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沈諹)은 사서(史書)에서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다. 충렬왕(忠烈王) 초에 공주부사(公州副使)가 되었는데 장성현(長城縣)의 한 여자가 말하기를, “금성대왕(錦城大王)께서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네가 금성신당(錦城神堂)의 무당이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네 부모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고 하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그를 따랐노라.”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또 같은 현(縣)에 사는 사람인 공윤구(孔允丘)와 사통(私通)하였는데 귀신의 말을 지어내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상국(上國)에 가려는데 반드시 공윤구를 동반하여 갈 것이다.”라고 하니, 나주(羅州)의 관아에서 역마(驛馬)를 내주었다. 하루는 우리(郵吏)가 도병마사(都兵馬使)에게 급히 보고하기를, “금성대왕이 옵니다.”라고 하니, 도병마사가 놀라며 괴이하게 여겼다. 나주 사람으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이 있어 그 신이(神異)함을 갖추어 왕에게 풍간(諷諫)하므로, 〈왕이〉 의논하기를 그를 맞아 접대하고 지나가는 주현(州縣)의 수령은 모두 공복(公服)을 입고 교외(郊外)에서 맞이하며 음식마련과 역마에 오직 삼가도록 하였다. 공주(公州)에 이르러 심양이 기다리지 않자, 무당이 화를 내며 귀신의 말로 전하기를, “나는 반드시 심양에게 화(禍)를 입힐 것이다.”라고 하고, 물러나와 일신역(日新驛)에서 묵었다. 밤에 심양이 사람을 시켜 몰래 살피니 여자가 공윤구와 함께 자고 있으므로 드디어 체포하여 국문(鞫問)하자 모두 자백하였다.
뒤에 감찰시사(監察侍史)에 임명되어 잡단(雜端) 진척(陳倜), 시사(侍史) 문응(文應), 전중시사(殿中侍史) 이승휴(李承休) 등과 함께 말하기를, “지금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아서 하늘은 가물고 민(民)은 굶주리니, 사냥하고 잔치를 즐길 때가 아닙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어찌하여 민의 일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사냥에만 열중하고 계십니까? 또 아직 길이 들지 않은 발 빠른 말을 타고 알지도 못하는 위험한 길을 달리시는데, 환란(患亂)이 갑자기 생기면 비록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부득이하다면 다만 군사들에게 명령하시어 평원에서나 짐승을 뒤쫓게 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기만 하여도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또한 홀적(忽赤, 홀치)과 응방(鷹坊)이 서로 다투어 대궐에서 잔치를 베풀고, 금을 오려서 꽃을 만들며 명주실을 묶어 봉황을 만들어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하여 형언(形言)할 수 없습니다. 한때의 오락을 멋대로 하여 잘못된 비용을 쓸데없이 들이면, 누가 상국의 법에 따라 간단하고 쉽게 받들어 모실 수 있겠습니까? 성악(聲樂)은 즉 항간(巷間)의 속된 소리를 물리치고, 교방(敎坊)의 법식대로 하는 곡을 올리는 것이 온 나라의 바람입니다. 상장군(上將軍) 윤수(尹秀)가 궁전의 잔치에서 왕을 모시는데, 상(床)에 올라가 춤을 추고 예의를 범하고 공손하지 못합니다. 대선사(大禪師) 조영(祖英)은 음란하고 더러우며 실천하거나 행하지도 않으면서 내전(內殿)에 출입하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그들을 내쫓고 책임을 물어 그 밖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소서. 또 지금 안팎으로 많은 사고가 나서 백성이 곤궁하므로 학사연(學士宴)도 또한 마땅히 그만두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심(虛心)으로 〈그 의견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새로워질 뜻을 가졌다.
〈이에〉 윤수와 조영이 서로 〈심양 등을〉 참소하자 왕이 크게 화를 내며 장군(將軍) 임비(林庇)와 지윤보(池允輔) 등에게 명하여 숭문관(崇文館)에서 심양을 국문하고 누가 그러한 의견을 제기하였는지를 묻게 하였다. 형틀에 묶어 주리를 틀고, 깨진 기와조각을 넓적다리 사이에 끼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게 하니, 피가 솟아나 땅을 적셔도 심양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심양을〉 순마소(巡馬所)에 가두니, 길가는 사람들이 형틀의 핏자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대관(臺官)의 피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에 진척과 문응을 해도(海島)에 유배보내고 이승휴는 파직시켰다. 이때 왕은 진달래꽃[杜鵑花]이란 시(詩)를 짓고 사신(詞臣)에게 화답(和答)하여 올리라고 하자, 백문절(白文節) 등이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 하늘같은 문장(文章)을 보이시고 신 등에게 화답하라 명하시니 만세(萬世)의 행운이옵니다. 심양이 감히 전하의 뜻에 거슬려 그 죄가 무겁지만, 그래도 또한 유자(儒者)이므로 관대함을 내리시어 문(文)을 숭상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간쟁(諫諍)은 성랑(省郞)의 임무인데, 심양은 법리(法吏)로 간쟁이 그 임무가 아니다. 또 그 말이 겸손하지 못하여 누가 의논을 제창한 것인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경(卿)들을 위하여 용서하겠노라.”라고 하였다. 즉시 명하여 〈심양을〉 풀어주고, 얼마 후에 진척과 문응 등도 풀어주었다.
심양은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며 딴 마음이 없으므로, 중외(中外)의 어떠한 관직에서도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시사(侍史)에 제수(除授)되자 서슴없이 조정의 기틀을 다시 떨칠 것을 자임(自任)하였으나, 불행히도 한 번 참소에 걸려 감옥에서 욕을 당하였으니 조종(祖宗)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로부터 언로(言路)가 결국 막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