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아 카펠라’로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찬송은 중심과 주변 모든 역할을 한다. 중심인 까닭은 예배의 본질 안에 찬양이 중요한 몸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부처럼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준비 찬송’이란 말이 그렇다. 마치 찬양을 예배를 앞두고 애드벌룬을 띄우는 작업처럼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찬송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예배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는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사실 전통적인 찬송가는 심심하기 짝이 없다. 복음성가에 비해 흥미가 덜하고, 젊은 세대의 음악적 감수성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러니 CCM은 예배찬송을 보완할 뿐 아니라 외려 찬송가보다 비중 있는 역할을 한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소외당하는 이유가 있다. 대개의 교회는 전체 찬송가 곡 중 절반도 활용하지 못한다. 예배 찬송을 선택할 때 회중 모두가 알만한 곡을 우선 골라야 하기 때문에, 아주 적은 범위에서 선곡한다. 예배 찬송이 늘 그 타령에 머무는 이유이다. 아는 곡은 너무 뻔하고, 모르는 곡은 아예 재미없다. 대개의 교회는 새로운 찬송가를 배우는 일에 미숙하다. 찬송가는 원래 구식이라는 선입견 때문이고, CCM에 비해 재미나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CCM에 가장 많이 담긴 성경은 시편의 구절일 것이다. 무려 150편이나 되니 그 세계가 무궁무진하다. 본래 시편은 제2성전시대의 찬송가라고 불렸다. 비록 그 노래들에 악보는 없으나 그 사연의 깊이와 넓이는 헤아릴 수 없다. 왜 이렇게 많은 노래들이 성경에 들어있을까?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노래를 좋아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천 년 가까운 역사 속에서 고백하고, 구전되고, 악보가 붙여졌으니 시편 그 자체로 위대한 영감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하셨다.
이렇게 길고, 짧은 시편들은 어떤 곡조로 불렸을까? 캘빈의 <시편찬송가>가 있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혁교회 시대에 불렸던 것인데, 당시에는 오직 시편으로만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에는 제네바 시편의 흔적이 남아있다. 캘빈 찬송가 편집자들은 예배 찬송을 유행가 부르듯 ‘콘템퍼러리’(contemporary)로 자유롭게 부르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16세기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무반주 노래라고 말하는 ‘아 카펠라’(A cappella)는 악기 없이 목소리로만 화음을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그런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아주 뛰어난 악성을 가진 사람들만 가능할 듯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음역을 지키면서 고유한 음정을 발성하려고 집중한다. 중세교회가 성가를 부르던 방식이었다. 이탈리아 어로 ‘카펠라’(Cappella)는 교회라는 뜻이다. 그러니 ‘아 카펠라’는 ‘교회 스타일’로 노래하라는 의미이다. 강조하려는 것은 ‘무반주’가 아니라 ‘스타일’이 아닌가?
1990년 초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 다달이 양심수를 위한 기도회를 열 때에 중보기도 직후에 조용한 기도송을 만들어 불렀다. 애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가사는 시편에서 빌려 왔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소서/ 내가 고난을 당할 때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 가고 시름에 지쳐 살이 마르오/ 지붕 위에 외로운 새들처럼 잠 못 이루고 탄식만 하오”(시 102편 중에서). 고난 받는 사람의 간구를 시편처럼 잘 담아낸 노래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호소와 절규를 외면하지 않고 귀기울여주신다는 진실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고난까지도 기도의 뼈대를 세우고, 노래의 속살이 되었다.
서양 계명에서 ‘도’(Do)의 원래 이름은 ‘우트’(ut)였다. 라틴어로 음표 이름은 ‘우트, 레, 미, 파, 솔, 라’로 불렸다. 이를 중세기에 구이도 다레초(991 경~1033년 경)가 바꾸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바로 ‘우트’가 ‘도’로 바뀌었다. ‘도’는 ‘도미누스’(Dominus) 또는 ‘도미네’(Domine)에서 따온 머리글자로 ‘주님’이란 뜻이다. 모든 노래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복음성가를 부를 때마다 자주 세대 간의 심각한 분리와 단절을 느낀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아이와 젊은이 그리고 부모 세대 모두가 합창을 부를 수 있는 레파토리 몇 가지쯤 나누면 좋겠다. ‘아 카펠라’ 하듯, 한국교회 스타일로, 우리 시대의 정신이 담겨 모두를 아우르는 그런 조화 있고 힘 있게 부르는 합창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막 14:26).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아마 절실한, 허나 승리를 부르는 노래였을 것이다. 찬송가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불리든, 밖에서 부르든 공동체의 믿음, 역사적 삶, 인간의 아픔과 희망을 두루 담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래 시편의 고백이 그렇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