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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사(경술국치)의 역사적 교훈
안홍순 엮음
Ⅰ. 역사적 의의
역사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언어와 역사를 통하여 민족정신(혼)의 교훈을 얻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를 비추는 빛이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여 바람직한 국민화합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근(경술국치)•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올바른 역사적 교육을 통하여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제고하여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민족정기를 선양해야한다.
Ⅱ. 갑오동학농민 운동(1893∽1895)
1. 동학(천도교): 1861년 최제우가 유,불,선 의 사상을 포함하며 개화기 서구 열강세력에 대응하고자 만들어진 서학에 대한 동학이란 민족종교.
2. 성격: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으로 조선말 지배계층과 양반들의 수탈로 가난 한 농민들의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은 지배계층에 대한 최대의 항 쟁으로 처절한 생존을 위한 내정개혁과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3. 과정: 사회개혁과 혁명을 대원군에 의지하려던 것이 일본군과 조선의 양반 부호들이 연합하여 오히려 농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학살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계략에 동조되어 훗날 식민지 지주제는 민족분열(친일)정책으로 전 개되었다.
4. 결과: 동학혁명군은 조선관군을 넘어 호남일대를 장악하게 되자 조정의 자 주 평정 능력이 없어 외세의 청과 일본(청일전쟁의 발단)의 개입으로 열악 한 무기(화승총: 속사포)와 병력으로 공주 우금치전투(250:4,000~1만여 전 멸)에 서 실패하나 그 후 양반유생과 농민이 함께하는 반일 애국주의의 의 병활동, 1919.03.01. 기미독립선언(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민주공화제,신 흥무무관학교, 봉오동, 청산리대첩, 만주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으로 계승되 었다.
Ⅲ 메이지 유신과 이토히로부미(1841∽1909)
1. 출생: 가난한 농민 하야시무조(양자로 이토다케베에 입양)의 아들로 출생 하 여 이토히로부미로 개명 -일본 근대화에 기여.
2. 성장: 서당을 거쳐 요시다쇼인의 쇼카촌숙에서 수학 19세에 5명 중 1명으 로 2년 간 런던대학에 유학 중 내전으로 귀국(이노우마사루) 도쿠가와막부 (270년) 세력을 타도하고 근대화(양원제-입헌군주제)로 메이지천황제 도입
3. 경과: 미(예일대 명예박사),독, 프랑스 순방, 1889년 메이지유신의 헌법 제정 및 정권 장악(초대총리-백작), 텐진 조약-청의배제(‘85),여성교육(‘86), 영.일 동맹(1902), 청일전쟁 승리(1895년 전 8도 분할),러일전쟁 승리(을사 늑약 1905), 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주살 (1909.10.26./03.26 순국/‘08.전명운, 장인환 미 스티븐스(고종의 보좌) 주 살) 국장-충정군-시호 문충 (순종)
※유길준(1856. 10. 24~ 1914. 9. 30).
한말의 개화사상가로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 수많은 저작물(서유견문록)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며, 정치의 전면에 나서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Ⅳ. 치욕의 경술국치(1910)
1. 국제정세에 어두운 19세기 초 서세동점의 대응을 못했다.
약육강식과 사회진화론으로 무장한 서구의 제국주의 침탈을 막아내기 위해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한국은 혼신의 힘을 쏟아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 며 안으로는 근대화에 힘썼으나 그 결과는 달랐다.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중적인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 국가로 전 락하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 한국의 비극은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다 근 대화의 기회를 놓쳐 청의 간섭과 일제의 침략 그리고 서구세력의 침탈을 받으며 지도층의 분열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침략 야욕을 갈파하지 못하고, 일제를 한국 독 립과 근대화의 후원자로 인식한 정세파악이 문제였던 것이다.
러일전쟁(독, 프, 러의 간섭) 시기에 포츠머츠 강화조약과 제2차 영일동맹 (인도, 버마지배)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열강 간의 비밀 거래를 모르고 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이준 열사를 비롯한 헤이그 특사의 피 끓는 호소 (헐버트)도 제국주의 열강의지지를 얻지 못하고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 던 것이다.
3.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사회의 근대화는 각계각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할지라도 외세에 대한 대응은 거족적인 단결로 투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제침략 세력에 대응은 외세(아관파천) 의존적이고 매우 분열적이었다.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내부의 반발과 갈등을 초래한 사실도 문제였 다. 동학농민전쟁 시기 집권층과 농민대중이 극열하게 대립하고, 전기 의 병 전쟁 시기에는 유생과 개화파의 민족운동 노선이 갈리어 유생 층은 위 정척사를 내세우며 반외세 무장투쟁에 나섰지만, 개화파는 일본식 근대화 노선에 함몰되어 의병전쟁을 도외시했던 것이다.
후기 의병은 유생 층과 해산군인, 그리고 평민층이 광범위하게 반일 민족 전선을 형성하였지만, 이때에도 개화파는 애국계몽운동에 치중하여 적극 적으로 힘을 보태지 않아 지도층(을사5적)의 단결을 이루지 못한 분열 양 상은 일제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4. 일제의 교활한 침략 술책의 혜안을 갖지 못했다
개항 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된 무장으로 항상 침략(정한론)의 촉수를 감추고 조선에서 청(淸)국과 영향력 경쟁을 벌이다 임오군란에서 밀리자 “군비 증강 8개년 계획”을 세워 청과의 결전에 대비 육,해군 병력을 증강에 엄청난 예산을 투자 그 결과 10년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임을 내 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마음을 잡고, 1894년 “시정 개선”을 표방하며 경복궁 쿠데타(황후시혜)로 친일 갑오내각을 지원하며 1895년 청나라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이인 직의 혈의 루)을 마치 한국의 독립전쟁으로 포장하여 조선에서 청을 몰아내 고 대만과 팽호제도의 식민지화 요동반도를 할양받게 되었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되자 조선도 러시아의 영향권에 이르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의 개입에 와신상담(절치부 심)으로 굴욕을 되갚겠다는 10년 계획으로 1905년을 겨냥 육·해군 증강을 위한 세금으로 실천, 외교력을 집중하여 최강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발틱함대 섬멸)로 열강의 반열에 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손병준-일진회) 선전포고에도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 립을 공고히 하기” 위한 침략 전쟁을 ‘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 이다.
5. 간도협약의 문제
일본은 1945년 항복문서 선언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1895년 청일전쟁 이 후 탈취된 간도는 1909년 이전의 상태(45만 거주)로 반환되어야 된다. 1951년 체결한 中.日평화조약 제 4조에는 “중일 양국은 전쟁의 결과로서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
는 근거로 1909년의 간도협약은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협약이기 에 당연히 무효가 되어야 한다.- 분단의 현실은...
6. 일제는 항상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팔며 침략전쟁을 선포했다.
러일전쟁 후 결국 이른바 ‘을사늑약’(1905)으로 주권을 강탈한다. 그런 데도 민족의 지성들은 일제 침략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경술국치(1910)’후 본격적인 내정 간섭으로 국내에서의 구국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게 되었다.
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 경술국치 후 우리는 근대적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물론 단일 민족으로 고조선(요하의 홍산문화 9,000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역사에서 경술국치를 전후 하여 봉건적 정체 성에서 근대적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2. 1919년 우리는 남녀노소 종교(천도교)와 신분 계급을 뛰어넘어 3·1독립선언 을 통하여 전국에서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켜 광복의 그날 까지 독립운동은 계층과 이념을 넘어 지역별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3. 3·1독립선언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의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국민주권 주의에 의한 민주공화제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1919.4.11 제정, 13 공포)되고, 의병활동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각기 분류되었던 국권회복운동 은 선열들이 주체세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4. 대일 항쟁기 선열들의 27년(상하이-난징-짜싱-창사-꽝저우-류저우-지장-충 칭)의 독립운동(신흥무관학교,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윤봉길, 이봉창, 백 정기의사 의거, ‘41.12.08 대일선전포고, 건국강령제정, 광복군-OSS활동)을 통해 발휘된 민족의 힘은 바로 광복의 근간 (1943. 카이로 선언종용/1945. 8.15(10) 일본의 무조건 항복/ 9월 8일 서울에 입성한 맥아더 군정 포고문 제1호: 남한 군정실시로 남북 분단-일제기관 종사자 계속 집무라는 악연/ 임정요원은 개인 자격으로 11월 환국/‘48년 5.10 선거. 7.17 제헌국회 등) 으로 정부수립/’50년 6•25전란/ 민주화,민주화 및 정보화로 경제성장의 원 동력이 되었음은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Ⅵ. 3.8선의 사연?
오늘날 우리의 분단이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미·소 냉전의 산물로 분단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반도 분할을 국제적으로 논의한 것은 4백여 년이 넘는 사연(정한론-임란)의 뿌리가 있다.
1. 1593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6월 서울을 점령한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 제시한 7개 항의 조건 중 조선의 8도를 이북의 4개도와 이남의 4개도로 분할 남쪽을 일본이 갖겠다는 협정이 무산되자 정유재란(이순신)으로 일본이 물러났다.
2. 1894년 7월, 청·일 전쟁 발발 직전에 나온 영국외상 킴벌리(Kimberley)의 안, 당시 조선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 있던 일본과 청나라를 중재한다는 취지로 조선을 청· 일 두 나라가 분할점령하자는 내용을 청이 거절했다.
3. 1896년 6월, 당시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외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Romanov)와의 회담 에서 일본외상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여 러시아와 일본 이 남· 북을 나누어 갖자는 제의에 러시아가 거절.
4. 1903년 9월, 당시 주일본 러시아 공사인 로오센이 일본 측에 제시한 한반 도 분할 39도선을 경계로 분할에는 일본이 거절.
이 같은 논의와 시도를 보면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나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토 문제를 조정이나 정부가 철저히 배제된 채 강대국 끼리만의 논의요 협상이 오늘날의 휴전선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인은 역사적 맥락과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 지형으로 대륙세력이 되면 일본(오늘날에는 미국)이 불안하고,- 해양세력이 되면 중국과 러시아의 불안이....
5. 1904~5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미국 T,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노벨평화상 수상)안이 미의 테프트와 일의 카쓰라의 밀약으로 미국 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 36년)의 지배(22년의 한미동맹우호조약 묵살)로 국제정세는 냉혹했던 것이다.
6. 태평양 전쟁에서 원자탄 투하와 쏘련의 참여(8.8)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에 미국은 38선(투르먼)을 그어 쏘련의 남하를 저지. 이는 전쟁주범 일본의 간 교한 계략의 로비에 엉뚱한 한국이 일본의 전범 범죄를 덮어쓴 것이다. (1943년 3상 회담- 카이로 선언/1945.09.02. 도쿄만 미함전에서 항복조인 / 9월 8일 서울에 입성한 맥아더 군정 포고문 제1호: 남한 군정실시 남북 분단-일본 공공기관 종사자 계속 집무라는 친일파의 악연) 그 결과 6.25 동란에서 정전 협정의 휴전선은 우리에게 또 다른 아픔의 연속이다.
Ⅶ. 드골의 나치 협력자 처단의 사례
1. 드골은 “애국적 국민에게 상을 주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 이렇게 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2. 처벌대상 ●나치 독일의 점령을 정당화 한 자
●모든 공직자와 지원세력 한 자
●독일(일본, 이탈리아)에 협력한 자로
독일을 찬양, 영·미군을 증오, 드골의 임시정부 ‘자유 프랑스3 년’을 테러집단으로 매도한 언론인, 지식인 반역자를 가장 먼저 파리 숙청재판소에 올려 거의 사형으로 다스리고 그 회고록에 “도덕성의 상징”,
드골: 언론인에게 면죄부를 주면 “곡필을 휘둘러 국가의 도덕성과 윤리를 마 비시키는 암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라 했다.
국내 레지스탕스를 지휘하여 프랑스가 독일군에 총격을 가하고 조국 해방 과 행정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연합군(미 군정)이 파리 진주에 앞서 입성 하여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역자 숙청을 철저하게 지금도 집행한다.
3. 고관대작과 일반 협력자 200만 명 중 99만 여명을 체포. 재판결과 6,763 명 사형선고-사형집행 767명, 2702명 종신노동 형, 1만637명 유기노동 형, 22,883명 징역형,2,044명 금고형을 선고했고, 시민법정은 9만5천명 부역죄 형, 7만 명 시민권 박탈, 공무원 12만 명 파면의 행정처분을 단행했다.
4.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지식인·대학 등 각 영역에서 나치 협력자를 도려 내 자유와 평등, 사회정의가 넘치는 새 나라를 건설 이후 민주선진국으로 도약하여 ‘반 인류 범죄 법’을 도입해 지속적으로 반역자를 응징했다. 나 치 협력 세력의 대화합 논리를 거부하고 대숙청에 성공한 배경은 그가 자 유 프랑스의 임정세력(우파)과 국내 레지스탕스(사회·공산당의 좌파)의 인 사들로 임시정부를 수립해 좌 우 연합으로 주체세력을 조직하여 성공했다. (유언: 퇴임 후 모든 기득권을 서민들에게(50m의 십자가)-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Ⅷ. 반민족행위자처벌과정과 그 외
1. 우리도 프랑스의 드골 식 청산을 시도하였으나 반민특위를 거부 (1949.1.5.출범, 6.6.피습 사건, 8.31해체 과정에서 668중 362체포 79명 처단으로)하는 친일파와 합작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택으로 한국의 친일파 청산은 오늘도 민족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역사왜곡: 동북공정- 구당서에 산해관 갈석산 동쪽은 조선 땅- 고구려,발 해를 중의 지방정부?/ 식민사관: 쓰다 소기치-이병도 스승-낙랑군, 임나의 이민족 지배? 광개토왕비 훼손 등-남북통일과 국력 신장만이)
2. 대한민국: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식’1948.08.15.(중앙청현수막)
1948.09.01.발행관보 제1호 민국30년 9월 1일- 헌법전문 ‘대한민국의 정통 성을 1919년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2008. 60 주년 건국절?)
3. 미국: 1776.07.04. 독립선언(13년 후) 1789.04.30. 헌법을 통과하여 연 방정부를 수립하였으나 독립기념일은 7월4일(프,브도 선언일을)
4. 독립유공자 예우법: 제2조(예우의 기본 이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法統)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므로 이러한 희생과 공헌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정신 의 귀감(龜鑑)으로서 항구적으로 존중되고, 그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 하여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榮譽)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문개정 2008.3.28.]
Ⅸ. 근 ·현대사의 교훈
이제 우리는 지난 100여 년 전의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놓치고 말았던 회한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그러한 과오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역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로 미래에 대한 준비와 새로운 신념을 다지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제고하는 민족정기를 선양하여 치욕의 역사를 딛고 피로써 싸운 독립운동선열의 역동적인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미래를 열어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민족 혼)을 승화시켜 국력을 신장하여 겨레의 숙원인 평화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자)은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 사진설명: 1970년 12월7일 독일 빌리 브란트(노벨 평화상) 총리가 비가 내린 위
령탑 앞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폴란드 국민이 지켜보고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는 폴란드 전쟁피해자 위령탑 앞에서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고 폴란드 국민도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폴란드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 감명을 주어 냉전의 분위기에서 평화의 초석이 되는 바탕이 되었던 모습이다.(일본과 대조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응답하라, 1937(문화·체육에디터)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강제 이주됐다는 기록이다.
“당의 소정방은 백제 백성 1만2807명을 끌고 갔다. 660년”<삼국사기>
“당은 고구려(남생과 남건)인 3만8200호를 대륙 곳곳으로 이주시켰다.668년”
발해는 더했다. 요(거란)는 발해 멸망(926년) 후 ‘9만4000여 호를 랴오량(遼陽)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옛 마을을 폐쇄’시킨다<요사>. 1호당 5명이라면 47만~50만 명이 강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11년이 훌쩍 지난 1937년 9월9일 밤, 연해주 고려인을 가득 실은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한다.
고려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규정한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른 것이다. 국권을 잃고, ‘조선백성’이 아닌 ‘일본신민’으로 취급받았으니 이렇게 힘없이 휘둘린 것이다.
소련은 이미 2500여명의 고려인 지도층을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총살시켰다. 그 해 12월까지 이주열차를 탄 고려인의 수는 18만 명에 이르렀다. 3개월 만에 바이칼호 동쪽은 고려인의 씨가 마른 것이다.
이주열차는 지옥열차였다. 화물차 1량을 4칸으로 나누고 칸마다 4가족을 밀어 넣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원래 유리창 하나 없는 차창은 널빤지로 가렸다. 저녁이 되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다. 출산소동이 벌어지고 겁탈과 식량 약탈이 자행됐다. 동승한 비밀경찰이 체포한 10여명은 끝내 행방불명됐다. 전염병이 돌면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연고가 없는 시신은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 가족이 있는 경우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으며,
6000㎞를 달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내동댕이쳐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연명해야 했다. 독거미와 독사, 모기떼에 시달렸다. 늪의 물을 먹고 쓰러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1935~38년에 태어난 고려인이 거의 없다는 통계가 비극을 웅변해주고 있다.
원로 언론인 김호준 씨의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을 읽으면서 과거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역사서에는 수만~수십만 명씩 피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났을 백제·고구려·발해 백성들의 사연은 담겨 있지 않다.
“~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에 떨어지며/ ~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 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1938년 강태수가 발표한 시(밭 갈던 아씨에게)란다. ‘연해주의 향수를 자극했다’는 죄로 21년이나 유배됐다니…. 필시 옛 망국의 백성들도 ‘지평선 너머 떨어지는 북두와 컴컴한 동녘을 보면서’ 고향땅을 떠났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1000년을 돌아왔다. (2013.1.25 경향)
● 일제강점기 희생자 800만/ 6.25전쟁은 600만(참전외국인 4만명)의 희생과 1,000만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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