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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胡 十 六 國 時 代
前涼(전량)
오호십육국시대에 난립했던 나라 중 하나로 한족 출신의 장궤가 301년에 건국하였다.
통칭 張涼(장량) 376년 苻堅(부견)이 보낸 요장에 의해 멸망하였다.
前 涼 王 朝 世 家
前涼(전량 AD. 301∽AD. 376) 漢族(한족) 위치 간쑤(감숙) 성: 張(장)
|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제1대 | AD. 301∽AD. 314 | 武王(무왕) | 張軌(장궤) | 姑臧 | 甘肅省 武威市 | |
| 제2대 | AD. 314∽AD. 320 | 明王(명왕) | 張寔(장식) | 장궤의 아들 | 고장 | 감숙성 무위시 |
| 제3대 | AD. 320∽AD. 324 | 成王(성왕) | 張茂(장무) | 장식의 동생 | ||
| 제4대 | AD. 324∽AD. 346 | 文王(문왕) | 張駿(장준) | 장식의 아들 | ||
| 제5대 | AD. 346∽AD. 353 | 桓王(환왕) | 張重華(장중화) | 장준의 차남 | ||
| 제6대 | AD. 353 | 哀公(애공) | 張耀靈(장요령) | 장중화의 자 | ||
| 제7대 | AD. 354∽AD. 355 | 威王(위왕) | 張祚(장조) | 숙부 | ||
| 제8대 | AD. 355∽AD. 363 | 沖王(충왕) | 張玄靚(장현정) | 장중화의 자 | ||
| 제9대 | AD. 363∽AD. 376 | 悼公(도공) | 張天錫(장천석) | 장준의 아들 |
장궤는 西晉(서진)의 관료로 尙書郞(상서랑). 散騎常侍(산기상시) 등의 중직을 역임했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중앙조정의 한계를 느끼고 301년에 護羌校尉 涼州
刺史(호강교위 양주자사)를 자청해 涼州(량주 甘肅省 중서부)에 부임하였다. 장궤는 양주
를 장악한 후에도 서진의 신하로써 자처하였다.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여 서진에서는 장궤를 西平郡公(서평군공
)으로 임명하였다. 314년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제1대 무왕(AD. 255∽AD. 314) 전한의 개국공신 장의의 후손
장궤는 前漢(전한)의 개국공신 張耳(장의)의 후손으로 관직에 나가 상서랑. 신기상시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장궤는 서진의 상황이 어려운지라 하서를 점거해 보려는 생각을 가
져 호강교위, 양주자사를 되기를 요구해 301년에 양주자사가 되었으며, 당시 양주의 경
계안에 도적이 발호하고, 선비족이 노략질을 하자 그들을 격파해 10,000여 명을 참수했
다. 장궤는 혜제 사마충에게 사자를 파견해 근왕을 위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청하
여 허락을 받았다. 이때 혜제가 사마모를 사자로 파견해 장궤에게 검을 하사했으며, 장
궤는 중독호 범원에게 20,000명을 주어 한치를 공격해 항복시켰다. 얼마 후에 약라발능
이 양주에 침입하자 사마 송배를 파견해 그를 죽이고 10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 공으로 장궤는 안서장군을 더해 1,000호를 받아 안락향후에 봉해졌고, 이곳에 곳간을
만들었다. 313년에 사마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공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했다. 314년
장궤가 늙고 병이 들자 민제 사마업의 장안 조정에서 장궤의 아들인 장식을 부자사로 삼
았다. 여름 5월에 장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힘쓰면서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
고 아래로는 집안을 평안히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0일에 사망했다.
제2대 명왕(AD. 271∽AD. 320) 장궤의 아들
젊었을 때 학식이 높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수재로 추천받아 낭중에 임명되었다. 307년에
는 효기장군직을 사양하고 아버지 장궤가 다스리고 있는 양주로 돌아가길 청하자 서진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양주에는 서평태수 조거, 농서내사 장월, 장진 등이 장
궤를 죽이고 양주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는 일이 터졌다. 장진은 겁을 먹
고 자신의 부하인 노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모든 것을 일러바치고 항복했다. 이에
장궤가 아들 장식에게 전 봉독호 송배, 장수 윤원과 보,기 30,000명을 주어 조거를 토벌
하게 하니, 조거는 잡혀 죽고 장월은 하북으로 도망쳤다. 서진 조정에서는 장식의 활약을
전해받고 그를 건무정후에 봉했다가, 이후 서중랑장에 임명했고 복록현후에 봉했다.
314년 장궤가 사망함에 장식이 뒤를 이어 양주자사 서평공이 되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로 자처하였으며, 317년에 西晉(서진)이 멸망하고 司馬睿가 東晉(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하자 다시 동진에 복속하였다. 320년 劉弘(유홍)이 종교전쟁을 일으켜 장식이 진압
하였으나, 유홍의 신하인 閻涉(염섭)에 의해 암살당했다.
제3대 성왕(AD. 227∽AD. 324) 장식의 동생
형 장식이 양주를 떠나 서진의 중앙 관료로 활동할 때, 장궤 곁에 남아 양주의 업무를 보
좌했다. 312년에 남양왕 사마보가 장무를 서진 조정에 종사중랑, 산기시랑으로 추천했지
만 사양했다. 바로 다음에(313년) 3월, 영가의 난으로 포로로 잡힌 진 회제 사마치가 호
한의 열종 소무제 유총에게 모욕을 당한 후 살해당하고 서진이 붕괴되자 사마보는 멋대
로 관직을 내려 장무를 평서장군, 진주자사에 임명했다. 320년 6월 형 장식이 사이비 교
주 유홍에게 넘어간 측근들에게 암살당했다. 장무는 관련자들을 모두 주살한 뒤, 너무
어린 조카 장준을 대신하여 장식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장식의 부하들은 장무를 대도독,
양주목, 태위로 추대하려 했으나 거절했다. 장무는 형의 관직이었던 지절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직만을 계승했고, 조카 장준에게 무군장군, 무위태수, 서평공의 작위를 넘겨주었
다. 그리고 자신과 사돈 관계인 양주의 호족 가모씨가 가씨 가문의 세력을 믿고 방종한
것을 보고 처형해 양주의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322년, 장수 한박에게 군사를 주어 진
주를 점령했다. 이듬해 323년 前趙의 劉曜(전조의 유요)가 29만의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
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유요가 이끄는 친히 이끄는 전조의 군대는 고창을 공격해 함락시
키고 황하 인근 지역을 뒤흔들었다. 결국 장무가 유요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대량의 공
물을 바치자, 유요는 장무에게 지절과 부월을 주어 그를 시중, 태사, 영대사마에 임명하고
양왕에 봉한 뒤 물러갔다. 324년, 장무는 병으로 승하하자 유요가 사자를 보내 그를 성렬
왕으로 추증했다. 장무에겐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장준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
랐다. 후에 위왕 장조가 장무를 성왕으로 추존했다.
제4대 문왕(AD. 307∽AD. 346) 장식의 외아들
316년, 진 민제 사마업이 조서를 내려 장준을 패성후에 봉했다. 이후 아버지 장식이 암
살당하고 숙부인 장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아버지의 작호였던 서평공을 물려받았다.
324년에 장무가 병사하자 양왕을 승계했다. 전조의 황제인 유요가 사자를 보내 장준을
대장군, 양주목에 임명하고 양왕에 봉했다. 전량의 장수 신안이 장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하남 지방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준은 두도 등을 보내 토벌할려고 했지만 종사
유경은 신안이 얼마 안가 항복할 것이라며 말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듬에 신안이 땅
을 들어 항복해왔다. 327년, 전조가 후조의 고조 명황제 석륵에게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
고 전조에서 준 관작을 모두 버린 뒤, 전조의 진주를 공격했다. 하지만 남양왕 유윤에게
패배하고 오히려 기세를 탄 유윤의 군대에 쫓기게 되었다. 유윤은 황하를 건너서 영거와
진무를 함락시키고 전량군 20,000명을 죽여 하서를 뒤흔들었다. 장준은 황보해를 보내
막도록 했지만 금성태수 장량과 포한호군 신안이 모두 땅을 바치고 전조에 항복을 하는
바람에 하남 지역의 땅을 다시 빼앗겼다. 329년, 전조의 잔당이 후조에게 완전히 멸망해
버린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다시 하남 지역을 되찾았다. 그리고 적도, 석문을 거쳐 합
수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조는 맹의를 사자로 보내 장준을 진서대
장군, 양주목에 임명했지만, 후조에 복속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장준은 맹의를 붙잡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해(329년) 9월 흉노족 왕강이 후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양주로 도망쳐왔다. 후조의 군대가 보복하러 올까바 겁을 먹은 장준은 억류하
던 맹의를 돌려보내고, 후조의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331년, 무기교위 조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역장사 이백을 패퇴시켰다. 장준의 측근 중 한 명은 이백이 조장과 내통하여
일부로 진것이라고 참언했지만, 장준이 이백은 죄가 없음을 밝히고 처형하지 않아 사람
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333년, 동진에서 사람을 보내 장준에게 진서대장군, 양주자사,
영호강교위직을 수여하고 정식으로 서평공에 봉했다. 또한 龜玆(귀자). 鄯善(선선) 등
서역 여러나라를 지배하고 농서지역을 경영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
력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 양왕를 자칭하기도 하였다. 346년, 장준이 승하했다. 동진에
서는 진 목제가 그를 대사마, 충성공으로 추증했고, 전량에서는 그의 아들 장조에 의해
문왕으로 추존되었다. 장남은 장조였지만 첩의 소생이었던 관계로 차남인 장중화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제5대 환왕(AD. 327∽AD. 353) 장준의 차남
332년, 부왕 장준이 중견장군 송집의 권유를 받아들여 5살에 세자가 되었다. 이후 18세
가 되어 장성했을 때 오관중랑장, 양주자사로 임명받았다. 346년, 장준이 승하하고 장중
화가 양왕을 승계받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도독, 태위, 호강교위, 서평공, 가양왕을
자칭했다. 그리고 자신의 양어머님인 왕후 엄씨를 태왕태후로 높혀 영훈궁에 거처하게
했고, 자신의 생모인 마씨 부인은 영수궁에 거처하도록 했다. 왕에 오른 장중화는 부세
와 관세를 경감하고, 궁궐의 정원을 떼어 백성들의 농지로 나누어주었다. 349년,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과 후조를 치기로 비밀리에 약조했지만 얼마 안가 염민이 즉위
후조가 멸망해버렸다. 352년, 후조의 왕탁이 전진의 고조 경명제 부견에게 패배하여 전
량으로 망명했다. 장중화는 왕탁을 후히 대접하고 그를 정로장군, 진주자사로 삼은 뒤,
장수 장홍과 종유 등에게 15,000명의 군사를 주어 왕탁을 도와 전진을 치도록 했다. 그
들은 북평공 부석과 종려에서 크게 싸웠지만 대파당했고, 장홍과 종유 등은 모두 전사했
으며, 왕탁은 진주를 버린채 혼자 양주로 도망쳤다. 장중화는 매우 슬퍼하며 상복을 입고
전사자들을 위해 통곡했으며, 유족들에게 직접 조위를 표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왕탁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진주를 되찾고는, 동진에 사자를 보내 전진을 정벌하겠다는 서신을 바
쳤다. 353년, 동진은 조서를 보내 회답했으나 장중화는 조서를 받기 전에 병으로 승하했
고, 아들 장요령이 뒤를 이었다. 동진의 효종 목황제는 정열공으로 추시했고, 훗날 그의
형 장조는 장중화를 환왕으로 추존했다.
제6대 애공(AD. 344∽AD. 355) 장중화의 장남
353년,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좌장사 마급을 보내 장남 장요령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
고 형 장조로 하여금 세자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다음달인 11월에 장중화의 병이 악화되
어 오늘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증화는 손수 조서를 써서 주천태수로 좌천되어 있
던 명장 사애를 위장군으로 삼고, 중앙으로 불러 조정의 정무를 맡기려고 했지만 庶兄
(서형)장조가 장중화의 총신인 조장, 위집 등과 결탁해 조서를 중간에서 빼돌렸다. 사애
가 끝내 오지 않자 장중화는 어쩔 수 없이 장조 조장, 위집 등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승
하했다. 어린 세자 장요령은 부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 대사마,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
평공을 자칭하고, 보정대신인 백부 장조에게 지절을 내려 도독중외제군사, 무군대장군에
임명했다. 353년 12월 조장과 위집 등은 대신들을 모은 뒤, 천하가 혼란하니 연장자가
군주에 올라야 한다며 장요령을 폐위하고 장조를 옹립할 것을 건의했다. 사전에 장조와
내통한 왕태후 마씨까지 나서서 장요령 폐위에 앞장섰고, 결국 장요령은 왕위를 빼앗긴
후 양녕후로 강등되었다. 355년 7월, 조카 장요령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장조가 패악
질을 일삼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분노했는데, 특히 하주자사 장관이 장조를 매우 혐
오했다. 장조 역시 이를 알고 장예태수 소부로 하여금 하주를 관리하도록 하고, 장관에
겐 포한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부장 역췌와 장령에게 13,
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장관의 군대를 습격하게 하자, 장관은 폭발하여 역췌를 무찌르
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하주로 가 소부까지 살해한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 장관은 전량
각지에 격문을 뿌려 장조를 다시 후작으로 끌어내리고, 패왕 장요령을 옹립하겠다는 뜻
을 밝혔다. 8월에 장관과 그에게 동조한 대신들이 장요령을 모셔오려고 했으나 장조가
선수를 쳐서 양추호를 보내 장요령을 궁중 동쪽 정원으로 납치해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 양추호는 장조의 명령에 따라 12살이었던 장요령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죽이고, 사
체를 모래구덩이에 숨겼다. 조카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은 장조는 애공이라는 시호를 하
사했다.
제7대 위왕(AD. ?∽AD. 355) 장조는 장준의 서자로 장중화의 형이다.
젊어서 장녕후에 봉해졌고, 위엄과 학식이 있어 정사를 잘 처리했다. 그러나 천성이 교
모하고 음란하고 음침한 구석도 있어, 부왕인 문왕 장준이 승하하자 양어머니인 왕태후
마씨와 간통을 저질렀고, 환왕 장중화 몰래 그의 총신들인 조장, 위집과 의형제를 맺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353년, 서동생 장중화가 병사하고 어린 세자 장요령이
즉위했다. 장조는 환왕 장중화의 유언장을 멋대로 조작하여 도독중외제군사, 무군대장군
에 임명받은 뒤, 어린 장요령을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했다. 장조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
고 장중화의 총신들을 이용해 연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고, 결정적
으로 왕태후 마씨의 승인까지 받아 장요령을 폐위시켰다. 장조는 즉위 이후 대도독, 대
장군, 양주목, 양공을 자칭했다. 더이상 꺼리낄 것이 없었던 장조는 황음무도하여 더욱
막나가기 시작했다. 선왕인 장중화의 정처인 왕태후 배씨를 강간하고, 부왕인 문왕 장준
과 서동생인 환왕 장중화의 비첩들은 물론 아직 시집가지 않는 자신의 조카딸과 이복
여동생 들까지 궁중에서 그가 범하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장조의 이런 막장 행보에 대
한 소문이 알려져 전량의 백성들 사이에선 이를 조롱하는 〈담자〉라는 시가 퍼졌다. 355
년, 평소 싫어하던 친척인 하주자사 장관을 부한으로 보낸 뒤, 부장 역췌와 장령에게 보
병과 기병 13,000명을 주어 기습하게 하고 소부로 하여금 장관을 대신하여 하주를 다스
리게 했다. 이 소식을 입수한 장관은 격분하여 황하를 도하 중이던 역췌의 군대를 역으
로 기습해 대파하고 자신의 본거지 하주로 돌아가 소부를 죽였다. 역췌가 패배하고 돌
아오자 장조와 그의 측근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때, 효기장군 송혼이 도성을 빠져나와
둔황에 도착하여 아우 송징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장관에게 호응했다. 황제
장조는 양추호를 보내 반란군이 옹립하려던 폐왕 장요령을 끔찍한 방법으로 암살하고
그 시체를 모래구덩이에 숨기해 했다. 그리고는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장요
령을 애공으로 추시한 뒤, 그의 사망 사실을 공표했지만 사기는 떨어지기는커녕 더 커
져만 갔다. 오히려 사태가 악화되자 이번에는 도성 고장에 남아있었던 장관의 아우 장
거와 장숭을 잡아죽이려 들었다. 이를 눈치챈 장거와 장숭은 집을 뛰쳐나와 사람들이
많은 도성 바닥에서 크게 소리쳤다. “장조가 무도하여 우리 형이 군대를 이끌고 성 동
쪽에 도착했다. 여기에 감히 반항하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다!” 그들의 고함 소리를
듣고 무리가 수백명 정도 모이자, 장거와 장숭은 이들을 이끌고 궁궐 서문으로 가 그곳
의 수비군과 혼란스럽게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영군장군 조장 등이 겁
을 먹어 태후 마씨의 승인을 받아 장조를 버리고 장현정을 새로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
만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장조가 역췌를 보내 조장 등의 무리들을 살해했다. 얼마 지나
지 않아 장거, 장숭의 무리들이 대궐로 진입하자 장조는 검을 빼들고 옥좌에 앉아서 좌
우 부하들에게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외쳤다. 그러나 평소 인망이 없었기 때문에 부하들
은 반란군 무리에 항복했고. 장조는 옥좌에서 끌어내려져 분노한 병사들에게 난도질당했
다. 뒤늦게 도성에 입성한 장관과 송혼이 장조의 머리를 잘라 성 안밖으로 효시하자 백
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송혼은 장조를 서자의 예로 매장한 뒤 두 아들들을 죽이고 장현
정을 옹립했다.
제8대 충왕(AD. 350∽363) 장중화의 서자이며 장요령의 동생이다.
354년에 백부 장조에 의해 양무후에 책봉되었다. 355년, 장조가 살해되고 반란을 일으
킨 대신들이 어린 장현정을 옹립했다. 장현정은 즉위한 후 연호 화평을 버리고 원래 쓰
던 건흥으로 되돌아갔으며, 칭제도 하지 않았다. 반란의 주모자 장관을 위장군에 임명하
여 병권을 그에게 일임했다. 355년 9월, 농서의 백성 이엄이 호족 팽요를 주살하고 반란
을 일으켰다. 장현정은 우패를 보내 진압하게 했는데, 우패의 관군이 농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서평에서도 백성 위림이 반란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예상치 못한 반란군의 등장으
로 인해 우패의 군대는 협공을 받아 전멸했고, 우패 또한 혼자 도성으로 도망쳤다. 356
년, 위장군 장관은 자신의 동생 장거에게 군대를 주고 위림을 치게 하고, 사마 장요에게
도 군대를 주어 위림에게 호응한 주천태수 마기, 전선 등을 공격하도록 했다. 장거는 위
림의 주력군을 대파했고 장요 역시 승리하여 마기와 전선을 참수했다. 장거와 장요가 위
림의 반란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돌아오자 장관 형제의 권세는 더욱 높아졌고, 급기야
왕위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359년, 보국 송혼과 그의 동생 송징이 권신들인 장관
형제를 제거하고 장관의 무리들을 축출했다. 국왕 장현정은 송혼을 도독중외제군사, 기마
대장군에 임명하여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361년, 송혼이 사망하자 장현정은 송징을 영
군장군으로 임명해 송혼을 대신하게 했다. 송징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좌지우지하자,
우사마 장옹이 이를 시기하여 정변을 일으킨 후 송징과 송씨 가문을 멸족시켰다. 장현정
은 장옹을 중호군, 숙부 장천석을 중령군에 임명하여 함께 국정을 보좌하게 했다. 그러나
장옹은 거만하여 궁녀를 희롱했고, 붕당을 조직해 국정을 독점했다. 또 형벌을 남발하여
거리낌없이 사람들을 살육해대니 전량의 백성과 관리들이 모두 그를 원망했다. 이에 장천
석은 자신의 측근인 유숙 등과 장옹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361년 11월 장천석과 장옹
이 함께 입조할 유숙과 조백구가 그 뒤를 밟았다. 장옹이 궁문을 지나려는 순간 유숙이
칼을 뽑아들고는 장옹을 향해 휘둘렀지만 명중하진 못했다. 뒤이어 조백구도 칼을 뽑고
장옹을 베려했으나 둘의 칼날이 장옹에게 닿지 않았다. 단번에 죽이려던 계획이 틀어지
자 유숙과 조백구는 장천석을 따라 궁 안으로 도망쳤고, 죽을 위기를 넘긴 장옹은 자신
의 집으로 도망친 뒤 사병 300명에게 갑주를 입히고 궁문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내 장
천석의 반격을 받고 붙잡혔으며 장옹과 장옹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국왕 장
현정은 장천석을 관군대장군에 임명하고 국정을 보좌하게 하니 조정은 장천석의 손아귀
에 넘어가버렸다.(장천석의 제1차 정변) 363년, 폭군 장조와 간통하고 국정을 망친 태비
마씨가 사망하자 장현정은 자신의 어머니 곽부인을 태비로 봉했다. 곽태비는 평소 장천
석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들에게 위협이 될까 염려하여 장흠 등의 대신들과 장천석
을 제거할 방법을 모의했다. 하지만 중간에 일이 누설되어 곽태비는 유폐되었고, 장홈
등 관련자들은 사형당했다. 장현정은 몹시 두려워하여 장천석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으
나 장천석이 사양했다. 며칠 뒤 장천석은 유숙 등에게 명령을 내려 야밤에 군사를 이끌
고 왕궁을 쳐 장현정을 살해하도록 했다. 장현정은 그날 밤 살해당했고, 장천석은 다음
날 장현정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공표했다.(장천석의 제2차 정변)
장천석은 장현정을 충공으로 추시했고, 동진의 열종 효무제는 장현정에게 경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9대 도공(AD. 346∽406) 장준의 막내아들
승평 7년 363년, 장현정의 모후인 왕태비 곽씨가 대신 장흠 등과 함께 권신인 장천석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장흠 등은 자살하고 곽씨는 유폐당하자 어린 장현
정이 왕위를 양도하려 했지만 장천석이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야밤에 우장군
유숙, 양경 등 측근들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쳐 장현정을 죽이도록 했다. 장현
정은 그날 밤에 살해당했고, 장천석은 왕이 병으로 돌연사했다고 공표한 뒤 스스로 전량
의 제9대 군주가 되었다. 장천석은 자신의 어머니인 미인 유씨를 왕태비로 모시고, 동진
에 보고하기 위해 사마 윤건을 수도 건강에 파견했다.
왕에 오른 장천석은 그의 형이었던 위왕 장조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방탕하고 색을
밝혀 정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궁궐 정원에서 연회를 즐겨 열었으며, 자신의 찬탈을
도운 유숙과 양경에게 장씨 성을 하사하고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었다. 양주의 민심이 흉흉하여 장천석의 사촌동생인 중랑 장헌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승평 8년(364), 장천석의 즉위 소식을 들은 전진의 명군 부견이 사자를 파
견해 대장군, 양주목, 서평공으로 삼았다. 승평 10년(366), 동진에서 정식으로 사자를 보
내 대장군, 대도독, 독농우관중제군사,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평공에 임명했다. 본래 동
진을 섬기고자 했던 장천석은 임명을 받자마자 전진의 부견과 단교했다. 승평 11년(367),
장천석은 아들 장대회를 세자에 임명했다가 나중에 그를 고창공으로 삼아 쫓아내고 더
총애하는 막내 아들 장대예를 세자로 삼았다. 그 해(367), 전량에 반란을 일으켰던 이엄
이 아들 이순을 전진에 보내 항복하면서 농서의 땅이 전부 전진에 넘어갔다. 장천석은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한에서 전진의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한족 출신의 왕맹과
격돌했지만 패배하여 약 10,000여 명이 전사하고 7,000여 명이 전진군에 사로잡혔다.
농서가 전진에 넘어간 뒤로 지속적으로 전량을 침공해오니 국경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당시 전진은 매우 강성했으므로 장천석은 제단을 쌓아 가축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등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 전진의 군대가 금창성 부근으로 접근하자 장천석은 조충절에게
군사를 주어 요격을 시도했다. 조충절은 적안에서 전진군과 크게 싸웠지만 대패하여 조
충절은 전사하고 전량군 38,000여 명이 전사했다. 장천석은 남은 친위대 수천 명을 데리
고 전진군을 막기 위해 금창에서 나왔으나,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금창을
버리고 고장으로 퇴각했다. 다음날, 전진군이 고장성 앞까지 도착하자 동진으로 도주하려
던 장천석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전진군의 장수 구장은 장천석을 사로
잡아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니 양주의 모든 군, 현들이 항복하면서 376년에 전량
은 멸망했다. 선소제 부견은 잡혀온 장천석에게 장안의 저택을 내어주고, 상서 귀의후에
임명하는 등 환대해 주었다. 의회 2년(406), 장천석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래도 한
때 전량의 군주였던지라 장천석 사후 공제는 그를 금자광록대부로 추증했고. 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료 출처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三崎良章(삼기양장)의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그
리고 인터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