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경지역 다대포 몰운대를 다녀와서!
2018년3월18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산행동호회에서 원정산행지로
정한 부산,경남지역회를 방문 다대포(多大浦)와 몰운대(沒雲臺)를 가기 위해
새벽 04:40분에 일어나 산행복장 등의 여장(旅裝)을 갖추고 05:40분에 집에서
출발 버스 전철등의 대중교통편으로 종로3가에 도착하니 06:45분 15번 출구로
버스 정차장으로 나가 미리와서 대기중인 동행할 님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로
한동안 소식을 몰라 적조(積阻)했던 맘을 풀고 사당동에서 오는 미즈
관광버스에 승차했지만 늦게 오시는 님들을 기다리느라 정시보다 조금 늦게
종로를 출발 죽전 승차장을 경유하여 여주휴게소에 들렀다가 중부내륙 고속
도로를 질주하던 미즈호 고속버스는 금새 칠곡휴게소에 도착 15분간의 쉼을
가진 뒤 대구광역시를 관통하듯 달려간 버스는 정오경에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입구에 도착하여 매년 한 번씩은 면대(面對)를 했기에 낮익은
분들이 많은 부경지역회 님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옛날에는 몰운도
라는 섬이었다는 물운대를 향해 오르는 산길에는 아름들이 소나무 숲이 조성
되어 있어서 허리와 등을 일직선으로 펴고 팔과 다리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걷는 운동 방법. 인체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건강을 도모하는
새로운 걷기 방법으로서 비만이나 당뇨병, 고혈압, 심장병 따위와 같은 질병
을 예방하고 치유 효과를 높이는 장점이 있다는 힐링 워킹(healing working)을
하는 기분이었고 부산의 8경 중에 5경에 속한다는 몰운대의 주변의 자연경관을
보며
▼ 칠곡휴게소 풍경
▼ 차창밖 풍경
▼ 몰운대로 가는 갈멧길
다대포(多大浦)
부산광역시의 서남단에 있는 소만입.
낙동강하구 최남단에 있는 다대반도와 두송반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5개의
작은 소만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 시내에서 17㎞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명의 유래는 큰 포구가 많은 바다라는 데서 비롯되며,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다다라(多多羅)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으며, 따라서
국방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조선 세종 때는 이곳에 수군만호영을 설치, 수군 123인과
병선 9척을 배치하였고, 성종 때는 높이 4m, 둘레 560m의 다대포진을 축성한 바
있으며, 임진왜란 때 다대포첨사였던 윤흥신(尹興信)과 그 동생 흥제
(興悌)가 왜군과 접전을 벌여 전사한 유서 깊은 곳이다.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와 감천동 항구 사이에 위치한 다대포는 몰운대·화손대·해수욕장
·낙동강 하구로 구분할 수 있다. 태종대·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의 3대(臺)로 알려진 몰운대
는 해송을 비롯한 각 종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 부산 근교의 한적한 어항이었으나, 목재 및 조선업이 유치되면서부터
어촌에서 공업지역으로 변모하였고 택지개발로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다대포해수욕장과 연계된 수변의 조망권을 확보하기위해 낙동강변 신평동 56호 광장∼
다대포해수욕장간의 전체 4.1㎞의 군사용 철책이 철거되었다. 부산시는 강변대로 일부
구간의 도로를 확장하고 도로와 하구사이 제방을 친수공간으로 조성하여 자전거도로
·산책로·휴식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주변에는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을숙도
생태공원·낙동강하구에코센터·낙조분수 등의 주요 명소가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국방상의 요지여서 윤공단(尹公壇)·다대포·첨사청·정공운 순의비(鄭公運 殉義碑)
등 선인들의 무공을 알려주는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동래지(東萊誌)』(동래지편찬위원회, 1983)
부산시청(http://www.busan.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다대첨절제사영 소속 객사.
다대포 객사(多大浦客舍)는 수령이 부임할 때 의식을 치르고, 임금의 상징인 전패
(殿牌)를 보관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하는 것]
를 드리던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조선 후기 지방 관청 건물이다. 조선
시대에 다대포는 군사적 요충이었으며, 이에 다대진에는
정3품의 당상관이 근무를 하였다.
다대포 객사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沒雲臺) 내에 위치한다.
다대포 객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대진이 설치된 임진
왜란 이후로 추정된다. 건립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고쳤다가 1825년(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다대포 객사는 현 다대초등학교 이전의
다대사립실용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1970년 현재의 몰운대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1992년에 단청 공사를 실시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벽체 없이 기둥만 남아 있어
서 마치 누각 건물처럼 보인다. 객사 건물에는 가운데 정당(正堂)[가운데 건물]과
좌우에 날개처럼 익실(翼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정당 외에 좌우에 익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다대포 객사의 관리자는 부산광역시 사하구이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다대포 객사는 조선 후기 다대진의 군사적 위상을 확인시켜 주는 관아 건축물이다.
다대진의 객사를 원래의 자리인 다대초등학교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교육적인 효과가 좀 더 컸을 것이다.
『부산시사』4(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부산의 문화재』(부산직할시, 1993)『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문화예술과, 2009)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대포해수욕장(多大浦海水浴場)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해수욕장.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위치하며, 부산 시내에서 서남
쪽으로 8㎞ 지점에 있어 도심지에서의 교통이 편리하다.
해안 백사장은 낙동강 상류에서 밀려 내린 양질의 토사가 퇴적돼 생겨 모래가
부드럽고 반월형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휘어져 있다. 낙동강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부근에 위치해 수심이 300m 거리의 바다까지도 1.5m 정도로 얕고
평균수온이 21℃로 따뜻하다. 백사장의 면적은 53,000㎡, 길이 900m, 폭 100m이다.
1987년에 축조된 낙동강 하구 둑이 강물의 흐름을 막아 백사장의 경질화와 수질
오염 및 갯벌화가 진행되고 있어 해수욕장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으나, 현재 진행
중인 연안 정비사업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다대포해수욕장 일원에는 2014년 완공
을 목표로 연안정비사업이 진행 중으로 진입광장·방사림·산책로·생태탐방로·해수천
등 생태 친화적 해변공원을 조성하여 세계적인 해안관광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6월 준공된 세계 최대 규모의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는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매년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국제록페스티벌과 다대포
해넘이축제 등의 문화·축제행사에 많은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다. 주변에는 해안
절경지인 몰운대(沒雲臺)가 있고, 다대포패총·다대포객사·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
정운공순의비·윤공단 등의 문화유적지와 관광명소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참고문헌
부산시청(http://www.busan.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대포해변공원(多大浦海邊公園)
해변도로 뒤쪽의 아파트 단지에 있는 몰운대성당은 일몰 촬영지로
유명하다. 해변도로의 팔각정도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다. 주차장
앞 해변에서는 로우앵글로 백사장을 찍어 보자.
부산의 일몰 명소 다대포해수욕장은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매력적인 곳이다.
모래 위에 바람이 만들어 놓은 물결무늬는 파도와도 잘 어울린다. 넓은 백사장과 그
끝에 닿아 있는 푸른 바다를 보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에 당도한 느낌이 든다. 바람에
묻어오는 짭쪼름한 바다 냄새 덕분에 문득 이곳이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겨울처럼 바람이 강한 때에는 해변의 모래가 물결무늬를 만들며 바람에 날려간다.
일정한 방향으로 스르르륵 날아가는 모래물결을 보고 있으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사막 같은 바닷가에서 해가 지는 풍경 또한 일품이다. 바닷물이 저만치 밀려난 해변
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몰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해변의 남쪽 끝에 삐죽 나와 있는 몰운대는 백사장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예부터 안개와 구름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몰운대, 즉 ‘구름 속에 빠진
섬’이라고 불렀다. 바닷가 옆으로 난 조붓한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다대포에서 낙동강으로 조금 가면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을숙도가 나오는데
다대포에서 을숙도 입구까지 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여행하는 코스도 인기 있다.
출처:(대한민국 여행사전, 2009. 3. 20., 터치아트)
몰운대(沒雲臺)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대지 일원.
부산광역시기념물 제27호.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산시의 중심가에서 서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다대포와 인접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4만평에 이른다. 이 일대는 지형상의 여건으로 인하여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모든 것이 시야에서 가리워지기 때문에 ‘몰운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다대포와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었던 정운(鄭運)도 이 앞바다에서
500여척의 왜선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그는 이곳의 지명을 몰운대라
한다는 말을 듣고 ‘운(雲)’자와 자기 이름의 ‘운(運)’자가 같은 음이라는 점에서,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정운을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고 하며 지금은 그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이 곳은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 낙동강의 물에 밀려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이순신·이억기·원균 등이 이끈 전라좌도(全羅左道)
·전라우도(全羅右道)·경상우도(慶尙右道)의 수군이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의 화손대(花孫臺) 부근 화준구미(花樽龜尾)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구미’는 길게 뻗은 곶이 후미지게 휘어진 지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배경과 원인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함대는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여 1592년 6월 16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8월 14일 한산도대첩까지 일본군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9월 6일부터는 일본군이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부산포(釜山浦)를
공격하기 위해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의 부대와
함께 함대를 편성해 합동 훈련을 하였다.
부산포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친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의 함대는 9월 29일 여수를
출발해서 그날 오후 남해도(南海島) 서북단의 관음포(觀音浦)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경남 통영의 사량도(蛇梁島) 앞바다에서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와 합류해서 함께 당포(唐浦)로 이동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가 이끄는 8천여 명의 수군과 470여
척의 전함을 부산포 일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수군은 3도의
병력이 모두 집결한 상태에서도 전선(戰船) 74척과 협선(挾船) 92척의
규모에 지나지 않아 병력과 선박의 수가 모두 열세였다.
발발과 전개과정
거제도 인근의 칠천도(七川島)를 거쳐서 진해의 원포(院浦)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해안
지역을 수색하며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했다. 그러면서 고성·진해·창원 일대의 일본군이
모두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 바깥으로 이동해서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10월 3일 가덕도의 천성포(天城浦)에 정박한 조선 수군은 다음날 김해와 양산 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낙동강 하구의 장림포(長林浦)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타고 있는 선박 여섯 척을 발견해 모두 파괴했다.
10월 5일 새벽 부산포를 향해 이동하던 조선 수군은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대형 선박
5척을 발견하고 모두 침몰시켰다. 그리고 다대포 앞바다에서 8척, 서평포(西平浦)
앞바다에서 9척, 절영도(絶影島)에서 2척의 일본군 선박을 잇달아 침몰시켰다.
결과와 영향
곧바로 부산포 앞바다로 이동해간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육지로 달아나 반격을 가해
오는 사이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 선박을 공격해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물러났다. 3도의 수군이 연합해서 벌인 작전이 큰 성과를 거두자 조정은 삼도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위를 새로 만들어 이순신에게 맡게 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은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서 이키 섬
[壹岐島]과 쓰시마 섬[對馬島]을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광역시 서쪽을 흐르는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하는 구역에 형성된 모래섬.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여 장장 525㎞를 흘러 부산광역시 강서구와
사하구에 이르러 남해로 유입한다. 낙동강은 남해로 유입하며 바다와 강이 만나는
수역에 모래섬을 형성하는데 이를 학술 용어로 연안 사주[barrier island]라고 한다.
그러나 낙동강 유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울타리 섬,
모래섬, 등(嶝), 모래톱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낙동강 하구 모래섬[연안 사주]는 파랑이나 조류 또는 해류에 의해 해안선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해안선과 거의 평행을 이루며 형성되는 좁고 긴 모래의 퇴적 지형이다.
낙동강 하구에서는 낙동강을 빠져나온 모래나 진흙이 남해와 만나 가늘고 길게 퇴적
된 지형이 형성되었다. 낙동강이 침식하여 운반되어 온 토사가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해안에 도달하면 해류나 조석, 파랑 등 바닷물의 작용을
받아 해안선에 평행한 모래섬을 발달시킨다.
낙동강 하구에는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현재 3열의 연안 사주가 발달해 있으며, 여기에
다시 제4열의 연안 사주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울타리 섬은 열을 지어 형성되어 있는
연안 사주의 형태에서 따온 이름이다. 낙동강 하구 모래섬은 낙동강 삼각주 지형의 일부
로 삼각주의 하부에 새롭게 발달하였다. 낙동강 하구에 형성되어 있는 연안 사주[등]들과
그 섬들이 지형도에 등재된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연안 사주들은 낙동강
하구로부터 먼 바다 쪽으로 서서히 발달해 나갔는데 명호도 남쪽으로 제1열의 섬들은
명호도로부터 약 1,000m, 제2열의 섬들은 제1열의 섬들로부터 약 500m, 그리고
제3열의 섬들은 제2열의 섬으로부터 250m 거리에 발달해 있다.
모래섬은 삼각주 내부의 섬처럼 육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 형성되어
그 출현 순서를 알 수 있는데, 1904년 지형도에는 신호도, 진우도, 대마등, 을숙도가
등재되어 있으며, 1916년 지형도에는 장자도[장자등, 옥림등]가 처음 출현한다. 1955년
지형도에는 백합등이 나타나고, 1975년 지형도에서는 새등을 처음 확인할 수 있다. 1981
년 지형도에는 나무싯등, 1983년 지형도에는 홍티등[무지개등], 1986년 지형도에는
도요등[철새등], 1989년 지형도에는 맹금머리등[맹그머리등, 맨끝머리등]의 생성이
나타난다. 현재도 모래섬은 낙동강 하구에서 남해를 향하여 계속 성장해 나가고 있다.
진우도 남쪽, 새등 남쪽 그리고 도요등 남쪽에서 새로운 등[새부리등]이 성장하고 있고,
또 다대포 해수욕장 앞쪽 몰운도 서쪽 해안에도 새로운 등[몰운대등]이 2010년부터 대기
중에 노출되었고 2012년 현재 해수면상에 출현하였다. 특히 낙동강 하구둑이 준공된 이후
연안 사주들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어선이 다니는 통로까지 매립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다대포와 가덕도 사이의 바다에 토사를 퇴적하여 머지않아 육지로 성장시킬 것이다.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모든 연안 사주는 주민이 없는 무인도이며
문화재 또는 환경 보존 지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 맹금머리등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 1150번지에 있는 모래섬으로, 면적 13만 9,636㎡에 육지로부터
120m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맹금머리등은 솔개나 매와 같은 맹금류가 서식하고 있는
등이라는 뜻을 가진 섬이다. 본래 을숙도 남단에서 남쪽으로 길게 성장 발달하던 십리등,
반월등이 장림어촌계, 보덕포어촌계, 홍티어촌계의 어선들의 항로를 막아 통행에 방해가
되자 낙동강 하구둑 축조 이후 장림과 보덕포 중간 지점을 절개하여 어선들의 출입을 편하게
하였다. 그 후 이 섬은 점차 성장하여 현재는 삼각형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맹금머리등의
북쪽에는 을숙도, 낙동강 하구둑이 있으며, 동쪽에는 무지개 공단이 들어서 있다.
2. 백합등
백합등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597번지에 있으며, 면적 41만 310㎡에 육지로부터
70m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백합등은 일명 사자도, 사자등이라고도 부른다. 이 섬은
무지개 마을 사람들이 백합 조개를 주로 채취하던 곳으로 백합등이라 하였다. 현재 백합
등에서는 인근 어촌계에서 김 양식과 재첩을 채취하고 있다. 갈대와 염생 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철새들이 모여들고 여름철 홍수가 지나가면 상류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가 산더미
처럼 쌓인다. 이 섬의 동쪽으로 장림골, 서쪽으로는 진동골[갯골]이 있어 조수가 드나든다.
백합등의 동쪽에 무지개 공단이 조성되어 있어 해안 공업 지대로 성장하고 있다. 서쪽
으로 장자도와 새등, 남쪽으로 나무싯등, 도요등,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며, 급속한
퇴적으로 백합등 주위의 나무싯등, 다대등, 홍티등 등이 결합되고 있다.
3. 도요등
1986년 이후에 성장하면서 대기 중에 노출된 모래섬이다. 도요등은 출현 이후
한글의 ㄴ자 모양으로 크게 성장하여 지금은 낙동강 하구 모래섬 중 가장 큰 섬으로
발달하였다. 이 섬에 도요새가 많이 깃들어 도요등이라 부르며, 일명 철새등
이라고도 한다. 도요등은 철새들의 산란 휴식 은둔지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각종 어패류의 양식장이 분포한다.
4. 대마등
대마등은 강서구 명지동에 위치하며 명지 주거 단지와 약 250m 거리에 위치한 길이
1.8㎞, 최대 너비 130m, 면적 0.24㎢인 무인도이다. 이 섬은 철새 보호 구역[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이 섬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어
대마등이라 부르며 명지 사람들이 물때를 맞추어 들어와 농사일을 하고 다시 명지
로 돌아간다. 이곳에서는 대파를 주로 재배하였으며,
주변에서는 어패류 양식이 성행하였다.
5. 장자도
장자등, 옥림등, 옥리등, 흐릉등으로 지칭되는 모래섬으로 강서구 명지동에 속한다.
1960년경 하신 부락의 조원익[당시 19세]이 들어와 밭을 일구어 보리농사를 지으며
일시 거주하였으나, 태풍이 심해지면 거주가 불편하여 태풍 사라호 이후 무인도
가 되었다. 이 섬은 1951년 면적이 0.577㎢에서 1978년 0.132㎢로 줄어들었으나
최근에는 0.4632㎢로 크게 성장하였다. 장자도라는 지명은 ‘섬이 크다’는 의미를
가지며, 옥림등이란 ‘오리들이 온다’는 의미를, 흐릉등이란 ‘파도소리가 으르렁
거리며 들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섬 주변에는 양식장이
분포하고 철새들이 많이 모여든다.
6. 새등[신자도]
새등은 강서구 명지동 남단에 위치한 모래섬이다. 명지 주거 단지로부터 남쪽으로
대마등-장자도-새등 순으로 연안 사주가 발달하였다. 새등이란 새로 생겨난 섬이란
의미를 갖고 있어 신자도라고도 부른다. 이 섬의 육지 쪽 해안은 비교적 바다가
잔잔한 편이나 바다 쪽 해안으로는 항상 파도가 밀려온다. 주변에는 김 양식장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좁은 갯골을 지나면 진우도이다.
7. 진우도(眞友島)
진우도는 강서구 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 신호 공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1.25㎞ 서쪽으로 약 300m 거리에 가덕도, 동쪽으로 250m 거리에 신자도가 있다. 이
섬은 1950년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보호하는 사회 복지 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태풍 사라호 시 큰 피해를 입어 진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진우도는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던 진우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 진우도에는
현재 농심 사원 교육용 건물과 삼흥수산의 김 가공 공장 및 종업원 숙소가 있고, 섬의
중간 지대에는 정주하는 주민은 없으나 농사를 짓고 있다. 진우도와 신호 공단 사이의
바다에는 굴 양식장이 넓게 분포하며, 최근에는 진우도 일대의 갯벌 체험을 위하여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진우도 서쪽에는 가덕도와
부산 신항만, 녹산 공단이 입지하고 있다.
『부산시사』1(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김해 농조 80년사』(김해농지개량조합, 1996)
반용부, 「낙동강 삼각주의 지형과 표층 퇴적물 분석」(경희대학교, 1986)
반용부,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연안 사주」(『부산 연구』2, 2005)
후지와라 겐조, 「낙동강 삼각주 평야의 개발」(『부산 연구』2, 2005)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대포 처녀/67
한산도:작사
한산도:작곡
이미지:노래
마음주지 말것을 믿지말것을
타향에서 흘러온 야속한 사람
고기떼를 따라서 찾아왔다가
갈매기떼 따라서 가버린 사람
다대포 그처녀가 그리워 운다
떠나갈때 차라리 아무말없이
나를두고 갔으면 속편할것을
부질없는 맹세을 지은 까닭에
하염없는 세월을 기다리면서
다대포 그처녀가 오늘도 운다 .
2018-03-19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