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 목사
Ⅰ.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의 집중 폭우
프로테스탄트는 종교 개혁이란 개신교의 배타적인 독점물처럼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사람들이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을 무시하였다. '종교 개혁'이라고 하면 16세기의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을 가리키는 것이 역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에 의하여, 예수에 의하여, 그리고 거듭 일어난 신흥교단 창립에 의하여서 성서 종교의 근원에로의 회귀가 주장되었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성서 종교의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던 최후의 대돌파의 시도였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루터의 종교 개혁은 서양 교회를 분열시켰고 분파화 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개신교의 모든 교파가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 것은 로마에 대한 '나인(Nein : 반대)이라는 한 점밖에 없다. 개신교도들은 저마다 신앙의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면서 서로 배격하고 대결하고 있다. 세계 교회협의회가 개신교의 끝없는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교파와 종교, 인종과 성의 차이, 남과 북, 동과 서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장벽을 헐고 인간 기초 공동체 형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섰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희망의 징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아직도 자기들 사이의 내분과 분쟁으로 시간을 보내며 이웃(타자)과 세계에는 눈을 돌릴 여유도 갖고 있지 않다. "타자를 위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나 사실은 자기밖에는 모르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 가톨릭 교회의 '종교 개혁'이라고 볼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평신도는 물론이고 목사나 신학생들이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동향에 대하여 주목하며 가톨릭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려는 생각 같은 것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개신교는 중병을 앓고 있다. 미국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기독교를 현대 세계에서 뜻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좋은 실례이다"는 물음에 대하여 29%밖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공민권을 위한 투쟁에 남부로 향한 북부의 목사와 학생에 대하여서 나는 근본적으로 동정적이다"라고 대답한 개신교 목사는 64%인데 개신교 평신도는 33%뿐이었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의 평신도는 인권 데모 참가에 반대하였다. 성직자의 2/3 이상은 교회의 정치적 발언에 찬성이었으나 평신도의 반수 이상은 찬성하지 않으며 불안한 사회 속에서 고뇌하고 있는 자기들에게 위안과 평안만을 줄 것을 바라고 있다.
사회학자 찰스 Y. 글록크 등의 공동 연구 「위안하는 것과 도전하는 것 - 현대 교회의 하나의 딜레마」는, '60년대 미국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서 넓어져 가고 있는 대립과 단절을 "교회 안의 집중 폭우"라고 보고 있다.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외치고 나선 프로테스탄트 주류 교회가 개신교 안의 집중 폭우에 의하여서 쇠퇴 일로의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은 진보적인 급진주의 신학과 보수적인 근본주의 신학이나 카리스마 운동 사이의 대립으로 신학계가 양극화되며 신전통주의 신학이 '6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붕괴한 데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한국 개신교의 현장도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병에서 멀지 않다.
논점을 가톨릭의 종교 개혁으로 옮기겠다. 프랑스의 교회사가 앙리 다니엘 로부스는 「가톨릭의 종교 개혁」이라는 저서를 발표하였다. 개신교 역사가에 의하면 가톨릭의 종교 개혁은 '대항 개혁'이며 종교 개혁의 반동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이해는 사실일까? 개신교는 '대항 개혁'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배우려고 하고 있을까? "날마다 종교 개혁"이라고 한 루터나 "종교 개혁은 계속 진행된다"라고 외친 슐라이어마흐의 말을 알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후예들이, 급변하는 세계의 상황의 변화를 직시하며 일으키고 있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종교 개혁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 오게 되는 날 현대 프로테스탄트는 건전한 교회 갱신 운동,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금세기 최대의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가 에큐메니칼 기도 주간에 쓴 글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공동 집회에서 하기로 되어 있는 강연인데 그의 최후의 글이기도 하다.
"우리들에게 특히 흥미 있는 것은 이 움직임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과 복음파 가톨릭, 양파 가운데서 때를 같이 하여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이 운동이 보다 많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장광을 띄고 있다는 것인데, 복음파보다는 오히려 베드로파 내부에서 더욱 그러하다."
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사
칼 바르트의 최후의 글, "최후의 증언"에서 교회의 일치와 세계 인류의 일치를 향하는 '보다 넓은 에큐메니즘'의 행진에서 베드로파 가톨릭과 복음파 가톨릭이 손에 손잡고 함께 대화하며 협력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본다는 것은 이 시대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 현대 가톨릭이 크게 개혁되었으나 그 이전의 가톨릭에는 개혁을 알지 못하는 보수 반동적인 교회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 이런 잘못된 편견은 재빨리 불식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악명 높은 교황 무오설을 선언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반근대성과 보수 반동성을 노골화시킨 의회로 알려지고 있다. 1864년에 발표한 '현대 오류설'의 연장선 위에서 "가톨릭 신앙에 대한 교의 결정"이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반대자가 상당수였다. 반대자 가운데는 교황 무오설을 선언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가 교황을 전제 군주라고 오해하게 하며 '종교개혁-계몽주의-프랑스 혁명' 이라는 도식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읽고 "합리주의, 범신론, 유물론, 무신론의 근원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을 들고 있는 것"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라고 생각되는 문구를 삭제"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뿐 아니라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수십 년 후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도 공표 된 주장과 성명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내부에는 보수 반동 조치라는 낡은 껍질을 깨칠 수 있는 개혁의 맹아가 잠재적으로 숨겨져 있다.
가톨릭의 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부터 지방적 단편적으로 숨겨져 있어 왔다. "트리엔트 회의는 무엇보다도 가톨릭 개혁의 하나의 정점이며 그 개혁의 업적에서 교회 사상 최대의 교회 회의이다" 라고 주장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본다면 종교 개혁은 가톨릭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고 루터는 프로테스탄트가 되기 전에 가톨릭 종교 개혁자였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가 되는 것으로 가톨릭의 종교 개혁의 전진을 방해하기는 하였으나 결코 멈추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사가 레에베닛히는 루터가 가톨릭의 종교 개혁을 방해하였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루터의 종교 개혁을 계기로 하여서 가톨릭 교회 안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재미있게 쓰고 있다.
"분명히 저들은 루터를 교회 재판 좌석으로 끌어내어 추방하고 파문하고 여기 저기에서 그에게 화형을 선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전투 방법은 내적인 곤혹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 싸움을 통하여 점차 그들 자신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고 이 자각에 거듭 힘입어서 다시금 공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일에서 분명히 가톨릭 교회는 루터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루터에 의한 혁신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루터만큼 가톨릭 교회의 혁신에 공헌한 이는 없다 ......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루터에 의하여 대항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동시에 자각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종교 개혁은 가톨릭에게도 교회사상 가장 깊은 곳까지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Ⅲ. 루터상과 종교 개혁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가톨릭 종교 개혁의 전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가톨릭에 의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연구와 그 평가이다. 16세기 당시의 루터상은 적의에 가득 찬 것으로 '이단자'일 뿐 아니라 '호색가'이며 '범죄자'였다. 1549년 출판된 요하네스 코홀로이스의 「마르틴 루터의 행위와 저작에 대한 주해」는 대표적인 증오에 가득 찬 루터전이다. 그 후 금세기 초까지의 가톨릭의 루터상은 대동소이하였다. 종교 개혁을 신앙적 동기가 아니라 육욕적 동기에서 설명한 독일 도미니칸 수도사이며 중세 전문가였던 하인릿히 데니플레의 두 권의 큰 저서 「원자료에 의한 루터 및 발전 초기의 루터주의」, 루터를 병리심리학으로 조명하여 과대 망상주의 정신이상자로 단정한 냉철한 비판서인 2,500면을 넘는 교회사가 하르트만 그리자아르가 쓴 세 권의 대작, 「루터」와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그 사업」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을 '열교', '배교', '이단'이라고 보던 전통적 견해에서 벗어나서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요제프 로르츠의 두 권의 저서, 「독일에서의 종교 개혁」이 효시를 이룬다. 로르츠는 중세기 말기의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루터의 종교 개혁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하며 가톨릭 교회의 죄책에 대하여 말한다. 데니프레나 그리자아르의 루터상에 반하여 그는 루터를 종교적 인간이라고 한다. 로르츠는 루터의 주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지만 종교 개혁에 의하여 비극적인 분열이 생긴 것은 가톨릭측이 루터파들의 순수한 신앙적 관심을 진지하게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가톨릭측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 후 루터에 대한 5백 이상의 문헌을 검토하고 루터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준 아돌프 헤르테의 천 페이지가 넘는 대저 「코홀로이스의 루터 주해의
주문에 사로잡힌 가톨릭의 루터상」, 프랑스의 네오 토미스트 쟉끄 마리탱이 데카르트와 루소와 함께 루터를 논한 「세 사람의 개혁자」, 종교철학자 요하네스 헷쎈이 1949년에 쓴 「가톨릭의 루터관」이 나타났다. 헷쎈은 루터의 주관주의란 루터의 경험 형태에서 그렇게 보일 뿐, 그 내용은 가능한 객관적이려고 한 것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신학자인 도미니코회의 이브 꽁가르는 프로테스탄트 루터 전문학자도 알지 못하는 루터의 소책자까지 읽고 난 다음에 쓴 저서 「교회에서의 참과 거짓 종교 개혁」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가톨릭의 루터상은 이제까지 논쟁적 신학적 관점, 역사적 관점에서 보여진 것이었으나, 최근 겨우 종교적이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여지게 되면서 비로소 루터와 그 종교 개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일 가톨릭이 종교 개혁의 종교적 의의를 발견 또는 재발견하고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의 많은 면에서의 복음의 본질을 발견 또는 재발견하게 된다면 이같은 양쪽에서부터의 운동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Ⅳ. 프로테스탄트 신학 연구
가톨릭측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연구와 그 평가에서 루터와 종교 개혁에 이어서 가톨릭 신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칼 바르트 신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저들의 관심은 '가톨릭에 접근하기 시작한 바르트', 후기 바르트가 아니라 젊은 바르트의 「로마서」에서부터 집중되었다. 「로마서」 제4판 서론에서 바르트 자신이 수십 년 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길조를 보고 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만 가톨릭 교회 신학자들과 역사적인 문제뿐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토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서 생겼다는 것은 앙편에게 있어서 전도 유망한 길조라고 이해하고 있다."
칼 바르트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서 바르트 신학과의 열려진 대화를 하고 있는 가톨릭 신학자는 카알 아담스, 에릿히 루슈와라, 요세프 엥게르트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중 두드러진 바르트 전문 신학자는 바르트와 같은 나라 사람인 스위스의 한스 U.v. 발타자르의 「카알 바르트 - 그 신학의 서술과 해석」과 한스 큉의 「의인 - 카알 바르트의 교리와 가톨릭의 의식」이다. 발타자르는 「로마서」에서 「교회교의학」에 이르는 바르트 신학의 발전 과정을 깨끗하게 분석하고 "변증법에서부터 아나로기에로"라는 발전 규정에서부터 바르트가 가톨릭적 입장으로 얼마나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힌다. 바르트 자신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대부분의 비판보다도 아주 수준 높은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기묘하게 보일는지 모르나 이 저서에서는, 발타자르와 내가 일치하고 있는 점이 우리들 양자가 틀리고 있는 점과 꼭 균형을 차지하고 있다." 바르트는 발타자르의 해석에 찬성 반 부정 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학위 논문, 「의인」에서 바르트와 가톨릭의 입장은 거의 일치점에 이른다.
발타자르는 바르트의 창조론을 다루었으나 큉은 화해론을 다루고 있으며 그 중심 문제인 의인론을 취급하고 있다. 신앙 의인론이야말로 종교 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최대의 논점이 되어 왔다. 큉에 의하면 만일 바르트의 의인론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리라고 본다면 그것은 가톨릭의 의인론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같은 큉의 견해에 대하여 바르트는 스위스 루체론 출신의 신학자 큉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그 저서 제2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인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인론과 일치하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르트가 가톨릭에 가까워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이 바르트에 가까워진 것일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바르트 신학을 연구하였다는 사실이다. 바르트 자신 자서전에서 "종교 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누구도 이처럼 많은 비판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흥미를 로마 가톨릭 학자측에 일으킨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 동반하는 기묘한 명예를 나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고 쓰고 있다.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은 현대 프로테스탄트 대표 신학자 바르트 신학 연구에 달라 붙었으나 바르트 이외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도 차례로 연구했다. 1940년 독일 목사들 모임에서 제기한 성서의 비신화화 작업에 주목하고 카알 아담스와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등 8명의 가톨릭 신학자에 의한 「불트만의 신학과 비신화화에 대한 가톨릭 신학의 비판」을 내놓았다. 금세기 초에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알프렛드 로와지는 역사 비판 연구를 받아들이며 "예수는 신의 왕국을 선포하였으나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고 주장하였다고 하여서 1908년 파문당하였다. 그러나 불트만의 비신화화 곧 실존론적 신학과의 열려진 대화를 통하여서 가톨릭 신학계에서의 성서학과 성서해석학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성서학자 에드워드 스힐레벡스를 낳게 되었다.
스힐레벡스는 어느 프로테스탄트 성서학자도 따라잡기 어려운 최대의 성서신학자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의 파울 틸릿히 신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나치스에 의해 50세 가까운 초로이 몸으로 미국으로 이민의 길에 떠나야 했던 틸릿히는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미국 신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틸릿히 신학에 대한 가톨릭 신학자들의 연구는 「가톨릭 사상에서의 파울 틸릿히」와 카알 아암브라스터의 저서 「파울 틸릿히의 비전」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한 프로테스탄트 연구의 특징의 하나는 조직적이라는 점이다. 1957년 독일 바델보온에 프로테스탄트 신학 연구만을 위한 연구소가 세워진 이래로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연구소가 여러 곳 세워졌다. 이런 연구소에서의 연구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알버트 부란 덴부르크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주요 문제」이다.
Ⅴ. 교황 요한 23세
루터와 종교 개혁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함께 시작된 가톨릭의 프로테스탄트 연구가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파울 틸릿히 등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계속 학문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현대 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무수한 문제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대화하여 나가며 협력하려는 새로운 선교 의식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보겠다.
1959년 1월 25일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 끝날인 일요일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미사에서 짧은 설교를 한 후 갑자기 베네딕토 수도원에 가서 미사에 참가한 16명의 로마 주재 추기경을 소집하고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을 통하여서 낡은 가톨릭의 형태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톨릭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칼 라너에 의하면 너무 길지 않는 과도기적인 평범한 교황이 될 것으로 알았던 "과도적인 교황 요한 23세가 교회의 장래에로의 이행을 완수하였다." 이 사건은 요한 23세에게 있어서도 "예기하지 않았던 곳에 갑자기 찾아온 봄의 나무들의 새싹처럼" 생겨난 것이며 "하늘의 빛의 섬광처럼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이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의 상황에 대하여 관용을 가지고 타협한 것은 아니지만 낡은 형태의 가톨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대담한 성서적인 자기 변혁을 감행하는 것을 통하여서 현대 세계에 적응하려고를 거듭 강조하였다. 이제까지의 공의회에 따라다니던 anathema(저주), 특히 근대적 오류를 저주하고 규탄하여 온 낡은 형태에서 완전히 탈피하려고 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지 445년 후에 일어났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와의 결별이 결정적인 것이 된 이래 4백 년이 지나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기념할 만한 사건에 의하여 가톨릭은 현대 세계의 상황과 행방을 직시하며 기독교의 원점인 성서 종교로 돌아가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현대에 살리려는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나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를 현대화 민주화 자유화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만큼 성서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기독교의 원점인 성서를 중시하고 존중하며 성서를 읽을 것, 성서를 연구할 것을 강조한다.
Ⅵ 신 신학
이같은 가톨릭 교회의 갱신 운동은 꽁가르, 라아너를 비롯하여 신 신학의 새시대인 요하네스 B.멧츠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고문으로 시종 지도적 역할을 한 공의회 신학자들의 영향이 컸다. 독일 바이에른의 방송국에서 소개한 현대 신학자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 6명와 함께 6명의 가톨릭 신학자가 있다. 아마 일괄하여서 신 신학으로 불려지는 현대 가톨릭 신학자에는 고생물학과 신학의 새로운 종합에 근거한 신 신학을 세운 떼야르 드 샤르댕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신신학자들은 금세기 초의 로와지와는 달리 전투적 혁명적인 선동가 타입이 아니라, 근대주의자들과 달리 가톨릭 신학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에 근거한 전통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 "전통을 토대로 하고서 항상 새로운 길을 추구하여 나가는 신학적 사고"를 영위하여 나갔다. 이들 신신학자들은 새로운 사상 동향에 대하여서도 낡은 전통에 대하여서도 함께 열려진 신학적 교회적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 이같은 개방적인 태도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대한 열려진 연구와 평가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이해의 심화는 가톨릭의 자기 이해의 심화와 일치하고 있다. 그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현재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특히 우리 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학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다는 일은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자신의 자기 이해와 천박성과 자신의 결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하겠다. 급격하게 비기독교화하여 가고 있는 현대 세계에 대하여 단순히 '반동'으로 뒷걸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적으로 옳은 의미에서 '적응'을 꾀하려고 하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가 과연 현대 가톨릭 교회처럼 과감하게 자기 비판을하여 가면서 자기 변혁과 자기 혁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생긴 세계교회협의회는 이같은 거룩한 선교적 과제를 위한 상징적인 기구이다. 프로테스탄트 선교 전선에는 이상이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끌어 갔던 '공의회 신학자'와 같은 성실한 신학적 모범을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라인홀드 니이버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휫치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강점과 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톨릭의 강점, 그 이름은 질서, 가톨릭의 병, 그 이름은 전제주의, 프로테스탄트의 강점, 그 이름은 자유, 프로테스탄트의 병, 그 이름은 무정부
Ⅶ. 현대 세계의 종교 개혁
미국 버클리의 태평양 신학교 윤리학 교수였던 휫치의 건강 진단표에 의하면 가톨릭의 교회 갱신은 강점인 질서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가톨릭의 병인 전제주의를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지상주의와 교회 회의주의라는 양극단을 넘어서려고 하는 뜻에서 교황을 머리로 하는 주교단, 성직 위계의 사도직을 확인한 것과 함께 평신도의 사도직을 강조한 것은 가톨릭 교회의 획기적인 전진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가톨릭적인 변혁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전통적인 체질에 이질적인 것들까지도 교회 갱신을 위해서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인 자유까지도 자신의 체질의 일부로서 수용하려고 하고 있다. 공의회에서 결정을 본 신앙의 자유에 대한 승인은 그 일례이다. 지난 19세기의 교황 비오 9세가 발표한 근대 사상에 대한 오류설표에 의하면 신앙의 자유는 분명히 오류설에 속한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선언하였다는 것은 가톨릭 밖의 여러 기독교 교파에 속하는 교회에 대한 열려진 태도를 훨씬 넘어서서 비기독교 제 종교를 향하여 대화의 창을 넓게 열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이다. 공의회는 유다인을 "저주받은 백성"이라든가 "살신한 범인"이라든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으로서의 전통적인 비판을 부당하다고 보고 반유다주의를 배척하며 아시아의 세계 종교와 함께 유다교에 대하여 충분한 경의를 표한다. "교회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지만 유다인은 하느님에 의하여 버려진 것 또는 저주된 것으로 말하여져서는 안된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는 이들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진실하고 귀한 것을 어느 하나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 교회는 자기의 아들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과 생활을 증명하면서 관용과 사랑을 가지고 타종교 신자와의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서 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정신적 도덕적인 부 및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며 더욱 촉진하도록 격려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저들은 영국 절대주의와 결합된 영국 국교회에서 떠나서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인권의 이념을 확립시키고 근대 민주주의의 촉진에 기여하였다. 어떤 특정한 신앙도 국가 권력에 의하여 강요될 수 없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의 법정에 맡겨야 하며 어떤 종교를 객관적 진리로써 타율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가톨릭 교회는 지난 세기에 잘못된 교설로 보고 있던 정교 분리와 종교적 관용주의, 신앙과 출판,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표방하는 근대 민주주의 이념을 대담하게 수용한 것이다. 가톨릭의 교회 변혁과 쇄신은 종래의 가톨릭의 강점에 새롭게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인 자유를 결합시켜서 가톨릭의 병인 전제주의를 극복하려는 체질 개선과 체질 강화의 운동이다. '70년대 초에 브라질을 방문한 마르틴 루터 킹의 후계자였던 아바나시 목사와 함께 '레시프 선언'을 발표한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비폭력적 사회 변혁 운동이 그 좋은 한 예이다.
Ⅷ. 프로테스탄트의 병
가톨릭적인 교회 쇄신 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데 반하여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갱신 운동은 장래가 밝지 않다.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이었던 자유가 유지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병인 아나아키만이 확대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중병이 가장 극심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자기의 체질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약점은 자유이고 그 강점은 아나아키라고 착각하는 도착 현상을 낳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갱신 운동은 자기 체질의 강약을 재빨리 자각하고 강점인 자유는 여전히 보존하면서 그 병인 아나아키를 피하고 가톨릭의 강점인 질서를 자기 체질의 일부로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갱신 운동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인 자유를 수용하는 경우 프로테스탄트의 병인 아나아키까지도 수용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듯이, 프로테스탄트도 가톨릭의 강점인 질서를 가톨릭의 병인 전제주의와 혼동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프로테스탄트병과 가톨릭병은 하나가 나타나면 필연적으로 여기에서 유발하는 상호 관계 속에 있는 병이다.
양측의 병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건강한 힘인 자유와 질서의 확립을 지향하여 나가는 노력을 인내를 가지고 함께 계속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는 리챠드 솔저 같은 혁명 신학의 주장과 과격한 행동의 자유를 전혀 억압하지 않으며 아나아키에 떨어지지 않는 변혁의 길을 가고 있다. 그에게 학문과 행동의 자유를 준 신학자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이며 그의 은사였던 죤 A. 매카이였다. 남미 선교사이기도 했던 매카이는 가톨릭병과 평생 싸운 자유의 투사였으며, 말년에는 가톨릭병의 미국판인 반공주의 매카시즘에 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자유의 투사였다. 그의 자유는 아나아키적인 자유가 아니라 질서의 전통이 함께하는 자유였다. 어떤 숭고한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하여도 전제정치적인 질서에 대하여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그는 하느님의 질서를 믿고 거기에 개인과 집단과 국가가 따를 때에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고 확신하였다. 자유의 투사 매카이에게는 '에페소 사람에게 보낸 편지와 이 현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하느님의 질서」라는 저서가 있다.
로버트 휫치가 말하였듯이 프로테스탄트병의 중심에는 "낡은 우상 숭배 곧 세속주의의 우상 숭배가 있다." 신학적인 아나아키는 정치적 아나아키와 결합하면서 윤리적인 아나아키를 낳는다. 프로테스탄트의 병이 언제나 따라가는 길이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최후의 명저 「계시에 직면한 철학적 신앙」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갱신 운동이 실패하고 자유가 아나아키로 전락하여 버린다면 가톨릭이 밝은 미래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적 객관적 고찰에 의하면 종교로서의 가톨릭 교회는 미래에 대하여 훨씬 유력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통일적인, 세계에 미치는 교황의 지도, 교회적 가톨릭적 사유의 여러 방법, 생존의 큰 구획의 시기라든가 일상이라든가의 삶을 통한 성별, 일천 년 이상에 이르는 인공적인 화려하고 장엄한 현전, 종교적 행위에 다양성, 정신적으로 터닦아진 독신제에서의, 신앙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우고 있는 교단의 수도사와 사제들은 감명 깊은 지배력, 교회를 근거하고 있으나 교회적 정치적 폭력과 책략에는 아주 먼 가톨릭적 경전, 그리고 그 경전을 가지고 철학적인 어떤 것이 넓은 민중에게 침투하고 있다는 것, 이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에 비하여서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은 빈약하다."
프로테스탄트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였던 철학자 야스퍼스는 성서 종교의 근원을 향한 최후의 위대한 돌파의 시도였던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이 혁명적인 단독자의 성실성의 상실과 함께 위축되고 광신적인 교조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성서적 신앙에서의 해방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여러 가지 교회의 요청, 교의, 전례, 칭호의 형태에서) 다수의 새로운 '가톨릭시즘'을 낳는 것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 오늘날 쉽게 행하여지고 있는 것은 교회와 목사를 경멸하고 그것을 다른 직업과 같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Ⅸ. 2000년대의 한국 천주교회
글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끝을 맺어야겠다. 필자는 루터의 종교 개혁 473주년을 맞게 되는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상기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갱신 운동이 가톨릭의 폭넓은 에큐메니칼 쇄신 운동에서 배우면서 이 땅 위에서 성공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글을 썼다. 한국에서 세계성체대회가 열렸던 작년 가을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뿐 아니라 한국의 여러 종교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세속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을 초청하여서 성체의 보편적인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며 필자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려는 기독교의 새로운 얼굴을 가톨릭 교회에서 보았다.
발터 카스퍼 주교를 초빙하였던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 국제 학술 회의에서 발표한 카스퍼 주교의 두 강연,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와 '현대 사회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시련 위에서 있는 현대 세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선교적 자세를 나타내는 새로운 신학 운동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가톨릭 대학의 심상태 신부의 강연 '2000년대의 한국 교회'는 듣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감격을 안겨 주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향한 열렬한 구도 자세와 진리를 위해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순교 정신"을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심상태 신부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자기 비판의 메스를 가하였다. 심상태 신부에 의하면 한국 가톨릭 교회는
1.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국 구조 안에서 교황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 교구장 주교들에 의하여 통치되는 일종의 '분봉왕국'이며
2. 좁은 나라에 있는 작은 교회 안의 여러 관구, 교구, 본당, 수도회, 신심 단체 등이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으며
3. 중산층화되고 대형화된 교회 안에 고립 집단의 게토가 형성되면서 위화감이 조성되어 가고 있고,
4. 2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교회가 아직도 서구 교회의 바빌론 포수 생활을 하며 비서구화, 토착화, 한국화의 길을 철저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 미성숙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5. 교회 당국의 사목 정책이 교육 활동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지성적 반지성적 풍토를 조성하고 있고
6.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순교의 씨앗이 열매맺은 교회'가 조선 왕조 시대에 선교했던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좁은 의미에서의 선교 정책 때문에 '민족 사회나 세계 교회 안에서 외적으로 활기찬 약동적 면모'를 나타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예언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한국 가톨릭 교회에 울림하는 이 예언자적 신학자의 2000년대의 한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밝은 비전을 밝히기 위해 한국 가톨릭 교회 비판의 소리가 가톨릭의 병은 물론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병까지 말끔히 씻어 주면 좋겠다. "Refomation geht weiter" (종교 개혁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신학자로서 필자가 가톨릭 교회에 바라고 싶은 것은 선교 2백주년을 맞이하면서 선교 정책으로 내놓은 토착화의 과제를 철저화 시켜 나가면서 종교 신학이 사회 정의를 외치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내세우는 해방신학과 자주 대화하는 것을 통하여서 한국적인 종교 해방 신학을 형성하는 길을 밝혀 달라는 것이다. 배타주의 패러다임은 보편주의적인 포괄주의를 거쳐서 다원주의 패러다임에 의하여서 완전히 극복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포괄적인 패러다임은 '80년대 이후 그 의미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새로운 종교 신학은 전통적인 종교냐 정치냐라는 양자 택일의 입장을 극복하고 종교를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보는 'both∼and∼'의 길을 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우리의 전통 종교 속에 숨겨져 있는 변혁과 해방의 누록을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하여야 한다.
Ⅹ. 종교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최근 남미 해방신학을 특집으로 했던 사목 137호에 실린 장용주 신부와 평신도 억임채 회장의 대화가 매스컴에 올랐다. 참된 대화는 서로 다른 의견에서 서로 많은 것을 배우며 서로 변혁을 경험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를 촉구하며 그리스도인과 세속 이데올로기 신봉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 경우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어느 정도까지 마르크스 사상과 방법을 수용하며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서 떨어지지 않는가가 문제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립과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단순히 사회 변혁의 교훈으로 이해하고 그 용어와 개념을 정치 운동을 위해 이용하기 위하여 복음의 내용까지 왜곡하는 환원주의나 이용주의 사상에 대하여서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따르는 잘못된 부현상과 해방신학 자체를 구별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톨릭 교회는 해방의 실천과 함께 해방의 영성을 강조하는 해방신학 속에 있는 영구적이며 윤리적이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무엇 하나도 부정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저개발 국가에서 벗어나서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 제3세계의 특유한 신학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민중의 빈곤과 억압적 상황을 이미 넘어선 선진국에서는 의미가 없으므로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뒤를 따르며 고도 성장하고 있는 한국, 중산층으로 구성된 부자 교회가 된 한국의 기독교는 해방신학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을까? 세 가지 점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고도 성장을 지향하며 제3세계 특히 절대 빈곤의 벽에 직면하고 있는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다국적 기업을 열어 가는 것을 통하여 일본에 이어서 '억압적 착취의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에 의하여서 그 억압적 착취적 사회의 변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 사회를 지지하고 있는 중산층 의식에 의하여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잉 소비주의 사회, 관리 사회, 경쟁 사회, 이윤주의 사회, 한탕주의 사회가 반인간적 가치관과 비인간적 생활을 낳고 있다는 현실을 복음의 빛에서 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60년대 중반에 보릿고개를 넘고 소위 풍요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 사회 속에도 여전히 피억압적 상황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 착취되고 차별 당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히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해방 운동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본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던 천주교회가 중산층 중심의 부자 교회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특유한 선교의 장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해방신학은 소외와 착취와 억압에 의하여 비인간화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권유하며 가난한 사람들과의 사랑의 연대성을 주장한다.
가톨릭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미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소수에 속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고 있는 막대한 빚을 의식하면서 선의의 타종교인들과 세속 이데올로기 신봉자들과의 열려진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 전인간성의 행복을 향한 인간화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야 한다. Semper reformendum!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함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개하여야 한다. 가톨릭의 프로테스탄트화도 아니고 프로테스탄트의 가톨릭화도 아니다. 두 교회가 참으로 복음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향하여 회개하게 될 때 두 교회에는 참된 종교 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변선환, 사목 141 1990년 10월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9-54]