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시 한 편 / 이재부
자벌레 | 임 보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의 선승처럼
어느 성지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가사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맨몸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 시화집 『시화일률』 중에서
눈 뜨고 살면서도 자기가 사는 세상을 못 보고 산다면 모순일까. 시야에 들어오는 표상이야 상습적으로 보지만, 내면과 마주치는 감동의 자각은 어렵지 않던가. 예술을 통해서 바라보는 간추린 세상과 마주치는 감동의 맛을 즐기고 살기가 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매우 어려운 일도 아닌 듯싶다.
가방 속에 존경하는 시인의 시집을 넣고 다니며 짬이 날 때 읽어보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세상이 다가온다. 실제보다도 더 확대된 내면을 관조하는 감동의 맛, 어수선하고 복잡함을 단순화시키면서도 의미 깊게 전달해 주는 보석 같은 시상을 마음대로 맛보고, 즐기는 것은 노인이 된 나에게는 생기生氣의 충전이다.
시집은 심정을 맑게 하는 환희의 보고라고 생각한다. 시정詩情에 담아 공유하는 서정의 세계, 올곧은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는 염결廉潔의 정신, 만물과 소통시키는 명철한 시어,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상상 등 시인이 창조하는 광채는 끝이 없다. 흠모의 마음으로 탐독하고 음미하면 생각이 풍만해지고 생활이 즐거워진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듯이, 내 정서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던 미지의 경지를 안경 하나 골라 쓰는 품이면 마주칠 수 있으니 얼마나 간편한 예술 접근인가.
시를 통해서 존경하는 시인들을 따르면 더욱 즐겁다. 생각지 않은 소득이 푸짐하게 생긴다. 시흥의 전이 현상에 젖어들어, 동일시되는 세상에서 활보하며 시인이 닦아놓은 터에 환상의 집을 짓고 그 주인으로 안식하는 것이다. 그의 시세계에 마음을 던지고 시흥에 겨워 돈키호테의 기분으로 춤추는 것은 독자의 옹골진 권리가 아닐까. 시 속의 도원이 내가 거주하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임대가 아니고, 임시도 아니며 완전한 내 소유의 평화의 도성에 성주가 된 기분으로 사는 것이다.
시를 통해서 시인의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면 넓혀지는 시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즐거움의 광장으로 나가는 첩경이 된다. 고행하고 고심하며 창작한 시인의 애장시가 독자의 가슴으로 옮겨오면 시인의 심정을 넘나들며 또 다른 생명력을 첨부하게도 되리라. 독자로서 시상에 취하다보면 자기 나름의 경지로 건너뛰기도 하고, 오르기도 한다. 그때 디딤돌이 되는 시가 명시가 아닐까. 그런 시에는 누구나 감동한다. 읽고 또 읽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지는 시는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도약의 땅이요, 누르면 열리는 스위치같이 단순한 시이지만 다양한 세상을 품어 독자를 무아경無我境으로 안내한다. 그런 시를 즐기는 것은 비워둔 감성을 채우는 빛이다. 방을 가득 채우는 촛불같이 정서의 공간을 채우고, 달빛같이 어두움을 밝히며, 햇빛처럼 생명을 키우는 에너지원의 시를 애송한다.
생활 속에서 기쁨을 주는 나의 애송시 임보 선생의 「자벌레」이다. 이 시는 이해하기 쉬워서 읽으면 직방으로 느낌이 온다. 기억하기 좋은 내용이고, 암송하기 편한 운율이다. 처음에 이 시를 대할 때는 내 삶의 묘사 같아서 무릎을 쳤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주인공 자벌레 모습이 달라진다.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 모습으로도 보이고, 가사에 골몰한 아낙네로도 보이며 때로는 외로운 독거노인도 되고 내 늙은 아내의 모습으로도 비춘다. 홀로 나를 키운 힘든 아버지의 모습도 연상된다. 차마고도를 넘어 성지를 찾아가는 라마의 선승 모습이 떠오르다가도, 청년교사 시절 어린이들 체력 단련을 시킬 때 이용하던 자벌레 걸음, 물개 걸음, 게 걸음 훈련시키던 생각이나 웃음을 짓기도 한다. 차안에서 쪽지를 돌리고 구부렁거리며 동정을 호소하던 고학생의 모습이 떠오르면 금시 고달프던 인생의 내면이 비극의 무대로 바뀌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자벌레가 일보궁배一步弓拜로 찾아가는 성지는 어디일까. 천적을 피하여 찾아가는 안식의 장소이거나, 먹고 살기 위한 고행이리라. 윤회의 환생을 꿈꾸는 선승의 경지이지만 살기 위한 보호색으로 위장도 해야 한다. 일생을 기어가는 선승의 고행이다. 운명 앞에 펼쳐지는 사람들 삶도 그러하리. 사랑의 길이 가깝지 않음을 자벌레는 알까. 보호막이 부실한 번데기가 되고, 나비로 환생하여야 사랑의 교호가 가능한 생태가 아니던가. 요사이 농장에서는 자벌레 피해를 본단다. 사랑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피해도 주고받아야하는 삶의 세상에서 “일보궁배”라는 의태어가 쫓기고 쫓는 속도감마저 느끼게 한다. 짧은 시 속에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상상이 즐거움을 주는 시 그것이 시가 갈 길, 시의 참맛이 아닐까. 시는 사유思惟의 파노라마요, 묘사의 화원이며, 상상의 우주다. 그 속을 산책하고 유영하는 기분으로 시를 읽는다.
이재부 : 2007년 《한국문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빛 방황의 노래』, 수필집으로 『백팔번뇌』 등이 있음. leejbbu7418@hanmail.net
첫댓글 자벌레의 모습을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모습으로 그려냈군요.
좋은 시 한 편 만나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