당대 제자님들이신데 그 분들을 뵈었던 기억이 난다.
숭산님 사모님이신 이명전님께는 강의를 한번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당신 부군을 존경하는지 모른다.
신여성이지만 대종사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간난한 초기교단 삶에서 정토회원으로서 후진을 챙기는 모범을 보이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숭산님 따님이신 지금 외대에 계시는 분도 원남교당 교도로 뵈었었다.
원불교의 특징이 있다. 사진을 보셨지만 대종사님 당신 아들을 장가를 보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종사님 생불, 새 부처님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도인의 모습은 결혼하지 않고 남다른 모습을 많이 생각한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당신의 딸을 가장 아끼는 제자인 주산종사에게 시집을 보내시고 당신은 신여성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당신 아들은 일본에 유학을 가게 하였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대종사님의 열린 사고를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다 유학을 가게 하는가, 아니다. 훈타원님은 일본 유학 가려다가 혼났다.
왜 당신 아들은 일본 유학은 보내고, 훈타원님은 못 보냈는가. 그리고 숭산님은 당신 따님을 불어를 하게 했는가.
여기에는 원불교에 대한 기본적 서원. 공심, 신심이 바탕이 되고 나서는 그 무엇을 해도 된다.
교수, 유학, 영어, 무엇을 해도 된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훈타원님은 왜 못가게 했는가, 먼저 우리 법을 확실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자꾸 이야기하는 것, 혼내는 것. 나는 악역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선역하고 싶다.
그러나 가능하면 결혼해서 아기 낳기 전에 그리고 더 빨리라도 숭산님이 질문했던 일원상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를 가늠을 잡았는가,
가늠을 잡았다면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불어 일어를 하든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빨리 먼저 잡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주인공 된 삶, 가장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이제는 알 것 같은데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때라는 것이 있다. 성품은 때라는 것이 없다. 무시무종이다. 그러나 유형의 세계에서는 때가 있다.
몸을 가지고 있고 이 생에 나왔을 때는 때가 있다.
때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때가 무엇인가.
우리는 젊기 때문에 놀기도 좋고 경험하기도 좋다. 공부를 해도 머리에 잘 들어온다. 그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개는 젊을 때 정말로 영원한 행복은 생각하지 않는다.
관 속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그것에 대해 가늠 잡고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 이치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가늠 잡아야 한다. 언제 잡는가, 빠를수록 좋다.
그래서 그것이 시중이라고 한다.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정말 여러분들은 1월 말일, 토요일 이 시간에 원불교를 안 만났다면 무엇을 했을 것인가. 코미디 프로를 보고 놀았을 것이다.
요즘 얼마나 코미디가 많은지 모른다. 그런 것을 보고 있을 것 아닌가.
한국 사람들이 TV를 평균 3시간 넘게 본다고 한다. 그러나 토요일 일요일에는 대여섯 시간 넘게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우리가 왜 앉아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떻게 대입시켜야 하는가.
아,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 라는 질문이 있다면 일원상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머릿속에 들어와야 한다.
저 일원상이 무엇인데 내가 인사하는가. 저것이 무엇인가. 왜 어디에서는 형체를 모시고 어디에서는 심체를 모시는가.
불상이 여러분들에게 죄 주고 복 주고 하는가.
대종사님이 절에 가서 부처님 뺨을 때려봤더니 계속 웃고 있더라고 한다. 불상을 모시는 것은 진리로 가는 중개자일 뿐이다.
그러면 진리의 실체를 모신 일원상은 무엇인가. 나와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이것을 가늠 잡아야 한다.
그러면 일원상을 볼 때 반갑고 좋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일원상같이 된 것 같다.
그래 일원상은 나지,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러러만 받들 일원상이 아니라 일원상이 바로 나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봉사가 세 사람이 가서 큰 코끼리를 만졌다.
한 사람은 코를 만지고, 한 사람은 배를 만지고, 한 사람은 다리를 만졌다.
그랬더니 각각 이야기하는 것이 달랐다.
이 사람은 다 본 것이 아니다. 다 각각 코나 다리나 배를 만져보았을 뿐이다.
결국에는 코를 만져본 것이지만, 자기가 말한 대로 ‘기둥 같다 절벽 같다’ 표현한 것 뿐이지만 코끼리 자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한 부분만 보고 이것이 이것이다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대종사님은 삼학의 공부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정신 수양을 해라, 온전한 정신, 참 성품을 알고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아 돌고 도는 구나, 흐르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을 보며 또 봄이 오겠구나, 여름을 보면서 나와 같겠구나 하는 것을 안다.
노인이 단풍을 보면서 단풍은 마치 내 몸에 검버섯과 같구나 조금 있으면 단풍이 떨어지듯 내 몸도 떨어질 것이다 하면서 알 수가 있다.
또 하나 아는 것은 내 마음 세계를 심성으로서 알 수 있다.
내 몸을 대소유무로 볼 수 있다. 전체가 대다, 그리고 구성이 지수화풍으로 구성돼 있다.
아까 어떤 생각이 나서 법준이가 이야기하면 웃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무엇이 들어서 웃고 있는가. 그 마음의 내면을 분석할 수 있다.
또는 그것을 의심을 가져서 한번 봐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서 찾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나는 공부해야 하는데 왜 손과 마음이 TV를 향하고 있는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다. 마음도 변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는 보고 싶어 죽겠다가 미워 죽겠기도 한다. 우리는 그 마음의 이치를 보아야 한다.
세상에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하겠다고 큰 소리 치겠는가.
자기 몸도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 몸을 아는가. 간과 위, 소장과 대장, 단전, 쓸개를 다 알며 역할을 아는가.
내 몸도 잘 모른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라는 실체도 모른다.
그러면 나의 실체, 어떤 것이 나인가.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어 잘한다고 목에 힘줄 것이 아니다.
물론 잘하면 좋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하나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바로 시험에 떨어져도 붙어도 상관없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원상을 바라볼 때에 부모같이 숭배하고 밝게 되고 원만구족 지공무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훈련 받고, 사경 헌배 좌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감 잡으면 그 사람의 인생의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것이며 복락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줄여가면서 우리는 주위에 엄청난 은혜를 나툴수 있는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참된 나를 모를 때, 자아실현은 못하고 자아를 죽이게 된다.
결국 자기 에고 속에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고 지킬 줄 모르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더 가까이 이야기하면,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일원상은 나의 실체에 대한 질문이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은과 하나인 나, 우주 만유와 하나인 나이다. 그래서 텅 빈 나이다.
그래서 우리 일원상을 무엇이라 하는가,
불교에서는 청정 법신불이다.
유가에서는 무극, 태극
선가에서는 도, 자연
생명(生命)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신(神)이라고도 한다.
법(法)이라고도 한다.
성(性)이라고도 한다.
무(無), 공(空), 에너지(力)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이것을 통해 가늠 잡으면 좋지만 결국은 우주만유의 본원, 천지의 본원이라는 것이다.
광대무량하여 유와 무를 총섭하지만 삼세를 관통하고도 남는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어떤 스님이 질문한다. ‘수행을 잘하여 번뇌가 끊어지고 마음이 명경과 같이 되면 다 된 것입니까’
그랬더니 스승이 “그것은 한갓 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거울을 깨뜨려 버려라.”
이것을 분별세계라고 한다.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분별이다. 분별 이전 자리를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한다.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그 그림자를 멈추는 방법이 있다.
그 움직이는 실체를 멈추게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도를 닦는다 때론 수행을 한다고 할 때 나의 실체를 안다고 할 때 분별 세계, 관념 세계에서 그것을 판단하려 한다.
그것은 마치 움직이는 그림자를 실체를 세우지 않고 그림자를 세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
아까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기둥같이 생겼다 하는 것과 같아서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일원상 자리를 깨달으려면 직관 자리라고 한다.
우주 자연을 통해 직관할 수도 있고 내 마음을 직관할 수도 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딱 보면 알아야 한다.
왜 생명이라 했으며 신이라고 했겠는가.
생명, 여기에서 다 나오기 때문이다.
신(神), 이같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같이 안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안다.
법(法), 성품이다. 성즉법 이다.
력(力)이다, 봄을 오게 하고 여름을 오게 하는 힘, 죄복을 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치라고도 이야기한다.
성(性), 마음이 생기는 그 자리, 마음 이전 자리이다.
무(無),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마음의 실체가 어디에 가 있는가. 형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空), 비워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도(道), 자연(自然), 인위적이지 않고 스스로 그런 이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음과 양은 무극에서 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극은 음양 이전자리이다.
이 세상은 전부 음양으로 돌고 돈다. 남녀, 천지, 선악, 흥망, 성쇠, 대소, 유무 모든 것이 음양의 이치로써 짝지어 있다.
그런데 짝 지어진 이전 자리가 있다. 그것이 무극이요 태극이다. 그것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자리에 가 있으며 그것을 일원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려운가.
법준이가 시립대 다니면서 군대 가기 전에 왔는데 군대 다녀오면 안 올 줄 알았다.
내가 교전을 보라고 이야기했더니 언젠가 저 사람이 나타나서 교전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네가 불심, 인연이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
종교가는, 원불교는, 그리고 나는 좀 다르다. 구애하고 구걸하듯이 여러분들에게 교당오라고 하는 것은 피차가 은혜 안된다.
대종사님 그렇게 교화 하신 적 없다.
본인이 구도심을 가지고 본인이 나의 실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유한한 7~80년, 8~9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제 순명님 오라버니가 79살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일주일전에는 이지현 교우의 증조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러분은 몇 년 남았는가. 잘 생각해 보라.
철학과 종교는 거기서 출발한다. 생사와 행복, 생명에 대한 문제이다.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향해서 반드시 알고 싶다, 깨닫고 싶다 한 것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정말로 제대로 복되게 살고 싶다, 자아를 실현하고 내생에도 복 있게 살고 싶다 하는 것이 수행이다.
즉 신앙과 수행은 내 삶의 문제이다.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은 이런 것이 있다더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원상도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라더라 하면 안된다.
그 일원상은 나의 실체다 하는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대종사님을 만날 수 있고, 이것을 택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 당대에 제자가 부처님을 쳐다보니 왜 보느냐 물으셨다. “보고 싶어서요”
그랬더니 부처님이 이것 곧 썩는다 하셨다. 내 몸을 보지 말고 내가 깨친 마음을 봐라 하셨다.
대종사님은 단순히 모시고 받드는 신앙을 넘어서서 실제로 나투는 신앙을 하도록 알려주시러 온 것이다.
그것을 위해 고생하신 것이며 우리가 배울 것도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풀면, 천지 만유의 본원은 그것을 사은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것을 더 쪼개면 처처로 불상이요, 사사로 불공이다.
그리고 수행은 처음에는 정기훈련으로 기간을 두어서 해라 하다가 나중에는 동정간에 무시무처로 하라 하셨다.
그것은 네 안에서 실체를 알아서 제대로 지키고 쓰기 위한 수행인 것이다.
예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번째 아들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14살이 된 아들을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아들이 답답해 하다가 올라와서 보니 전쟁이 끝나버렸다.
왜 나를 지방으로 보냈냐고 따지니 사람들이 넌 앞으로 살 날이 많아서 그쪽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도쿠가가와의 아들이 “지금 살고 있는 14살은 나중에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도쿠가와가 “역시 내 아들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중에 어떻게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소소영령하게 내 안에 함께하는 것이 마음이요 바로 일원상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한번 찾아보고, 만져보고, 같이 느껴 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감사합니다.
첫댓글 반드시 알야아하는데...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죠? 법준교우님 창훈교우님 교무님 은전교우님 감사 ^^
다시 한번 챙길 수 있는 이 공간이 참 감사합니다. 항상 수고해주시는 은전 교우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