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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돕는 푼돈의 힘 | |||||||||||||||||||||||||||||||||
“집 쫓겨난 주민 돕다” 1979년 성남 주민교회에 다니던 사람 47명이 천원씩 4만7천원을 모아 주민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5년. 그 돈이 500억원으로 불었다. 조합원 수도 어른 1만1천여명과 학생 2천여명. 1100여개 전국 신용협동조합 가운데 100위 안에 드는 규모다. 주민교회의 신협은 한 신자의 불행에서 시작됐다. 박현내(72·여)씨는 5남매와 단칸 월세방에 살다 그해 겨울 방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나앉게 됐다. 주민교회를 세운 이해학 목사는 박씨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교인들을 돕기 위해 신협을 만들고 고리채 안 쓰기와 월세를 전세로 바꾸기 운동을 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신분녀(67·여)씨는 “신협이 없었으면 지금도 월세방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1년 간암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7남매를 데리고 성남으로 올라와 날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에 버는 돈은 2, 3천 원으로 한달 꼬박 일해도 8, 9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월세 2만 원을 내고 나면 아이들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모자랐다. 하지만 신협의 융자가 그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듬해 신협으로부터 100만 원을 빌려 단칸방이지만 전세를 얻었고 그 때부터 하루에 천원씩 저축을 시작했다. 3년쯤 지나 빌린 돈을 다 갚은 뒤 다시 300만원을 빌려 방 2개짜리 옥탑방을 얻었고 다음에는 700만원을 빌려 독채 전세를 얻었다. 성남에 온 지 18년째인 99년. 비록 1450만원을 빌리고 전세를 끼긴 했지만 마침내 신씨는 집을 샀고, 이 집을 허문 뒤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새 집을 지었다. “새끼들 공부 시키고 집 사고 나중에 그 집을 팔아서 아이들을 여우었지요. 신협이 없었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었지요.”
주민교회의 가난한 신도들에게 신협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빌려줄 돈이 없어 조합원들은 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주말이면 예배당 한 켠에서 돈을 모았다. 가난한 이들이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천원짜리가 수십만원이 되려면 몇 달이 걸렸다. 신협의 자본금은 차츰 조금씩 늘어갔지만 굴리는 돈이 수백만원이 고작인 주민신협은 밖에서 보면 영세한 ‘불량’ 금융기관일 뿐이었다.
“제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신협 해산을 위한 총회를 하고 있더라고요. 교회의 요청으로 수원교구에서 실시한 신협교육을 받았어요. 평생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무의 ‘등장’으로 신협을 계속 운영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고 이해학 목사를 비롯해 10명의 이사가 은행에서 100만원씩 빌려 1000만원을 출자했다. 이 전무는 월급도 제대로 받지 않고 3년 동안 교회 한 구석에 책상 하나를 놓고 신협 일을 했다. 그 때부터 신협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해 92년에는 자산 10억원을 넘었다. 95년에는 자산 100억원을 달성했고 수진동에 지소도 만들었다. 아이엠에프 때도 흔들림이 없었던 주민신협이 가장 어려웠을 때는 2003년 11월 금융감독원이 전국 신협 110여 개를 동시에 퇴출시킬 때였다. 주민신협에도 예금 인출사태가 일어났다. 이 전무는 “온몸으로 막았지만 2주 동안 200억원 가운데 30억원이 빠져나갔다”며 “한 달 뒤 대부분 다시 돌아왔지만 흑자도산을 걱정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위기를 넘긴 주민신협은 이후 신흥동에도 지소를 열어 본점과 지소 2개를 갖춘 비교적 안정된 금융기관으로 커 나가고 있다. 2003년에는 박봉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직원들의 월급도 크게 올렸다. 이승일 이사장은 “자산 500억원 돌파를 계기로 올해를 제2의 창립의 해로 선언했다”며 “금융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지역 공동체의 구심으로 주민신협을 성장시켜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성남/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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